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Chapter 641 - Chapter 650

696 Chapters

제641화

정다슬이 떠날 때 장현진은 그녀를 아래층까지 배웅했다.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정다슬이 먼저 자신의 차를 가리키며 말했다.“얼른 올라가 봐.”“잠깐만.”장현진이 정다슬을 불러 세우더니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우리 엄마가 아까 하신 말씀은...”“우린 친구야.”정다슬이 붉은 입술을 살짝 올리며 무심한 듯 웃었다.“어른들이 하는 말은 그냥 농담이니까 난 신경 안 써. 이런 걸로 우리 오랜 우정을 망칠 생각도 없어.”빈틈없이 완벽한 말이었다.장현진에겐 아무런 기회가 없었다.그 말인즉 어른이 하신 말씀은 농담으로 넘기며 앞으로 계속 친구로 지내겠지만 그가 꺼낸다면 친구로도 지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듣고 있던 장현진의 입꼬리가 점점 직선으로 굳어졌다. 잠시 후 그는 떠보듯 농담 삼아 이렇게 말했다.“우리 정 변호사님이 한 사람에게만 매달리는 분인가?”그게 누구를 가리키는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아도 그와 정다슬은 잘 알고 있었다.정다슬도 모르는 척하는 대신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누구, 하지훈? 나와 그 남자는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야.”밤이 깊어지자 찬바람이 휘몰아쳤다.뒤편 모퉁이에서 싸움에서 진 듯한 길고양이가 사나운 기세로 멀리 달아나는 소리가 들렸다.정다슬이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말했다.“하지만 나는 서로 사랑하고 비슷한 수준의 상대라는 전제하에 연애할 수 있어.”아주 간단하게 하지훈과의 관계를 부인하는 동시에 장현진도 거절했다.전자는 수준이 맞지 않았고 후자는 사랑이 없었으며 순수하기 그지없는 우정뿐이었다.그 말에 장현진은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겠어.”단지 하지훈 때문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정다슬이 하지훈을 위해 어떤 희생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어릴 때부터 득실을 따지는 데 능숙했던 정다슬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그래서 장현진은 알고 있었다. 하지훈이 정다슬에게 얼마나 특별한 존재
Read more

제642화

주객전도, 법정에 설 때마다 의도적으로 연습해 온 직업병이었다.하지만 하지훈도 이제야 깨달은 건 아니었다.예전에 두 사람이 연애할 때부터 이미 그 조짐이 보였다.정다슬은 주도권을 쥐는 데 능숙했고 관계에 있어서 앞으로 나아갈지 물러설지는 오로지 그녀가 결정했다.그들의 만남에서도 정다슬이 먼저 하지훈을 유혹하고는 말 한마디만 남긴 채 바로 연락을 끊어버린 것처럼.지금 하지훈은 통화를 엿들었어도 전혀 민망한 기색 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 집 앞인데 뭘 엿들었다는 거야? 네가 날 못 본 거지.”정다슬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마지막 한 마디에서 약간의 서러움이 묻어나는 것처럼 들렸다.‘분명 착각일 거야.’태생이 금수저인 하지훈 같은 도련님은 남을 서럽게 하면 했지 본인이 당하진 않았다.정다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일리가 있네요.”그러고는 더 이상 대화할 생각이 없는 듯 뒤돌아 문을 열려 했다.문을 닫으려는 순간, 문밖의 남자가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와 한 손으로 문짝을 막으며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했다.정다슬은 깜짝 놀라 반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더 할 말 있어요?”“나랑은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면서, 그럼 장현진은?”느닷없는 질문이 불쑥 튀어나왔다.정다슬은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 채 눈가의 당황함을 감추고 문을 닫으려던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현관 신발장에 살며시 몸을 기울이며 붉은 입술을 살짝 올린 채 직설적으로 말했다.“나랑 다시 만나고 싶어요?”“그래.”한쪽은 직설적으로 묻고 다른 한쪽은 숨김없이 답했다.고개를 든 정다슬의 눈에 확신에 차 번뜩이는 하지훈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녀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난 싫어요.”간결한 네 글자로 대화가 끝날 뻔했다.하지만 하지훈은 절대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었다. 검은 눈동자로 정다슬을 똑바로 바라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강조했다.“말했잖아, 내가 원한다고. 예전에는 만날 때도, 헤어질 때도 네가 결정했어. 이번엔 내 차례지.”
Read more

