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Chapter 761 - Chapter 770

775 Chapters

제761화

분명 혼잣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강지연은 자꾸만 중얼거리게 됐다. 그런데 할 말을 다 마쳤는데도 온하준은 여전히 맞은편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너 왜 아직도 안 가?”강지연이 재촉하듯 말한 바로 그때였다. 고요한 교실 안에서 갑자기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강지연은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귀를 기울이자 그 소리는 분명 온하준에게서 나는 것이었다.그녀는 온하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스며든 달빛 아래, 그의 얼굴 위에는 반짝이는 액체 같은 것이 걸려 있는 듯했다.“온하준, 너 우는 거야?”강지연은 그대로 굳어버렸다.“너 왜 울어?”물론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얼굴에 닿아 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손가락은 안개 속을 헤집는 것처럼 허공만 갈랐고 오직 그녀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만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시험 망쳐서 그래? 괜찮아. 너 원래 기초가 워낙 탄탄하잖아. 마음만 바로잡으면 다음 시험은 분명 잘 볼 수 있어.”“아니면 선생님께 혼나서 그런 거야? 네가 원래 자존심 센 사람인 건 알아. 선생님께 혼나본 적도 거의 없었을 테고. 그래도 선생님이 심한 말을 한 건 아니잖아. 진심으로 널 걱정한 거고 나름대로 널 이해해 보려고도 했고.”“아, 온하준. 너무 힘들면 그냥 울어. 왜 우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은 감정을 오래 눌러두면 한 번쯤 터뜨려야 괜찮아질 때도 있으니까.”“아...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넌 못 듣지. 됐다...”강지연은 온하준이 듣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참 동안 그렇게 조잘조잘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결국 먼저 지쳐버렸다.아마 베르덴의 집 쪽에서 곧 깨어날 것 같았다. 지난번처럼 이쪽에서 몹시 졸릴 때면 저쪽에서 눈이 떠지곤 했으니까.그녀는 하품하고 무릎을 끌어안은 채 책상 위에 웅크려 앉았다. 그리고 머리를 무릎 위에 기댄 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이번에는 곧바로 깨어나지 않았다. 몸을 한 번 뒤척인 뒤 다시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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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2화

그 뒤로 한동안 강지연은 다시는 꿈속으로 빠져들지 않았다.그녀는 베르덴에서 가족들과 함께 그해 겨울의 첫눈을 맞았고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더 눈을 맞았다.떠들썩하게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보내고 심지어 귀국해서 설까지 쇠었다.국내로 돌아온 뒤에도 그녀는 자주 최아현을 불러냈다. 두 사람은 함께 밥을 먹고 거리를 걷고 커피를 마시며 어린 시절 발이 닿았던 해성의 골목골목을 빠짐없이 돌아다녔다.강시우는 베르덴 쪽에 급한 일이 생겨 설 연휴가 끝나기도 전에 먼저 돌아가야 했다.강희라는 모처럼 귀국한 김에 조금 더 머물고 싶어 했고 그래서 강시우가 다음에 다시 들어올 때 함께 출국하기로 한 채 남았다.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새 봄이 찾아왔다. 해성의 학교들도 모두 개학했고 강지연은 최아현과 약속을 잡아 함께 학교에 선생님을 뵈러 갔다.오랜만에 다시 밟은 교정에서 두 사람은 예전에 수업을 듣던 교실 앞에 한참을 머물렀다.“강지연, 기억나? 네 자리가 바로 저기였잖아.”최아현이 교실 안 한 자리를 가리켰다.“나는 네 옆자리였고.”그건 아직 문과와 이과로 나뉘기 전의 교실이었다. 그녀와 최아현은 나란히 앉았고 온하준은 같은 조였다.“나중에 문과 이과 나뉘고 나서는 교실도 바뀌었잖아. 가자, 고3 건물도 보러 가자.”최아현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달렸다.그 시절에는 고3 학생들이 조용히 공부할 수 있도록 따로 오래된 한 건물을 썼었는데, 두 사람이 그쪽으로 달려가 보니 건물은 이미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다.“이곳은 다시 공사하는 거야?”최아현이 지나가던 학생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네. 원래 이 건물은 오래전부터 안 썼어요. 고3은 새 건물로 옮겼고요.”결국 예전의 문과반도, 이과반도 볼 수는 없게 되었다.최아현은 한참 만에야 선생님과 연락이 닿았고 강지연을 데리고 함께 교무실로 갔다.그 시절 선생님들 가운데는 이미 은퇴한 분들도 있었다. 이번에 연락이 닿은 분은 아직 반이 갈리기 전 담임을 맡았던 선생님이었는데 이제는 교감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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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3화

