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os los capítulos de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apítulo 1541 - Capítulo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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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1화

고하슬도 손수 만든 카드를 고이한에게 내밀었다.고이한은 딸이 삐뚤빼뚤 눌러쓴 글씨를 한참이나 들여다봤다.[아빠, 생일 축하해요. 저는 아빠를 세상에서 제일 오래오래 사랑할 거예요!]글을 읽어 내려가던 고이한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졌다.작은 카드 한 장을 손에 쥐고 있자니 딸이 어느새 이렇게 훌쩍 자랐다는 사실이 새삼 마음에 와닿았다.언제까지나 품 안에서 울고 보채기만 할 줄 알았던 아이가 이제는 제 마음을 글로 담아 전할 만큼 자란 것이다.고이한은 손을 뻗어 딸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내렸다.“고맙다, 우리 딸.”9시가 넘자 소예지도 슬슬 돌아갈 채비를 했다.그날따라 마당이 유난히 예쁘게 꾸며져 있어서인지 고하슬은 좀처럼 집에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소예지는 아이를 조금 더 놀게 두고 혼자 가방을 챙겨 먼저 밖으로 나왔다.대문을 나서자 뒤에서 발소리가 따라왔다. 돌아보니 고이한이 선물 봉투를 든 채 따라오고 있었다.“차 좀 태워줄 수 있어?”고이한이 웃으며 물은 뒤 한마디 덧붙였다.“오늘 술을 좀 마셔서.”소예지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타.”고이한은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럽게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차는 고택을 벗어나 큰길로 접어들었다. 구시가지답게 도로가 제법 막혔지만 소예지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차를 몰았다.“그 펜 말인데.”고이한이 불쑥 다시 펜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은근히 신경 쓰고 있다는 기색이 목소리에 고스란히 묻어났다.“진짜 아무 생각 없이 고른 거야?”소예지가 고개를 돌려 고이한을 한 번 바라봤다.“그럼 뭐겠어.”“난...”고이한이 무언가 더 말하려 하자 소예지가 먼저 말을 잘랐다.“별 뜻 없어. 하준 씨한테도 줬고 현욱 씨한테도 줬으니까.”고이한의 입가에 남아 있던 웃음이 그대로 굳었다. 잠시 말이 없던 고이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다 똑같은 거였어?”“응.”소예지의 대답은 짧고 담담했다.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고이한이 손에 든 펜을 내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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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2화

“강 선배가 이번에 목숨까지 걸고 나를 구해줬어. 그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직 모르겠지만 당신이 말하는 그런 식은 절대 아니야.”그 말을 듣자 고이한의 굳어 있던 눈빛이 조금씩 누그러졌다.“알겠어.”그제야 자신이 혼자 너무 멀리까지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마음이 조급해진 나머지 소예지를 몰아세우고 있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자각했다.엘리베이터에 오른 소예지가 28층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고이한은 27층을 누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소예지가 대신 손을 뻗어 버튼을 눌러줬다.“집에 수면제 남았어? 한 판만 더 줘.”뜬금없는 말에 소예지가 놀란 눈으로 고이한을 바라봤다.“지난번에 준 거 벌써 다 먹었어?”고이한의 눈가에 옅은 웃음기가 번졌다.“왜, 안 돼?”“수면제 그만 먹고 병원부터 가.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몰라서 그래?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소예지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아무래도 이 남자는 수면제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고이한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지난번에 받은 거, 어디 뒀는지 모르겠어서.”소예지가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바라봤다.“내 집에도 이제 없어. 김 비서한테 보내달라고 해.”말을 마치고 나서야 소예지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애초에 수면제가 필요해서 꺼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고이한은 그저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자 예상대로 웃음기 어린 짙은 눈동자와 마주쳤다.“역시 소 박사님, 나 꽤 걱정해 주네.”낮은 웃음과 함께 흘러나온 말에 소예지는 시선을 돌려 층수 표시만 바라봤다.“진짜 할 일도 없다.”고이한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안 주면 오늘 밤도... 아마 또 못 잘 텐데.”말끝에 은근히 다른 뜻이 묻어 있었다. 소예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단번에 알아차렸다.마침 엘리베이터가 ‘띵’ 소리를 내며 27층에 멈췄다. 문이 열리자 소예지는 턱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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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3화

