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Chapter 191 - Chapter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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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1화

경성은 외지인이 많은 도시였다.명절을 코앞에 둔 이맘때, 도시는 낯선 만큼 고요했고 거리마저 텅 비어 있었다.차도 거의 보이지 않아 도로 위는 적막했지만 이상하게도 차가 향하는 방향이 점점 낯설어지고 있었다.분명히 목적지는 진안로였는데 길이 점점 청연원 쪽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온채아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고개를 돌려 운전석을 바라보았다.“아저씨, 저 진안로에 가야 해요.”그러자 운전석의 진명환이 난처한 얼굴로 망설이더니 백미러 너머로 조수석에 앉은 주율천을 슬쩍 바라봤다.처음엔 그저 길을 잘못 든 줄로만 알았던 온채아는 그 한 번의 시선으로 모든 게 주율천의 지시였음을 단번에 깨달았다.이 문제로 또다시 실랑이를 벌이는 것도 이제는 지쳤다.“저, 당분간 청연원엔 돌아갈 생각 없어요.”그러자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던 주율천이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온채아, 이번 명절은 우리 같이 보내자. 설이 지나도 네가 아무 소식 없으면... 그땐 내가 직접 널 데려다줄게.”온채아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담담히 되물었다.“우리가 명절을 같이 보낸 적 있었던가요?”기억을 더듬는 듯 조용히 이어진 그녀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차분했다.“매년 당신은 본가에 갔고 청연원엔 항상 나 혼자였죠.”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덧붙였다.“아, 아니지. 아주머니도 계셨네요.”그렇게 외롭게 보냈던 수많은 명절은 그녀가 스스로 감당하기로 했던 시간이기도 했다.하지만 이제 와서 그가 손 하나 까딱해 다시 불러세운다고 해서 순순히 따라갈 만큼, 그녀는 더 이상 어리지 않았다.세상에 그렇게 쉬운 일은 없다.그 점을 주율천 역시 아는 듯,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화면을 확인하고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무슨 일이야?”“대표님!”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담결의 목소리엔 불안이 섞여 있었다.“심서정이 도망쳤습니다. 오늘 설이라 경비를 최소 인원만 두었는데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며 틈을 만들어 경비를 기절시키고 빠져나갔어요.”주율천의 눈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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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화

온채아가 보육원에 처음 들어온 건 한여름이었다.그날 그녀는 화사한 핑크빛 공주풍 나시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작고 가녀린 어깨 위엔 복숭앗빛을 닮은 나비 모양의 점이 선명했다.흔히 아이들의 점이나 흉터는 보기 흉하고 거칠기 마련인데 그녀의 그것은 달랐다. 살짝 스쳐도 눈에 확 들어올 만큼 고왔고 그 한 점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마치 하늘이 그녀에게만 내려준 특별한 축복처럼 그 흔적조차도 그녀의 존재를 더 눈부시게 해주는 장식 같았다.그때의 심서정에게 온채아는 질투 그 자체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눈에 거슬렸다. 심지어 그 나비 점조차 도려내고 싶을 만큼 미웠다.온채아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옷을 여미고는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한밤중에 미쳐서 내 앞에까지 와서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에요?”심서정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그 안엔 증오와 질투, 집착과 비틀린 감정이 엉켜 들끓고 있었다.“너였구나, 역시 너였어. 왜 하필 너야? 왜 꼭 너냐고!”심서정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세상의 좋은 일은 어째서 하나같이 온채아만을 향해 쏟아지는 걸까.경찰인 부모 밑에서 공주처럼 자라났고 비록 원수 집안에 입양되었다 해도 성유준은 무려 9년이나 그녀 곁을 지키며 아껴줬다. 결국엔 주율천과도 결혼에 성공했고 지금은 중요한 연구 프로젝트에까지 참여 중이었다.게다가 지금 상황은 더 가관이었다.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주율천의 아내이고 동시에 성유준과는 몰래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성씨 가문의 후계자, 그 성유준이 온채아를 위해 그림자 속에 숨어 사는 불륜남이 되다니.’경성에서 가장 빛나는 두 남자가 바라보는 사람은 결국 온채아, 그녀 단 한 사람이었다.심서정은 숨이 턱 막혔다. 만약 주율천이 지금의 온채아가 과거 보육원에서 자신이 괴롭히던 그 아이였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녀를 어디까지 떠받들어줄지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하지만 정작 온채아는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증오하고 질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전혀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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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3화

