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다시 너의 세계로: Bab 21 - Bab 30

100 Bab

제21화

그 사람은 이윤아였다. 고등학교 시절 반에서 가장 예쁜 여학생이라 불리던 아이.역시나 정하준 주변엔 언제나 그를 쫓아다니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하준아, 이거 내가 싸 온 점심이야. 우리 집이 프랜차이즈 하는데, 셰프가 만든 거거든. 오늘 바빠서 밥도 못 먹었지?”정하준이 컴퓨터 화면만 보고 대꾸하지 않자 이윤아는 한 발 더 다가섰다.“지난번에 우리 외삼촌 진료해 줘서 고마워. 지금 많이 좋아지셨어.”“이윤아, 그러니까 오늘 내 진료 예약한 게 병 보러 온 건 아니라는 거지?”남자의 목소리는 싸늘했고 그는 고개를 들며 검은 눈동자에 차가운 빛을 띠었다.“다음에 또 이렇게 진료 예약 잡아서 진짜 환자 시간 뺏으면, 병원에서 3개월 블랙리스트야.”“어... 나, 나는...”이윤아는 정하준이 이 정도로 동창 체면을 봐주지 않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냥... 진짜 고마워서 도시락 챙겨온 건데.”정하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시계를 한번 보았다. 이윤아는 오늘 오전 마지막 환자였고 이제는 퇴근 시간이었다.“이윤아, 난 너한테 그런 감정 없어. 앞으로 여기 와서 시간 낭비하지 마.”정하준은 칼같이 선을 그었다. 그의 눈빛은 이윤아를 보는 감정이 마치 길 가는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차갑고 무심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을 나갔다.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이윤아는 진료실을 나서다, 마침 간호사 스테이션에 있던 간호사들과 눈이 마주쳤다. 곧 그들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이제까지 이런 식으로 진료 예약 잡아서 정 선생님한테 들이댄 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네.”“정 선생님은 어떤 타입 좋아하는지 진짜 궁금하다.”“그만해. 혹시 너도 그런 마음 있는 건 아니지?”“내가 무슨 수로. 정 선생님 같은 사람은 그냥 멀리서 보기만 해도 만족이지.”...그때 서이담은 딸 서하율의 손을 잡고 황준기 교수의 진료실에서 나왔다.3층 약국에서 약을 타고 딸의 손을 꼭 쥔 채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약간의 감각 과민이 있는 서하율은 이런 에스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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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정하준은 다시 한번 마음속에 맴돌던 의문을 꺼냈다. 서이담의 도자기처럼 희고 매끄러운 얼굴을 마치 꿰뚫어 보려는 듯 바라봤지만 머릿속 어디에도 관련된 기억은 없었다.“아뇨. 아까 저 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정 선생님.”“정 선생님.”누군가 그를 불렀다. 정하준이 고개를 돌렸고 서이담은 그 틈을 타 딸과 함께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이제 여섯 살이 된 아이는 점점 자라며 어른들 사이의 감정을 조금씩 읽을 수 있게 됐다.방금 전처럼...“엄마, 아까 그 아저씨... 아빠랑 엄청 닮았어요...”서하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이담이 아이의 입을 틀어막았다.“서하율, 엄마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말투는 조금 단호해져 있었다.서하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저씨가 아빠랑 닮았다고 말하면 안 된다’고 엄마가 당부했었다. 하지만 정말로 사진 속 젊은 아빠와 많이 닮았다.서하율이 아빠를 본 건, 침대 머리맡 협탁 위에 놓인 엄마 지갑 속 사진뿐이었다.그건 아빠와 엄마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아빠’라는 단어는 사실 서하율에게 너무 멀고도 먼 존재였다. 