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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첫사랑만 구한 남자: Chapter 211 - Chapter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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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1화

지하 주차장, 검은색 고급 세단 안.운전석에 앉은 양준명의 손바닥엔 식은땀이 났다.그는 백미러로 뒷좌석을 흘끗 훔쳐봤다.변도영은 한마디 말도 없이 창밖을 응시한 채 미묘한 기류를 흘려보내고 있었다.그의 침묵은 분노보다 더 무섭고 꾸짖음보다 더 차가웠다.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양준명은 이미 모든 일을 전해 들었다.오늘 연회장에서 신지아가 모두의 앞에서 이혼을 선언했다는 것.그뿐만이 아니었다.그녀는 곧바로 새 남자 친구를 소개했고 심지어 박수미가 회사 지분을 신지아에게 넘겼다는 말까지 들려왔다.결혼생활은 끝났고 이제 남은 건 재산 문제뿐이었다.양준명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변 대표님, 사모님과 한 번 다시 이야기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변도영의 눈빛은 살짝 흔들렸지만 여전히 침묵했다.양준명은 계속 말했다.“사모님은 원래 그런 분이 아닙니다. 무작정 남의 걸 빼앗는 사람도 아니고요. 이번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잠시 후, 변도영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이혼까지 해놓고 무슨 얘기를 하라는 거지?”그의 음성에는 씁쓸함보다 깊은 배신이 깃들어 있었다.신지아가 단순히 감정적으로 폭발한 줄 알았다.하지만 한 달 전부터 이미 계획된 이혼이었다는 걸 알고 난 뒤 변도영은 비로소 깨달았다.‘신지아, 너 참 치밀했구나.’이런 생각이 떠오를수록 그의 가슴은 묘하게 답답해졌다.“그래도...”양준명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5년이나 함께하셨잖습니까. 감정이 아예 없을 리가요? 아마도 순간적인 감정이었을 겁니다.대표님이 조금만 낮은 자세로 나서신다면 사모님께서 마음을 돌릴 수도 있어요.”그 말에 변도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차창 밖 어둠 속 불빛을 바라봤다.“나더러 사과를 하라고? 신지아가 한 달 전부터 나 몰래 이혼을 준비했는데 지금 와서 내가 고개 숙여 사과하라고?”조용한 차 안에 변도영이 내뱉은 너털웃음이 울려 퍼졌다.“웃기지 마. 절대 그럴 일 없어.”양준명은 그 말을 듣고는 한숨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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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2화

차 안이 침묵에 휩싸였다.양준명은 운전대 위에서 손가락을 조심스레 꼼지락거렸다.사실 그는 오래전부터 그 교통사고의 진실을 말할까 망설이고 있었고 하민재가 찾아와 협박을 했던 일이 떠올라 심각하게 고민했다.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앞날을 걸고 변도영을 보좌하는 입장이었다.양준명은 ‘형은 신지아 씨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하민재의 말을 믿었다.그렇다면 굳이 상처만 키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그건 나름 선의의 거짓말이었다.하지만 며칠 전 신지아가 혼자 이혼 서류를 들고 구청으로 향하던 뒷모습을 본 순간 그의 마음은 흔들렸다.신지아는 정말 외로워 보였다.그 모든 걸 감당하고서도 끝내 아무 말 없이 떠나려는 사람의 뒷모습이었다.이대로라면 변도영은 평생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겠지.오늘만큼은 진실을 말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하필 그날 내내 변도영은 박수미의 생신 잔치 준비로 분주했다.그래서 기회를 찾지 못한 채 하루가 저물었고 지금 변도영이 먼저 그 말을 꺼내자 양준명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그는 낮고 빠르게 말했다.“지난번 이나은 씨의 교통사고... 그 사고에 부딪힌 다른 차량의 운전자가 사모님입니다. 그리고 유산한 것도 그 사고 때문이었습니다.”양준명의 말이 끝나자 차 안의 공기는 한층 더 차가워졌다.같은 시각, 병원 12층.하민재는 박수미의 생신 잔치가 끝난 뒤 다시 야간 근무를 서야 했다.피곤함에 찌든 얼굴로 커피를 마시던 그는 지루함을 못 견뎌 결국 친구 몇 명을 불러들였다.그들 사이엔 이미 연회장의 뒷얘기가 떠돌고 있었다.“어르신이 지분을 신지아 씨한테 준 건 도영이랑 다시 재결합시키려는 술수래.”“그래서 지금 내기판도 열렸대. 과연 두 사람은 재산 때문에 다시 붙을까, 아니면 끝까지 이나은 씨랑 결혼할까에 대해서.”피곤한 웃음과 함께 웃음 섞인 농담이 오갔다.그들은 곧 ‘사소한 내기’를 걸었다.“설마 도영이가 신지아 씨한테 다시 구걸하겠어?”“하, 말도 안 돼. 그 여잔 이미 버린 카드야.”“그래도 지분이 반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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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3화

