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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 Kapitel

제271화

구준오는 웃는 얼굴만 걸친 채 양가죽 장갑을 벗어 던졌다.“도진 형은 튀는 거 싫어해. 형수님도 이 바닥 사람이 아니야.”주민혁은 골프채를 캐디에게 툭 넘겼다. 옆에서 누군가 눈치 빠르게 뚜껑까지 따 놓은 물병을 내밀었다. 주민혁의 시선이 코스 구석에 있는 고은율 쪽으로 천천히 고정됐다. 주민혁은 턱을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구 대표, 가려는 거야? 고은율 씨도 불러서 인사나 시키지 그래. 앞으로 이 판에서 얼굴 자주 볼 텐데, 나도 좀 챙겨 줘.”진호영이 이를 악물고 한 발 내딛는 순간, 구준오가 진호영의 팔꿈치를 낚아챘다. 구준오는 고개를 아주 작게 저었다. 그냥 참으라는 뜻이었다.“둘 다 그렇게 긴장하지 마.”주민혁이 고개를 들자 이유를 모를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내가 너희 앞길을 가로막겠다는 말은 안 했잖아.”주민혁은 손을 휘휘 저었다.“그냥 가.”고은율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른 채, 카트에 올라탔다. 고은율이 머리끈을 툭 잡아 빼자 폭포처럼 긴 머리카락이 등 뒤로 쏟아졌다. 허리 잘록한 데까지 내려오는 길이었다.주민혁의 시선이 끝까지 고은율을 따라갔다.진호영이 홱 뒤돌아 주민혁을 노려봤다. 이를 갈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저 새끼는 성이 주씨라고 명원시에서 아주 안하무인이네. 오늘 일은 그냥 못 넘겨. 이 모욕감은 절대 못 참아.”진호영은 휴대폰을 두드리며 쉴 새 없이 타자하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 손을 뻗어 휴대폰을 낚아챘다.구준오였다.“못 참으면 네가 직접 해. 도진 형이 뭘 하길 바라는데? 도진 형이 뭘 하겠어.”구준오가 이를 악물고 말을 뱉었다.“내가 전에 했던 말, 다 잊었냐? 넌 대체 언제 철들 건데.”고은율은 거울 보며 화장을 고치다가 둘을 힐끗 봤다.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무슨 말이야? 하나도 모르겠어. 못 참겠다는 게 뭔데? 그게 도진이랑도 관련이 있어?”“별거 아냐. 호영이가 또 발작한 거야.”구준오는 차갑게 잘라 말하고 화제를 돌렸다.“내일 촬영 들어가?”“응.”고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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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2화

“아니, 불러 와. 막다른 골목에 잘못 들어선 개가 아직 무슨 패를 숨겼는지 좀 보자.”주민혁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입가에는 의미 모를 웃음이 걸렸다.“진씨 가문 자식이 하도진이랑 동서 사이라며? 미쳐 버릴 때까지 몰아붙이면, 의외로 쓸모 있는 개가 될지도 모르지.”송지훈이 검사 결과지를 들고 병실 문을 밀어 열었다. 주변을 한 바퀴 훑었지만 민하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송지훈은 미간을 찌푸리고 툴툴거렸다.“민하윤 씨는 어디 갔어? 설마 그냥 가 버리고 널 혼자 여기 던져둔 거야?”하도진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못마땅한 눈으로 송지훈을 쳐다봤다.“안 갔어. 1층 창구에서 비용을 지불하고 있을 거야. 곧 올라오겠지.”“난 민하윤 씨를 욕한 게 아니거든?”송지훈이 투덜대며 서류를 넘기다가 갑자기 크게 숨을 내쉬더니 손에 든 종이 뭉치를 흔들며 말했다.“그래도 다행이야. 폐렴이나 심근염까지는 안 갔어. 세균성 감기인데, 비 맞고 몸살까지 겹쳐서 고열이 난 거야. 며칠 입원해서 링거 맞으면 돼. 큰일은 아니야.”병실 문은 살짝 덜 닫혀 있었다. 민하윤은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 멈춰 서 있다가, 큰일은 아니라는 말을 듣는 순간 힘이 빠지듯 안도의 숨을 삼켰다.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면서 문을 열려는 찰나였다.“난 입원 안 해.”하도진이 송지훈을 똑바로 바라보며,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입술은 하얗게 질렸는데도 말투만큼은 고집스러울 만큼 단호했다.송지훈이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또 시작이야? 이유 한 번만 말해 봐. 납득되면 들어 줄게.”“내일 연애 예능 첫 촬영이야. 현장 좀 봐야 해.”하도진이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가슴을 누르며 거칠게 숨을 골랐다.송지훈이 그대로 폭발했다.“장난하냐? 예능 하나 때문에 네가 직접 나가서 지켜봐야 해? 하도진, 너희 그룹은 자회사만 몇 개인데. 자산이 얼마인데 새로 띄우는 예능 따위가 네가 병실에서 뛰쳐나갈 이유냐고?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송지훈은 흰 가운 자락을 정리하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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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3화

