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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1화

겉으로 보기에는 별일 없이 끝난 식사였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하도진은 굳이 이 일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어느 쪽이든 다 친구였고 애초에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이건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다.술을 마신 구준오는 안색이 아주 좋지 않았다. 기사가 급히 다가와 구준오를 부축해 차에 태웠다.반쯤 내려간 차창 너머로 구준오의 시선이 다시 송지훈에게 향했다가 천천히 구이현에게 옮겨갔다.“안 타?”구준오는 말투부터 압박감이 상당했지만 구이현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친구 차 타고 왔어. 난 누리 언니의 차를 타고 갈게.”그러면서 구이현은 얼른 백누리의 팔을 잡아당기며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냈다.“그래요. 이현이는 제 차를 타고 가면 돼요.”연예계 생활로 눈치 하나는 누구보다 빠른 백누리는 흠 잡을 데 없는 미소를 지었다.“구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현이를 무사히 집까지 데려다줄게요.”그러자 구준오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더니 천천히 차창을 올렸다.차가 골목 끝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구이현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오빠가 뭐라고 했어요?”구이현은 미안함과 걱정이 뒤섞인 얼굴로 송지훈을 바라봤다.그러자 송지훈은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들어 구이현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별말 안 했어. 그래도 무슨 말을 하든 네 오빠가 널 정말 많이 아낀다는 것만 기억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아이고... 여기서까지 연애질이네. 오늘 이런 장면을 봤으니 저녁 샐러드는 안 먹어도 배부르겠네.”백누리는 이마를 짚으며 더는 이 자리에 남아 있고 싶지 않다는 듯 차 문을 열었다.그런데 막 타려던 순간 누군가 백누리의 앞을 막아섰다.“도련님, 무슨 일이에요?”백누리는 정말 진호영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진호영은 철이 없는 데다가 행동도 가벼웠고 사람이 영 믿음직스럽지 못했고 무엇보다 눈치가 너무 없었다.‘내가 진호영을 별로 반기지 않는다는 게 그렇게 티가 안 나는 걸까?’“별건 아니고 전에 제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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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2화

“이현아, 넌 우리가 모두 어릴 때부터 봐 온 동생이잖아. 그런 감정이랑 남녀 사이의 감정은 다르지. 어떻게 같은 선상에 놓겠어?”구이현은 눈을 내리깔았고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그랬군요.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송지훈은 그 말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민하윤을 바라봤다.“하윤 씨, 지금 몸도 불편하실 텐데 오래 서 계시면 힘들어요.”구이현은 별다른 뜻을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가죠. 전 괜찮아.”일행은 국성 골목 입구에서 헤어져 각자 반대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차에 탄 뒤에도 하도진의 손은 가만있지 않았다. 술기운이 살짝 오른 탓인지 자꾸 민하윤의 짧은 머리를 만지작거렸다.민하윤은 생각에 잠긴 채 몇 번 참다가 귀찮다는 듯 하도진의 손을 밀어냈다.“왜? 아직도 머리 때문에 속상해? 금방 다시 길어.”민하윤은 고개를 저었다.“머리 생각한 거 아니에요. 그냥...”“그러면 뭘 생각했는데?”도수가 센 술을 조금 마신 하도진은 뒤늦게 술기운이 올라왔는지 평소보다 유난히 민하윤에게 들러붙었다.“이현이가 예전에 좋아했던 사람이...”