All Chapters of 이혼 후, 나는 그의 형의 신부가 되었다: Chapter 21 - Chapter 30

100 Chapters

제21화

이람도 남자의 얼굴이 잘생겼을 거라는 건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자의 얼굴이 진짜 드러나는 순간, 그녀는 다시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어떻게 남자가 이렇게 정교하게 생길 수가 있지?’또렷한 이목구비, 완벽한 얼굴선.흠잡을 데 없는 비율.단순히 외모가 뛰어난 차원이 아니었다.이람은 이전에도 잘생긴 남자를 본 적이 있었지만, 이 정도의 ‘충격’을 준 사람은 단 한 명뿐.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 눈앞에 있는 바로 이 남자였다.3년 전.이람과 제헌이 가족 중심의 소규모 결혼식을 올릴 때, 조용히 참석했던 낯선 남자.서하준.제헌의 이복형.그날 처음 마주했을 때, 이람은 이상하리만큼 긴장했었는데, 단순히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그때도... 지금처럼 숨이 막혔었다.서하준은 당시에도 강한 존재감을 풍겼지만,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깊어졌다.시간이 이 남자를 매끄럽게 다듬은 듯했다.블랙 롱코트를 걸친 캐주얼한 차림이었지만, 오히려 그런 편안한 스타일이 그의 미스터리함을 더 부각했다.이람의 숨이 잠시 멎었다.‘설마 여기서, 이 사람을 다시 보게 될 줄은...’이곳에서 서하준을 만날 거라곤 정말 단 한 순간도 상상한 적 없었다.“대표님, 여기 제 초등학교 짝꿍 민서, 그리고 민서의 친구 조이람 씨입니다. 두 분 다 IT 업계에서 일하고 있어요.”세진이 밝은 표정으로 소개를 이어갔다.“이쪽은 저희 회사 대표님, 서하준 대표님이세요.”하준의 시선이 두 사람을 향했다.민서는 웬만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이번엔 달랐다.하준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민서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그리고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악수를 청했다.“처음 뵙겠습니다, 서 대표님.”그 뒤엔 민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평소처럼 너스레나 유쾌한 농담이 나오지 않았다.다음 순간, 하준의 시선이 이람에게 옮겨졌다.남자의 눈빛은 이상할 정도로 묵직했다. 마치 시선 자체에 압력이 있는 것처럼, 피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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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제은 옆에는 딱 봐도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 몇 있었다.표정, 옷차림, 분위기.모두 상류층의 전형.그중에는 제헌의 친구들도 있었다.결혼식에서 몇 번 마주쳤던 얼굴들.모두 유리를 응원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듯했다.‘역시, 다들 유유상종이야.’이람은 시선을 다시 경기장으로 돌렸다. 애써 무관심한 척했지만, 망원경 너머로 포착된 인물은 하유리였다.‘일부러 찾은 것도 아닌데...’유리의 모습이 화면에 고정된 채, 망설이던 시선을 막 돌리려는 순간.유리의 목에서, 무언가 반짝이며 흘러내렸다.가슴 위로 섬세한 백합 모양의 목걸이가 눈에 띄었다.그날, 생일 파티에서 고지후가 분명히 말했다.제헌이 유리를 위해 세계에 단 하나뿐인 백합 목걸이를 맞췄다고.유리가 백합을 좋아해서...그 말이 이람의 머릿속에 생생히 되살아났다.지금 유리는 그 목걸이를 차고 당당하게 트랙 위에 서 있었다.이람의 턱 근육이 단단히 굳어졌다.‘하유리가 뭘 좋아하는지, 강제헌은 다 알고 있었네.’‘조용히 기억하고, 몰래 준비하고, 그걸로 감동 주려고 했겠지.’숨기지도 않고, 감추지도 않은 제헌의 애정.보란 듯이, 모두가 보는 자리에 걸고 나왔다.그 순간부터, 이람은 더 이상 경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눈을 돌리려 했지만, VVVIP 룸의 시야는 너무나도 탁월했다.아래 VIP석도 훤히 내려다보였다.