그녀가 본 ‘아빠’는 늘 유치원 친구들의 아빠였고 자기 아빠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세상 모든 사람이 아빠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에겐 세상에서 가장 좋은 엄마, 서이담이 있었다. 엄마는 누구보다도 자신을 사랑해 줬다.몇 걸음 걸어간 서이담은 고개를 돌려, 젊은 여자 의사와 이야기하는 정하준을 바라봤다. 그녀는 곧 시선을 거두고 눈을 내리깔았다.정하준은 태생부터 남들 위에 서 있는 사람이었고 주변에 예쁜 여자들이 끊이지 않았다.그런 사람에게 그때의 그녀는 어떻게 감히 사귀자고 ‘협박’까지 했을까.3년을 이어온 그 관계는 아마도 그의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흑역사였을 것이다.서이담이 정하준을 피하는 게 아니라 만약 정하준이 서이담이 ‘강보람’이라는 걸 안다면, 피하려 드는 쪽은 오히려 그일 터였다.수준에 맞는 집안과 배경을 가진 여자만이 그의 옆에 설 자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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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사실 오수영의 이런 해명은 설득력이 약했다.정하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차갑고 냉담하며 눈은 언제나 위를 향해 있고 업무 시간 외에는 온몸에서 거리를 두는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사람.오수영이 정하준을 찾아 온 것도 몇몇 간호사들이 어떤 여자가 정하준에게 도시락을 갖다 줬다가 거절당했다는 얘기를 하는 걸 들었기 때문이었다.그녀는 정하준이 그런 여자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날 그의 사무실 안에서 그의 품에 안겨 있던 그 여자만 빼고.그 일이 오수영에게는 큰 위기감으로 다가왔다.윤아정은 사실 한마디를 더 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그 여자는 절대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아주 예뻤다. 하지만 오수영의 표정을 보고는 더 이상 입을 뗄 수 없었다.오수영은 오준철 원장의 딸이었고 잘 보여야 할 사람이었다....9월, 새학기가 시작되었다.아침에 서하율을 학교에 데려다주며 서이담은 이것저것 잔뜩 당부했다.서하율이 교문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서야 서이담은 다시 지하철을 타고 회사로 향했다.출근 카드를 찍고 자리에 앉아 아침 회의를 준비하니 딱 맞는 시간이었다.요즘 라움에서는 새로운 디자인 의뢰 두 건을 받아 전 직원이 바빴다.서이담 역시 잦은 야근에 시달렸다. 퇴근 후에도 집에서 두 시간은 더 일을 해야 했지만 다행히 집에 있는 두 마리 강아지는 얌전했다.며칠 동안 야근이 이어지자 오후에는 박순자가 대신 서하율을 데리러 가 주었다.그게 너무 고마워서 토요일 쉬는 날에 서이담은 박순자에게 옷 한 벌을 사다 주었다.박순자는 겉으로는 까칠하고 잔말이 많은 동네 어르신 같았지만 막상 지내보면 정 많고 속 깊은 사람이었다.그날 오후, 박순자는 서이담이 사 준 옷을 입고 친구들과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어때, 멋지지? 우리 집 위층 아가씨가 사 준 거야. 안 산다고 했는데도 꼭 사 주더라니까. 봐, 이거 워싱 면이야. 여름에 입으면 얼마나 시원한데. 네 거 그 실크보다 훨씬 편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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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서이담은 급히 다가가 박순자를 부축해 소파에 앉히고 등을 천천히 두드리며 호흡을 가다듬게 했다.박순자는 체격이 조금 통통했고 천식과 고혈압이라는 오래된 지병이 있었다.이윽고 숨을 조금 고른 그녀는 서이담의 손을 붙잡고 헐떡이며 말했다.“허허... 난 괜찮아...”옆에 있던 서하율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박순자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었다.“괜찮아, 하율아. 많이 놀랐지.”숨은 조금 가라앉았지만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서이담은 탁자 위에 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고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가자고 할 생각이었다.