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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1화

“이 회장님, 강동에 비어 있는 상업용 부지가 하나 있습니다. 회장님은 이 바닥에서 연륜도 깊고, 명성도 있으시고, 아는 분들도 많으시잖아요. 번거로우시겠지만... 매수자 좀 알아봐 주실 수 있을까요?”하도진이 가볍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그 순간, 이준호의 눈이 번쩍 뜨였다.“하 대표님, 정말 그걸 내놓으시겠다고요? 강동 땅은 지금 시세가 있어도 값이 없는 곳입니다. 이 2년간 정책만 봐도... 돈이 있어도 못 사요.”“네. 에스티 그룹의 상권은 주로 화북과 동남 연해 쪽에 집중돼 있습니다. 강동 그 부지는 당장 활용도가 없어요.”하도진은 잔 속의 짙은 석륫빛 와인을 바라보며, 무심한 듯 셔츠 칼라를 살짝 당겼다.태유 은행은 전국 주요 도시마다 지점을 두고 있지만 유독 강동에는 땅이 워낙 희소해 상업용 부지가 이미 다 나뉘어 있었다. 지점을 꼭 내고 싶다던 이준호에게, 하도진이 베개를 내민 셈이었다. 공짜로 줄 리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이준호는 흥분한 얼굴로 임형섭의 어깨를 탁하고 두드렸다.“임 팀장, 요즘 일은 잠깐 내려놔. 어디 가서 임 팀장만큼 괜찮은 남자를 찾겠어. 그냥 휴가라고 생각해.”이준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말을 이어갔다.“하 대표님은 우리 은행의 최상위 고객이고, 신용대출 부서의 직원들도 다 임 팀장이 키워낸 사람이잖아. 그런데 불안할 게 뭐가 있어? 방송 한 번 나가서 바람도 좀 쐬고, 권한도 좀 내려줘. 밑에 애들한테 기회도 주고 말이야.”임형섭은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천천히 쥐었다.솔직히 임형섭은 굳이 이런 굴욕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이 일자리가 인생의 전부도 아니었고, 아버지는 몇 번이고 집에 와서 가업을 물려받으라고 설득해 왔다.임형섭은 당연히 거절하고 돌아설 수 있었다.하지만 임형섭은 그러지 않았다.잠시 침묵한 뒤, 임형섭은 와인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좋습니다. 하 대표님, 그리고 진 대표님,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아유, 별말씀을요. 출연료는 절대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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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2화

하도진이 가볍게 웃으며 진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이 회장님, 저도 정말 진심으로 매물로 내놓을 생각입니다. 다만... 우리 둘은 다 장사하는 사람이잖습니까. 시세라는 게 있죠. 강동 그 상업용 부지는 솔직히 이 가격이 아니라 한 번 더 올려도 사겠다는 사람이 줄을 설 겁니다. 회장님도 위치랑 면적 보시면 아시잖아요. 이 가격이 제가 내밀 수 있는 최대 성의입니다. 저도 회장님이랑 진짜로 친구가 되고 싶어서요. 그리고 에스티 그룹 협업 건이 태유 은행에 얼마나 이익을 안겼는지... 제가 굳이 다시 길게 말씀드릴 필요는 없겠죠?”이준호는 그 긴 숫자를 노려보며,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이를 악물며 말했다.“사인할게요.”...밤이 짙게 내려앉았다. 초봄의 명원시는 기온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하도진은 검은색 롤스로이스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창문은 반쯤 내려가 있었고, 이준호는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채 허리를 굽혀 자세를 낮췄다.“하 대표님, 조심히 들어가십시오.”하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 있게 웃었다.그러다가 하준호는 이준호의 어깨 너머 뒤쪽에 서 있는 키 큰 남자에게 시선을 옮겼다.다림질이 칼같이 잡힌 셔츠, 슈트 재킷은 한쪽 팔에 무심히 걸쳐져 있었고, 비율은 연예인 못지않았다. 깊은 눈매가 차갑게 하도진과 마주쳤다.