하민재는 변도영이 이 질문을 던질 거란 걸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그의 눈빛에 담긴 분노와 확신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는 증거였다.결국 하민재는 숨을 고르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신지아 씨였어.”순간 변도영은 두 주먹을 꽉 쥐었고 단 한걸음에 하민재의 앞까지 다가와 멱살을 잡았다.“왜 그런 짓을 했어?”목이 졸려 숨이 막힌 하민재가 간신히 대답했다.“형, 나도 형을 위해 그랬어. 정말이야.”“날 위해서?”변도영이 헛웃음을 터뜨리자 하민재는 겁에 질린 채 대답했다.“형, 혹시 생각 안 해봤어? 그 사고도, 유산도... 혹시 신지아 씨의 자작극일 수도 있잖아.”“뭐라고?”“그날은 나은 누나가 한국에 돌아온 첫날이었잖아. 그런데 하필 그날 신지아 씨가 그 차에 부딪힌다고? 이건 너무 기묘하지 않아?”그는 당당하게 말을 이어갔다.“게다가 유산 후에도 같은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하더라. 난 그게 우연이라고 생각 안 해. 신지아 씨는 나은 누나를 겨냥했던 거야. 하지만 그게 엇나가서 자기 배의 아이까지 잃은 거지. 그 후에 죄책감을 덮으려고 모든 걸 나은 누나 탓으로 돌린 거야. 그게 신지아 씨 스타일이잖아.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여자.”하민재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엔 은근한 확신이 섞여 있었다.“신지아 씨는 5년 동안 집안에만 갇혀 살았잖아. 형이 나은 누나를 감싸던 그 모든 세월 동안 얼마나 눌려 있었겠어? 이젠 터질 때가 된 거야.”하지만 변도영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눈동자 속엔 분노보다 더 깊은 무언가가 번지고 있었다.“그러니까 네 말은 신지아가 질투 때문에 자기 아이와 목숨을 내던졌다는 거야?”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피식 웃었다.“신지아가 어떤 인간이든 그 정도로 어리석진 않아.”그 말엔 분명 단호함이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엔 이미 오래전의 의심이 되살아났다.‘혹시 정말일까?’“형.”하민재가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앞뒤는 상관없어. 정말로 누굴 다치게 하고 싶다면, 운전대가 앞에 있든 뒤에 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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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4화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건 네가 날 속일 이유가 되지 못해.”변도영의 날카로운 시선은 곧바로 하민재를 향했다.“그리고 오늘 그 영상도 네 짓이지?”순간 하민재는 움찔했고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마지못해 낮게 대답했다.“나... 나도 형이랑 나은 누나가 잘 되길 바랐어. 그래서 조금 도와준 거지.”변도영의 눈빛이 한층 더 싸늘해졌다.하민재는 두 손으로 부은 얼굴을 감싸며 말을 이었다.“그런데 누가 알았겠어? 이혼이 진짜 될 줄은. 게다가 그 주식을 신지아 씨한테 넘길 줄은 더더욱...”그는 말끝을 흐렸다.자기 입으로 ‘복잡하게 됐다’고 말하는 순간 자신이 저지른 짓이 얼마나 치졸한지도 깨달았기 때문이다.잠깐의 침묵, 그러다 하민재는 머뭇거리며 조심스레 물었다.“형, 설마 진짜 나은 누나 버리고 신지아 씨랑 다시 만나려는 건 아니지?”그 말에 변도영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그건 정말 찰나의 흔적이었다.곧바로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표정을 정리했다.변도영은 천천히 하민재의 옷깃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그건 내 일이야. 다신 내 일에 끼어들지 마. 그리고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마. 다음엔 오늘처럼 간단하게 끝나지 않을 거야.”그는 그렇게 말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문을 열고 떠났다.문이 닫히자 하민재는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아직도 귓가엔 도영의 목소리가 선명했다.“그건 내 일이야.”그 말의 냉정함 속엔 이상한 흔들림이 섞여 있었다.하민재는 문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설마 진짜로 신지아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건가?”스스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지금껏 자신이 믿어온 변도영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그 눈빛, 잠깐의 흔들림이 너무 낯설었다.이번엔 정말 신지아의 계략이 먹힌 걸까?한편, 병원 밖에서는 양준명이 차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변도영이 병원 문을 나오는 순간 양준명은 마치 낯선 사람을 본 것처럼 숨을 죽였다.밤의 어둠 속에 선 그 남자, 그의 실루엣은 여전히 단호했지만 어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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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5화

