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Chapter 721 - Chapter 730

775 Chapters

제721화

최아현은 주시은의 휴대전화를 꽉 쥔 채 그대로 카카오톡을 열었다. 그리고 대화 목록을 훑더니 ‘하나HN’이라는 이름의 채팅방을 눌렀다.대화창에는 음성 메시지가 줄줄이 쌓여 있었다. 최아현이 재생 버튼을 누르자 스피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시은아, 겁먹지 마. 우리 엄마와 교감 선생님 사이가 좋거든. 그러니까 이 학교에서 감히 나를 건드릴 사람은 없어. 내가 말한 대로만 해. 일 끝나면 반클리프는 네 거야.”바로 아래에는 사천 원 송금 기록이 있었고 그 밑으로 짧은 문자가 이어졌다.[이거로 밀크티 사 마셔.]강지연은 그 음성을 듣는 순간, 교감이 왜 그렇게까지 신고를 막으려 했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그리고 의심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게시판도, 오늘 샤워실도, 결국 시작점은 이하나였다.최아현도 ‘교감 선생님’이라는 단어에 잠깐 얼어붙었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카메라를 단단히 고정해 휴대전화 화면이 또렷하게 들어오도록 맞췄다.음성 재생 화면, 송금 내용과 메모, 교감 선생님이 언급된 부분까지 한 글자도 빠짐없이 찍었다.한 번은 음성을 재생한 채로 또 한 번은 음성을 문자로 변환한 화면까지 꼼꼼하게 남겼다.촬영을 마친 뒤 최아현이 강지연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됐어.”그제야 강지연이 말했다.“이제 얘 폰에 있는 영상은 완전히 지워.”최아현은 주시은의 휴대전화에서 촬영본을 찾아 영구 삭제까지 끝냈다.그동안 주시은은 강지연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였다. 조금만 몸을 비틀어도 두피가 찢어질 듯 아팠다. 영상이 삭제된 걸 확인하자 울먹이며 애원했다.“이제... 이제 놔주면 안 돼?”하지만 강지연은 바로 손을 놓지 않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훑었다.늘 약한 애들만 골라 괴롭히고 밖에서 노는 애들과 엮였다는 걸 힘인 양 휘두르며 학교 안을 휘젓고 다니던 아이들이었다.“너희 폰도 다 내놔.”강지연이 남은 네 명을 똑바로 노려봤다.이들은 학교에서도 약한 자를 괴롭히고 강한 자를 두려워하는 무리였다.평소에는 성격이 유약한
Read more

제722화

야자까지 남은 시간은 십 분 남짓이었다.최아현은 강지연이 걱정돼 문과반 교실까지 함께 따라 들어왔다.강지연의 자리는 창가 옆이었다. 답답한 기분에 창문을 열어 환기라도 시키려던 순간, 아래층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나무 아래, 온하준과 이하나가 마주 서 있었다.무슨 말을 주고받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이하나가 온하준 앞에서 눈물을 훔치는 모습만은 너무 선명했다.“저 멍청이, 또 이하나한테 넘어간 거 아니야?”말이 끝나기 무섭게 최아현은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고 강지연이 불러도 돌아보지 않았다.창밖의 두 사람은 여전히 마주 선 채였다. 그러다 이하나가 갑자기 온하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강지연은 더 보고 싶지 않았다. 몸을 돌려 자리에 앉으려던 순간, 아래에서 고함이 터졌다.“너희 지금 뭐 하는 거야! 창피하지도 않아?”최아현이었다. 정말 빠르기도 했다.그 소리에 두 사람은 급히 떨어졌고 곧바로 소란이 시작됐다.최아현은 이하나가 뒤에서 저지른 일을 떠올리자마자 곧장 이하나 쪽으로 달려들었다.손이 먼저 나가려는 걸 온하준이 붙잡았고 양 손목을 꽉 쥔 채 움직이지 못하게 막아섰다.“놔! 너 얘가 무슨 짓했는지 알고도 감싸? 너 계속 감싸면 절교 정도가 아니라 나랑 강지연한테 넌 평생 원수로 남을 거야! 절대 용서 못 해!”목소리가 커지자 건물 위쪽 창문들이 하나둘 열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구경하는 얼굴들이 늘어났다.온하준은 굳은 표정으로 최아현과 이하나 사이를 가로막았다.“진정 좀 해.”“너!”최아현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샤워실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온하준은 남자였고 강지연이 그 일을 남자애가 알게 되는 걸 원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게다가 보고 있는 눈이 너무 많았다. 여기서 한마디만 새어도 소문은 또 다른 괴물이 되어 돌아올 게 뻔했다.온하준이 뒤돌아서서 이하나에게 낮게 말했다.“너 빨리 가.”이하나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마치 자기가 가장 큰 피해자인 것처럼 입을 막
Read more

