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혼 후, 나는 그의 형의 신부가 되었다: Chapter 11 - Chapter 20

100 Chapters

제11화

전화를 걸어온 건 수범이었다.수범은 조이건의 대학 동기.이건은 이람의 친동생으로, 오늘이 대학 졸업식이 있는 날이었다.대학 시절, 이건은 수범과 함께 게임 회사 ‘아크바이트’를 창업했다.외삼촌 심기정이 해외로 떠날 당시, 이건에게 현금 200억 원과 아파트 한 채를 유산으로 남겼다.이건은 망설임 없이 200억을 선택했고, 그게 곧 회사 창립을 위한 초기 자금이 되었다.수범의 전화를 받은 이람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민서가 운전해 이람을 병원까지 데려다 주었다.도착하자 이람은 민서에게 차에 있으라고 말하고, 혼자 병실 쪽으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병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이건의 차가운 목소리에 발걸음이 멈췄다.“왜 우리 누나한테 연락했어?”이람은 문을 열지 못하고, 그대로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봤다.침대에 누워 있는 이건이 보였다.이십대 초반의 나이였지만, 몇 년간의 창업 경험이 그의 분위기를 다듬어 소년과 남자 사이 어딘가에 있는 묘한 무게를 풍기고 있었다.이건의 안색은 다소 창백했지만, 눈빛은 또렷했다.그걸 보니 이람은 조금 안심되었다.수범은 그런 이건의 차가운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이람 누나는 네 친누나잖아. 너 아픈데 누나한테 말 안 하면 누구한테 말하냐?”이건의 목소리는 싸늘했다.“내 일은, 누나랑 아무 상관 없어.”“아니, 도대체 왜 그렇게 누나를 싫어하는 건데? 난 이람 누나 괜찮아 보이던데?”이건은 더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입 닫기 싫으면 나가.”“오케이, 알겠어! 잘 회복하시고, 전 물러갑니다.”수범은 투덜거리며 병실 문을 향해 걸었다.“하... 나는 저렇게 좋은 누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그때, 문 앞에 서 있던 이람.수범이 다가오는 걸 보고, 재빠르게 몸을 옆으로 피했다.문을 열자마자 눈앞에 서 있는 이람을 본 수범.이람은 손가락으로 입술 앞을 가리며 눈짓했다.수범은 이람의 뜻을 바로 눈치채고는 아무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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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하지만 지금 이건과 이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죽어도 이건이 강제헌에게 손 벌릴 일은 없을 것이다.수범은 이건처럼 고집이 세진 않았다.그래서 몰래 KU그룹 쪽에 접촉을 시도했다.‘강제헌 대표의 처남’이라는 명목으로.수범은 운 좋게 제헌을 실제로 마주하는 기회를 얻었다. 단 1분 만에 ‘아크바이트’가 준비 중인 전통문화 기반의 AAA급 대형 게임에 대해 빠르게 피치를 날렸다.솔직히, 그 자리에서 바로 투자 약속이 나올 줄 알았다.그런데 수범은 경비원들에게 어깨를 잡혀 건물 밖으로 ‘정중히’ 퇴장당했다.수범은 어안이 벙벙했다.‘아니, 그래도 명색이 대표의 처남인데... 이렇게 쫓아낸다고?’더 놀라운 건, 며칠 후 KU그룹이 ‘아크바이트’의 직접적인 경쟁사에 거액을 투자했다는 기사였다.마치 뺨을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모욕감이었다.이건과 수범, 둘 다 할 말을 잃었다.수범은 이람과 강제헌 사이가 어떻게 된 건지 감히 묻지는 못하고, 다만 조심스레 운을 뗐다.“누나, 사실 오늘 이렇게까지 무리한 건... 회사의 핵심 개발자들이 전부 경쟁사로 넘어갔어요. 우리가 가진 기술까지 유출될 위험도 있고요. 지금, 회사는 거의 존폐 위기예요.”수범의 말은 단호했다. 절박했지만, 기운이 빠져 있는 건 아니었다.“그래서... 이 200억, 우리에겐 진짜 마지막 기회예요.”이람은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누나, 이제 누나는 우리 회사 지분 있는 대주주예요. 게임 상장되면, 꼭 배당 챙겨 드릴게요. 약속해요.”‘진짜 보여줄 거야. 누나가 믿어준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걸.’