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혼 후, 나는 그의 형의 신부가 되었다: Chapter 41 - Chapter 50

100 Chapters

제41화

지후는 슬쩍 제헌의 얼굴을 바라봤다.제헌의 표정이 영 좋지 않은 것은 도규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뜻이었다.평소라면 조이람 같은 사람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을 제헌이, 지금처럼 무거운 표정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저 무시하는 수준은 아니라는 뜻이었다.‘형수님한테 진짜 정떨어진 거야?’‘아니면... 이혼할 거라는 말이 그냥 빈말은 아닌 거야?’지후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생각에 잠긴 채 약국을 빠져나가려던 그때, 이미 조이람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뭐 타고 간 거지? 그렇게 빨리?’그때, 도규가 다가와 지후의 어깨를 가볍게 부딪쳤다.“같이 가냐?”제헌과 유리가 함께 있었기에, 눈치 빠른 도규는 굳이 곁에서 분위기 망칠 생각은 없었다.지후는 짐짓 놀란 듯 물었다.“형은 인재 찾으러 왔던 거 아니에요? 이렇게 한 명도 못 건지고 가요?”도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아까 유리랑 얘기 나눴어. 유리가 Lugi-X 개발자랑 안다고 하더라. 시간 되면 직접 소개해 준대.”지후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유리 누나는 진짜 못 하는 게 없네요.”도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 어린 어조로 말했다.“그럼. 대단한 사람이야.”유리가 접촉하는 사람들은 전부 해당 분야의 최상위권 인재들이었다.그래서 직접 추천해 주는 인물이면 말도 안 되는 스펙일 거라는 건 확실했다.사실 도규는 얼마 전 유리의 레이싱 경기도 직접 가서 봤다.서킷 위의 유리는 평소의 차분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매력이 있었다.그 순간, 도규는 완전히 이해했다. 왜 제헌이 그토록 유리를 원하고 선택했는지.‘그 선택... 이해 못 할 이유가 없지.’비록 자신이 제헌의 입장이었다면, 도규는 결코 이람 같은 여자와 억지로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설령 강수철 회장의 압박이 있었다고 해도 말이다. 끝까지 버티면서, 박사 과정을 마친 유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제헌은 이람을 아내로 맞이한 이유에 대해 단 한 번도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었다.도규 역
Read more

제42화

점심 식사가 끝난 뒤, 하준은 이람에게 업무 하나를 더 맡겼다.하준이 주문해 둔 컵을 식기 전문 매장에서 받아 자택으로 가져다 놓으라는 것이었다.현관 비밀번호는 문자로 따로 보내왔다.식사 도중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개인 연락처를 교환했는데, 물론 이건 세진이 먼저 분위기를 띄워서 가능한 일이었다.이람은 감히 먼저 하준의 번호를 물을 수 없었기에, 그저 받아두기만 했다.그 식기 매장은 해외 명품 브랜드였고, 하준이 구매한 컵 두 개의 가격은 공식 홈페이지 기준으로 약 2천만 원.직원이 여러 겹의 에어캡으로 꼼꼼히 포장해 주었지만, 이람은 여전히 조심스럽게 쇼핑백을 두 손으로 꼭 감싸 들었다.그렇게 매장을 나서려던 순간, 맞은편에서 강제은이 친구들과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이 동네는 왜 이렇게 좁지...?’이람이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제은의 친구 소영미가 일부러 들리게 말했다.“제은아, 그게 네가 얘기하던 너희 집에서 키우는 개 맞지? 와... 얼굴은 진짜 예쁜데, 그렇게 예쁜 개도 있었구나?”영미는 며칠 전 병원에서도 함께 있었던 인물이었다.그날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말이 그냥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제은은 이람이 자신을 무시하고 지나가려는 걸 보곤, 일부러 더 큰 소리로 말했다.“그냥 얼굴 하나로 먹고사는 거지. 실속은 하나도 없는 애야.”말은 이람을 향했지만, 이람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그들 무리를 스쳐 매장을 나섰고,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제은은 분이 풀리지 않았다.‘뭐야...? 나를 무시한다고?’‘오빠한테 혼나고도 정신 못 차렸나 보네. 점점 도가 지나치잖아.’제은은 이를 악물었다.‘진짜 제정신이면, 내 눈치라도 좀 보이게 행동해야지.’‘오빠의 진짜 마음을 되돌리고 싶다면...’‘당연히 나한테 잘 보이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 아냐?’그 모습을 지켜보던 영미도 약간 당황했다.‘오... 생각보다 성격 세네? 제은이를 보고도 저렇게 무표정으로 지나가다니.’영미는 조심스럽
Read more

