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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쓴 남편의 모든 챕터: 챕터 171 - 챕터 180

194 챕터

제171화

송남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버릇없는 이들을 쏘아보았다.“너희를 배려하는 게 아니야. 너희는 내가 배려할 가치도 없어. 나는 단지 공익 활동 전체의 진행이 늦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을 뿐이야. 너희가 일을 존중하지 않으면, 일도 너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반달 동물원 동쪽 담벼락으로 향했다.머리가 그다지 좋지 않은 미대 학생들은 그제야 송남지에게 혼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은 누군가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흥, 잘난 척은. 자기가 시댁에 쫓겨난 건 생각도 못 하나 보네. 저 여자 말대로라면 시댁에서 쫓겨난 것도 시댁을 먼저 존중하지 않아서 그런 거겠네!”“맞아, 어떤 사람들은 나이만 믿고 깝죽거린다니까.”양서진은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너희들 도대체 일할 거야 말 거야? 일 안 할 거면 다 학교로 돌아가!”그들은 만만한 사람만 골라서 괴롭히는 듯했다. 송남지는 만만해 보이니까 덤볐지만 양서진은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양서진은 누가 봐도 호랑이 같은 성격이었다.해가 중천에 뜬 시간.한여름의 태양은 마치 심술궂은 계모처럼 매섭게 내리쬐었다.송남지는 오늘 특별히 회색 티셔츠에 짙은 색 청바지를 입고 벽화 작업을 할 담벼락 앞에 섰다.먼저 청바지 주머니에서 검은색 머리끈을 꺼내 어깨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모아 잡더니 순식간에 높이 묶은 포니테일 스타일로 머리를 묶었다.양서진은 몇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송남지를 바라보았다.‘저런 능숙한 모습만 봐서는 어딜 봐서 롤스로이스에서 내린 여자라고 생각하겠어. 영락없이 갓 고등학교 졸업한 새내기 대학생 같잖아.’특히 머리를 질끈 묶고 휴대폰을 청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은 채 고개를 숙여 물감을 조색하는 모습을 보며 양서진은 마치 미대 입시 반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너무 풋풋해 보였다.그녀는 아까 송남지를 비웃던 3학년 학생들을 다시 한번 힐끗 쳐다봤다. 왠지 모르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나이는 송 선배보다 훨씬 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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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2화

양서진은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찌는 듯한 더위에 모두가 지쳐서 쉬고 싶어 하는데, 송 선배는 굳이 일을 끝마치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으니 말이다.재능은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지만 남들이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려면 남들이 견딜 수 없는 끈기가 필요한 법이었다.양서진은 한숨을 내쉬며 시원한 물 한 병을 들고 송남지에게 다가갔다.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송남지의 얼굴은 이미 오색찬란한 물감으로 얼룩덜룩했다. 마치 송남지가 그린 판다와 똑같았다.“선배님, 잠깐만 쉬면서 물이라도 드세요. 땀을 너무 많이 흘리셔서 탈수라도 오면 어떡해요? 저 책임 못 져요.”송남지는 물병을 받아 뚜껑을 열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거의 한 병을 다 비울 기세였다.양서진은 벽에 그려진 그림을 감탄하며 칭찬했다.“역시 서경 미대의 모네는 다르네요. 빛과 그림자의 조화가 정말 환상적이에요! 그리고 이 아기 판다가 대나무를 먹는 모습은 어떻게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있죠?”양서진의 칭찬에 송남지는 기쁜 듯 미소지으며 말했다.“서경 미대의 모네는 그냥 장난으로 붙여준 거야. 나를 모네와 비교하지 마. 몸 둘 바를 모르겠어.”말을 마친 송남지는 아직 미완성인 벽면 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울창한 대나무 숲을 그려 넣어야 했다.대나무 숲은 송남지의 그림 실력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인위적인 느낌 없이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려면 빛과 그림자의 조화를 완벽하게 표현해야만 했다.송남지는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이 그린 그림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통통한 아기 판다가 대나무 잎을 든 채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모습은 정말 깜찍했다.하지만 그것은 송남지의 재능으로만 귀결될 수는 없었다.그것은 그녀가 어젯밤 몇 시간 동안이나 동영상을 보며 연구한 결과였다.물을 마신 후 송남지는 다시 벽화 그리기를 시작했다.붓은 그녀의 손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였고 짙은 색 데님 바지에는 여기저기에 물감이 묻어 단순한 스타일에서 트렌디한 스타일로 변모했다.해가 뜨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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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화

