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버림받은 아내의 화려한 귀환: Chapter 81 - Chapter 90

100 Chapters

제81화

“합리적이면, 줄 거다.”은혁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단, 당신 양심에 괜히 찔리지 않는다는 전제하에.”“내가 왜 찔려?”서하는 더는 말싸움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난 찔릴 일 없어. 그리고 당신 걸 탐내지도 않아. 그건 당신이 번 돈이지, 나랑은 상관없으니까.”“임서하.”은혁의 눈빛이 곧장 서하를 파고들었다.“부부의 의미가 뭔지는 알아?”‘알지. 하지만 우리가 부부였던 건, 이름뿐이었어.’서하는 고개를 들고 담담히 대답했다.“아마... 우리 시작 자체가 잘못이었을 거야.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그 말에, 기억이 저절로 떠올랐다.막 결혼했을 때, 그때의 서하는 설렘과 기대를 품고 있었다.낯선 남자와의 거리가 두려웠지만,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희망을 찾으려 했다.‘내가 두려웠던 건... 사실 열등감 때문이었지.’‘배은혁의 세계는 언제나 높았어. 난 그저 그 자리에 끼어든 이방인일 뿐이었고.’은혁이 곁에 둔 건 언제나 재벌가 딸들이었고, 서하는... 얼굴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여자였다.누구라도 ‘임서하가 남자 잘 잡았다’라고 수군댔을 것이다.그래서였을까... 서하는 늘 조심스러웠다.숨죽이며 살았다.서하가 자신의 모습을 잃고 살았던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은혁에 대한 사랑이었다.사랑했으니까... 사랑하니까 불안했고, 사랑하니까 두려웠고, 결국 사랑하니까 은혁을 미워하게 되었다. 그 길 끝에 지금의 서하가 있었다.이제 서하는 알았다. 자신이 놓아야 한다는 걸...‘이제 끝내야 해. 다시 내 인생을 살아야지.’‘내가 좋아하던 물리와 화학, 내가 가고 싶던 길. 거기에 내 전부를 쏟을 거야.’‘다시는 사랑이라는 두 글자에 목매지도, 묶이지도 않을 거야.’‘아니, 어쩌면 먼 훗날...’‘진정으로 존중하고, 아껴주고, 한결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겠지.’‘하지만 배은혁과 임서하로는 더는 안 되겠어!’서하는 은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다시 돌아간다면, 난 당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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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제가 하 변호사님 사무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앳된 얼굴의 여자애가 밝게 말했다.서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 나서 안으로 들어서자, 작은 건물 내부는 의외였다.정갈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전통식 인테리어.겉으로는 로펌이라기보다 오래된 명문가 저택 같았다.3층에 올라가자 사무실이 보였다.여자애는 문을 두드린 뒤 조심스럽게 열었다.“이리로 들어가시면 됩니다.”서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그리고 시선을 올리는 순간...단정한 셔츠 차림, 온화한 인상.예상과 달리 날카로움보다는 학자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서하는 잠시 의아했다.‘변호사라면 보통 예리한 인상을 주는데... 대학 교수님 같네.’서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안녕하세요. 임서하라고 합니다. 한소진 씨 소개로 찾아왔습니다.”“하선우입니다.”짧고 간결한 자기소개.그와 동시에 선우가 손을 내밀었다.서하는 악수하며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제 상황을... 이미 들으셨나요?”“진이가 대략 말해주긴 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건, 직접 더 들어야 할 것 같네요.”‘진이? 선우 변호사님이 소진을 ‘진이’라고 부르네?’‘소진이 성격상,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그렇게 못 부르게 하는데...’‘그런데...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왜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지?’“앉으시죠.”선우의 목소리가 서하의 생각을 끊었다.서하는 정신을 가다듬고 자리에 앉았다.이어서 짧고 명확한 말로, 은혁과의 결혼 생활과 이혼 문제를 설명했다.모두 들은 뒤, 선우가 바로 물었다.“배은혁 대표님도... 이혼에 동의하시나요?”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동의는 했습니다.”“제가 알기로는 배 대표님 쪽에도 자체 변호사팀이 있는 걸로 압니다만...”“하 변호사님은 그쪽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쪽 합의서만 제대로 준비해 주시면 돼요.”서하는 분명하게 말했다.“이 합의서가 쓰이지 않더라도, 정당한 수임료는 드리겠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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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화

