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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화

“만약… 저희가 여기에 남아서 죽게 된다면요.”강시아는 여 마님의 등 뒤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그 말을 반복했다. 그러나 그녀는 움직이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강시아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으나 그 안에는 꺾이지 않는 단단함이 숨어 있었다.“저는 그저 살고 싶습니다. 제 딸과 함께… 살아남고 싶을 뿐입니다.”여 마님은 천천히 몸을 돌려 세웠다. 그녀는 오랜 침묵 끝에 마침내 입을 열었다.“지금 성문은 삼엄하게 봉쇄되어 있습니다.”“압니다. 다음 달이면 조공도 있으니 적어도 두 달은 더 걸릴 테지요.”이 소식은 강시아가 한 달 전, 차마행에서 묻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그 말을 들은 여 마님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그 소식은 어디서 들은 것입니까?”강시아는 사실대로 말했다.“한 달 전 주작가의 한 차마행에서 들었지요. 그 자리에서 은자 오십 냥을 걸었습니다. 한데 며칠 전, 그 차마행이 문을 닫아버려서… 오늘 이렇게 마시에 온 겁니다.”여 마님은 짧게 숨을 고르며 낮게 중얼거렸다.“마님께는 제법 운이 따르는 모양이군요. 그 차마행과 방금 마님을 속이려 들던 자는 본래 한 패였습니다. 며칠 전 문을 닫은 것도 사람을 잘못 건드려 화를 자초한 탓이지요.”그녀는 비웃듯 콧소리를 흘렸다.“목숨 걸고 하는 장사이니, 언젠가는 도랑에 처박히기 마련입니다.”여 마님의 눈빛이 다시 강시아를 찌르듯 훑었다.“한데 마님은 제가 그대를 속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강시아의 눈빛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이미 스스로도 말했잖습니까? 이런 일은 목숨을 걸고 하는 장사라고. 다른 이들은 자기 몸 하나 숨기기에 바쁘겠지요. 한데 당신은 오히려 집까지 이곳 마시에 있지 않습니까? 그건 곧 담대함이자 능력이라는 뜻이겠지요.”여 마님은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좋습니다. 눈은 밝으시군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운명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강시아의 얼굴에 희미한 기쁨이 차올랐다. 하지만 여 마님은 이내 얼굴을 굳히고 단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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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화

잘못이든 아니든 어차피 모두 그녀의 탓이었다. 비록 허물이 없어도 억지로라도 잘못을 씌워야 했다. 이토록 많은 이들이 모인 자리에서 감히 체면을 잃을 수는 없는 법. 체면 따위 없어도 되는 사람은 오직 그녀 뿐이었다. 열 냥 은전으로 사들인 여자, 값비싼 체면이란 애초에 그녀에게는 필요치 않았다.주종현은 하인들 손에 부축되어 마차에 올랐다. “연아야!”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소림이 뛰쳐나왔다. 연회 내내 찾아 헤매던 연아를 마침내 발견한 것이다.“이거 줄게!”소림은 망설임조차 없이 차마 내놓지 못했던 그 황비취로 빚은 호랑이 옥패를 연아의 품에 쑥 밀어 넣었다.그러자 조 씨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이… 이건… 일곱 째 왕야, 이러시면 곤란합니다.”그러자 소림은 두 손을 허리에 얹고는 어린아이 특유의 떼쓰는 목소리로 불만을 토했다.“셋째 형님께서 그러셨단 말이에요! 제가 누구에게 주고 싶으면 주면 된다고! 본왕은 그냥 연아가 좋습니다! 그러니 꼭 주고 싶어요!”천진난만한 선언이었으나 군왕의 말처럼 또렷하게 들렸다.연아 역시 이 상황에 놀라 움찔하며 불안스레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그때, 소휘가 미소를 띠며 아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네가 찾던 누이라는 아이가 알고 보니 영국공가의 아가씨였구나.”그러면서 조 씨와 강시아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놀랄 것 없네. 일곱 째 아우가 내어준 것이니 그저 받아두면 된다.”소림은 더욱 신이 나서 연거푸 외쳤다.“맞아요, 맞습니다! 