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다시 너의 세계로: Bab 31 - Bab 40

100 Bab

제31화

서이담이 정하준에게 선 좀 지켜달라고 말한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정하준이 손에 힘을 빼자 서이담은 재빨리 손을 빼고 떠날 준비를 했다.한 발 내디뎠지만 그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그는 긴 다리를 옆으로 뻗어 그녀 앞을 막았다.190cm에 가까운 키의 남자는 양팔을 그녀의 어깨 양옆 벽에 짚고 몸을 기울이며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고작 손바닥 하나가 드나들 정도였다.정하준은 서이담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을 떼지 않고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고2 2반엔 서이담이라는 애는 없었어. 그러니까 당신 대체 누구야?”서이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살이 찌푸려졌다.만둣가게에서 정하준은 몇 반이었냐고 물었고 서이담은 무심히 2반이라고 둘러댔다. 그런데 그는 정말로 확인까지 한 것이었다.“정 선생님, 제가 어디서 고등학교를 다녔는지, 몇 반이었는지는 선생님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에요. 우리 그렇게 친하지도 않고 지금 하시는 건 정상적인 의사와 환자 관계를 완전히 벗어난 행동이에요. 저...”서이담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저 신고할 수도 있어요.”정하준은 비죽 웃었다. 표정은 유난히 여유롭고 담담했다. 그러더니 이메일 주소 하나를 말해줬다. 자신이 속한 과 내부의 민원 전용 메일이라며 거기로 신고하면 더 빨리 처리된다고 했다.서이담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하준이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기억했어요?”“나 예전 이름은 김이담이야. 고2 때 2반이었고 다음 학기에 전학 가면서 성 바꿨어. 너한테 연애편지도 준 적 있어. 뭐, 너야 인기가 많으니까 편지 받은 여자애들 기억 안 나겠지만. 이런 대답이면 만족해?”서이담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녀는 실제 있었던 사실을 엮어 거짓말을 지어냈다. 그녀는 맑은 눈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겉으로는 전혀 동요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심장은 지금이라도 목구멍을 뚫고 튀어나올 듯 요동쳤다.김이담이라는 사람은 실제로 존재했다. 연애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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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정하준이 손을 놓았다. 손가락 끝에 약간의 물기가 묻어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낮고 잠긴 듯 울렸다.“미안.”그 뒤로 잠깐이면서도 길게 느껴지는 침묵이 이어졌다.서이담이 세면대를 떠나 화장실을 나설 때까지 정하준은 여전히 그 자리에 기대 서 있었다.그의 감정이 어떤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에 휘말려 있었다. 그게 조금 전, 여자가 눈가에 눈물을 머금고 자신을 보며 어쩐지 자조 섞인 비애를 띠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눈앞의 이 사람이 자신이 마음속에 떠올린 그 사람과는 분명 다른데 어딘가 조금은 익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인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그 익숙함은 강보람의 그림자를 아주 희미하게 닮아 있었다.정하준은 안다. 그녀는 강보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홀린 사람처럼 서로 전혀 다른 두 사람을 억지로 한데 맞춰보려 했다.그는 손끝으로 지친 듯 미간을 눌렀다.‘내가 미쳤지. 진짜 미친 게 틀림없어.’아마도 ‘김이담’이라는 이름 때문일 것이다.서이담이 짜낸 진짜와 거짓이 뒤섞인 이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그 덕분인지 두 사람의 관계는 다시 균형점을 되찾은 듯했다.그 한 달 동안 서이담이 정하준을 본 건 두 번뿐이었다.첫 번째는 병원에서였다. 그녀는 접수하고 박순자에게 줄 약을 타러 그의 진료실에 들어가 있었다.앞뒤로 채 4분도 안 되는 시간, 그렇게 들어갔다가 곧 나왔다.정하준은 평범한 환자 보호자를 대하듯 차갑고 고요한 목소리로 약 복용 시 주의 사항과 복용 후 2주 뒤에 다시 와서 수치를 확인하라는 말만 건넸다.두 번째는 쇼핑몰이었다. 서이담이 동료들과 함께 훠궈집에 갔을 때, 마침 백서연과 정하준도 그곳에서 식사하고 있었다.몇 사람이 한자리에 합석하게 되었고 누군가 장난스럽게 말했다.“백 팀장님, 남자 친구 생겼다면서요? 그럼 오늘은 팀장님이 쏘셔야죠.”백서연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아이참, 좋아요. 제가 쏠게요.”그녀가 정하준의 팔짱을 끼려 하자 그는 그 팔을 가볍게 뺐다.