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혼 후, 나는 그의 형의 신부가 되었다: Chapter 51 - Chapter 60

100 Chapters

제51화

이람은 조용히 옷자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됐어요.”그렇게 말하고는, 다른 드레스를 집어 들었다.심플한 순백색의 드레스.앞모습은 단정했지만, 뒷부분은 깊게 파인 백리스 스타일.게다가 길이도 애매한 미디움 기장이라, 어지간한 체형이나 분위기로는 소화하기 어려운 옷이었다.하지만 이람은 달랐다.또렷한 이목구비, 차가운 듯한 인상, 흰색이 전혀 밋밋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분위기와 절묘하게 어우러졌다.심플함 속에 묘한 날카로움이 스며 있었다.피팅을 도와주던 매장 직원이 이람의 중간 길이의 흑발을 반쯤 말아 올렸다.그 순간, 드러난 등이 조명을 받아 빛났다.창백한 피부와 짙은 머리카락이 극적인 대비를 이루며, 이람은 마치 빛 속에 선 여신처럼 보였다.직원은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말끝을 맴돌다가 결국, 감탄이 튀어나왔다.“너무 우아하시고, 아름다우시고... 그리고... 그...”예상 못 한 반응에, 이람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 뭐요?”직원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말했다.“멋있어요.”“멋있다고요?”직원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느낌이 그래요. 듬직하달까, 믿음직스럽고... 그냥, 진짜 멋있어요.”속으로는 거의 소리 지르고 싶었다.‘이건 그냥 미인 정도가 아니야! 존재감이, 카리스마가...’‘진짜 톱 남배우보다 더 멋있어 보여!’하지만 고객이 놀랄까 봐 꾹 참고 있었다.이람은 직원의 속마음은 알 길 없었다.그저 거울을 바라보며, 방금 들은 단어를 곱씹었다.‘멋있다...’민서도 예전에 그렇게 말했었다.‘네가 되게 쿨한 느낌이 있어.’그땐 농담처럼 들었는데...이람은 한 번도 그런 자기 모습을 인정해 본 적이 없었다.결국 참다못해 물었다.“근데 왜 전 그런 느낌이 안 들죠?”직원은 즉시 대답했다.“평소에 꾸미는 걸 안 좋아하시고, 또 칭찬을 잘 못 들어보셨나 봐요.”“예전에 친구가 말한 적은 있어요.”“그럼, 요즘엔 많이 못 들으셨겠네요.”이람은 순간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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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화

이람의 두 번째 반응은 ‘어쩜 이렇게 딱 마주치냐’였다.보통 사람들은 혼자 쇼핑할 때, 아는 사람을 마주치는 것에 꽤나 불편함을 느낀다.오늘 하준은 정장 차림이 아니었다. 올블랙 스포츠웨어에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블랙 롱코트를 걸쳤다.전에 버렸던 그 브랜드의 코트와 같은 라인이지만, 길이만 달랐다.날카로운 이목구비는 여전히 잘생겼고, 그만큼 차가웠다.이미 마주쳤으니 이람도 모른 척 지나가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그녀는 약간의 거리감을 두고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하준은 표정 하나 안 바뀐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그 눈빛에 이람은 순간적으로 한기 같은 걸 느꼈다. 더 이상 말은 하지 않고, 가볍게 고개만 끄덕인 후, 다시 계산대로 시선을 돌렸다.그 순간, 하준의 어깨가 재원의 손바닥에 가볍게 맞았다.“네 번째.”하준이 입을 열기 전, 재원은 벌써 컵을 내려놓고 자연스럽게 이람 쪽으로 다가갔다.그리고 계산하려던 이람의 앞을 슬쩍 가로막으며 익숙한 듯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유재원이라고 해요.”재원은 특별히 웃지 않아도 호감 가는 얼굴이었다. 눈매가 깊고, 입꼬리는 습관처럼 살짝 올라가 있었다.‘고지후랑 비슷한 느낌이네.’이람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지후도, 유재원도 사람 끄는 힘이 있는 타입.다만, 고지후는 더 정제된 분위기였고, 유재원은 좀 더 느긋하고 장난기 넘쳤다.딱 남쪽 사람과 북쪽 사람의 그 미묘한 차이.