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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1화

해가 저물 무렵, 민하윤은 서정아와 아버지께 드릴 옷과 보양식을 들고 요양원으로 갔다.서동민은 연세가 들수록 몸 상태가 더 나빠지고 있었다. 예전처럼 바나나를 먹으며 애니메이션을 보지도 않았고 얼굴빛도 잿빛으로 변한 채 조용히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민하윤은 서동민의 손을 꼭 잡고 아빠라고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돌아가기 전에 민하윤은 몰래 찬장 안에 봉투 하나를 넣어 두고 병원 건물을 나선 뒤에야 서정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민하윤은 서정아가 받지 않을까 봐 걱정했고 그렇게라도 해야만 감사한 마음을 전할 수 있었다.큰길가에는 검은 마이바흐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하도진은 조수석 쪽 차체에 기대선 채 손끝에 담배를 하나 끼우고 있었다. 하얀 연기가 피어올라 차갑고 엷은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민하윤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그쪽으로 걸어갔다. 하도진과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 몸이 갑자기 휘청했다. 하도진은 민하윤의 손목을 붙잡아 자기 품으로 세게 끌어당겼다.하도진은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버리더니 윤기가 나는 구두로 붉은 불씨를 짓이겨 껐다. 하도진의 손은 차가웠고 품 안에서는 바람이 가득 찬 것처럼 싸늘한 기운이 밀려왔다.“언제 돌아왔어? 민하윤, 너 임형섭이랑 결혼했어?”민하윤은 입을 다문 채 얼굴을 돌렸다. 누런 가로등 불빛 아래 두 사람의 길고 가는 그림자가 얽혀 있었다.하도진은 자조하듯 웃었다.“그래. 너는 나랑 할 말이 없겠지. 그럼 내가 말할게. 그 여자애는 집에서 붙인 맞선 상대였어. 내가 새로 사귄 여자 친구도 아니고 더더욱 사모님도 아니야.”“네. 알아요.”민하윤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요염한 눈빛이 소리 없이 하도진의 얼굴 위에 내려앉았다.하도진은 어색하게 목울대를 굴리더니 무의식중에 민하윤을 자기 품으로 더 끌어당겼다. 매서운 북풍이 두 사람 사이를 휘감았다.“너 결혼했지? 임형섭이랑...”“하 대표님, 그거 말고 또 하실 말씀 있나요?”민하윤은 하도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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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2화

고은율은 그만 웃음이 나왔다.“난 아무 말도 안 했어.”하도진은 촬영장에 세워 둔 밴 옆에서 표정이 좋지 않은 채 전화를 받았다.고은율은 가짜 배를 감싼 채 힘겹게 몸을 일으키더니 하도진에게 다가갔다.“무슨 일이라도 있어?”“포리아 프로젝트 책임자가 명원시에 도착했어. 오늘 저녁에 식사 자리가 잡혔어.”고은율은 고개를 끄덕였다.“바쁠 텐데 그럼 가 봐.”하도진도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무심코 시선이 고은율의 살짝 불룩한 배 위로 떨어졌다가 금세 거둬졌다.하도진은 그대로 차에 올라 떠났고 고은율은 이제 예전처럼 그에게 매달리지 않았다.시간은 고은율에게 많은 걸 가르쳐 줬다.남을 사랑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아껴야 하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매달려 봐야 아무 의미 없다는 도리를 알게 되었다.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던 고은율은 후련한 듯 숨을 내쉬었다.이 정도면 충분했다.두 사람은 천천히 친구 사이로 돌아가고 있었다.학생 시절의 그 풋풋한 설렘도 오래고 질긴 시간 속에서 이미 다 닳아 버렸다.곰곰이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하도진을 좋아한 건 늘 고은율 쪽이었다.고은율은 7년 동안 하도진이 자신에게 단 한 번이라도 흔들린 적이 있었는지, 정말 조금이라도 좋아한 적은 있었는지도 잘 몰랐다.주변 사람들은 한때 하도진 같은 천상계 남자가 모든 걸 내려놓고 자신을 따라 제누오까지 갔다며 부러워했다.하지만 사랑에 눈멀었던 고은율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그 시절 하도진이 제누오로 따라온 건 사랑이라기보다 집안의 통제에 맞서기 위한 이유에 가까웠다.