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다시 너의 세계로: Bab 41 - Bab 50

100 Bab

제41화

서이담과 강보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꿈속에서나 잠시 겹칠 뿐, 현실에서 그 둘을 혼동하진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에 묵직한 답답함이 남아 있었다. 정하준은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조용히 되뇌었다.‘서이담.’선생님이 책상을 톡 두드리며 말했다.“준서 외삼촌 오셨네요. 이분은 하율 학생 어머니세요. 두 분 먼저 앉으시죠.”서이담의 등이 곧게 펴져 있었지만 그 곧음 속엔 어딘가 굳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자연스럽게 내려져 있던 손가락이 살짝 움찔했다가 다시 힘을 풀었다.‘구준서의 외삼촌이 정하준이라니...’서하율도 놀란 듯 눈이 동그래졌다. 까만 눈동자가 꼭 잘 닦인 포도알처럼 반짝였다.“의사 아저씨.”“응.”정하준은 서하율 쪽으로 걸어가 무릎을 굽혔다. 그가 몸을 낮춰도 키 차이는 여전히 컸다. 길고 단정한 손가락이 소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아저씨가 대신 사과할게. 준서가 네 머리를 잡아당기면 안 됐어.”서하율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들어 엄마를 한 번 바라봤다.서이담은 선생님 쪽을 향해 있었고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두 분이 아는 사이시라면 얘기는 금방 끝나겠네요. 아이들끼리 장난은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잘 타이르셔야 합니다.”아이 둘은 얌전히 서로 사과를 주고받았다. 마침 방과 후라 귀가 시간이 다가왔다. 서이담은 딸 손을 잡고 먼저 교무실을 나섰다. 정하준과 할 얘기는 없었다. 곧이어 정하준도 구준서를 데리고 나왔다.“외삼촌, 서하율 엄마랑 아는 사이예요?”“잘 몰라.”“그런데 잘 모르는 사람을 그렇게 계속 쳐다보는 건 예의 없는 행동이에요.”정하준이 고개를 숙여 조카를 내려다보더니, 큼지막한 손바닥으로 바가지 머리를 눌렀다.“구준서, 이 얘기를 너희 엄마한테 해줄까?”“외삼촌, 잘못했어요.”구준서는 급히 정하준의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차에 태운 후, 정하준은 밖에 기대 담배를 하나 피우고서야 운전석에 앉았다.“우리 점심에 KFC 가요.”“외할머니 댁에 데려다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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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화

“괜찮아. 나도 너 할퀴어서 미안해.”서이담이 구준서를 바라봤다. 설마 자기 딸 머리채를 잡은 그 꼬마가 정하준의 조카일 줄은 몰랐다. 정하준의 누나를 본 적은 없지만 피란 참 묘했다.아마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괜히 구준서와 서하율의 이목구비가 조금 닮아 보였다.그때, 테이블 아래서 남자의 긴 다리가 앞으로 쭉 뻗어와 서이담의 다리에 스쳤다.그녀는 시선을 내렸다. 분명 자리를 조금 뒤로 물렸는데도 또 닿아버렸다.‘설마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겠지... 아마도 내가 너무 예민한 거겠지...’시야 안에 들어온 건 쭉 뻗은, 고급스러운 질감의 검은색 캐주얼 슬랙스를 입은 긴 다리였다.서이담은 할 수 없이 의자를 또 살짝 뒤로 뺐다.정하준은 이런 패스트푸드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기름 범벅이 된 입으로 먹고 있는 구준서를 보다가 다시 얌전하게 먹고 있는 작은 소녀에게 시선을 옮겼다.하얗고 작은 볼, 까만 포도 같은 동그란 눈, 참 깨끗하고 사랑스러웠다. 아마도 오래 앓아서인지 몸집은 작았다.서하율이 피자 한 조각을 집어 서이담 쪽으로 내밀었다.“엄마, 내가 먹여줄게요.”이제 마지막 한 조각만 남아 있었다.서하율이 정하준을 올려다봤다.“아저씨, 드실래요? 마지막 조각 드릴게요.”그 순간, 구준서가 통통한 손으로 먼저 낚아챘다.“우리 외삼촌은 이런 거 안 먹어. 내가 먹을래.”정하준이 손을 뻗어 통통한 손등을 툭 쳤다. 그러더니 기름 잔뜩 묻은 손을 보며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누가 안 먹는대.”