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의 모든 챕터: 챕터 491 - 챕터 500

631 챕터

제491화

“오라버니!”아람은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잠에서 깼다.아직 한밤중이었고 사방은 숨소리조차 죽은 듯 고요했다. 곁에서는 두 아이의 얕고 고른 숨결만이 들려왔다.아람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좀처럼 꿈을 꾸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은 드물게도 아주 어린 시절의 장면을 보았다. 심지어는 오래전에 이미 기억에서 지워졌다고 생각했던, 더 어릴 적의 모습까지도.막 잠에서 깬 지금, 머릿속은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꿈속에서는 그렇게도 또렷하던 장면들이 이제는 마치 옅은 안개를 뒤집어쓴 듯 흐릿해지고 있었다. 아람은 차가운 달빛을 바라보며 가슴이 이유 없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보낸 지 열흘도 넘은 편지. 오라버니는 과연 그 편지를 받았을까?꿈속의 모든 장면이 아주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손에 잡힐 듯하다가도 금세 멀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울음소리도 있었고 다투는 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단단한 품 하나가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그 품은 그녀의 귀를 막아주며 불안하고 두려운 소리들을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어린 시절의 일은 이제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니와 맹 가 사이에 어떤 원한이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작년, 맹 노장군이 정현까지 찾아와 그녀와 오라버니를 만났던 날, 오라버니는 이틀을 거의 말없이 보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람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그녀는 기억하지 못하니 과거의 고통을 짊어질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오라버니는 달랐다. 그는 모든 일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가 짊어진 무게는 그녀보다 훨씬 무거웠다.지금의 맹 가는 가문을 떠받칠 계승자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니 능력 있는 오라버니는 더없이 적합한 선택지일 터. 그리고 그녀는 맹 가를 끌어당기기 위한 또 하나의 매개체가 되어 버렸다.금주에서 주종현이 했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소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기회를 노리는 사람들은 많았다.이 세상에 권세와 지위를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서북군 이십만의 유혹 앞에서 누가 감히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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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2화

“오, 오라버니가…”아람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터지듯 울렸다. 그녀의 시선이 계소만의 소매에 멈췄다. 그 위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핏자국이 점점이 남아 있었다. 말하는 법도, 걷는 법도 잊어버린 사람처럼 몸이 굳어 버렸다. 계소만이 부축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의관 문턱조차 넘지 못했을 것이다.의관의 삼 층.강세오는 눈을 굳게 감은 채 누워 있었고 의원은 침을 놓고 있었다.곁에 서 있는 하연은 말 그대로 만신창이였다. 몸에 걸친 옷은 원래 어떤 색이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시아, 미안해. 내가 책벌레를 지켜 주지 못했어.”강세오는 독화살에 맞았다.하연이 데려온 호위 가운데 독을 다루는 자가 있기는 했지만 이 독은 그들이 풀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결국 경성으로 가서 의원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소휘의 사람들이 끝까지 추적해 왔고 금주에 이르러는 습격을 당하고 말았다.그때 주종현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들 역시 살아서 경성에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아람은 하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디에서도 명문가 규수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차갑게 식은 손을 내밀어 하연의 손을 꼭 잡았다.“아가씨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제 오라버니는 지금 이렇게 누워서 의원의 진맥을 받을 기회조차 없었을 겁니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하연은 고개를 저었다.“난 괜찮아. 주 대인께서 몸으로 칼을 막아 주지 않았으면 난 지금 살아있지도 못했을 거야. 책벌레도 그분이 데려오셨어. 지방 관리가 조서도 없이 경성에 들어오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거든.”그녀는 두 손을 모아 정중히 예를 올렸다.“주 대인, 앞으로 무슨 일이든 말씀만 하세요. 저는 불속이라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주종현은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습니다. 지금은 강 형님이 가장 중요합니다.”그는 아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핏기가 완전히 가신 얼굴,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게 조여왔다.“오늘 성 밖에 나갔다가 한 시진을 허비했다.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이런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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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3화

