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진짜 그렇게까지 차갑게 굴어야 해요? 제작진이 임형섭 씨한테 금융권 임원 설정을 준 것도 웃기는데, 해외 명문대 출신이라니... 너무 과장 아니에요?”임형섭은 성큼성큼 걸어가 아무 데나 털썩 앉았다. 옆에서는 몇몇 출연진이 떠들썩하게 수다를 떨며 장난까지 치고 있었다.허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말이 나온 김에... 제작진이 우리 둘을 엮어서 커플로 밀 거래요. 그럴 거면 임형섭 씨도 좀 그럴싸하게 연기라도 해요. 그래야 시청자들을 속이죠.”하지만 임형섭은 여전히 냉랭한 얼굴뿐이었다. 입술을 꾹 다문 채 꺼진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말이다.허연은 고개를 저으며 두 손을 들었다. 임형섭은 잘생기긴 했는데 예의가 너무 없었다. 허연이 옆에서 한참을 떠들어도 임형섭은 단 한 마디도 안 했다.허연도 더는 힘 빼지 않고 촬영용 별장 소파에 웅크려 앉아 휴대폰만 들여다봤다. 제작진은 아직도 동선을 잡느라 분주했고 바닥에는 전선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그때 별장 안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스태프들이 급히 자리를 비키며 카메라가 현관 쪽을 향했다.“여러분 안녕하세요.”백누리가 검은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 들어섰다. 몸에 딱 맞는 재단이 매끈한 실루엣을 살렸고 밤색의 긴 머리는 굵은 웨이브로 흘러내렸다. 선명한 레드 립스틱을 바른 백누리는 화려하고도 당당했다.“누리 선배님 안녕하세요!”젊은 출연자 몇 명이 재빨리 일어나 줄을 서듯 다가가 악수하며 인사를 건넸다.백누리는 별장 안을 한 번 쓱 훑고는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출연진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카메라는 계속 돌아가는데 이 장면은 방송 안 나갈 거예요. 원래 대본대로면 마지막 회에야 만나는 거잖아요? 긴장하지 말고, 커피랑 디저트 좀 가져왔어요. 겸사겸사 친구도 좀 보려고요.”순간 다들 멍해졌다. 백누리는 업계에서 잔뼈가 굵었다. 초특급 톱 연예인은 아니어도 연기력과 얼굴로 팬층이 탄탄한 배우였다. 게다가 예능
하도진은 서류를 넘기다가 손가락으로 한 곳을 짚었다.“남자 출연진 중에 상황이 특수한 사람이 있어요. 쓸데없는 문제 생기지 않게 조심하고 여론 방향도 신경 쓰세요.”감독은 몸을 낮춰 허리를 굽힌 채 눈을 크게 뜨고 가까이 들여다봤다.“허승헌 씨말인가요?”잠깐 생각하더니 감독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네, 하 대표님. 세리 엔터 기획부 쪽에서 따로 안내가 왔습니다. 저희도 알고 있어요. 허승헌 씨의 파트는 밋밋하게 구성해 두었습니다. 절대 논란 나지 않게요.”하도진은 눈가를 누르듯 미간을 찌푸렸다.“생물학 박사라고 들었고... 온라인에서도 팬덤이 있더군요. 더 조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청각장애가 있으니까요. 다른 출연자가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 꼭 신경 쓰세요.”하도진은 생각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결국 옆으로 손짓했다.“서 비서, 조진영 선생님 쪽에 연락해 봐. 촬영 들어올 수 있는지 일정 확인해 보고.”감독은 물을 재빨리 내밀며 비위를 맞췄다.“걱정하지 마십시오. 허승헌 씨는 아직 커플 매칭도 없습니다. 장애를 소재로 억지 감동 팔이 하거나 부정적인 여론이 생길 일 없게 하겠습니다.”하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를 꼬고 앉아 발끝을 가볍게 흔들었다. 얼굴빛이 창백한 하도진은 턱을 손으로 받친 채 무심히 물었다.“대기실 쪽은요?”그러자 감독이 눈치껏 대답했다.“고은율 씨는 아직 호텔에서 메이크업 중입니다. 불러 드릴까요?”하도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서 비서가 건넨 짙은 회색 코트를 걸쳤다. 손등 혈관이 푸르게 도드라졌다.“그럴 필요 없어요. 촬영 계속하시고 저는 호텔로 갈게요.”누가 봐도 이 프로그램이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는지 뻔했다. 잘생긴 남자, 예쁜 여자들을 모아 놓고 거액을 쏟아부은 이유는 하나였다. 고은율을 대중 앞에 세워 이미지를 만들고, 이름값을 올리려는 것이었다.“촬영 계속해!”감독은 하도진을 극진히 배웅해 내보낸 뒤, 태도가 확 바뀌어 무전기를 잡고 외쳤다.“임형섭 씨, 좀 웃어요! 예능 찍으러 왔으
