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Chapter 211 - Chapter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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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1화

“거짓말이 아니란 얘기야.”장현택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부작용을 50%까지 낮춘 신약은 이미 실험에 들어갔고 온채아 씨가 이전에 진행했던 연구들을 봤을 때, 실패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성공으로 이어질 거야.”부작용을 절반이나 줄인다는 건 결코 하루이틀 실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온채아는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매번 수치를 조금씩 조율해나갔고 그 과정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장현택은 그녀의 재능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한재혁과 양준이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장현택은 일부러 덧붙였다.“원래 이 프로젝트를 너희들 팀 명의로 제출하려 했어. 하지만 지금 보니까, 두 사람은 연구에 아예 관여조차 안 했네. 그럼 연구진 명단에는 온 조장과 강태무 이름만 올리겠어.”그 말에 회의실 공기는 단숨에 얼어붙었다.한재혁과 양준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미 늦었다.그들은 아까 너무 단정적으로 말해버린 탓에 스스로 물러날 구멍조차 없앤 셈이었다.심서정의 얼굴 역시 보기 좋게 굳어 있었지만 이내 태세를 바꾸며 온채아를 바라봤다.“어차피 앞으로 두 팀이 공동 연구를 하게 될 거라면 온 팀장께서 이번 약물 실험의 배합 비율 정도는 공유 해주셔야 하지 않을까요?”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은 다시 한번 술렁였다.노골적으로 성과를 가로채려는 의도가 다 드러나는 질문이었다.온채아는 얇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공동 연구라는 말은 맞아요. 하지만 그게 당신더러 편하게 성과만 가져가라는 뜻은 아니에요.”그녀의 말투는 단단했지만 결코 감정적으로 흐르지 않았다.“최소한 같은 수준의 역량은 갖추고 요구하세요. 그 정도면 나도 굳이 숨길 이유 없으니까.”이쯤 되면, 온채아도 심서정의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였다.그녀는 그냥 손쉽게 명성과 이익을 얻고 싶었을 뿐이고 실력은 없으니 머리를 굴리는 것뿐이었다.결국 이번 회의의 본질은 하나였다.공동 연구란 이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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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2화

온채아의 말을 들은 순간, 심서정은 잠시 멍해졌다.하지만 곧 입꼬리를 비틀며 마치 정신 나간 사람이라도 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설마 지금, 본인이 여승운 선생의 ‘입실 제자’라도 된다는 말은 아니겠죠? 그런 꿈은 이제 깨는 게 어때요?”만약 진짜 여승운의 입실 제자였다면 이 세상에 못 만날 고위 인사는 없었을 테고 벌써 언론을 타고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어야 정상이다.이렇게 연구소 구석에서 고생하며 약 개발 따위를 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하지만 온채아는 그녀의 조롱에도 가볍게 입꼬리를 올린 채, 담담하게 대답했다.“당신한텐 굳이 증명할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그 말만을 남긴 채, 온채아는 더는 들을 필요 없다는 듯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그러자 심서정이 불쑥 목소리를 높였다.“내가 오늘 여기 왜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아요?”“관심 없어요.”온채아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굳이 듣지 않아도 짐작은 갔다.심서정이라면 분명히 주율천이 연결해 준 거라고 들먹일 게 뻔했다. 이 정도 권력을 가진 사람이 경성에 많지 않으니까.그녀가 복도를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엘리베이터 문이 막 열리려던 찰나, 연구소의 또 다른 동료가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그는 숨을 고르며 온채아를 마주 보고는 존경 어린 눈빛으로 감탄을 터뜨렸다.“온 조장님, 정말 대단하세요!”온채아는 평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구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누구든 해낼 수 있어요. 결국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의 차이죠.”그는 한재혁이나 양준과는 완전히 달랐다.온채아를 깔보거나 뒷말을 하는 일도 없었고 오히려 조용히 손을 내밀어준 적이 많았다.“앞으로 도와드릴 일 있으면 언제든 말씀만 하세요!”전윤호는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온채아도 그 미소에 화답하며 부드럽게 말했다.“고마워요.”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몇 명이 함께 내렸다.사람들이 조금씩 흩어지자, 강태무가 온채아 옆에서 고개를 살짝 돌려 조용히 물었다.“진짜 심서정이랑 공동 연구할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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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3화