제43화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서 대표님의 즉석 지시였겠지.’세진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말투는 여유로웠다.“서 대표님께서 직접 부탁하신 일이니까요. 외근 마무리되면 굳이 회사에 다시 들어올 필요는 없다고”남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묻지 않았다.한편, 이람은 전화를 끊고 나서 잠시 고민했다.‘외근이라고 해도, 이렇게 대놓고 빈 시간이 생긴 건 처음인데...’요 며칠 감기 기운을 약으로 겨우 눌러놓은 상황이었다.‘쉴 때 확실히 쉬어줘야지. 면역력 떨어지면 감기 기운이 다시 도지는 건 시간문제야.’그리고 쉬는 김에 조금 눈을 붙이기로 하고 현관 쪽으로 향하려던 순간, 무심코 시선이 닿은 쓰레기통.이람의 발이 멈췄다.그 안에, 익숙한 바바리코트가 구겨진 채 버려져 있었다.어젯밤, 이람이 운전할 때 하준이 어깨에 걸쳤던 외투였다.살짝 주름이 간 걸 제외하면 상태는 거의 새것 같았다.‘단 한 번 입고 바로 버린 거야?’이람은 코트의 브랜드를 기억하고 있었다.백화점에서도 가장 비싼 쪽에 걸려 있던 명품 브랜드.이런 옷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다니...‘역시, 서하준은 심각한 결벽증이야.’그 순간, 하준의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이 떠올랐다.겉으로만 시크한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속부터 꽁꽁 얼어 있는 사람.누구의 관심도 필요 없고, 어떤 평가도 아랑곳하지 않는다.‘정말 얼음 같아. 가까이 다가가면 다칠 수밖에 없어.’그녀는 다시 한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들어오기 전에 신발 커버 챙긴 거... 진짜 잘했어.’...그 시각, 제은은 친구들과 하루 종일 쇼핑하고 저녁까지 배불리 먹은 뒤, 스포츠카를 몰고 오빠 제헌을 찾아왔다.그리고 오늘은 꼭 불을 붙이고야 말겠다는 듯, 분노와 작심이 눈에 서려 있었다.‘조이람 그 여자... 오빠한테 혼 좀 나 봐야 정신 차리지.’집 앞에 차를 세우고 문을 열려던 그때, 제은의 시선이 멈췄다.저 멀리, 메인 건물 방향으로 제헌과 유리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오빠가 유리
Read more

제44화

핸드폰 알림음이 계속해서 울렸다.이람은 결국 핸드폰을 들어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제은이 또 발작 중이었다.[지금 당장 하나만 시켜볼게요. ‘공주님, 제가 잘못했어요.’ 이 문장은 절대 문자로 보내면 안 되고, 음성 메시지로 10번 연속 보내요. 우선 지금 내 기분부터 풀고 나서 얘기해요.]제은은 종종 ‘어디까지 참나 보자’라는 식으로 행동했다. 말은 장난처럼 했지만, 사실상 가스라이팅이었다.그 말을 따라 하면 기분이 풀릴 리가 없고, 오히려 더 기세등등해져서 점점 선을 넘게 될 것이다.그건 이람도 잘 알고 있었다.이람은 채팅창을 위로 스크롤 했다.그러다 ‘선물’이라는 말과 함께 도착한 동영상을 확인했다.영상 배경은 이람이 3년간 살아온 집.익숙하다 못해, 눈을 감고도 동선이 그려질 정도였다.영상 속 사람도 너무나 익숙했다.아마도 전날 밤의 일 때문이었을까...제헌의 차디찬 태도를 다시금 눈앞에서 마주한 이후, 이람의 감정 기준선이 어딘가 크게 올라가 버린 느낌이었다.‘이젠 정말 아무렇지 않네.’제헌이 무슨 짓을 해도, 이람은 더 이상 마음이 크게 흔들리지 않고, 확신할 수 있었다.자신이 지금, 정말로 불행했던 과거에서 벗어나고 있다는걸.상처가 아물어가는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앞으로 막상 제헌을 눈으로 보면 아무런 감정이 없진 않겠지만, 더 이상 그것이 다 고통이나 미련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이젠 분노, 혐오 같은 ‘정상적인 감정’도 함께 섞일 테니까.즉, 아직 남은 사랑이 만든 감정이지만, 이제 제헌을 그냥 ‘평범한 남’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이람은 영상 재생을 끝내고, 아무런 표정 없이 꺼버렸다.그리고 곧장 하나 떠오른 의문.‘내가 분명히 강제은을 차단했을 텐데.’이람은 핸드폰을 조작해 보았다.흠집처럼 남은 흔적이 하나, 둘 보였다.‘해킹이네. 근데 허술해.’자신이었다면 절대 이런 식으로 흔적을 남기진 않았을 것이다.그 정도의 실력은 쉽게 감별할 수 있었다.이람은 가만히 생각한 뒤, 몇 줄의
Read more

