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의 모든 챕터: 챕터 511 - 챕터 520

631 챕터

제511화

관사들은 하나같이 오래 이 일을 해온 늙은 여우들이었다. 게다가 수년 동안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굴어 온 터라 아직 어린 아설에게 순순히 복종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결국 모두가 일을 미적거리며 버틸 것이고 아설 혼자서는 사방에서 몰려드는 손을 감당하기 어려울 터였다. 그러나 이 고비만 넘겨 이 늙은 관사들을 꺾어 놓는다면 그때부터 아설은 진짜 대행상이 될 것이 분명했다.“좋아, 나는 그저 은전이나 세고 있으면 되겠네.”맹 가에는 점포도 많고 논밭과 장원도 많았다. 하연은 떠날 때, 맹 장군이 맡겼던 수북한 점포와 장원 문서까지 전부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그것들을 직접 관리할 생각도, 관리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에 그저 아설처럼 수익만 나누어 받으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시은은 모든 점포를 하나의 상행으로 통합해 모든 관사와 점원, 장부 담당들을 전부 상행 아래에 두고 자신은 마지막 총장부만 보면 되게 만들었다. 지금 가장 바쁜 사람은 아설이었다.류영을 따라붙였던 호위가 돌아와서는 말했다.“아가씨, 현재까지는 류영에게서 특별한 움직임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류영의 아버지는 성격이 무던하고 우직한 사람으로 보였고 도박에 빠진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다. 너는 먼저 가서 쉬거라.”다음 날, 류영이 돌아왔다. 집안에 사람이 절반 이상 사라진 것을 보고 잠시 멈칫하자 마당을 쓸던 어린 하녀가 맹 장군과 세자 모두 임지로 돌아갔기에 지금은 아가씨와 아이 둘만 있다고 말해주었다. 류영은 무언가를 곱씹듯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은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 역시 알아채지 못했다.“단비영, 이 천벌 받을 놈아. 나는 네 어머니다.”단 가의 집은 이미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마당에는 푸른 벽돌이 깔렸고 집 안에는 새 가구들이 들여져 있었다. 노부부는 평소 명절에도 아까워서 못 입던 새 옷까지 차려입고 있었다. 큰아들은 한 달에 열 냥을 벌고 둘째는 세 냥을 벌었다. 한 달에 모두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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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2화

“아가씨, 이건 예상산장에서 보낸 초대장입니다.”류영이 정교한 초대장 한 장을 들고 들어왔다. 보통의 초대장과 달리 그 위에는 금분으로 목단 한 송이가 그려져 있었고 보기만 해도 다른 것보다 훨씬 귀티가 돌았다.“이 예상산장은 어떤 곳이냐?”시은은 붓을 내려놓고 손을 씻은 뒤에야 초대장을 받아 들었다.“작년에 새로 문을 연 자수 공방입니다. 양식이 참신해서 경성의 아가씨들이 많이들 사 간다고 합니다. 예상산장의 초대장은 아무나 받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아가씨도 가시겠습니까?”“가지, 왜 안 가겠니.”이렇게까지 공을 들여 보내온 초대장인데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시은은 예상산장이 바로 자림원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정원은 염색방과 수방으로 나누어졌을 뿐, 예전의 배치와 다름이 없었다. 정원 전체에 아가씨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그녀의 시선은 예전에 소림을 만났던 그 정자로 향했다. 그 정자 위쪽으로는 숨겨진 누각이 하나 더 있었고, 그 안에는 소휘가 기르던 호랑이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 호랑이가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시은 아가씨, 평안하십니까?”시은을 바라보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사람들은 모두 시선을 피하느라 바빴지 이렇게 다가와 인사하는 이는 오직 이 소녀 하나뿐이었다. 시은은 그녀를 알지 못했다.“아가씨도 평안하십니까?”상대가 자기를 모른다는 것을 알자 소녀는 스스로를 소개했다.“저는 신무후부 차 씨 집안의 다섯째입니다. 시은 아가씨께서는 저를 사융이라 부르시면 됩니다.”차 씨 집안이라... 시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사융 아가씨, 저를 그냥 시은이라 하셔도 됩니다.”차사융은 눈을 휘어 웃으며 말했다.“그럼 은이 언니라고 부르겠습니다.”그녀의 시선을 옆쪽으로 슬쩍 보냈다.그쪽에는 차윤서와 주종현, 그리고 여러 남자 손님들이 모여 있었다. 오라버니가 부탁한 일이 이렇게 쉽게 이루어질 줄도 모르고 여러 물건을 달라고 부탁했으니... 이제는 가지러 가기가 부끄러워질 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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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3화

