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다시 너의 세계로 / Chapter 61 - Chapter 70

All Chapters of 다시 너의 세계로: Chapter 61 - Chapter 70

100 Chapters

제61화

“삼촌, 우리도 꽃 보러 가요.”정하준은 자신을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서이담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싫어.”“삼촌, 나도 꽃 보러 가고 싶단 말이에요.”구준서가 팔을 잡아당기며 떼를 썼다.“2호관 가면 네가 좋아할 만한 과자들이 한가득 있을 거야.”구준서는 그 말에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거기로 가요.”‘선 그으려는 사람한테 굳이 다가갈 필요는 없지. 어차피 우리는 그냥 의사와 환자 보호자로 몇 번 본 게 다인 사이였잖아.’정하준은 그렇게 생각하며 구준서를 데리고 2호관으로 향했다.서이담에게 흥미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고 왠지 모르게 편하기도 했으니까.하지만 서이담은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는 유부녀였다. 게다가 지금은 티 나게 선까지 그으려고 하고 있다.상대방이 그럴 마음이 없다는데 정하준도 굳이 다가갈 이유는 없었다.2호관.이곳은 과자와 디저트 천지였다. 평소보다 가격이 두 배나 비싼데도 아이들과 함께 와서 그런지 부모님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어 돈을 지불했다.정하준은 먹보인 조카를 위해 선뜻 20만 원을 보내며 스마트 워치로 원하는 것을 사게 했다.“삼촌, 나 아이스크림 먹을래요.”정하준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구준서가 오버하며 얼마 나지도 않은 땀을 닦아냈다.“아까부터 계속 걸어만 다녔더니 땀이 엄청 많이 났어요. 그래서 아이스크림을 꼭 먹어야 해요.”“알았어. 먹어.”동의가 떨어지자 구준서는 활짝 웃으며 아이스크림 가게 직원을 바라보았다.“누나, 아이스크림 4개 주세요. 저는 딸기 맛으로 주시고요. 삼촌, 삼촌은 어떤 맛으로 먹을래요?”아이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나는 됐으니까 3개만 사.”“네.”구준서는 말을 마친 후 이번에는 스마트 워치로 서이담에게 전화를 걸어 원하는 맛을 물었다.“바닐라 아이스크림이랑 초코 아이스크림도 주세요.”“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직원은 주문을 받은 후 곧장 안쪽으로 들어
Read more

제62화

“따, 땅콩 알레르기요.”구준서가 버벅거리며 답했다.“하율이한테 들었어요. 하율이도 이담이 아줌마도 두 사람 모두 땅콩 알레르기가 있다고.”‘삼촌 얼굴 너무 무서워...’“사, 삼촌...”그때 직원이 아이스크림 세 개를 구준서에게 건네주었다. 구준서는 서이담과 서하율의 아이스크림을 아이스팩이 담긴 포장 주머니에 넣고는 딸기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었다.정하준은 구준서의 팔을 잡아 의자에 앉힌 후 굳은 얼굴로 당부했다.“구준서, 여기 앉아서 삼촌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알았지?”“네.”아이스크림을 손에 쥐고 있어서 그런지 아이는 흔쾌히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정하준은 곧장 2호관에서 나와 1호관 쪽으로 달려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 뛰고 호흡이 가빠져 오며 손도 미세하게 떨려왔다.머릿속으로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그럴 리가 없다고 여기면서도 그는 한편으로 그 생각을 믿고 싶었다.만약 그 생각이 맞으면, 그러면...정하준은 인파를 누비다 곧바로 하늘색 니트를 입은 여자의 뒷모습을 발견해 냈다.그는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폭발시키듯 여자의 등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강보람!”큰 소리로 불렀는데도 불구하고 여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애먼 주변 사람들의 시선만 꽂혔다.정하준은 앞으로 몇 걸음 더 걸어가 여자의 손을 빠르게 낚아챘다.“어머, 이게 무슨 짓이에요?”낯선 여자의 얼굴이 보이고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이담이 아니었다.정하준은 손을 놓아주며 낮은 목소리로 사과했다.“미안합니다.”사람을 착각하고 나니 머리도 다시 이성적으로 돌아오는 듯했다.생각해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 단지 땅콩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강보람과 서이담을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해 버렸으니까.두 사람은 같은 사람일 리가 없었다.단지 몸매가 다른 것뿐만이 아니라 강보람은 서이담보다 키가 조금 작았으니까. 게다가 전에 봤던 차트에서 강보람은 분명 남자아이를 낳았다고 적혀있었다.‘서이담은
Read more