하도진은 속이 영 찜찜했다. 벽에 걸린 전자시계를 몇 번이나 확인하다가 시선이 굳게 닫힌 문으로 옮겨 갔다.민하윤이 나간 지 벌써 두세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하도진은 링거병을 올려다봤다. 약물이 얼마나 남았는지 보는 것조차 신경을 긁어 더 짜증이 치밀었다.그때, 진호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하도진은 차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인데.”수화기 너머에서 우물쭈물하는 소리만 들리자, 하도진의 인내심이 바닥을 쳤다. 하도진은 링거 속도를 더 올렸다. 차가운 약물이 정맥을 타고 밀려 들어오며 팔 안쪽이 욱신거릴 정도로 저렸다.“말해.”하도진의 목소리는 거의 잠겨 있었고, 숨도 거칠었다. 하도진의 눈은 여전히 닫힌 문에 박혀 있었다.“형, 이건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오늘 준오 형이랑 은율 누나를 데리고 텐션 클럽에 바람 쐬러 갔다가, 주민혁 일행을 딱 마주쳤어. 주민혁이 은율 누나한테 너무 관심을 보이더라고. 형 결혼한 것도 알고 있었고. 예전에 형이랑 사이도 안 좋았잖아. 걱정돼서... 그 자식이 형한테는 못 덤비니까 은율 누나한테 보복할까 봐 그래.”하도진의 미간이 파르르 떨렸다. 익숙한 이름이 나오자 불쾌한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하도진은 간신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알았어. 그 일은 너희가 손대지 마. 주민혁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주민혁이 한마디 더 했는데...”진호영은 또 말끝을 흐렸다. 하도진은 진호영이 우물쭈물하는 게 더 거슬렸다.“말하라고.”문을 바라보던 하도진은 더 예민해졌다. 말을 못 하는 민하윤이 병원에서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하도진의 신경을 긁었다.하도진은 스피커폰을 켜고 휴대폰을 침대 위에 던졌다. 그리고 반대 손으로 손등에 꽂힌 주삿바늘을 그대로 뽑아 버렸다.약물이 한 방울 튀며 새어 나왔고 하도진의 손등을 고정하던 테이프 아래로 피가 번졌다. 하도진은 이불을 걷어차듯 들추고 일어서며 다시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주민혁이... 은율 누나보고 와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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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4화