백서연이 잠시 그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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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화장실에서 나와 몇 걸음 옮기던 서이담은 걸음을 멈췄다.화장실은 복도 끝 모퉁이에 있었고 옆 창문이 열려 있어 그곳에 간이 흡연 구역이 마련돼 있었다.옅은 회색 셔츠를 입은 남자가 창가에 기댄 채 서 있었다. 그의 등 뒤로 바람이 스쳐 들어왔다.정하준은 창가에 기대 손끝에 담배를 집고 한 모금 빨았다가 자연스럽게 손을 아래로 내렸다. 손등 위로 도드라진 혈관이 뚜렷하게 드러났다.소매는 팔꿈치 위까지 걷어 올려져 있었고 그 혈관은 팔 안쪽까지 이어져 있었다.서이담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그를 향했다.정하준이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올려다봤다. 눈빛은 담담했지만 까만 눈동자는 깊게 빛났다. 둘의 시선이 잠시 맞물렸다.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서이담도 똑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인 채 앞으로 걸었다.두 사람은 그 어떤 불필요한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러 거리를 유지하는 듯 보였다.서이담이 막 지나간 직후, 한 여자가 화장실에서 나와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외쳤다.“저기요! 립스틱 두고 가셨어요!”하지만 서이담은 듣지 못했다.자리에 막 앉자 옆자리에 앉은 이세은이 의미심장하게 눈짓을 보냈다.서이담이 휴대폰을 열자 이세은 김유린 최가영과 함께 있는 4인 단톡방의 메시지가 이미 99개가 넘어 있었다.[나 방금 백 팀장 남친 사진 몰래 찍었는데, 이런 굴욕 각도에서도 잘생겼어.][인정. 진짜 모델 얼굴이다!][몰카에서도 잘 나오는 건, 진짜 잘생긴 사람만 가능하죠.][백 팀장 평소엔 사무실에서 잘난 척하더니, 남친 앞에선 완전 조신한 척이네.][그런데 내 눈엔 그 남자 백 팀장한테도 좀 냉담한 거 같던데요?][어, 나도 그렇게 봤어.][그래도 집안끼리 정략결혼 아니야? 곧 결혼하는 거 아냐?]누군가 김유린을 태그했다. 백서연의 비서인 김유린은 늘 정보가 빠르니까.[난 못 들었는데? 아마 조용히 진행하려는 거 아닐까?][그럴 수도. 재벌 결혼은 다 조용하잖아.][아니죠, 재벌 결혼은 엄청 화려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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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이세은은 평소에 패션 잡지를 즐겨 보고 또 고객관리팀에 있어 사람을 많이 접하다 보니, 남자 시계 브랜드를 바로 알았다. 그녀는 휴대폰으로 시계를 검색하느라 서이담 대답도 못 듣고 혼잣말처럼 말했다.“이거 꽤 마이너 브랜드인데, 디자인이 세련됐네요. 저 차보다 비싸요. 이런 마이너 브랜드 시계를 사는 사람은 웬만한 경력자 아니면 불가능하죠. 백 팀장님 남자 친구,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이세은은 원래 성격이 수다스럽고 호기심이 많은 편이었다. 서이담은 평소에 비교적 조용한 편이라, 이세은이 이런 얘기를 시작하면 좀처럼 끝나질 않았다. 둘이 길가에서 차를 기다리는 동안 서이담은 스치는 바람에 약간 서늘함을 느꼈다. 마침 그때 차가 도착했다.둘은 차에 올랐다. 이세은은 혼잣말을 이어가며 심심해하지 않았다. 서이담이 대답을 잘 안 하는 성격인 건 알았지만 의외로 그녀가 한마디 받아줬다.“집안끼리 어울리는 거겠지. 백 팀장 할아버지가 옛날에 참모총장이었잖아. 남자 쪽 집안도 만만치 않을 거야.”이세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겠죠. 부잣집 사람들은 그런 걸 제일 먼저 따지니까.”차가 몇 개의 교차로를 지나던 중, 앞이 막히기 시작했다.멀리 체육 경기장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운전기사가 투덜댔다.“아이고, 이럴 줄 알았으면 이 길로 안 왔지.”이세은이 창밖을 내다봤다.“아, 연예인 콘서트구나. 미리 알았으면 다른 길로 가자고 했을 텐데.”인기 절정의 가수 공연이라 체육관 주변은 팬들로 붐볐고 도로는 꽉 막혀 차가 거북이처럼 움직였다.서이담은 조금 피곤해졌다. 차 안에는 여름밤의 열기와 가죽 냄새가 섞여 답답했고 에어컨도 꺼져 있었다. 창문이 열려 있었지만 후끈한 바람이 들어올 뿐이었다. 저녁에 먹은 음식이 속에서 한 번 뒤집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최대한 불편한 기운을 억눌렀다.네 개 차선의 차들이 조금씩 앞으로 기어갔다.그때, 옆자리의 이세은이 서이담 팔을 살짝 잡았다.“저기 봐요. 백 팀장이랑 남자 친구 차도 저기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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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강보람은 담배 연기에 목이 메어 기침을 터뜨렸다.정하준의 가슴팍을 움켜쥔 채 몇 번을 연달아 기침하며 힘겹게 말했다.“여긴 학교야...”그는 사람들이 볼까 두렵지 않은 걸까?밤 열 시가 넘어 주변엔 인적도 뜸했다.그 순간 강보람은 은근히 그를 바라보며 기대하고 있었다.그땐 이미 살이 조금 빠진 상태였고 본래의 또렷한 이목구비가 서서히 드러날 무렵이었다.여자라면 누구나 예뻐지고 싶다. 