고은율은 이제 하도진이 자신을 사랑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고은율은 이대로면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했다.한편 민하윤은 요즘 자이첸 외자 투자 건을 맡아 정신없이 바빴다.민하윤이 명원시 총행으로 돌아온 뒤 처음 맡은 S급 프로젝트였다.듣자 하니 지역 책임자는 여자였고 성격도 만만치 않다고 했다.부서에서 올린 제안서는 전부 퇴짜를 맞았다.민하윤은 일주일 내내 야근하며 새 제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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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3화

애들린은 뒷좌석 카시트에서 아직 아주 어린 아기를 안아 올렸다.고작 네다섯 달쯤 되어 보이는 아기였는데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힌 채 입술을 삐죽 내밀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미안해. 집에서 아이 봐주시는 이모가 갑자기 쉬게 돼서 도저히 시간을 뺄 수가 없었어. 그래서 수키를 데리고 왔는데... 괜찮겠지?”임형섭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고 말까지 꼬였다.“아니, 네 아기라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어? 넌 비혼주의자가 아니었어?”그러자 애들린이 웃었다.“오랜만에 봤다고 너무 구식적인 질문하는 거 아니야? 누가 결혼 안 하면 아기도 못 낳는대?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애들린은 그렇게 말하고는 곧 민하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죄송해요. 방금 수키가 계속 울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했네요.”“저는 애들린이에요. 린가 진후칸 지사 총괄 맡고 있어요. 만나서 반가워요.”애들린은 아이를 안고 있어 손을 내밀 수 없었는지 미안한 얼굴로 민하윤을 향해 웃어 보였다.“혹시 수키 좀 잠깐 안아 주실 수 있을까요? 차에 분유랑 기저귀가 있는데 그걸 가져와야 해서요. 아마 배가 고픈지 오는 내내 계속 울었거든요.”같은 여자라는 이유에서인지 애들린은 이상할 만큼 경계심이 없었다.처음 보는 민하윤에게 울고 보채는 자기 아이를 선뜻 맡기려 했다.민하윤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조심스럽게 말랑말랑한 아기를 받아 안았다.너무 긴장한 나머지 팔이 굳어 버려 몸조차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그런데 신기하게도 아기는 갑자기 울음을 뚝 그쳤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민하윤을 가만히 바라봤다.민하윤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품 안 가득 안긴 우윳빛 냄새 나는 통통한 아기를 내려다봤다.민하윤은 순간 마음이 한없이 누그러졌다.임형섭이 다가와 민하윤의 품에 안긴 아기와 살짝 놀아 줬다.그리고 수키의 보들보들한 작은 손도 살며시 잡아 봤다.그때 애들린이 갑자기 난감한 소리를 냈다.“왜 그러세요?”민하윤이 물었다.“큰일 났네요. 수키 젖병이랑 분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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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4화

민하윤은 머리를 세차게 내저었다.그러고는 수키의 통통한 볼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아기가 이렇게 작은데 무겁긴 뭐가 무거워요.”그러면서 품에 안긴 아기에게 고개를 숙여 말을 걸었다.“수키야, 넌 남자야? 아니면 여자야? 수키야, 웃어 봐.”두 사람은 품에 안긴 아기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봤다.그때 지하 2층에서 올라오던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추며 띵 소리를 냈고 문이 천천히 열렸다.하도진은 손에 든 서류를 넘겨보던 중이었다.문이 열리자 하도진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상대가 탈 수 있게 자리를 비켜 줬다.그런데 바깥에 선 사람들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지 않았다.