하지만 박순자는 고집이 셌다. 아들이 곁에 없고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이곳에서 홀로 십 년 넘게 살아온 그녀는 웬만하면 병원에 가지 않으려 했다.병을 숨기고 치료를 미루는 성격이라 곧바로 손을 내저었다.“병원은 무슨 병원이야. 멀쩡한데 왜 가. 그냥 오래된 증상이라 그래. 약 먹으면 금방 나아.”“안 돼요. 꼭 병원 가셔야 해요.”서이담은 방금 상황이 너무 위급했다고 느꼈다. 게다가 자신은 휴대폰도 안 갖고 나와서 바로 연락할 수 없었고 그 곁엔 여섯 살짜리 아이뿐이었다.큰일이 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설령 휴대폰이 있었다 해도 무슨 소용이겠는가.라움 스튜디오에서 여기까지 지하철을 타면 한 시간이 걸리고 택시를 타다 막히기라도 하면 한 시간은 훌쩍 넘을 터였다.평소 차분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는 서이담이지만 이 일에만큼은 물러서지 않았다.박순자 또한 만만치 않게 완강했다.“안 가, 안 간다니까. 내가 병원은 왜 가. 너는 내 진짜 며느리도 아니잖아. 그냥 신경 끄고 가서 쉬어.”그녀는 오히려 서이담과 서하율을 집으로 돌려보내려 했다.서이담은 박순자의 팔을 꼭 잡았다.“내일 일요일이잖아요. 제가 같이 병원 가 드릴게요. 전신 검진도 같이하시고요.”“아이고, 얘는 왜 나보다 더 고집이 세니.”박순자가 한숨을 내쉬었다.바로 그때 현관 쪽에서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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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그의 그림자가 그녀를 덮쳤다.정하준은 서이담의 손에서 서랍을 열어 약통을 꺼내 들었다.“이 약들은 전부 유통기한이 지났거나 오래 먹어서 내성이 생겼어요. 이렇게 오래 복용하면 이제 효과 없습니다.”서이담은 서하율이 정하준에게 전화를 걸 줄도, 그가 정말로 올 줄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서하율이 박순자의 팔을 꼭 붙잡았다.“할머니, 이분은 의사 아저씨예요. 아주 대단한 아저씨예요. 나 심장 안 좋아서 병원 갔을 때 진료받은 아저씨예요.”박순자가 서이담을 한번, 정하준을 한번 번갈아 보았다.이 얼굴 조합 아무리 봐도 잘 어울렸다.“의사가 참 젊네.”“혈압계 있습니까?”정하준이 물었다.“있어요.”정신을 차린 서이담이 서랍에서 혈압계를 꺼냈다. 정하준은 그것을 받아 박순자의 혈압을 쟀다. 그러고는 몇 가지를 더 물었다.“가슴 답답하십니까? 두통이나 어지럼증은요? 어디 불편한 데 있나요?”“그냥 천식이 좀 있고 오래된 병이에요. 혈압도 높지 않은데요.”혈압 수치를 확인한 정하준이 고개를 들었다.“수축기 혈압이 168인데도 안 높아요? 그럼 뭐가 높아요? 비행기처럼 높아야 높다고 할 겁니까?”박순자는 입을 다물었다.서이담은 정하준을 흘긋 보았다.그가 몸을 굽히자 짧은 흑발이 이마 앞으로 내려와 있었다. 낮에 보던 냉정하고 단정한 모습과 달리, 회색 셔츠 윗단추 두 개가 풀려 있었다.차갑고 말수가 적은 외모와 달리 입을 열면 가시 돋친 말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었다.서하율은 고혈압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조금 전 박순자가 갑자기 쓰러져 숨을 못 쉬던 모습이 너무 무서웠다.“의사 아저씨 말 들어야 해요.”박순자가 손을 들어 서하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래, 할머니가 들을게.”정하준이 소녀를 한번 바라봤다. 그는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서이담의 번호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한 여자아이가 울면서 ‘할머니가 쓰러졌는데 의사 아저씨가 살려줄 수 있냐’고 묻자 몸이 먼저 움직였다.마침 이날 저녁 그는 성운시 송북구에 있는 의학계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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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서이담이 담담히 말했다.“오늘 저녁 일로 신세 졌네요. 제 딸이 선생님께 전화를 한 줄 몰랐어요. 