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버림받은 아내의 화려한 귀환: Chapter 71 - Chapter 80

100 Chapters

제71화

서하는 밀려드는 의심을 애써 외면했다. 누군가를 향해 가장 나쁜 마음으로 추측하는 건 더더욱 원치 않았다.하지만 지금 눈앞에 놓인 건 다름 아닌 피임약이었다.레나가 은혁의 동생의 약혼녀라서가 아니라, 설령 평범한 연인 사이라 해도, 이런 약을 대신 받아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시간이 좀 지난 후,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서하는 자신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시계를 보니 시간은 벌써 밤 아홉 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서하는 약 봉투를 조수석에 내려놓았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을 본 순간, 숨이 잠시 멎는 듯했다. 발신자는 레나였다.서하가 집을 나간 뒤로 둘 사이엔 마주칠 일조차 없었다. 하지만 은혁과 엮이기만 하면 이상하리만치 레나는 언제나 그림자처럼 나타났다.지금의 서하는 달랐다. ‘이젠 웬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아. 누구도 나를 무너뜨릴 수 없어.’통화를 받자마자 레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서하 언니, 언니 차에 혹시 약 봉투 있지 않으세요? 그거 은혁 오빠가 대신 받아주신 건데, 차에 두고 가셨다고 하더라고요.]“있어.”서하의 목소리는 담담했다.[다행이에요. 저 그거 먹어야 하거든요.]레나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언니, 번거로우시겠지만 좀 갖다 줄 수 있어요?]“퀵으로 보낼게.”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아 서하는 짧게 잘랐다.[잠깐만요.]레나가 급히 불러 세웠다.[언니, 언제쯤 돌아와요? 은혁 오빠 혼자 집 지키게 놔두는 거,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빠 또래 남자들, 다들 혈기왕성한 거 아시잖아요.]서하는 코웃음이 나왔다.“그건 네가 더 잘 아네.”레나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은혁 오빠 술도 자주 드시잖아요. 제가 동생으로서 다른 도움은 못 되니까... 그럴 땐 제가 챙겨드려야죠.][지난번에도 술 취하셔서 제가 오빠를 좀... 아무튼, 언니. 언니가 빨리 돌아오시는 게 좋을 거예요.]서하는 레나의 말에서 은근한 자랑과 기묘한 자신감을 읽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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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화

은혁에게는 가슴의 점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전부 서하가 꾸며낸 말이었다. 그저 레나를 떠보려는 의도였을 뿐인데, 뜻밖에도 레나는 순순히 걸려들었다.그 사실만으로도 은혁과 레나 사이가 아직 깊은 관계까지는 나아가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하지만 그 현실을 알았다고 해서 서하가 안도감을 느낀 건 아니었다.‘배은혁 같은 사람이 민레나를 안 건드린 건...’‘아마 가까운 사이라 조심스러워서겠지.’‘그래서 결국 나를 욕망의 출구로 삼는 건가?’서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머릿속을 스쳐 가는 복잡한 생각들을 털어냈다.‘어차피 난 이혼할 거야. 더 생각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그런데도 오늘 하루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은혁은 서하의 얼굴을 정성스레 닦아주었고, 함께 거리를 걸었으며, 끝내 아무런 손길도 없이 돌아갔다.‘저건 전혀 배은혁답지 않아.’서하는 봉투를 퀵서비스 기사에게 맡기고 집으로 돌아왔다.저녁엔 마라탕을 먹었지만, 잠자리에 들 무렵 다시 허기가 몰려왔다.그녀는 냉장고를 열어보니 요거트 몇 개만 덩그러니 들어 있을 뿐, 라면조차 은혁이 다 먹어 치운 뒤였다.서하는 애초에 요리할 줄 몰랐다. 핸드폰을 들어 배달 앱을 켰지만, 음식 사진을 보는 순간 도무지 입맛이 당기지 않았다.그런데도 배는 계속 꼬르륵거렸다.‘왜 이렇게 서러운 거지...’서하는 홧김에 핸드폰을 침대 옆으로 던져버리고는 몸을 눕혔다.막 눈을 감으려는 순간, 다시 벨 소리가 울렸다.“여보세요?”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임상호 누나 되시죠? 지금 빨리 오셔야 해요. 임상호가 사람을 죽였어요!]서하는 번개처럼 상체를 일으켰다.“뭐라고요?”뚝! 통화는 끊겼다.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려던 서하는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었다. 눈앞이 새까매지며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몇 초간 깊게 숨을 고른 뒤에야 시야가 조금씩 돌아왔다.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고, 손바닥은 식은땀에 축축히 젖었다. 