그리고 그곳에서 고개를 숙이던 이람의 시야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제헌이었다.얼굴은 희미했지만, 기울어진 몸의 각도, 한 곳을 향한 시선... 단 한 치의 흔들림조차 허락하지 않는 집중에서 제헌의 존재감이 뚜렷하게 전해졌다.제헌의 시선은 트랙 위의 누군가에게 정확히 향해 있었다.흐트러짐 없는, 한 사람만을 응시하는 눈빛이었다.이람은 수년간 줄곧 제헌의 뒷모습만을 좇아왔다.그녀는 그저 그날 차가운 바닷물에 휩쓸려 죽어가던 자신을 지옥에서 끌어올린 따뜻하고 넓은 그 품에 다시 한번 안기고 싶었을 뿐이었다.하지만 이람은 늘 잊고 있었다. 제헌의 마음은, 이미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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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하준은 일부러 차갑게 말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목소리는 그 자체로 단정하고 냉담했다.마치 성격을 그대로 옮겨 담은 듯한 음색, 맑고 절제된 톤, 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Sun이라는 이름을 말할 줄은 몰랐어.’이람은 놀람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순간적으로 걱정이 스쳤다.‘설마... 날 알아본 건 아니겠지?’정말 바라건대, 하준이 자신을 기억하지 않기를.그 순간, 민서가 옆에서 번쩍 눈을 뜨고 이람을 바라봤다.두 눈이 반짝이며 흥분이 가득한 표정.‘제발... 제발 입 다물고 있어...’이람은 눈빛으로 민서를 제지했다.민서는 입을 삐죽이며 얌전히 입을 닫았다.정홍도 회장은 하준의 말에 여유롭게 반응했다.“그 선수는 제가 처음 듣는 이름이네요. 나중에 시간 될 때 찾아봐야겠습니다.”하준은 별 감흥 없는 어조로 말했다.“찾아보실 필요 없어요. Sun은 더 이상 이 판에 없습니다.”말은 했지만, 하준의 시선은 전혀 이람에게 향하지 않고, 그저 가볍게 넘긴 대화일 뿐이었다.이람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행이다. 기억 못 하는 것 같아.’경기는 A조와 B조로 나뉘어 이어졌지만, 하준은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한 듯 중간에 자리를 떴다.그가 나가자 자연스럽게 이 자리도 조금씩 파하는 것 같았다.세진은 민서에게 먼저 다가와 말했다.“집에 도착하면 꼭 톡 줘. 무사히 들어가는 거 확인하고 잘게.”민서는 운전기사를 따라왔기 때문에, 돌아갈 땐 이람의 차에 탔다.하지만 차가 아직 시동도 걸리지 않았는데, 민서가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아니, 너 왜 나 못 말하게 했어? 서하준 대표님이 네 정체 알았으면, 우리랑 좀 친해질 수도 있었잖아!”민서는 원래 말 잘 걸던 사람이지만, 오늘은 도무지 적당한 타이밍이나 주제를 못 찾았다.하지만 이람의 Sun이라는 정체는 누가 봐도 완벽한 화젯거리였다.“그거 하나면 인맥 연결 끝이었어! 안 그러면 다음에 또 봐도 오늘처럼 인사만 하고 끝일걸.”이람은 조용히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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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진행자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와, 생일 선물이라니! 혹시 남자친구가 준 건가요?”유리는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니에요. 남자친구는 아니고요. 저에게 아주 중요하고, 특별하고, 제가 정말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선물해준 거예요. 저한테는 정말 의미 있는 선물이라... 앞으로 중요한 자리에선 꼭 이 목걸이를 착용할 생각이에요.”진행자는 재치 있게 분위기를 이어갔다.“중요한 순간에 함께해야 할 사람이라면, 그분도 오늘 이 자리에 와서 이 모습을 봐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관중석에서 일제히 함성이 터져 나왔다.“맞아요! 봐야죠!!”현장은 순식간에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유리는 말없이, 부드럽게 웃으며 한 방향을 바라봤다.