송남지는 뒤를 돌아봤다.그녀는 수수한 옷차림에 얼굴과 옷에는 온통 물감이 묻어 있어 눈앞의 여자애와 비교하면 다소 초라해 보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없이 독립적이었고 특유의 날카로움마저 서려 있었다.송남지의 아우라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단 한 번의 눈빛만으로도 방금 그 여자애를 압도하고도 남았다.“괜찮아, 데리러 오는 사람 있어.”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사실 그녀는 이미 너무 지쳐 있었다. 누구와도 상대하고 싶지 않았고 그저 그늘진 곳에 얌전히 앉아서 하정훈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싶을 뿐이었다.하지만 그 여자애는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도대체 왜 이제 겨우 스무 살인 내가 과부가 된 송남지보다도 더 늙어 보이는 거란 말인가.’“선배님, 데리러 오는 분 있는 거 알아요. 그리고 선배님이 남편분과 사별하신 것도 알고요. 예전에는 재벌 2세와 결혼해서 고급차를 타셨겠지만 지금은 혼자가 되셨으니 고급차는 못 타시겠죠. 그러니 우리 집 차라도 타세요. 우리 집 차도 몇억은 나가니까 나름대로 고급차라고 할 수 있어요.”송남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에게 힘이 있다면 오직 자신의 그림에만 쏟고 싶었다.하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그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눈앞에서 시건방지게 굴고 있는 저 여자애는 자신이 상대해야 할 그림도 아니었다.그녀는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하지만 양서진은 송 선배가 너무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대신 나서서 따지기 시작했다.“온혜정! 너 좀 정상적으로 행동할 수 없어? 결국 자랑하고 싶은 건 너희 집에 기사 있고 몇억짜리 차로 데리러 온다는 거잖아? 꼴불견이야, 마치 너희 집만 그런 것 같잖아.”양서진은 온혜정 따위와 그런 거로 경쟁하고 싶지 않았지만 저 죽일 년은 너무 열 받게 했다.뭐만 있으면 있는 대로 다 뽐내고 싶어 안달이 난 꼴이었으니 말이다.요즘 서경시에서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거의 대부분 몇억짜리 차는 한 대씩 가지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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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4화

온혜정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창문을 열고 밖을 향해 말했다.“얻어 타는 주제에 뭘 그렇게 튕겨요? 탈 거면 빨리 타고, 안 탈 거면 우리 가요.”송남지는 계속해서 재잘거리는 온혜정을 힐끗 쳐다보며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내가 너랑 친한 사이야? 아까부터 계속 혼자 떠들고 있는데 내가 대꾸라도 했어? 아니면 내가 뭔가 착각할 만한 행동이라도 했었나?”“네?”온혜정은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송남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송남지의 거침없는 말과 무시하는 듯한 태도는 온혜정의 자존심을 짓밟는 것과 같았다.온혜정은 순간 격분하여 송남지의 코앞을 가리키며 소리쳤다.“흥, 좋게 대해주니까 아주 기고만장하네요! 그쪽처럼 남편 잃은 사람은 재수 없어서 태우기도 싫어요!”온혜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양서진은 아침에 보았던 롤스로이스에서 한 남자가 내리는 것을 보았다.남자는 키가 187cm 정도 되어 보였고 마치 잡지에서 튀어나온 모델 같았다.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CK 속옷 광고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온 듯한 탄탄한 몸매가 눈에 띄었다.걸음걸이는 다소 급해 보였는데 하얀 셔츠 너머로 탄탄한 복근과 남성적인 매력이 은근히 드러났다.그는 셔츠 소매의 단추를 풀고 소매를 팔꿈치 위로 걷어 올렸다.그는 원래 송남지를 가리키는 손을 망설임 없이 쳐냈어야 했다. 하지만 하정훈은 잠시 망설인 후에 쳐냈다.그의 손으로 저렇게 더러운 것을 만지는 것은 정말 역겨운 일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감히 그의 여자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꼴은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대체 누구한테 감히 손가락질이야?’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반은 롤스로이스를 향해 있었고 나머지 반은 하정훈을 향해 있었다.하정훈이 온혜정의 손을 매몰차게 쳐내자 양서진은 입을 틀어막으며 감탄했다.“대박! 너무 멋있어! 저게 바로 진정한 남친미라는 건가!”온혜정은 손이 얼얼해져 풀이 죽은 채 차창에 기대어 있었다.하정훈은 고고한 자세로 팔짱을 끼고 몸을 숙여 운전기사를 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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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5화