“안녕하세요. 조이람입니다.”이람이 간단히 대답하자, 재원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하준이 국내에 들어왔다는 소식 듣고, 제가 오늘 일부러 J시에서 날아왔어요. 오랜만에 좀 보려고요.”그러더니 재킷 안의 흰색 트레이닝 셔츠를 가리켰다.“보다시피, 오늘 오후에 같이 테니스 했거든요. 혹시 테니스 하세요? 시간 되면 우리 같이 한 판?”‘말 많다, 이 사람...’이람은 사실 테니스 칠 줄 알았다. 하지만 입에서는 정반대의 말이 나왔다.“아니요, 못 쳐요.”“오, 그럼 잘 됐네요. 하준이가 이람 씨 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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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재원이 H시에 도착한 건 오후였다. 도착하자마자 라켓부터 들고 테니스장으로 향했고, 해가 지고 나선 친구들과 술자리로 향했다.사적인 모임이었기에 분위기는 편했고, 재원은 큰 고민 없이 하준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J시 안 내려가는 거, 혹시 너희 어머니 피하는 거냐? 우리 다 들었어. 결혼하라고 들들 볶는다며?”“소개해 준 사람마다 다 퇴짜 놨다던데? 너 정도면 조건도 괜찮으니까 눈 좀 높은 거 이해는 해.”그 말에 부연훈과 우세진의 시선이 단번에 재원 쪽으로 쏠렸다.재원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근데, 나 진짜 괜찮은 사람 한 명 떠올랐어.”연훈은 그 말을 들으며 이람이 떠올랐다. 하지만 입 밖에 내진 않았다. 대신 물었다.“누군데?”“이람 씨.” 재원이 이름을 딱 잘라 말했다.하필 며칠 전, 재원은 이람과 우연히 마주친 데다, 하준이 유난히 이람에게 신경 쓰는 걸 눈치챘다.하준은 어릴 때부터 여자에게 관심이 전무했다. ‘쟤는 혹시 남자 좋아할 애인가’ 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그런 하준이 이람을 두세 번 훑어봤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특이한 반응이었다.그래서 재원은 확신했다. ‘이 여자... 가능성이 있네.’연훈의 표정에 놀라움이 떠올랐다.“너 조이람 씨 알아?”“야, 설마 너도 알아?” 재원이 들떴다. “너도 그렇게 생각한 거지? 맞지?”연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재원은 감탄했다.“이람 씨, 그 싸늘한 분위기 봤지? 근데 우리 하준이 앞에서도 기 죽지 않더라. 당당하고 침착하게 말하는 거, 진짜 멋졌어.”“대체 몇 명의 여자가 그게 되겠냐? 보통은 얼굴 빨개지거나, 다리 풀려서 하준이 품에 쓰러질 판인데.”연훈은 콧잔등에 얹힌 은테 안경을 슬쩍 밀어 올렸다.“다들 비슷하게 봤네. 둘 다 같은 세계 사람 같아. 우리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재원은 자신만 알고 있던 정보가 이미 공유된 사실이라는 걸 알고 아쉬워했다.“근데 너는 어떻게 이람 씨 알아?”“조이람 씨는 하준이 비서야.”“헐, 그럼 더 대박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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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그렇다고 재원의 감정이 첫눈에 반했다는 식의 유치한 것은 아니었다.그저, 한 번쯤 시도해 보고 싶었다.‘혹시 모르는 거지. 진짜로 뭔가 통할 수도 있고.’마침 조이람이라는 낯선 사람에게 호기심이 생기던 참이었다.그런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말도 안 했던 하준이 눈을 들어 대답했다.“그래. 해.”재원은 멈칫했다.“내가 너 관심 없는 여자한테 작업 거는 거지, 허락받는 건 아니거든?”하준은 한 템포 늦게 술잔을 내려놓고, 말끝을 날카롭게 뱉었다.“강제헌 아내한테 그렇게 마음 가면, 하고 싶은 대로 해. 더는 말 안 할게.”“뭐?”재원이 몇 초간 말을 잃고 하준을 바라봤다.“이람 씨가 강제헌 아내라고?”연훈도 놀란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 싹수없는 네 의붓동생? 내가 알기엔 강제헌 결혼했는데. 근데 이람 씨가 강제헌의 부인이면, 왜 한 번도 말이 없었지? 오히려 강제헌은 요즘 다른 여자랑 자주 같이 다니던데?”