하도진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인정하기 싫어도 하도진은 질투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포럼 일정 내내, 공항에서 둘이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걸어가던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한 번도 지워지지 않았다.그날 민하윤은 고개를 살짝 기울여 장난스럽게 웃으며 환한 꽃다발에 얼굴을 파묻었다.하도진 앞에서 민하윤은 꽃보다 더 환하게 웃었다.문제는 저 남자였다.사람을 홀리는 얼굴을 타고나서 매일 민하윤의 주변을 맴돌았다. 떼어내려 해도 떨어지지 않으니, 미칠 만큼 하도진의 신경을 긁었다.차창이 천천히 올라가자 하도진은 냉정하게 시선을 거두었다.롤스로이스의 검은 차체가 밤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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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3화

뒷좌석의 하도진은 눈을 감은 채로 쉬고 있었다. 주위 공기까지 짓누르는 듯한 차가운 분위기가 차 안을 감쌌고, 서 비서는 백미러로 슬쩍 하도진을 훔쳐봤다. 날카롭게 빚은 듯 단단한 얼굴선, 깊게 꺼진 눈매, 흔들리는 가로등 불빛이 그의 높은 콧날 위로 명암을 만들었다가 지웠고, 짙은 속눈썹은 한 올 한 올 또렷했다. 얇게 다문 입술은 일자로 굳어 있었다.미세하게 미간이 찌푸려진 걸 보자 서 비서의 마음속에 경보가 울렸다. 운전기사는 목적지도 없이 고속도로 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하 대표님... 오늘 밤은 어디로 모실까요?”서 비서가 목을 가다듬고 겨우 입을 열었다. 이 끝없는 침묵이 사람을 미치게 했다.“그 여자는 어디에 있어?”하도진의 콧소리가 유난히 짙었다. 남해 포럼 일정 내내 현지의 큰 일교차에 몸이 상한 모양이었다.서 비서는 눈을 깜빡이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조심스럽게 되물었다.“어... 어느 분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고은율 씨... 아니면 사모님이요?”하도진이 눈을 번쩍 떴다. 깊은 눈이 그대로 서 비서를 꿰뚫었고, 차 안의 온도가 뚝 떨어졌다.“너도 알잖아. 거의 새벽인데 내가 누굴 만나러 가야 맞겠어?”서 비서는 마음이 뒤집힐 정도로 복잡했다.‘도대체 누가 자신이 유부남인 걸 잊고 전 여친이랑 그렇게 붙어 다녔는데요? 설날에도 가족은 안 챙기고 전 여친과 함께 병원을 지키고, 전 여친 어머니 일까지 사위처럼 도맡아 하고, 법적 아내는 툭하면 내팽개치고... 선 넘는 짓만 해대면서 사모님을 챙기는 선배한테는 또 질투를 오지게 하고!’서 비서가 속으로만 울부짖으며 하마터면 휴대폰을 내던질 뻔하다가, 문득 연봉 1억 2천만이라는 숫자가 머리를 스쳤다. 서 비서는 순식간에 표정을 정리하고 직장인의 프로패셔널한 얼굴로 줄줄 보고했다.“사모님은 귀국 당일 저녁을 밖에서 드시고 택시로 르네 별장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이틀 동안 외출이 있었는데요. 어제는 요양원에 들러 환자분을 뵙고 오셨고, 오늘은 명원시 외곽 쪽, 좀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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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4화

그 전화 한 통을 기점으로 두 사람은 완전히 갈라섰다.민하윤은 아드린으로 떠났고 하도진은 병원으로 달려갔다....민하윤의 희고 고운 손끝이 한때 산산조각 났다가 테이프로 다시 이어 붙인 사진 위를 조심스레 훑었다.송해정은 민하윤이 그 사진을 가지고 있는 걸 발견했을 때, 당장이라도 목을 조르듯 달려들었다.미친 사람처럼 사진을 찢어 너덜너덜하게 만들고 민하윤의 뺨을 몇 대나 후려치며 욕을 퍼부었다.“이 천한 년아, 인신매매범 둘을 잊지를 못해? 도둑을 엄마로 섬기는 년아!”민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송해정이 미쳐 날뛰며 때리는 걸 묵묵히 견뎠다.작고 차가운 방이 다시 죽은 듯 고요해졌을 때, 민하윤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사진 조각을 하나하나 주웠다.‘이건 엄마의 얼굴, 이건 엄마의 손, 이건 엄마가 딱 한 번 입던 분홍색 옷, 이건 아빠의 하얗게 센 머리, 이건 아빠의 자애로운 웃음, 이건 주름이 깊게 팬 아빠의 얼굴... 저건 웃음 많던 나... 저건 엄마와 아빠가 사 준 원피스, 저건 내 이마 위의 나비 머리핀...’