머릿속은 텅 비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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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전화가 끊기자마자, 배효산은 곧장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배효산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은혁이 서 있었다....서하는 길가에서 급히 택시를 잡았다. 마음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그리고 상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리 해도 받지 않았다.‘상호 쪽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모르지만...’‘내가 혼자 가는 건 위험해. 분명 안전하지 않아.’그래서 서하는 결국 배효산에게 연락했다.다행히 배효산은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가는 길에 변호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주소를 묻자 서하는 급히 알려줬고, 변호사는 곧 도착하겠다고 했다.그제야 서하는 조금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도착한 곳은 얼마 전 상호가 찾아왔던 바로 그 룸살롱이었다.하지만 변호사는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다.조급해진 서하는 혼자 안으로 들어갔다.그리고, 그 순간.서하는 오학빈을 발견했다.‘그날 룸살롱에서 상호와 함께 앉아 있던, 투자 이야기를 늘어놓던 남자였네?’서하의 기억 속에 학빈의 인상은 뚜렷했다.가벼운 눈빛, 느글거리는 미소, 허술한 말투.“누님.”학빈은 서하를 보자 두 눈이 달라붙은 듯 떼지 못했다.“상호 찾으러 오신 겁니까?”서하는 더는 체면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제 동생이 어디 있는지 알아요?”급히 나오느라 두꺼운 겨울옷을 걸쳤음에도, 서하의 차가운 아름다움은 전혀 가려지지 않았다.검은 여자의 눈동자엔 물기가 맺혀 있었고, 창백한 뺨은 추위와 달려온 기운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미치겠네... 지금 당장 끌어안고 싶은데.’학빈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그때, 서하의 핸드폰이 울렸다. 변호사의 번호였다.서하는 다급히 전화받았다.[임서하 씨... 죄송합니다. 제가 사고가 나서, 조금 늦을 것 같습니다.]서하는 애가 탔지만, 그런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었다.전화를 끊자마자, 학빈이 손을 내밀었다.“누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상호 있는 데로 같이 가시죠.”서하는 상호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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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학빈은 워낙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 상황 돌아가는 걸 순식간에 읽어냈다.그러고는 비웃듯 입을 열었다.“신고 안 한 건, 상호가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님께서 변호사까지 부르셨다니...”“혹시 저희랑 법정에서 다퉈보시겠다는 겁니까? 좋습니다. 그럼 우리도 경찰에 바로 신고하죠. 상호... 몇 년은 안에서 썩어야 할 겁니다.”말이 떨어지자 상호의 얼굴이 새하얘졌다.“누나... 저 감옥 가기 싫어요! 누나,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서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입 닥쳐!”하얀 얼굴에 서늘한 눈빛. 당황하지 않고 버티는 서하의 모습이 학빈에게는 오히려 더 자극적이었다.“물론이죠. 누님 말씀처럼 저도 일을 키우고 싶진 않습니다. 합의, 불가능한 건 아니죠.”‘합의라... 그 입에 담긴 속뜻이 뭔지 뻔하지 않나.’서하는 곧장 물었다.“어떻게 해결하자는 겁니까?”학빈은 속내를 바로 드러내진 않았다. 서하가 쉽게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건 짐작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런 태도조차, 학빈에게는 더 치명적이었다.‘손짓 한 번이면 달려드는 여자들... 그런 건 이제 지겹다.’‘하지만 이 여자는... 다르다.’학빈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짓더니 말했다.“누님, 잠시 나가서 얘기하시죠.”그는 먼저 룸을 나섰다.서하는 상호를 돌아보았다.상호의 얼굴은 두려움에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대학을 갓 졸업한 스물셋 청년. 세상의 냉혹함을 알 턱이 없고, 감옥이란 단어만으로도 무너질 나이였다.“누나, 제발요. 나 좀 도와줘요. 저 감옥 못 갑니다! 누나, 저 버리지 마요!”상호는 울며 고개를 떨궜다.서하는 순간 문득 스물셋 나이의 은혁을 떠올렸다.그때 은혁은 이미 남들과는 다른 기품을 갖춘, 차갑고도 도도한 남자였다.‘만약 배은혁이 이런 상황에 놓였다면...’‘이렇게 울부짖고 매달렸을까? 절대 아니었을 거야.’서하는 고개를 저었다. 