이번엔 세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이람 씨랑 강제헌 대표, 벌써 결혼한 지 3년 됐어요.”그 말을 하고 나니, 세진은 왜 처음에 이람이 결혼한 걸 들었을 때 아깝다고 느꼈는지 이해가 됐다.연훈 말처럼, 하준과 이람은 딱 ‘같은 세계 사람’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재원은 연훈의 말을 정리하듯 되새기고 나서 손가락을 튕겼다.“이혼도 머지않았단 뜻이네? 그러면, 이람 씨가 이혼하면?”하준은 이람에게 어떤 감정도 없었다.친구들이 멋대로 떠들어댄 건 전부 망상일 뿐.그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였다.“나랑 조이람 씨. 그럴 일 없어.”하준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그리고 이어진 말은 더욱 차가웠다.“방금 너희가 한 말, 다 들었어. 그냥 술김에 떠든 걸로 넘길게. 하지만 조이람 씨 앞에선 단 한 마디도 꺼내지 마.”남자들의 가십은 이람에게 너무나도 불공평한 일이었다.무례한 상상이고, 존중이 없는 태도였다....다음 날 아침.이람은 눈을 뜨자마자 세면대 앞에 섰다.가볍게 세수한 뒤, 왼손의 상처에 새 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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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비서실 실장 남진과 대표실 수석비서 우세진이 나란히 걸어 나왔다.그 뒤를 따라, 서하준이 모습을 드러냈다.몸에 착 감기는 맞춤 슈트, 곧고 단단한 체형.흠잡을 데 없이 정제된 이목구비와 날카롭게 각진 눈매.절제된 무표정 속에서도 흘러나오는 냉담한 분위기.하준이 등장한 순간, 로비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존재만으로 위압감을 드러내는 사람이었다.지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눈에 띄게 놀라고, 또 동시에 감탄하는 눈빛.그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주변에 앉아 있던 직원들도 일하던 손을 멈추고, 시선이 일제히 하준을 향했다.하지만 당사자인 하준은, 그런 시선 따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시선을 곧게 하고, 로비를 지나쳐갔다.세 사람은 곧바로 대표실 안으로 들어갔다.문이 닫히고 나서야 사무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현실로 돌아왔다.대부분 이미 몇 번은 하준을 봤을 터였지만, 볼 때마다 느끼는 건 똑같았다.‘이 사람, 진짜 사람이 맞나?’고된 사무실 생활 속, 하준의 얼굴은 분명 강력한 피로 회복제였다.지영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이람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야야야! 드디어 확인했어요! 영화배우보다 백배는 잘생긴 거 맞아요!”이람은 그런 지영의 반응이 귀여워서 피식 웃었다.지영은 여운을 놓지 못한 채 눈을 반짝였다.“안 되겠어요. 오늘 남편한테 SY그룹 대표님 정보 좀 캐봐야겠어요.”이람은 그런 지영의 흥분을 더 자극하지 않고, 조용히 자기 자리에 앉아 업무에 집중했다.약 30분쯤 지나, 우세진과 남진이 대표실에서 나왔다.세진은 곧바로 다른 업무로 이동했고, 남진은 이람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조 비서, 이 서류 다섯 부 출력해서 대표님께 바로 드려요.”“네.”이람은 곧바로 프린트를 마친 뒤, 서류를 정리하고 대표실 앞에 섰다.노크.“들어오세요.”낮고 무심한 목소리가 안에서 울렸다.이람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하준은 책상에 앉아 있지 않았다.대표실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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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KU그룹은 H시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이었다.강수철 회장 때부터 쌓아온 인맥과 영향력은 지금까지 끈질기게 이어져 오고 있었다.