민하윤은 사진을 조금씩 맞춰 붙여 테이프로 꾹꾹 눌러 다시 만들었다. 그리고 침대 매트리스 아래 깊숙이 숨겼다.대학 입학 등록하던 날이 되어서야 민하윤은 그 사진을 꺼내 오래도록 들여다볼 수 있었다.민하윤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눈을 깜빡이는 순간, 투명한 눈물 두 방울이 손등 위로 떨어졌다.오늘 민하윤은 묘지에 다녀왔다.날마다 그리워하던 여자는 이제 작은 영정 사진 한 장이 되어 차가운 묘비 위에 박혀 있었다.양어머니 묘지 앞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민하윤은 무릎을 꿇고 앉아 고집스럽게 풀을 하나하나 뽑아냈다. 그리고 손끝으로 영정을 조심스레 닦았다.민하윤은 말해 주고 싶었다.친가로 돌아가서 어떻게 살았는지, 죽도록 공부해 좋은 대학에 붙고, 운 좋게 졸업하자마자 최고급 사립 은행에 들어간 이야기, 그러다가 하룻밤의 실수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해 몇 해 사이 세상의 냉정함을 뼛속까지 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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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5화

하도진은 천천히 민하윤의 목덜미에 기대었다. 얼굴은 핼쑥했고, 이마는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데 손발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입술은 하얗게 질렸고 머릿속은 몽롱한 나머지 금방이라도 푹 꺼져 잠들어 버릴 것 같았다.민하윤은 본능적으로 하도진을 밀어내려 했다가 얇은 목덜미 깊숙이 전해지는 그의 열기에 얼굴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무심코 손등으로 이마를 짚어 보니 역시나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하도진은 병든 사람처럼 그 자리에 서서 힘없이 거친 숨만 쉬었다. 길고 짙은 속눈썹이 눈 밑에 그늘을 드리웠다.민하윤은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돌아서려는 순간, 술 냄새가 폭처럼 밀려왔다. 남자의 뜨거운 숨결까지 한꺼번에 덮쳐 왔다.하도진은 뒤에서 민하윤을 끌어안았다. 뺨을 민하윤의 목덜미에 파묻고 차가운 온기에 매달리듯 중얼거렸다.“넌... 내가 죽든 말든 상관없는 거야? 나 너무 힘들어...”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귀 끝을 스쳤다. 뜨거운 숨이 귓불에 닿아 간지럽게 파고들었다. 사람 마음을 교묘하게 흔드는 너무도 익숙한 방식이었다.민하윤은 하도진의 품을 억지로 떼어내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계단을 올라갔다.그 순간, 하도진의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하도진은 끓어오르는 열과 몸살 통증을 억지로 버티다가 거실 옆 소파로 그대로 쓰러지듯 누웠다.하도진은 텅 빈 눈으로, 몇 미터나 높게 뻗은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를 바라봤다. 수많은 수정과 둥근 조명 링이 반짝이며 어지럽게 교차했다. 그 찬란한 빛무리가 점점 흐려지는 걸 보며 하도진은 자조적인 쓴웃음을 지었다.‘아마도 난 이미 하윤이의 마음을 다 망가뜨려 놓았겠지. 그런데도 뭘 더 바라겠어.’눈이 시릴 만큼 차가운 불빛이 쏟아지자 하도진은 손등으로 눈가를 가렸다. 온몸 근육이 은근히 쑤셔 왔다.그때, 거실 조명이 툭 꺼졌다.대신 은은한 불빛이 켜지며 샹들리에에 닿은 빛이 다시 사방으로 흩어졌다. 벽마다 반짝이는 빛점이 쏟아져 마치 은하 속에 들어온 것처럼 보였다.민하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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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6화