그 시선을 따라 중계 카메라가 움직였다.정확한 인물을 클로즈업하진 못했지만, 그 방향의 관중석을 비추는 와중... 카메라에 제헌의 모습이 포착되었다.관중 속에서도 눈에 띄는 사람.단정한 수트, 또렷한 이목구비.무표정 속에서도 느껴지는 부드러운 아우라.카메라가 얼굴을 확대하지 않아도, 이람은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강제헌이네.’화면 속 제헌은 눈빛이 다정하게 젖어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시선은 오로지 유리를 향하고 있었다.주저함도, 거리낌도 없는 눈빛.누가 봐도 감정을 숨기지 않은 사람의 표정이었다.수천 명의 응원과 환호가 쏟아지는 그 자리에서 제헌의 눈엔 오직 유리만 있었다.‘이게 강제헌의 대답이구나.’이람은 입술을 꾹 다물고 조용히 시동을 걸었다.차는 천천히 경기장을 빠져나갔다....절반쯤 왔을 때, 민서가 핸드폰을 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하유리, A조에서는 1등이었는데, B조 성적 합쳐지니까 최종 4등 됐대. 결국 시상대에는 못 올랐어.”알고 보니 민서는 내내 실시간 중계를 보고 있었다.말을 전하면서도 이람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이람은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차 안엔 일시적으로 조용한 공기만 흘렀다.몇 분쯤 흘렀을까... 이람이 입을 열었다.목소리는 담담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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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그 선배한테 너무 무례한 거 아니야?”이람이 살짝 웃으며 물었다.민서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그 선배가 굳이 이름 밝히기 싫다잖아. 그런 식이면 뭔가 목적이 있다는 거지. 상대가 날 떠보는 거면, 나도 한번 떠봐야 공평하지 않겠어?”민서는 날카롭게 이어 말했다.“내가 그래도 사회생활 몇 년을 했는데 말이야, 이름 안 밝히고 조용히 굴던 사람들 중에 진짜 대단한 사람은 극소수야. 대부분은 그냥 있어 보이려고 허세 부리는 거지. 네가 예외긴 해도, 걘... 글쎄.”업무 관련된 이런 밀당은 이람보다 민서가 훨씬 더 익숙했고, 이람도 그 점을 잘 알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그러지 뭐.”저녁에는 민서에게 약속이 있었다.겸사겸사 새로 이사 온 이람의 집도 체크했으니, 이제 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이었다.단지 입구까지 기사 차량이 와 있던 터라, 이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민서와 함께 내려갔다.차에 타기 직전, 민서가 한쪽 손으로 이람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넌 이제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저축도 착실히 했고, 게다가 네가 좋아하는 일도 하고 있잖아.”“진짜 이제 시작이야. 나는 앞으로 너 완전 잘될 거라고 봐. 우리 꼭 같이 돈 많이 벌어서 부자 되자, 진짜로.”흔한 말 같지만, 이람은 괜히 그 말에 뭔가가 가슴을 툭 건드려졌다.‘같이 부자 되자.’그 짧은 말 한마디가 마음속 깊은 데까지 파고들었다.이람은 잠시 말없이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또박또박 말했다.“그래. 우리, 꼭 같이 부자 되자.”민서는 그 말에 참지 못하고 이람을 꼭 끌어안았다.민서가 떠난 뒤, 이람의 기분은 오랜만에 가벼웠다.서킷에서 느꼈던 감정도, 이상하리만치 지금은 전부 멀게만 느껴졌다.기분이 좋아진 김에 근처 마트에 들러 이것저것 장을 봤다.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7동 꼭대기 층.양손 가득 장바구니를 든 채, 이람은 늘 그렇듯 조용히 걸어 나왔다.이곳은 층당 두 세대씩 있었고, 둘 중 1호는 이람의 집이었다.지금까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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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예상대로, 오후가 되자 이람은 제헌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5시 반, 산 아래서 기다려.]