시류를 잘 타고 부를 이룬 신흥 재벌, 예를 들면 정홍도 같은 인물들이 아무리 돈을 들이밀어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세계.강씨 가문에 줄을 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넘쳐났고,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이람은 알고 있었다.제헌이 유리를 좋아한다는 사실.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추상적인 ‘사실’일 뿐이었다.감정의 온도는 느껴보지 못했으니까.그런데, 지난 일주일 동안, 제헌이 유리를 대하는 방식을 하나하나 지켜보며 그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 하나하나 절절히 알게 되었다.‘이렇게 다정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나한테는 늘 얼음 같던 사람이...’‘사랑이라는 걸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네.’그 진심을 눈으로 직접 본 순간, 더 이상 묻고 싶지 않았다.‘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라는 질문도,‘내가 뭘 해야 날 봐줄 거냐’라는 애원도.그 두 사람 사이엔, 제삼자가 끼어들 수 없는 밀도 높은 뭔가가 있었다.예전의 이람은 차갑게 닫힌 제헌의 마음을 손으로 감싸 데우려 했고, 그게 가능하다고 믿었던 적도 있다.하지만 이제는 안다.그건 순진한 착각이었다.‘졌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네.’‘아프고, 서럽고, 미련이 남아도... 그래도, 이제는 정신 차릴 때야.’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 하나.‘그렇게 하유리를 사랑했다면, 왜 3년 전에 나랑 결혼한 거지?’사랑하지 않았다면, 안 하면 그만이었다.무슨 사정이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제헌은 쉽게 타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아무리 강수철 회장이 압박했다고 해도 그가 억지로 끌려갔을 것 같지는 않았다....한편, 지영은 슬쩍 남진 실장실을 확인하더니 안전하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 수다를 이어갔다.“확실한 건, 강제헌 대표님도 보기 드문 미남이긴 한데, 우리 서하준 대표님한테는 못 미쳐요!”이람은 생각을 거두고,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그 얘기 남편 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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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화

하준은 문손잡이에 걸려 있던 쇼핑백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그대로 문을 닫고 이람을 따라가려다 늦었다.텁-문이 닫히는 소리에 발을 멈췄다.그제야 재원은 하준 손에 든 쇼핑백을 유심히 봤다.명품 브랜드 로고가 선명했다.“야, 나 이거 까먹고 안 줬다. 너 직접 산 거야? 온라인 주문?”하준은 아무 대꾸 없이 부엌 쪽으로 향했다. 말이 없어도 평소처럼 그러려니 했다.재원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계속 떠들었다.하준은 조용히 가위를 집어 들고, 쇼핑백을 열었다.포장을 제거하자, 안에 들어 있던 유리컵이 모습을 드러냈다.정밀한 커팅으로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잘려 나간 유리 표면.조명이 비추자, 컵 표면은 별빛처럼 반짝이며 눈부시게 빛났다.컵의 이름은 ‘폴라리스’.특별한 기능이 있는 건 아니지만, 보기엔 정말 예뻤다.하준은 컵을 꺼내 벽 한편의 진열장으로 향했다.이미 그 공간엔 비슷한 스타일의 유리컵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하준이 직접 골라 모아온 것들이었다.재원은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또 한마디 던졌다.“설마... 이람 씨가 준 거냐? 너 방금 문 닫을 때 급하게 숨기던데? 되게 수상했거든.”