의아하게 고개를 든 순간, 하도진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문밖에는 민하윤과 임형섭이 나란히 서 있었고 두 사람도 모두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하도진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민하윤의 품에 안긴 아기를 발견했다.통통한 손 하나를 꼭 쥔 채 칭얼거리고 있는 작은 아기는 꼭 애교 부리는 새끼 고양이 같았다.두 사람은 그대로 서 있었고 선뜻 앞으로 들어오지 못했다.하도진의 심장은 점점 바닥으로 가라앉았다.하도진의 눈에 비친 두 사람과 아기의 모습은 너무 선명했다.임형섭은 뒤에서 민하윤과 아기를 감싸안은 것처럼 가까이 서 있었고 세 사람은 누가 봐도 다정한 한 가족처럼 보였다.“탈 거야 말 거야.”하도진은 서류철로 열림 버튼을 누른 채 민하윤을 똑바로 바라봤다.하도진의 눈빛은 차갑기 짝이 없었고 태도 또한 한없이 멀어 보였다.민하윤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가 임형섭에게 팔꿈치를 가볍게 붙들렸다.민하윤은 본능적으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하도진은 끝까지 버텼다.서류철로 열림 버튼을 계속 누른 채 시선을 떼지 않았다.민하윤이 안 타면 자신도 여기서 계속 기다리겠다는 듯한 태도였고 누가 더 오래 버티는지 해 보자는 식이었다.민하윤이 입술을 깨물고 가만히 있자 품에 안긴 수키는 안긴 자세가 불편한지 다시 칭얼거리기 시작했다.민하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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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5화

엘리베이터가 26층에 멈추자 하도진은 깊게 숨을 들이켰고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그대로 발을 옮겨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갔다.민하윤은 눈을 내리깔고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 괜히 다시 돌아왔나 싶었다. 명원시에 있다면 결국 하도진을 피할 수가 없었다.임형섭은 민하윤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일부러 수키를 안은 채 민하윤의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꼬마야, 하윤 이모가 울 것 같은데... 수키가 이모 좀 달래 줄까?”말이 떨어지자마자 수키는 정말 울음을 뚝 그쳤다. 손가락을 입에 넣고 침을 질질 흘리며 동그란 눈을 깜빡거렸다.“배고팠나 보네요.”민하윤은 애써 정신을 다잡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수키의 입가에 흐른 침을 휴지로 닦아 줬다.애들린은 허둥지둥 룸 안으로 들어오더니 보온병의 물을 젖병에 붓고 분유통을 열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순식간에 분유를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손으로 젖병을 힘차게 흔들었다.수키는 젖병을 보자 더 크게 울어댔다. 하지만 입에 젖병이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세상 다 가진 얼굴로 젖을 쪽쪽 빨아 먹었다.세 사람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수키는 조용히 분유를 먹다가 눈꺼풀이 천천히 무거워졌고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눈을 덮자 곧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민하윤은 휴지로 수키의 입가에 묻은 우윳자국을 닦아 주고 작은 이불까지 잘 덮어 줬다.애들린은 의자에 털썩 앉아 생수 한 병을 단숨에 비웠다.“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다시는 도우미 이모한테 휴가 안 줬을 거예요.”세 사람은 직원에게 두툼하고 부드러운 담요 몇 장을 부탁해 소파 위에 깔고 곤히 잠든 수키를 그 위에 눕혔다. 그제야 그들은 자리에 앉아 계약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주문부터 할까? 일단 먹으면서 얘기하자.”임형섭이 메뉴판을 옛 친구 애들린에게 건넸다.“일 얘기부터 하자. 아니면 밥을 못 먹겠어. 혹시 함정일 수도 있잖아. 괜히 먹고받은 게 생기면 마음이 약해져. 방금 수키까지 봐줬는데 그것만으로도 이미 너무 미안하거든.”애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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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6화