제45화

제은은 허탈하게 웃었다.“조이람이라고? 걔는 그냥 밥이나 하는 애야. 집안일하면서 월급 쥐꼬리만큼 받고 감지덕지하는 싸구려 가사도우미라고!”그렇게 말은 했지만, 영미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조이람이 단순한 가사도우미일 리 없어.’ ‘제은이 얕봐서 그렇지, 분명 뭔가 숨기고 있어.’“그럼 네가 생각해 봐. 누가 너한테 이렇게까지 할 만한 사람 있어?”제은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영미가 눈치를 채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왜? 진짜 있는 거야?”제은은 입꼬리를 비틀며 냉소적으로 말했다.“원한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누군지 고르기 힘들거든.”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제은은 성격상 절대 참는 걸 몰랐고, 본인 기준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바로 뒤통수부터 갈겼다.얽힌 사람만 수백 명, 미운 사람만 해도 셀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늘 그랬다. 사람들이 자기를 싫어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쟤네가 날 싫어한다고 내가 눈길 한 번 줄 것 같아? 우습긴.’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직접적인 피해가 있었고, 핸드폰 속 정보는 언젠가 새어 나갈 것이 뻔했다.결국 그 조각만 쥐고 있으면, 범인을 찾는 건 시간문제였다.‘찾기만 해봐... 죽여버릴 거니까.’제은은 그렇게 이를 악물고 맹세했다.이대로 끝날 리 없었다.잔을 들이켜고 나서, 그녀는 갑자기 영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근데 너, 눈은 왜 이렇게 나빠? 조이람이 해커처럼 보여? 걔한테 그런 아우라나 느낌이 조금이라도 있어? 너 지금 내 올해 최고의 농담상 수상 후보야.”그 말에 영미는 속이 철렁 내려앉았다.절친 사이에서도 건드려선 안 되는 선이 있는데, 지금이 그 순간이었다.“미안, 내 잘못이야. 벌로 석 잔 마실게.”영미는 잔을 들이켰고, 제은도 함께 한 잔 비웠다.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이람이 영상은 봤을 테고, 마음 한구석은 찢겼을 것이다.그걸로 오늘의 목적은 달성됐다.‘기분 더럽진 않네. 괜찮아, 이 정도면.’이람은 영상만 확인하고 바로 지워버렸다
Read more

제46화

사진 속 대세 영화배우 A는 흠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에, 눈빛은 깊고 분위기는 맑았다. 정말이지, 놀랄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다.이람은 솔직하게 말했다.“서 대표님이요.”지영이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세상에! 그럼 우리 앞으로 배우보다 잘생긴 사람이랑 매일 같이 출근하고 일하는 거예요? 우리 회사 복지 죽여주네, 이거 너무 행복한 거 아니냐고요?!”‘서하준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알면, 그런 말 못 하지.’이람은 속으로 중얼거렸다.출근 시간은 이미 지났지만, 하준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그때, 남진이 이람을 불렀다.“이람 씨, 잠깐 실장실로 올래요?”남진은 책상 위에 놓인 문서를 가리키며 말했다.“이번 주 토요일 자선 만찬에 서 대표님이 참석하실 거예요. 이람 씨가 동행하게 될 거고요.”“이건 초청자 명단이에요. 대표님 옆에 붙어 있다가 인사하러 오는 사람 있으면, 바로바로 정보 전달해 드려야 해요.”“이번 자리가 서 대표님이 공식적으로 대외 활동에 처음 나서는 자리예요. 작은 실수 하나도 있어선 안 됩니다. 대표님이 곤란하거나 민망한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야 해요. 알겠죠?”어제 하준이 참석한 자리는 기술 분야 인사들만 모인 비교적 조용한 술자리였고, 공식적으로 SY그룹 대표이사 자격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도 아니었다.부대표인 부연훈과 함께 간 자리라,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을 뿐. 그래서 참석자도 20명 남짓이었다.하지만 이번 자선 만찬은 다르다.대표이사라는 신분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자리다.기술 스타트업 대표부터 유명 인사, 예술가까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일 예정이었다.“실장님, 그렇게 중요한 자리에 왜 제가 가는 거예요?”이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남진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질문하지 마요. 업무 지시예요. 상사가 가라고 하면 이람 씨는 가는 겁니다.”이람은 남진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결단력 있고 신중하며, 한번 내린 결정은 뒤집지 않는 사람.그런 성격이 아니었다면 SY그룹
Read more