사진 속 소녀는 맑은 눈망울에 입꼬리를 활짝 올린 해사한 미소까지, 너무도 사랑스럽고 예뻤다.그리고 그 모습은 아주 조금씩 주율천의 기억 속에 자리한 그 아이의 얼굴과 겹치기 시작했다.오랜 세월이 흘러, 그는 사실 그때 그 아이의 얼굴을 거의 다 잊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이 사진은 그의 기억과 놀라울 정도로 완벽히 포개지고 있었다.게다가 이상하게도 이 사진은 어딘가 낯익었다. 정확히 어디서 본 건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확실히 본 적 있다.마침 온채아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려 하자 주율천은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슬쩍 내려 화면을 가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헛기침을 했다.“그게...”“급한 일 있던 거 아니었어요?”온채아는 그의 표정에 스친 조급함을 눈치챈 듯, 태연하게 툭 내뱉었다.사실 그는 정말로 마음이 급했고 지금 당장이라도 이 사진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그래, 급한 일 있어서...”“그럼 먼저 가세요.”온채아가 조용히 그렇게 말하자, 주율천은 그녀 옆에 서 있는 강태무를 한 번 힐끗 보고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응, 진짜 급한 일이라 그래.”온채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그제야 방향을 틀어 엘리베이터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차에 오르자마자 주율천은 곧장 담결에게 전화를 걸었다.“이 사진, 나 분명히 본 적 있어.”사진 속 아이뿐 아니라 그 전체적인 분위기까지도 너무 익숙했다. 단순히 과거 해성에서 몇 번 마주친 기억만으로 설명되기엔 너무도 또렷한 친숙함이었다.그의 머릿속은 지금 어떤 진실을 꺼내기 직전인 듯 알 수 없는 불안과 초조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급기야 목소리에도 떨림이 섞였다.“이 사진, 더 깊이 파봐. 단서 하나도 놓치지 말고.”“네, 대표님.”담결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주율천은 숨을 고르며 목소리를 낮췄다.“심서정이 예전에 말했던 거... 구아를 입양한 사람이 경성에 있다는 얘기, 그건 어디까지 조사됐어?”담결은 곧바로 상황을 정리해 보고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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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4화

온채아는 몸을 굳힌 채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시선 끝에, 문에 기대어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성유준과 눈이 마주쳤다.그는 막 샤워를 마친 듯했다.젖은 듯 축축이 내려앉은 먹빛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흘러내려 있었고 평소처럼 날이 선 분위기 대신 오늘은 한층 누그러진 인상이었다. 오히려 편안하고 청량한 기운이 감돌았다.“그런 거 아니야.”온채아는 속으로 조용히 절망했다.착각한 건 자신이었다.‘간신히 손에 넣은 약점을 성유준이 이렇게 순순히 놓아줄 리 없다는 걸, 왜 그토록 순진하게 기대했던 걸까.’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느긋하게 물었다.“내가 없으니 그렇게 좋았던 거야?”“아니라니까.”입으로는 부정했지만 말과 달리 온채아의 눈빛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그러나 성유준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손짓으로 가볍게 그녀를 불렀다.“그럼 와서 밥이나 먹자.”온채아는 자신이 거절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 한 장짜리 계약서 때문에 적어도 성유준 앞에서만큼은 주율천과 있을 때보다도 더 ‘자유’가 없었다.그녀는 묵묵히 신발을 갈아신고 거실로 들어섰고 식탁 위에 가지런히 차려진 반찬 네 가지와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보자 눈빛이 살짝 빛났다.“오빠가 만든 거야?”음식은 하나같이 따뜻했고 용기도 외식용이 아니었다. 포장 흔적 없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고 보기만 해도 정성이 느껴졌다.그날 아침, 그가 끓여줬던 죽과 계란말이도 의외로 맛있었기에 요리를 할 줄 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성유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질문을 되받았다.“넌 남자가 요리할 줄 아는 게 좋아? 아니면 모르는 게 좋아?”온채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되물었다.“진짜 솔직하게 말해도 돼?”“그럼. 아니면 뭐 하러 물어봐.”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상관없어. 좋아하는 사람이면 주방을 어질러도 귀엽고 싫어하는 사람이면 미슐랭 셰프라도 그냥 ‘요리 잘하네’ 정도일 뿐이니까.”요컨대, 감정이 없으면 아무리 뛰어난 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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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5화