황제는 전각 안에서 다른 대신들을 접견 중이라 주종현은 전각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속이 타들어 가도 그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그때 마침, 영국공이 조정에서 미소를 가득 담은 채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다 문밖에 서 있는 아들의 몰골을 보는 순간, 그 웃음이 그대로 얼굴에 얼어붙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 그는 곧장 다가가 아들의 소매를 거칠게 움켜쥐고 이를 악물며 낮게 말했다.“입궁해 폐하를 뵙는 자리다. 너 스스로 좀 보거라, 이게 무슨 꼴이냐?”주종현은 급히 궁으로 들어오느라 옷만 갈아입었을 뿐, 제대로 씻을 겨를도 없었다.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도 피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인 기운이 느껴졌다.주종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부친께서는 어서 돌아가십시오. 괜히 연루되실까 염려됩니다.”“너 이놈!”영국공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 내관이 밖으로 나왔다.“주 대인, 들어오시지요.”주종현은 아버지를 지나쳐 곧장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영국공은 아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콧김을 거칠게 내뿜고는 끝내 소매를 휘두르며 먼저 돌아갔다.황제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미간을 찌푸린 채, 손가락으로 콧등 양옆을 천천히 눌러 주무르고 있었다.“신, 주종현. 폐하를 뵙습니다.”“주 경, 오늘은 평소와 다르구나. 집에 물이 없어 목욕을 못 했느냐?”황제는 눈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옅은 피로가 묻어 있었다.주종현은 깊이 몸을 굽혔다.“사정이 급했습니다. 폐하께서 벌을 내리신다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급하다고 했으니 돌려 말하지 말고 바로 말하거라.”주종현이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정현 현령 강세오가 자객의 추격을 받았고 현재 맹독에 중독되어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민간의 의원들은 손을 놓은 상태입니다. 신이 감히 강 대인을 대신해 해독약을 청합니다.”황제가 눈을 떴다.“누가 그리 대담하단 말이냐? 감히 조정의 관리를 추살하다니.”“강 대인은 서남군 하 장군의 셋째 아가씨 하연과 함께 정현에서부터 도망쳐 경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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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4화

“태의, 제 오라버니는 어떻습니까?”아람의 심장이 목울대까지 치솟아 있었다. 태의원 원사는 맥침을 거두며 말했다.“해독이 어려운 독은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 약인이 필요합니다.”하연의 얼굴에 기색이 번쩍였다.“무슨 약인입니까? 제가 당장 구해 오겠습니다.”태의원 원사는 방 안의 사람들을 차례로 둘러보았다.“강 대인과 혈연으로 가장 가까운 이의 혈액이 약인입니다.”“혈인이라고요?”아람은 곧바로 소매를 걷어 손을 내밀었다.“우리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남매입니다. 제 피를 쓰세요.”“안 됩니다.”태의는 고개를 저었다.“마님은 여자이니 음에 속합니다. 그러니 약인으로 쓸 수 없습니다.”“그럼 지금 바로 맹 장군을 찾아가겠습니다.”하연이 돌아서려는 순간, 아람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잠깐만요.”그녀는 다시 태의를 바라보았다.“정말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없습니다.”태의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이 독은 예전에 귀족 가문들 사이의 암투에서 자주 쓰이던 것입니다. 중독된 이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지위나 재산을 포기해야 했지요. 너무도 음험한 독이라 조정에서 엄금했고 가문 싸움에 이를 사용하면 작위 박탈과 가산 몰수로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수십 년 동안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던 독입니다.”아람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오라버니의 침상 곁에 쪼그려 앉았다.“오라버니, 맹 노장군께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요. 오라버니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가 무엇을 요구하든 다 받아들이겠어요. 깨어난 후 이 일로 화가 났다면 그때 저를 꾸짖어 주세요.”그녀는 오라버니의 손을 꼭 붙잡았다가 천천히 일어섰다.“지금쯤이면 맹 노장군은 분명 경성에 계실 겁니다. 이런 독을 쓰게 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오라버니를 몰아 맹 노장군과 혈연을 인정하게 만들려는 것이지요.”아람의 입가에 냉소가 스쳤다.“돌을 들어 제 발등을 찍는 일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주종현이 말했다.“내가 함께 가겠다.”아람의 시선이 그의 오른팔에 머물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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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5화