더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예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건 당연했다.오늘 그가 올 거라는 걸, 밤에 만나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화장까지 하고 나왔는데 정하준은 그런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대신 불쑥 물었다.“너 하루 얼마 받아.”“5만 원.”강보람은 대답하고도 살짝 눈빛이 가라앉았다.“아르바이트 일당이 5만 원이거든.”정하준은 옅게 웃었다.“나 다른 건 안 물었는데, 너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야.”그리고 시계를 흘끗 본 뒤 덧붙였다.“나 7시 반부터 여기 있었어. 네가 만든 커피 두 잔이나 마셨는데, 한 번도 창밖을 안 보더라. 강보람, 네 눈은 장식이야?”“봤어.”강보람은 그렇게만 말했다.같이 아르바이트하는 동기들이 있었기에 그에게 다가가면 곧바로 들킬 게 뻔했다.그날 밤, 강보람은 시내 고급 아파트로 갔다.그가 건넨 작은 선물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여성용 시계가 들어 있었다.그리고 지금 그의 손목에 찬 것과 같은 디자인이었다.작지만, 독창적인 디자인의 고급 시계.소수의 상류층 사이에서만 유통되는 브랜드라 세상에 알려진 명품 브랜드보다 훨씬 드물고 값비쌌다.그때 강보람은 몰랐다. 명품이라 해도 이름난 브랜드 몇 개 정도밖에 알지 못했기에 그 시계가 어떤 가치를 가진 건지 알 수 없었다.정하준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별로 안 비싸.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샀어.”강보람은 믿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5만 원, 네 하루 일당.”그 시절은 지금처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 브랜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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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그때 최명희에게서 음성 통화가 걸려 왔다.백서연과는 잘 어울리느냐고 묻더니, 내일은 백서연의 어머니 진미현이 집에 방문할 예정이니 정하준도 들어오라고 했다.“엄마, 잘됐네요. 그럼 대신 거절해 줘요.”“아이고, 나 이 가슴이 다 아프네... 나 이러다 구급차 불러야 하는 거 아니냐...”“괜히 구급차 불렀다간 오늘 당직이 내 동료라 나까지 불려 가요. 약은 집에 넉넉하게 있으니까 그냥 약 드셔요.”세 시간 전에도 이 노모는 혈압이 오른 척하며 전화를 걸어, 백서연과 저녁을 같이하라고 성화였다. 그 말에 못 이겨 정하준이 약속을 받아준 참이었다.“이 싸가지 없는 놈, 나 이래서 혈압이 더 오르잖아...”최명희는 백서연의 어머니 진미현과 오랜 카드 친구였다. 매주 한 번은 모임을 가질 만큼 가깝고 백서연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아들이랑 잘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마음에 들든 아니든, 일단은 한 번쯤 만나봐야 한다는 생각이었다.“백씨 집안 딸이 마음에 안 들면 내가 대신 거절할게. 그럼 황씨 집안 딸은 어때? 미대 선생인데, 기품 있고 온화하더라. 시간 내서 한번 만나볼래?”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왜 말이 없어? 병원에도 있잖아. 오준철 딸도 너한테 호감 많다더라. 그 아가씨도 내가 봤는데 괜찮더구나.”정하준은 운전에 집중하며 듣고만 있었다.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어머니의 프로필 사진은 귀여운 동물 캐릭터였다. 얼마 전 조카가 장난으로 바꿔놨는데, 최명희가 그걸 또 마음에 들어 했다. 예순이 훌쩍 넘었는데 마음은 마흔 같았다.“엄마.”정하준이 말을 꺼내려는 순간 최명희가 먼저 말했다.“아무튼 난 몰라. 올해 안에 한 명은 꼭 데려와야 해. 네가 좋아하는 그 연예인들이라도 괜찮아. 엄마도 이제 인정할게. 아버지 쪽은 내가 설득할 테니까, 집안만 반듯하면 돼.”이건 최명희가 사실상 모든 조건을 풀어준 셈이었다. 예전엔 절대 연예계 사람은 며느리로 안 된다고 했으니까.최명희는 안락의자에 기대 밀크티를 한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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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막내아들이 어떤 성격인지, 아버지로서 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어릴 적부터 영특했고 두 형보다도 뛰어났다. 그 일만 아니었다면...어린 시절, 정하준은 형의 죽음을 목격하며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쌍둥이 형 정하성이 그 끔찍한 납치 사건에서 정하준의 눈앞에서 잔혹하게 범인에게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그 충격 이후, 정하준의 성격은 완전히 바뀌었다. 예전엔 집안의 ‘작은 폭군’처럼 활발하고 장난기 많던 아이가 그날 이후로는 말수가 적어지고 차갑고 멀어졌다.정씨 집안 장남 정도현은 옛 친구의 아들로, 늘 곁에서 함께 자라며 정하준에게도 존경받는 형이었다.정윤범은 원래 두 아들이 함께 태한 그룹을 이끌기를 바랐다.