민하윤은 하도진이 왜 주삿바늘을 뽑았는지조차 묻지 않았다.하도진은 민하윤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지만 입술까지 올라온 질문을 끝내 삼켰다. 하도진은 조금 전에 했던 말이 민하윤의 귀에 들어갔을까 봐 겁이 났다. 설명하려 들수록 오해만 더 깊어질 게 뻔했다.잠시 뒤 병실 간호사가 들어왔다.“무슨 일 있으세요?”민하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환자복을 입은 하도진을 가리켰다. 간호사는 무슨 뜻인지 몰라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가 하얀 붕대가 피로 붉게 번진 걸 보는 순간 비명을 질렀다.“아니, 왜 혼자 바늘을 빼셨어요. 너무 위험해요. 약도 아직 다 안 들어갔는데... 보호자는요? 왜 말리지 않으셨어요?”간호사는 주머니에서 소독약과 새로운 붕대를 꺼내 재빨리 상처를 정리했다. 푸른 혈관이 도드라진 손등 위로 약물이 흘러나온 탓에 연한 파란 병원 침대 시트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병실 공기가 묘하게 가라앉자, 간호사는 입가에 걸린 꾸중을 다시 삼켰다. 여긴 명원시 군 병원 병동이었다.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고, 송 박사가 오후에만 이 병실을 세 번이나 들락거렸다. 간호사는 더 캐묻지 않고 붕대를 마저 감고는 남아 있던 반병의 링거를 치워 버린 뒤, 의료 폐기물을 정리해 조용히 나갔다. 간호사실로 돌아가자마자 수간호사와 담당 의사에게 상황을 보고했다.병실에는 다시 침묵만 남았다. 하도진과 민하윤은 서로를 보면서도 먼저 한마디를 꺼내지 않았다.하도진이 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일 처리할 일이 있어서... 아마...”말끝이 이어지기도 전에 민하윤의 손이 끼어들었다.[내일 은행 업무를 다시 시작해야 해요. 저는 출근해야 해서 여기서 도진 씨를 계속 간호하긴 어려워요. 아주머니한테 문자를 보냈어. 아주머니가 오늘 밤 명원시에 올라올 거예요.]하도진은 민하윤의 맑은 눈을 오래 바라봤다. 하도진도, 민하윤도 알고 있었다. 서로가 일부러 숨기는 게 있었다.어설프게라도 덮어 두고 지나가는 날들이 다 캐묻고 따지는 날들보다 차라리 편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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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5화

병실 밖 햇살이 유리창을 뚫고 민하윤의 얼굴에 그대로 쏟아졌다. 민하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본능적으로 이불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우롱차 같은 차향에 담배 냄새가 아주 옅게 섞여 있었다. 민하윤은 번쩍 눈을 떴다. 몸 위에는 하도진의 검은 캐시미어 코트가 덮여 있었다. 민하윤이 천천히 몸을 돌리자 병실은 텅 비어 있었고, 하도진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결국 떠났다.민하윤은 코트 자락을 손끝으로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리고 억지로 기운을 끌어올려 세수하고 출근 준비를 했다....명원시 외곽, 향원 별장이 넓은 들판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주변은 끝없이 이어진 푸른 들판이었다. 제작진은 반 달 전부터 들어와 내부를 손보고, 근처에 촬영용 공간을 이것저것 만들어 놓았다.두 사람이 데이트하기 좋은 카페, 고요하고 한적한 정원, 분위기 있는 비밀 서점, 자연 그대로의 목장까지 있었다.공터에는 유니폼을 맞춰 입은 스태프들이 분주히 오가며 촬영 전 준비에 매달리고 있었다. 촬영지는 깊고 푸른 호숫가로 잡혀 있었다. 초봄의 명원시는 날씨가 유난히 맑았다. 촬영팀은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프로그램 오프닝용 동영상부터 차곡차곡 담아내고 있었다.끝없이 펼쳐진 호수빛 하늘, 수평선에 걸린 두툼한 흰 구름, 바람에 모양이 바뀌는 구름의 가장자리, 동쪽 끝에서 주황빛 해가 서서히 올라오며 첫 햇살이 푸르고 맑은 호수 수면을 비췄다. 잔잔한 물결 위로 안개가 얇게 깔리고 금빛 물결이 반짝였다. 막 움튼 버드나무 가지가 호숫가로 늘어져 있었다.카메라가 천천히 움직이다가 깨끗한 길 위에 멈췄다. 흰 셔츠를 입은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바구니에는 연분홍 꽃다발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바람에 셔츠 자락이 살짝 날렸다.화면이 다시 전환됐다. 풀숲 옆 나무 벤치, 젊은 남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또 한 번 화면이 넘어갔고 이번에는 호숫가였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 둘이 치마 끝을 걷어 올리고 맨발로 물에 들어가 웃으며 물방울을 튕겼다.화면은 다시 벚꽃나무 아래로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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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6화