그는 조카 손에서 피자를 빼앗아 한입 베어 물었다. 생각보다 괜찮았다.“외삼촌, 예전엔 이런 거 안 먹었잖아요...”마지막 한 조각을 놓친 구준서는 입술을 핥으며 서운함 가득한 눈으로 정하준을 올려다봤다.정하준은 피자만 먹은 게 아니라, 구준서가 눈을 떼지 못하던 그의 오렌지 주스까지 집어 들었다. 전에는 늘 마시지 않던 음료였다.정하준이 안 마시면 남은 건 당연히 구준서 차지였는데, 오늘은 마지막 한 모금까지 마셔 버렸다.구준서의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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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서이담은 오늘 아침 간단히 오트밀우유 하나와 삶은 계란 하나를 들고 출근했지만 먹을 틈도 없이 오전 내내 회의에 매달렸다.라움에 두 건의 대형 디자인 계약이 들어왔고 두 여성 의류 브랜드 대표가 직접 라움을 찾아왔다. 봉규남 대표는 서이담을 불러 사무실에서 이야기했고 점심 무렵엔 그 두 대표와 함께 식사 자리까지 동석했다.서이담은 원래 이런 비즈니스 식사를 즐기지 않는다. 게다가 억지로 술도 두 모금 정도 마셨다. 그녀는 하루 종일 제대로 먹은 게 거의 없었다.오후 네 시쯤, 서하율의 담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와 딸이 뒷자리에 앉은 남자아이와 싸웠다고 했다. 서이담은 곧바로 회사를 빠져나와 급히 학교로 향했다.결국 오늘 먹은 건 피자 한 조각이 전부였다. 기름진 맛이 입안에 남아 있는데, 서이담의 얼굴은 창백했고 몸이 살짝 흔들리며 주저앉았다. 아이를 낳고 난 뒤로 저혈당 증상이 자주 나타났다.순간 머릿속에서 웅웅거리며 눈앞이 하얘졌다. 어렴풋하게 딸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이담은 본능적으로 서하율의 손을 꼭 쥐었다. 괜찮다고, 조금만 쉬면 된다고 안심시키고 싶었다.그때, 뒤에서 한 긴 손이 뻗어와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리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시야는 여전히 아득하고 중심이 잘 잡히지 않았다. 서이담은 힘겹게 눈을 뜨고 무의식적으로 상대의 옷깃을 잡았다.또렷한 윤곽의 얼굴, 높고 곧은 콧대, 매끈한 턱선이 눈에 들어왔다. 점점 시야가 맑아지면서 차가운 기운이 그녀를 감싸고 있다는 걸 느꼈다.서이담의 시선이 그 얼굴을 따라 움직였다.정하준이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뒷좌석에 태울 때, 그 얼굴은 아주 가까이 있었다. 숨이 멎을 듯 가까운 거리였다.그는 고개를 숙였고 검고 곧게 뻗은 속눈썹이 시야를 가렸다.그때 눈꼬리 주름 위, 아주 작은 검은 점 하나가 보였다.강보람이 처음 그의 품에서 깨어났을 때도, 이렇게 가까이서야 그 점을 발견했었다.가장 사랑이 깊을 때, 그녀는 장난스럽게 그 자리를 손끝으로 쓰다듬곤 했다.정하준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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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하준아, 오늘 밤새울 거야?”그의 차가운 외모 속에는 본질적으로 세상을 가볍게 여기는 거만함이 숨어 있었다.성적이 전교 1등이었기에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었고, 담배를 피우고 수업을 빼먹고 밤새 피시방에 죽치고 있어도 그런 학생일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모든 선생님의 마음속에 자리한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서이담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자신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만들려 했다. 입안 초콜릿이 완전히 녹아내렸고 어지럼증은 많이 가셨지만 좁은 공간 안이라 그런지 속이 은근히 울렁거렸다. 공기 속에는 은은한 고급 남성 향수 냄새와 시트 가죽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그녀가 미간을 살짝 좁히자 옆자리의 창문이 몇 센티미터 내려갔다. 스며드는 저녁 바람이 조금은 숨을 편하게 해 주고 정신도 또렷하게 만들었다.서이담은 저도 모르게 그를 바라봤다.정하준은 앞만 보며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집중해서 운전하고 있었다. 