휴대폰 화면에 낯선 번호가 떴다.신지아는 잠시 그 숫자들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다가 끝내 거절 버튼을 눌렀다.짧은 진동을 끝으로 찾아온 고요함.전화는 다시 걸려 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한참 동안 휴대폰을 내려다봤다.사실 전화를 건 상대가 누구일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결국 신지아는 코트를 걸치고 문을 나섰다.밤공기가 싸늘했다.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내려가 아파트 단지 입구 쪽의 낡은 공중전화 박스로 향했다.유리문을 밀고 들어가 동전을 넣는 순간까지 손은 떨리고 있었다.신지아는 방금 거절했던 번호를 다시 눌렀다.고이진이 떠난 후, 신지아는 걱정이 돼 사람을 찾아 그녀의 소식을 알아보라고 했었다.하지만 누구도 고이진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고 고씨 가문과 윤재혁이 그녀의 행방을 알까 봐 두려워 이렇게 몰래 찾고 있었다.고이진을 찾는 일에 도움을 준 건 신지아가 가장 믿는 탐정이었다.만약 그 탐정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면 그건 고이진에 대한 중요한 소식이 생겼다는 뜻이었다.평소 같았으면 그녀는 바로 전화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탐정은 다음 날 직접 신지아를 만나 자료를 전달하곤 했다.하지만 오늘 밤은 달랐다.고이진이 보여준 그 귀걸이가 그녀의 심장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이번엔 그냥 넘어갈 수 없어.’결국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전화를 걸었다.“무슨 일이에요?”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신지아는 재촉하듯 물었다.수화기 너머의 여자는 잠시 놀란 듯 멈칫하더니 곧 평정을 되찾고 말했다.“저희가 고이진 씨 행방을 확인했습니다. 지금...”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지아는 바로 끊어버렸다.“구체적인 위치는 말하지 마세요. 지금 괜찮나요? 안전한가요?”잠깐의 정적 끝에 탐정이 조심스럽게 답했다.“제가 확보한 건 반년 전의 사진이에요. 고이진 씨를 본 사람이 있었죠. 당시엔 안전했습니다.하지만 사진이 찍힌 다음 날, 고이진 씨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 후로는 소식이 없어요.”“바다로 나갔다고요?”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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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6화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정신이 없어 보여?”아까 고우빈이 본 건 신지아의 뒷모습뿐이었다.그런데 지금 정면에서 보니 그녀가 얼마나 세게 넘어진 건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턱에는 피가 맺혀 있었고 손바닥과 무릎도 다 까져 있었다.그런데도 신지아는 아픈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았고 지금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전 괜찮아요.”신지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이상하게도 고우빈을 보는 순간 방금까지의 불안과 공포, 그리고 혼란이 현실로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이내 코끝이 시큰해지더니 눈물이 주르르 쏟아졌다.얼굴 위로 따뜻한 액체가 흐르는 걸 느끼자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슬며시 손을 들어 닦으려 했다.그때 고우빈이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신지아에게 내밀었고 그녀는 조용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하지만 눈물은 끊어진 실처럼 멈추질 않았고 온몸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고우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신지아에게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무슨 일이지? 혹시 변씨 가문 때문인가? 아니, 그건 아닐 것 같은데.’그는 방금 변하늘과 헤어졌다.변하늘은 자신에게 더는 신지아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물론 변승주나 고미애가 지분 문제로 불만을 품고 있긴 했지만 이번 결정은 어디까지나 박수미가 내린 것이었다.그들이 어른으로서 체면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노골적으로 그녀를 찾아오진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변도영 때문인가?고우빈은 곰곰이 생각했다.그도 변도영을 자주 만난 건 아니지만 그의 성격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만약 지분 문제로 불만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참았을 리 없다.고우빈은 신지아가 걸어왔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곧, 공중부스 하나가 눈에 띄었다.그때 신지아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진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고우빈은 그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천천히 물었다.“그걸... 어떻게 알아?”신지아는 방금 전 통화 내용을 모두 털어놓았다.그리고 지난 몇 년 동안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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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7화