민하윤은 마음속 생각이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하얘졌다가 붉어졌다.“그럼 이제 우리 밥 먹어도 되죠? 안 그러면 수키가 깨는 순간 이 식사는 끝이에요.”애들린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휘휘 저으며 지역의 특색 요리를 잔뜩 시켰다. 그러고도 마지막에는 임형섭을 향해 빼먹지 않고 확인했다.“나 오늘 너한테 얻어먹는 거 맞지?”그러자 임형섭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마음껏 시켜.”세 사람은 그렇게 함께 식사했고 식사 자리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애들린은 임형섭과 옛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민하윤에게 훨씬 더 큰 흥미를 보였다.애들린은 대놓고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둘이 상사와 부하 관계고 선후배 사이인 건 알겠는데... 그거 말고 다른 관계는 없어요?”민하윤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얼른 손사래를 쳤다.“없어요.”애들린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임형섭을 한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아, 그럼 아직 못 사귄 거네요.”애들린은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그러고는 민하윤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제가 형섭의 흑역사 하나 알려 줄게요. 우리 유학할 때 글로벌 경제학 교수님이 과제를 내줬거든요. 시뮬레이션 알고리즘 자료를 메일로 제출하라고 했는데 임형섭이 뭘 냈는지 알아요?”그러자 임형섭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애들린, 진짜 나랑 싸우자는 거야?”민하윤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저도 모르게 물었다.“뭘 냈는데요?”“얘가 진후칸어로 된 메일을 통째로 보낸 거예요. 교수님은 진후칸어를 못 읽으니까 형섭더러 직접 올라와서 번역하라고 했죠. 반에는 거의 다 외국인뿐이라 대형 화면에 띄운 그 메일 내용을 아무도 못 알아봤어요. 그런데 저는 읽을 수 있었죠.”애들린은 민하윤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그건 연애편지였어요. 대충 내용이 뭐였냐면 대학 시절부터 한 학과 후배를 좋아하게 됐고 그 마음을 오랫동안 혼자 품고 있었다는 거예요. 용기 내서 진심 가득한 편지를 썼고 결국 그 사람에게 분명한 대답을 듣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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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7화

임형섭은 민하윤이 올라가는 걸 끝까지 바라봤다.눈이 덮인 나무 옆에 서서 창문에 불이 켜질 때까지 한참을 올려다보다가 그제야 차를 몰고 떠났다.아무도 자갈길 옆 벤치에 말없이 앉아 있던 정장 차림의 남자를 눈치채지 못했다.하도진은 떨리는 손으로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냈다.손으로 바람을 막아 가며 몇 번이나 불을 붙이려 했지만 끝내 불이 붙지 않았다.결국 입에 문 담배를 빼고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민하윤은 사기꾼이었다.다른 남자와 결혼한 것도 아니었고 품에 안고 있던 그 아기도 그녀와는 아무 상관 없는 아이였다.임형섭의 차가 멀어졌다.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민하윤은 여전히 혼자였다.하도진은 깊게 숨을 들이켜더니 문득 웃었다.희미한 달빛이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내려앉았다.하도진은 설명할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혔다.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들떴다.하도진은 고개를 들어 창문 너머로 새어 나오는 따뜻한 노란 불빛을 오래 바라봤다.민하윤은 맨발로 바닥을 딛고 있다가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노트북을 안은 채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애들린이 남긴 피드백에 맞춰 제안서를 꼼꼼히 손보고 있었다.