아설을 데려올 걸 그랬다. 이런 자리는 한 번쯤 눈으로 직접 보게 해 줬어야 했는데. 류영은 눈앞의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듯한 시은을 힐끗 바라보더니 재빨리 문 쪽에 서 있던 하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하녀는 찻잔을 들고 사람들 사이를 자연스럽게 가로질러 다가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맞닿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하녀가 마치 무엇에 발이 걸린 것처럼 앞으로 휘청이며 넘어졌다.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감과 동시에 시은은 마치 무언가를 발견한 듯 사선 앞으로 몇 걸음 빠르게 옮기며 분홍빛 연꽃무늬의 비단을 붙잡았다.“이 색감이 참 곱네.”그녀는 찻물을 정확히 피해 갔다. 그러나 그 찻물은 방금까지 그녀 옆에 서 있던 한 부인의 얼굴 위로 고스란히 쏟아졌다.“아악!”날카로운 비명이 홀 안의 대화와 음악을 단번에 끊어 놓았다. 모든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고 시은도 마치 이제야 알아차린 사람처럼 고개를 돌렸다.“죽을죄를 지었습니다.”하녀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엎드렸다. 그 부인의 시녀가 즉시 손을 들어 하녀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차를 들고 다니다니. 끓는 물이 우리 부인을 다치게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리하느냐!”소동을 들은 예상산장의 여주인이 급히 달려 들어왔다.“이게 무슨 짓이냐? 이 안에는 차를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하녀는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맹 아가씨께서 차를 달라고 하셔서…”목소리는 작았지만, 주위 사람들 귀에는 또렷이 들렸다. 이 자리에 맹 아가씨라면 시은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시은이 가볍게 웃었다.“나는 차를 시킨 기억은 없는데.”하녀는 시은이 차를 시킨 적이 없다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저 누군가가 시은한테 찻물을 뿌리고 그 과책 역시 그녀한테 뒤집어 씌워라고 지시를 하였을 뿐이었다. 비록 지금 찻물을 뒤집어쓴 사람은 시은이 아니지만 과책은 확실히 그녀한테 뒤집어 씌웠으니 계획이 완전히 틀어진 것은 아닌 셈이었다. 차를 맞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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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4화

예상산장에서 벌어진 그 일 이후, 경성의 훈귀들은 맹 가의 시은을 다시 보게 되었다. 류영은 뒤뜰을 한 번 돌아본 뒤,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류영 아가씨, 어디 가십니까?”칠 백부는 덮개가 씌워진 작업실에서 나무 상자를 들고 나오며 말을 걸었다. 상자 안에는 망치와 톱 같은 연장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집 안의 책상이며 의자가 망가지면 늘 그의 손을 거쳤다. 다리가 예전 같지 않게 된 뒤로는 이런 자잘한 일에 더 매달리게 된 셈이었다.그는 막 재목과 공구가 쌓인 방에서 나오다 서두르는 류영을 마주쳤다. 류영은 그를 보지 못하고 있다가 흠칫 놀라더니 이내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앞거리 백마골목 재단사에게 맞긴 겉옷이 있어서요. 그걸 좀 보러 가는 길이에요.”칠 백부와 인사를 나눈 뒤, 그녀는 곁문으로 몸을 날리듯 빠져나갔다. 진국공부의 옆에는 실로 재단사 가게가 하나 있었다. 류영은 그 가게로 들어갔다가 뒷문으로 빠져나와서는 바로 옆 상가 거리로 나왔다. 주변을 경계하듯 한 번 훑어본 뒤, 그녀는 인파 속으로 스며들어 곧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 흔적 없이 섞여 버렸다. 길가에 수수한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류영은 고개를 숙인 채 그 안으로 올라탔다. 마차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류영은 마차에 오른 후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지안이 소매 속에서 귀걸이 한 쌍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너를 위해 따로 챙겨 온 것이다.”류영은 코웃음을 쳤다.“저에게 그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몇 번이나 저를 위험에 몰아넣은 분을 따라다니다가는 더 빨리 죽겠습니다.”고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귀걸이를 쥐여 주었다.“이게 뭔지 보고싶지는 않느냐?”류영이 손바닥을 펼쳤다. 붉은 옥으로 만든 귀걸이 한 쌍이었다. 그녀의 입가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이 귀걸이는 그녀가 고 가에 있을 때부터 갖고 싶어 했던 것이었다. 세자비가 한 쌍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막 들어온 어린 하녀에게 하사되었다. 지금 손에 쥐어진 이 귀걸이는 그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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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5화