강씨 가문의 본가는 도심 외곽의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공기가 맑고 조용한 곳이었지만, 접근성은 그만큼 떨어졌다.매번 본가에 갈 때마다, 제헌은 이람에게 산 아래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차로 가는 길에 들러 데려가는 게 편하다는 이유였다.그게 사실 이람 때문에 돌아가는 거니까, 귀찮은 일은 안 하겠다는 말이었다.오후 5시 20분.이람은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산 밑의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하루 종일 내린 가랑비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게다가 산이라 그런지, 도심보다 확실히 더 쌀쌀했다.초저녁 기온은 더욱 떨어졌고, 바람까지 불기 시작했다.10분이 지났을 뿐인데 손과 발이 얼어붙은 듯했다.하지만 제헌의 차는 오지 않았다.‘또야... 역시.’몸을 움츠리며 기다리던 중, 멀리서 차 불빛이 안개를 뚫고 이람을 비췄다.이 근방엔 강가 외에도 몇몇 집들이 있었기에, 이람은 자세히 눈을 떴다.벤틀리.제헌이 타는 마이바흐는 아니었다.‘아니구나.’희미하게 기대했던 만큼, 실망도 컸다.차가 아니란 걸 알자, 이람은 고개를 돌려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그때, 몇 초 후.칙-차가 바로 옆에 멈춰 섰고, 차창이 내려갔다.운전석에서 드러난 남자의 옆얼굴.그는 고개를 돌려, 이람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어두운 눈동자 속으로, 순식간에 이람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공기마저 단단히 얼어붙은 순간이었다.“탈래요?”낮고도 단단한 서하준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3년 전 결혼식 날, 하준은 단 한마디 ‘축하해요’를 건네고는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그때의 인상은 단 하나였다. 하준은 차가운 사람이었다.어제 이람이 하준을 연달아 두 번의 우연한 마주침은, 그 인상을 더 단단하게 굳혀줬다.‘이렇게까지 사람을 겁나게 만드는 사람은 처음이야.’‘뭘 생각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이람은 하준의 생각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그가 왜 굳이 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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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제헌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드물었다.‘하준의 차를 본 모양이지.’보통의 커플이었다면 이런 질문은 질투 섞인 농담 정도로 넘어갔을 테고, 분위기를 살리는 감정 표현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람과 제헌 사이엔 그런 감정선이 존재하지 않았다.그리고 그 이름이 ‘서하준’일 때, 문제는 완전히 달라졌다.제헌에게 서하준은 겨우 한 달 차이로 형이 되었지만, 결코 형이라 부르고 싶지 않은 존재였다.그저 언급조차 꺼려지는, 오래된 금기의 그림자였다.그동안 하준이 해외에 있었기에, 제헌이 이람에게 직접 하준 이야기를 꺼낼 일도 없었다.오히려 이람은 몇 번의 가족 모임에서, 시아버지인 강운국의 입을 통해 눈치챘다.강운국은 종종 두 아들을 비교하곤 했다. 말끝마다, 눈빛마다 더 큰 기대와 애정을 실은 건 늘 첫째 아들이었다.3년에선 KU그룹의 젊은 총수로 제헌의 성과를 높이 평가했지만, 강운국의 시선은 늘 거기서 멈췄다.“그래도 하준이는...”그 한 마디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제헌을 얼마나 짓눌러왔을지...아버지가 해온 그 모든 말들은 모두 제헌의 마음속에 켜켜이 쌓였다.하준과 관련된 일이라면, 제헌은 절대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그리고 마주칠 이유가 없으면 서로도 굳이 얼굴 볼 일도 없었다.