“멈춰라.”그녀의 심장이 안쪽에서 둔하게 울렸다.“마님?”향 유모가 조 씨를 부축해 마차에서 내리며 그녀의 시선을 따라 진국공부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 등뒤가 어쩐지 낯설지 않은, 그저 그런 정도의 익숙함이었다.그러나 조 씨의 얼굴에는 격한 기색이 번졌다.“내가 잘못 본 게 아니야. 분명 저 아이야…”저 여인을 아들의 집에 들이기만 하면 현이는 예전처럼 돌아올 것이다. 지금처럼 차갑고 멀어진 모습이 아닐 것이다.아람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눈에 들어온 것은 익숙한 두 얼굴이었다.영국공부의 안주인 조 씨, 그리고 곁에 선 향 유모.경성에 들어와 처음 마주한 옛사람이 조 씨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너, 너는 사람이냐, 귀신이냐?”조 씨와 향 유모의 얼굴이 한순간에 창백해졌다.아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이면 어떻고, 귀신이면 또 어떠한가?조 씨는 향 유모의 손을 꽉 붙잡고는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한밤중이었다면 그대로 기절했을 얼굴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지금은 대낮이었다.“너는…”조 씨가 입을 여는 순간, 진국공부의 대문이 열리더니 맹여산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세 사람은 각기 다른 방향에 서서 잠시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가장 먼저 입을 연 이는 맹여산이었다.“아는 사이냐?”물음은 아람을 향했지만 지칭은 조 씨였다.맹여산은 경성에 머무는 날이 드물었기에 조정의 대신들조차 모두 알지 못했다. 하물며 공후 가문의 안주인들을 어찌 다 알겠는가?아람은 담담하게 말했다.“모릅니다.”조 씨는 어색해졌다. 맹여산은 자신을 모르지만 자신은 그를 알고 있었다. 더구나 찾아온 것도 아니고 남의 집 대문 앞에 서 있는 형국이었다.“저는…”“모른다면 들어오거라.”맹여산은 더 묻지 않고 몸을 돌렸다. 아람은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쾅.진국공부의 대문이 조 씨의 눈앞에서 단단히 닫혔다. 그녀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향 유모도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마님, 저 아이가, 저 아이가…”강 마님과 너무도 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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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6화

“우선은 살아야지. 책벌레도 네 선택을 이해해 줄 거야.”아람은 힘없이 웃었다.“괜찮습니다.”그때 시녀 류영이 여러 장의 초청장을 들고 들어왔다.“마님, 각 저택에서 보낸 방문첩입니다.”새로 들어온 시녀들 가운데 비교적 눈치가 빠른 아이였기에 늙은 관사가 내택에 두어 쓰고 있었다.“모두 거절하거라.”“잠깐만.”류영이 나가려는 순간 하연이 그녀를 불렀다. 하연은 류영의 손에서 초청장을 받아 들었다.“너는 먼저 물러나거라.”“예.”하연은 아람 곁에 앉았다.“어머니가 그러셨어. 방문첩은 함부로 거절하면 안 된다고. 경성의 각 가문을 잘 아는 관사를 찾아야 해. 아부하려는 집들은 신경 쓸 필요 없지만 동급 가문이면…”그녀가 잠시 말을 멈췄다.“진국공부와 동급인 집은… 없는 것 같네. 그래도 진국공부보다 높은 집에서 온 건 답례를 보내야 해.”하연은 손에 든 두툼한 초청장 더미를 보며 투덜거렸다.“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실 때는 한쪽귀로 듣고 한쪽귀로 흘려서 아무것도 안 배웠어. 그래서 그런지 네게 도움이 하나도 안 되네.”진국공부에는 맹 장군 외에 사교를 맡을 주인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맹여산이 청을 올렸고 저택에는 도련님과 아가씨가 새로 생겼다.인맥을 잇고자 하는 사람들의 방문첩이 눈송이처럼 날아들었다. 하지만 아람은 무심하게 웃었다.“어차피 다들 저희가 시골에서 자랐다는 걸 알잖아요. 이런 규례를 모르는 게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중에는 저희를 비웃으려는 사람도 많을 거예요.”하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모르면 모르는 거지. 누가 비웃으면 내가 채찍으로 상대해 줄게.”아람은 그 말에 잠시 웃음을 터뜨렸다.맹 가에 새로 돌아온 도련님과 아가씨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경성 안에서는 이미 온갖 소문이 떠돌았다. 심지어 돈을 주고 진국공부 하인들에게 캐묻는 이들까지 나타났다. 마침 이 기회에 늙은 관가는 입이 가벼운 자와 손버릇이 나쁜 자들을 전부 쓸어냈다. 다른 집들은 몰라도 영국공부에는 이 소식이 청천벽력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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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7화