수범의 그 눈빛 속에는 결기가 있었다.이람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지금은 너희 일에만 집중해.”사업 세계의 냉정한 룰까지 이람이 신경 써줄 수는 없었다.다만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선까지는 언제든 동생에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 생각이었다.수범은 이람에게서 언제나처럼 말보다 더 따뜻한 ‘진심’을 느꼈다.밤새 억울하고 분했던 감정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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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임신’이라는 말에, 이람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멎는 듯했다.그토록 간절히 기다려온 아이를 잃은 건, 사랑 없는 삼 년의 결혼 생활 중 가장 쓰라린 상처였다.이람이 민서에게조차 그 일은 말하지 않았다. 알고 있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고 생각했으니까.그런데 그 누구보다 안하무인에 말 조심 따위는 모르는 강제은이, 아무렇지 않게 그 상처를 헤집고 들어왔다.가만히 있던 이람의 손가락이 작게 떨렸다. 차마 티 낼 수 없어 그대로 바닥만 내려다봤다.하지만 제은이 그런 미묘한 변화를 알아챌 리 없었다.“근데 언니 성격 내가 제일 잘 알잖아요? 진짜 임신했으면 온 세상에 떠벌리고 다녔겠죠. 애 낳아서 신분 상승하려는 거, 누가 모를까 봐요?”예전에 제은은 아이 문제로 수없이 이람을 조롱해왔다.그땐 참았다.‘그래도... 아이만 생기면, 제헌 씨가 나를 좀 더 바라봐 주지 않을까?’그렇게 생각했으니까.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더는 참을 이유도, 참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이람은 싸늘하게 말했다.“그렇게 잘 알면서, 굳이 물어보는 이유는 뭐예요? 비켜요.’제은은 코웃음을 쳤다.“이 정도 말에 상처받아요? 우리 오빠가 유리 언니 생일 챙겨주는 거 보면, 그 자리에서 숨넘어가겠네요?”제은은 어릴 적부터 오빠인 제헌에게 유난히 의지했고, 그런 만큼 다른 여자가 오빠 곁에 있는 걸 노골적으로 불쾌해했다.그래도 굳이 한 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건 이람이 아닌 유리였다.유리는 집안도 좋고, 본인이 직접 스타트업 CTO까지 거쳐온 재력, 외모, 실력 모두 두루 갖춘 여자.게다가 취미마저도 레이싱, 암벽등반, 스키, 서핑까지 못 하는 게 없었다.제은이 선망하는 ‘자유롭고 화려한 삶’ 그 자체였다.반면, 이람은?요리나 한다고 설치는 사람.가사도우미와 뭐가 다른지 제은은 알 수 없었다.겉보기엔, 이람이 유리보다 나은 게 하나라도 있긴 할까?다행히 오빠인 제헌도 이람을 대할 때 비슷한 수준의 무관심을 보였다.결혼한 지 3년이 넘도록 한 번도 이람의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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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의미 없는 설명은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아까 이람이 잠시 흔들렸던 건, 임신과 아이를 잃은 상처가 다시 건드려졌기 때문이다.지금은 차분해졌다.이람은 담담한 눈빛으로 제은을 바라보았다.“그렇다 치자.”그 한마디로 끝이었다.그러고는 곧바로 돌아서 아무 미련도 남기지 않은 차가운 뒷모습만 남긴 채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제은은 예상 밖의 반응에 당황하면서 입술을 삐죽이며 뱉었다.“연기하네, 또...”잠시 뒤, 병원 약국 쪽에서 친구가 약 봉투를 들고 다가왔다.제은의 시선을 따라가던 친구가 묻는다.“누구야? 방금 그 여자?”제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우리 집에서 키우던 개.”경멸 가득한 얼굴이었다.친구가 웃으며 장난처럼 말했다.“헐, 개한테 물렸냐?”“웃기지 마. 어디 개가 주인을 물어? 발로 차도 잘만 들러붙는 애지. 좀 짜증 날 뿐.”사실 제은은 최근 기성에게 들은 얘기를 믿고 있었다. 