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카카오톡 친구 추가 알림이었다.민하윤은 무심코 눌러 봤다가 그대로 미간을 찌푸렸다.익숙한 오로라 프로필 사진에 변함없는 닉네임 H가 보였다.그 순간, 민하윤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하도진이 어떻게 자기 새 연락처를 알아낸 건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백누리였다.[하윤아, 나 진짜 미안해. 근데 하도진이 너무 많이 줬어. 오늘 매니저가 나한테 스타해 엔터 지분 양도 계약서 가져왔거든. 시가총액만 해도 수십억이야.]민하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답장을 쳤다.[그래서?][하도진이 원하는 건 딱 하나였어. 네 연락처랑 새 번호... 그래서 주긴 줬는데 받아 줄지는 네 마음이야.]민하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고 순간 심장이 세게 뛰었다.하얀 손끝이 화면 위에 머문 채, 하도진의 친구 요청을 한참이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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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8화

민하윤은 무언가에 홀린 듯 수락 버튼을 눌렀다.그러자 상대는 거의 곧바로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민하윤이 사진을 눌러 보자 통통하게 살이 오른 고양이가 소파 위에 벌러덩 누운 채 분홍빛 발바닥을 핥고 있었다.그 위로 남자의 한쪽 손이 고양이 등을 덮고 있었다.손마디는 또렷했고 손등에는 푸른 힘줄이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었다.민하윤은 천천히 물음표 하나를 보냈다.하도진이 이 밤중에 잠도 안 자고 친구 신청까지 해 놓고 정말 순순하게 삼색이 사진만 보여 주려는 건 아닐 게 뻔했다.민하윤은 화면 속 그 손을 한참 바라봤다.불거진 힘줄과 선명한 관절, 길고 예쁜 손가락이 선명하게 보였다. 민하윤은 문득 그 손이 자기 몸을 더듬던 장면까지 떠올라 버렸다.하도진은 자기 무릎 위에 엎드린 고양이를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어 이마를 툭 건드렸다.“잘해 보자. 네 엄마를 다시 꾀어 올 수 있냐 없냐는 너한테 달렸어.”[요즘 삼색이가 좀 아픈 것 같아. 내가 시간을 못 내서 동물병원에 못 데려가는데 네가 좀 데려갈 수 있어?]민하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고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삼색이는 네가 주워 온 거잖아. 내 집에서 몇 년을 공짜로 먹고살았는데 너는 양육 책임도 안 질 거야?]민하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답장을 보냈다.[도진 씨가 그때 삼색이는 이제 자기 거라고 했잖아요. 제가 데리고 가는 걸 막은 사람 당신이었어요.]하도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미끼를 물었네.’하도진은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였고 마음속에는 은근한 들뜸까지 번졌다.[그럼 넌 삼색이를 아직 키울 생각이 있어? 나 내일 회의 있어서 동물병원 데려갈 시간이 없어.]민하윤은 하도진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못했다.’나 아주머니는 뭐 하고 있지? 설마 일을 그만두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적어도 서 비서라도 삼색이를 병원엔 데려갈 수 있을 텐데...’선뜻 승낙할지 말지 망설이던 민하윤은 사진을 확대해서 다시 봤다.통통하게 살이 오른 삼색이를 보자 민하윤은 마음이 복잡해졌다.예전에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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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9화