민하윤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됐어요. 다 지난 일인데...”“뭐?”하도진은 갑자기 몸을 바로 세웠다.“설마 이현이가 오래전부터 송지훈을 좋아했던 거야? 어쩐지 우리랑은 다 잘 지냈는데 유독 지훈이만 피하더라.”하도진은 제법 진지한 얼굴로 혼자 결론을 내렸다.그러자 민하윤은 어이가 없어 한숨을 쉬었다.“됐어요. 이제야 도진 씨가 정말 아무 생각도 없었다는 게 믿기네요. 연애 쪽으로는 진짜 눈치가 없네요.”술기운이 제법 오른 하도진은 뒷좌석에 기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맞아. 나 원래 그런 쪽으로는 좀 둔해.”그러더니 잠시 후 낮게 덧붙였다.“안 그랬으면 너를 그렇게 오래 놓치지도 않았겠지.”민하윤은 순간 굳었다.가슴속에서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오자 민하윤은 괜히 당황해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바라봤다.높은 건물과 거리의 사람들이 차창 너머로 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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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3화

그 순간, 채선화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평소 학생이나 부하 직원을 대하듯 아들을 훈계하는 버릇이 있었지만 하도진은 그런 엄마의 권위가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결국 채선화는 입을 다물고 쇼핑백 두 개를 들고 냉장고로 향했다. 교외 농장에서 가져온 신선한 달걀과 유기농 채소를 하나씩 꺼내 정리했다.“아이고, 이런 건 아래 유기농 마트에서도 다 살 수 있는데 엄마랑 할머니가 뭐 하러 직접 가져오셨어요.”하도진은 졸린 눈으로 하품하며 입을 열었다.“그거랑 같니? 이 채소는 전부 네 할아버지가 직접 온실에서 키운 거야. 내년 여름에는 마당에 채소를 잔뜩 심어서 우리 쌍둥이한테 직접 키운 친환경 채소를 먹이겠다고 하시더라.”하도진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른 채 두 사람에게 차를 우리면서 말했다.“할아버지도 연세가 있으신데 이제 그만 좀 쉬시라고 해요.”“본인이 좋아서 하시는 걸 어떡하니? 요즘은 매일 기사한테 교외 온실까지 태워 달라고 해서 잡초도 뽑고 물도 주신다니까. 며칠 전에는 농사 관련 책까지 한가득 사 오셨어. 은퇴하기 전보다 더 바쁘셔.”“이 추운 겨울에 이런 채소까지 키우시다니... 할아버지도 대단하시네요.”하도진은 찻잔을 두 사람 앞에 하나씩 내려놓았다.그때 채선화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제 곧 설이잖아. 미리 하윤이랑 얘기해서 짐 챙기고 본가에 들어와 한동안 지내.”“싫어요. 설날에 가도 안 늦어요.”하도진은 소파 한쪽에 늘어지듯 기대앉으며 말을 이었다.“본가에 들어가면 얼마나 불편한데요. 늦잠도 못 자고 세 끼에 야식까지 정해진 식단대로 먹어야 하잖아요. 우리 모두 답답해서 못 견뎌요.”“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해.”채선화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하도진을 노려보며 말했다.“곧 아빠가 될 사람이 아직도 애처럼 굴다니 철이 없어도 너무 없어.”이 말은 정말 하도진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었다.하도진은 한숨을 내쉬었다.“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 와이프는 제가 잘 챙길 수 있어요. 애들이 태어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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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4화