제63화

정하준의 시선이 토끼에게로 향했다. 너무나도 익숙한 토끼였다.“알게 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선물을 줘? 거짓말로 널 살살 꼬드기려는 여자면 어쩌려고.”“원래 여자는 이런 식으로 꼬시는 거랬어요.”구준서가 고개를 쳐들며 삼촌이 뭘 아냐는 식의 눈빛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삼촌이 아니면 오르골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 애교를 부리며 정하준의 팔을 이리저리 흔들었다.“삼촌, 나 돈 좀 빌려줘요. 네? 이담이 아줌마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꼬신다는 말도 네 아빠가 가르쳐줬어?”정하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토끼를 빤히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구준서의 이마를 밀어냈다.“토끼한테 꿀벌의 날개를 달아주는 발상은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정하준의 불만 섞인 말에 직원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손님, 안목이 있으시네요. 이 오르골의 디자인은 올해에 막 나온 신상 디자인이에요. 아이들이 예쁘다면서 여기로 올 때마다 하나씩 구매해 가요.”“못생겼어.”정하준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해당 디자인을 그는 이미 7년 전에 본 적이 있었다.구준서는 기분이 영 별로인 정하준을 바라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삼촌에게서 돈을 빌리는 건 무리인 것 같았다.‘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 엄마가 내 금고까지 털어간 바람에 좋아하는 사람한테 잘 보일 기회도 사라져 버렸잖아!’구준서는 역시 남자는 돈이 있어야 한다며 어른들이나 할 법한 생각을 했다.직원은 직설적인 정하준의 발언에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아무리 자기가 잘생겼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 하잖아.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쪽으로 가던가 왜 오르골을 앞에 두고 못생겼대. 그리고 이렇게 귀여운 게 또 어디 있다고!’직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얼른 다른 손님 쪽으로 갔다.구준서는 입을 삐죽인 채 오르골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려 잔액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보는데 마침 나무 블록으로 된 장미꽃이 눈에 띄었다.이거는 충분히 살 수 있었다.그때 구준서의 시야로 익숙한
Read more

제64화

창밖은 어느새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서이담은 뻐근한 목을 마사지하며 잠깐 휴식을 취했다.그때 노트북에 알림음이 울리며 [너의 왕자]로부터 카톡이 도착했다.[아줌마, 바빠요?][아니, 괜찮아. 준서는 어때? 배 아픈 건 조금 나아졌어?][네, 이제는 괜찮아졌어요. 아까 병원에서 안 아프게 해주는 주사 맞고 왔어요.][주사도 맞았어? 준서 대단하네.][헤헤. 아줌마, 혹시 어렸을 때 부모님이 불러줬던 이름 같은 거 있어요?]구준서는 호칭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해 서이담과의 거리를 좁혀갈 생각이었다.[저는 가족들이 준서 말고 가끔 레오(leo)라고 불러요. 그게 제 태명이거든요.]서이담은 태명이 따로 없었다. 그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어릴 때 강보람의 마지막 글자를 따 ‘람이’라고 불러준 적이 있을 뿐이었다.서이담 쪽에서 아무런 대답도 없자 구준서가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혹시 앞으로는 아줌마 말고 담이 이모라고 불러도 돼요?][당연히 되지.][혹시 전에 누가 이런 식으로 불러준 적 있어요?][없어. 레오가 처음이야.]서이담은 구준서와 계속 대화를 이어가면서 부엌으로 가 불닭볶음면을 끓였다. 사실 제대로 된 요리를 할까도 했지만 서하율이 너무나도 잘 자고 있는 바람에 라면으로 충분해졌다.서이담은 구준서와의 대화가 즐거운 듯 라면을 먹으면서도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구준서는 구김살이 하나 없는 아주 밝은 아이였다. 그래서일까, 매번 보고 있으면 웃음만 나왔다.만약 그녀의 아들이 살아있었다면 구준서와 같은 나이였을 것이다.잠시 후, 서이담이 라면 하나를 거의 다 먹어갈 때 갑자기 구준서가 영상통화를 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이에 서이담은 흔쾌히 알겠다며 수락했다.구준서는 잔뜩 흥분한 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아이는 예쁘게 머리를 만진 후 이번에는 옷장 앞으로 달려가 제일 아끼는 가죽 재킷을 꺼내 입었다.서이담은 자신과 영상통화를 하기 위해 엄청 신경 쓴 듯한 아이의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환한 웃음을
Read more