제643화

남들 눈에는 하지훈의 집안과 지위만으로도 애초에 이 관계가 절대 대등하지 않다는 게 정해져 있었다.더욱이 어떤 결말도 기대하기 어려웠다.그래서 하씨 가문에서 처음으로 정다슬을 찾아와 고액 수표를 건넸을 때 그녀 역시 어느 정도 회의감이 들었다.하지만 그것도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다.급을 나눠 사람을 판단한다는 걸 잘 알았지만 집안이 형편없다고 해서 자신의 감정과 시간도 값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정다슬의 말에 하지훈의 눈가에 순간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곧이어 그는 비웃듯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내가 그렇게 생각한다고?”그는 정다슬의 말 속에 담긴 숨은 뜻을 당연히 알아챘다.본인 마음을 가지고 놀 생각은 말라는 뜻이었다.정다슬은 하지훈의 태도에도 흔들리지 않고 냉담하게 되물었다. “아니면요?”답을 찾을 수 없는 관계인데도 자꾸만 그녀를 찾는 이유가 또 뭐가 있겠나.당당하게 마주하는 여자의 시선 앞에서 하지훈은 주먹으로 솜을 때리는 듯한 허탈함을 느꼈다.“그래.”하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얼음처럼 서늘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장현진과 결혼할 날짜 정해지면 꼭 알려줘. 성유준한테 축의금 두둑하게 챙겨주라고 할 테니까.”말끝마다 장현진을 언급하니 정다슬도 해명할 의욕이 사라져 흔쾌히 대꾸했다.“그쪽 축의금 두둑하게 받으면 부자 되겠네요.”그러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더니 쾅 문을 닫아버렸다.문밖에서 하지훈은 기가 막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뒤돌아 성큼성큼 집으로 들어간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퇴직 증명서를 보고 별안간 다리를 들어 테이블 모서리를 걷어찼다.‘퇴사는 개뿔.’한가득 쌓인 짜증이 풀리기도 전에 소파에 던져둔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형.”전화받자마자 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하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그의 이런 망나니 같은 성격에 익숙해져 있었다.하희민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퇴사가 잘 안됐어?”“그런 셈이지.”퇴사 절차는 순조로웠다.퇴사 후 벌어진 일이 순조롭지
Read more

제644화

하긴, 이곳은 해성이 아니기에 하씨 가문이 성씨 가문보다 소식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하지훈이 감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하예원이 네 아버지랑 다시 연락하지 못하게 해.”두 사람은 서로 ‘네 아버지’라고 칭했지만 하지만 아무도 그 말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하희민은 오히려 하지훈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래, 그건 어렵지 않아.”하선호가 하예원을 얼마나 감싸는지, 죄를 짓고도 도망치게 도와주는 걸로 모자라 하예원이 사람을 죽여도 울기만 하면 하선호가 대신 시체를 묻어줄지도 몰랐다.하선호의 권력은 껍데기만 남았지만 그래도 하씨 가문이 뒤에 있으니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체면을 봐줄 것이다.그러면 하예원을 찾는 건 더 어려워진다.한편, 경성의 한눈에 띄지 않는 별장 단지에서 하예원은 초라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쓰레기통을 부여잡은 채 담즙까지 토해냈다.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천천히 맞은편 남자를 바라보았다.“간호사를 통해 나한테 말 전하라고 한 게 당신이야?”하선호의 힘을 빌려 유죄 판결을 미루려는 생각뿐이었다.그런데 병원에서 검사받을 때 간호사가 혈액을 채취하며 한 마디를 건넸다.그 말을 따르자 경찰의 감시에서 순조롭게 벗어났다.하지만...하예원은 시체 틈에서 탈출했다.맞은편에 앉은 이 남자는 그녀를 영안실로 밀어 넣어 시체와 함께 운반해 나오게 했다.죽은 지 얼마나 오래된 건지 시체에서 나는 악취가 너무 심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몇 번이나 씻었음에도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생각만 해도 속이 또다시 뒤집어졌다.박시훈이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도 마치 시체를 보는 듯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하예원은 바보가 아니었기에 강렬한 역겨움을 억누르며 물었다. “목적이 뭐야?”대가 없이 베푸는 호의 따위는 절대 믿지 않았다.당시 하선호가 그녀를 하씨 가문으로 데려와 친딸처럼 돌봐줬을 때조차 그에게 뭔가 속셈이 있거나 뭔가를 잘못해서 자신에게 빚진 게 있다고 생각해 왔다.박시훈이 비웃으며 말했다.“네가 지금 무슨 쓸모
Read more