그의 손목에는 여전히 그 마이너 브랜드의 고급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그 브랜드에 유독 애착이 있는 듯했다. 7년 전, 그녀에게 건넸던 시계도 같은 브랜드였다.가는 길 내내, 구준서는 재잘재잘 떠들며 분위기를 띄우는 달인 같았다. 아이의 세계는 참 단순하고 즐겁고 천진난만했다.바가지를 뒤집어 쓴듯한 머리 모양에 동글동글한 볼살과 큰 눈망울을 가진 구준서를 보고 있자니, 더없이 귀여웠다.만약 서이담의 아들이 죽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렇게 컸을 것이다. 그 아이는 서하율의 오빠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태어나자마자 출산 질식으로 숨을 거뒀다.6년이 흐른 지금, 겉으로 보기엔 바쁜 생활 속에 묻어둔 듯 보였지만 서이담은 한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열 달을 품은 아이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그녀는 아이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출산 직후 의식을 잃었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쌍둥이 중 아들아이는 세상에 태어난 지 26분 만에 조용히 숨이 멎었다는 말을 들었다.정하준은 룸미러로 서이담의 표정이 갑자기 가라앉는 걸 보았다. 그는 조수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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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구준서는 정하준의 바지를 잡고 있었는데, 서하율이 전부 들어버렸다.남자가 어떻게 돈이 없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예쁜 여자 앞에서 돈이 없다는 걸 들키다니, 얼마나 망신스러운 일인가.하지만 정예진은 구서준이 학교 끝나고 몸에 안 좋은 간식을 사서 먹을까 봐 세뱃돈을 전부 빼돌려 버렸다.서이담이 먼저 구준서에게 같이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 벌써 시간이 꽤 늦었고 아까 조금은 먹었지만 그래도 밥은 먹여야 했다. 게다가 정하준이 집까지 데려다줬으니, 그 값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구준서는 얼굴이 빨개진 채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려 애썼다.“아줌마, 저 돈 있어요. 그냥 우리 삼촌이 대신 보관하는 거예요.”정하준은 더 이상 놀리지 않고 고개를 돌려 턱짓했다.그러자 구준서는 바로 서하율의 손을 잡고 만둣가게로 달려갔다.정하준은 서이담을 힐끗 보더니, 그녀의 옅은 입술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저혈당이면 세 끼를 제때 챙겨 먹어야 해요. 영양도 균형 있게. 아침은 너무 늦게 먹지 말고 탄수화물은 꼭 먹어야 하고.”“네.”그는 발걸음을 옮겨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서이담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뒤따라 들어갔다. 그녀는 가게 주인 아주머니에게 자신이 계산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야 괜히 빚진 기분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정하준과 이렇게 다시 마주하게 된 뒤로 그녀는 계속 마음속 균형점을 찾고 있었다.그가 집까지 데려다주었다면 이 식사비는 그에 대한 답례가 되는 셈이었다.구준서는 정말 맛있게 먹었다. 만둣국을 먹으며 ‘살면서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다’라고 할 정도였다.하얗고 통통한 얼굴에 커다란 눈, 거기다 귀여움까지 갖춘 덕에 주인 아주머니는 그를 무척 귀여워하며 제철 채소 무침과 계란부침 두 개를 더 얹어 주었다.밥을 다 먹은 후 구준서는 식탁 밑에서 슬쩍 손을 내밀어 정하준을 불렀다.“외삼촌, 제발... 2만 원만 보내 주세요. 제가 두 배로 갚을게요.”여기서 남자의 체면이 땅에 떨어질 수는 없었다.정하준은 입꼬리를 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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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화