만약 주종현의 딸이 그를 아버지라 부른다면… 그 상상을 떠올리는 순간, 고지안의 눈빛에 번지는 웃음이 한층 더 깊어졌다. 그는 귀걸이를 달고 흐뭇해하는 류영을 흘끗 보았다.“지금이 딱 꽃구경하기 좋은 때다. 곧 백마사의 벚꽃이 필 테지. 귀에 바람 좀 불어 넣어라. 일이 끝나면 네 몫은 확실히 챙겨 주마.”류영은 귀걸이를 단단히 고쳐 끼운 뒤, 고지안을 바라보았다.“세자께서 설마 이 신흥 귀인을 들이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그렇다면 맹 장군을 너무 얕잡아 보신 겁니다. 아직 아이가 있을 뿐이지, 설령 아가씨의 미모가 빼어나지 않았다 해도 맹 장군께서는 절대 그녀를 첩으로 들이게 두지 않을 거예요.”고지안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코끝을 가볍게 건드렸다.“그럼 이렇게 생각하거라. 네가 가장 떳떳하게 내 곁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이라고.”류영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아주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류영은 오래 머물 수 없었기에 곧 마차에서 내려 길 건너편으로 향했다. 마침 맞은편 가게에서 나오던 주온청이 한눈에 류영을 발견했다. 그녀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곁에 있던 시녀가 낮게 말했다.“셋째 마님, 마차를 모는 자는 외원에 있는 동자입니다.”마차 자체는 흔했지만 마부는 분명 흥양후부의 사람이었다.주온청은 입술을 단단히 다물었다.“이미 내쫓긴 사람을 누가 다시 만나겠어.”하지만 그녀는 곧 답을 알게 되었다. 그녀와 고지안이 거의 동시에 부로 돌아왔고 고지안의 마차를 모는 이가 바로 외원의 동자였다는 것을.“셋째 부인, 세자셨…”시녀가 숨을 삼키며 말했다. 류영이 쫓겨나던 날, 일이 얼마나 추했는지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주온청의 소행이라 여겼지만 실상은 곧은 성정의 주온청이 큰마님을 대신해 욕을 뒤집어쓴 것이었다. 지금은 온 부안에서 주온청을 질투 많은 여인이라 수군거렸다. 시집온 지 반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이도 없으면서 셋째 공자가 첩을 들이는 것도 막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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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6화

고지용은 주온청의 허리를 움켜쥐더니 단번에 책상 위로 들어 올렸다. 막 그녀의 향기를 훔치려는 순간,“비켜요, 급한 일이 있어요.”주온청은 남편이 내민 입술을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말했다.“저녁에 기다리지 마세요.”그녀는 책상에서 훌쩍 내려 바람처럼 밖으로 뛰어나갔다.“대체 무슨 일이 나보다 더 중요하단 말이야?”고지용은 불만을 토로했지만 이미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주온청은 진국공부로 가지도 않았고, 정식으로 방문장을 넣지도 않았다. 그녀는 지난번에 시은을 보았던 바로 그 점포로 곧장 향했다. 점포의 장사는 예전만 못해 보였고 점원들의 태도도 늘어져 있었다. 주온청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누구 하나 제대로 쳐다보는 이 없었다.이 일대의 여러 점포는 서로 통로로 이어져 있었고 뒤쪽에는 넓은 공동 마당이 붙어 있었다. 안으로 몇 걸음 옮기자 그쪽에서 고성이 들려왔다.“난 더 못 해먹겠다.”“나도 그만둘 거야!”점포의 점원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마오랑 애들도 나간대, 너도 갈 거야?”“우리 어머니께서 아직 병환 중이라 여길 나가면 이런 월급 받는 데 또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원 장객이 새 주인장을 삼았대. 나더러 그쪽으로 오라더라.”남겠다는 사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그쪽은 급여가 절반밖에 안 된다던데, 다들 흥분하지 마.”“나도 나갈거야. 왜 우리가 그런 어린 여자 밑에서 일해야 해!”“그러게 말이야.”주온청은 그들을 힐끗 보더니 곧장 뒷마당으로 향했다.“부인, 뒤쪽은 출입하시면 안 됩니다!”뒤늦게 알아차린 점원이 막아섰지만 이미 늦었다. 뒷마당에는 다섯여섯 명의 점원이 한 여인을 에워싸고 있었고 바닥에는 장부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설강.”주온청이 불렀다.“그날은 그렇게 기세등등하더니 오늘은 이런 애들한테 겁먹고 있는 것이냐?”모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주온청은 뒤에 서 있던 자신의 시녀를 향해 말했다.“진국공부에 사람을 부르러 가지 않고 무얼 하느냐?”“예.”시녀는 주온청을 한 번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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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7화