하준은 아무 말 없이 ‘폴라리스’를 진열대 한 칸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그리고 다시 돌아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잠시 후.재원의 핸드폰이 진동했다.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말도 없이 800만 원 쏘는 너, 맘에 든다.]둘 사이엔 종종 수백만 원씩 주고받는 일이 있었지만,‘800’이라는 숫자는 처음이었다.“야, 아무리 그래도 한 번에 팔백은 선 넘은 거 아냐?”재원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미 손가락은 ‘받기’를 누르고 있었다.하준은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조이람 씨가 너한테 갚아달래.”재원의 손가락이 딱 멈췄다.느릿하게 고개를 들며, 눈을 가늘게 떴다.“무슨 뜻이냐?”“조이람 씨가 너한테 빚지고 싶지 않대.”재원은 입을 벌리다 말고,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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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화

[나도 한빈 교수님이 보낸 자료 봤어. Lugi-X가 예전에 비슷한 문제를 해결한 건 맞는데, 3년 차이면 세부 기술은 완전히 달라져.][알다시피, 기술은 디테일이 생명이라, 아주 사소한 차이가 결과를 완전히 뒤집을 수 있거든. 우리 팀만으론 해결 못 해. 근데 너라면... 해볼 만할 것 같아서.]민서의 말투는 진지했지만, 이어지는 말은 살짝 무거웠다.[물론, 한빈 교수님은 이렇게 후한 조건을 거는 건 KU그룹에서 이 프로젝트에 투자했기 때문이야. 너 전남편, 그 사람 돈이지. 그건 미리 말해두고 싶었어. 그게 좀 걸리면, 그냥 안 해도 돼.]잠깐의 정적 후, 민서가 분위기를 바꿨다.[근데... 돈 싫어하는 사람 없잖아?]이람은 웃으며 대답했다.“당연하지. 나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 아니야. 우리 약속했잖아. 같이 부자 되기로.”[그럴 줄 알았다니까.]민서가 숨기지 않고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말인데, 지금 이 계약서 내 눈앞에 있어. 너 오케이 하면 바로 회사 명의로 계약 넣고, 세금은 내가 알아서 정리해 줄게. 수익도 회사 계좌로 정리해서 네 몫 바로 떼어줄 거고.]이람은 조용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잠깐, 너무 서두르지 마. 자료 좀 더 보고 판단할게. 확신이 서야 수락하지.”[걱정 마. 나 이미 한빈 교수님 쪽엔 일단 거절했다고 했어. 너 괜찮다 싶으면, 다시 상황 바뀌었다고 얘기하면 돼. 어차피 그 팀 두 달 넘게 같은 데서 막혀 있었잖아. 이번 주 안에 갑자기 무슨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어.]민서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그럼, 대략 언제까지 피드백 줄 수 있어?]“오늘 퇴근하고 집 가서 볼게. 내일 금요일, 그때까지 답 줄게.”[이 효율성... 너무 좋다.]전화기 너머 민서가 장난스럽게 소리 내어 이람에게 뽀뽀하는 소리를 냈다.[이래서 이혼이 좋은 거야. 이람아, 넌 지금 네 분야에서 제대로 빛나고 있어. 이번에 논문만 잘 나오면, 네 몸값은 진짜 수직 상승이야.][그때부터 넌 선택하면 돼. 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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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화