서하는 선우와 상담을 마치고, 배웅받으며 1층으로 내려왔다.막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정문이 ‘철컥’ 하고 열렸다.서하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회색빛 1980년대 레트로풍의 점잖은 맞춤 정장을 입은 남자.머리는 뒤로 넘겨 단정히 빗어 올렸고, 뚜렷한 이목구비가 훤히 드러났다.준수한 외모만이 아니었다.풍기는 아우라 자체가 남달랐다.마치 오래된 영화 속 재벌가 도련님이 현실로 걸어 나온 듯했다.‘지천후?’순간, 서하는 얼어붙었다.‘여기서 이 사람을 보게 될 줄이야...’‘설마 또 일부러 나타난 건가?’‘전에도 그랬잖아... 이번에도 일부러 마주친 건가?’천후의 목적이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좋은 쪽은 아닐 터였다.서하가 생각을 이어가기도 전에, 옆의 선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왔어?”순간, 서하는 깨달았다.‘아... 이번은 내 착각이구나. 진짜 우연이네.’하지만 천후는 선우의 말에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그 시선은 곧장 서하에게로 향했다.“꿀이?”낯 뜨거운 호칭에 서하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졌다.선우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두 분은... 아는 사이...?”“아니요, 전혀 모릅니다.”“당연히 알지!”두 사람의 목소리가 거의 동시에 튀어나왔다.정반대의 대답.천후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듯 말했다.“허, 우리 꿀이가 거짓말을 잘하네. 새삼 귀여운데?”‘역시... 불쾌해. 이 사람, 왜 이렇게 거리 두기를 모를까?’‘왜 갑자기 나한테 반말이지? 왜 함부로 내 어릴 때 별명을 부르는 건데?’서하는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고, 천후와 단 1초도 한 공간에서 숨 쉬고 싶지 않았다. 바로 고개를 돌려 선우에게 말했다.“하 변호사님,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필요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정중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서하는 시선을 한 치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곧장 천후 곁을 스쳐 지나갔다.천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그저 손을 흔들며 뒤에서 외쳤다.“꿀이야, 잘 가라!”서하의 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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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언니!”아정이 서하를 보자 반갑게 달려왔다.둘은 지난번 만남 이후로 얼굴을 본 적은 없었지만, 시간 날 때마다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물론 서하가 매번 답장을 해주는 건 아니었다. 그럴 때면 아정은 꼭 작은 크기의 우는 표정 이모티콘을 보냈다.아정은 집안에서 늘 귀하게 자라며 주변 사람들에게 떠받들려 왔기에, 서하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점이 더 마음에 들었다.서하 역시 아정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아정의 일들을 기억해 두고, 오늘은 일부러 자외선 차단제를 챙겨온 것이다.“새해에 여행 다녀온 거, 재밌었어?”서하가 아정을 안아주며 물었다.아정은 가족들과 함께 사계절 내내 따뜻한 어느 섬에 다녀왔다. 서하는 이미 아정의 SNS에서 그 사진들을 본 상태였다.“너무 재밌었어요!”아정의 커다란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언니, 나중에 기회 되면 우리도 같이 여행 가요!”서하가 웃으며 말했다.“좋지. 근데 나 이제 박사 과정 들어가거든. 아마 앞으로 2년은 시간 없을지도 몰라.”“우와, 언니 박사 과정 밟아요? 대단해요!”“대단하긴 뭐가.”서하가 들고 있던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이거 선크림이야. 기초 관리 다 하고 나서 발라. 괜찮은 거라 효과도 꽤 좋아. 일단 써보고 알레르기 있는지 확인해 봐.”“알겠어요. 고마워요, 언니! 언니, 우리 저녁 같이 먹을래요?”하지만 서하는 학교에 들러야 해서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았다.거절당하자 아정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물었다.“그럼 언니 언제 시간 되세요?”서하는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다.아정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그럼 제가 시간 날 때 연락드릴게요. 괜찮죠?”“언니는 ‘다음에’, ‘언젠가’, ‘조만간’ 이런 말로 대충 넘기면 안 돼요!”서하는 피식 웃었다.“그러지 않아. 시간 나면 제일 먼저 말할게.”잠시 더 얘기를 나눈 뒤에야 서하는 차에 올라 떠났다.그제야 아정은 서하가 모는 차를 제대로 보게 됐다.그건, 예상 밖으로 평범한 차였다.‘어떻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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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화