강지연이 이해할 수 없는 건 다른 시공간에서 김도윤 일행은 성적이 꽤 좋은 편이었다는 사실이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온하준과 같은 대학에 갈 수도 없었을 테니까.그런데 왜 이 시공간에서는 하나같이 공부와는 담을 쌓은 애들처럼 보이는 걸까.“김도윤, 우리 나온 지 두 시간 됐어. 이제 돌아가자.”갑자기 김도진이 입을 열었다.“뭘 그렇게 불안해하고 그래.”김도윤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이미 배울 건 진작 다 배웠고 모르는 건 지금 와서 다시 해도 어차피 안 돼. 이럴 바엔 나와서 스트레스나 푸는 게 훨씬 효율적이야.”김도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우리 또 수업 빼먹으면 선생님이 부모님 부른다고 했단 말이야.”역시 무단이탈이었다. 강지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부르고 싶으면 부르라 해. 이 시기에 때리기라도 하겠냐? 결국 달래기나 하겠지.”김도윤이 퉁명스럽게 내뱉자 김도진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표정은 영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역시 김도진은 원래부터 겁이 많은 인간이었다.“됐어. 하준이도 안 급해하는데 네가 왜 난리야?”김도윤이 또 한마디 던졌다.“그러게.”이하나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거들었다. 곧장 온하준 앞까지 다가간 그녀는 손에 든 담배 한 대를 그의 입가로 내밀었다.“하준아, 수업 듣느라 힘들었지? 한 대 피우고 정신 좀 차려.”다급해진 강지연은 온하준이 자기 말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순식간에 그의 앞으로 떠밀리듯 날아가 소리쳤다.“온하준! 피우지 마!”하지만 온하준은 망설임도 없이 이하나가 내민 담배를 입에 물었고 이하나는 라이터를 켜 그 담배 끝에 불을 붙여주었다.강지연은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번 꿈에서만 해도 그는 담배를 처음 피워 사레에 걸렸었다.그런데 이번에는 들이마시는 모양도, 내뿜는 손놀림도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온하준! 너 진짜 너무 실망이야!”강지연은 온하준 앞에 떠 있는 채 그와 이하나가 함께 담배 연기를 내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짙고 무거운 무력감이 한꺼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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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4화

문득 자신의 지난 생 전반을 떠올린 강지연은 눈시울이 시큰해졌다.이 시공간의 강지연은 자신보다 훨씬 단단했다. 아마도 일찍부터 고모와 오빠를 만나 충분한 버팀목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친부모에게 짓눌릴 일도 없었고 그들이 할머니를 괴롭힐까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몰랐다.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믿었다. 이 시공간의 강지연은 자신의 지난 생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게 될 거라고.그리고 눈앞의 상황은 분명 온하준도 이렇게까지 흘러갈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그는 한순간 말문이 막힌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김도진은 아예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 당장이라도 온하준과 선을 긋고 싶은 사람처럼 굴었고 반면 이하나는 피식 웃더니 오히려 온하준 쪽으로 다가섰다.“하준아, 너...”“너 입 다물어.”강지연의 손끝이 그대로 이하나를 겨눴다.“쟤처럼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싶지 않으면 입 닥쳐.”이하나는 순간 머쓱한 얼굴로 온하준 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온하준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녀 역시 본능적으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바로 그때였다. 두 개의 목소리가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너희 씨발 감히 걔 머리카락 하나라도 건드리면...”차유준과 이승우가 동시에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두 사람은 강지연이 이곳으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라도 안 좋은 일을 당할까 봐 급히 뒤따라온 참이었다.그런데 막상 안으로 들어와 마주한 광경은 예상과 완전히 달랐고 둘 다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강지연은 모두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고 이곳은 이미 완전히 그녀의 무대가 되어 있었다.소란을 듣고 당구장 사장도 달려왔다. 마침 강지연이 찾던 사람도 바로 그였다.“당신이 여기 사장이에요?”강지연이 물었다.“예.”사장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얼떨떨한 얼굴이었다.강지연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다가 차유준과 이승우를 발견하고는 당구대를 가리키며 말했다.“부숴. 돈은 내가 물어줄 테니까.”차유준과 이승우는 얼빠진 표정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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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5화

