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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정하준은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서이담의 얼굴을 훑어보았다.서이담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품에 안은 강아지를 꼭 껴안은 채 두 걸음 물러섰다. 등은 엘리베이터 벽에 바짝 붙었다.“그냥 한번 물어본 건데, 서이담 씨 표정이 꽤 긴장돼 보이네요?”“정 선생님, 지금 이 행동 너무 경솔하신 거 아니에요?”“난 엘리베이터 밖에 서 있고 거리도 두 미터는 되는데, 그게 경솔한 겁니까?”정하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서이담은 이미 엘리베이터 가장 안쪽 구석에 몰려 있었고 온몸에 긴장과 경계가 가득했다.긴 시간 문이 닫히지 않자 엘리베이터에서 경고음이 울렸다.결국 정하준은 손을 내렸고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혔다.문이 닫히는 순간 서이담은 그 짙고 깊은 눈동자를 떠올리며 숨을 내쉬었다. 등 전체가 땀으로 젖어 있었다.혹시 정하준이 그녀를 알아본 걸까?‘아니, 아닐 거야. 설령 알아봤다 해도 무슨 상관이람. 하율이는 내 딸이야. 그 사람한테 절대 넘기지 않을 거야.’벌써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지금 정하준은 다른 여자와도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는 듯했다.그에게 ‘강보람’은 그저 잠깐 스쳐 간 장난 같은 인연일 뿐이었다. 뚱뚱하고 평범했던 그 시절의 여자쯤이야, 재벌가 아들인 그가 굳이 기억하거나 다시 들춰볼 이유도 없을 터였다....정하준은 손을 내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리트리버는 엘리베이터 쪽을 향해 길게 울부짖었다. 자기 ‘아들’이 떠난 게 못내 아쉬운 듯했다.그 마음을 읽었는지 정하준은 리트리버의 머리를 툭 치며 비꼬듯 말했다.“고작 일주일 키워놓고는 진짜 네 자식인 줄 아나 보지? 그냥 아주 사랑이 넘치네. 네가 자선 사업가야?”리트리버는 엉덩이를 흔들며 꼬리로 그의 다리를 툭툭 치더니, 못마땅하다는 듯 거실 구석 자기 집으로 돌아가선 토끼 인형을 물고 풀이 죽은 모습으로 웅크렸다.정하준은 소파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테이블 위에 놓인 현금 9만 원을 힐끗 보았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담배를 꺼냈다.반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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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악몽에 시달리던 서이담은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그녀는 황급히 서하율의 방으로 달려갔다. 아이가 편안히 자고 있는 모습을 확인한 순간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서이담은 몸을 숙여 서하율의 볼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그 순간 서하율이 눈을 살짝 뜨고는 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응, 엄마 여기 있어.”서이담은 옆에 누워 서하율을 꼭 끌어안았다. 아이의 고른 숨결, 따스한 체온이 피부에 전해졌고 차오르던 감정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녀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서하율이 다시 잠든 뒤, 서이담은 조용히 일어나 창가에 섰다. 창밖으로 높이 떠 있는 달이 흐릿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은은한 달빛이 흘러내렸고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다.잠 못 이루는 사람은 서이담뿐만이 아니었다. 정하준 역시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었다. 내일 오전에는 황준기 교수의 수술에 보조로 들어가야 해서 푹 자두어야 하는데, 그는 얕은 잠에 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했다.결국 정하준은 수면제를 한 알 삼켰다. 그런데도 강보람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네모를 키워달라고 울먹이며 매달리는 얼굴, 자신의 팔을 흔들며 날개가 달린 토끼 인형을 잡아달라고 조르던 모습.어떤 장면에선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흰 니트 상의 사이로 손을 넣었고, 두 사람의 옷은 금세 흐트러졌다. 그들은 학교 체육관 구석 아무도 없는 기구실에서 숨 막힐 만큼 격렬하게 입을 맞췄다.“밖에... 누가 있는 것 같아...”숨을 고르던 그녀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바로 그때 철컥, 문이 열리고 운동부 학생이 기구를 찾으러 기구실 안으로 들어섰다.두 사람은 창고 구석 어딘가에 숨어 있었고 강보람은 온몸을 벌벌 떨었다.정하준은 잠깐 눈을 붙였지만 곧 깨버렸다.새벽 세 시.그는 벌떡 일어나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온몸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들끓고 있었다.화장실로 향한 그는 옷을 갈아입고 더러워진 옷은 세탁기에 던져 넣었다.오늘따라 이상했다. 