정하준은 묵묵히 운전을 이어갔다. 가는 내내 옆자리의 잔소리는 듣지 않은 척했다.집 앞에 도착하자 구준서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어른들이 뭘 알아요. 전 이미 아줌마랑 카톡도 했으니까, 기회는 있다고 봐요.”정하준은 갑자기 담배가 피고 싶어 손끝으로 가볍게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놨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녀석을 한번 보고는 거친 숨을 삼킨 듯 낮게 말했다.“그 사람 결혼했어. 너는 그 사람 딸이랑 동갑이고.”“나이 어린 게 제 잘못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요즘 누가 연하 안 좋아해요? 외삼촌은 몰라서 그래요. 아줌마 진짜 예쁘다니까요. 피자 줄 때 제 머리도 한번 쓰다듬어 주셨고, 향기도 좋고, 피부도 하얗고 웃을 땐 엄청 부드럽게 웃으시고... 아줌마도 분명 저를 좋아해요.”“너처럼 잘 먹는 뚱뚱한 애는 처음 봐서 그래.”“흥, 외삼촌은 그냥 제 매력을 깎아내리는 거예요. 아줌마는 제가 귀엽대요.”구준서는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 그는 스마트워치를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배터리가 다 닳아 있었고 서둘러 차에서 충전하며 카톡을 열어 보니, 서이담의 음성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고마워. 너도 귀여워.”구준서는 최대 볼륨으로 틀어서 정하준에게 들려줬다.“여자들 겉치레 말은 믿는 거 아니다. 예쁜 여자들은 다 거짓말 잘해.”“그럼 왜 외삼촌한테는 귀엽다고 안 하고 저한테만 귀엽다고 했을까요? 저한테만 그런 말 하는 건 호감 있다는 거죠.”정하준은 피식 웃으며 녀석의 통통한 볼을 꼬집었다.“너 보름 전에 학교에서 바지에 오줌 쌌을 때, 외삼촌이 데리러 갔던 거 맞지?”구준서는 귀까지 빨개졌다.“나... 아직 어리니까... 그리고... 그건 물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거예요.”그렇게 변명만 남기고는 차에서 내려 인사도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갔다.정하준은 차 문에 기대 담배를 꺼냈다. 정씨 집안 가사도우미 한씨 아주머니가 구준서의 작은 가방을 들고 오더니 물었다.“도련님, 오늘 저녁은 댁에서 드실 건가요?”“아니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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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화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학교 안엔 독감이 한창 돌고 있었다. 반에 한 명이라도 감기에 걸리면 순식간에 반 전체로 번져 버렸다.아이들은 면역력이 약하니 서이담은 혹시나 서하율이 옮을까 걱정이 됐다. 서하율은 심장이 약해 한번이라도 감염되면 일이 커진다. 그래서 그녀는 딸의 결석계를 내고 일주일 동안 학교를 쉬게 했다.그런데 정작 서이담이 먼저 열이 났다. 노인과 아이는 면역이 취약하니 박순자와 서하율에게 옮길까 봐 마스크를 꼭 쓰라고 했다.박순자는 오히려 웃으며 서이담의 체질이 서하율보다 약하다고 놀려주었다.서이담은 회사에 병가를 내고 아파트 단지 앞 작은 보건 진료소에서 사흘간 수액을 맞았다. 그런데도 차도가 없었다. 열은 오르락내리락했고 기운은 점점 빠졌다.점심 무렵 박순자가 죽을 가져다주며 말했다.“내일이라도 큰 병원 가서 피검사 좀 해보는 게 어때?”원래는 내일 가려고 했지만 몸이 너무 무거웠다. 그저 눕고만 싶었다.그러다 방문 앞에 서 있는 서하율과 눈이 마주쳤다.빨갛게 충혈된 눈 속엔 걱정과 불안만이 가득했다.서이담은 당장 달려가 아이를 안아 주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옮길까 두려워 발걸음을 멈췄다.서이담은 어려서부터 엄마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서하율을 낳았을 때, 그녀는 겨우 스물한 살이었다. 어떻게 엄마 노릇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서하율은 예쁜 천사 같았다.서하율이 세 살쯤이었나, 집 지붕이 새서 비가 들이쳤다. 비 오는 날이라 관리소 사람들도 올라오지 않았다. 하필 새는 곳이 거실 한가운데였다.서이담은 비닐 대야를 놓아 빗물을 받았다.