병실 밖 햇살이 유리창을 뚫고 민하윤의 얼굴에 그대로 쏟아졌다. 민하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본능적으로 이불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우롱차 같은 차향에 담배 냄새가 아주 옅게 섞여 있었다. 민하윤은 번쩍 눈을 떴다. 몸 위에는 하도진의 검은 캐시미어 코트가 덮여 있었다. 민하윤이 천천히 몸을 돌리자 병실은 텅 비어 있었고, 하도진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결국 떠났다.민하윤은 코트 자락을 손끝으로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리고 억지로 기운을 끌어올려 세수하고 출근 준비를 했다....명원시 외곽, 향원 별장이 넓은 들판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주변은 끝없이 이어진 푸른 들판이었다. 제작진은 반 달 전부터 들어와 내부를 손보고, 근처에 촬영용 공간을 이것저것 만들어 놓았다.두 사람이 데이트하기 좋은 카페, 고요하고 한적한 정원, 분위기 있는 비밀 서점, 자연 그대로의 목장까지 있었다.공터에는 유니폼을 맞춰 입은 스태프들이 분주히 오가며 촬영 전 준비에 매달리고 있었다. 촬영지는 깊고 푸른 호숫가로 잡혀 있었다. 초봄의 명원시는 날씨가 유난히 맑았다. 촬영팀은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프로그램 오프닝용 동영상부터 차곡차곡 담아내고 있었다.끝없이 펼쳐진 호수빛 하늘, 수평선에 걸린 두툼한 흰 구름, 바람에 모양이 바뀌는 구름의 가장자리, 동쪽 끝에서 주황빛 해가 서서히 올라오며 첫 햇살이 푸르고 맑은 호수 수면을 비췄다. 잔잔한 물결 위로 안개가 얇게 깔리고 금빛 물결이 반짝였다. 막 움튼 버드나무 가지가 호숫가로 늘어져 있었다.카메라가 천천히 움직이다가 깨끗한 길 위에 멈췄다. 흰 셔츠를 입은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바구니에는 연분홍 꽃다발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바람에 셔츠 자락이 살짝 날렸다.화면이 다시 전환됐다. 풀숲 옆 나무 벤치, 젊은 남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또 한 번 화면이 넘어갔고 이번에는 호숫가였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 둘이 치마 끝을 걷어 올리고 맨발로 물에 들어가 웃으며 물방울을 튕겼다.화면은 다시 벚꽃나무 아래로 돌아
민하윤은 하도진이 왜 주삿바늘을 뽑았는지조차 묻지 않았다.하도진은 민하윤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지만 입술까지 올라온 질문을 끝내 삼켰다. 하도진은 조금 전에 했던 말이 민하윤의 귀에 들어갔을까 봐 겁이 났다. 설명하려 들수록 오해만 더 깊어질 게 뻔했다.잠시 뒤 병실 간호사가 들어왔다.“무슨 일 있으세요?”민하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환자복을 입은 하도진을 가리켰다. 간호사는 무슨 뜻인지 몰라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가 하얀 붕대가 피로 붉게 번진 걸 보는 순간 비명을 질렀다.“아니, 왜 혼자 바늘을 빼셨어요. 너무 위험해요. 약도 아직 다 안 들어갔는데... 보호자는요? 왜 말리지 않으셨어요?”간호사는 주머니에서 소독약과 새로운 붕대를 꺼내 재빨리 상처를 정리했다. 푸른 혈관이 도드라진 손등 위로 약물이 흘러나온 탓에 연한 파란 병원 침대 시트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병실 공기가 묘하게 가라앉자, 간호사는 입가에 걸린 꾸중을 다시 삼켰다. 여긴 명원시 군 병원 병동이었다.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고, 송 박사가 오후에만 이 병실을 세 번이나 들락거렸다. 간호사는 더 캐묻지 않고 붕대를 마저 감고는 남아 있던 반병의 링거를 치워 버린 뒤, 의료 폐기물을 정리해 조용히 나갔다. 간호사실로 돌아가자마자 수간호사와 담당 의사에게 상황을 보고했다.병실에는 다시 침묵만 남았다. 하도진과 민하윤은 서로를 보면서도 먼저 한마디를 꺼내지 않았다.하도진이 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일 처리할 일이 있어서... 아마...”말끝이 이어지기도 전에 민하윤의 손이 끼어들었다.[내일 은행 업무를 다시 시작해야 해요. 저는 출근해야 해서 여기서 도진 씨를 계속 간호하긴 어려워요. 아주머니한테 문자를 보냈어. 아주머니가 오늘 밤 명원시에 올라올 거예요.]하도진은 민하윤의 맑은 눈을 오래 바라봤다. 하도진도, 민하윤도 알고 있었다. 서로가 일부러 숨기는 게 있었다.어설프게라도 덮어 두고 지나가는 날들이 다 캐묻고 따지는 날들보다 차라리 편할