심서정은 거의 날뛰듯 온채아의 팔을 거칠게 잡아채며 소리쳤다.“가지 마! 지금 당장 주율천한테 전화해! 너 바람났다고, 이혼할 거라고 말해! 당장!”온채아는 황당함에 말문이 막혔다. 방금 입을 열려던 찰나, 저 멀리서 여러 명의 남자들이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담결이 경호원들을 이끌고 오고 있었고 그들 한가운데엔 주율천이 있었다.그의 얼굴은 냉기 어린 무표정으로 굳어 있었고 빠르고 묵직한 걸음 하나하나에 억눌린 분노가 느껴졌다.온채아는 심서정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어깨 너머를 턱짓으로 가리켰다.“굳이 내가 전화할 필요도 없겠네요. 그 사람이 직접 왔으니까.”심서정의 얼굴은 순간 사색으로 질렸고 본능적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경호원들이 순식간에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주율천은 빠르게 다가와 온채아부터 살폈다.차갑던 표정에 잠시 부드러움이 스쳤다.“괜찮아? 너한테 무슨 짓한 건 아니지?”온채아는 고개를 저으며 짧게 답했다.“별일 없어요. 심서정 씨 찾으러 온 거죠?”주율천은 잠시 시선을 내리깔며 말없이 숨을 고른 뒤 낮게 대답했다.“맞아.”온채아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둘이 잘 이야기해요. 난 이제 들어갈게요.”그녀는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심서정은 초조하게 몸부림치며 담결의 제지를 뚫고 온채아 쪽으로 달려들었다.“온채아! 제발, 나 좀 도와줘! 저 사람이 나 다시 끌고 가려 해... 나, 나 거기 다시 끌려가면 진짜 죽을지도 몰라!”그 절박한 외침에도 온채아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단호하게 발걸음을 옮겨 아파트 입구로 향했다.그들의 문제는 이제 그녀와 아무 상관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녀는 원래 그런 마음이 약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심서정은 성윤혁과 손잡고 그녀를 함정에 빠뜨렸고 간신히 쌓아 올린 명예와 삶을 짓밟았다.그 일로 인해 정다슬이 구치소에 갇히는 일까지 벌어졌고 그 치욕과 분노를 그녀는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이제 와서 그런 과거를 덮고 누군가를 불쌍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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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4화

주율천의 표정이 순간 단단히 굳었다.“뭐라고? 네가 걔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가 어떻게 알겠어?”심서정은 단호하게 부인했다.“그 마약 밀매범도 아직 출소하지도 않았잖아? 그러니 걔가 뭐가 힘들겠어. 어디서 잘 먹고 잘살고 있겠지.”그러나 주율천은 끝까지 의심의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애가 정말 잘 지내고 있길 바라는 게 좋을 거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그녀가 받은 상처만큼 아니, 열 배, 백 배는 더 끔찍한 꼴을 보게 될 테니까.”말을 마친 그는 손가락을 살짝 들어 담결에게 지시를 내렸다.“잡아들여. 앞으로는 어떤 시간이든 최소 세 명이 붙어 감시하게 해.”“네.”담결이 곧장 심서정을 붙잡고 지하실로 끌고 가려는 찰나, 문밖에서 고급 승용차 한 대가 급히 멈춰 섰고 그 안에서 민은하가 다급히 차에서 내렸다.그녀는 서둘러 주율천 쪽으로 다가와 크게 외쳤다.“너 제정신이니? 저 여자가 그래도 네 형수야! 도대체 언제까지 괴롭히려는 거냐!”“어머니.”주율천은 목소리에 온기 하나 담겨있지 않았다.“요즘 어머니, 너무 많은 일에 관여하시는 거 아니세요?”민은하는 아들의 고집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정면으로 맞붙는 건 무의미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시윤이를 생각해 봐. 네 형이 세상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 애가 이제 겨우 아버지를 잃었는데 그 어린 조카가 이제 엄마 얼굴조차 못 보게 할 셈이냐?”그 말에 주율천의 날카롭던 눈매가 아주 조금 누그러졌다.민은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밀어붙였다.“심서정이 아무리 잘못했다고 해도 시윤이 친어머니야. 네 형 생각해서라도 이번 한 번만 눈 감아 줘. 안 되겠니?”주율천과 그의 형 주석현은 남다른 형제애를 나눈 사이였다. 재벌가문에서 흔히 있는 권력 싸움도, 유산 다툼도 없었고 주석현은 애초에 사업에 뜻도 없었다.경쟁은커녕 늘 뒤에서 묵묵히 가족을 위해 사는 사람이었다.그랬기에 심서정이 갑작스레 주석현과 결혼하겠다고 돌아섰을 때도 주율천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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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5화