남편 은혁은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약하거나 무능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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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서하는 알았다. 학빈이 한 말은 사실이었다.그래서 곧장 물었다.“조건을 말씀하시죠.”학빈이 굳이 따로 불러낸 것도, 처음부터 신고하지 않은 것도 결국 거래를 염두에 둔 것이 분명했다.학빈은 입꼬리를 비틀며 비열하게 웃었다.“역시 누님은 눈치가 빠르십니다. 저는 누님 같은 스마트한 분만 상대하고 싶어요.”서하에게는 더 이상 쓸데없는 가식 따윈 필요 없었다.‘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어. 이 남자, 절대 정상은 아니야.’그녀가 침묵하자, 학빈은 다시 입을 열었다.“이번 일, 어떻게 처리할지는 제 한마디에 달렸습니다. 결국은... 누님 하기에 달렸다는 거죠.”서하의 눈이 차갑게 가늘어졌다.“무슨 뜻입니까?”학빈은 한 발 다가섰다.“정말 모르십니까? 누님을 처음 본 날부터 저는 누님이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그러니... 눈치 있게, 제 곁에서 이틀만 같이 있어 주시면 됩니다.”짝!맑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서하의 손바닥이 학빈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설마 했는데... 이런 더러운 말까지 뱉을 줄은 몰랐어. 역겹다. 정말 역겹다.’학빈은 순간 눈빛이 흔들리더니, 곧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좋습니다. 저는 이런 게 더 좋습니다. 누님 같은 분... 다루는 맛이 있죠.”그는 곧장 서하의 팔을 낚아챘다.“놔요!”서하는 당황하며 몸을 빼려 했지만, 학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벽 쪽으로 힘껏 밀어붙였다.‘설마... 이런 곳에서?’서하는 경악했다.그러나 이 룸살롱은 다름 아닌 학빈의 소유였다.안에 있는 종업원, 관리인 모두 그의 사람들이었다.지금 이 복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감히 나설 수 있는 이는 없었다.학빈의 얼굴이 서하에게 점점 가까워졌다.“상호가 감옥 가는 꼴 보기 싫으시죠? 그럼 얌전히 계세요. 어차피 결혼도 하신 분인데, 남자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건 없잖습니까.”서하는 그제야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배은혁이 억지로 날 대했을 때도... 이정도는 아니었어.’‘이 남자는... 인간 이하의 짐승이야.’학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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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너희들 뭐 하는 거야? 대낮에... 아악!”비명이 뒤로 멀어졌다.서하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오직 은혁의 품속에 파고들어, 눈을 꽉 감은 채 온몸을 움츠렸다.머릿속엔 조금 전의 공포만이 남아 있었다.‘이 사람이 조금만 늦었어도... 난 어떻게 됐을까.’서하가 겨우 진정을 찾았을 때, 눈을 뜨고 보니 은혁은 이미 그녀를 ‘구름바다’에 있는 집으로 데려왔다.한때 두 사람이 함께 살았던 곳.은혁은 여전히 서하를 안은 채, 그녀의 닫힌 눈과 떨리는 어깨를 바라봤다.차갑던 눈빛 속에, 순간 날카로운 살기가 스쳤다.“이제 됐어. 아무 일도 없어.”서하는 입술을 열었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은혁은 그녀를 부축해 앉히고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건넸다.서하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말했다.“고마워.”“상호는 집으로 보냈어. 변호사가 뒤처리할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고마워...”서하는 같은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또 뭐라고 할까 봐 두려워. 당신은 늘 말끝마다 날 몰아붙였잖아.’서하는 잠시 은혁이 예전처럼 비아냥대며 ‘고맙단 말로 끝낼 일이냐’라고 할까 봐 두려웠다.아버지 병원비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은혁은 또다시 자신을 구했고, 상호까지 감싸주었다.“근데... 당신... 어떻게 온 거야?”서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은 분명 배효산에게도, 은혁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은혁의 표정이 굳어졌다.“넌 아직 내 아내야.”목소리는 싸늘할 만큼 담담했다.“당신한테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날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서하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당신한테 빚지고 싶지 않아.”“네가 이미 나한테 진 빚이 얼만데?”은혁은 비웃듯 웃었다.“갚을 방법이라도 생각해 봤어?”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은... 아무 힘도 없어. 공포와 피로로 버티는 게 전부야.’‘이 사람과 기싸움할 여력도 없어.’은혁은 그런 서하의 상태를 눈치챘다. 이내 무표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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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화