사실, 제 딸 전화 한 통 때문에 굳이 오실 필요는 없었는데, 시간만 뺏은 것 같아요.”너무나도 형식적인 말투에 정하준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어차피 시간은 이미 뺏겼습니다. 원래는 한 선배 댁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했는데, 전화받고 바로 왔거든요.”서이담은 몇 초간 말문이 막혔다.“...미안합니다.”“오는 길에 단지 입구 근처에 분식집이 보이던데요.”정하준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차는 단지 건물 바로 앞에 세워져 있었는데, 오늘 타고 온 차는 전혀 조용하지 않았다.마치 검은 맹수가 잠복해 있는 듯한 한눈에 고급임을 알아볼 수 있는 차였다.그는 평소 출근할 때는 이런 차를 타지 않았다.출근할 때는 평범한 비즈니스 차량을 이용했다.서이담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정하준이 담배를 비벼 끄고 옆 쓰레기통에 버린 뒤 몸을 돌렸다.빛과 그림자가 그의 키 큰 실루엣을 길게 늘였다.“사과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차 타세요. 저녁 사세요.”서이담은 입술을 달싹였다.그의 깊고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채, 숨을 한 번 고르고는 차에 올랐다.그저 밥 한 끼 사는 것뿐 일상적인 예의 범절이라고 생각했다.단지 입구에는 ‘아줌마 만두’라는 가게가 있었다.여러가지 메뉴를 팔았는데, 서이담도 자주 아침에 여기서 만두나 팥도넛을 사서 두유와 함께 먹곤 했다.가게 주인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어, 이담 씨 왔네.”주인이 반갑게 다가왔다가 그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준수한 남자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작은 가게 안에서 유독 돋보이는 외모와 분위기였다.서이담이 정하준을 바라봤다.“뭐 드실래요?”정하준은 턱짓으로 그녀에게 맡겼다.이미 만둣가게에 들어왔으니, 알아서 시키라는 뜻이었다.“만둣국 두 그릇이요. 하나는 대자, 하나는 소자. 그리고 한 그릇엔 김 가루만 넣어 주세요. 건새우는 빼고요.”주문을 하고 나서 서이담은 무심코 입술을 깨물었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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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정하준은 식사를 마치고 서이담과 함께 만둣가게를 나섰다.그는 박순자를 가능한 한 빨리 병원에 데리고 가서 검사를 받게 하고 혈압약도 새로 바꿔야 한다며, 그래야 앞으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서이담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전했다.밤 아홉 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여인의 긴 치마 자락이 바람에 가볍게 물결쳤고 검은 머리칼도 밤바람에 흩날렸다.정하준은 차 앞에 서서 문을 열고 잠시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남편은요?”그는 방금 전 박순자가 시어머니라는 걸 눈치챘다.전화 속에서 서하율이 그를 ‘할머니’라고 불렀으니 말이다.그런데 병원에 갈 때마다 늘 서이담 혼자 딸을 데리고 왔고 남자의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서이담은 미간을 좁혔다.“외국에 있어요. 오늘 밤에 폐 끼쳐서 죄송했어요. 조심히 가세요.”말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풍성한 검은 머리칼이 공중에서 잔물결처럼 스쳤다. 마치 순식간에 번져나가는 먹빛 안개 같았다.정하준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들려 올라갔다. 비단결 같은 머리칼이 그의 손가락 사이를 스르르 빠져나갔다.그는 떠나가는 서이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전히 손을 허공에 멈춘 채 서 있었다.찰나의 스침이었지만 은은한 향이 남아 있었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손끝에 감긴 건 머리칼이 아니라 마음을 휘감고 스쳐간 한순간의 유혹처럼 은근한 전율이 맴돌았다....서이담은 박순자 집으로 돌아왔다. 