송남지는 가끔 하정훈이 던지는 질문들이 사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마치 예전에 소파에서 할지 침대에서 할지 물었던 것처럼 말이다.지금도 마찬가지였다.하정훈은 그저 그녀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는 것뿐이었다.몇 초 후, 그의 얇은 입술이 송남지의 입술에 살짝 닿았다. 송남지는 뽀뽀를 받느라 얼떨떨해졌고 심지어 밖에서 환호하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이미 차에 탔던 온혜정은 자기 집 운전기사를 괜히 타박하다가 누가 저렇게 허세를 부리나 싶어 차에서 내렸다.양서진은 차에서 내려 다가오는 온혜정을 보며 팔짱을 끼고 콧방귀를 뀌었다.“나라도 롤스로이스가 데리러 오면 네 낡은 BMW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야. 작작 좀 해! 선배가 너 상대하기도 싫어하잖아.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빨리 집에 가!”온혜정은 차 안에서 키스하는 두 사람을 보며 이를 갈며 발을 동동 굴렀고 빈정거리는 말투로 비꼬았다.“송 선배는 예전에 돈 보고 결혼한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편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다른 남자를 꼬시고 다니는 거래요? 혹시 명문가 사모님 양성코스라도 밟은 건가?”양서진은 저렇게 뻔뻔한 사람은 처음 봤다. 그녀는 온혜정 앞으로 성큼 다가가, 뒤돌아보며 경멸하듯 말했다.“이건 돈 주고도 못 보는 진귀한 구경거리거든? 얼른 꺼져, 분위기 망치지 말고. 안 가면 임 교수님께 네가 오늘 벽화 봉사 활동에 참여하면서 햇볕 쬐기 싫어하고 옷에 물감 묻는다고 징징거렸다고 죄다 이를 거야. 졸업하기 싫어?”온혜정은 즉시 입을 다물고 풀이 죽어 차에 올라탔다.하정훈은 송남지에게 몸을 기울여 손을 뻗어 차창을 모두 닫았다.아쉬움과 미련이 가득한 키스를 마친 그는 손을 들어 송남지의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더운 날씨 탓에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정리한 후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이제 안 보이니까, 대답해 줄 수 있어?”송남지는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다만 그녀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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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화

“이거 네가 그린 거야?”송남지는 고개를 들어 벽화를 바라보았다. 푸르른 대나무와 판다의 검은색과 흰색이 선명하게 대비되는, 그녀 특유의 화려한 색감이었다.그녀는 추측하듯 말했다.“내 몸에 묻은 물감 보고 짐작한 거죠?”역시 하정훈답게 관찰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하정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 네 그림 스타일을 보고 알아낸 거야.”그는 벽화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석양의 잔광 속에서 빛과 그림자가 조화를 이루며 더욱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하정훈은 고개를 숙여, 물감이 잔뜩 묻은 그녀의 가느다란 손을 바라보았다. 햇볕에 오래 노출된 탓에 물감이 그녀의 피부에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그는 그녀의 재능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팠다.“정말이지, 신이 내린 손재주야.”하정훈은 좀처럼 남을 칭찬하는 법이 없었다.송남지는 서경 미대를 다닐 때 귀가 닳도록 칭찬을 들어왔지만 그때마다 겸손하게 몸을 낮추며 그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다고 답하곤 했다.하지만 하정훈의 진심 어린 칭찬은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고 자부심을 느끼게 해 주었다.하루 종일 쏟아낸 땀과 노력이 그 순간 모두 보상받는 듯한 기분이었다.그때, 양서진에게서 온 카톡 메시지가 도착했다.송금 내역과 짧은 메시지가 덧붙어 있었다.“선배님, 이건 저희가 약속한 작업 보수예요!”하정훈은 송금 내역을 슬쩍 곁눈질하며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양서진? 남자 이름 같지는 않은데.”송남지 또한 궁금했던 점을 꺼내어 물었다.“그러게요. 분명 여자애인데, 곽지민은 왜 자꾸 훈남이라고 한 걸까요?”송남지는 의아했지만 하정훈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곽지민, 그 녀석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하정훈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생각했다.‘뭔가 꾸미려면 뒷감당할 자신부터 있었어야지.’하정훈은 차에 시동을 걸었고 반달 동물원의 벽은 석양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이번 작업 보수는 어떻게 쓸 거야? 아니면 오늘 보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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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7화