학교에 도착해 교문을 지나고 교실 건물 앞에 이르자 어린 강지연은 차유준과 이승우에게 먼저 교실로 올라가라고 했다.그리고 풀이 죽은 온하준만 그 자리에 남겨두었다. 그림자처럼 떠 있던 강지연은 두 사람 사이에 머물며 그들의 대화를 들으려 했지만 한동안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어린 강지연은 온하준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고 온하준은 끝내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꼭 잘못을 저지른 문제아 같았다.“온하준.”마침내 어린 강지연이 입을 열었다.“너 지난 학기 기말고사 이과에서 전교 200등 했더라. 무슨 생각이야?”‘뭐라고? 200등?’화가 치민 강지연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온하준, 너 뺨을 몇 대 더 맞아야 했네. 차라리 흠씬 두들겨 맞는 게 낫겠다.’하지만 온하준은 여전히 침묵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린 강지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사람들은 네가 다른 학교 애들이랑 어울려서 망가졌다고 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넌 원래 자기 관리 철저한 사람이잖아. 네가 스스로 망가지려는 마음이 없었으면 누가 널 끌고 가도 이렇게 안 됐어. 그러니까 지금 네가 이 모양이 된 건 결국 네 선택이라는 뜻이야. 그런데 이거, 네 할머니도 알고 계셔?”할머니 이야기가 나오자 온하준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눈빛에 순간 불안이 스쳤다.“걱정하지 마.”어린 강지연이 말했다.“난 네 할머니한테 말 안 할 거야. 너보다 네 할머니가 더 안쓰러우니까. 이렇게 불효하는 손자 때문에 할머니가 마음고생하게 두진 않을 거야. 나는 그냥...”어린 강지연은 잠깐 말을 멈췄다.“됐어. 온하준, 내가 너를 찾아온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네가 말하기 싫으면 나도 더는 억지로 안 물을게. 대신 앞으로는 네가 알아서 해. 계속 이렇게 망가지고 싶으면 그렇게 망가져. 난 그냥, 애초에 널 알지도 못했던 걸로 할 테니까.”그 말을 끝으로 어린 강지연이 돌아서려 하자 그제야 온하준이 입을 열었다.“나...”하지만 그 한 글자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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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6화

결국 강지연은 깨어났다. 눈을 떴을 때는 해성 집의 침실이었고 그저 오후 내내 낮잠을 한 번 잔 셈이었다.깨어난 뒤에도 온하준이 마지막에 어린 강지연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몸만 유난히 무겁고 지칠 뿐이었다.며칠 뒤 강시우가 귀국했고 국내 회사 일들을 보름쯤 처리한 뒤 세 사람을 데리고 다시 베르덴으로 돌아갔다.그 뒤로 강지연은 다시는 그 꿈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몇 달이 지나고 강지연은 어쩌면 그 모든 일은 정말 꿈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소설 속 이야기처럼 주인공이 길고 긴 또 하나의 삶을 살아낸 것 같았지만 결국은 한바탕 꿈에 불과했던 것처럼.여름이 왔고 다시 에딘버러 페스티벌이 열렸고 강지연은 이미 무용단으로 복귀해 있었다.단원들과 함께 반년 넘게 새 작품을 다듬은 끝에 마침내 에딘버러 페스티벌을 앞두고 새로운 무대를 완성해 냈다.그리고 다시 한번 동양적인 아름다움으로 예술제 전체를 뒤흔들었다.이번 예술제에서는 세레니아의 옛 친구들과도 다시 만났고 그들은 진심 어린 얼굴로 강지연에게 다시 세레니아로 와 달라고 청했다.강지연과 민다혜는 기쁜 마음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에딘버러에서 돌아온 뒤 무용단은 잠시 휴식에 들어갔다.단원 중에는 휴가를 떠나는 사람도 있었고 귀국하는 사람도 있었다.강지연은 강희라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발코니에 앉아 홍순자와 함께 티타임을 즐기다가 문득 꿈속에서는 아마 수능이 이미 끝났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지금쯤이면 다들 합격 통지서를 받았겠지. 과연 그들은 각자 원하던 학교에 붙었을까?’“지연아?”갑자기 할머니가 그녀를 불렀다.“네?”강지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넋이 나갔네.”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아, 아무것도 아니에요.”강지연은 웃어 보였다.“에딘버러에서 춤췄던 일이 생각나서요.”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털어냈다. 그저 꿈일 뿐인데 괜히 너무 몰입한 건 아닌가 싶었다.그런데 바로 그날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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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7화