강세오가 혼수상태로 누워 있는 동안 그를 돌본 사람은 줄곧 하연이었다.옥죽관을 그의 입에 물리고 숟가락으로 인삼탕을 조심스레 떠서 큰 깔때기에 부어 넣으면 약물이 가느다란 관을 따라 그의 입으로 흘러 들어갔다.이제는 마당의 얼음과 눈도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연아와 선아는 진국공부를 마치 모험터처럼 여기며 밥만 먹고 나면 금세 모습을 감췄다. 어디선가 아이들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차갑기만 하던 저택에도 이제야 사람 기운이 깃들었다.늙은 관사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이제야 집답습니다.”그때 문밖에서 또다시 마차 소리가 들려왔다.그는 곧장 하인에게 시켰다.“누가 왔는지 보고 오너라.”문을 연 하인은 황제 곁을 지키는 전 내관을 보고 황급히 대문을 활짝 열었다.“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전 내관의 전갈은 분명했다. 이틀 뒤 황제가 친히 진국공부에 행차할 예정이라는 소식이었다.황제는 즉위한 뒤로 천지와 조상의 제사 지낼 때를 제외하고는 궁 밖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하물며 어느 신하의 저택을 직접 찾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진국공부는 즉시 새 단장을 시작했다. 아람은 그동안 세상을 떠돌며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황제를 뵈어야 한다고 하니 가슴이 저절로 조여 왔다.단낭은 자신이 만날 수 있는 사람 중 가장 높은 신분을 지닌 자는 그 어린 패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사이에 천자도 볼 수 있게 되다니.그녀는 진국공부의 식솔도, 하인도 아니었기에 황제를 알현할 자격은 없었다. 그러나 창문 뒤에 숨어 살짝 바라볼 수는 있었다.강세오가 눈을 떴을 때, 이미 바깥은 어두워져 있었다. 방 안에는 촛불이 밝게 타오르고 있었고 눈에 들어오는 가구들은 모두 정교하고 화려했다.“하연…”목이 바싹 마른 채로 그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낯선 소녀 하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세자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얼른 하연 아가씨를 부르겠습니다.”“세자라니. 무슨 세자인 것이냐? 여기는 어디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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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8화

강세오의 눈앞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던 장면이 끝없이 되풀이되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아람을 노려보았다.“그럼 너는 내가 차라리 죽는 것을 택하려 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겠네.”아람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은 잃어버렸지만 오라버니와 함께한 시간만큼은 또렷했다. 그를 눈앞에서 잃는 일만은 견딜 수 없었다.“저는 오라버니를 살릴 수만 있다면 어떤 조건이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발버둥 치며 살아왔는데 왜 죽어야 하는 겁니까?”강세오는 비웃듯 숨을 내뱉었다.“헌데 나는 원하지 않아. 어머니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네가 여섯 살 이전의 기억을 잃은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가 왜 거리에 떠돌게 되었는지. 너는 다 잊었겠지만 나는 아직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어.”그의 목에 핏줄이 도드라졌고 얼굴은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나는 그의 손아귀에서 비굴하게 목숨을 부지하고 싶지 않아.”아람은 그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보며 끝내 눈물을 터뜨렸다.“오라버니, 저는 오라버니께서 살아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열네 살이던 해, 그녀는 오라버니에게 살 길을 만들어 주기 위해 영국공부에 몸을 팔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맹여산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강세오는 시선을 돌렸다.“나가. 너는 네가 원하는 맹 가의 아가씨로 살아. 나는 원하지 않으니까.”아람의 눈물은 끊어진 구슬처럼 흘러내렸다. 그녀는 소매를 움켜쥔 채 그대로 방을 뛰쳐나갔다.“시아.”하연은 문밖에서 그 모든 소리를 들었다. 무예를 익힌 그녀의 귀는 남들이 쉽게 놓치는 진동까지 잡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강세오의 심정도 이해가 갔고 누이가 오라버니를 살리려는 마음도 알 수 있었다. 이 남매는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잘못은 모두 이전 세대가 남긴 것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도 상처가 될 것이고 뒤로 물러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이 틈바구니 속에서 그들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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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9화