성유준은 부엌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온채아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대로 그녀를 다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가 머무는 이곳이 비로소 ‘집’처럼 느껴졌으니까.온채아는 두 벌의 식기를 들고나와 성유준 맞은편에 앉으려다 그가 자기 옆 의자를 살짝 당기는 걸 보고 걸음을 멈췄다.“여기 앉아.”협의서에 얽매여 아무 저항도 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온채아는 말 없이 그의 옆에 앉아 조용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얼마간 침묵이 흐른 뒤, 온채아는 익숙한 맛에 고개를 들었다.“이거 어디서 먹어본 맛인데?”성유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무심하게 대답했다.“갈비찜이 다 이런 맛이지.”이미숙은 한식 요리에 일가견이 있었고 그녀의 손맛은 웬만한 프라이빗 셰프와도 견줄 만큼 정갈하고 깊었다.하지만 그 요리를 맛볼 수 있었던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온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말했다.“그렇긴 하지.”“밥이나 마저 먹어.”성유준은 젓가락으로 갈비 한 점을 집어 그녀의 그릇에 올려주었다.온채아가 고개를 숙인 채 그걸 한입에 넣고 씹기 시작하자, 그녀의 볼이 작게 부풀어 올랐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성유준의 눈동자에 잔잔한 미소가 은은하게 번졌다.아마 누군가 이 장면을 목격했다면 의심부터 했을 것이다.성유준에게 저런 표정이 나올 리 없다고, 그건 틀림없이 착각이라고 여겼을 테니까.창밖으로는 해가 저물고 도시엔 하나둘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온채아는 성유준이 집어준 갈비를 입에 넣은 채, 잠시 아득한 기분에 잠겼다.어린 시절, 그들과 성유준은 수없이 많은 저녁을 함께했다.하루도 빠짐없이 서로 마주 앉아 밥을 먹었던 3,336일의 기억과 그 수많은 밤 속에서 이어졌던 익숙한 식사 시간.문득 눈가가 뜨거워졌다.자신은 분명 성유준을 원망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슴이 시큰해져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먹먹한 감정이 심장을 찌르듯 퍼져나갔고 그 뜨거움이 어느새 머리끝까지 차올라 아무리 눌러도 가라앉지 않았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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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6화

아마도, 단 한 번도 그런 경험이 없어서였을까, 온채아는 침대 위가 오히려 더 안전하게 느껴졌다.그녀는 성유준이 직접 골라준 잠옷을 입고 있었다.목선과 치맛단엔 섬세한 레이스가 장식되어 있었고 그 디자인은 그녀를 한층 더 순하고 단정한 분위기로 만들어주고 있었다.머리를 말리다 말고 잠깐 정신이 다른 데 팔렸는지 앞머리가 한쪽으로 살짝 날려 올라가 있었고 그 모습은 의외로 귀엽고 발랄했다.맑고 투명한 피부는 샤워 후의 뜨거운 물기운을 머금은 듯 옅은 홍조를 머금었고 지금의 그녀는 마치 잘 익은 복숭아처럼 생기가 흘러넘쳤다.다만 겉보기엔 차분해 보였지만 두 손을 앞에서 끊임없이 꼬아 쥐고 있는 움직임은 그녀의 긴장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사슴 같은 검은 눈동자에도 어딘가 불안한 기색이 서려 있었고 그보다 더 짙게 읽힌 건, 이미 마음을 내려놓은 듯한 체념 혹은 각오였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성유준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그리고 장난기 어린 말투로 중얼거렸다.“영화부터 보고 침대로 가자.”“영화도 본다고?”온채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영화’를 떠올렸다.“그런 영화는 안 봐도 될 것 같은데...”한 번쯤 호기심에 본 적이 있었지만 고화질 영상은 너무 적나라했고 오히려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다.물론 이제 나이도 있고 지난 몇 년간은 피할 수 없는 생리적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기에 그녀 역시 그런 욕망을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영상보다는 소설 쪽이 훨씬 편했다.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성유준에게 같이 야설 보자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그랬다간 평생 놀림감이 될 게 뻔했다.‘게다가 성유준처럼 정정한 남자가 왜 그런 영화를...’‘설마 그게 안 되는 건 아닐까...’온채아가 갈수록 묘한 상상을 이어가는 걸 눈치챈 성유준은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네 머릿속엔 도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거냐...”그는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고 화면이 켜지자마자 나타난 영화 제목에 온채아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플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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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7화