하도진은 서류를 넘기다가 손가락으로 한 곳을 짚었다.“남자 출연진 중에 상황이 특수한 사람이 있어요. 쓸데없는 문제 생기지 않게 조심하고 여론 방향도 신경 쓰세요.”감독은 몸을 낮춰 허리를 굽힌 채 눈을 크게 뜨고 가까이 들여다봤다.“허승헌 씨말인가요?”잠깐 생각하더니 감독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네, 하 대표님. 세리 엔터 기획부 쪽에서 따로 안내가 왔습니다. 저희도 알고 있어요. 허승헌 씨의 파트는 밋밋하게 구성해 두었습니다. 절대 논란 나지 않게요.”하도진은 눈가를 누르듯 미간을 찌푸렸다.“생물학 박사라고 들었고... 온라인에서도 팬덤이 있더군요. 더 조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청각장애가 있으니까요. 다른 출연자가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 꼭 신경 쓰세요.”하도진은 생각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결국 옆으로 손짓했다.“서 비서, 조진영 선생님 쪽에 연락해 봐. 촬영 들어올 수 있는지 일정 확인해 보고.”감독은 물을 재빨리 내밀며 비위를 맞췄다.“걱정하지 마십시오. 허승헌 씨는 아직 커플 매칭도 없습니다. 장애를 소재로 억지 감동 팔이 하거나 부정적인 여론이 생길 일 없게 하겠습니다.”하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를 꼬고 앉아 발끝을 가볍게 흔들었다. 얼굴빛이 창백한 하도진은 턱을 손으로 받친 채 무심히 물었다.“대기실 쪽은요?”그러자 감독이 눈치껏 대답했다.“고은율 씨는 아직 호텔에서 메이크업 중입니다. 불러 드릴까요?”하도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서 비서가 건넨 짙은 회색 코트를 걸쳤다. 손등 혈관이 푸르게 도드라졌다.“그럴 필요 없어요. 촬영 계속하시고 저는 호텔로 갈게요.”누가 봐도 이 프로그램이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는지 뻔했다. 잘생긴 남자, 예쁜 여자들을 모아 놓고 거액을 쏟아부은 이유는 하나였다. 고은율을 대중 앞에 세워 이미지를 만들고, 이름값을 올리려는 것이었다.“촬영 계속해!”감독은 하도진을 극진히 배웅해 내보낸 뒤, 태도가 확 바뀌어 무전기를 잡고 외쳤다.“임형섭 씨, 좀 웃어요! 예능 찍으러 왔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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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7화

“진짜 그렇게까지 차갑게 굴어야 해요? 제작진이 임형섭 씨한테 금융권 임원 설정을 준 것도 웃기는데, 해외 명문대 출신이라니... 너무 과장 아니에요?”임형섭은 성큼성큼 걸어가 아무 데나 털썩 앉았다. 옆에서는 몇몇 출연진이 떠들썩하게 수다를 떨며 장난까지 치고 있었다.허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말이 나온 김에... 제작진이 우리 둘을 엮어서 커플로 밀 거래요. 그럴 거면 임형섭 씨도 좀 그럴싸하게 연기라도 해요. 그래야 시청자들을 속이죠.”하지만 임형섭은 여전히 냉랭한 얼굴뿐이었다. 입술을 꾹 다문 채 꺼진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말이다.허연은 고개를 저으며 두 손을 들었다. 임형섭은 잘생기긴 했는데 예의가 너무 없었다. 허연이 옆에서 한참을 떠들어도 임형섭은 단 한 마디도 안 했다.허연도 더는 힘 빼지 않고 촬영용 별장 소파에 웅크려 앉아 휴대폰만 들여다봤다. 제작진은 아직도 동선을 잡느라 분주했고 바닥에는 전선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그때 별장 안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스태프들이 급히 자리를 비키며 카메라가 현관 쪽을 향했다.“여러분 안녕하세요.”백누리가 검은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 들어섰다. 몸에 딱 맞는 재단이 매끈한 실루엣을 살렸고 밤색의 긴 머리는 굵은 웨이브로 흘러내렸다. 선명한 레드 립스틱을 바른 백누리는 화려하고도 당당했다.“누리 선배님 안녕하세요!”젊은 출연자 몇 명이 재빨리 일어나 줄을 서듯 다가가 악수하며 인사를 건넸다.백누리는 별장 안을 한 번 쓱 훑고는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출연진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카메라는 계속 돌아가는데 이 장면은 방송 안 나갈 거예요. 원래 대본대로면 마지막 회에야 만나는 거잖아요? 긴장하지 말고, 커피랑 디저트 좀 가져왔어요. 겸사겸사 친구도 좀 보려고요.”순간 다들 멍해졌다. 백누리는 업계에서 잔뼈가 굵었다. 초특급 톱 연예인은 아니어도 연기력과 얼굴로 팬층이 탄탄한 배우였다. 게다가 예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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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8화