초봄이라 겨울처럼 매섭지는 않았지만 바깥에 나서려면 여전히 솜저고리는 필요했다. 마차는 관도를 따라 덜컹이며 달리고 있었다. 아설은 무릎 위의 바구니에서 향과 촛불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었고 류영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아설 아가씨, 꽃구경을 간다면서 향과 촛불을 이렇게 많이 가져가는 이유가 뭐예요?”아설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그래요. 꽃이 뭐가 그렇게 대수겠습니까? 백마사 재신전이 그렇게 영험하다면서요. 이번엔 제대로 빌 생각입니다.”예전 영국공부에 있을 때는 장사라는 것이 어떤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람을 따라 경성을 떠난 뒤, 그녀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보았다. 그녀 손에서 나간 돈만 해도 수만 냥이었고, 되돌아온 돈은 십만 냥에 가까웠다. 지금 아설의 금고는 예전의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두둑해졌다.꽃구경이 무슨 소용인가? 돈이 최고였다. 다만, 이 점포들의 점원과 관사들이 이렇게 다루기 힘들 줄은 몰랐다. 곡창에 있을 때는 일이 힘들었지만 노동자들은 포대 수만큼 품삯을 받았고 이 점원들처럼 말썽을 부리지도 않았다.“그럼 이따가 시주를 좀 넉넉히 하도록 해. 연말에 돈 세기를 기다리고 있거든.”류영은 속으로 그 말을 비웃었다. 전날 백마사에 꽃 보러 가자고 했을 때 그렇게 선뜻 승낙하더니 결국은 재물신에게 절하러 가는 길이었다. 누가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이 아니랄가봐, 그 많은 재산에 맹 장군의 권세까지 등에 업고 있으면서도 머릿속엔 오직 돈 생각밖에 없었다. 이런 사람이 과연 세자의 도움이 될 수 있을까?하지만 그녀는 곧 생각을 바꿨다. 이렇게 돈에 집착하는 속물일수록 오히려 다루기 쉬운 법이었다. 훗날 시은과 세자비가 다투게 된다면 마지막에 웃게 될 사람은 결국 자신이 될 테니까.시은은 상상에 빠진 류영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웃음이 스쳤다.마차가 백마사 아래에 도착했다. 백마사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향불을 피우러 오는 사람들로 늘 붐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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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8화

“가자.”시은은 몸을 돌려 다시 산길을 올랐다. 걸음은 아까보다 한층 더 빨라져 있었다. 류영은 순간 반응이 늦어 거의 놓칠 뻔했다. 산 위의 풍경은 과연 달랐다. 온 산이 연분홍 꽃 향으로 가득했고 긴 회랑 위쪽에는 두 갈래로 휘어진 연결 회랑이 이어져 팔각정으로 닿아 있었다. 정자 안에 사람이 있는 듯했지만 시은은 굳이 들여다보지 않았다. 난간에 서서 산자락을 뒤덮은 벚꽃을 바라보자 마음이 저절로 고요해졌다.류영은 망토를 품에 안고 뒤따르며 숨을 고르고 틈틈이 주위를 살폈다. 시은은 이미 그 기색을 알아차렸지만 모른 척하고 있었다. 고지안은 산허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류영이 시은의 허리에 벚꽃 옥패를 달아 주면 그것을 신호로 모습을 드러내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숲길은 생각보다 험했다. 나무 사이를 빠져나오느라 시간을 끌다 보니 정작 나왔을 때는 이미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머리도 가지에 걸려 흐트러져 있었다. 겨우 단정하게 정리하고 회랑 위로 올라섰을 때, 고지안의 눈에는 류영이 먼저 들어왔다. 그러나 류영은 어쩐지 난처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헤아릴 틈도 없이 그는 조금 앞쪽에서 주종현이 시은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주종현은 원래 백마사에 올 생각이 없었다. 주다언과 주온청이 끌어내듯 데려온 것이었고 이곳에서 시은을 마주칠 줄은 몰랐다.“혼자 온 것이냐?”그가 알고있는 여인은 꽃구경보다는 은전 세는 일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시은이 흘겨보며 말했다.“주 세자께서는 꽃을 봐도 되는데 저는 보면 안 됩니까?”주종현은 코를 긁적이며 그녀의 뒤를 살폈다. 시녀 하나뿐이었다.“큰 누님과 온청이 다과를 가져왔어. 같이 먹지 않겠느냐?”시은은 팔각정 쪽을 힐끗 보았다. 주다언 부부와 주온청 부부가 모두 그곳에 있었다.“아니요. 다 모르는 사람들이잖아요. 전 시도 못 짓고 그림도 못 그리는데 괜히 분위기만 흐릴까 봐 겁이 납니다.”그녀는 절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까딱였다.“아설이 재물신께 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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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9화