다른 신혼부부들은 직원들에게 나눠 줄 답례 사탕까지 챙겨 왔고 약지에는 약혼반지가 반짝였다.하지만 민하윤은 아무것도 없었다. 얼떨떨한 채로 하도진과 결혼해 그의 아내가 되었다.민하윤은 하도진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알아갈 기회조차 없었다. 함께 있는 시간도 손에 꼽혔고 대부분은 각방을 썼으며, 둘이 나란히 식탁에 앉아 저녁 한 끼를 온전히 먹는 일도 거의 없었다.하도진은 늘 그 방면에서 욕구가 생길 때만 민하윤의 방문을 열었다.“씻고 와.”어떤 날은 차갑게 명령했고, 어떤 날은 뜨겁게 숨도 못 쉬게 입을 맞췄다.민하윤은 행복을 바라지 않았다.그래도 민하윤은 그려 왔던 삶이 따로 있었다. 민하윤은 다정하고 살가운 남자와 결혼해 귀여운 아기를 낳고, 어쩌면 둘을 낳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평범하게 살다가 둘이 천천히 늙어 가며 아이가 자라는 걸 함께 지켜보는 삶을 원했다.만약 시간이 되돌아간다면 민하윤은 친엄마가 손대어 버린 임신 테스트기를 들고 하씨 가문에 찾아가 하도진을 붙잡는 일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정말로 결말도 달라졌을까?“민하윤, 너 미쳤어?”하도진이 바닥에 흩어진 조각들을 주워들었다.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거지고, 쉰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졌다. 차가운 눈빛이 민하윤을 꿰뚫었다.“이혼하자는 거야?”민하윤은 손이 떨렸다. 끊어진 구슬처럼 눈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민하윤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울음을 억지로 삼키며 손을 움직였다.[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사랑도, 아이도, 결혼식도, 반지도... 아무것도 없어요.][저는 도진 씨의 마음을 모르겠어요. 도진 씨는 저를 밀어내면서도 제가 도진 씨 곁에 안 다가온다고 또 미워하잖아요.]하도진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몇 장의 종잇조각이 빙글빙글 돌며 바닥으로 흩날렸다.“민하윤, 우리 일에 관해서 결정권은 언제나 나한테 있어.”하도진은 고개를 숙인 채, 찢어진 종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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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7화

[도진 씨, 저는 누가 저를 협박하는 게 제일 싫어요.]민하윤이 손을 들어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아 수어로 내뱉었다.하도진은 코웃음을 흘렸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민하윤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촉촉하게 젖어 도톰한 입술을 오래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하윤아, 난 널 협박하는 거 아니야. 네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거지.”그의 목소리는 낮고 느긋했다.“판을 뒤엎을 힘도 없으면서 머리 뜨거워졌다고 밥그릇부터 깨면 안 돼.”하도진은 말을 이어 갔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칼끝처럼 정교했다.“네가 이번에 승진한 건, 너도 이유를 알잖아? 아무도 못 따라오는 실적인데, 너만 가볍게 따냈지. 왜 그런지는... 너도 알잖아.”“네 양아버지 치료도 그래. 신경내과랑 정형외과 쪽 최고 교수들이 모여서 계속 회진 돌았고, 효과도 점점 좋아지고 있어. 그것도 네가 모를 리가 없잖아.”민하윤은 이미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하도진이 직접 입에 올리는 순간, 자신이 얻어 온 것들이 하나씩 대가로 환산되는 느낌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민하윤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그렇다.사람들이 민하윤이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애써 잊어 주는 척하는 건, 그녀가 정말 압도적인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 아니었다.하도진의 아내라는 호칭이 주는 편의와 혜택을 민하윤이 분명히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태유 은행은 매년 공개 채용 자리 자체가 손에 꼽았다. 대부분은 헤드헌팅으로 고액 연봉을 주고 데려오는 수준이었다.명문대 출신 신입도 들어오면 지점 말단부터 기어 올라가야 했다. 그런데 민하윤은 명문 대학을 나온 평범한 졸업생이면서도 졸업하자마자 본점으로 들어왔다. 실력 때문이 아니라 임형섭 선배의 추천 덕이었다.민하윤은 은행에서 몇 년을 성실히 버텼지만 말을 할 수 없다는 약점 때문에 업무는 줄곧 신용대출 부서에서 자료 서류 심사하는 것에만 머물렀다. 영업도, 외부 프로젝트도, 직접 맡을 권한이 없었다.그런데 에스티 그룹 협력 프로젝트가 공개 입찰로 풀렸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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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8화