임형섭은 눈을 내리깔고 커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더니, 그 화제는 끝내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말하기 싫으면 됐어요.”백누리는 속이 뒤집혀도 겉으론 체면을 지키며 웃었다.“그러면 저 갈게요. 부탁받고 와서 임형섭 씨 자리 좀 잡아주려던 거예요. 하윤이는 임형섭 씨가 괜히 불편한 일이라도 당할까 봐 걱정하더라고요.”임형섭의 눈빛이 번쩍 살아났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진짜예요?”“괜한 걱정이겠죠. 임형섭 씨가 그런 얼굴인데... 누가 감히 다가가겠어요.”백누리는 드레스 자락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됐어요. 저는 할 일 다 했으니 갈게요.”방 안 사람들 손이 동시에 멈췄다. 모두가 한꺼번에 백누리를 바라봤고 누군가는 사인을 받으려고 달려왔고, 누군가는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찍으려 했다.백누리는 하나하나 다 받아줬다. 마지막에는 환하게 웃으며 정중하게 부탁까지 덧붙였다.“제 친구가 좀 낯을 가려요. 다들 이해 좀 부탁드릴게요.”백누리가 자기 앞을 막아서 준 모습에, 임형섭은 표정이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다.고은율은 메이크업을 끝내고 욕실에서 흰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스태프가 뒤에서 치맛자락을 받쳐 들고 고은율은 10cm가 되는 가느다란 하이힐을 신고 조심조심 바닥을 딛으며 나왔다.그리고 그대로 굳어 섰다. 호텔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은 고은율이 매일 떠올리던 하도진이었다.“도진아, 드디어 날 보러 온 거야?”하도진이 일어나 고은율을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말투에는 살짝 꾸중이 섞였다.“신발 다시 갈아 신어. 넘어지면 어떡해.”“괜찮아! 현장 가서 사진 몇 장만 찍는 거야. 관찰실 들어가면 갈아 신을 거야.”고은율은 고개를 살짝 돌려 웃으며 하도진을 찬찬히 훑어봤다.“살 빠진 것 같네.”“아니야...”하도진의 목소리는 조금 잠겼고, 콧소리도 묻어났다.“오늘 나랑 같이 있어 주러 온 거야?”고은율은 기대에 찬 눈으로 하도진을 바라보다가 웃음 끝이 서서히 씁쓸해졌다.하도진의 시선이 고은율의 손으로 떨어졌다. 하도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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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9화