하도진은 속이 영 찜찜했다. 벽에 걸린 전자시계를 몇 번이나 확인하다가 시선이 굳게 닫힌 문으로 옮겨 갔다.민하윤이 나간 지 벌써 두세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하도진은 링거병을 올려다봤다. 약물이 얼마나 남았는지 보는 것조차 신경을 긁어 더 짜증이 치밀었다.그때, 진호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하도진은 차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인데.”수화기 너머에서 우물쭈물하는 소리만 들리자, 하도진의 인내심이 바닥을 쳤다. 하도진은 링거 속도를 더 올렸다. 차가운 약물이 정맥을 타고 밀려 들어오며 팔 안쪽이 욱신거릴 정도로 저렸다.“말해.”하도진의 목소리는 거의 잠겨 있었고, 숨도 거칠었다. 하도진의 눈은 여전히 닫힌 문에 박혀 있었다.“형, 이건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오늘 준오 형이랑 은율 누나를 데리고 텐션 클럽에 바람 쐬러 갔다가, 주민혁 일행을 딱 마주쳤어. 주민혁이 은율 누나한테 너무 관심을 보이더라고. 형 결혼한 것도 알고 있었고. 예전에 형이랑 사이도 안 좋았잖아. 걱정돼서... 그 자식이 형한테는 못 덤비니까 은율 누나한테 보복할까 봐 그래.”하도진의 미간이 파르르 떨렸다. 익숙한 이름이 나오자 불쾌한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하도진은 간신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알았어. 그 일은 너희가 손대지 마. 주민혁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주민혁이 한마디 더 했는데...”진호영은 또 말끝을 흐렸다. 하도진은 진호영이 우물쭈물하는 게 더 거슬렸다.“말하라고.”문을 바라보던 하도진은 더 예민해졌다. 말을 못 하는 민하윤이 병원에서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하도진의 신경을 긁었다.하도진은 스피커폰을 켜고 휴대폰을 침대 위에 던졌다. 그리고 반대 손으로 손등에 꽂힌 주삿바늘을 그대로 뽑아 버렸다.약물이 한 방울 튀며 새어 나왔고 하도진의 손등을 고정하던 테이프 아래로 피가 번졌다. 하도진은 이불을 걷어차듯 들추고 일어서며 다시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주민혁이... 은율 누나보고 와서 인
“아니, 불러 와. 막다른 골목에 잘못 들어선 개가 아직 무슨 패를 숨겼는지 좀 보자.”주민혁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입가에는 의미 모를 웃음이 걸렸다.“진씨 가문 자식이 하도진이랑 동서 사이라며? 미쳐 버릴 때까지 몰아붙이면, 의외로 쓸모 있는 개가 될지도 모르지.”송지훈이 검사 결과지를 들고 병실 문을 밀어 열었다. 주변을 한 바퀴 훑었지만 민하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송지훈은 미간을 찌푸리고 툴툴거렸다.“민하윤 씨는 어디 갔어? 설마 그냥 가 버리고 널 혼자 여기 던져둔 거야?”하도진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못마땅한 눈으로 송지훈을 쳐다봤다.“안 갔어. 1층 창구에서 비용을 지불하고 있을 거야. 곧 올라오겠지.”“난 민하윤 씨를 욕한 게 아니거든?”송지훈이 투덜대며 서류를 넘기다가 갑자기 크게 숨을 내쉬더니 손에 든 종이 뭉치를 흔들며 말했다.“그래도 다행이야. 폐렴이나 심근염까지는 안 갔어. 세균성 감기인데, 비 맞고 몸살까지 겹쳐서 고열이 난 거야. 며칠 입원해서 링거 맞으면 돼. 큰일은 아니야.”병실 문은 살짝 덜 닫혀 있었다. 민하윤은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 멈춰 서 있다가, 큰일은 아니라는 말을 듣는 순간 힘이 빠지듯 안도의 숨을 삼켰다.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면서 문을 열려는 찰나였다.“난 입원 안 해.”하도진이 송지훈을 똑바로 바라보며,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입술은 하얗게 질렸는데도 말투만큼은 고집스러울 만큼 단호했다.송지훈이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또 시작이야? 이유 한 번만 말해 봐. 납득되면 들어 줄게.”“내일 연애 예능 첫 촬영이야. 현장 좀 봐야 해.”하도진이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가슴을 누르며 거칠게 숨을 골랐다.송지훈이 그대로 폭발했다.“장난하냐? 예능 하나 때문에 네가 직접 나가서 지켜봐야 해? 하도진, 너희 그룹은 자회사만 몇 개인데. 자산이 얼마인데 새로 띄우는 예능 따위가 네가 병실에서 뛰쳐나갈 이유냐고?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송지훈은 흰 가운 자락을 정리하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