유리에게 있어서 이번 문제를 풀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열쇠는 바로, 진민서였다.그런데 만약 한빈 교수가 자신보다 먼저 민서와 접촉한다면...‘내 입지가 애매해질 수밖에 없지.’이런 생각은 생각만으로도 위태로웠다.그때, 한빈의 말이 전환점을 맞았다.“근데 진 대표님이 거절했어요. 그래서 이번엔 우리 내부에서 해결해야 해요. 하 팀장님께서 이끄는 쪽에 기대를 걸어보겠습니다.”유리는 안도의 숨을 삼켰다.‘됐어. 아직 기회는 내 손에 있어.’한빈은 유리와 제헌의 관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공식적인 말투 사이에, 살짝 사적인 뉘앙스를 담았다.“이번 기회가 하 팀장님 입지 다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어요. 성과를 보여줘야 팀원들도 자연히 따르니까요.”유리는 처음부터 이 연구팀에 뿌리를 내릴 생각은 없었다. 여기에서 커리어를 다듬고, 필요한 스펙을 갖춘 뒤, 자신만의 다음 스텝으로 나아가는 게 본래 목표였다.‘내 계획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야.’‘기회가 된다면 창업도 가능하고, 아니면 박사 후 과정으로 넘어가도 되고.’그리고 언젠가, 반민진 같은 전설적인 인물들과 협업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멋진 미래가 될 것이다.그 정도 네트워크만 확보하면, AI업계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는 건 시간문제였다.지금 회의실에서 쏟아졌던 반감과 불신?유리는 그딴 문제들이 확실한 결과 한 방이면 조용해질 거라고 믿었다.한빈이 먼저 민서를 접촉한 이상, 전략을 바꿔야 했다.유리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만약 루센티스와 외주 협업이 가능하다면, 진행 속도는 훨씬 빨라질 겁니다. 제가 직접 진 대표님을 만나보겠습니다.”한빈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역시 민서에게 단칼에 거절당했기 때문에, 기대는 크지 않았다.“큰 기대는 말고요. 그래도 한 번 시도해 보는 건 의미 있겠죠. 단, 하 팀장님도 내부 진행을 병행하세요. 이대로 시간이 더 지체되면,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습니다.”“알겠습니다.”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저는 항상 결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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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화

보안 조치 때문에 프로젝트의 전체 자료는 당연히 포함되지 않았다.이람이 받은 건 문제 기술서.문제 상황만 담긴 문서였지만, 무려 30페이지에 달했다.이람은 빠르게 내용을 훑었다.먼저 눈에 거슬린 건 문제를 설명하는 문장들이었다.‘용어 선택이 모호하네. 참고 논문도 연관성이 부족하고...’그녀는 손에 펜을 들고 핵심을 짚어가며 내용을 다시 정리했다.30페이지 분량의 문서를 10페이지로 간결하게 압축했다.그다음은 발산적 사고.이람은 다양한 가능성을 조목조목 적어나갔다.그 방향에 따라 국내외 관련 논문을 검색해 정확히 필요한 것만 빠르게 다운로드했다.정리가 거의 마무리될 즈음, 이람은 불현듯 한 인물의 이름을 떠올렸다.‘반민진 교수...’그가 몇 년 전 발표한 기술 철학 기반의 이론서.전문 용어가 지나치게 추상적이라 일반인은 물론 전공자들도 읽기 버거운 책이었다.한정 수량으로 100부도 채 인쇄되지 않았고, 온라인상에 자료도 남아 있지 않았다.이람은 곧바로 시립도서관 통합 검색을 통해 한 권이 등록된 걸 확인했다....퇴근 후, 이람은 저녁을 간단히 해결하고 바로 시립도서관으로 향했다.서가 구역에서 책을 찾아 꺼내던 그때, 불쑥 옆에서 누군가 손을 뻗어 관련 학과의 입문서를 가져갔다.이람은 무심히 책 제목을 흘깃 봤다.기초 수준의 컴퓨터 개론서.“진짜 우연이네.”귀에 익은 목소리.고개를 들자, 정도규가 책장을 넘기며 서 있었다.시선은 책에 떨어져 있었지만, 이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낀 듯했다.도규는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말투는 무심했고, 표정은 담담했다.“컴퓨터 쪽에도 관심 있었어요?”내일 민서를 만나기로 한 날.도규는 준비 차원에서 지인인 개발자에게 책을 추천받아, 그 책을 빌리기 위해 도서관에 들렀던 참이었다.택배로 받을 시간이 부족했기에, 직접 빌리러 온 것이었고, 이람을 마주친 건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다.‘조이람이라니... 이런 데서도 마주치네.’도규는 속으로 어이없는 웃음을 삼켰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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