제65화

구준서는 서이담의 목소리에 더 높게 점프하며 휴대폰을 되찾으려고 했다.그 모습을 본 정하준은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리더니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레오, 엉덩이 제대로 닦고 온 거 맞아? 삼촌이 한번 확인해 볼까?”“아! 삼촌!”구준서가 주먹을 꽉 말아쥐며 정하준을 노려보았다. 화가 난 건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버렸다.아이는 씩씩거리더니 이내 창피한 듯 이불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무릎을 꽉 끌어안았다.‘삼촌 미워! 외할머니는 크면 삼촌처럼 잘생겨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싫어! 삼촌은 너무 못 됐어. 어떻게... 어떻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구준서는 씩씩거리며 오늘은 정하준과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을 거라고 결심했다.정하준은 둥글게 말려있는 구준서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휴대폰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또다시 허공에서 부딪쳤다.꼭 슬로우 모드라도 걸린 것처럼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서이담은 정하준의 입가에 걸려있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보고는 손을 움찔했다. 이 미소는 그가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만 보여주던 미소였다.서이담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이만 영상 통화를 끊으려고 했다.그런데 그때 정하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박순자 씨, 퇴원한 지 한 달 정도 됐죠? 시간 내서 병원에 들르라고 하세요. 채혈하고 몸 상태를 한번 확인해 보는 게 좋겠어요.”“네, 알겠어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정하준은 환자 대하듯 딱딱하게 끄덕이고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는 휴대폰을 구준서의 옆에 내려놓고는 아이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렸다.“구준서, 협탁 위에 물 놓아뒀으니까 잊지 말고 마셔.”구준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다가 정하준이 나간 뒤에야 다시 이불속에서 튀어나왔다.아이는 가장 먼저 휴대폰을 들어 서이담에게 기다란 문자를 보냈다.[담이 이모, 삼촌이 한 말은 잊어버려요. 나는 엉덩이를 제대로 닦을 줄 아는 남자예요. 할머니가 그랬어요. 삼촌은 성격이 이상해서 가끔 이
Read more

제66화

서이담이 의아해하며 물었다.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정하준과 정도현 외의 다른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둘째 삼촌은 이 세상에 없어요. 지금 제 나이였을 때 유괴를 당했다고 했어요. 엄청 듬직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고 할머니가 늘 나한테 얘기해줬어요.]구준서는 태어나서 한 번도 정하성을 본 적이 없었기에 많이 슬퍼하지는 않았다. 최명희가 정하성에 관해 얘기해줄 때도 할머니가 많이 슬퍼하는구나 라는 감정밖에 느끼지 못했다.구준서는 가문의 비밀을 외부인에게 발설해 버렸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금방 화제를 돌리며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서이담은 아이의 말이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은 온통 정하준의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그건 대학교 1학년이었을 때였다.서이담은 정하준의 아파트로 가 그가 올 때까지 밤새 기다렸다. 하지만 정하준이 집으로 돌아온 건 동이 트고 나서였다.밤새 비가 내린 것도 아니었는데 정하준의 몸은 물기로 가득했다. 꼭 습하고 찬 곳에서 밤을 새우고 들어온 것 같았다.안으로 들어온 그는 아무 말 없이 침대로 가 눈을 감았다.서이담은 수업이 있었기에 아침을 준비해 준 후 조용히 집을 나섰다. 오후에 다시 돌아와 보니 아침밥은 그대로 있었고 정하준은 열이 나고 있었다.눈을 질끈 감은 채 빨개진 얼굴로 미약한 숨을 내뱉는 것이 매우 안쓰럽게 느껴졌다.그때 그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대로 안 들렸던 탓에 서이담은 그의 바로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내가 죽어야 했는데.”정하준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는 자기가 죽어야 했다는 말이었다.서이담은 그날, 밤새 눈 한번 붙이지 않고 그를 돌봐주었다.하지만 약을 먹이면 금방 토해버렸고 다시 입에 넣어주려고 하면 몽롱한 얼굴로 서이담을 바라보며 멀리 꺼지라고 했다.결국 서이담은 약이 아닌 젖은 수건으로 그의 열을 내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시도 또한 막혀버리고 말았다.고열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데다 아무것도 먹은 게 없어 위까지 아프기 시작한 정하준은
Read more