남자 반지는 당당하게도 하도진의 방 책상, 펜꽂이 옆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하도진은 기억을 더듬어 보려 했지만, 끝내 여자 반지는 찾지 못했다.원래 하도진은 연말 행사 때,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 민하윤의 손에 직접 끼워 주려 했었다. 그런데 그날 밤, 하필 하도진은 민하윤이 다른 남자와 한 치의 틈도 없이 다정하게 붙어 있는 모습을 봐 버렸고, 가슴속에서 정체 모를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다.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도진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보석함도 사라진 채였다.약기운이 서서히 몸을 잠식하자, 하도진은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반대편의 텅 빈 자리를 바라보는 순간,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이상한 감각이 스며들었다. 그건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속이 휑한 공허함이었다....임형섭은 주방 아일랜드에 걸터앉아 거슬리는 넥타이를 툭 잡아당겨 풀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셔츠 단추 몇 개가 튕겨 나갔다. 임형섭은 용기를 쥐어짜 휴대폰 잠금을 풀고 저장도 안 된 번호를 뚫어져라 바라봤다.몇 초를 망설인 끝에, 임형섭은 결국 전화를 걸지 못하고 잔을 들어 술부터 들이켰다.사실 임형섭은 그 질문을 하는 게 두려웠다.관계가 완전히 남처럼 되어 버릴까 봐, 친구라는 이름으로라도 곁에 남아 있을 자격을 잃을까 봐, 무엇보다 답이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닐까 봐 두려웠다.임형섭은 혼자 술을 들이붓다 말고, 텅 빈 브랜디 병을 흔들며 툴툴거렸다. 그러고는 술장으로 비틀거리며 가 더 독한 술을 하나 꺼냈다.테이블 위에는 계약서 한 장이 펼쳐져 있었다. 빽빽한 활자들이 새까맣게 박혀 있었지만 시야가 흐려져 글자 하나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임형섭은 빈 술병 두 개를 끌어안은 채, 그대로 테이블에 엎드려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아일랜드 위에 놓인 휴대폰이 미친 듯이 진동했다. 임형섭은 시끄러워서 본능적으로 귀를 막았지만 진동은 상판을 타고 계속 윙윙 울렸다.아무리 성격이 좋아도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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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9화

임형섭의 낮고 자석 같은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흘러왔다. 임형섭은 부정하지 않았다.백누리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올렸다. 가방 안에 넣어 둔 계약서를 힐끗 보더니 입꼬리를 비틀며 일부러 놀렸다.“하, 그럼 소문이 그냥 소문만은 아니었네요?”임형섭은 말싸움할 기분이 아니었다. 숙취에 절어 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임형섭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다가 화면에 뜬 발신 표시를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백누리 씨, 하윤이는요? 옆에 있어요?”백누리는 전화를 민하윤에게 툭 넘기며 일부러 목소리를 키워 수화기 쪽으로 말했다.“옆에 있어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직접 하세요.”“하윤아...”임형섭은 말이 목에 걸린 듯 머뭇거렸다.