그때 배송 기사들이 초록색 소형 트럭 한 대를 몰고 왔다.처음에는 하도진도 별생각이 없었다. 그저 혼자 거실 소파에 앉아 두 명의 배송 기사가 연신 상자를 들고 들락날락하는 모습을 지켜봤다.그런데 넓은 거실이 어느새 택배 상자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조차 없어지자 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하도진은 여자들의 쇼핑 욕구를 너무 얕본 모양이었다.여자인 민하윤조차도 눈앞의 광경에 할 말을 잃었고 커다란 배를 받친 채 이쪽저쪽 돌아다니며 물건을 구경했다.“이리 와서 앉아.”하도진은 민하윤을 소파에 앉힌 뒤 서랍에서 가위를 찾아 하나씩 상자를 뜯기 시작했다.작게는 노리개, 우유병, 턱받이부터 크게는 유모차까지 없는 게 없었다.두 어른은 쌍둥이에게 조금도 차별을 두지 않았다. 크든 작든 모든 물건을 정확히 두 개씩 준비해 두었고 같이 쓰라는 건 아예 없었다.한참 상자를 뜯던 하도진은 슬슬 지쳐 갔다.거실 바닥에 줄지어 놓인 각종 물건들을 보자 하도진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여기가 거실이야? 애들 주차장이야?’하도진도 직접 아이를 낳아 보기 전에는 요즘 아기용품이 이렇게 다양하다는 걸 알 길이 없었다.수백 곡의 동요가 들어 있고 알록달록한 불빛이 나오는 장난감부터 누워서 재울 수 있는 바운서와 접이식 유모차, 가리개가 달린 유모차, 네 바퀴짜리 전동 유모차까지 종류별로 많았다.심지어 나무로 만든 장난감 회전목마에 실내용 미끄럼틀과 그네 세트까지 있었다.이쯤 되니 집이라기보다 작은 키즈카페와 대형 아기용품 매장을 합쳐 놓은 것 같았다.하도진은 아직 뜯지도 못한 상자가 한가득 남아 있는 걸 보며 갑자기 진이 빠졌다.쌍둥이를 낳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키우는 것도 만만치 않을 게 분명했다.‘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모든 걸 똑같이 맞춰 놓았다니... 애들만 생각하지 말고 부모 생각도 좀 해 주지.’하도진은 다시 상자를 뜯기 시작했다.이번에는 물티슈와 휴지, 기저귀가 거실 절반을 채울 만큼 쏟아져 나왔고 뒤이어 새아기 옷이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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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5화

하도진은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검지를 작게 흔들며 말했다.“그럴 리가. 내 딸 이름은 당연히 흔하지 않고 멋진 걸로 지어야지. 기왕이면 좀 카리스마도 있었으면 좋겠어.”그 순간, 민하윤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씰룩였다. 하지만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예를... 들면요?”민하윤의 질문에 하도진도 바로 답하지 못했다.급기야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2층 서재로 올라가 천문 지리부터 고전 시가, 불경과 철학서까지 닥치는 대로 뒤지기 시작했다. 듣기 좋으면서도 흔하지 않고 의미까지 깊은 이름을 반드시 찾아내겠다는 기세였다.사실 이름을 짓겠다는 건 순간적인 생각만은 아니었다.하지만 아무리 책을 뒤져 봐도 하도진의 마음에 쏙 드는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민하윤은 진작 그 일을 잊어버린 뒤였다.그날 밤, 샤워를 마치고 머리까지 말린 민하윤은 침대에 누워 만화를 볼 준비를 했다.요즘 푹 빠진 순정 로맨스 만화가 하나 있었는데 풋풋한 연애에 코믹한 내용까지 섞여 있어 민하윤의 몇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이불까지 덮고 태블릿을 집어 든 순간, 커다란 손이 민하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생각해 봤는데 딸이면 그냥 돈 주고 작명 전문가한테 맡기자. 이름은 대충 지으면 안 되잖아. 특히 여자애는 이름이 예쁜 것도 장점이지.”“네, 네...”민하윤은 건성건성 고개를 끄덕이다가 하도진이 방심한 틈을 타 태블릿을 다시 가져왔다.“그러면 이름은 전문가한테 맡겨요. 우리도 머리 아플 일 없잖아요. 아들이어도 신중하게 지어야 해요.”“아들은 아무거나 지어도 돼. 어차피 부르는 이름인데 말이야.”민하윤은 어이가 없었다.‘정말 차별도 적당히 해야지.’쌍둥이의 태명은 설날, 김옥자가 절에서 받아 온 이름으로 정해졌다.김옥자는 모두 4개의 이름을 가져왔다.“스님께서 남자아이 둘, 여자아이 둘씩 이름을 지어 주셨어. 쌍둥이라도 성별에 맞춰 하나씩 고르면 된다고 하시더구나.”김옥자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천천히 펼쳤다.힘 있는 붓글씨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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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6화