강지연은 그들 사이에 떠 있는 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우정이 완전히 깨진 것 같지는 않았다.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화기애애한 얼굴로 한자리에 모여 밥을 먹고 있을 리 없었으니까.헤어짐이 아쉬웠던 이승우는 이 사람 붙잡고 울고 저 사람 붙잡고 또 울고 한참을 이리저리 매달리며 훌쩍거렸다.그 바람에 분위기는 점점 더 울적해졌고 결국 최아현과 강지연까지 같이 울고 말았다.차유준은 이러다간 정말 눈물로 밤을 새우겠다 싶었는지 하나하나 달래가며 분위기를 수습하더니 이쯤에서 헤어지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어느덧 시간은 새벽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들은 건물 아래로 내려와 차를 기다렸다. 곧 강지연의 경호원이 차를 가져왔는데 네 사람이 충분히 탈 수 있었다.“너희 먼저 타. 난 볼일이 좀 있어.”온하준이 말했다.“하준아, 너 타. 난 택시 타고 가도 돼.”차유준은 울먹이던 셋을 먼저 차에 앉히고 말했다.“됐어. 진짜 괜찮아.”온하준은 그를 재촉했다.“너 먼저 가. 난 가게 좀 정리하고 가야 해.”차유준은 잠시 침묵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내일 바로 정리하는 거야?”“응. 빨리 정리하고 할머니 모시고 진경시로 가야지.”차유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렸다.“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빨리 가. 나는 조금 더 있다가 갈 거야.”온하준은 차유준의 등을 떠밀어 차에 태웠다. 그리고 그 차가 멀어질 때까지 한참 바라보다가 그제야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 식당으로 돌아갔다.식당 안에는 온하준이 따로 쓰는 사무실이 하나 있었고 사무실로 들어간 그는 곧 짐 정리를 시작했다.개인 물건과 읽었던 책들, 갈아입을 옷들, 신발 몇 켤레, 자잘한 잡동사니까지 하나하나 챙겨 가방에 넣었다.책상 위에는 사업자 등록증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도 집어 들었다.강지연이 가까이 가서 보니 등록증에는 온하준의 할머니 이름이 적혀 있었다.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식당을 열 당시 온하준은 아직 미성년자였으니까.아까 차유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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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8화

먼저 티셔츠를 벗고 그다음에는 벨트를 풀고 바지까지 벗었다.‘설마 속옷까지 여기서 벗으려는 건 아니겠지?’“온하준!”강지연은 결국 비명을 질렀다.하지만 당연하게도 온하준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고 태연하게 계속 옷을 벗었다.강지연은 필사적으로 시선을 틀었고 한참 애를 써서야 겨우 눈을 다른 쪽으로 돌릴 수 있었다.욕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그녀는 간신히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시 온하준의 방을 둘러보았다.온하준의 짐은 이미 거의 다 정리돼 있었고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상태였다.책상 위에는 여러 물건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문득 온하준의 계획표가 궁금해진 강지연이 그쪽으로 떠가자 책상 위에는 예전에 자신이 글을 남겼던 그 연습장 종이가 맨 위에 놓여 있었다.[온하준, 나랑 한 약속 잊지 마. 김도윤, 김도진, 이하나랑 어울리지 마. 걔들이랑 같은 대학도 가지 말고 친구도 되지 마.]투명한 그림자 같은 자신이 온 힘을 다해 연습장 위에 남겼던 글이었다.그 위에는 온하준이 적어놓은 문제 풀이 흔적까지 겹쳐 있었다. 그런데 온하준은 그걸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었다.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데도.‘대체 안 버리고 가지고 있는 이유가 뭐야?’생각에 잠겨 있을 즈음 욕실 문이 열리고 온하준이 나왔다. 그는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허리에 수건 하나만 두르고 있었다.이 시기의 온하준은 아직 몸이 얇았다. 운동을 해서 근육은 단단하게 잡혀 있었지만 어른 남자의 두터운 몸이라기보다 소년 특유의 마른 근육에 가까웠다.그는 그렇게 젖은 몸 그대로 방 안을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녔다.“이건 다 진경시에 가져갈 것들이고.”온하준은 혼잣말하며 책상 위에 쌓여 있던 물건들을 상자 안으로 하나씩 넣기 시작했다.강지연은 그림자처럼 그 물건 더미 위에 떠서 자신이 글을 남겼던 그 종이가 온하준의 손에 의해 상자 안에 담기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뭐야? 아니, 할머니한테는 많은 걸 챙길 필요 없다고 해놓고 정작 너는 이런 종잇장 하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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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9화