그날 밤 고이한은 취할 만큼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니었다. 기억을 더듬어봐도 레드 와인 두 잔이 전부였다.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했든 소예지는 지금 그 물음에 답하고 싶지 않았다.소예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말했다.“늦었어. 먼저 들어가.”소예지가 문을 열자 젤리가 냉큼 뛰쳐나와 두 사람의 발치 사이를 오가며 신나게 뛰어다녔다.고이한은 손을 뻗어 젤리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소예지를 바라봤다.“젤리는 내가 데리고 내려갈게.”소예지는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젤리가 마치 알아듣기라도 한 듯 꼬리를 흔들며 고이한의 다리 주위를 맴돌자 결국 짧게 대답했다.“응.”다음 날 아침, 소예지는 강준석을 보러 병원에 들렀다.상처는 예상보다 빠르게 아물고 있었다. 정신도 평소와 다름없이 또렷했고 비서는 아예 업무 자료까지 병실로 가져다 놓은 상태였다.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강준석이 일에 얼마나 매달리는 사람인지 소예지는 잘 알고 있었다. 완벽주의 성향이 강해 억지로 일을 못 하게 하면 오히려 밀린 업무를 걱정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할 게 뻔했다.소예지는 과일을 씻어 건네고 한동안 업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자 강준석은 오히려 자기 걱정은 그만하고 돌아가서 일을 보라며 재촉했다. 자신 때문에 소예지의 일정이 미뤄지는 걸 원치 않는 듯했다.오후에는 연구실로 돌아왔다.현미경으로 세포 배양 접시를 들여다보던 소예지의 표정이 문득 달라졌다. 숨을 죽인 채 초점을 세밀하게 맞추고 표시해둔 부분을 하나씩 차례로 확인했다.“찾았다. 찾았어.”소예지의 들뜬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옆에 있던 이지원이 손에 든 펜을 내려놓고 급히 다가왔다.“소예지, 찾은 거야?”소예지가 자리를 비켜주자 이지원은 곧장 현미경 앞으로 다가가 들여다봤다. 몇 초 뒤, 이지원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낮게 외쳤다.“딱 네가 예상한 대로야. 억제제가 진행을 늦추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회복까지 촉진하고 있어.”“그게 다가 아니야.”소예지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이 메커니즘은 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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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4화

고하슬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한쪽으로 자리를 옮겼다.고이한이 물 한 잔을 따라 건넸다. 마침 목이 말랐던 소예지는 두말없이 받아 들었다.“고마워.”고이한은 잠시 소예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소예지, 연구라는 게 마음먹는다고 쉽게 놓을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 하슬이랑 시간을 많이 못 보낸다고 너무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지금은 하슬이가 다 이해하지 못해도 크면서 조금씩 알게 될 거야. 자기 엄마가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는지.”소예지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자신이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던 고민을 고이한이 알아채고 있을 줄은 몰랐다.생각지도 못한 위로여서인지 그 말은 유난히 마음 깊이 와닿았다.“언젠가는 하슬이도 당신을 자랑스러워할 거야. 지금 당신이 하는 선택도 결국 하슬이한테 좋은 모습으로 남을 거고.”차분한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다.늘 장난스럽게 굴거나 고집을 부리던 모습과 달리 지금만큼은 진심으로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소예지는 그동안 연구자와 엄마라는 두 역할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살아왔다. 연구에 몰두할수록 딸과 함께하는 시간은 줄어들었고 그럴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는 늘 미안함이 남았다.거실에서 놀고 있는 고하슬을 바라보던 소예지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잠시 아이를 바라보던 소예지는 다시 고이한에게 시선을 돌렸다.“고마워.”오늘만 벌써 두 번째였다.하지만 이번에 건넨 고맙다는 말에는 조금 더 깊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자신의 일을 이해하고 응원해 주는 것도 고마웠지만 무엇보다 고하슬을 자연스럽게 돌보며 아빠로서 제 몫을 다해주는 모습이 고마웠다.“도와줄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해.”고이한의 말에 소예지는 이번에는 사양하지 않았다.“응.”정말 고씨 과학기술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기꺼이 부탁할 생각이었다.“이제 마음 놓고 일해. 하슬이 학교 문제는 내가 맡을게. 인테리어도 사람 시켜서 끝까지 챙길 테니까 9월 전에는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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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5화