“회주는 ‘대지도론’에서 중생을 자비로 보듬고 배로 사람을 건넨다는 뜻에서 따온 이름이란다. 스님 말씀으로는 오행의 조화도 좋아 아이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셨어. 명연은 ‘능엄경’에서 따온 이름이야. 어리석음을 깨뜨리고 본성을 밝게 깨닫는다는 뜻이라 지혜롭고 총명하게 자라라는 의미래.”“남자애 이름을 이렇게까지 어렵게 지어야 하나요?”하도진은 여전히 자기가 지은 이름이 더 낫다고 생각했지만 더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또 말했다가는 할아버지에게 지팡이로 한 대 더 맞을 것 같았다.가족들은 모처럼 화기애애하게 설날 저녁을 함께 먹었다.식사를 마친 뒤에는 모두 거실에 모여 앉아 공연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스님께서 태명은 지어 주셨는데... 정식 이름은 생각해 둔 게 있니?”“남자애들은 그냥 성만 붙이면 되잖아요. 하회주, 하명연이요. 어릴 때는 주주랑 연이라고 부르면 되고요.”하도진은 그 자리에서 남자아이 이름을 바로 정해 버렸다.다들 잠시 생각해 보니 스님이 지어 준 이름도 살리고 듣기에도 나쁘지 않아 그대로 하기로 했다.민하윤은 사과를 베어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그럼 여자아이들도 그냥 성을 붙여요?”하지만 속으로 두 이름을 몇 번 되뇌어 보니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그럴 리가!”하도진은 단번에 반대했다.“하덕풍, 하화우가 뭐야. 너무 옛날 이름 같잖아. 덕풍이랑 화우는 그냥 태명으로 쓰고 정식 이름은 더 예쁜 걸로 지어야지.”사람들은 일제히 할 말을 잃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자아이 이름은 그렇게 대충 정해 놓고 딸 이름에는 왜 이렇게 유난인 건지 말이다.“좀 더 생각해 봐야겠어. 이름은 평생 따라다니는 거잖아. 내 딸 이름인데 아무렇게나 지을 순 없지.”그때 누군가 한마디 거들었다.“그럼 작명하는 분한테 부탁해 보는 건 어때? 태명은 스님께 받은 걸 쓰고 정식 이름은 외할머니한테 부탁해서 괜찮은 분을 알아봐 달라고 하면 되잖아.”“싫어요. 왜 그렇게 다들 그런 걸 믿어요?”하도진은 질색이라는 듯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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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7화

설이 지나자 하씨 가문에는 긴장감과 설렘이 함께 감돌았다. 온 가족이 하루빨리 새 식구들을 만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민하윤의 출산 예정일이 가까워질수록 하도진도 부쩍 예민해졌다. 아침에는 늦게 나가고 저녁에는 일찍 돌아오며 웬만하면 민하윤의 곁을 지켰다.임신 35주가 되자 문선미 교수가 다시 정밀 검사를 진행했다. 쌍둥이의 예상 체중과 머리둘레 모두 정상 범위였다.검사를 마친 문선미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자연분만과 제왕절개 중 어느 쪽을 생각하고 있어요?”“아내가 마취가 잘 듣지 않는 체질인데... 어떤 방법이 그나마 덜 힘들까요?”그러자 문선미는 고개를 저었다.“출산 자체가 산모에게는 힘든 일입니다. 지금 상황이라면 복막 외의 제왕절개를 권하고 싶군요. 임상적으로도 이미 많이 안정된 방법이고 수술 후 통증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습니다. 마취제도 몇 가지 수입 약물 중에서 선택할 수 있으니 그 부분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그날 이후 하도진은 아예 비상사태라도 선포한 사람처럼 굴었다.회사에도 거의 나가지 않고 집에 붙어 지내며 언제 진통이 시작될지 모르는 민하윤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도저히 빠질 수 없는 해외 회의는 전부 화상으로 돌렸다. 민하윤이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으면 하도진도 노트북을 들고 서재에서 내려와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하도진은 어떻게든 민하윤을 자기 시야 안에 두려는 듯했다.검은색 반무테의 안경을 쓴 하도진은 짙은 회색 실크 잠옷 차림으로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가끔 민하윤이 알아듣지 못하는 제누오어로 몇 마디씩 말했다.민하윤은 한동안 진지하게 일하는 하도진을 구경하다가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무거워진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자 민하윤의 길게 뻗은 속눈썹 아래로 짙은 그림자가 졌다.오후 햇살이 거실 안으로 따뜻하게 스며들었다.회의를 마친 하도진은 안경을 벗고 미간을 꾹 눌렀다가 그제야 소파에 누운 민하윤이 잠든 걸 발견했다.집 안은 난방이 따뜻해 민하윤은 연분홍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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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8화