관자놀이가 계속 뛰었고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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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정하준은 두 손으로 운전대를 꽉 쥔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뒤에서는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재촉했지만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한 남성이 그의 차 창문을 두드렸다.“가실 거예요, 말 거예요? 길 막혔잖아요.”그제야 차를 움직인 정하준은 굳은 듯 몇 미터를 운전하다가 길가에 차를 세웠다.휴대폰은 이미 상대방이 끊어버린 상태였다.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고개를 뒤로 젖히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담배를 두어 모금 빨아들이자 진한 연기가 목을 찔렀고 그제야 조금은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이 두 사람 중, 어떤 쪽도 정하준이 바라는 결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차라리 첫 번째 가능성을 믿고 싶었다.6년 전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일 거라는 건 거의 본능 같은 직감이었다. 게다가 시간도 맞아떨어졌다.그가 해외로 나가던 그해. 서이담과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그날 밤.정하준은 다시 운전대를 움켜쥐었다. 가슴이 쿡쿡 쑤시듯 아려 왔다....라움 디자인 스튜디오.퇴근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서이담은 김유린과 이세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오늘 저녁에 우리 셋이서 밥 먹자.”김유린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오늘 무슨 날이야? 성과급 나왔어?”서이담은 눈을 살짝 가늘게 뜨더니 빙긋 웃었다.이세은이 웃음을 터뜨렸다.“이번 분기 우리 디자인팀 실적 1등이 이담 언니잖아요. 상여금 확정이래요!”김유린은 서이담이 딸을 혼자 키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이 심장이 좋지 않아 수술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기에, 서이담이 이번에 상여금을 받게 됐다는 말에 누구보다 기뻐했다.그녀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근처 신상 맛집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결국 새로 생긴 고깃집으로 결정했다. 서이담은 신규 계정이라 모바일 쿠폰까지 받아 4천 원을 절약했다.세 사람이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한 배달원이 장미꽃다발을 들고 들어와 백서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세은이 김유린을 힐끗 보며 입 모양으로 물었다.“남자 친구가 보낸 거예요?”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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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장윤희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 역시 오늘 오후 진료실에 찾아온 남자가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하지만 걱정할 건 없었다. 그 진료기록은 그녀가 이미 손을 봐둔 상태였으니까.설령 뭔가 수상하다 해도 들킬 일은 없었다.그날 강보람은 쌍둥이를 임신한 채 병원에 실려 왔다. 하지만 이미 대량 출혈이 진행된 상황이었다. 결국 남자아이는 살리지 못했고 간신히 여자아이 하나만 건질 수 있었다.사실 장윤희가 강보람을 도운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예전 자신의 딸 장나연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 바로 강보람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도와준 건 말하자면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강보람과 장나연은 고등학생 시절 옆 반이었다. 강보람은 뚱뚱했고 장나연은 얼굴에 주근깨가 있어 둘 다 반에서 따돌림을 당하곤 했다. 2반 애들은 장나연을 ‘점박이’라 부르며 놀렸다.그런 공통된 아픔 때문이었을까.같은 동네 출신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며 가까워졌다.장나연은 부모가 이혼한 후 어머니 성을 따라 살다가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있는 성운시로 전학을 오게 됐다.고등학교 2학년 1학기 때 장나연은 큰 용기를 내어 기성우에게 고백했지만 보기 좋게 차였다. 그 일로 기성우를 짝사랑하던 몇몇 불량 여학생들의 눈 밖에 나 화장실에 갇혀 괴롭힘을 당했다.그때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 바로 강보람이었다. 강보람은 겉보기엔 순하고 말도 잘 못하는 성격처럼 보였지만 은근히 힘이 셌다.당시 그녀는 주저 없이 화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괴롭히던 애들을 밀쳐내며 장나연을 데리고 도망쳤다.