서하는 한동안, 은혁이 레나를 안 건드린 건 그만큼 아껴서라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지금 정작 눈앞에 앉아 은혁 얘기를 꺼내는 레나는 눈가며 입술까지 달콤하게 물들어 있었다.‘내가 뭐라도 아는 척 분석했던 게, 지금 생각하니 참 우습네.’철벽이라도 두른 듯, 어떤 상처도 통하지 않을 거라 믿었던 서하의 몸.하지만 그 모든 게 다 허상이었다.서하의 마음은 얼음 창고에 갇힌 듯, 싸늘하게 식어갔다.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손가락 끝까지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듯 차갑기만 했다.‘배은혁이 이미 레나랑 자면서도... 나랑 침대를 같이 썼다고?’‘으윽, 역겨워... 토할 것 같아.’서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고, 눈빛이 휘청거리는 걸 본 레나는, 더할 나위 없이 뿌듯했다.“제가 뭐랬어요, 언니. 은혁 오빠 얼마나 힘 있고 대단한 분인데요. 근데 저 아끼느라 괜히 힘 안 쓰시죠. 저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몰라요.”“그러니까 가끔 언니랑 잠자리로 풀고 오는 거,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제가요.”서하는 마지막 남은 기운까지 쥐어짜 내듯 입을 열었다.“나랑 배은혁은 아직 이혼도 안 했어. 너 지금 하는 짓, 간통이자 불륜이야. 민레나, 너 양심이라는 게 있긴 해?”레나는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되받아쳤다.“제가 이미 말했잖아요. 은혁 오빠 할아버지가 언니 편 들어주지 않았으면, 은혁 오빠랑 결혼했을 사람은 저였다고요. 언니야말로 우리 사이에 끼어든 거예요.”“은혁 오빠한테 언니는 족쇄일 뿐이에요. 진짜 제3자는 언니예요, 언니 같은 사람이요!”‘졌구나... 법적으로 아내인 게 무슨 소용이람...’‘종이 한 장짜리 혼인신고가 무슨 의미가 있냐고...’‘배은혁 마음이 나한테 없는데... 난 민레나한테 이미 진 거야.’게다가 이제 은혁은 더럽혀졌으니, 서하는 다시 그 몸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이혼 문제... 이제는 내가 서둘러야겠네.’‘배은혁의 변호사팀이 그렇게 크다면서, 아직도 이혼 합의서 하나 제대로 못 썼단 말이야?’...서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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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화

서하는 더 이상 자신을 억지로 붙들어 매고 싶지 않았다.은혁 쪽이든, 친정 부모님 쪽이든, 이제 상관없었다.‘이혼하고 싶어. 다 내려놓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어.’상호가 아무리 눈물로 붙잡아도, 서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섰다....H시의 가장 비싼 땅값을 자랑하는 고급 빌라 단지.비단 같은 실크 잠옷을 걸친 한 남자가 거대한 통유리창 앞에 서 있었다.느긋한 자세, 나른한 기운.그 뒤, 거실 한가운데 서 있는 또 다른 남자는 고개를 조아린 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그래서, 네가 어떻게 배은혁을 건드리게 된 건데?”창가에 서 있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요염하다 못해 사악할 정도로 완벽하게 다듬어진 얼굴.지천후였다.수많은 인맥을 동원해 거의 집안이 쪼개지다시피 하며 가까스로 이 자리에 끌려온 사내.그가 바로 오학빈이었다.학빈은 이를 갈며 목소리를 낮췄다.“저는 그 배은혁이라는 인간이 너무 역겨웠습니다. 겉으로는 고상한 척, 사실은 위선자이자 짐승 같은 놈이니까요.”그 말에 천후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천후는 손에 든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며 물었다.“그래, 그다음은?”학빈은 기회를 잡은 듯 서둘러 말을 이어갔다.“저는 늘 지 대표님을 존경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술자리에서 배은혁의 처남을 만났습니다.”천후가 눈썹을 흥미롭게 치켜세웠다.“오?”학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 처남이라는 자가 돈만 밝히는 놈이더군요. 그런데... 배은혁 아내도...”천후가 천천히 걸어와, 내려다보듯 학빈을 노려보았다.“배은혁 아내가 뭐?”학빈이 씩 웃으며 내뱉었다.“겉으로는 단정한 척하지만, 사실은 천한 년이지요.”부러진 갈비뼈가 숨만 쉬어도 욱신거렸지만, 학빈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그 순간, 천후의 눈빛이 싸늘하게 좁혀졌다.학빈의 등골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뭐지... 왜 저렇게 노려보는 거지?