연아가 크면 제가 꼭 왕비로 맞이할 거예요!”역시나 아이의 천진난만한 말이었으나 떨어지는 울림은 돌 위에 망치질하듯 묵직했다.순간,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모두 놀라 숨을 죽였다. 뒤편에 서 있던 송하윤은 수건을 악물 듯 깨물며 분노를 삼켰다. 그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강시아가 나타나면 절대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걸.첩이 낳은 딸마저 왕자와 인연을 맺게 된다면 앞으로 자신이 낳은 딸은 영영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게 될 터였다. 그녀들의 존재는 곧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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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강시아.”강시아는 깜짝 놀라 고개를 홱 돌렸다. 그곳에는 술에 취해 쓰러진 줄 알았던 주종현이 맑디맑은 눈빛으로 앉아 있었다.“서방님… 술에 취하지 않았군요.”주종현은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낮게 물었다.“어머님께 들었다. 누군가 네게 청첩을 내밀었다고. 그 사람을 만났느냐?”강시아는 눈을 내리깔았다.“만났습니다. 성왕 전하였습니다.”주종현은 의외라는 빛조차 띠지 않고 미간을 살짝 치켜세웠다.“무슨 말을 했느냐?”“성왕께서 잃어버린 물건이 있다 하시며 서방님께서 보지 못했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모른다고 말씀드렸고요.”주종현은 마차의 벽에 몸을 기대며 피식 웃었다.“성왕, 참으로 애를 쓰는군.”그러고는 다시 그녀를 향해 단호히 말했다.“앞으로 이런 수상한 청첩을 받으면 먼저 내게 알리거라.”그의 눈빛이 곧장 그녀를 꿰뚫었다.강시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예.”그러나 주종현은 문득 몸을 기울여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아직 반응할 틈도 없었는데 갑자기 두피가 조여 오더니 차가운 무언가가 뇌리에 꽂혔다.“가만히 있거라.”그는 물러나고는 손을 거두었다. 강시아는 오른편이 묵직해지는 느낌을 받았고,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이내 귓가를 스쳤다. 만져보니 그것은 한 쌍의 보요였다.“연회에서 활로 꽃을 꺾어 내가 따낸 것이다.”주종현이 담담하게 말했다.강시아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는데, 무릎 위에 놓인 두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주종현은 지금껏 그녀에게 직접 무언가를 내민 적이 없었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그저 사람을 시켜 보내왔을 뿐. 이것은 오늘 그의 손으로 직접 준 첫 선물이었다.그는 그녀의 얼굴에 환희가 번지기를 기다렸지만, 시간이 흘러도 기대하던 기색은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의 미간이 서서히 일그러지려는 순간, 강시아는 조용히 머리핀을 뽑아 들었다.“서방님께서 송 아가씨와 같은 연회 자리에 계셨지요. 그러니 서방님께서 이 보요를 따내는 것을 지켜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그 아가씨께서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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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그가 급히 이름을 불렀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강시아는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첩은 그리 옹졸한 사람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서방님 곁에 머문 세월만 해도 송 아가씨보다 몇 해나 길지 않습니까? 그걸로 이미 충분합니다.”주종현의 입술이 미묘하게 떨렸으나 막상 터져 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그럼… 유한석 그 사람은?”강시아의 얼굴이 순간 굳어지고 가슴 한구석이 송곳처럼 아프게 저려왔다.결국, 이 때문이었구나.그가 굳이 보요를 내민 건 따지고 물어보려는 의도였던 것이다.그녀의 손가락은 손바닥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시선은 떨구어진 채 붉은 보석을 박은 적금의 머리비녀를 가만히 응시했다.