시현은 국물을 한술 뜨고 나서야 서하를 바라봤다.“교수님이 내주시는 과제, 할 만해?”서하는 난처한 듯 기중환 교수를 힐끔 보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선배, 교수님이 아까 이미 엄청 혼내셨어요. 제발 그 얘긴 꺼내지 마세요, 이렇게 부탁할게요.”식탁에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기중환 교수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지금 좀 힘들어야, 나중에 편해지는 거야. 우리 길이 원래 험해. 물리나 화학 하는 사람들 많지만, 세계적으로 이름 남기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새로운 성과 내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되겠냐.”“교수님, 알고 있습니다.”서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히 말했다.“저는 대단한 걸 이루겠다는 욕심은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굳이 저 자신을 깎아내리지도 않을 겁니다. 걱정 마세요, 전 힘든 거 겁나지 않아요.”기중환 교수의 눈가가 살짝 풀렸다.이 학생이 퍽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식사 자리는 내내 웃음이 오갔고, 분위기는 따뜻하게 흘렀다.식사 후에도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서하가 먼저 일어나겠다고 하자 시현도 곧바로 자리에서 따라 일어섰다.둘이 함께 내려와 아파트 현관 앞에 섰을 때, 서하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선배, 안녕히 가세요!”“서하야, 내일 시간 있어?”시현이 곧장 물었다.“공장 쪽 같이 가볼까?”“내일은 못 갈 것 같아요. 다른 일정이 있어서요.”서하는 웃으며 대답했다.“선배, 운전 조심하시고요. 전 이만 갈게요.”그녀는 금세 차에 올라 골목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시현은 서하의 차가 보이지 않게 되자 비로소 자기 차에 몸을 실었다....시간은 어느새 밤 9시 가까이.서하는 그대로 병원으로 향했다.병실에서는 임범철이 또 퇴원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담당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조금 더 입원하길 권했다.서하는 의사에게 정중히 말했다.“조금 더 입원하겠습니다. 언제쯤 퇴원하면 될지 선생님이 말씀해 주시면, 그때 나가겠습니다.”그 길로 병실에 들어간 서하는 임범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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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은혁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대답 대신, 서하는 방문을 세게 닫아버렸다.쿵! 소리에 은혁은 몇 초간 멍하니 서 있다가, 결국 자리를 떠났다.서하는 이미 잠이 깨버렸다. 다시 잘 생각도 들지 않았다.그녀는 씻고 나서 마스크팩을 붙였다. 그 뒤 침대에 누워서 배달을 시켰다.아침을 먹고 나서는 한 시간 정도 요가를 했다.오랜만이라 몸이 잘 안 펴졌지만, 그녀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천천히 하면 돼. 금방 다시 익숙해질 거야.’앞으로의 삶은 자신에게 좀 더 충실하고 행복하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돈 버는 건 서두르지 않았다. ‘노력하다 보면, 결국 내 힘으로 이 집을 지켜낼 수 있을 거야.’레나의 교통사고 얘기는 신경 쓰지도, 따로 물어볼 생각도 없었다.며칠 뒤, 서하는 다시 로펌을 찾았다. 이번에는 두 시간 가까이 안에서 머물다가 나왔다.그 사이 임범철은 끝내 퇴원을 고집했다. 설까지 보름도 안 남았기 때문이다.서하는 전통적인 생각이 강했다. ‘설을 병원에서 보낼 수는 없어.’그래서 직접 의사를 만나고 퇴원 수속을 밟았다.미리 낸 돈과 보험 처리까지 계산하니, 환급금이 1억 8천만 원 정도였다.서하는 그중 1억만 챙기고, 남은 8천만 원가량의 금액은 부모님께 드렸다.그리고 은혁의 계좌로 1억을 송금했다.은혁 명의의 계좌가 워낙 많고, 매일 돈이 드나드는 액수도 엄청나다 보니, 1억 정도는 바다에 콩알 하나 던진 수준이었다.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게 당연했다.서하는 송금 화면을 캡처해 두고, 임범철을 집으로 모셔다드렸다.짐을 나르던 상호는 서하를 보더니 하고 싶은 말을 간신히 참느라 입술만 달싹거렸다. 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서하 역시 모른 척했다.다 정리하고 돌아가려는 순간, 노숙진이 서하의 손을 붙잡았다.“서하야, 네 아버지 퇴원했으니까, 언제 배 서방 시간 되면 둘이 집에 한 번 와서 밥 먹자.”서하는 바로 대답했다.“배 서방 출장 갔습니다. 언제 올지 몰라요.”