세레니아의 겨울은 이제 익숙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다.강지연은 무용단 동료들과 함께 호텔에 짐을 푼 뒤 곧장 연습과 리허설에 매달렸고 첫날부터 녹초가 될 만큼 일정은 고됐다.처음 세레니아에 온 몇몇 새 단원들은 야시장에 가보자며 들떠 있었고 강지연은 피곤하긴 했지만 결국 그들을 따라 함께 나갔다.한참을 구경하고 이것저것 먹으며 걷다가 마침내 그녀는 그 도자기 가게를 보았다.그 커다란 도자기 항아리 두 개는 지금도 베르덴 집에 있었다.강지연은 가게 앞에 멈춰 서서 항아리 하나를 품에 안은 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봤다.가게 주인인 젊은 여자는 강지연이 마음에 들어 하는 줄 알았는지 아주 좋은 가격에 줄 수 있다며 반갑게 말을 걸어왔고 그제야 강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항아리를 내려놓았다.마침 무용단 동료들이 뒤에서 그녀를 불렀고 그녀는 다시 사람들 틈으로 돌아가 함께 걸어갔다.그날 밤 잠들기 직전까지도 강지연은 이상하게 온하준이 등불 너머에서 돌아보며 웃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그리고 그녀는 또다시 꿈속으로 들어갔다.이번에 강지연이 도착한 곳은 그녀가 다녔던 무용대학이었다. 너무도 익숙한, 그녀의 모교였다.그곳 역시 겨울이었고 오늘은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차유준은 두툼하게 옷을 껴입은 채 조각상 옆에 서 있었고 눈이 그의 어깨와 머리 위로 소복이 내려앉고 있었다.그의 손에는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고 얼굴은 넋이 나간 듯 멍했으며 눈빛에는 짙은 의문과 혼란이 가득했다.멀리서 강지연이 달려왔다. 손을 흔들며 그를 부르는 모습은 마치 사슴처럼 가볍고 경쾌했다.차유준 앞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숨을 조금 몰아쉬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꾸밈없는 웃음이 가득했고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차유준.”강지연은 너무 빨리 뛰어온 탓에 가볍게 숨을 고르며 말했다.“진짜 미안. 오늘 같이 놀러 가기 힘들 것 같아. 새해맞이 공연 연습이 잡혀서 수업 끝나고 바로 연습 들어가야 하거든. 교수님께서 빠지면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으셔서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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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0화

구체적으로 적힌 글은 이랬다.[차유준, 이 글을 보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 줘. 왜냐고 묻지도 말아 줘. 나도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니까. 광활한 우주에는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도 많아. 너와 같은 반 친구가 될 수 있어서, 형제 같은 사이가 될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 네 발자국을 따라 네가 걸었던 길을 걸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고 잠시나마 네가 되어 너 대신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다행이었어. 남은 생은 부디 평안하고 순탄하게,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란다.]강지연은 그 글자들 위에 떠서 그것을 내려다보았고 그녀의 시야 속에서 차유준의 속눈썹이 서서히 젖어 드는 것이 보였다.그때 어디선가 종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그녀의 가슴 한가운데를 묵직하게 두드렸고 알 수 없는 통증이 천천히 번져왔다.희미하게는 염불 같은 소리까지 들려오자 관자놀이도 지끈지끈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그리고 아득하고 먼 기억 속에서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다음 생이 있다면 난 정말 그 사람 소원을 하나하나 다 이루어주고 싶어.”띵.무슨 벨 소리 같은 것이 울리더니 강지연은 꿈에서 그대로 굴러떨어지듯 빠져나왔다.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단장님, 죄송해요. 제가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안 해놨네요.”같은 방을 쓰고 있던 민다혜는 메시지 알림 때문에 강지연이 깬 게 미안한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강지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괜찮아. 그냥 꿈꿨을 뿐이야.”“악몽이었어요?”민다혜가 걱정스레 물었다.강지연은 잠시 망설였다. 그걸 정말 악몽이라고 해야 할지, 아닌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아직 날도 안 샜으니까 좀 더 자.”강지연은 다시 누우며 급히 눈을 감았다. 차유준의 노트에 적혀 있던 글자들이 아직도 눈앞에 선명했다.너무도 익숙한 필체였고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의 글씨였다.다시 꿈속으로 들어가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꼭 알고 싶었다.하지만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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