“그 사실은 이미 해명 드린 바 있습니다. 서방님께서 아무리 거듭 물으신다 해도 첩의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습니다.”주종현은 그녀의 미묘하게 흔들리는 감정의 결을 똑똑히 읽어내며 굳게 턱을 조였다.그렇게 오랜 침묵 끝에야 그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좋다. 본 세자는 믿겠다. 다만 너 스스로 오늘 한 말을 반드시 기억하거라.”강시아는 웃고 있었으나 그 웃음은 눈동자 끝까지 닿지 않았다.“예. 첩은 잊지 않겠습니다.”저택에 돌아왔을 때, 주종현은 먼저 마차에서 내려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대문을 들어섰는데, 손에는 여전히 그 비녀가 꼭 쥐어져 있었다.조 씨가 막 내리던 참에 그 광경을 보고 비꼬듯 물었다.“이렇게나 빨리 술이 깬 것이냐?”향 유모의 품에 안겨 있던 연아는 이제 막 눈을 비비며 깨어났다.“세자께선 본디 주량이 약하지 않사옵니다. 스스로 취하는 편이 억지로 떠밀려 취하는 것보다 나은 법이지요.”그때 연아가 눈을 비비며 입을 열었다.“어머니…”향 유모는 오래도록 이렇게 작은 아이를 안아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연아가 얌전하기까지 하니 괜스레 마음이 더 애잔해졌다.“네 어미는 저기 계신다.”연아는 목에 걸린 황비취로 만든 호랑이 조각을 양손으로 소중히 떠받쳐 조 씨에게 내밀었다.“할머니, 이 큰 호랑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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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가고 싶거든 그냥 가거라. 괜히 이런 모양새를 부리니 모르는 사람은 내가 너를 핍박하는 줄 알겠다!”그녀는 이 말을 내뱉자마자 곧장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강시아는 그 자리에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조 씨란 여인은 늘 냉담하고 웃음기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간혹 모습을 드러내도 시어머니와 맞붙어 다투기 일쑤였지 따뜻한 눈길을 보낸 적은 없었다.지난 생애 송하윤이 집안에 들어와 살림권을 쥔 뒤로 그녀는 더욱 드물게 모습을 비췄다.그때, 향 유모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마님께서는 말은 차갑게 하지만 속은 부드러운 분이옵니다. 세월이 지나면 강 마님께서도 알게 되실 겁니다.”그녀는 다시 연아를 한번 바라보고는 덧붙였다.“전에 백마사에서 혜능법사께서 연아 아가씨의 사주를 보셨을 때 복록이 겸비 되었다고 하셨지요. 마님께서는 그저 아이의 복을 누리시면 됩니다.”강시아가 미소를 지으며 응했다.“그 말, 꼭 그대로 이루어지길 빌겠습니다.”작은 뜰에 돌아오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콩뼈가 반갑게 달려와 그녀를 맞이해주었다. 오늘 연회에 나갔다 온 터라 설강과 하 유모가 쉴 수 있도록 내보냈기에, 뜰 안은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고요했다.강시아는 직접 딸아이의 옷을 갈아입히고는, 자기도 모르게 탁자 위에 놓인 옥호로 시선을 옮겼다.그 호랑이는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황비취 자체도 희귀한데 저토록 큰 덩이를 온전히 새겨 만든 옥호라니. 어린아이가 주는 의미를 모른 채 덥석 내놓았기에 가능했던 것 뿐이지, 선물이 지닌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조 씨가 이제야 연아를 키워보겠다는 듯 마음을 돌린 것도 결국 다 이 옥호 덕분이었다. 그렇기에 장차 연아가 왕비로 출가하게 된다면 그것은 곧 국공부에 더없는 원군이 될 터였다.지난 생애 연아에게는 옥호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녀를 눈여겨보지 않고 차갑게 내버려둔 채 송하윤의 손아귀에 짓이겨지도록 바라만 보았을 뿐이었다. 이번 생애, 단 한 마리의 옥호가 나타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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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딱 봐도 유복한 집안 사람인데 구태여 동전 한 닢도 안 주다니.”“분명 어느 벼슬아치가 바깥에서 몰래 거두어 기르는 여자겠지. 진짜 마님이라면 어찌 겨우 하녀 하나만 달고 나왔겠는가?”