그때, 집 안에 갑자기 성유준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려 퍼졌고 온채아는 놀란 나머지 반사적으로 진동 모드로 전환한 뒤 화면을 들여다봤다.전화의 주인은 성일이었다.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자 곧바로 보고가 흘러나왔다.“대표님, M 국 쪽 프로젝트 최종 확정됐습니다.”“저예요.”온채아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레 말했다.“오빠 지금 자고 있어요. 일어나면 전화하라고 전해줄게요.”“자고 있다고요?”성일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설마요, 대표님이 이 시간에 주무신다고요? 늘 새벽에나 잠드셨던 분인데 이렇게 일찍 주무신 건 처음 듣네요.”온채아는 순간 멈칫했다.“그래요?”“그럼요.”성일은 피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근데 아마도 아가씨가 옆에 계셔서 그런 거 아닐까요? 대표님도 이제 편안해지신 거죠.”그리고는 더는 말을 잇지 않은 채, 마치 일부러 공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빠르게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온채아는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성유준의 얼굴을 바라봤다.정갈하고 선명한 이목구비, 조용히 눈을 감고 잠든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훨씬 더 평온하고 온화해 보였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마음 한구석이 소란스럽게 흔들렸다.예전의 두 사람은 분명 서로에게 가장 편안한 존재였다.‘하지만 지금도 정말 여전히 그런 걸까?’온채아는 조용히 가죽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영화 속 두 주인공의 다정한 장면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눈꺼풀이 무거워지더니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고요한 집 안엔 영화 속 인물들의 대사만이 잔잔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그리고 성유준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그녀의 잠든 모습이었다.조용히 고개를 한쪽으로 기댄 채, 새카만 머리카락이 얼굴 반쪽을 부드럽게 가리고 있었고 숨결조차 고요하게 내려앉아 있었다.그 모습이 참, 순하고도 얌전했다.성유준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그녀를 안아 들었다.품에 안긴 그녀의 체중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품에 안는 감각 또한 낯설지 않았다.“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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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8화

온채아는 임지연이 이 일로 직접 자신을 찾아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임 비서님, 뭘 보셨는진 모르겠지만 저를 찾아오셔도 소용없어요.”찾아가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닌, 성유준이었다.사실 임지연도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성유준 같은 남자는 결코 쉽게 얽히는 사람이 아니었다.수많은 여자가 그에게 다가갔지만 그는 언제나 무심하고 냉정하게 그들을 밀어냈다. 그리고 임지연은 그 모습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여러 번 지켜 봐왔다.집안 좋은 명문가의 아가씨들도, 요염하고 능글맞은 여자들도 성유준 앞에선 모두 무력했고 그 안엔 그녀 자신도 포함돼 있었다.그래서 잘 알고 있었다.언젠가 성유준이 누군가와 엮이게 된다면 그건 오직 그가 원했기 때문일 거라는 걸.그를 억지로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임지연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는 온채아를 바라보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어쩔 수 없어서 널 찾아온 거야.”그녀 역시 성유준이 스스로 관계를 정리해 주기를 바랐지만 그건 아무리 기다려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온채아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차분히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시는데요?”“성 대표랑 거리를 좀 뒀으면 해. 가능하다면 완전히 끝내줬으면 좋겠어.”임지연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그 말은 이 자리에 오기 전부터 수없이 머릿속에서 되뇌었던 문장이었고 사실상 그녀가 여기 온 유일한 이유이기도 했다.온채아와 성유준이 확실하게 끝을 내야만 자신에게도 결혼이라는 기회가 주어진다.약혼만 해도 이미 여러 해였고 그의 곁에서 비서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았다.하지만 가까이 있을수록 마음은 점점 깊어졌고 이제 와서 그를 포기한다는 건 더는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그녀의 말을 들은 온채아는 가볍게 웃으며 임지연을 바라봤다.눈빛은 담담했지만 그 속에 섞인 말투는 마치 비수처럼 날카롭게 스쳐 갔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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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9화