“별일은 아니고. 나... 당분간 휴가 들어가. 그 예능 찍어야 해서.”임형섭은 숨을 한 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 신용대출 부서를 맡았잖아. 예전처럼... 처리 안 되는 일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물어봐.”수화기 너머로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임형섭은 시선을 떨군 채 조용히 덧붙였다.“난 네 능력은 믿는데... 사람 마음은 모르는 거니까, 네가...”민하윤이 화면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대답 대신 짧게 신호를 보낸 셈이었다.임형섭은 더는 못 이어가겠다는 듯 숨을 깊게 들이켰다.“그래. 나도 할 일이 있어서... 끊을게.”임형섭은 통화를 끊고, 켜진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똑같은 숫자 두 줄이 나란히 떠 있었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던 시간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새벽 한 시.어젯밤 임형섭은 민하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시간은 1분 30초였다.‘저 1분 30초 동안,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지?’찬물로 샤워를 한 임형섭은 정신을 차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당장이라도 민하윤을 보러 가고 싶어 차 키를 집었다가 문 앞에 멈춰 섰다.휴대폰을 들어 문자 대화 창에 몇 글자를 쓰고, 지우고, 또 썼다.결국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흰색 승합차가 길가에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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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0화

백누리는 찔리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난 지금도 나름 만족하거든. 너무 뜬 것도, 인기가 너무 없는 것도 아니니 얼마나 좋아? 가끔 작품 하나 하고, 일 없을 땐 집에 박혀 있고, 가끔 가족들이랑 여행도 가고. 그 정도면 괜찮지 않아?”나은지는 코웃음을 쳤다.“백누리, 너도 이 업계에서 오래 일 했잖아. 신인으로 들어온 고은율 좀 봐. 성장 속도가 로켓이야! 너도 걔처럼 하 대표님의 기분만 잘 맞춰 줬어도 난 네가 뭘 먹든, 뭘 하든 눈감아 줬을 거야.”나은지는 민하윤을 처음 보는 얼굴이라, 백누리의 일반인 친구쯤으로 단정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말도 가리지 않았다.백누리는 종이봉투 안에서 고소한 냄새가 올라오는 꼬치를 힐끗거리며, 속을 긁듯 툭 내뱉었다.“흥! 난 하 대표님의 7년이나 사귄 전 여친도 아닌데. 나도 하 대표님의 빽을 좀 잡고 싶지. 근데 그게 잡히겠어?”나은지가 단호하게 받아쳤다.“네가 진짜 잡을 수 있었으면 지금 이 꼴이겠냐? 고은율은 회사 들어온 지 1년도 안 됐는데 설날 특집 무대까지 올라가잖아. 집안일만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는 네가 갔을 것 같아? 꿈 깨. 하 대표님이 고은율의 앞길이 트이게 하려고 돈을 얼마나 쏟아붓는지 알아? 여주 자리까지 박아 넣어 줬어.”나은지는 숨도 안 쉬고 이어갔다.“지금 이 예능도 회사가 가장 힘주는 프로젝트야. 홍보를 시작하자마자 화제성이랑 조회수 벌써 플랫폼 1위 찍었잖아. 넌 진짜 돈 벌려고 이걸 하는 줄 알아? 다 고은율의 인기를 올리려고 판 깔아 준 거야.”백누리는 단어 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 순간, 백누리의 얼굴이 확 굳었다.“언니... 그럼 올해 설날 특집 무대는 내가 고은율의 자리를 뺏은 거야? 아니면... 고은율이 안 한다고 해서 내가 들어간 거야?”나은지는 결국 이를 악물고 못을 박았다.“맞아. 그래서 다른 연예인들은 몇 달 전부터 리허설 돌리는데, 네가 통보받을 때는 설 직전이었잖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민하윤은 조용히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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