장나연은 그 일을 평생 잊지 못했다. 자연히 두 사람은 더 가까워졌고 여름방학이 되어 시골로 내려갔을 때는 강보람이 장나연 집에도 들러 장윤희를 여러 번 만났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익숙해졌다.그날 밤, 장나연은 바로 서이담에게 전화를 걸었다.“너무 걱정하지 마. 진료기록은 우리 엄마가 그때 손봐놨어. 그런데 정하준이 너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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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그때 강보람이 입고 있던 브라는 정말이지 가장 평범한 소녀용 브라였다. 받쳐주는 힘도, 잡아주는 힘도 전혀 없었다.특히나 그녀는 가슴이 또래보다 빨리 자라고 있었고 걸을 때마다 흔들리곤 했다.남자애들뿐 아니라 여자애들까지도 그녀의 가슴을 훔쳐보며 수군댔고 그녀는 그 시선이 너무나 싫었다. 그게 얼마나 수치스러웠는지 모른다.강보람은 더 좋은 브라를 살 돈이 없었다. 그래서 여름 교복 안에는 꼭 순면 흰색 나시를 한 겹 더 껴입곤 했다.뒤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강보람은 겁에 질려 몇 걸음 앞으로 달아났다.그런데 그 발소리도 함께 빨라졌다.그녀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배는 아프게 쑤시는데 뒤에는 시선이 끈적한 양아치가 따라오고 있었다.외삼촌 집까지는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길.그때 정하준이 나타났다.서이담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때 자기가 먼저 그의 등 뒤로 숨었는지, 아니면 그가 먼저 다가와 그녀를 가로막아 섰는지.그전까지 서이담은 ‘담배 피우는 남자’나 ‘피시방에서 나오는 남자’ 같은 이미지와 눈앞의 이 사람을 도무지 연결시킬 수 없었다.정하준은 ‘교내 얼짱’이자 성운고등학교의 전설이었고 성적도 언제나 압도적인 존재였다.그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다른 불량배들과는 전혀 달랐다.흰색 교복 단추는 끝까지 제대로 잠겨 있었고 옷에는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으며 매무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마치 티끌 하나 없는 사람 같았다.그저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만이 그의 입술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정하준은 그저 멋을 부리기 위해서 담배를 피우는 것도, 중독돼서 피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하고 싶어서 언제든 끊을 수 있고 무엇이든 제어할 수 있다는 태도였다.차가운 외모 속에 감춰진 건, 교만하고도 반항적인 본능이었다.걸리든 말든, 혼나든 말든, 그는 개의치 않았다.그저 그녀를 한 번 바라보았고,지갑에서 2만 원을 꺼내 건넸다.“택시 타.”하지만 강보람은 결국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그 지폐는 그녀의 일기장에 곱게 접혀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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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행운의 신이 세 번째로 그녀를 찾아온 건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때였다.사실 고등학교 3년 동안 강보람은 정하준과 거의 말을 섞은 적이 없었다.그러다 고3 1학기 두 사람은 같은 책상을 쓰게 됐다. 그렇다고 해서 말이 많아진 건 아니었고 간간이 오가는 짧은 대화가 전부였다.어느 날, 강보람은 실수로 다른 사람의 교과서를 집어 들었는데 그 안에는 빼곡한 필기가 적혀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야 그게 정하준의 책이라는 걸 알았다.책 표지 위에는 또렷하게 ‘정하준’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의 글씨는 힘 있게 기운 필체였다.강보람은 한동안 그 글씨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의 글씨 역시 그의 책 속에 남았다. 그 순간 평행선을 달리던 두 사람이 서서히 가까워지는 듯했다.하지만 불과 석 달 만에 자리 배치는 바뀌었다.강보람의 고등학교 생활은 평온하면서도 동시에 그렇지도 않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정하준의 걸음을 따라가고 싶었고 또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고 싶었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쥐고 싶었고 외삼촌의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S대에 진학하고 싶은 이유는 단순히 정하준과 같은 학교에 가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을 위해서였고 또한 미래를 갖기 위해서였다.그러나 이번에는 행운이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담임은 수험생들이 너무 긴장하지 않고 마음을 풀 수 있도록 수능 한 달 전 주말을 이용해 반 전체로 소풍을 가기로 했다.비용은 1인당 4만 원이었다. 부족한 금액은 담임이 채워주고 남는 돈은 졸업할 때 음료나 간식을 사서 작은 반 모임을 열 계획이었다.그때 반에서는 돌아가며 반장을 맡는 제도가 있었는데 그날 반장은 강보람이었다. 