주종현이 고지안을 알아보고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지안이었나? 언제 이곳에 온 겐가?”그는 이미 이곳에 꽤 오래 머물렀지만 고지안의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고지안의 입술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방금...”“그런가? 그럼 나는 이만. 물건을 좀 찾아야 해서.”주종현의 시선이 바닥으로 옮겨 갔다. 시은이 떨어뜨렸다던 옥패였다. 그는 몸을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가, 순간 손길이 멎었다. 고지안의 허리에 달린 것과, 모양과 빛깔이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주종현은 옥패를 손안에 쥐고 천천히 힘을 주었다. 짧고 건조한 소리가 나며 옥이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 앞에 선 고지안의 눈에 웃음인지 경계인지 모를 빛이 스쳤다. 그때 시은이 다가왔다.“못 찾았습니까?”“찾기는 했다만 떨어져 깨졌구나.”“그렇다면 깨진 대로 두지요. 류영이 그저 봄기운에 맞춰 달아 둔 것일 뿐이니까요.”시은의 얼굴에는 미련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주종현의 시선이 고개를 숙인 류영을 스쳤다.“내게 화전옥 한 점이 있다. 내일 사람을 보내어 전해 주마.”시은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그렇다면 오히려 이득이군요. 깨진 옥 하나로 더 좋은 옥을 얻게 되었으니.”고지안은 그제야 주종현의 시선 속에 더는 숨기지 않은 적의가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미 같은 옥패가 두 개인 것을 눈치챈 것이었다.“여전히 후하시군. 지난달에는 의란원에서 금을 쏟아붓더니 오늘은 또 화전옥이라니.”주종현은 무심히 시은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그가 무엇을 하든, 마음에 닿지 않는다는 듯 고요했다.“나는 본디 인색하지 않네. 이것은 시은 아가씨도 알고 있을 거고.”주종현은 정말이지 거짓말을 물 흐르듯 하는구나.고지안이 한마디 더 하려는 순간, 주종현이 말을 끊었다.“헌데 형수님은 보이지 않는군. 이토록 봄빛이 고운 날에 혼자만 즐길 생각은 아닐 테지.”주종현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는 고지안이 이곳에 온 목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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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0화

고지안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안색 또한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러나 주온청은 그 변화를 못 본 듯 담담히 말을 이었다.“형수님께서 며칠 전부터 기침을 하시면서도 집안일을 직접 챙기고 계십니다. 어제는 마당의 복숭아나무를 보며 왜 아직 꽃이 피지 않느냐고 하시더군요.”고지용은 큰형의 낯빛을 보고 조용히 부인의 소매를 당겼다. 주온청은 남편을 한 번 바라보고는 입술을 다물었다.주종현은 자신의 여동생을 힐끗 보더니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요즘 한가로운 분이시니 이처럼 백마사의 봄꽃을 놓칠 리가 없지.”그 말끝에 실린 미묘한 조소가 고지안의 눈을 찔렀다. 그는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궁성에서 쫓겨나, 한순간에 구름 위에서 진흙탕으로 떨어진 몸이었다. 한때는 그를 뵙기만 해도 고 통령이라 불러 주던 자들이 이제는 스스럼없이 지안 형님이라 입에 올렸다. 마치 그가 추락하자 모두가 같은 자리에 올라선 것처럼 말이다. 고지안의 입꼬리가 떨렸다.“자네야말로 요즘 바쁜 몸이지 않나? 그럼에도 꽃구경할 여유가 생겼나보군.”주종현이 미소 지었다.“근래는 분주했는데 오늘은 모처럼 짬을 얻어 백마사의 경치를 즐기러 왔지. 그것도 시은 아가씨와 함께 말일세.”시은은 그 말에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초대받은 기억은 없습니다만. 류영, 혹시 주 대인에게서 무슨 부탁을 받은 것이냐? 왜 멀쩡한 날에 백마사에 꽃구경을 오게 되었나 했더니.”류영은 고지안의 살기 어린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며 황급히 손을 저었다.“아닙니다, 아가씨. 지금이 꽃이 가장 좋은 때라 제가 감히 말씀을 올렸을 뿐입니다.”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지요. 주 대인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마치 일부러 거리를 두려는 태도였다. 주종현은 개의치 않았다.“초대보다 우연이 낫고, 우연한 만남 또한 인연이라 하지 않느냐?”시은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주종현은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주온청은 처음 보는 주종현의 이러한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 순간, 주다언도 팔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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