영상은 거기서 뚝 끊겼다.민하윤은 마지막 순간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인 삼색이를 보자 마음이 이상하게 쓰렸다.민하윤은 입력창을 열어 하도진에게 따지듯 문자를 보냈다.[왜 삼색이한테 제가 삼색이를 버렸다고 말해요?]하도진은 한 손으로 삼색이의 등을 쓸어 주면서 다른 손으로 답장을 보냈다.[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때는 정말 네가 삼색이를 두고 간 거니까.]민하윤은 울컥했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그때 민하윤은 명원시를 완전히 떠날 각오를 하고 있었고 삼색이를 데리고 이곳저곳 떠돌 자신도 없었다.하도진 역시 삼색이를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이것저것 따져 보니 삼색이가 자기 곁에서 고생하는 것보다는 하도진의 곁에서 지내는 편이 훨씬 나았다.민하윤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여전히 화가 난 상태로 다시 문자를 했다.[이혼하고 혼자 아이 키우면서 상대를 욕하는 사람들이랑 뭐가 달라요?]그 말에 하도진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다를 거 없어. 몇 년 동안 진짜 내가 혼자 키운 건 맞으니까. 그런데 이 양심 없는 놈은 네 이름만 들어도 2층 방으로 달려가서 여기저기 뒤지고 문을 긁어 대.]민하윤은 가슴 한쪽이 찌르르 저렸다.하도진의 메시지는 계속 이어졌다.[이번이 처음 굶는 것도 아니야. 네가 떠난 직후 며칠 동안은 아무것도 안 먹었어. 하루 종일 물만 조금 핥았고 그런 상태가 적어도 일주일은 갔어. 네가 떠나자 삼색이도 많이 힘들어했어.]민하윤은 화면을 바라보며 눈가가 시큰해졌다.하도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그날 민하윤은 별장 앞에서 하도진과 완전히 등을 돌리기 전에 삼색이를 꼭 안아 줬다. 그리고 큰 결심을 내린 사람처럼 그대로 돌아섰다.통통한 삼색이는 민하윤을 한참을 뒤쫓아왔지만 민하윤은 끝내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삼색이를 데리고 가지도 않았다.그날 이후 삼색이는 고기 간식이나 츄르도 전부 거들떠보지 않았다.밥그릇에 담긴 사료는 한 입도 먹지 않았고 가끔 도자기 그릇 앞으로 와서 물만 몇 번 핥고 돌아갔다.하도진은 고양이 집 옆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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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0화

하도진은 민하윤의 젊은 몸을 욕심냈다.서로 몸이 얽히면서 정신없이 빠져드는 그런 쾌락이 좋았고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민하윤에게 끌렸다.민하윤의 전부를 갖고 싶었다.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하도진은 자신이 민하윤에게 느끼는 감정이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민하윤의 주변에 이성이 많은 꼴을 더는 못 보게 됐고 겉으로는 점잖고 부드러워 보여도 속은 영악한 늑대 같은 선배 임형섭과 민하윤이 가까이 지내는 걸 견딜 수 없었다.민하윤을 향한 감정은 단순한 육체적 끌림을 넘어섰고 가져서는 안 될 소유욕까지 자라났다.그 후로 하도진은 민하윤의 관심과 시선을 갈망하게 되었다.둘이 몸을 섞을 때면 억지로라도 자기 눈을 보게 만들었고 아예 민하윤을 통째로 삼켜 버려 다시는 누구에게도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하도진은 민하윤과 같은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는 걸 좋아했다.한 침대에서 같은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것도 좋아했다.지극히 사소하고 평범한 일들이어도 민하윤과 함께라면 하도진은 이상하리만치 행복했다.뒤늦게야 자신이 민하윤을 사랑하게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하도진은 그런 감정이 우습고 황당하게만 느껴졌다.그런데도 몸과 마음은 자꾸만 민하윤 쪽으로 기울었다.하도진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자 결국 일어나 삼색이 집 앞에 쪼그려 앉았다.“나 이제 네 엄마 진짜 다시 데려오려고 해. 날 좀 도와주면 안 되겠어?”삼색이는 발을 핥던 걸 멈추고 어둠 속에서 초록빛 눈을 반짝였다.그러더니 알겠다고 대답하는 것처럼 낮게 야옹 한 번 울었다....민하윤은 은행에 하루 휴가를 내고 약속한 시간보다 훨씬 일찍 별장 단지 앞에 도착했다.익숙하면서도 낯선 별장을 바라보자 민하윤은 마치 짐가방을 끌고 이곳을 떠난 게 불과 며칠 전 일처럼 느껴졌다.그때 하도진이 고양이를 안고 밖으로 나왔다.막 씻고 나온 사람처럼 간단한 스탠드칼라 셔츠에 긴 바지를 입고 있었고 머리는 차분하고 단정했으며 눈매는 여전히 검었다.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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