그 일이라면 민은하야말로 평생 잊을 수 없었다.그 끔찍한 교통사고에서 그녀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그날 이후로 다시는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지도 않았고 재혼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 이야기를 꺼내자 민은하의 눈동자에 잠시 깊은 상처의 그림자가 스쳤다.“그 얘길 지금 왜 꺼내는 거야?”심서정이 낮게 물었다.“그래도 기억은 나시죠?”“당연히 기억나지.”“그럼 그때 당신과 율천을 구해준 경찰관과 그 경찰의 딸아이, 기억하세요?”“기억나.”민은하는 잠시 그때를 떠올렸다.그 소녀는 활기차고 밝았으며 마치 햇살을 머금은 해바라기처럼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아이였다.누가 봐도 사랑스럽고 보는 사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아이였다.그날이 그렇게 비극적으로 끝나지만 않았더라면 민은하는 주율천과 그 소녀를 약혼시키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어 했었다.비록 경찰 집안이라 재산은 많지 않았지만 가정이 단정했고 무엇보다도 그 소녀는 어른스럽고 예의 바르며 참으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민은하는 다시 심서정을 매섭게 노려보았다.“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그 일이 율천이랑 무슨 상관인데?”심서정의 목소리가 서늘하고 낮게 흘러나왔다.“율천은 지금까지도 그때 당신들을 구해준 그 소녀를 찾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이는 그 소녀가 바로 나라고 믿었죠.”그녀의 목소리엔 묘한 쓸쓸함이 섞여 있었다.“그래서, 그래서 그이가 나한테 그렇게 잘해줬던 거예요.”민은하는 순간 비웃음을 터뜨렸다.눈빛에는 노골적인 경멸이 번졌다.“역시 그럴 줄 알았다. 율천이가 왜 너 같은 여자에게 빠졌나 이상했는데 결국 남의 신분을 훔쳐서 자신을 포장한 거였구나!”남의 삶을 베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니 그보다 더 비열한 짓이 또 있을까.“난 훔친 게 아니야!”심서정이 날카롭게 소리쳤다.“그때 사고를 내가 만났어도 나도 똑같이 구했을 거야! 난 그냥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온채아처럼 행운이 따르지 않았던 거야!”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안엔 꺾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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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6화

올해 설은 온채아에게 있어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맞는 마음 편한 명절이었다.크게 다치지도, 불쾌한 일도 없이 조용히 새해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겐 드문 일이었다.연휴 내내 이웃집에서도 별다른 소란은 없었다.온채아와 정다슬은 각자 일에 집중하며 집 안에 조용히 틀어박혀 지냈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빼곡히 메모가 된 연구 노트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책상 위엔 서류들이 잔뜩 펼쳐져 있었다.오후가 되자, 정다슬이 직접 가져다준 커피를 막 받아 든 그때, 온채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들여다본 그녀는 통화를 받으며 부드럽게 말했다.“현우 오빠, 무슨 일이세요?”전화 너머에선 듣기만 해도 미소 짓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우리 온채아, 설인데 전화 한 통 없는 건 좀 서운하네?”온채아는 웃으며 대답했다.“새해 인사는 단톡방에 보냈잖아요.”정확히 말하면, 설날 자정에 맞춰 친구들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단체로 새해 인사를 돌렸던 것이었다.김현우는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그래, 됐고. 지금 뭐 하고 있어?”“집에서 일하고 있었어요.”온채아가 솔직히 대답하자 김현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에이, 설에 무슨 일이야. 정다슬도 데리고 나와. 우리랑 같이 좀 놀자. 위치는 문자로 보낼게.”“전 괜찮아요. 오빠들이나 재밌게 놀다 오세요.”온채아는 이번 설만큼은 조용히 보내고 싶었다.무엇보다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고 주율천과의 이혼 문제도 조용히 정리할 생각이었다.그전까지는 굳이 얼굴을 마주할 이유도, 말을 섞을 이유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통화 너머에서 누군가 무언가를 말하더니 다음 순간 김현우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율천이 자기가 데리러 갈 수도 있대.”온채아는 들고 있던 커피잔을 조용히 내려놓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냥 제가 직접 갈게요.”주율천이 데리러 오면 분명 끝날 때도 자기가 데려다주겠다고 할 게 뻔했다.그럴 바엔 애초에 혼자 움직이는 편이 훨씬 나았다.김현우는 통화를 이어가며 곁에 있는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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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7화