그녀는 돈을 받아 정리해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그런데 그날 오후 체육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니 책상 서랍 속 돈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저녁 자율학습 시간.평소엔 조용하던 교실이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고 수많은 시선이 강보람에게 쏟아졌다. 그 시선은 그녀의 살갗을 한 꺼풀씩 벗겨내는 것만 같았다.손바닥은 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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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선생님, 저... 정말 제가 한 거 아니에요. 그 돈, 제가 안 가져갔어요.”“보람아, 선생님은 네가 착한 아이인 거 알아.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앞으로 있을 시험 잘 준비하자.”그때 강보람은 몹시도 허탈했다. 하지만 지금의 서이담은 안다. 그때 담임인 진 선생님이 그녀를 믿지 않은 게 아니라는 걸.폭풍의 한가운데 모든 사람이 너를 의심하는 상황에서 절대적인 증거가 없는 한, 약자에게는 변명조차 독이 된다. 설명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법이다.누구도 재벌가 출신, 정씨 집안의 아가씨가 180만 원을 훔쳤다고 믿지 않았다.그건 권세에 아부해서가 아니라 그런 집안은 돈이 부족할 리 없다는 본능적인 판단이었다.180만 원은 정소연에게 겨우 반팔 티 한 장 값에 불과했다.하지만 강보람처럼 가난한 집안 출신에게는 그건 엄청난 거금이었다.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돈이 더 절실한 쪽이 훔쳤을 거라 여겨졌다. 그래서 그녀가 ‘도둑’이 됐다.그때 강보람은 이 일이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한 달 뒤로 다가온 수능을 위해 오직 성공만을 허락하는 외로운 각오로 더 치열하게 공부했다.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소문은 점점 더 커졌다. 어딜 가든 낯선 눈빛이 따라왔고 모두가 그녀를 외면했다. 등 뒤에서는 ‘도둑’이라는 말이 쏟아졌다.그러던 어느 날, 한 통의 문자가 왔다.[나한테 정소연이 네 책상 서랍 뒤지는 영상 있어. 그거면 네 결백 증명할 수 있거든. 갖고 싶어? 그럼 서쪽 거리 모텔 202호로 와.]강보람은 약속 장소로 갔다. 거기에는 옆반의 오준열이 있었다. 전형적인 문제아로 주 1회는 꼭 이름이 학교 방송에 오르내렸고 집안이 부유하단 이유로 제멋대로 굴며 무법자처럼 행동하는 녀석이었다.그는 비열하게 웃으며 그녀의 가슴을 훑어봤다.“강보람, 나 고1 때부터 너 지켜봤다? 피부 되게 하얗네. 우리 친구하자. 번호도 주고. 그러면 영상 바로 보내줄게.”그가 순순할 리 없다는 걸 강보람은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만큼 자신의 결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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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주다빈이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강보람입니다.”그 이름을 들은 순간 주다빈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강보람의 얼굴을 한참 동안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어딘가 싫어하고 깔보는 기색마저 스쳤다.“겨우 그 영상 하나로 우리 딸이 돈을 훔쳤다고 누가 말하겠어요? 영상에 그런 장면이 나오기라도 했나요? 내 딸이 강보람 책상 서랍을 뒤진 건 맞지만, 그게 꼭 돈을 훔친 거라는 증거가 어디 있죠? 여자애들끼리, 혹시 물티슈나 생리대를 찾은 걸 수도 있잖아요.”실제로 그 첫 번째 영상에는 정소연이 그녀의 책상 서랍에 손을 넣는 모습만 있었고 돈을 훔치는 장면은 찍히지 않았다.정소연은 당장 눈가를 붉히며 말했다.“선생님, 엄마, 저 정말 생리 시작해서 보람이 가방에 생리대 있는 거 알아서 그거 꺼내려고 했던 거예요.”“보람아, 미안해. 네 허락 없이 가방을 뒤져서. 근데 돈은 정말 내가 안 가져갔어. 나 그 180만 원이 없어서 못 쓰는 애도 아니고, 우리 이렇게 잘 지내는데 내가 왜 그러겠어.”주다빈이 콧방귀를 뀌었다.“이 일은 이미 뻔한 거예요. 강보람 성적 좋은 건 알지만 선생님이 감싸주려고 가볍게 넘어가려는 건 아니겠죠? 나이도 어린 애가 품성이 이렇게 바닥이라니.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이 어디서 오는 줄 알아요? 우리 태한 그룹에서 계속 후원한 건데, 이런 애한테 줄 줄은 정말 몰랐네요.”하지만 강보람에겐 두 번째 영상이 있었다. 그것 역시 오준열이 보내준 것이었다.이번 영상에는 정소연이 돈다발을 들고 가방에 넣은 뒤 주위를 살피며 교실을 나서는 장면이 또렷하게 담겨 있었다.그 영상을 틀자 교무실 안은 기묘할 만큼 고요해졌다.정소연의 어깨가 움찔하며 떨렸고 얼굴은 잿빛으로 질렸다.그 자리에 있던 건 담임과 학년 부장, 그리고 부교장이었다.누구도 부잣집 아가씨가 돈을 훔쳤으리라 믿지 않았지만 지금은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눈앞에 있었다.주다빈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침묵했다.정소연은 다급하게 변명했다.