하정훈은 차를 몰아 송남지를 서경시에서 가장 비싼 지역으로 데려갔다.차가 서경의 명주 미래 타워 주차장에 멈추자 송남지는 속으로 약간 움츠러들었다.‘60만 원으로 이곳에서 밥을 먹을 수 있을까?’서경시 토박이인 송남지는 미래 타워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이곳은 사치의 극치를 달리는 곳이었다.미래 타워에서는 매일 밤 단 한 팀의 손님만 받았다.하지만 이미 저녁을 사겠다고 약속했으니 이제 와서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이었다.송남지는 멋쩍게 말했다.“정훈 씨, 우리 예약 안 했는데.”그녀는 예약을 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며 하정훈이 다른 곳으로 가기를 은근히 바랐다.하정훈은 차에서 내려 조수석으로 돌아가 송남지를 위해 문을 열어주며 씩 웃었다.“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게.”그가 알아서 한다고 하니 송남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미래 타워에는 꼭대기 층까지 바로 연결되는 전망 엘리베이터가 있었다.송남지는 서경시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을 내려다보며 황혼과 밤이 교차하는 성대한 의식을 감상했다.동시에, 속으로는 오늘 저녁 식사에 대체 얼마가 들지 계산하고 있었다.결코 그녀가 인색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늘 번 돈으로는 분명히 턱없이 부족할 것이 뻔했기에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나중에 계산할 때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과연 하정훈이 말한 대로였다.그는 정말 방법이 있었다.제복을 입은 웨이터가 정중하게 인사하며 길을 안내했다.“하 대표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하정훈은 송남지의 손을 잡고 곧장 꼭대기 층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송남지는 고개를 돌려 투명한 유리로 된 레스토랑을 바라보았고,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더러운 물감 자국을 발견했다.‘맙소사! 옷을 갈아입는 것을 깜빡했잖아!’송남지는 민망한 듯 하정훈의 손을 살며시 놓으며 말했다.“정훈 씨, 화장실에 잠깐 다녀올게요.”하정훈은 아무런 이상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에게는 송남지의 옷에 묻은 물감 자국이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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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8화

일찍이 윤씨 가문에 있을 때부터 송남지는 허상미가 이 앱에 재력을 과시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일부러 티를 팍팍 내는 전형적인 얄팍한 수작으로 윤씨 가문의 정원을 은근히 자랑하곤 했던 것이다.[서경시에서 수백억대를 호가하는 저택]게시물 제목은 늘 이런 식이었다.송남지는 그때, 자랑할 게 없어서 저런 낡은 집을 자랑하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허상미는 겉으로는 욕심 없는 척, 청렴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이 재벌가 며느리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속물이었던 것이다.송남지는 대수롭지 않게 허상미의 게시물을 훑어보았다.그러다 문득 낯익은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분명 미래 타워의 레스토랑이었다. 게시 날짜를 확인해보니 바로 방금 전이었다.‘허상미도 여기 있다는 뜻인가?’송남지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허상미의 게시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머리가 모자이크 처리된 자신의 임신 사진과 윤해진의 뒷모습, 그리고 레스토랑 창밖 풍경 사진까지. 사진 속에는 성은 그룹 빌딩도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무조건적으로 나만을 아껴주는 남편이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예약이 늘 꽉 차 있는 서경의 명주 미래 타워의 레스토랑, 갑자기 먹고 싶다고 하니 남편이 바로 데려와 주네요!]허상미가 올린 글의 내용이었다.마침 댓글에는 미래 타워의 레스토랑 가격이 얼마나 비싼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송남지는 댓글들을 대충 훑어보며 시간을 때웠다.그러다 허상미를 찬양하는 댓글들 틈바구니에서 한 줄기 빛과 같은 정보를 발견했다. 물론, 그 댓글에도 허상미에게 아부하는 뉘앙스가 짙게 배어 있었다.[상미여화님은 역시 재벌가 며느리시네요. 1인당 4백만이 넘는 초호화 레스토랑에 쿨하게 데려다주시는 우리 남편분, 넘 멋져요!]송남지는 댓글을 읽다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저 댓글, 설마 허상미 본인이 쓴 건 아니겠지? 말투가 어쩜 저렇게 똑같을까. 우리 남편분...’송남지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그녀는 재빨리 앱을 닫았다. 조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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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9화