제645화

하예원은 순간 몸이 뻣뻣하게 경직된 채 벌떡 일어섰다. “갈게.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박시훈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경계심만이 남아 있었다.그렇다.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 자신이 더 이상 하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와도 조건을 협상할 수 있는 뒷배가 사라진 상태였다.눈앞의 남자가 그러한 목적으로 그녀를 빼낸 거라면 해내지 못했을 때 쉽게 돌려보내는 것도 가능하단 뜻이었다.박시훈이 시선을 돌려 하예원을 관찰하듯 쳐다보다가 비로소 천천히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그래, 눈치껏 행동해야지.”하예원은 주먹을 꽉 쥐고 망설이다가 단호하게 물었다.“온채아의 목숨을 원하는 거야?”“내가 그랬으면 좋겠나?”박시훈은 하예원이란 존재가 안중에도 없는 건지 곧바로 되물었다.하예원은 당연히 그러기를 바랐다.그렇지 않으면 갖은 수를 써서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무엇이겠나.‘단순히 경찰서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그런 거면 더 좋지.”하예원의 말에도 박시훈은 전혀 놀라지 않고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원하긴 해.”자신이 지난번에 괜한 연민을 품었다가 빈틈만 보였던 여자였다.또다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이번에는 봐줄 생각이 없었다.하예원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계산기를 두드렸다.“그렇게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야. 나에게 시간을 좀 줘.”“10일.”박시훈이 강조했다. “1분이라도 지체해선 안 돼.”하예원은 처지가 여의치 않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억지로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목적을 달성한 박시훈은 오래 머물지 않고 그녀를 감시할 사람을 남겨둔 채 일어나 떠나려 했다.하예원은 머뭇거리다가 그가 문밖으로 나가기 직전에 입을 열었다.“당신 누구야?”박시훈은 작년에야 해외에서 경성으로 돌아왔고 하예원 역시 올해 전까지는 경성 사교계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그러니 그의 신분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박시훈은 걸음을 살짝 멈추고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내가 누구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말을 마친 그가 성큼성큼 가버렸다.
Read more

제646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경성에 첫눈이 내렸다.며칠 동안 온채아의 몸도 많이 회복되었다.성유준은 그녀가 마당에 쌓인 눈을 보고 들뜬 모습에 먼저 입을 열었다.“놀고 싶어?”“응.”온채아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의 하얀 눈보라가 비쳐 눈동자가 더 반짝였다.최근 외출이라곤 전혀 하지 못했기에 지루해 미칠 지경이었다.이럴 때 눈을 보고 어떻게 참을 수 있겠나.성유준은 마음이 약해져 입가에 애정 어린 미소를 띠었다. “가서 놀아.”성이는 마침 지하 1층 휴게실에서 올라오다가 이 장면을 보고 소름이 돋은 채 뒤에 있던 성일에게 눈짓했다.성일이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왜, 또 애정행각이라도 봤어?”요즘 모시는 도련님께서 온채아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키는 탓에 그는 진작 익숙해져서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게다가 사실 어릴 때부터 성유준은 온채아를 이렇게 아껴줬다.다만 그때는 남몰래 숨겼지만 지금은 온 세상에 알리고 싶어서 안달이었다.성이가 콧방귀를 뀌었다.“알면서 뭘 물어.”...남자의 말을 듣고 온채아의 눈이 반짝였다. “정말?”“응.”성유준은 두 부하의 수군거림을 듣지 못한 척 도우미의 손에서 털장갑과 모자를 건네받아 온채아에게 꼼꼼히 씌워 주며 입을 열었다.“나랑 같이 가.”“정말?”온채아는 더욱 놀라웠다.어릴 적부터 그녀는 눈을 가지고 노는 걸 무척 좋아했지만 성유준은 단 한 번도 함께해 준 적이 없었다.그의 손을 잡고 아무리 졸라도 팔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와중에 유치하다는 말만 내뱉었다.매번 마당에서 신나게 놀다가 뒤돌아보면 성유준은 항상 바닥까지 내려오는 통유리창 너머로 무심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다. 그때마다 온채아는 그에게 눈덩이를 던져버리고 싶었다.성유준은 온채아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거짓말 같아?”“모르지.”온채아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예전엔 한 번도 같이 놀아주지 않았잖아. 항상 내가 유치하다고만 했으면서.”성일이 마침 거실을 지
Read more