강수철 회장이 아니었다면, 제헌이 이 집에 발을 들일 일도 없었을 것이다.이람은 짧게 대답했다.“안 친해요.”그걸로 충분했다.제헌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하준과 이람이 친할 리 없다는걸.하지만 하준이란 이름이 언급된 순간, 그는 굳이 확인하고 싶었을 뿐.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차는 곧 강씨 가문의 본가에 도착했다.예전 같았으면 이람은 일부러 강수철 회장을 핑계로 제헌의 팔짱을 끼고 들어갔을 것이다.제헌이 다소 불편해해도, 강 회장 앞에서는 억지로라도 모습을 맞춰줬다.이람은 그런 짧은 접촉 하나에도 마음이 설렜다.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이람에게 오늘은 강 회장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기 위한, 이혼 전 마지막 연극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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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오늘은 강제헌도 반지를 끼고 있었다.하지만 그 반지는 이람과의 결혼반지가 아니고, 유리와 맞춘 커플링이었다.남자용 반지는 대부분 비슷한 디자인이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무슨 반지인지 알아차리기 힘들다.그래서 제헌이 낀 반지가 결혼반지인지 아닌지, 그 누구도 쉽게 알 수 없었다.이람은 굳이 거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무표정하게 거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거실 너머의 고가구 틈 사이로 하준이 보였다.그는 진한 나뭇결이 살아 있는 원목 의자에 앉아, 가사도우미가 우려낸 차를 묵묵히 음미하고 있었다.제헌과 이람이 들어왔음에도 하준은 고개 한 번 들지 않았다.하준의 주변은 마치 투명한 장막이라도 씌워진 듯,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제헌과 제은은 그 태생부터가 남달랐다.그래서 타인을 쉽게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람은 그런 둘보다도 하준이 훨씬 냉정하고 무심하다고 느꼈다.하지만, 강씨 가문이 어떤 성격을 가졌든 이제 이람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이람은 그저 주어진 자리를 조용히 지킬 뿐이었다.거실 구석, 하준에게서 가장 멀리 가 앉았다.제헌은 의외로 이람 옆에 자리를 잡았다.평소였다면 일부러라도 거리를 뒀을 텐데.‘나보다 서하준이 더 싫은가 보네.’이람은 그런 제헌의 선택이 우스웠다.‘겨우 이런 식으로 이기다니... 참 우습다, 정말.’거실엔 가사도우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모두 말이 없었다.공기 자체가 묵직하고 답답하게 내려앉아 있었다.이람도 그 분위기에 눌려 조금씩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정작 그 둘, 하준과 제헌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서로 불편해하면서도, 묵묵히 버티는 그 정적.익숙한 싸움의 방식이었다.시간이 흘러, 드디어 오후 6시.제은이 도착했고, 늦지는 않았지만, 예전처럼 활기차게 들어와 제헌에게 신나게 최근 이야기를 풀어놓거나, 소파에 드러누워 도우미에게 간식을 입에 넣어달라고 하지는 않았다.평소처럼 당당하고 제멋대로이던 제은조차, 이 숨막히는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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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강운국과 채영희는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 오지 않았다.하준이 있는 자리에 강운국 부부가 함께했더라면, 분명 분위기가 좋지 않았을 테니, 빠진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자연스레 하준과 이람 사이 자리는 강수철 회장의 몫으로 비어 있었다.이람은 슬쩍 제은을 바라봤다.