제67화

12월에 진입하자마자 일주일 내내 비가 내렸다.퇴근하고 나온 서이담은 택시를 잡으려다가 지난번의 트라우마가 떠올라 결국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회사 건물에서부터 지하철역까지는 대충 8분 정도만 걸으면 도착할 수 있었다.서이담은 코트를 단단히 여민 채 우산을 들고 앞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기 때문에 몸이 덜덜 떨렸다. 빗물도 바람 때문에 더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힘껏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빗소리가 워낙 컸기에 서이담은 금방 환청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그러자 이번에는 가방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비 오는 날이라 휴대폰을 꺼내는 것도 상당히 귀찮았다.하지만 그럼에도 인상을 쓰며 휴대폰을 꺼내 보니 구준서가 보낸 음성 메시지가 보였다.무슨 말을 보내온 건지 들으려는데 뒤편에서 차량 불빛이 그녀를 환하게 비추었다.서이담은 불빛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뜬 채 차량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 확인했다. 익숙한 번호판과 함께 운전석에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담이 이모, 어서 타요!”구준서가 차창을 내린 채 그녀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서이담은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뒷좌석에 올라탔다. 빵빵하게 켜져 있는 히터 덕에 얼어붙었던 몸이 금세 녹아내렸다.차 안 가득한 은은한 향수 냄새에 서이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앞으로 돌려 정하준을 바라보았다. 정하준은 앞을 응시한 채 아무 말 없이 운전만 하고 있었다.“저는 지하철역 앞에 내려주시면 돼요.”정하준은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차량은 금세 지하철역을 스쳐 지나갔다.이에 서이담이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자 구준서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먼저 말했다.“담이 이모, 손이 너무 차요. 내가 따뜻하게 해줄게요.”서이담은 아이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고마워.”말을 마치자마자 앞쪽에서 남자의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삼촌은 원래 저래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저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으니
Read more

제68화

그러고는 서이담의 품으로 숨었다.서이담은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미소를 지었다. 정하준이 러브레터를 많이 받은 것쯤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그녀 역시 정하준에게 보낸 적이 있었으니까.“담이 이모는 남자한테 러브레터 준 적 있어요?”“응.”서이담이 시원하게 인정했다.정하준은 그 말에 룸미러로 그녀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다정한 미소를 흘리고 있는 것이 꼭 구준서의 엄마 같았다. 그래서일까, 차 안 분위기가 그녀로 인해 한결 좋아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정하준은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는 다시 앞을 응시했다.단지 앞에 도착한 후 서이담은 아이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태워줘서 고마워요, 선생님.”정하준에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딱딱한 말투가 아닌 매우 온화한 말투였다.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정하준은 서이담이 들어간 후 차창 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몇 초간 더 바라보았다. 그러다 빗물이 안으로 새어들어들 때쯤 다시 차창을 올리며 시동을 걸었다.“삼촌은 나랑 담이 이모가 이어지는 게 싫은 거죠? 그렇죠?”구준서가 심각한 얼굴로 정하준을 바라보았다.정하준은 아이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운전에만 집중했다.“삼촌이 아무리 방해해도 나는 포기 안 해요. 삼촌은 나랑 담이 이모를 절대 갈라놓을 수 없어요!”“대체 허구한 날 애한테 어떤 드라마를 보여주는 건지.”정하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아이의 목소리가 시끄럽다는 듯 노래를 틀었다.“삼촌, 내 말 듣고 있어요?”구준서가 포기하지 않고 큰 소리로 물었다.“다음번에 선생님이 부모님한테 전화하라고 하면 나 말고 네 아빠한테 해.”정하준의 말에 구준서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계속 재잘거렸다가는 다음부터 삼촌을 부려 먹을 수가 없을 테니까.구준서를 집에 데려다준 후 정하준은 곧바로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최명희가 다가와 그의 앞을 막아섰다.“비도 오는데 오늘은 그냥 여기서 자고 가.”“네모가 집에 혼자 있어요
Read more