고우빈의 말을 들은 신지아는 끝내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만약 연성시를 벗어나 윤재혁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녀는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짐이 될 수도 있었다.신지아가 조금 진정된 것을 본 고우빈이 부드럽게 말했다.“일단 올라가서 몸부터 챙겨. 이진이가 네 이런 모습 보면 걱정할 거야.”그제야 신지아는 자신의 상처를 의식했고 따끔거리는 통증도 조금 느껴졌다.고우빈은 그녀를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상처를 정성껏 소독하고 붕대를 감아주었다.그가 일어서서 나가려던 순간 신지아는 고우빈의 옷깃을 살짝 잡았다.“미안해요.”이내 신지아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때 이진이 일에 제가 조금만 더 용기 냈더라면...”그녀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고우빈이 단호하게 잘라버렸다.“그 일은 네 탓이 아니야. 너는 충분히 잘했어.”고우빈은 가만히 신지아를 바라보았다.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어머니의 유언 때문에 윤씨 가문과 세상의 온갖 비난을 견뎌야 했던 신지아였다.그런 상황 속에서도 고이진을 윤재혁의 눈앞에서 빼돌리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그때 신지아는 얼마나 힘들었을까.고우빈은 허리를 숙이고 이마 앞에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귀 뒤로 넘겨주며 계속 말했다.“지아야, 미안해야 하는 건 나야.”그때 그가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고이진의 이상한 낌새를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신지아가 이렇게까지 아프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고우빈은 신지아를 얼마간 다독인 뒤, 그녀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 걸 확인하고서야 방을 나섰다.그날 밤, 신지아는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건 고이진의 창백한 얼굴, 혹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모습뿐이었다.또 한 번은 꿈에서 물에 흠뻑 젖은 고이진이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이런 말을 내뱉기도 했다.“지아야, 너는 꼭 행복해야 해. 난 이제 그만 갈게.”“가지 마!”비명처럼 내뱉으며 그녀는 꿈속에서 벌떡 깨어났고 온몸은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다행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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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8화

이혼?남자 친구?예전 같았으면 변도영은 신지아가 일부러 자신을 자극하려는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하지만 어제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터졌다.그제야 그는 깨달았다.자신이 신지아를 제대로 몰랐다는 사실을.그녀가 언제 진심으로 이혼을 결심했는지, 언제부터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고 다른 남자를 마음에 들였는지.변도영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지만 단 한 가지는 분명했다.그는 이혼하고 싶지 않았다.신지아와 멀어지는 것도, 그녀가 자신을 보지 못하는 눈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도, 다른 남자와 있는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았다.곧, 어제 하민재가 한 말이 떠올랐고 어쩌면 이것 또한 신지아가 자신을 붙잡기 위한 또 다른 덫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엔 그 ‘덫’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변도영은 분노를 삼키며 낮게 말했다.“좋아, 네 말 다 맞다고 하자. 오늘 내가 여기 온 건 부성 그룹의 지분 때문도... 할머니 유언 때문도 아니야.”“그럼 뭐 때문에 오셨어요?”신지아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이미 두 사람 사이에는 이제 그런 얘기들 말고는 남은 게 없었으니까.변도영은 대답 대신 문을 밀어 열려 했고 신지아는 재빨리 발로 문을 막았다.단호한 거절이었다.“안에 누가 있어?”신지아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대꾸했다.“있든 없든, 그건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죠. 잊지 마세요. 우린 이미 이혼했어요. 당신이랑 나는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나는 이혼하기 싫어. 한 달 전 그 교통사고, 그 일로 아이는 목숨을 잃었고 네가 병원에서 쫓겨난 일까지 다 알고 있어. 그 일 때문에 나한테서 도망치고 싶었다면 미안하다고 할게. 그만큼의 보상도 하겠어.”변도영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하지만 결혼은 둘이 하는 거야. 그런데 이혼은 혼자서 결정했다고? 난 동의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아.”신지아는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더니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좋아요. 그럼 당신한테 보상할 기회를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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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9화