이제는 사소한 일 하나에도 하도진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가 다시 뛰기를 반복했다.민하윤은 괜히 맞서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알기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하도진의 손을 잡아 수도꼭지 아래로 끌고 갔다.차가운 물이 쏟아지는 사이, 핏줄이 도드라진 하도진의 하얀 손등은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많이 아파요?”하도진은 고개를 저으며 민하윤을 안심시켰다.“별거 아니야. 안 아파.”3월 중순, 예정일까지 이제 열흘 남짓밖에 남지 않자 온 가족이 덩달아 숨을 죽였다.채선화는 거의 매일 전화를 걸어 상태를 확인했고 물어보는 것도 늘 비슷했다.하도진은 이제 그런 질문을 하도 많이 들어 이제는 채선화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외울 지경이었다.“태동은 어때? 배는 자주 뭉쳐? 태동 검사도 했고? 하윤이 오늘 상태 어떠니? 차라리 아는 사람을 통해서 밴카버에 있는 사립 병원으로 가는 건 어때? 하윤이는 비자도 있잖아.”계속되는 질문에 하도진도 슬슬 지쳐 갔다.안 그래도 출산일이 다가올수록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데 이제는 집의 전화벨만 울려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였다.결국 민하윤은 예정일보다 조금 일찍 출산 신호가 왔다.그날 아침, 하도진은 나지혜가 차려 놓은 아침을 들고 2층으로 올라왔다가 텅 빈 침실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하도진은 쟁반을 한쪽에 내려놓고 욕실 문을 두드렸다.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었다.안에서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왔다.“하윤아, 내가 들어가서 도와줄까? 바닥이 미끄러우니까 조심해.”여전히 대답이 없자 하도진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나 들어간다?”문손잡이를 돌려 욕실 문을 여는 순간, 하도진은 심장이 그대로 멎는 줄 알았다.“하윤아!”하도진은 다급히 달려가 미끄러져 욕실 바닥에 주저앉은 민하윤을 일으켰다.샤워기에서는 계속 물이 쏟아져 두 사람은 순식간에 흠뻑 젖었다.“어쩌다 이랬어?”하도진은 다급하고 화도 났지만 그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얼굴에 흐르는 물을 대충 훔치고 황급히 샤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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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9화

민하윤은 원래 집안의 어르신들까지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하도진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넋이 나가 있었다. 뭘 해야 할지도 모른 채 우왕좌왕하는 모습에서 긴장과 두려움이 그대로 드러났다.민하윤은 하도진의 그런 모습을 더는 보고 있을 수 없었기에 창백한 입술을 꾹 깨물고 밀려오는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어머님께 전화해요.”전화벨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채선화가 받았다.“엄마, 하윤이가 애 낳을 것 같아요. 양수가 터졌어요!”전화기 너머로 채선화의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뭐라고? 아직 보름이나 남았잖아! 예정일도 안 됐는데 갑자기 왜 양수가 터져?”하도진은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손에 묻은 게 욕실에서 젖은 물인지 식은땀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욕실에서 넘어졌는데 그 뒤로 양수가 터졌어요.”