뒤이어 무슨 말이 더 오갔는지 강시아는 듣지 못했다. 이 모든 수군거림은 이제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산 아래에서부터 올라가며 연아는 온갖 먹을거리와 장난감을 사들였다.강시아, 설강과 하 유모, 세 사람은 번갈아 가며 연아를 안아주느라 진이 빠져 이미 녹초가 되어 버렸다.백마사의 대전 앞에는 향을 올리려는 이들로 이미 긴 행렬이 이어졌다. 설강은 연아를 데리고 올 적부터 줄곧 노래하듯 찾던 작은 물고기를 보러 갔고, 강시아는 성급한 마음을 꾹 눌러 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에게 오늘 가장 중요한 일은 출성에 필요한 통행증과 적서를 손에 넣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래 기다렸건만 여전히 여 마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전 안으로 들어서니 바깥보다 사람이 더 많아져 있었다. 줄지어 향을 올리는 신도들 말고도 법문을 들으러 모인 무리들로 북적였다. 법상 위에서는 혜능법사가 설법을 펼치고 있었고, 아래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무릎을 꿇은 채 귀를 기울였다.만약 큰 마님이 이 광경을 본다면 분명 기절해 쓰러졌을 것이다. 해마다 사찰에 시주하는 향유 값만 해도 천금이 넘는데 정작 큰 마님에게는 그녀가 수차례 간청했던 법사의 설법이 단 한 번도 허락된 적이 없었다.강시아는 공손히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지금 그녀의 유일한 기원은 단 하나. 무사히 이 성을 벗어나는 것이었다.기도를 마치고 몸을 돌리자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 선 여 마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눈빛에 미묘한 기쁨이 번졌다.“하 유모, 먼저 설강을 찾아가거라. 내가 곧 따라가겠다.”하 유모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문가에 서 있는 여인을 곁눈질했다. 첫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단정한 집안의 규수가 풍기며, 기척과는 거리가 먼 여인이었다.사실 여 마님은 이미 진작에 강시아를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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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화

여 마님은 주종현의 어깨 너머로 강시아를 향해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관사 말로는 네가 백마사에 왔다던데. 무엇을 빌었느냐?”주종현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가더니 곧 땅바닥에 흩어진 종이쪽지 위에 멈췄다. 강시아는 화들짝 놀라 급히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들어 억지로 돌려세웠다. 순간, 그녀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첩… 첩은, 그저 한 사람의 마음만을 원합니다. 그래서 백발이 되도록 서로 떠나지 않게 해달라 기도했지요.”주종현의 시선이 다시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의 거리는 서로의 호흡이 뚜렷이 전해질 만큼 가까웠다.주종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차가운 기색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고, 눈동자는 마치 그녀의 심장을 꿰뚫으려는 듯 깊게 잠겨 있었다. 강시아는 가슴이 서늘히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애써 딴청을 부리듯 시선을 연아 쪽으로 돌렸다.“오늘은 사람이 너무 많아, 연아가 놀고 싶은 걸 다 못 했습니다.”강시아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연아가 놀고 싶은 곳은 내가 데려가마.”주종현은 대수롭지 않은 듯 무심히 대꾸했으나 그의 눈초리는 여전히 땅 위를 스치고 있었다. 그곳에 흩어진 종잇장 가운데 한 장은 앞면이 드러난 채로 놓여 있었다.적서.바로 그때, 한 손이 쓱 뻗어져 종이를 집어 올렸다.“뭘 그렇게 급히 도망가는 것이냐? 다시 태어나고 싶어 환생길이라도 뛰어들려는 것이냐?”여 마님은 손에 든 종이를 주워 담으며 마치 저잣거리의 난폭한 여인처럼 거칠게 욕설을 퍼부었다. 