윤해진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연민과 가짜 선의에 송남지는 속이 메스꺼워 견딜 수가 없었다. 다행히 많이 먹지 않아서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윤해진에게 그대로 토해버렸을지도 모른다.“막노동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불만이라도 있어요? 그분들이 없었다면 당신이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미래 타워가 어떻게 지어졌겠어요? 나잇값 좀 하세요. 말하기 전에 생각을 좀 하고!”윤해진은 불쾌한 표정으로 송남지를 쏘아보았다.그는 송남지가 윤씨 가문에 깊은 원한을 품고 있기에 저런 식으로 자신에게 쏘아붙인다고 생각했다.“송남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네가 이렇게까지 망가졌다는 게 문제지. 윤씨 가문에 있을 때는 이런 일 할 필요도 없었잖아. 지금 네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지 알아? 나를 차단 해제해. 내가 돈 좀 보내줄게. 앞으로는 이런 더럽고 힘든 일 하지 마.”그렇게 말하며 윤해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고는 송남지가 꼬리를 내리고 그를 차단 목록에서 풀어주기만을 기다렸다.송남지는 윤해진의 돈은 절대 받을 수 없었다. 그 돈은 돈이 아니라 윤해진이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히기 위한 일종의 계약금과 같았기 때문이다.“내가 윤씨 가문에 있을 때 그림 그리는 일을 하지 않은 건 당신네 윤씨 가문이 아직 조선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에요. 당신 어머니 손 여사는 며느리가 바깥에서 일하는 걸 윤씨 가문의 수치라고 생각하잖아요. 나는 지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있어요. 그러니 초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적어도 지금 내 남편은 조선 시대가 이미 망했다는 건 알고 있거든요.”송남지는 거의 망설임도 없이 쏟아내듯이 그 말들을 다 내뱉었다.“그리고요. 윤 대표님, 좀 비켜주시겠어요? 저는 그쪽과 어떤 신체 접촉도 하고 싶지 않거든요. 괜히 임신 막달인 당신 부인이 보면 태아에게 안 좋을까 봐 걱정돼요. 저는 윤씨 가문의 귀한 핏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책임질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저 지금 밥 먹을 시간이니까, 제 식사 시간을 방해하지 마세요!”“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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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0화

그가 다가서며 능글맞게 송남지의 손을 잡아끌었다.“송남지, 제발 날 차단 좀 풀어줘. 내가 돈 좀 줄게. 많지는 않아도 지금 너보단 훨씬 나을 거야. 꼴사납게 이러지 말고. 상미 배 속의 아이가 태어나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너도 그 고생 안 해도 되고...”송남지는 있는 힘껏 손을 빼냈다. 움켜쥔 손아귀 힘에 손목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윤해진이 바싹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혹시 저 인간, 허상미가 애를 낳으면 다시 윤해진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지내자는 건가? 내가 감격해서 눈물 글썽이며 윤씨 가문에 감사라도 할 줄 아나 보지? 어처구니가 없네. 기가 막혀.’말로는 도저히 통할 것 같지 않다고 판단한 송남지는 역겨움을 억누르며 윤해진의 옆을 비집고 지나가려 했다.그러자 윤해진은 잽싸게 팔을 뻗어 그녀를 가로막았다.송남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쏘아붙였다.“진짜 갈수록 가관이네요. 얼른 안 비켜요? 징그러워 죽겠어, 진짜!”윤해진은 작정이라도 한 듯 뻔뻔하게 말했다.“네가 차단만 풀어주면 비켜줄게. 진심으로 네가 이 힘든 시기 잘 넘기길 바라는 마음이야. 이렇게 초라하게 살지 않길 말이야...”송남지는 망설임 없이 무릎으로 윤해진의 급소를 걷어찼다.“으악!”윤해진은 고통에 겨워 팔을 움츠리며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웅크린 채 앓는 소리를 냈다.그 틈을 타 송남지는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다.저런 짐승 같은 놈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짐승이 어떻게 사람 말을 알아듣겠는가?하지만 짐승도 아픔은 느끼는 법. 이 방법이 제일 효과적이었다.레스토랑 안.하정훈은 이미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다가 도대체 왜 이렇게 늦나 싶어 나가보려고 하던 참이었다.막 일어나려는데, 송남지가 빠른 걸음으로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레스토랑에는 테이블이 하나밖에 없었기에 송남지는 재빨리 목적지를 찾아냈다.마치 악귀라도 쫓아오는 듯 발걸음이 걷잡을 수 없이 빨랐다.하정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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