그 모습을 본 서하율이 TV 속 어른들 흉내를 내며 또박또박 말했다.“서이담 씨, 나중에 내가 엄청 큰 집 사줄 거예요. 딱 엄마 혼자 쓰게.”대형 병원 수액 주사실.서이담은 마스크를 두 겹으로 쓰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른, 노인,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까지 사람이 바글바글했다.긴 줄 끝에 서서 기다린 끝에야 접수를 마치고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 앉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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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화

설령 박순자가 서하율을 데리고 이곳까지 찾아온다 해도 이 인파 속에서 서이담을 찾아내긴 쉽지 않을 것이다.하필이면 바로 그다음 순간 백서연과 정하준이 서이담의 옆자리에 앉았다.멍하게 어지럽던 머리가 단번에 맑아졌다. 서이담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턱을 점퍼 안으로 파묻은 채 얼굴을 옆으로 틀어 다른 쪽을 바라봤다.답답하고 불쾌하던 공기 속에서 남자에게서 풍기는 서늘한 기운이 보이지 않는 실처럼 서이담의 신경을 조여 왔다. 코는 막히고 목은 아팠지만 이상하게도 그 기운만은 또렷하게 느껴졌다. 마치 몸이 정하준의 모든 것을 예민하게 기억하는 듯했다.서이담은 고개를 들어 수액병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조금이라도 빨리 끝나기를.하지만 막 교체한 수액은 머리가 아픈 환자에게 쓰이는 만니톨이라 속도가 느렸다.정하준이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최명희 여사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서연이는 어때?]오늘 오전, 백서연과 진미현이 최명희 여사를 뵙겠다며 집에 찾아왔다. 요즘 최 여사는 독감에 걸려 목이 붓고 열이 나 집에서 요양 중이었다. 단순한 감기였지만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그런데 백서연이 잠시 뒤 몸이 좋지 않다며 힘들어했고 최명희는 혹시 자신이 옮긴 게 아닌지 미안해했다. 마침 오늘 밤 당직이었던 정하준이 병원에 데려온 것이었다.정하준은 괜찮으니 걱정 말고 푹 쉬라고 답장을 보냈다.“하준 오빠, 정말 죄송해요. 원래는 오늘 아주머니를 뵈러 간 건데, 제가 오히려 감기에 걸려 버리다니...”“물 많이 마시고, 수액 맞고 집에 가서 푹 쉬세요.”“네, 감사합니다. 하준 오빠.”백서연은 정하준 앞에서 회사에서와는 전혀 다른 작은 여자의 모습이었다.정씨 집안과 백씨 집안은 혼사를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조건이 맞는 집안이었고 서이담도 회사에서 김유린이 떠드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백 팀장 결혼이 머지않았다는 소문이었다.서이담에게는 시간이 유난히 느리게 흘러갔다. 그녀는 몰래 고개를 돌려 옆을 훔쳐봤다.바로 옆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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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화

간호사가 웃으며 말했다.“정 선생님, 여기 계셨네요.”정하준의 얼굴은 이 병원에서도 유명할 만큼 눈에 띄었다.간호사는 그의 옆에 있는 여자를 힐끗 보았다. 샤넬 니트에 베이지색 체크무늬 캐시미어 코트를 걸친 부잣집 아가씨 같은 세련된 차림새였다.백서연이 서이담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서이담 씨?”“네, 백 팀장님.”서이담이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를 벗었다.그녀의 쉰 목소리를 들은 백서연은 피식 웃었다.“어머, 이담 씨. 목소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어요? 아까는 알아보지도 못했네요.”그리고 옆에 앉은 정하준에게 소개했다.“하준 오빠, 이쪽은 제 부하 직원이에요. 예전에 우리 같이 밥 먹은 적 있잖아요, 다미정에서요. 기억나요?”백서연은 정하준이 이런 사소한 일을 기억할 리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저 형식적으로 말했을 뿐이었다.