서하율을 방으로 먼저 들여보내 쉬게 한 뒤 거실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놓인 약통을 정리했다.박순자가 그녀를 흘끗 보더니 참지 못하고 물었다.“방금 그 남자는...”서이담은 곧장 답했다.“몇 번 본 적 있는 의사예요. 별로 친하지도 않아요.”“별로 안 친한데 오늘 밤에 이렇게 왔다고? 나 그때 숨이 안 쉬어져서 죽는 줄 알았는데, 하율이가 놀라서 네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더니, 20분 조금 넘어서 바로 오더구먼.”박순자는 그동안 서이담이 혼자 딸을 키우며 사는 걸 안쓰럽게 여겼다. 그래서 마음속으론 좋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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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다음 날 일요일 오전, 서이담은 서하율에게 집에서 얌전히 TV를 보라고 하고 박순자를 모시고 병원에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다.여러 항목을 검사한 뒤, 박순자가 초음파실 안에서 줄을 서고 있는 동안 서이담은 밖에서 기다렸다.그때 누군가 ‘정 선생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돌렸을 때, 낯선 남자 의사가 서 있었다.서이담은 온몸이 순간 굳었다가 뒤늦게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병원이 이렇게 크고 바쁘고 여긴 심장외과도 아닌데 그를 만날 리가 없었다.마치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고양이처럼 경계심이 확 올라왔다.‘정하준’이라는 세 글자는 그녀 마음속 깊이 박혀 있는 공포였다.하지만 여기에서도 어쩔 수 없이 그의 소식을 듣게 됐다.성운제일병원의 스타 의사. 그는 어디에 있어도 늘 주목받는 존재였다.서이담이 초음파실 대기 구역에 앉아 있을 때, 안내 데스크 쪽 간호사 몇 명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나 내일 심장혈관흉부외과로 순환근무 가야 하는데, 정 선생님은 며칠 휴무래요.”“그 사람 여자친구 생겼다던데요? 오수영 선생님이 도시락 가져다줬다가 봤다더라고요.”“진짜예요? 오수영 선생님이 그렇게 오래 쫓아다녔는데...”...검진 결과지는 사흘 뒤에 서이담이 직접 받으러 갔다.혈압, 혈당, 혈중지질 모두 높았고 연세를 감안해 의사는 며칠간 입원해서 몸을 조리하라고 권했다.서이담은 그날 오후 반차를 내고 박순자를 병원에 모셔 입원 수속을 밟았다.“이렇게 돈 많이 쓰면서까지 해야 돼? 난 평소엔 아무렇지도 않은데.”“아플 때 되면 늦어요.”박순자는 평소 고집이 센 편이지만 서이담은 그보다 더 완강했다. 꼭 의사 말을 따르게 해야 했다.처음에 서이담이 박순자의 다락방에 살 때는 매달 월세를 냈다. 시세보단 저렴했지만 그래도 매달 나가는 돈이었다. 그러다 박순자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이 다락방, 평소에도 세 들어오겠다는 사람 없고 비워두기만 해. 네가 나를 어머니라고 한 번이라도 불렀잖아. 그것도 인연이니까 그냥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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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서이담은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볍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주황빛 석양이 남자의 흰 가운 위로 내려앉아 있었다. 날카롭고 단정한 옆얼굴에는 차갑지만 은근히 부드러운 빛이 스쳤고 눈가와 미간에는 어딘가 모르게 멀고 차가운 기운이 어려 있었다.정하준이 돌아섰다. 그는 멈칫하더니 미세하게 눈썹을 들어 3, 4미터 떨어진 그녀를 바라보았다.“의사 아저씨, 안녕하세요.”서하율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그래, 안녕.”정하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몇 걸음 앞으로 다가오더니, 서이담 곁을 지나치는 순간 발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려 그녀의 길게 드리운 속눈썹을 흘끗 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그가 지나가자 공기 사이로 은은한 남성 향수 냄새가 스쳤다.