“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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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서하의 마음은 이제 평온하고 잔잔했다.은혁을 향한 기대나 설렘은 더 이상 없었다.‘배은혁이 빨리 이혼합의서에 서명만 하면 되는데.’‘그러면 둘이 같이 가정법원에 가서 끝내면 돼.’그런데도 은혁이라는 사람... 서하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질질 끌며 이혼을 미루는지, 짐작 가는 이유도 없었다.하지만 이제 그녀는 이혼에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았다.다시 로펌을 찾아간 서하는 이혼합의서를 챙겨 나왔다.지난번 만남에서 이미 선우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은혁은 말로는 이혼에 동의한다고 했지만, 결국 이혼합의서를 내놓지 않았다.선우는 몇 가지 방안을 제시했으나, 서하는 전부 고개를 저었다.마지막에 선우가 말했다.“그럼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네요.”“뭔데요?”선우와 헤어진 뒤, 서하는 보험회사를 들렀다.그날 오후, 서하는 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은혁은 금방 받았다.“아직 출장 중이야?”“언제 들어와?”은혁의 목소리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왜, 무슨 일 있어?]“전에 들어놓은 보험 만기가 됐어. 수익자가 당신이라, 서류에 당신 서명이 필요해.”[그거 말고 또 뭐 있냐?]“없어.”잠시 정적이 흐르고서야 은혁이 대답했다.[내일 들어간다.]“몇 시쯤? 내가 회사로 찾아갈까?”[아마 저녁쯤 될 거야. 본가에서 보자.]“난 안 가. 레나 보기 싫으니까.”서하는 단호했다.“몇 시에 들어오는지만 말해줘. 내가 본가 앞에서 기다릴게.”은혁은 다시 잠시 말이 없었다가, 낮게 말했다.[그럼 굳이 거기까지 오지 마. 내가 퇴근하는 길에 네 집에 들를게. 기다려.]서하는 속으로는 은혁이 자기 집 근처에 오는 것도 원치 않았다.하지만 은혁이 한발 물러선 상황에서 더 밀어붙일 수도 없었다.“알았어. 기다릴게.”서하는 어릴 적부터 수학, 과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또래 아이들이 뛰어놀 때, 서하는 혼자 책상에 앉아 수학 문제를 풀곤 했다. 문제가 어려울수록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풀이 방법을 찾았다.‘사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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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서하는 서류를 받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고생 많았어. 먼 길 왔으니 얼른 집에 들어가서 쉬어.”은혁은 고개를 들어 서하를 바라봤다.그 눈빛 속에서 서하는 순간 착각했다.‘지금... 불쌍한 척? 아니면, 애원?’잠깐 멍해진 사이, 은혁은 이미 시선을 피했다.“나 아직 저녁 못 먹었어.”‘너 저녁 못 먹은 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서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입을 열었다.“난 이미 먹었어.”은혁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말했다.“조금만 더 같이 먹자. 비서 시켜서 보내게.”서하는 손에 쥔 서류를 내려다보다가,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그래.”은혁이 몸을 일으켰다.“먼저 샤워 좀 할게.”서하는 이마를 찌푸렸다.“이건 좀... 아니지 않아?”은혁은 고개를 돌려 서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뭐가 아닌데?”서하는 결국 물러섰다.“그래, 샤워해.”은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더니, 욕실로 들어갔다.‘괜찮아, 난 흔들리지 않아...’하지만 그 웃음 하나에, 서하는 순간 시야가 흔들리는 듯했다.서하는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그러고는 다시 공부 자료를 펼쳐 들었다.10분쯤 지나, 욕실 문이 열렸다.은혁은 상반신이 훤히 드러난 채, 허리에 수건만 두르고 나왔다.탄탄한 복근이 그대로 드러났다.결혼 전까지, 서하는 성인 남자의 몸을 이렇게 가까이 본 적이 없었다.소진이 종종 짧은 영상에서 상반신을 탈의한 꽃미남 사진들을 보내주곤 했지만, 그때마다 서하는 반신반의했다.‘정말 저렇게 허리가 얇고 어깨는 넓고, 복근이 그렇게 완벽할 수 있을까?’소진은 늘 웃으며 말했다.“보고 즐기면 그만이지, 진짜든 가짜든 그게 뭐가 중요해?”하지만, 서하가 결혼하고 은혁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을 때 알았다.옷을 입고 있을 땐 그저 키 크고 어깨 넓은 남자였지만, 모든 걸 벗어 던진 뒤의 은혁은...‘세상에, 진짜로 이런 몸이 존재하는구나.’은혁의 근육 선은 화면 속 남자들보다도 훨씬 더 좋았다.