고이한이 운전대를 잡고 소예지가 옆에서 길을 알려줬다.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식당 앞에 도착했다.한낮의 햇볕이 유난히 따가웠다. 차에서 내린 소예지가 손을 들어 이마를 가리려는데 고이한이 먼저 손을 뻗어 머리 위로 그늘을 만들어줬다.소예지가 고개를 들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고이한은 웃고 있었고 등 뒤로 쏟아지는 햇살 때문인지 오늘따라 얼굴이 유난히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가자.”두 사람은 마당이 딸린 고급 한정식 식당으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이라 손님이 제법 많았지만 다행히 빈 테이블이 두 곳 남아 있었다.그중 한 테이블에는 낯익은 연구실 동료들이 앉아 있었다. 왁자지껄하던 목소리는 두 사람이 들어서자 눈에 띄게 잦아들었다.소예지는 여기저기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워낙 눈에 띄는 고이한과 함께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조금 전까지 큰 소리로 이야기하던 동료들은 곧바로 목소리를 낮추고 저들끼리 소곤거리기 시작했다.소예지가 메뉴를 고른 뒤, 고이한은 요리를 두 가지 더 주문하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찻잔에 차를 따라줬다.마침 소예지는 휴대폰으로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연구실 동료들의 속삭임이 더욱 활기를 띠었다.소예지는 이지원이 보내온 실험 데이터를 확인하느라 주변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고이한이 찻잔을 손 가까이 밀어주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고마워.”짧게 인사한 소예지는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려 답장을 보냈다.고이한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데이터를 확인할 때마다 살짝 찌푸려지는 소예지의 미간을 가만히 바라봤다.업무와 관련된 답장을 모두 마친 소예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여전히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게 맞은편의 고이한에게 물었다.“오늘 하슬이는 어땠어?”“엄청 좋아했어. 코치가 재능도 있고 겁도 없대.”딸 이야기가 나오자 소예지의 표정도 자연스럽게 부드러워졌다.“그렇긴 해.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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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6화

“딱히 못 할 얘기는 아니야. 이유도 복잡하지 않고.”소예지는 다시 고이한을 바라봤다.고이한이 상체를 조금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깊은 눈으로 똑바로 바라보며 한마디씩 또렷하게 말했다.“당신 때문이야.”소예지는 멈칫했다. 찻잔을 쥔 손가락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지만 그렇다고 정말 자신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이한도 자기 말이 부담을 줬다는 걸 알아챈 듯 가볍게 웃었다.“그래도 당신 탓은 아니야. 그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데 제대로 쉬지도 못해서 머리가 센 거니까.”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당신이 납치됐던 날, 다행히 임 대위가 제때 구해냈지. 당신 대신 칼까지 맞으면서 지켜줬고. 당신은 눈물을 흘리면서 나한테 현욱 씨를 살려달라고 했어. 내가 당신을 안아 차에 태우고 현욱 씨 곁으로 데려다줬을 때, 나는...”테이블 위에 놓인 손이 어느새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날 밤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속 가장 여린 곳이 다시 건드려지는 듯했다.잠시 말을 멈췄던 고이한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목소리가 낮고 잠겨 있었다.“그땐 당신이 결국 임 대위를 선택할 줄 알았어.”소예지의 숨이 잠시 멎었다.“그날 밤 내가 당신을 임 대위 곁으로 데려다줬을 때, 임 대위는 온몸이 피투성이였고 당신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 사람만 보고 있었어. 그래서 그런 생각까지 했어. 당신 대신 칼을 맞은 게 나였다면, 나도 그렇게 걱정해 줬을까? 당신이 현욱 씨 곁을 지킨 것처럼, 내 곁도 지켜줬을까?”소예지는 그날 밤 임현욱이 다친 모습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아 머릿속이 새하얘졌었다. 그날의 기억이라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임현욱의 모습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그래서 고이한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었다. 그가 차에서 내려 자신을 안아 태우고 문을 닫아줬던 것, 그 정도만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소예지는 목이 잠기는 듯했지만 차분하게 말했다.“그런 일은 다시 없었으면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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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7화