주종현의 시선 아래서 그녀는 능숙하게 그 종이를 거두어 품에 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강시아에게 말을 건넸다.“마님, 향값을 빌려주어 고맙습니다. 마님 댁이 어디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다음에 한 번 찾아 뵈어 갚도록 하겠습니다.”강시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입을 열려 했으나 주종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필요 없다.”여 마님은 그의 깊은 눈동자에서 소유욕을 읽어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공자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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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화

설강도 웃으며 다가와 속삭였다.“마님, 세자께서는 분명 마님을 다르게 대하고 계시옵니다.”다르게 대하다니?그녀가 아는 것은 단 하나. 자신이 억압과 핍박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끝에야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 뿐이었다.강시아는 미소만 띠고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발걸음을 옮겨 앞으로 걸어갔다.하 유모와 설강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는데, 왠지… 마님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잠시 후 산문 앞에 이르렀을 때, 한 아이가 부주의한 탓에 강시아와 부딪혀 버렸다. 아이의 몸은 중심을 잃고 그대로 넘어져 사지가 허공에 떠올랐다. 그녀가 몸을 굽혀 아이를 일으켜 세우는 순간, 손바닥 위로 은밀히 무언가가 쑤욱 밀려 들어왔다. 강시아는 놀라 몹시 당황했지만, 이내 아무 일 없는 듯 소매 안으로 곧장 감췄다.“조심해야지. 천천히 뛰거라.”그녀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는데, 순간, 가슴속이 환히 트이며 마음이 시원해졌다.뒤이어 여 마님의 그림자가 인파 속에 파묻히듯 사라졌다.이때 하 유모와 설강이 곧장 뒤따라 와 물었다.“마님, 괜찮으시옵니까?”강시아의 입가가 가볍게 올라갔다.“괜찮다. 아이가 힘이 세봤자 뭐 얼마나 세겠느냐? 어서 돌아가자.”두 사람은 다시금 눈을 마주쳤다.아까 까지만 해도 기운 없어 보이더니 지금은 또 즐거워 보이네?그날 가장 신이 난 사람은 단연 연아였다. 그녀는 뛰어 놀다가 지쳐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곯아떨어졌다.주종현은 이미 곤히 잠든 그녀를 품에 안고 강시아의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엔 넘칠 듯한 기쁨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오늘은 어쩐 일로 이렇게 즐거워 보이느냐?”강시아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본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뺨이 뻐근하다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계속 웃고 있던 것이었다.강시아는 얼른 손으로 뺨을 매만지며 말했다.“그렇네요. 오랜만에 이렇게 즐겁네요. 늘 저택 안에만 갇혀 지내다가 나와보니… 연아도 이젠 컸는데, 그 조그만 마당은 벌써부터 좁아 터졌거든요.”단지, 이 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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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한데 그 무리들이 들이닥칠 때의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그날 제가 얼버무리며 뒤에 주인장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벌써 우리 곡차를 뒤엎어버렸을 것입니다.”“너는 그 주인장이 누구라고 말했느냐?”하대우는 허벅지를 탁 치며 답했다.“제가 감히 누구 이름을 입에 올리겠습니까! 그저 얼버무리며 넘겼을 뿐이지요. 강 마님, 이제 어찌해야 좋을지 어서 대책을 세워 주십시오..”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곡창의 문이 쾅 하고 걷어차이며 열렸다. 그 무리들이 다시 들이닥친 것이었다. “오, 아직 안 옮겼네? 보아하니 결국 마음을 고쳐먹고 우리한테 팔기로 작정한 모양이군.”