마치 자신과 임지연 사이를 굳이 온채아에게 설명이라도 하려는 듯한 그 말투에 정다슬이 슬쩍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근데 말이야, 네 남자친구 태도 괜찮은데? 너한테 오해할 틈도 안 주는 거 봐.”온채아는 순간 모든 걸 털어놓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로 꺼내는 순간부터 모든 게 복잡해질 터였다.한편, 성유준은 임지연에게 조금의 체면도 남겨주지 않았지만 정작 임지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공기 속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성유준은 개의치 않는 듯 소파에 느긋이 기대앉아 있었고 정다슬을 흘긋 바라본 뒤엔 시선을 내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온채아는 결국 주율천 옆으로 가지 않았다.대신 정다슬의 손목을 끌어 그녀와 함께 방 한쪽 구석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그 어색한 분위기를 푼 건 김현우였다.“진실게임이나 벌칙 게임하자. 살짝 분위기 좀 띄울 겸.”술병을 돌려, 병 입구가 멈춘 사람이 지는 룰이였고 병을 돌린 사람이 질문하거나 벌칙을 정하는 식이었다.모인 이들은 서로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기에 금세 웃음소리가 터졌고 조금씩 분위기도 풀려갔다.임지연 역시 사람 다루는 데 능한지라 자연스럽게 어울려 들어갔고 몇 라운드가 지나자 모두 들뜨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병의 입구는 계속 온채아를 피했다.그녀는 그저 잔잔하게 웃으며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그러다 또 한 번, 병이 돌아 멈춘 방향은 정다슬 쪽이었다.“이상형이나 연애 기준 있어요?”김현우의 친구 중 한 명이 웃으며 가볍게 물었다.순간 룸 안은 야유 섞인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질문은 더 노골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고 정다슬도 부끄러워하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가볍게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일단 키는 최소 185cm, 매일 운동 30분 이상 하는 남자, 그리고 순정남이면 좋겠어요.”“그 정도면 됐다, 됐어.”장난기 섞인 웃음이 다시 터지려는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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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8화

그 질문은 겉보기엔 아주 평범해 보였다.마치 어린아이에게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라고 묻는 것처럼 흔하고 익숙한 질문처럼 들렸다.하지만 문제는 온채아와 성유준의 관계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준과 주율천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그녀를 바라봤다.다른 사람들 또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모두가 온채아의 입에서 나올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온채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담담한 어조로 진심을 꺼냈다.“둘 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그 한마디에 방 안은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하지만 누구도 놀라진 않았다.성유준은 그녀를 8년 동안 방치했고 주율천은 심서정을 위해 그녀를 삼 년 동안 외면했다.게임은 계속되었고 몇 라운드가 더 지나자 누군가 카드 게임을 제안했다.룸 안에는 이미 테이블이 두 개 준비돼 있었고 가림막도 있어 각각의 공간이 적당히 분리돼 있었다.분위기는 가볍고 자유로웠지만 서로의 영역은 조용히 존중되고 있었다.성유준, 주율천, 김현우, 그리고 정다슬이 한 테이블에 앉았고 온채아는 조용히 정다슬 옆에 자리 잡고 패를 바라보며 구경하고 있었다.다른 쪽에서는 누군가 하지훈에게 옆 테이블로 오라고 불렀지만 그는 가지 않았다.대신 조용히 의자 하나를 가져와 정다슬 옆에 앉았다.“내가 운 좀 불어넣어 줄게요.”그 말에 정다슬은 패를 하나 내려놓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온채아만 있으면 충분해요.”하지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었다.“그럼 따면 다슬 씨 거고 지면 내가 낼게요. 어때요?”“좋아요.”정다슬은 이번엔 꽤 시원스럽게 대답했다.그 모습에 온채아는 오늘 밤엔 꼭 정다슬과 하지훈의 관계에 대해 캐물어 봐야겠다고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잠시 후, 온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고 볼일을 본 김에, 여승운에게 전화를 걸어 손정원의 몸 상태를 물었다.“걱정 마라. 거의 다 회복하셨다.”여승운의 목소리는 한결 여유로웠다.“우린 이틀 안으로 귀국할 생각이다.”온채아는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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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9화