유리가 귀국한 뒤, 이람이 미친 듯이 질투해서 이혼을 핑계 삼아 제헌의 동선을 몰래 조사 중이라나.‘지나가는 막장 드라마 한 장면 같다니까.’‘그 흔한 밀당 질도 못 놓고 있으니 말 다 했지.’제은은 이람이 자신에게 틱틱대는 것도 그냥 웃긴 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렇게 이람 따위는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잊어버리려던 순간.핸드폰 진동.화면에 뜬 이름은 ‘오빠’.제은은 방금까지의 불쾌함이 눈 녹듯 사라지며 기분 좋게 통화를 받았다.“오빠! 뭐야, 무슨 일이야?”제헌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그 사람이 돌아왔어.]“그 사람?”제은의 얼굴이 굳었다.머릿속에서 저절로 떠오른 한 사람.무표정한 얼굴.서늘한 기운.아무 말 없이 시선을 주기만 해도 등에 소름이 끼치는, 그 사람.그녀는 몸이 순간적으로 굳고,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다.제헌의 말투는 평소보다 더 건조했다.[할아버님께서 이번 주말, 본가에서 가족 모이라고 하셨어. 너 그 사람 보기 싫으면 미리 지방에 내려가 있어. 할아버님 쪽은 내가 핑계 댈게.]순간, 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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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아...” 툭-민서는 전화를 끊기 전, 짧게 감탄하듯 소리를 내더니 통화를 종료했다.이람은 민서의 반응이 다소 의외였다.“누군데?”“모른대. 직접 만나서 소개하고 싶다네.”민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이게 지금 나한테 갑질하는 거야, 뭐야? 이름 하나 안 알려주는 건 좀 무례하지 않나?”이람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혹시...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그런 거 아닐까?”민서는 어깨를 으쓱하며 헛웃음 쳤다.“그래, 상대가 ‘이람 2.0’ 급이면 진짜 깜짝 놀라 줄게. 그 정도 아니면 그냥 허세지.”이람은 대꾸 대신 고개만 살짝 돌렸다.민서는 다시 시동을 걸면서 말했다.“토요일 일정은 까먹지 마. 나 너 데리고 갈 거야.”이람은 민서의 손이 올려진 운전대를 힐끔 봤다.‘그러고 보니... 경기장 가는 것도 오랜만이네.’심장이 아주 조금, 설레는 것처럼 뛰었다....그 후로 이람은 매일 수범에게 연락해 이건의 상태를 물었다.수범이 전한 이건의 상태는 완전히 회복되기도 전에 ‘200억 투자금’이라는 수혈을 받고, 다시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하는 ‘병든 워커홀릭’이었다.[누나, 진짜 출근하자마자 책상에 앉아서 이틀을 안 일어났다니까요.]수범이 전화로 이람에게 항상 이건의 근황을 보고했다. 이람은 걱정됐다.‘몸이 버텨낼까...’직접 전화라도 해보려 했지만, 이건은 이미 이람의 연락처를 차단한 상태였다.‘해킹으로 우회하는 건 1초면 되지만.’‘그렇게까지 하면, 그나마 남은 관계도 완전히 무너지겠지.’이람은 결국 포기했다.‘조만간 얼굴 보고 직접 확인하자.’...토요일.이람은 민서와의 약속대로 레이싱 경기를 보러 갈 준비를 마쳤다.원래 민서가 데리러 오기로 했지만, 급한 일이 생겨서 톡을 보냈다.[너 알아서 와.] 이람은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역시 민서 스타일.’이혼 전까지 이람은 제헌 명의의 차량을 타고 다녔다.이제는 그것까지 다 정리를 마쳤다.어제, 이람은 자기 돈으로 하얀색 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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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이게 바로, ‘신경 쓰이는 사람’과 ‘안중에도 없는 사람’의 차이였다.예전 같았으면, 이람의 마음은 아마 이 장면 하나로 온종일 뒤숭숭하고 심란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이혼했으니까... 강제헌에 대한 기대도, 마음도... 다 내려놓게 되었다.마음이 없으니, 상처도 그만큼 덜했다.물론 완전히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다만, 이람은 이제 그 감정을 스스로 조절하고 소화해 낼 수 있었다.