제647화

성유준은 온채아의 눈을 바라보며 차마 거절할 말을 찾지 못했다.잠시 후, 그는 손을 들어 여자의 뺨을 살짝 꼬집으며 결국 한발 물러섰다.“좋아, 그럼 먼저 서재로 가자.”“그래!”온채아는 성유준이 허락할 줄 예상했다.요즘 그녀가 뭘 요구하든 다 들어주곤 했으니까.아마 화를 내면 배속 아기에게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온채아는 성유준의 팔짱을 낀 채 함께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며 무심코 말했다.“사실 며칠 동안 쉬면서 아기도 안정을 되찾았어. 내가 들어주기 불편한 제안을 꺼내면 거절해도 돼. 나도 그렇게 막무가내인 사람이 아니니까.”그 말을 듣고 성유준이 그녀를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내가 아이 때문에 네 말을 다 들어준다고 생각해?”“어?”온채아는 질문에 당황해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아니면 뭔데?”성유준이 그녀의 이마를 톡 건드리며 심통이 난 척 말했다.“알아서 생각해 봐.”“아.”온채아는 대꾸하려는 순간 바로 깨달았다.아기가 아닌 그녀 때문이었다.성유준이 처음부터 끝까지 제일 두려워했던 건 태아가 불안정해서 자칫 유산으로 그녀의 몸이 상하는 것이었다.그 생각을 하니 감동과 동시에 마음속으로 아주 가볍게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그럼...”“나도 너와 나의 아기를 기대하고 있어.”성유준은 온채아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 적절히 그녀의 말을 끊으며 분명하게 말했다.“다만 그 어떤 것도 네 몸보다 중요하지 않아.”온채아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인정했다.“내가 그걸 물어볼 줄 어떻게 알았어?”성유준은 눈꼬리를 살짝 치켜올리며 당당하게 말했다.“나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사실이 그러했다.온채아의 성격이 자리 잡던 시절부터 가장 가까이 곁에 있었던 사람인데 어떻게 그녀를 모를 수 있겠나.다만 과거의 오해들이 얽혀 있어 서로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시험해 보기만 했다.말을 이어가던 성유준이 서재 문을 열며 온채아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했다.이미 여러 번 들어왔던
Read more

제648화

확신에 찬 대답을 듣자 온채아는 성유준을 잡아끌며 재빨리 계단을 내려갔다.“그럼 눈사람 만들러 가자. 날이 어두워지면 또 못 하게 할 거잖아.”마당에는 여전히 굵직한 눈송이가 내리고 있었지만 성유준이 그녀를 꽁꽁 무장해 줬기에 춥지 않았다.눈사람 만드는 데 익숙했던 온채아의 손에서 눈은 금세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눈덩이를 나르는 성유준을 돌아보며 말했다. “당근 좀 썰어 와.”성유준이 거절할 리 없었다. “천천히 움직여. 바닥 미끄러우니까.”말은 했지만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도우미를 불러 그녀를 지켜보게 했다.온채아는 진지하게 눈사람의 동글동글한 머리를 빚어냈다. 언뜻 시야에 사로잡힌 남자가 환한 거실을 지나칠 때 잠시 넋이 나갔다.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작년 크리스마스 무렵에도 청연원 마당에 쪼그려 앉아 지금처럼 눈사람을 만들었던 것을.다만 그때는 그녀 혼자였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그러나 지금은 달랐다.“왜 멍하니 있어?”옆에서 어느새 돌아온 성유준이 당근을 건네주려다 온채아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의아해하며 물었다.온채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지만 눈에는 촉촉한 눈물이 고여 있었다.“그냥... 지금 내가 정말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모든 것이 상상했던 것보다 수천만 배는 더 좋았다.과거의 모든 일들이 현실이 아닌 꿈처럼 느껴졌다.성유준은 한참 동안 온채아를 바라보다가 곧바로 반쯤 쪼그려 앉은 뒤 살짝 기울어진 모자를 고쳐 줬다.“네가 행복하면 돼. 나도 행복해.”그러면서 살짝 부풀어 오른 그녀의 배를 가리켰다.“아이도 나중에 우리처럼 행복할 거야.”“응!”온채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좋은 엄마가 될 것이다.성유준도 자기 아이라는 걸 모를 때조차 기꺼이 데려와 키우려 했는데 본인 핏줄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그날 밤, 온채아는 푹 잠들었다.깨어났을 때 손을 뻗어 옆을 더듬어 보니 텅 비어 있었다. 한참 뒤에야 어제 잠들기 전
Read more