신지아는 곧장 계단을 내려갔다.두 번이나 문전박대를 당했으니 이제 변도영도 자존심 때문에 더는 따라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하지만 잠시 뒤, 뒤에서 또렷하게 들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그녀가 고개를 돌려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변도영이 서 있는 걸 발견했다.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며 화분을 만지작거렸다.시선을 교환한 것도 아닌데 묘하게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신지아는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재촉했다.그러자 몇 초 뒤 또다시 뒤에서 들려오는 일정한 발소리.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결혼 생활 5년 동안, 신지아는 변도영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다.그는 언제나 도도했고 냉정했다.늘 신지아가 먼저 다가가 붙잡고 애써야만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리고 그럴 때마다 변도영은 지독하게도 차갑게 밀어냈다.그런 그가 지금은 마치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처럼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물론 변도영이 따라오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굳이 간섭하는 것도 귀찮기에 신지아는 애써 모른 척하며 걸었다.그녀가 계속 걸음을 옮기자 변도영 또한 신지아의 발걸음에 맞춰 걸었다.이상하게도 그마저 따라가는 자신이 우습다는 생각이 스쳤다.사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지금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어젯밤 병원을 나와서 아이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머릿속은 엉망이었다.사고 당시 피투성이가 된 신지아의 모습, 묘비에 새겨진 작고 낯선 이름, 그 모든 게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거기에 그녀가 자신과 이혼했고 이제는 다른 남자와 있다는 사실이 더해졌다.변도영은 미칠 듯이 답답했다.그래서 어젯밤 내내 신지아의 집 아래에서 서성였다.그리고 결국 새벽이 밝기도 전에 문을 두드렸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과를 했다.신지아가 완전히 용서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마음의 문을 조금은 열어줄 거라 생각했는데 오늘의 그녀는 예전에 알던 아내가 아니었다.그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았다.하지만 이상하게도 신지아의 방 안에 다른 남자가 없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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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0화

신지아는 운전에 능한 사람이었다.하지만 가끔 변도영이 본가에서 늦게까지 머물러 집에 돌아가지 못할 때면 그녀는 굳이 회사를 들러 그와 함께 차를 타고 돌아가곤 했다.변도영의 말에 신지아도 그 시절을 떠올렸다.그때의 그녀는 정말 변도영을 좋아했지만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늘 한정되어 있었고,신지아는 그조차 깨뜨릴까 두려워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그래서 언제나 변도영이 남는 자투리 시간에 맞춰 그의 곁에 살짝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단 한마디 말도 오가지 않아도 그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그때의 자신이 지금은 참 우스웠다.신지아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그리고 이내 아까 변도영이 한 말이 떠올랐다.“그래서 이게 저한테 준다는 보상이에요? 제가 아이를 잃은 것에 대한?”신지아가 아니면 이런 행동을 할 이유가 없었기에 변도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솔직히 그건 보상 때문이 아니었다.그저 그녀를 다시 알고 싶었다.이상하게 예전에는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신지아가 이제는 낯설게 느껴졌다.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신지아는 비웃듯 말했다.“변도영 씨, 제가 분명 말했죠? 이나은 씨를 경찰서에 보내서 제 아이의 복수를 해주지 않는다면 그 어떤 보상도, 어떤 미안함도 저는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엔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이 고여 있었다.신지아가 그토록 아끼던 아이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그리고 그 비극을 만든 사람은 단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마음의 짐을 덜고 싶어 했다.그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는 피해자만 알 것이다.“이제 그만 따라오세요.”신지아가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변도영이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끼익!짜증이 난 그녀가 변도영을 욕하려는데 옆으로 한 대의 차가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신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운전석 창문이 내려갔다.운전석에 앉은 윤형우가 검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미소를 지었다.은빛 슈트 차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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