“엄마, 나 그냥 보람이랑 장난친 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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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그러나 수능을 코앞에 둔 시기였고 얼마 전 최명희가 큰 수술을 받아 건강이 좋지 않았다.그런 상황에서 정소연이 학교에서 친구 돈을 훔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 그대로 기절해버릴지도 몰랐다.게다가 정소연은 어디까지나 그의 조카였다. 그는 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는 걸 원치 않았다.정씨 집안은 가풍이 엄격했다. 대대로 정치 가문이었고 정하준의 아버지인 정윤범 세대에서야 비로소 상업에 손을 댔다.삼촌과 백부들은 모두 정계의 거물급 인사들이었고 어머니 최명희는 대대로 고위 관료를 배출한 명문가 출신이었다. 이 일이 만약 정윤범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는 주저 없이 정소연의 다리를 부러뜨릴 사람이다.“강보람, 한 번만 더 생각해 줘. 이 일은 해결할 방법이 많아.”눈 부신 햇살에 강보람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쥔 채 마주 선 소년의 옷에서 풍기는 차갑고 맑은 향을 느꼈다. 그 향이 가슴속 깊이 스며들었다.강보람은 목이 바싹 타들어 가듯 메말랐고 목소리는 굳건했지만 어쩐지 힘이 없었다.“하지만 나는 도둑이 아니야...”소년이 그녀를 바라봤다. 햇볕에 달아오른 얇은 피부의 얼굴.그녀는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고 그는 차가운 어조로 다시 말했다.“조건을 말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최대한 들어줄게.”“그럼 나랑 사귀어 줄래?”“뭐?”정하준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굳어 있던 그는 십여 초의 침묵 끝에 그녀를 다시 훑어봤다.감정을 거래 조건으로 삼는 건 정하준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다. 특히 사랑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더더욱 그랬다. 그럼에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좋아. 그런데 난 장거리 연애는 안 해. 네가 S대에 합격한다는 전제하에서.”강보람은 모의고사 세 번 중, 가장 좋은 성적이 S대 최저 합격선보다 8점 모자랐다. 가장 나쁜 성적은 26점이 부족했다.단 5일 만에 8점을 메우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해냈다. 그해 수능 문제는 결코 쉬운 편이 아니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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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침실 안, 머리맡 조명은 은은한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그 빛이 침대 위, 여자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 위로 부드러운 표정이 드리워졌고, 그녀는 품에 안긴 딸아이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고 있었다.서하율이 꿈속에서 중얼거렸다.“엄마.”“응, 엄마 여기 있어.”이 7년 동안, 서이담이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은 건 서하율을 품에 안게 된 일이었다. 그녀는 하늘이 자신에게 내려준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라 믿었다. 물론 하늘은 다른 하나의 선물을 거둬 가기도 했다.서이담은 옷매무새를 풀고 눈길을 평평하고 하얀 아랫배로 떨궜다.제왕절개 자국은 이미 옅어져 있었지만 연한 분홍빛 선이 한 줄 남아 있었다.차가운 백색 피부 위에서 그 자국은 7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선명했다.밤이 깊고 고요해질 때면 그녀는 늘 생각했다.그때 조금만 더 일찍 병원에 갔더라면 아이를 잃지 않았을까.아니면, 그날 외숙모와 다투지 않았더라면, 밀쳐져 넘어지지 않았더라면, 배를 다쳐 과다 출혈을 겪지 않았더라면 그 아이는 살아 있었을까.외숙모 남영숙은 줄곧 강보람의 이름을 팔아 정도현과 주다빈을 협박하여 딸을 태한 그룹에 취직시켰고 해외 연수까지 보내줬다.그 과정에서 강보람은 정소연이 돈을 훔치는 영상이 남영숙 손에 있다는 걸 전혀 몰랐다.그 영상은 이미 자신이 삭제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영상이 어떻게 외숙모 손에 들어갔는지, 그리고 지난 4년 동안 외숙모가 그걸로 은밀히 정도현과 주다빈을 협박해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강보람은 이 일이 오래전에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몇 년 동안 외삼촌과 외숙모는 이 일을 발판 삼아 정도현 주다빈 부부를 ‘현금인출기’처럼 대했다.강보람은 피해자에서 어느새 흡혈귀 같은 공범이 되어 있었다.그녀가 따지자 남영숙은 코앞에서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네가 나한테 이런 말 할 자격이 있어? 너도 예전에 그 일로 정씨 집안 아들 협박해서 사귄 거 아니야! 결국은 차였으면서! 우리가 너를 몇 년을 먹여 살렸는데, 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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