하지만 뜻밖에도 정도현은 상업이 아닌 의학의 길을 선택해 스스로 해외로 떠난 뒤 7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가문의 권력 다툼에 끼어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정윤범은 내심 친아들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그 아가씨 말이야... 내가 보기엔, 하준이가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것 같아.”정윤범도 딱히 고리타분한 사람은 아니었다. 요즘 세상에야 다들 스스로 연애하는 게 당연했고 그는 아들의 혼사를 집안 간의 정략으로 묶고 싶지 않았다.“집안 배경만 깨끗하면, 평범해도 상관없어. 막내가 정말 좋아한다면, 그게 오히려 더 좋은 일이지.”“하지만 그 아가씨가 이미 결혼했다면 그래도 마음에 우리 하준이가 있다면...”“최명희!”정윤범이 눈살을 찌푸렸다.“당신,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그냥 생각만 해본 거지.”최명희는 귀를 후비며 태연하게 대꾸했다.“소리를 왜 질러.”“그런 건 생각도 하지 마!”정씨 집안은 백 년을 이어온 명문가였다. 어디까지 망가져야 이 집 대문 안으로 ‘이혼한 여자’를 며느리로 들이는 일이 가능하겠는가.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정윤범은 죽어서 귀신이 되더라도 대문 앞에 서서 그 황당한 결혼을 막아설 게 분명했다.정하준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 부모가 침대 위에서 이런 실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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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목요일, 정하준은 당번을 조정해 오후에 시간을 냈다. 그리고 차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로 예약을 잡았다.차성병원은 제일병원과는 꽤 거리가 있었다. 구를 하나 넘어서 성운시 송북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정하준은 제일병원의 의사이자 젊은 세대의 선두 주자였다. 게다가 병원 측에서 진행하는 홍보 마케팅 덕에 의료계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드물었다.심리 상담이라고 해서 부끄러운 건 아니지만 현대인 대부분이 크든 작든 마음의 병을 안고 산다고 해도 막상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털어놓는 일은 쉽지 않았다.순서가 다가오자 정하준은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입꼬리에 자조적인 웃음이 스쳤다.아마 지금이야말로 환자들이 왜 의사가 병 고치는 건 괜찮아도 자기 병은 숨기고 싶어 하는지 그 심정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일 것이다.마음속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에게 꺼내놓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이 답답함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다른 방법도 없었다.정하준은 결국 문을 열고 들어갔다. 상담을 맡은 건 곽씨 성을 가진 여의사였다.간단히 몇 가지를 물어본 뒤, 정하준은 요즘 자신이 겪는 심리 상태를 이야기했다.그녀가 곧장 물었다.“혹시 좋아하나요? 첫사랑 말이에요.”정하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마스크를 낀 채 앉아 있는 그를 보며 여의사는 다시 물었다.“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어떤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사귀게 된 건가요?”그 말에 정하준은 본능적으로 짧게 반박했다.“다른 얘기 하죠.”여의사는 그를 한 번 더 살피더니, 미소를 지었다.“혹시 그 사람이 예쁘지 않다거나, 당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나요? 그래서 연인이 된 걸 부끄럽게 여긴 건 아닌가요?”그는 고개를 저었다.“그렇진 않습니다.”“그럼 헤어졌을 때는 후련했나요?”정하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다른 질문 하시죠.”“그럼, 누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죠?”그는 깊게 숨을 내쉬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만으로도 여의사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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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그 해, 정하준이 그 말을 꺼냈을 때 솔직히 그녀를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여의사가 그를 한번 바라봤다. 눈앞의 남자는 타고난 엘리트의 기품을 지니고 있지만 연애 얘기만 나오면 머릿속이 뒤엉킨 사람 같았다.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선물을 돌려준 걸 내심 못마땅해하고 어리석다고 하면서도 그녀의 노력과 끈기를 누구보다 잘 기억하고 있었다.