맹여산은 긴 회랑 아래에 서 있었다. 어둠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아람이 사라진 방향에 고정되어 있었다.“곽방, 사람을 붙여 아가씨를 따라가거라.”“예.”아람은 진국공부의 대문을 나서는 순간에서야 마치 등에 짊어졌던 천근만근의 무게가 비로소 떨어져 나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웅장한 저 대문이 금방이라도 그녀를 덮쳐 삼킬 것처럼 느껴졌다.그녀는 오라버니가 맹 가를 얼마나 혐오하는지, 그들이 어린 시절 어떤 삶을 견뎌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모든 고통을 지나 겨우 살아남은 이 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강세오는 긴 세월 책을 파고들었고 그녀는 영국공부에서 목숨을 걸었다. 그렇게 버텨온 삶이었는데 왜 이제 와서 쉽게 버리려 하는 걸까?이제 그녀는 단지 살아남는 것만이 아니라 아무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만큼 당당하게 살아야 했다.밤이 내려앉았지만 야시장은 여전히 들끓고 있었다. 뜨거운 호병탕 한 그릇, 고소한 참깨 전병 한 장, 그리고 저마다 다른 모양의 등불들.웃음과 소음, 사람들의 체온이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웠다.“아가씨, 마지막 매화 향낭이에요.”아람이 그것을 받아 들자마자 누군가가 대신 값을 치렀다. 그녀가 돌아보자 곽방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다시 다섯 걸음 뒤로 물러났다.가까이 다가서지는 않되, 그녀를 놓치지 않는 거리였다.자수는 조잡했지만 향낭에서 은은한 향기가 흘러나와 조금씩 그녀의 마음을 가라앉혔다.아람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무엇을 집어 들든 항상 누군가가 대신 값을 지불하고 물건을 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 남은 것은 끝내 그 향낭 하나뿐이었다.돈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권력이었다. 주종현이 그러했듯이 지금은 소휘가 그녀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든 거리낌 없이 그녀를 이용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녀에게는 힘이 없었으니까.아람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더 단단한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덕흥루는 여전히 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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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0화

쓰러진 고지안의 몸 위로 곽방의 발길질이 먼저 꽂혔고 그다음엔 덕흥루에서 막 걸어 나온 주종현의 발이 날아들었다.차윤서는 고지안의 몸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는 듯한 착각에 목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괜히 나섰다간 같이 날아갈 판이었다.아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도망칠 필요도, 해명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누군가가 그녀를 대신해 모든 것을 처리하고 있었으니까.주종현은 아람의 눈가가 젖어 있는 것을 보고 잠시 시선을 멈췄다.“괜찮아?”아람은 문득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아직도 그저 이름 없는 첩이었다면 이 장면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누군가는 말하겠지. 조용히 참고 넘기라고, 애초에 밖에 나가지 말았어야 했다고.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오른쪽 어깨에 시선이 멈췄다. 그곳은 한때 그녀를 구했고 또 한때는 오라버니의 목숨도 지켜 주었던 자리였다. 전생에 그녀가 잃은 목숨까지 생각하면 이제야 겨우 빚을 갚은 셈이었다.아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단을 향해 몸을 돌렸다.연아는 이곳의 밤떡을 가장 좋아했다.“주인장, 밤떡 한 상자랑 부용과 한 상자 주세요.”덕흥루의 밤떡과 부용과는 돈이 있어도 쉽게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기에 예약하지 않으면 손에 넣을 수 없었다.하지만 덕흥루는 늘 몇 상자를 따로 남겨 두었다. 옛날 같았으면 그녀는 하녀를 보내 줄을 서야 했겠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었다.“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주인장은 귀족들 틈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답게 눈치 하나는 기가 막혔다.돈을 낸 사람의 허리에 서북영 표식이 달려 있는 걸 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러자 젊은 점원이 슬쩍 다가와 속삭였다.“대단하네요, 주인장.”주인장은 콧소리를 냈다.“이게 다 눈썰미다.”틀리면 겨우 떡 두 상자 잃는 거지만 맞히면 귀인을 적으로 만들지 않는 셈이 되니까.아람은 떡 상자를 들고 돌아섰다.주종현은 그녀가 떡을 고르는 것도, 그녀가 다시 걸어오는 것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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