소예지는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요즘은 연구실 일에 온통 정신이 팔려서 다른 걸 챙길 여유가 없었다.“나...”입을 뗐지만 딱히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고이한이 오히려 먼저 봐주듯 말했다.“됐어. 내 머리 보기 싫다고만 안 하면 굳이 치료 안 해도 상관없어.”남들 시선 따윈 아무래도 좋지만 소예지의 생각만큼은 신경 쓰인다는 뜻이었다.소예지가 찻잔을 들며 피식 웃었다.“건강에 문제만 없다면 굳이 치료할 필요가 없기는 해.”고이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여기서 더 욕심내면 안 된다는 걸 아는 얼굴이었다.다시 젓가락을 들며 그가 말을 이었다.“별장은 기본 공사 거의 끝났어. 가구랑 소품 배치 쪽 설계안도 디자이너가 몇 개 보내왔고. 오늘 저녁에 시간 나면 같이 골라보자.”소예지가 잠깐 생각하다 답했다.“일단 나한테 보내줘. 짬 날 때 먼저 볼게.”“응. 하슬이 방은 하슬이한테도 물어볼 거야.”“좋아.”소예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딸도 자기 방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끼어 있다는 기분을 느꼈으면 했다.두 사람은 한동안 인테리어 얘기를 주고받으며 식사를 마쳤다.고이한은 소예지를 연구실 입구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갔다.돌아오자마자 강준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변호사가 안채린의 사건을 정리해 줬다는 내용이었다.“안채린 쪽은 결론 났어. 살인미수로 갈 거고 사안이 사안이라 대략 6년 정도 나올 거라고 변호사가 그러더라.”소예지는 통유리창 앞에 선 채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예상 밖의 결과는 아니었다. 안채린이 벌인 일이었고 그 대가도 결국 안채린 몫이었다.그런데도 마음 한쪽이 개운치가 않았다.“응, 알겠어.”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 그런지 아직 좀 안타깝긴 해.”강준석이 말끝을 흐리다 이내 목소리를 다잡았다.“그렇다고 봐줄 순 없는 거지. 동정받을 자격도 없고.”받아 마땅한 벌이었다.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안채린 자신의 선택이었다.“강 선배, 나 때문에 이번 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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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8화

“너 여기서도 일 잘하고 인정받고 있잖아. 이렇게 고향으로 내려가면 너무 아깝지 않아? 나중에 다시 일하고 싶어도 쉽지 않을 텐데.”옆에 있던 동료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나라고 모르겠어? 그런데 요즘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 왜 여자는 가정이랑 일 중에서 늘 하나를 포기해야 할까. 결국 가장 크게 손해 보는 건 여자 경력이잖아.”“내 말이. 왜 여자만 가정이랑 아이 때문에 일을 포기해야 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남자가 회사 그만두고 애 보면 안 되는 것도 아니잖아. 우리 남편이 그렇게 해준다면 나야 좋지. 나도 지금 하는 일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거든.”“여자로 살면서 가정이랑 일 둘 다 놓치지 않는 게... 정말 쉽지 않다.”소예지는 구석에 선 채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돌이켜보면 요즘 고이한이 정말 많은 일을 대신 해주고 있었다. 특히 고하슬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 그랬다.하지만 실험에 매달려 지내느라 그동안 고이한이 얼마나 많은 몫을 감당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아빠니까 이 정도는 당연하다고 여기며 별생각 없이 넘겼던 것 같았다.우연히 들은 두 사람의 대화가 그런 소예지의 생각을 바꿔놓았다.고이한이 해온 일은 단순히 아빠로서 해야 할 몫을 다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소예지를 배려하고 기꺼이 짐을 나눠 지려는 마음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됐다.‘고이한이 곁에서 하슬이를 챙겨주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마음 놓고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을까.’어쩌면 아이와 일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포기해야 했을지도 모른다.탕비실로 다시 들어갔을 때는 두 동료 모두 이미 자리를 뜬 뒤였다. 소예지는 커피를 받아 들고 연구실로 돌아갔다.밤 9시가 넘어 집에 들어서자 양희순이 미리 끓여둔 전복죽이 준비되어 있었다. 고이한도 아직 돌아가지 않고 고하슬을 돌보고 있었다.양희순은 그런 모습을 보며 속으로 흐뭇해했다.오늘 저녁도 두 사람 몫까지 넉넉하게 준비해 둔 터였다.나중에 별장으로 옮기면 이렇게 세 식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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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9화