늘 침착하던 채선화도 그 말에는 당황했다.마침 대학원생의 발표를 듣고 있던 중이었지만 더 볼 것도 없이 가방을 챙겨 들고 강의실을 나섰고 곧장 차를 몰아 병원으로 향했다.소식을 들은 하진석과 김옥자도 기사를 불러 바로 병원으로 출발했다.민하윤은 수술실 앞까지 침대에 실려 왔다.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진통이 너무 심해 이제는 말할 힘조차 없었다.“하윤아, 무서워하지 마. 우리 모두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김옥자는 집을 나서기 전부터 너무 놀란 나머지 도우미가 챙겨 준 청심환까지 먹고 왔지만 아직도 가슴이 쿵쿵 뛰어 진정되지 않았다.민하윤은 울고 싶었지만 눈물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고통에 시야가 흐려지며 머릿속도 새하얘졌다.하도진은 민하윤의 손을 꽉 붙잡은 채 끝까지 같이 들어가겠다고 고집했다.수술 준비를 마친 문선미는 손을 씻고 나오다가 하도진을 한번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상태로 들어가 봐야 방해만 됩니다. 수술 시작하면 바로 마취 들어갈 거고 의료진이 다 있으니 일단 밖에서 기다리세요.”채선화도 급히 달려오느라 발걸음이 휘청거릴 정도였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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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0화

문선미는 수술 준비를 마치고 마취과 의사에게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냈다.“조금만 자고 일어나요. 무통 주사랑 마취 들어가면 훨씬 괜찮아질 겁니다.”하도진은 떨리는 손으로 민하윤의 손을 꼭 잡고 애써 웃어 보이며 말했다.“눈 좀 감고 있어. 내가 계속 네 곁에 있을게.”민하윤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곧 허리 쪽으로 바늘이 들어오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고 차가운 약물이 천천히 몸 안으로 퍼졌다.민하윤은 아픔에 눈을 꼭 감았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고 오로지 끝없이 이어지던 진통만 온몸으로 느껴졌다.그러다가 통증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고 서서히 졸음도 밀려왔다.하도진은 연신 민하윤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줬다.민하윤은 그대로 잠들고 싶었지만 마취 용량이 적절하게 조절된 탓에 의식은 또렷했다.차가운 수술대 위에 누워 몸은 힘이 빠져 있었지만 민하윤의 정신은 깨어 있었다.옆에서 간호사들이 하도진에게 말을 거는 소리까지 들렸다.문선미가 하도진에게 직접 탯줄을 자르겠냐고 묻는 것도 들렸다.하도진이 뭐라고 대답한 것 같았지만 그 말까지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하도진은 민하윤의 손을 꼭 잡고 손끝에 입술을 댄 채 수술대 쪽을 바라봤다.곧 길게 이어진 탯줄이 보였고 간호사가 피와 하얀 태지가 묻은 작은 아기를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첫째는 남자아이입니다.”하도진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이 순간만큼은 아이의 성별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너무 긴장한 나머지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한 채 눈앞의 작은 생명을 멍하니 바라봤다.문선미는 능숙하게 탯줄을 묶고 잘랐다.곧 우렁찬 울음소리가 수술실 안에 울려 퍼졌다.하지만 긴장된 분위기는 여전했다.간호사들은 아기를 데려가 체중을 재고 몸에 묻은 피와 태지를 닦은 뒤 작은 담요로 감쌌다.나머지 의료진은 그대로 수술대 주변에 남아 둘째를 기다렸다.그리고 7, 8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아기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피부는 붉고 자줏빛이 돌았고 온몸에는 하얀 태지와 피가 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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