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배은혁을 욕했으니 당연히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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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이 불운은 오학빈에게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은혁은 부하의 보고를 통해 지천후가 이 문제에 개입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그래서 일부러 학빈을 풀어주라고 지시했다.예상대로, 학빈은 천후의 집을 찾았다가, 결국 쓰레기처럼 밖으로 내던져졌다.은혁은 그 모든 일을 계산에 넣고 있었다.부하의 보고를 들으며, 은혁이 쥔 펜을 꺾을 듯 힘을 주어 잡자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다음 순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의 캐비닛을 걷어찼다.쾅!대표이사실에 울린 굉음.그러나 사무실 문밖에서는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그 시각, 서하는 전화를 걸었다.은혁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차갑고 담담했다.[당신, 회사야?]“응.”[가도 돼?]“뭐가 안 되는데.”[알았어.]서하는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곧장 차를 몰아 은혁의 회사로 향했다.그녀는 로비에 들어서자, 나재도가 눈을 크게 떴다.“사모님, 어떻게 오셨어요?”“배 대표 만나러 왔습니다.”서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수고지만, 나 비서님이 좀 안내해 주시겠어요?”“네, 그러시죠.”두 사람은 은혁의 전용 엘리베이터에 함께 올랐다.올라가는 동안, 재도는 서하를 흘끔 보았다.그는 말을 걸고 싶었지만, 서하의 싸늘한 표정에 이내 입을 다물었다.그저 속으로 ‘후’ 하고 한숨만 삼켰다.곧 최상층.대표이사실 문 앞에서 재도가 노크했다.“들어와.”낮게 울리는 은혁의 목소리가 안에서 새어 나왔다.재도가 문을 열고, 손짓으로 서하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안내했다.은혁은 고개를 들어 서하를 바라봤다. 움직임도, 표정도 없었다.“뭐 하러 왔어.”서하는 곧장 그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눈을 똑바로 맞추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이혼합의서는, 완성됐어?”은혁의 펜 끝이 잠시 멈췄다.그는 곧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서하를 바라봤다.서하는 피하지 않았다. 정면으로 그 시선을 마주했다.은혁의 눈빛은 깊고 어두웠다.높은 콧대, 칼로 조각한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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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서하는 미간을 찌푸렸다.“일부러 그러는 거지?”“뭘? 일부러 당신이랑 이혼 안 한다고?”은혁은 가볍게 웃어 보였다.“당신은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아니, 불가능하지. 당신은 나랑 빨리 끝내고 레나랑 결혼하고 싶겠지.’‘그런데 이혼합의서 하나 작성하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일까?’‘난 믿을 수가 없어. 그렇다면... 일부러 시간을 끄는 거야.’서하는 곱씹듯 생각하다가, 답을 스스로 찾은 듯 고개를 들었다.‘그래... 이유는 하나뿐이야.’매번 은혁과의 부부관계에서 느꼈던 점. 서로 마음이 통한 적은 없었지만, 그 일에 대해 은혁이 얼마나 열중했는지는 서하도 알고 있었다.‘짐승 같다는 말, 절대 억울하지 않지. 그런데 민레나한테도 그렇게 했을까?’‘아니, 분명 못 했을 거야. 첫사랑이자 마음에 둔 여자는 아낄 테니까.’‘하지만 나한텐... 그저 자기 즐기고 싶은 대로만 했겠고.’이 깨달음이 가슴을 파고들자, 서하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배은혁. 더는 미루고 싶지 않아. 당신이 무슨 속셈이든 상관없어. 출장 다녀오면, 이혼합의서 내 눈앞에 내놓아야 해.”은혁은 의자에 느긋하게 몸을 기댔다. 두 손을 깍지 끼고,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그렇게 급해?”말투는 한없이 가볍고 냉담했다.“왜, 벌써 딴 사람이라도 찾았어?”‘이제는 당신 말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난 베이지 않아.’‘존중도, 사랑도... 그런 건 다 끝났어.’‘다시는 내 마음을 흔들 수 없어.’서하는 담담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그래서 뭐? 그렇다 해도 이제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민레나랑은 마음껏 더럽게 얽히면서, 나는 새로운 시작조차 못 한다는 거야?’‘이게 바로 위에서는 마음대로 하면서, 밑에선 찍소리도 못 하게 만드는 오만한 논리지. 참, 배은혁다운 태도야.’서하는 속으로 비웃었다.‘그래, 배은혁은 태어날 때부터 가진 게 많았어. 그래서 당당할 수 있었고, 그래서 모든 게 가능하다고 믿는 거겠지.’‘하지만 배은혁에겐 나를 사랑하고 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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