고요한 서재 안에서 소예지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고이한이 아직 물러나지 않았다는 것도 느껴졌다.가까이서 닿는 숨결은 좀처럼 멀어지지 않았고 둘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고이한이 몸을 숙인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눈에는 아직 안약이 남아 있어 억지로 뜨지 않았다.그때 눈가에 남아 있던 안약이 눈꼬리를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꼭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아 괜히 민망해졌다.따뜻한 손끝이 눈가를 조심스럽게 훑으며 흘러내린 안약을 닦아냈다. 소예지의 몸이 저도 모르게 살짝 굳었다.“휴지 좀 가져다줘.”직접 닦으려고 말했지만 고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소예지가 더는 못 참고 눈을 뜨려던 찰나, 아주 부드러운 무언가가 눈가에 살며시 닿았다.손가락과는 전혀 다른 감촉이었다.너무나 가볍고 짧게 스쳐 지나갔는데도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느껴졌다. 깃털이 스치듯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따뜻한 숨결이 가까이서 와닿았다.소예지는 숨을 멈췄다. 온 신경이 방금 무언가 닿았던 눈가로 쏠렸다.“고이한, 지금 뭐 하는 거야?”묻는 동시에 눈을 떴다.안약에 젖어 촉촉해진 눈은 마치 눈물을 머금은 듯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는 예상치 못한 모습이 있었다.몸을 숙인 고이한이 코앞에서 소예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이한 역시 그대로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두 사람의 거리는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웠고 고이한의 호흡은 평소보다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서재 안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봤고 가까이서 들려오는 숨소리만 희미하게 이어졌다.“눈 감아. 아직 약이 덜 스며들었어.”고이한이 낮게 말했다. 평소보다 조금 잠긴 목소리였다.“나 내려갈게.”그 말을 남긴 고이한은 더 머물지 않고 서둘러 서재를 나갔다.소예지는 여전히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있었다. 다시 눈을 감았지만 방금 눈가에 닿았던 부드러운 감촉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분명 입맞춤이었다.소예지는 미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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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50화

너무 충동적이었다.천천히,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는데 눈을 감은 소예지의 눈가에 투명한 안약이 맺힌 걸 보는 순간 그 다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그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었고 어떻게든 닿고 싶었다.후회는 늘 한발 늦게 찾아왔다.먼저 소예지의 마음부터 살폈어야 했다. 아직도 자신을 밀어내고 있는 건 아닌지,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거부감이 남아 있는 건 아닌지 확인했어야 했다.이혼 전, 소예지의 눈에는 혐오가 담겨 있었다. 이혼 후에는 원망이 남았고 1년쯤 지나자 그마저도 사라졌다.그 뒤로는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눈빛뿐이었다. 고이한에게는 미움보다 그게 더 무서웠다. 차라리 미워해 줬으면 싶을 만큼 자신이 소예지의 삶에서 완전히 밀려난 것 같았다.그러다 그날 밤 오해를 풀고 난 뒤부터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소예지가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일도 생겼고 함께 밥을 먹는 것도 더는 피하지 않았다. 생일도 함께 보내줬고 아주 조금씩 자신에게 기대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그 관계를 여기까지 되돌리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고이한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 그 모든 걸 입맞춤 한 번으로 망쳐버린 건 아닐까.’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고이한은 손끝으로 그곳을 꾹 누르다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안약 효과 괜찮아?]짧게 메시지를 보냈다.소예지는 고하슬을 재운 뒤였다. 아이는 엎드린 채 그림책을 뒤적이고 있었고 소예지는 씻을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그때 휴대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고이한이었다.소예지는 눈을 몇 번 깜빡여봤다. 확실히 전보다 훨씬 편해져 있었다.[효과 좋아. 고마워.]간단히 답장을 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고이한은 짧은 답장을 몇 번이고 되읽었다.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에 화가 났거나 방금 일을 불쾌하게 여기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담담한 반응이었다.어쩌면 자신이 한 행동을 아주 싫어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불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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