제은은 이를 악물고 노려보고 있었다.‘무서운 사람 옆에 앉는 게 싫어서 나한테 떠넘기려고 하더니...’‘결국 네가 옆에 앉게 됐구나.’그런 상황이 마냥 웃겼다.이 정도면 제은 인생에 몇 안 되는 ‘고통의 식사’쯤 되려나.‘참 복도 많지, 강제은.’이람이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강수철 회장이 들어섰다.자리에 있던 손주 세대 모두가 일어났다.올해 일흔셋.각진 이목구비에는 여전히 젊은 시절의 준수한 인상이 남아 있었고, 180을 훌쩍 넘는 키에 허리는 여전히 전혀 굽지 않았다.강 회장은 젊은 시절 강단 있는 철혈 경영자였다.세월이 흘러 성격은 한결 온화해졌지만, 그래도 아들 세대는 여전히 그를 두려워했다.손주 세대가 조금 덜할 뿐.제은은 강 회장을 보는 순간, 긴장이 풀린 듯 눈을 반짝였다.“할아버님, 집사님한테 감기 걸리셨단 얘기 들었어요. 아프셨으면 진작 말씀해 주셨어야죠. 그걸 혼자 참으시면 어떡해요.”“바이러스성 감기야. 전염될까 봐 일부러 말 안 한 거지. 이제 다 나았으니 됐다.”강 회장은 손을 가볍게 내저으며 말했다.“자, 다들 앉아서 밥 먹자꾸나.”강 회장이 자리에 앉고, 차례로 가족들을 둘러보더니 마지막에 이람에게 시선을 멈췄다.“아가, 살 빠진 것 같구나?”이람은 얼른 머리를 굴렸다.“요즘 운동 시작했어요. 아마 그 영향일 거예요.”사실, 과거에는 일과 제헌 사이에서 자신을 돌볼 여유조차 없었다.회사 동료들도 요즘 들어 이람이 많이 야위었다고 걱정할 정도였다.아이를 잃은 고통과 이혼 문제로 그녀는 몸과 마음이 다 무너진 상태였다.오늘도 일부러 연하게 화장해 얼굴을 가렸지만, 부쩍 수척해진 몸은 가릴 수 없었다.‘약해 보이는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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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하준은 그렇다 쳐도, 제은의 관점에서 이람은 그저 오빠의 가사도우미에 지나지 않았다.예전의 이람은 제은이 시키는 무엇이든 다 해줬다.말 잘 듣고, 눈치도 빠르고, 적당히 비위도 맞춰주던 이람.그런 이람이 요즘은 말을 듣지 않았다.‘진짜, 미치겠네. 왜 갑자기 말 안 들어?’제은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그때 강 회장이 김 집사에게 말했다.“자, 술 좀 따라라. 오랜만에 다들 모였으니.”제헌이 먼저 말했다.“할아버님, 저 요즘 위가 좀 안 좋아서... 술은 괜찮습니다.”강 회장은 억지로 권하지 않았다. 곧바로 하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준은 말없이 잔을 들었다.“3년 만이네.”강 회장이 하준을 바라보며 웃었다.그 눈빛엔 감추지 못한 애정이 묻어났다.“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해외에선 뭐 했어?”하준은 간결하면서도 알찬 답을 이어갔다.구체적인 숫자와 프로젝트, 파트너 국가들까지.핵심만 뚝뚝 짚어내는 말투였지만, 디테일도 놓치지 않았다.강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엔 잘 웃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하준이 돌아온 것이 강 회장은 정말 기쁜 눈치였다.감기가 갓 나은 상태였음에도, 강 회장은 술잔을 들었다.하준도 조용히 잔을 부딪쳤다.그리고 매번, 자신의 잔을 조금 더 낮춰 들었다.그 화면은 자연스럽고 익숙했다.단순한 예의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난 존중.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깊고 단단한지 보여주는 순간이었다.‘진짜 친하긴 친하네...’이람은 술잔이 오가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며 생각했다.예전에 이람이 강 회장을 병문안 왔을 때, 김 집사와 강 회장의 대화에서 흘러나온 몇 가지 사실이 있다.강운국은 젊은 시절, 두 여자를 동시에 만나고 있었다.말 그대로 양다리, 그것도 아주 치밀하고 교묘하게.그중 한 명은 명문가 출신 귀한 집 딸이었다.지금의 하준 어머니인 서주연 여사.서주연은 강운국의 말과 출중한 외모에 속아 사랑에 빠졌고, 임신까지 한 뒤에야 자신이 ‘본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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