서하는 정신을 가다듬고 시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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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서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긴장을 꾹 눌러 삼키고, 애써 웃으며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냐.”은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단숨에 사인을 했다.서하는 곧장 다음 장을 넘겼다.“여기도 있어.”은혁이 다시 서명하고 서하에게 펜을 넘기자, 서하는 펜을 챙겨 넣고 서류를 가방에 넣었다.“그럼 난 이만 가볼게.”은혁은 곁눈질로 서하를 스치듯 바라보며 말했다.“필요할 땐 쓰고, 끝나면 버려?”서하는 심장이 쿵쾅거려 더는 다른 걸 신경 쓸 수 없었다.그때 옆에 앉아 있던 민석이 불쑥 끼어들었다.“서하 씨, 이거 딱 남자랑 같이 자고 나서 바로 모른 척 내빼는 거랑 뭐가 달라요?”서하는 이마를 찌푸렸다.은혁은 옆에서 발길질을 날렸다.“닥쳐!”민석은 몸을 피하며 웃었다.“야! 넌 진짜 여자에 눈이 멀었구나!”은혁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서하만 바라봤다.“돌아가면 볼 일 있어?”서하는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여기선 숨이 막혀. 제발 나가고 싶어.’그녀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집에 가서 자료 좀 더 봐야 해.”은혁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내가 데려다줄게.”“차 가지고 왔어.”그 순간 민석이 히죽 웃으며 끼어들었다.“‘내가 데려다줄게’라는 말을 번역하면 ‘같이 자자’ 이런 뜻 아닌가?”민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혁의 발길이 다시 날아왔다.민석은 몸을 홱 피하며 소리쳤다.“야! 내가 딱 맞히니까 발끈하는 거지? 뭐야, 진짜 입 막으려고 그러는 거야?”은혁은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 대신 서하의 손목을 단단히 잡아끌고 방을 나섰다.복도는 조용했다. 그제야 공기가 가라앉는 듯했다.은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민석이 원래 입이 더러워. 그냥 못 들은 셈 쳐.”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속으로는 민석의 말이 맞다고 느꼈다.‘당신이 나를 찾는 이유... 결국 침대 말고는 없잖아.’‘우리 사이에 다른 대화는 전혀 없는데...’...클럽의 화려한 불빛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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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화

“응, 이번 달엔 조금 당겨졌어.”서하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이제 가도 되죠?”말을 끝내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은혁이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설마 마음속으론 내가 당신 찾는 이유... 그거 하나뿐이라고 생각하지?”서하는 의아하게 그를 바라봤다.“아닌가?”늘 침착하던 은혁의 얼굴에서 여유가 지워졌다.“임서하!” 은혁은 목소리를 높였다.서하는 남자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왜 소리치는데? 내가 말한 것 중에 사실 아닌 게 있어? 억울해?”은혁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분노를 삼켰다.“좋아, 다른 건 제쳐두자. 우리 부부잖아. 부부생활 하는 게 그렇게 잘못이야?”“잘못이라고 말한 적 없어!”서하는 차갑게 대꾸했다.“하지만 내가 싫다고 했을 때 당신은 멈춘 적이 있었나?”“그건...”은혁은 순간 말이 막히며 얼굴을 굳혔다.“그럼 내 욕구는? 난 어떻게 하라고?”“그래서 내가 미리 말했잖아. 생리 중이라 못 한다고. 그게 잘못인가?”은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서하는 곧장 돌아서 걸음을 옮겼다.몇 걸음 가지 않아, 뒤에서 따라붙는 발소리가 들렸다.이어서 고개를 돌리자, 역시 뒤따라오는 은혁이 보였다.“또 뭐 하려고?”은혁은 짧게 대답했다.“물어볼 게 있어.”“빨리 해.”“당신 집으로 가든지, 아니면 같이 본가로 가자.”은혁의 목소리가 낮게 이어졌다.“걱정 마. 절대 안 건드려.”서하는 턱을 살짝 들며 냉정히 말했다.“그럼 당신 차 타고 와.”“차 안 가져왔어. 민석이가 태워줬거든.”은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내뱉었다.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서하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차에 태우기로 했다.이 차를 샀을 때만 해도, 은혁이 직접 타는 날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서하는 조심스레 서류가 든 가방을 뒷좌석에 올려두고, 그제야 운전석에 앉았다.‘제발... 이혼합의서만 무사히 지켜내면 돼.’...가는 길 내내, 은혁과 서하는 한마디 대화도 거의 없었다.집에 도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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