제47화

백화점에서도 보기 어려운 시계였다.바쉐론 콘스탄틴도 아니고, 오데마 피게도 아니다.파텍 필립.명품 시계의 정점, 수억에서 수십억을 호가하는 가격은 일반인에겐 그저 구경거리일 뿐이었다.고급 브랜드의 맞춤 드레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억이면 ‘저렴한 편’이고, 수십억짜리는 그저 ‘중간’ 수준.이람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심혜영이 유리에게 이렇게까지 후한 사람이라는 걸.이람이 심혜영을 마지막으로 만났던 건 1년이 훌쩍 넘은 일이었다.심혜영은 젊은 시절 연예계에서 배우로 활동했다. 스물다섯에는 주연급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커리어에 한참 물이 오르던 시점에 갑작스레 은퇴했다.그리고 결혼.딸 하나 낳고 십 년을 살다가 이혼했다.그 몇 년 뒤, 자신보다 열 살 많은 하태국과 재혼. 하태국은 바로 하유리의 아버지였다.심혜영이 직접 낳은 딸 하나는 현재 고등학생이고, 동시에 남편 하태국의 아이 셋의 새어머니다.하태국은 인문계열을 전공한 교수로, 연구에는 몰두했지만, 실생활엔 어딘가 서툴렀다.이람의 외삼촌이 해외로 이주한 뒤, 심혜영이 가문에서 운영하던 그룹의 실질적인 후계자가 됐다.그 뒤엔 그룹의 자원을 통째로 하씨 집안과 공유했고,지금의 HT그룹이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전부 그녀 덕분이었다.현재 HT그룹의 경영을 총괄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심혜영이다.그녀는 이람 외할머니의 세 자녀 중 둘째.가장 비상식적이고, 가장 독특한 인생을 산 딸.심혜영은 한번 마음먹으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누가 뭐라 해도, 그녀는 자기 방식대로 해낸다.많은 사람이 그녀의 결혼을 손해라고 여겼지만, 정작 본인은 그 삶을 즐기고 있었다.이람은 심혜영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다.하지만 굳이 이해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이람은 타인을 통제하고 싶은 욕망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심혜영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건 그녀의 인생이고, 어른이라면 각자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게다가, 하태국과 결혼한 뒤로 심혜영은 제법 잘살고 있는 것처럼
Read more

제48화

오랜만에 조카를 마주한 심혜영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언제 왔어?”이람이 조용히 대답했다.“이모가 유리 생일 선물 챙긴다고 얘기할 때요. 그때 이미 도착했어요.”심혜영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이람은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시선을 똑바로 고정한 채 말했다.그 시선은 팽팽하게 당겨진 실처럼 날카롭고 단단했다.“저... 지난달에 생일이었는데, 이모는 기억해요?”심혜영은 이람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 보다가, 그제야 아주 잠깐, 시선을 피했다.“이모가 좀 많이 바빴어.”이람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뼈가 있었다.“마음속으로 그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아무리 바빠도 기억하죠. 저는 기억하거든요. 이모 생일...”심혜영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온기가 사라졌다.“이람아, 너 지금 그 말... 이모한테 섭섭하단 거야?”이람은 얼어붙은 듯한 심혜영의 표정을 바라보며,순간 깨달았다.‘질투하고 있잖아, 나...’제헌이 유리와 사귈 때도 질투하지 않았다.그저 담담히 받아들였고, 결혼도 이혼도 조용히 정리했다.하지만 심혜영은 다르다. 가까운 어른이고, 어머니 심혜주와 너무도 닮은 사람이니까.‘이모한테서... 조금이라도 애정을 받고 싶었던 거지.’‘조금 질투한 거면... 나도 사람인데, 그 정도는 괜찮잖아.’생일 얘기만 꺼냈을 뿐이다.제헌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았는데, 심혜영은 벌써 불쾌해했다.이람은 주먹을 살짝 움켜쥐었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섭섭하긴 한데... 제가 이모한테 그런 감정 가질 자격은 없죠.”말이 끝나자, 눈물이 이유도 없이 터져 나왔다.이람은 감정적으로는 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속이 아리고, 가슴이 답답했다.‘이상하네. 1년 만에 이모를 봐서 그런가?’‘이모 얼굴을 보니까 또 엄마 생각나고, 거기다 강제헌까지...’인생이 가장 어두운 시점에서, 자신은 그토록 의지하고 싶었던 이모가 다른 사람에게 더 마음을 쓰는 걸 보면... 조금 흔들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Read more