임지연은 온채아의 입에서 그 금액이 다시 한번 반복되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6천억...’속으로 비명을 질렀다.‘이 둘, 진짜 미친 거 아냐?’“나보고 어디 가서 그 많은 현금을 구하라는 거야?”평범한 사람은커녕, 경성에서도 손꼽히는 재벌가조차 선뜻 꺼내기 어려운 돈이었다.게다가 그 돈을 아무 조건 없이 내놓는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그런데 온채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치의 감정도 보이지 않는 차분하고 담담한 얼굴이었다.임지연은 도저히 믿기지 않아 조심스럽게 물었다.“지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건 아니지?”온채아는 고개를 비스듬히 젖힌 채 웃지도 않고 조용히 대답했다.“내가 뭐 하러 임 비서님한테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요?”임지연은 말문이 막힌 채 숨을 들이켰다.살면서 돈이 없어 말이 막힌 건 처음이었다.그녀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자 온채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래서, 약은 처방하실 건가요?”임지연이 이곳을 찾은 이유, 그 본심은 온채아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진짜 목적은 진료가 아니었다.“할게.”임지연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최근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있었고 대기실에서 다른 환자들이 온채아의 침술이며 약재를 두고 감탄하는 이야기를 들었다.이왕 온 김에 몸이라도 챙기자는 생각이 들었다.온채아는 말없이 키보드를 두드렸고 잠시 후 프린트된 처방전을 꺼내 건넸다.“1층 내려가서 수납하고 약 받아 가세요.”임지연은 처방전을 받아 들었지만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온채아가 시계를 흘끔 보고는 무심하게 말했다.“결정하셨어요? 그 돈, 정말 나 대신 내줄 생각이 있는지.”“그건 좀...”임지연은 결국 고개를 돌리며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그렇게까진 무리야. 6억 정도라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었을 텐데...”“그럼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저도 퇴근해야 하니까요.”온채아는 애초에 그녀가 돈을 낼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고 그저 오늘 이 자리에서 말은 분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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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0화

온채아는 단 1분, 아니 1초도 더 이 결혼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하루라도 빨리 이 관계에 종지부를 찍어야만 진짜로 이 결혼에서 벗어난 기분이 들 것 같았다.그렇지 않으면 주율천이 매번 그녀를 가로막을 때마다 목 깊숙이 무언가 걸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토해낼 수도, 삼켜낼 수도 없는 그 막막하고 불쾌한 감각이 그녀는 너무도 싫었다.그런 온채아가 단호하게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민은하는 입술을 악물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도대체 이혼해서 너한테 뭐가 좋다는 거야? 우리 집안의 보호가 사라지면 너한텐 남는 게 아무것도 없어!”온채아는 그 말에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보호? 당신들이 언제 나를 보호한 적이 있었던가.’그녀는 감정 하나 담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주셔도 돼요. 대신, 제가 성유준 씨 찾아가서 새로 발급받으면 되니까요.”물론 민은하라면 사람을 시켜 기록을 막으려 들 수도 있었다.하지만 성유준이 단 한 통의 전화만 걸면 이혼증명서 열 장쯤은 단숨에 다시 뽑혀 나올 일이었다.사실 온채아는 진심으로 성유준에게 부탁할 생각까진 없었고 그를 끌어들이고 싶지도 않았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 집요하고 질긴 여자를 상대하려면 그의 이름을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더는 질질 끌릴 여유가 없었다.민은하는 온채아가 성유준과 다시 가까워졌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의 이름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꺼내며 자신을 위협할 줄은 몰랐다.‘이년이 내 앞에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예전엔 내 도움 없이는 취직도 못 하던 애가...’분노로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민은하는 이를 악물고 억지로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그래, 줄게. 하지만 부탁이 하나 있어.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라면 당분간 율천이한테는 말하지 말아 줘.”아직 아들에게 뭐라고 설명할지조차 정리를 못 하고 있었다.이혼 기록을 시스템에서 지워보려 하기도 했지만 이미 등재된 이상 취소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던 것이다.온채아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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