복도 안에서 이어지는 유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누나 경기 곧 시작인데, 제헌 형 여기서 같이 보죠! 제가 고른 방인데, 뷰가 진짜 끝내줘요.”그 말을 듣고, 이람은 제헌이 왜 여기에 있는지 이해가 됐다.‘하유리가 오늘 경기 나가는구나...’그동안 제헌은 카레이싱 경기에는 별 관심 없어 보였던 터라, 이람은 제헌과 같이 즐기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왔었다.하지만 인제 보니, 제헌은 취향이 없는 게 아니라 그냥 이람에게 관심이 없는 거였다.“그래. 나 먼저 전화 좀 하고 올게.”제헌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말에 이람은 민서가 잡아둔 VIP 룸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제헌이 복도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잠깐 기다리기로 했다.‘피하는 게 낫지. 괜히 마주쳐서 불편해지고 싶지 않아.’문이 덜컥, 닫히는 소리가 났다.제헌이 전화하러 나왔다는 뜻.이 복도에는 출구가 하나뿐이었다.이람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모퉁이 하나 돌아 나온 회전 구간, 그 안쪽에서 몇 분 정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시간이 좀 지나고, 제헌의 통화가 끝났을 것 같아 이람은 복도 안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딱.이람은 한 걸음 내딛는 그 순간, 누군가와 정면으로 마주쳤다.정확히 1미터 거리.제헌이었다.둘 다 그대로 멈춰 섰다.순간, 이람의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가까이서 풍기는 익숙한 향.은은하면서도 절제된 남자의 향수 냄새.그 향기는 기억의 버튼처럼 예전의 화면들을 한순간에 되살려냈다.‘왜 하필 이런 데서, 이런 식으로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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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이람은 제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몸 옆에 늘어뜨린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이혼 이야기를 먼저 꺼낸 건 제헌이었다.그런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한 마디로 ‘본가에 오라’고 했다.그 말만 남기고 이람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돌아서는 뒷모습엔, 이람의 의사는 애초부터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날, 그냥 필요할 때 불러서 쓰는 사람쯤으로 여기는 거겠지.’이람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가슴 안쪽에서 올라오는 불편한 감정을 진정시키려 애썼다.하지만 지금 머릿속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건...‘내일, 본가에 가야 하나?’강수철 회장이 그곳에 있다.이람이 제헌과 같이 가지 않으면,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다.하지만 이혼 서류에 사인까지 한 상황에서, 다시 그 집에 들어가는 건 전혀 내키지 않았다...결정을 못 내리고 있던 그때, 이람의 핸드폰이 울렸다.민서였다.[넌 VIP룸에 잠깐 앉아 있어. 내가 연락하면 그때 나와. 좀 있다가 아주 중요한 사람을 소개해줄 거야.]그 말에, 이람은 본가 이야기를 잠시 잊고 되물었다.“누구?”예상 밖의 전개였다.민서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M국에서 돌아온, 최고의 명문가 집안의 황태자야.]민서는 창업하고 나서 수많은 인맥과 비즈니스 인물들을 만나봤다.그런 민서가 이렇게 흥분한 걸 보면, 그 ‘황태자’라는 사람이 보통 인물은 아닌 듯했다.이람은 조심스럽게 물었다.“내가... 거기 껴도 되는 자리야?”[당연하지. 전부 우리 업계 사람이야. 그 황태자는 해외에서 불과 몇 년 만에 사업을 대륙 단위로 확장해서, 현재 20여 개국에서 활동 중이야. 