제69화

안경준의 결혼식이 있기 며칠 전, 친구들끼리 함께 하는 술자리가 열렸다.뒤늦게 퇴근하고 참석한 정하준은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온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며 오랜만에 술을 마음껏 들이마셨다.“서연이 왔어.”그때 누군가가 문 쪽을 바라보며 외쳤다.안경준은 백서연의 얼굴을 보자마자 정하준의 어깨를 툭툭 치며 눈빛을 보냈고 다른 친구들도 너도나도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정하준을 바라보았다.정하준은 친구들의 시선에 피식 웃으며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술이 들어간 탓인지 사람 전체가 매우 나른해 보였다.정하준은 자기 쪽으로 다가오는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백서연은 누구라도 인정할 만한 예쁜 얼굴이었다.백서연은 얼굴을 핑크색으로 물들이며 그의 곁에 앉았다.“하준 오빠, 술 많이 마셨죠? 이제 그만 마셔요. 그러다 속 버려요.”안경준의 여자 친구인 기은영이 웃으며 백서연에게 말했다.“얼씨구, 누가 보면 오빠 와이프인 줄 알겠어. 이참에 너도 나랑 같이 식 올리는 거 어때?”“너는 농담을 해도 꼭.”백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정하준의 표정을 살폈다.정하준은 셔츠 단추 두 개를 푼 채 한 손을 소파 위에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은 잔을 들고 빙빙 돌리고 있었다.술을 많이 마신 건지 흰 피부가 조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조금 흐트러진 그 모습도 매우 섹시하게 느껴졌다.백서연은 평소와 달리 풀어진 표정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술자리가 계속 이어지던 중, 안경준과 기은영은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친구들이 다 보는 앞에서 서로를 끌어안으며 입을 맞췄다.친구들은 함께 온 파트너 여자를 옆에 낀 채 큰 환호를 질렀다.그러다 누군가가 정하준을 바라보며 말했다.“경준이 다음으로 장가들 사람은 역시 우리 하준인 건가?”상류사회에서 정략결혼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다들 가문을 더 크게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자식들을 약혼시키는 집안도 드물지 않았다.실제로 이익이 맞는 가문끼리 이어지면 큰
Read more

제70화

정하준은 인사를 건네온 남자가 누군지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말에 예의상 미소는 지어주었다.“내 이름은 진수호야. 고등학교 때 체육부장이었어.”진수호가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명함을 건네받은 정하준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눈썹을 살짝 끌어올리며 물었다.“너희 반에 김이담이라는 애 있지 않았어?”“김이담?”진수호는 기억을 훑어보고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있었어. 내 뒷자리여서 기억나.”사실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그저 김이담이라는 여자애가 같은 반에 있었다는 것만 기억이 날 뿐 얼굴이나 성격 같은 건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하지만 정하준이 물은 거였기에 기억이 안 나도 나는 척을 해야만 했다. 일단은 대화의 물꼬를 텄으니까.진수호는 자리로 돌아간 후 동창들에게 연락을 돌리며 김이담에 관해 물었다. 그러다 술자리가 거의 끝나갈 때쯤 다시 정하준의 곁으로 다가와 자신이 얻어낸 정보를 얘기해주었다.“이담이는 지금 성운시에 있어. 본가는 백현읍이고. 몇 년 전에 성운시 남자랑 결혼했대. 혹시 이담이를 만나고 싶은 거야? 그럼 내가 연락처 알아내 줄게.”정하준은 술을 많이 마신 것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워 이만 집에 가려 했다가 김이담의 얘기에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하지만 별다른 표정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그저 잠깐 멈춰 섰을 뿐 이내 다시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집으로 돌아온 정하준은 힘든 몸을 이끈 채 소파로 가 털썩 앉았다.탁자 위에는 그가 얼마 전에 받은 토끼 오르골이 놓여있었다. 토끼는 오늘도 어김없이 조금 우스운 자태를 뽐내며 천천히 돌고 있었다.정하준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음악을 꺼버리고는 눈을 감았다.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숨을 쉬는 것도 조금 힘이 들었다.“네모야, 네가 한번 얘기해 봐. 내가 대체 왜 이러는지.”정하준의 입에서 힘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왜 시도 때도 없이 주마등처럼 과거 일이 떠오르는지 그조차도 알 수 없었다.
Read more
PREV
1
...
5678910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