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서이담은 비로소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숨을 내쉬었다.그녀는 박순자의 병상 앞으로 가서 말했다.“오늘은 찐 고구마랑 볶은 오크라 가져왔어요. 먼저 좀 드세요.”서하율은 이미 얌전히 침대 옆에 앉아 있었고 오늘은 학교에서 받아온 포스터를 그리고 있었다.혹시 서하율이 자신의 어떤 재능을 물려받은 건 아닌지, 색감과 그림에서 늘 대담하고 창의적인 면을 보였다.그럴 때면 서이담은 문득 자신의 어머니가 떠오르곤 했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어릴 적 서이담은 외할머니에게 물었다.“우리 엄마는 어디 있어요? 왜 저는 엄마가 없어요?”외할머니는 늘 ‘네 엄마는 아주 먼 곳에 갔단다’라고만 말했다.지금 서이담이 서하율에게 ‘아빠는 먼 곳에 있다’고 말하듯이.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 이런 선의의 거짓말은 언젠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박순자가 그녀를 흘끗 보았다. 단번에 서이담과 정하준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녀의 눈썰미는 여간 예리한 게 아니었다.“그 정 선생 말이야, 생긴 건 참 괜찮더라.”서이담은 일회용 장갑을 낀 채 고구마를 까며 말했다.“아주머니, 밥 드세요.”“네가 좋으면 사귀는 건 괜찮지만 요즘 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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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서이담이 수도 앞에서 물을 받으려는데 수도를 열었지만 물이 나오지 않았다.손잡이를 조금 더 틀자 갑자기 뜨거운 수증기가 확 뿜어져 나왔다.“앗!”손등에 화끈한 통증이 번졌다.순간 멍해진 그녀는 두어 초 동안 꼼짝도 못 했다. 손가락이 떨리는 사이 등 뒤에서 불쑥 한 손이 뻗어와 그녀의 손목을 감쌌다.고개를 돌리자 정하준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본능적으로 손을 빼려 했지만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움직이지 마요.”화장실 안.정하준이 서이담의 손을 잡아 물줄기 아래로 가져갔다. 고요한 공간에 물 흐르는 소리만 잔잔히 울렸다.서이담은 몇 번이나 손을 빼려 했지만 그의 손목을 쥔 힘은 겉보기엔 강하지 않아도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뺄수록 그의 손아귀는 조금씩 더 단단해졌다.정하준이라는 사람은 겉보기엔 차갑고 고고하며 청명한 하늘 같은 사람이었다.그러나 서이담은 이미 10년 전, 하얗게 잘 다려진 교복을 단정히 입고 단추를 끝까지 잠근 채 손가락에 담배를 끼고 PC방에서 나오는 그를 봤을 때 알았다.이 남자의 뼛속에는 반항기가 있다는걸. 무언가 하기로 마음먹으면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성질이라는 걸.그의 손에 이끌려 흐르는 물에 손가락을 담근 지 벌써 30분이 흘렀다.그 사이 몇몇 사람이 화장실 앞을 지나갔고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밖에서 바닥을 닦았다. 그리고 여러 시선이 둘을 스쳤다. 정하준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정 선생님.”병원이라는 공간은, 어디든 사람이 많았다.그 30분 동안만 해도 환자와 직원 그리고 그와 인사를 주고받는 이들이 일곱, 여덟은 됐다.다들 놀란 눈길로 서이담을 바라봤다.차갑기로 유명한 정하준이 한 여자의 손목을 잡고 있는 모습이라니 그 옆의 여자가 누군지 궁금해하지 않을 리 없었다.서이담은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정하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머리를 푹 숙인 그녀의 모습이 묘하게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재미있었다.마치 자신과 조금이라도 얽히는 게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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