게다가 우리 회사랑도 사업분야가 잘 맞아. 너무 잘 맞는 자리라서, 네가 꼭 와야 해.]경력만 들어도 포브스 리스트에 나올 법한 인물이었다.‘민서가 이런 사람을 아는 레벨이었던가...?’이람이 의아해할 만도 했다.그동안 민서는 단 한 번도 그런 얘길 꺼낸 적이 없었다.그런 이람의 의심을 눈치챘는지, 민서가 덧붙였다.[긴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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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제은은 마치 ‘이런 멍청한 질문을 왜 하나’ 싶은 얼굴로 피식 웃었다.“유리 언니를 안 좋아하면, 새언니를 좋아하겠어요?”“언니, 나한테 솔직히 말해봐요. 언니한테 도대체 뭐가 있어서 내가 언니를 좋아하겠어요? 단 하나라도 언니의 장점을 말해줄 수 있다면, 내가 그 자리에서 바로 태세 전환해서 언니 칭찬할게요.”말은 가볍게 던지는 듯했지만, 제은의 말투는 늘 그랬다.사람 가슴을 찌르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타입.제헌처럼 냉정한 얼굴을 하진 않았지만, 제은은 매번 말속에 함정을 숨겨뒀다.그건 또 다른 방식의 잔인함이었다.‘역시, 남매는 남매구나.’이람은 굳이 대응하지 않았다.애초에 소통이 안 되는 상대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런 이람의 무반응이 제은에겐 재미없었는지, 질문을 바꾸듯 말을 이어갔다.“언니, 궁금하지 않아요? 유리 언니가 왜 갑자기 레이싱을 시작했는지?”이람은 ‘안 궁금해’라고 말하려던 순간, 제은이 벌써 혼자서 대답을 시작했다.“유리 언니가 Sun 경기 본 적 있대요. 그때부터 레이싱에 빠졌고, 지금은 거의 프로급이에요. 물론, 아직 Sun이랑 비교하긴 멀었지만. 세상에 Sun을 이길 사람은 없거든요.”이람은 순간 멍해졌다.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Sun 때문이라고?’하지만 제은은 이람의 미세한 표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혼자 회상에 잠긴 듯, 눈빛이 반짝였다.그 안엔 광적인 열정과 아쉬움이 뒤섞여 있었다.“나도 Sun 진짜 오랫동안 못 봤어요. 완전 찐팬이거든요. 그때, 진짜 거의 볼 수 있었는데, 사인도 받을 뻔했는데... 에휴, 언니한텐 말해봤자 모르겠지만요.”말끝에 이람을 위아래로 훑으며 고개를 갸웃했다.“이게 내가 언니를 안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예요. 내가 좋아하는 거 얘기해 봤자, 언니는 무슨 말인지 모르잖아요. 말이 안 통하는 게, 마치 벽이랑 얘기하는 느낌이랄까?”‘나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근데 유리 언니는 언니랑 달라요. 유리 언니는 반짝이는 Sun을 보고 반할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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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민서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이람은 한동안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던 레이서, 바로 그 Sun이었다.어머니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이람은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다.그 깊은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이람은 다양한 익스트림 스포츠에 빠져들었다.몸이 극한의 속도에 휘둘릴 때, 순간적으로 모든 생각이 멈췄다.잡생각도, 불안도, 슬픔도... 모두 사라졌다.그때만큼은 온전히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심장이 아드레날린에 의해 쿵쾅거릴 때, 이람은 살아 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레이싱은 그 많은 익스트림 스포츠 중 하나에 불과했다.처음부터 대회에 나갈 생각도,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그래서 이람은 비공식 레이싱 팀에 들어갔고, 그곳에선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됐다.