성유준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타고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가자 온채아는 순간적으로 두 눈을 번쩍 뜨고 그를 밀어냈다.“안 돼!”비록 마음 한구석에선 언젠가 이 관계가 그 선을 넘을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자 그녀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아무래도 그녀는, 본능적으로 여전히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설령 둘 사이가 연인도, 부부도 아니고 계약 관계에 가까운 사이라 해도 그녀는 자신의 처음이 단지 육체적 본능의 연장선으로 그것도 이런 어둡고 어수선한 공간에서 치러지는 건 아니길 바랐다.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성유준은 그녀의 반응을 읽고 조용히 손을 거둬들였다.그의 목소리는 거친 모래로 긁힌 듯 낮고 쉰 울림으로 번졌다.“여긴 안 돼?”온채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응.”그리고는 대리석 손잡이를 쥔 채, 낮게 말했다.“나 먼저 돌아갈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는 성유준이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문을 열고 룸을 나섰다.화장실에 들러 급히 흐트러진 립 메이크업을 고치고 숨을 가다듬은 뒤 황급히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그리고 방문을 밀어 열기까지, 온채아의 심장은 끝내 진정되지 않았다.만약 애초에 성유준이 이렇게 자극적이고 즉흥적인 타입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그때 정다슬을 구할 다른 방법이 있었는지,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봤을 것이다.그녀가 상상했던 건, 그저 성유준이 필요할 때 침대를 함께 써주는 것이었다.어차피 그도 외모 조건이 워낙 뛰어났고 그런 조건이라면 자신도 손해 볼 게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현실은 달랐다.그는 장소도 시간도 가리지 않고 그녀를 안았고 키스는 물론 손길조차 늘 자리를 가리지 않았다. 항상 어디서든 그녀를 붙잡고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쉬지 않고 그녀를 더듬었다.그런 그에게서 온채아는 매 순간 간신히 중심을 잡고 버텨야만 했다.방문이 닫히고 성유준은 어두운 룸 안에 홀로 서 있었다.그의 눈빛은 더없이 깊고 어두웠고 손끝으로 방금 전의 감촉을 되새기듯 조용히 문질렀다.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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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0화

공기마저 멈춘 듯,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성유준은 마치 우스갯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옅은 웃음을 지으며 임지연을 흘끗 쳐다봤다.“내 명성이 언제 좋았던 적이 있었나?”성씨 가문에서는 예절도 없고 어른 공경도 모르는 불효자 소리를 들었고 밖에서는 누구든 그를 보기만 해도 몸을 사릴 정도였다.그런 그에게 좋은 평판이 있을 리 없었다.임지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그럼... 온채아는요? 그것도 신경 안 쓰는 거예요?”“신경 써.”그래서 그는 온채아가 이혼하기 전까진 둘의 관계를 공개할 생각이 없었다.임지연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하지만 지금처럼 계속 가다 보면 언젠가는 들킬 수도 있잖아요...”성유준의 눈매가 차갑게 가라앉으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그러니까, 네가 더더욱 입조심해야겠지.”그건 반은 경고였고 반은 충고였다.평소에도 이렇게 무심하고 냉담했지만 막상 그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임지연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알겠어요...”정교하게 손질한 네일은 손바닥 안에서 이미 부러져 있었다.그가 몸을 돌려 다시 룸으로 향하려 하자 임지연은 그의 곧은 뒷모습을 바라보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런데 온채아랑은... 장난이에요? 아니면 진심이에요?”그러나 성유준은 마치 듣지 못한 사람처럼 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그대로 룸 쪽으로 걸어갔다.그는 애초에 그녀에게 어떤 설명도 해줄 가치조차 느끼지 않았다.그가 말했듯, 그들 사이의 혼약 따위 그는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았으니까.임지연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감정을 겨우 추스르고 룸 안으로 되돌아갔다.온채아가 룸으로 돌아오자 주율천이 손을 흔들며 불렀다.“와봐, 이거 한번 해봐.”“나 잘 못하는데요.”“괜찮아, 그냥 막 해. 나 돈 많잖아. 지면 어때.”“쳇, 여기서 왜 이러실까.”김현우가 혀를 차며 웃었다.온채아는 자리에 앉아 조심스럽게 패를 받았다.아직 패를 정리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그때, 룸의 문이 다시 열렸다.성유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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