주민혁은 검은 니트 하나만 걸친 채, 문에 느긋하게 기대 서 있었다. 아래로 늘어진 손에는 선명하게 붉은 장미 한 다발이 들려 있었다.주민혁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의미 모를 웃음을 흘리더니 꽃다발을 안고 두 사람 앞으로 걸어왔다.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더니 하도진 쪽으로 내밀었다.“도진이 형, 오랜만이네.”하도진은 차갑게 주민혁을 훑어봤지만, 손을 맞잡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시선이 꽃다발로 내려가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렀다.“그래. 오랜만이네.”주민혁은 조금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 웃으며 손을 거둬들였다. 시선이 고은율의 순한 얼굴로 미끄러지더니, 손가락 끝으로 고은율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고은율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피하자 하이힐이 휘청하며 발이 비틀렸다. 그러자 하도진은 재빨리 고은율의 허리를 받쳐 들었다.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아슬아슬한 자세로 서로를 마주 보게 됐다. 그 순간, 주민혁이 배를 움켜쥐고 크게 웃어 버렸다. 예전 그대로였다. 여전히 미친놈 같은 인간이었다.하도진이 고은율을 곧게 세워 주며 주민혁을 향해 시선을 박았다. 날 선 눈빛에 쉰 목소리인데도 위압감이 실렸다.“장난은 그만해. 재밌냐?”“형, 장난이라니?”주민혁은 태연하게 웃었다.“고은율 씨는 연기도 잘하고, 예쁘잖아. 좋아서 꽃 들고 온 건데... 예능 첫 출연, 잘되라고 축하해 주고 싶었어.”주민혁은 웃으며 송곳 같은 작은 이빨을 드러냈다. 겉보기에는 순해 보이기까지 했다.주민혁은 꽃다발을 고은율의 품에 툭 밀어 넣고, 고은율 앞에 손을 내밀었다.“주민혁이에요. 고은율 씨는 저를 기억하겠죠?”고은율의 숨이 턱 막혔다. 본능적으로 두 걸음 뒤로 물러나는 순간, 손에서 힘이 풀렸다. 품에 안겨 있던 꽃다발이 바닥에 떨어지며 붉은 꽃잎이 사방으로 흩어졌다.그리고 그 사이로 사진 한 장이 미끄러져 나와 바닥에 떨어졌다.사진 속 여자는 거의 맨몸에 가까웠다. 바닥에는 찢어진 옷가지가 흩어져 있었고, 유리 테이블 위에 모욕적인 자세로 엎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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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0화

하도진은 문 앞을 지키던 건장한 경호원을 단숨에 제압했다. 입가에 번진 피를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낸 뒤, 의자를 움켜쥐고 그대로 휘둘렀다. 방 안에 있던 남자 몇 명이 순식간에 나가떨어졌다. 하도진은 고은율을 붙잡아 제누오에서 임대해 머물던 빌라로 데려갔다.그리고 그날 하도진은 짐을 대충 꾸렸다. 놀랄 만큼 차분한 얼굴로, 헤어지자고 말했다.고은율은 울면서 사과했다. 하지만 하도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캐리어를 끌고 문을 나섰고, 고은율은 그냥 지금 화가 난 거겠지 하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또 풀릴 거라고 믿었다.연애 7년 동안 다툼은 수도 없이 있었다. 크게 싸우면 하도진이 호텔로 며칠 나가 있는 일도 있었다.그래서 고은율은 하도진이 이번엔 진짜라는 걸 몰랐다.하도진은 밖으로 나가자마자 택시에 올라 공항으로 향했다. 고은율은 뒤쫓아가 7년의 사랑을 붙잡으려 했지만 돌아온 건 뜻밖의 소식이었다.하도진은 이미 결혼했었다.주민혁이 들고 있는 사진은 칼처럼 고은율의 심장을 다시 찔렀다. 숨기고 묻어 둔 치욕이 다시 파헤쳐졌다. 주민혁은 사진 한 장으로 고은율의 숨통을 쥔 것처럼 굴었다.고은율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속에서부터 공포가 들끓듯 자라났다.“형, 결혼했다면서? 난 형수님 얼굴도 못 봤는데.”주민혁이 두 걸음 다가와, 사진을 하도진의 재킷 가슴 포켓에 태연히 꽂아 넣었다.“이 사진은 선물이야.”주민혁은 왼쪽 다리를 슬쩍 어루만지며 몸을 기울였다. 두 사람만 들을 수 있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형은 내 다리 하나를 가져갔잖아. 그럼 고은율 씨가 대신 갚으면 어때? 아니면... 형수님을 내 쪽으로 보내. 내가 형 대신 잘 챙겨 줄게.”하도진의 관자놀이 핏줄이 꿈틀거리더니 두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도진은 주민혁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한쪽 다리로도 모자라? 나머지 한쪽도 의족 달고 싶으면 계속 지껄여. 고은율이든... 누구든... 건드릴 생각만 해 봐.”주민혁이 웃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오히려 섬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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