제49화

이람의 손끝이 서늘하게 식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뺐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심혜영은 이람의 경계심 어린 반응을 바라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이람아, 이모가 이런 말 하면 상처받을까 봐 걱정되지만... 사실은, 제헌이랑 유리는 꽤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어. 둘이 원래 잘 어울렸던 거야. 네가... 끼어든 거고.”‘참 다행이네. 강제은이 말해줬잖아. 하유리랑 강제헌, 애초에 사귄 적 없었다고.’‘아니었으면... 나, 또 이모 말에 휘둘렸을지도 몰라.’하지만 이람은 심혜영의 말에 더는 깊이 빠지지 않았다. 그보다 궁금했던 건, 심혜영의 태도가 언제부터, 왜 그렇게 달라졌는지였다.그건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을 붙잡고 있던 의문이었다.짐작은 했지만, 애써 부인해왔던 것도 사실이다.하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이모, 이모가 날 멀리한 건... 역시 하유리 때문이었네요.”심혜영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너... 이모를 뭐로 보는 거야?”심혜영은 언제나 그렇다. 불편한 진실엔 눈감으려 하고, 다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게 서로를 위한 거라고 믿는다.하지만 이람은 이제, 그런 식으로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상대가 가족이라 해도, 더는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차가워진 분위기 속에서도, 이람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단단하게 훈육 받아온 탓인지, 지금 심혜영의 싸늘한 얼굴도 낯설지 않았다.‘눈 돌리고 싶지 않아.’‘이모가 나를 어떻게 보든, 오늘만큼은 진심을 말해야 해’“이모, 이모가 묻고 싶은 거 알아요. 이번에... 정말 이혼할 거냐고.”이람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단단했다.“네, 전 진짜로 이혼할 거예요.”심혜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헌에 대한 이람의 감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단호한 모습은 처음이었다.‘설마... 진심인 거야?’하지만 유리의 말이 떠올랐다. 이람은 요즘도 제헌 앞에 자꾸 나타났고, 마치 우연인 척 행세하며 확인하듯 집착했다고 했다.이람은
Read more

제50화

이람의 가슴 깊은 곳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분노가 터져 나왔다.순간적으로 심혜영의 손목을 반사적으로 잡아 쥐었다.힘이 들어간 손끝에, 이람 자신도 놀랄 만큼 감정이 실려 있었다.“이모, 이모는 정말 하유리를... 많이 아끼시는 거군요.”이람의 눈빛 속에 번진 화염에, 심혜영이 잠시 말을 잃었다.이람은 언제나 똑똑하고, 얌전하고, 남의 말 잘 듣는 아이였다. 감정을 이렇게 격하게 드러내는 건... 심혜영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이모가 하유리를 아끼고, 사랑하고, 신경 써주는 거 다 괜찮아요. 근데... 제발, 그걸 저한테까지 보여주진 마세요. 네?”뒷말은 거의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짚는 듯했다.이람이 이렇게까지 정중하고 또렷하게 부탁하는 건, 사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이야기였다.그런데도, 심혜영은 잠깐 입술을 달싹이더니 말했다.“그건...”한마디로 끝맺지 못한 채, 애매하게 맴도는 말끝.대답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이람은 그 순간 모든 기운이 빠지는 걸 느꼈다.화가 났던 감정은 허공에 주먹을 휘두른 듯, 무언가에 순간 꺾여버렸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심혜영을 몇 초간 바라보다가,그대로 돌아섰다.말없이,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심혜영은 오늘 오랜만에 조카를 보러 온 길이었다.그냥 얼굴도 보고, 밥도 한 끼 같이 먹고,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기를 바랐는데...떠나는 이람의 뒷모습을 보며, 심혜영도 ‘붙잡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유리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대화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심혜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게다가 이람의 편을 들기엔, 유리의 시선이 따가웠다.자신이 이람을 더 챙기면, 유리가 서운해할 게 뻔했다.결국, 누구의 편도 들 수 없는 상황.그게 심혜영이었다....차에 올라탄 이람은, 시동도 걸지 않은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십 분쯤 지났을까... 방금 전의 격한 감정은 거짓말처럼 가라앉아 있었다.심혜영의 반응 하나로, 온몸에 불붙
Read more
PREV
1
...
34567
...
10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