제649화

‘성이 걔네...’온채아는 그 말을 들었을 때 별생각 없이 받아들였다. 옷을 갈아입고 내려와서야 비로소 ‘걔네’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성이와 성구 외에도 다섯 명의 경호원이 있었고 완전히 전투태세를 갖춘 모습이었다.그린 빌라로 가는 길에 온채아는 성유준에게 문자를 보냈다.[박시훈을 경계하는 거야?]하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일이 벌어진 지 며칠 안 됐는데 박시훈이 이렇게 빨리 다시 나타날 리가 없었다.그 순간 대화창에 답장이 뜨며 그녀의 의문을 풀어주었다.[아니, 하예원.][누가 보석으로 풀어주었고 그 틈을 타 도망쳤어.]온채아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꽉 말아쥔 채 하예원의 어중이떠중이 친구들이 도와준 거라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다.[그럼 사모님 치료 끝나면 빨리 돌아올게.]자신 때문에 또 무슨 문제가 생기는 건 원치 않았다.하예원이 도망쳤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아예 외출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성유준이 그녀를 달랬다.[걱정하지 마, 성이가 있으니까 작정하고 달려들진 못할 거야.]온채아는 알겠다고 답한 뒤 안정제를 한 알 삼킨 뒤에야 마음이 놓였다.출발하기 전 이미 하씨 가문에 전화했기에 도착했을 때 하희민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왔어요?”차 문이 열리자 평소 그렇듯 예의 바르고 신사적인 하희민이 성이보다 먼저 손을 내밀어 온채아를 부축하며 오빠처럼 걱정스럽게 말했다.“천천히, 벌써 외출해도 돼요? 몸은 잘 회복됐어요?”며칠 동안 하씨 가문 사람들은 계속 월강 레지던스에 그녀를 보러 가고 싶었지만 차마 갈 수 없었다.하나는 몸을 회복하는 데 방해할까 봐 걱정스러웠고 하예원 일로 잘못한 게 있기 때문이었다. 하예원이 다시 체포되기 전까지 그들은 온채아를 마주하기가 부끄러웠다.그런데 성유준은 전혀 온채아에게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거의 다 회복됐어요.”온채아는 하희민의 팔을 살짝 잡았다가 차에서 내려 땅에 발을 디딘 뒤 손을 뗐다. “희민 오빠, 고마워요.”“채아야!”저택 정문에서 강미진의 기
Read more

제650화

온채아는 온몸이 굳어지며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강미진도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하지훈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그녀는 급히 온채아의 손을 잡으며 설명했다.“채아 씨, 이 일은 우리도 전혀 몰랐어요. 그래서 아버님도 그 사람 직위를 박탈하고 해성으로 돌려보내셨어요.”온채아는 강미진의 따뜻한 손길을 느꼈다. 그녀가 진심을 담아 설명하며 대충 넘기려는 뜻이 전혀 없음을 알 수 있었기에 마음속의 미미한 괴로움이 금방 사라졌다.어차피 하선호와 가깝지도 않았고 그가 오랫동안 키워온 딸을 편애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분위기를 풀기 위해 대충 하선호를 이해하듯 말했다.“회장님께선 하예원 씨와 오랜 세월 쌓아온 정이 있으니 한순간 마음이 약해지는 것도 당연해요.”강미진과 하희민은 이 사실을 몰랐으니 그들을 난처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하씨 가문 터에서 이 댁 사람들을 나무랄 입장은 아니었다.강미진과 아무리 사이가 돈독해도 타인과 가족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는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았다.강미진은 배려하며 눈치껏 물러서는 온채아의 모습에 가슴이 쓰리고 답답해 숨조차 가빠지며 온채아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분노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하선호를 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제정신이 아니에요. 그 나이 먹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데 아버님께서 직위만 박탈한 것도 많이 봐준 거죠.”일찌감치 강미진과 하선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세기의 연인이었다.서로 수준 맞는 집안에 둘의 감정도 애틋했으니까.지금까지도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부부였다.하지만 강미진 본인만이 20여 년 전 작은딸이 실종되었을 때부터 둘 사이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하선호가 하예원을 감싸는 모습이 늘 그녀의 마음에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옆에서 하희민이 당당하게 구는 하지훈을 흘깃 보며 말했다.“우리만 마음이 불편해? 그럼 너는?”“...”하지훈은 집을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성장하는 걸 지
Read more
PREV
1
...
6364656667
...
70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