사실 그녀와 서이담은 사적으로 어울리는 사이도 아니었다. 서로 사는 세계가 달랐다.다만 서이담의 디자인 실력은 눈에 띄었고 봉규남 대표도 꽤 높이 평가하는 인재였다.그렇지만 어디까지나 평범한 집안 출신에 이혼 후 아이를 혼자 키우는 여자였다.백서연은 단지 정하준 앞에서, 그리고 회사 직원 앞에서 자신이 이렇게 ‘배려심 있고 친근한 상사’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다.서이담은 웃음만 지으며 대답을 더 잇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자기 신발과 바닥, 그리고 팔에 꽂힌 수액 줄을 바라봤다. 그러면서도 시선 한편으로 옆에 앉아 있는 정하준을 살짝 훔쳐봤다.간호사가 멀어져 간 뒤, 간호사 스테이션에 가서는 정 선생님 여자 친구를 봤다는 식으로 수군거림이 오갔다.서이담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몇 번이나 시선이 자신의 얼굴을 스치고 간다는 걸.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편한 기분이었다.옆자리에서 백서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정하준과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는 소리였다. 그러다 백서연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걸려 온 번호는 정하준의 어머니 최명희였다.“하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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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서이담은 오른쪽 문에 몸을 바짝 붙였다. 팔까지 문에 기대었지만 그게 아무 소용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문은 잠겨 있었다.최악의 상황까지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차창 밖으로는 드문드문 차량만 스쳐 지나가는 한적한 대로가 펼쳐져 있었고 이곳은 여전히 성운시 북쪽 외곽이었다. 양옆으로는 공장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으며 인적 드문 외딴 변두리였다.서이담은 가슴이 조여 왔다. 그럼에도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말했다.“아직 밤 여덟 시 반이잖아요. 그렇게 늦은 건 아니죠.”“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남편이 밖에 내보내다니. 나 같으면 절대 안 보낼 텐데.”운전기사의 시선이 서이담의 목덜미로 내려앉았다. 매끈하고 하얀 피부. 그는 혀끝으로 입술을 훑었다.서이담은 그 눈빛을 마주했다. 겉모습은 순박해 보였지만 시선만큼은 노골적이고 음란했다. 그녀는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 뛰었다.한 손은 가방 속 호신용 스프레이를 더듬었고 다른 손은 휴대폰을 꺼냈다. 창밖의 어두운 도로를 바라보며 허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고 무슨 상황인지 알려주려는 거였다. 어쨌든 이곳은 그의 공장에서 막 나온 길이었으니까.하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아마 바쁜 모양이었다.서이담은 서서히 조급해졌다. 머릿속엔 뉴스에서 보던 젊은 여성이 불법 택시 기사에게 끌려가 변을 당하는 장면이 스쳤고 손끝까지 떨렸다.자신은 참 운이 없다고 생각했다. 잠시 주저하던 그녀의 이마엔 식은땀이 맺혔다. 사실 당장 경찰에 신고하고 싶었지만 아직 이 남자가 직접적으로 무슨 행동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몇 마디 말을 건넸을 뿐이었다. 근거도 없이 신고했다가 괜히 상대를 자극하면 더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서이담은 평소 알고 지내는 남자가 거의 없었다. 디자인팀 동료들도 모두 여자였고 그녀는 카톡으로 장나연에게 현재 위치와 상황을 보냈다.장나연에게서 곧바로 답이 왔다.[무서워하지 마. 내가 우리 오빠 불러서 데리러 갈게.]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고개를 들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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