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함께한 순간들의 세세한 장면을 또렷이 떠올린다.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건 처음엔 외모 때문일 수도 있다.첫눈에 반했든, 외모에 마음이 끌렸든, 결국은 오래도록 부대끼며 지내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법이다.그가 말한 그 여자는 아마도 첫눈에 반한 건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래도 끝내 잊지 못하는 사람이었다.“왜 헤어졌나요?”“그때... 제가 유학을 가야 했습니다.”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성운시에 남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형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태한 그룹의 후계자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았다.어린 시절의 그 끔찍한 납치 사건에서 그는 쌍둥이 형을 잃었다. 그날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말썽꾸러기였던 성격이 하루아침에 변했다.차갑고, 무심하고, 사람과 거리를 두는 아이로.“들어보니... 참 귀엽고 진솔한 여자였네요.”정하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그 사람이 꿈에 자주 나오고 또 다른 여자를 꿈에서 보는데... 그 여자에게도 욕망을 느끼고 있네요. 둘이 닮았다고 느끼지만 전혀 다른 사람인데 그 여자를 첫사랑의 대용품으로 보고 있는 건가요?”“아닙니다.”정하준은 단호했다. 서이담이 강보람과 비슷한 느낌을 주긴 했지만 그녀가 김이담이라는 걸 알게 된 뒤로는 자신의 생각이 우스울 만큼 황당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졌다. 그래서 서이담과 가끔 마주칠 때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당신이 묘사한 첫사랑을 보면, 사실은 유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헤어진 걸 후회하고 있는 겁니다. 또 그 사람이 진짜로 당신과 헤어졌다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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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마치 안개가 걷히듯 마음속 깊은 곳을 찌르는 말이었다.정하준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손은 문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다.“정하준 씨, 여자 관점에서 당신 얘기를 들으면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 사람은 당신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스스로를 너무 자격 없다고 느끼고, 예민하고,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어요. 당신 말에 따르면 그 사람은 첫눈에 반할 만큼 예쁜 얼굴로 당신을 사로잡은 게 아니었죠. 조금 통통한 체형에, 어떤 일과 수단으로 당신을 위협해 억지로 사귀게 했고 그 사람도 알았을 거예요. 당신과의 관계가 오래가지 않을 거란 걸.”의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갔다.“그 사람은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성실하고, 착했죠. 마치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도 꿋꿋하게 자라는 들풀처럼요. 생활이 빠듯한 상황에서도 다리를 다친 길고양이를 구하려고 일주일을 굶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요... 당신은 그걸 어리석다고 했지만 결국 그런 모습에 끌렸던 거 아닐까요? 사실 당신도 그 고양이를 구해주고 싶었을 테니까요. 당신도 속은 부드럽고 선한 사람이에요. 다만 껍질이 다를 뿐이죠. 그 사람이 당신을 위협해 남자 친구가 되게 했을 때, 그건 동시에 그 사람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무언가를 포기했다는 뜻이기도 해요. 당신처럼 빛나는 사람과 달리, 그분 인생에 비친 한 줄기 빛이 바로 당신이었을 거예요. 당신은 ‘비밀 연애’라고 말했지만, 그 사람에게는 그게 어둠 속의 한 점 불빛이었을 수도 있어요.”정하준은 순간 멍하니 굳었다. 눈빛이 서서히 깊어졌다. 귓가에 강보람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올랐다.‘난 도둑이 아니야. 넌 날 믿어?’“그분이 이미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면, 이제는 축복해 주세요.”돌아오는 길, 정하준은 차를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몰았다. 의사의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그는 강보람을 축복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 그녀의 소식을 캐고 다니고 싶지도 않았다. 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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