앞장선 사내는 원숭이처럼 바짝 마른 데다 허리까지 구부정하여 한눈에 보아도 결코 선량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낯선 여인이 한 사람 더 있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아이고, 이 어여쁜 아가씨가 바로 그 주인장이란 말이지!”강시아는 설강의 옷을 걸치고 머리카락도 풀어 내렸기에 청아한 얼굴이 더욱 자연스레 도드라져 보였다. 아무도 그녀가 세 살이 넘은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것이었다.그녀는 이 무법의 무리들을 차갑게 응시하며 나직이 꾸짖었다.“천자의 발 아래, 어찌 감히 강제로 사들이고 억지로 팔게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가장 앞에 서 있던 사내는 고개를 젖히고는, 마치 천하의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듯 껄껄 웃었다. “장사란 걸 하면서도 석 가의 셋째 도련님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단 말이냐!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감히 누가 이 땅에서 거래를 할 수 있겠느냐!”강시아는 또렷이 받아쳤다.“행수의 필적이 담긴 허락장이 있고 관가의 도장이 찍혀 있다. 관가의 어르신들조차 내 장사에 관여하지 않거늘! 너는 무슨 신선이라도 되는 것이냐? 그럼 내가 향이라도 사르고 불공이라도 해줄까?”그는 입가의 수염을 비비며 비릿하게 웃었다.“허! 맞는 말이지. 석 가의 셋째 도련님에게 향을 사르지 않고는 이곳에서 가게 하나 열 수 없는 법이지.”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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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말이 채 끝나기 무섭게 그의 머리에 쿵 하고 또 한 번 삽질이 날아들었다.셋째 도련님은 좌우로 휘청거렸다. 만약 하대우가 그의 옷깃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미 쓰러졌을 것이다.하대우는 다소 놀란 기색으로 강시아를 쳐다보았다. 그녀에게도 이런 담력이 있을 줄이야. 그녀가 후원에 갇혀만 있는 처지만 아니었다면 아마도 대단한 상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강시아는 삽을 든 손을 높이 들어올린 채 차가운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았다.“너의 주인을 살리고 싶으면 모두 물러서거라!”그렇게 하여 모든 사람은 곡창에서 쫓겨나듯 밀려 나왔다. 바깥에는 가랑비가 흩날리고 있었고 대여섯 명의 졸개들은 빗속에 흩어진 채 누구 하나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그들은 정말로 이 여자가 목숨을 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포에 휩싸였다. 석 가의 셋째 도련님이 죽으면 자신들의 죽음도 멀지 않을 테니까.하대우는 강시아를 끌어다가 처마 밑에 세워두고는 참담한 얼굴로 물었다.“이제 도대체 어찌해야 합니까?”셋째 도련님은 어지러워 겨우 눈앞이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의 이마에서는 피가 천천히 흘러내려 뺨을 타고 미끄러졌고, 졸개들 또한 빗속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그는 손으로 피를 닦아내며 욕을 마구 내뱉었다.“빌어먹을 놈!”분을 삭이지 못한 채 벌떡 일어나 하대우의 죽창을 피하려 했으나 강시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또 한 번 쇠삽을 내리찍었다. 비를 맞은 졸개들은 마치 그 창이 곧 자신들의 머리를 강타한 것처럼 몸을 움찔거렸다.셋째 도련님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땅에 주저앉았다.“어르신! 어르신!”“너는 어르신이 어떤 신분인지 아느냐!”“얼른 석 시랑의 집으로 가거라!”그들 중 한 사람이 벌벌 떨며 돌아서 석 가로 바삐 도망쳤다.하대우는 창백한 얼굴로 그의 콧등을 짚어 보았고 한참 뒤에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살아있구나, 살아있어!”근처 상인들은 평소 석 가의 셋째 도련님에게 많은 괴롭힘을 당해 왔었다. 그런데 오늘 그를 두들겨 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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