이람은 확실히 재능이 있었다. 처음 핸들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레이싱 감각을 익혔고, 몇 번의 레이스 이후, 이람에겐 팬이 생겼다.그러다 어느 날, 이람은 우연히 공식 대회에서도 깨지지 않던 기록을 간단히 넘겨버렸다.입소문은 빠르게 퍼졌고, Sun이라는 이름도 유명해졌다.팬은 점점 늘어났고, 아마 그때쯤 제은도 Sun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이람은 그런 유명세에는 조금도 흥미가 없었다.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레이싱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그렇게 이람은 조용히 다른 익스트림 스포츠로 관심을 옮겼다.물론, 속도에 지배당하던 그 쾌감은,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이야기였다.이람은 민서를 흘끗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나 이제 안 하니까 괜히 입방정 떨지 마.”민서는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받아쳤다.“내가 입방정 떨면, 너 뭐 어쩔 건데?”민서가 이럴 땐 일부러 더 세게 나온다는 걸, 이람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마음껏 말해. 어차피 아무도 안 믿을 걸. 설령 믿는다 해도, 나 다시 할 생각 전혀 없어.”누군가에겐 Sun이 ‘레이싱 그 자체’였는지 몰라도, 이람에게 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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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너 기분 지금 안 풀어주면, 이따가 그 ‘황태자’ 앞에서 네가 빡쳐서 분위기 싸하게 만들까 봐 무섭거든. 그 사람 기분 상하면 네가 나를 팔 수도 있잖아. 그럼 나 진짜 못 버텨.”민서는 익살스럽게 말한 뒤, 바로 초등학교 동창에게 연락을 취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 동창이 모습을 드러냈다.우세진이 걸어오고 있었다.세진은 첫인상부터 깔끔했다.키는 185 정도.단정하게 정리된 머리, 딱 떨어지는 맞춤 정장.자칫하면 차가워 보일 수 있는 격식 있는 옷차림인데도, 세진은 오히려 부드러운 인상이었다.‘은근히 사람 기분 좋게 만드는 타입이네.’이람이 처음 받은 인상은 ‘절제된 엘리트’.“세진, 여기!”민서가 손을 흔들었다.세진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고, 민서를 바라보며 인사했다.“오랜만이다, 친구야.”그 후, 자연스럽게 이람에게 시선을 돌렸다.예의 바르고 담백한 목소리였다.“안녕하세요, 이람 씨. 우세진입니다.”‘민서가 이미 다 얘기해뒀구나.’이람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민서가 옆에 있어서 이람도 따로 대화를 이어갈 필요는 없었다. 그저 조용히 곁에 서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그 화면만 보면, 민서와 세진은 오래 알고 지낸 사이 같았지만, 민서의 귀띔이 없었다면, 이람은 이 둘이 10년도 넘게 연락이 끊겼었다는 걸 절대 몰랐을 것이다.‘둘 다, 사회성이 타고난 편이네.’세진이 앞쪽을 손으로 가리켰다.“이람 씨, 우리 안으로 들어갈까요? 저쪽이에요.”세 사람은 나란히 VVVIP 룸으로 향했다.이곳은 일반 VIP 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넓고, 인테리어도 훨씬 고급스러웠다. 중앙엔 기다란 블랙 가죽 소파, 한쪽엔 커다란 스크린과 여러 가지 오락 장비가 마련돼 있었다.‘딱 봐도 지루할 틈이 없겠네.’이람은 고개를 들어 룸 안을 훑었다. 소파 위엔 이미 몇몇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나이대도 다양했다.이람은 그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이곳은 사적인 자리였다. 공식적인 비즈니스 모임도 아니고, 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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