제723화

최아현은 말을 끝내자마자 다시 뛰어갔다.마음이 너무 아팠다. 강지연이 오늘 하루 겪은 일들 때문이기도 했고 온하준과의 우정이 이제는 완전히 무너진 것만 같아서이기도 했다.강지연은 최아현이 우는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아려 곧장 계단을 뛰어 내려갔고 건물 옆에서 최아현과 마주쳤다.최아현은 강지연을 보자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더니 급히 손등으로 눈물을 문질렀다.우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은 듯했지만 눈물은 오히려 더 쏟아졌다. 닦을수록 번져 볼까지 흥건하게 적셨다.강지연의 마음도 같이 시큰해졌다.사실 강지연은 이곳으로 돌아오면서 최아현이나 온하준 같은 또래들과는 다른 마음이었다.대책 없이 울고 웃는 청춘의 감정, 단숨에 달아올랐다가 또 단숨에 식어 버리는 마음.강지연은 이미 그런 시절을 한 번 지나왔고 다른 시간 속에서 너무 오래 살아 버렸다.그래서 이하나의 모함도, 샤워실에서의 모욕도, 온하준의 부재도, 심지어 온하준이 이하나를 감싸는 모습까지도 그녀를 크게 흔들지는 못했다.화가 치밀지도 않았고 오히려 담담했다.그런데 최아현이 이렇게 무너지는 걸 보자 마음이 아파졌다.아무 계산도 망설임도 없이 오로지 강지연만을 위해 움직이는 그 마음이 정말 고맙고 따뜻하게 느껴졌다.강지연은 아직도 울고 있는 최아현의 손을 꼭 잡았다.“아현아, 고마워.”그 말에 최아현은 더 크게 울었다.“뭐가 고마워.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데...”“아니.”강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넌 이미 많은 걸 해 줬어. 잘해 줘서 정말 고마워.”그녀는 최아현의 심리를 알고 있었다. 최아현은 줄곧 강지연이 무용을 전공해서 여리여리할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사실 강지연은 겉보기엔 그저 날씬해 보일 뿐, 온몸이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어 힘이 세고 단단했다.“잘해 주긴 뭘 잘해 줘. 널 지켜 주지도 못했는데.”최아현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닦았다. 분명 강지연을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 사람은 오히려 가해자를 감싸고 있다는 생각에 더 화가 치밀었다.“너는 나한테
Read more

제724화

차유준이 보낸 건 짧은 영상 하나였다.학교 CCTV. 아침 여섯 시 이후 통째로 먹통이 됐다고 했던 바로 그 구간이었다.강지연은 숨이 턱 막혔다.“이걸 어떻게 구했어?”차유준은 태연하게 웃었다.“내가 알아서 했어. 너는 신경 쓰지 마.”그러고는 한 박자 쉬었다가 덧붙였다.“누가 했는지만 알면 되잖아. 어떻게 해결할지는 내가 생각할게.”강지연은 차유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너 오늘 오후에 조퇴한 거 설마 이거 때문이야?”차유준은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강지연은 순간 목이 잠겨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이걸 어떻게 구한 건데? 신경 쓰지 말란다고 내가 정말 신경 안 쓰겠어?”차유준은 잠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학교 보안 시스템에 허점이 있어. 그걸 파고들어서 지워진 원본 데이터를 복구했지.”강지연의 눈이 커졌다.“학교 보안 시스템을 건드렸다고? 그걸 어떻게?”‘넌 문과생이잖아. 어떻게 컴퓨터를 알아.’강지연은 뒤의 말을 끝까지 잇지는 않았지만 차유준은 그 뜻을 알아차린 듯 웃으며 되물었다.“왜? 나 문과라서 컴퓨터 못 할 것 같아? 문과반이라고 컴퓨터를 못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나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강지연이 급히 손을 내저었다.“그냥 너무 의외라서.”그 순간 강지연은 마음속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확 밀려오는 걸 느꼈다.차유준은 괜찮냐는 말로 달래지 않았고 걱정하지 말라는 말로 헛된 위로를 건네지도 않았다. 그저 지금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걸 정확히 가져다주었다.“고마워.”고마운 마음과 함께 곧바로 미안함도 밀려왔다.“그런데 너한테 문제 생기면 어떡해? 학교 네트워크를 건드린 거면...”“그럴 리 없어.”차유준이 단호하게 잘랐다.“흔적을 안 남겨서 못 찾아. 너는 그냥 나한테서 받은 거라고만 해. 어떻게 구했는지는 내가 설명할게. 답은 다 준비해 놨어.”강지연은 잠깐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물었다.“차유
Read more

제725화

“넌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거야?”온하준의 목소리가 차갑게 강지연의 등 뒤에서 울렸다.강지연은 걸음을 멈췄다.‘두렵다니? 무슨 소리지?’“선생님이 나이도 어린 애들이 연애한다고 생각할까 봐?”온하준의 말투에는 따져 묻는 기색이 섞여 있었고 한층 더 날이 서 있었다.강지연이 놀라 돌아봤다.“아니야.”“그러면 뭐가 두려운 건데?”온하준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굳어 있었다.“우리 아무 사이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두려워?”강지연은 입술을 달싹였다.“난 그냥...”강지연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아까 실수한 거야. 순간 생각 없이 말이 나간 거야...”온하준은 차가운 표정으로 한참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강지연은 어이가 없었다. 온하준이 언제부터 거기 와 있었는지도 몰랐고 왜 왔는지도, 무슨 이유로 그런 말을 던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그날 밤 강지연의 마음은 내내 복잡했다.모함을 당해서도 아니었고 샤워실에서 사진을 찍힌 일 때문도 아니었다. 온하준과 차유준 때문이었다.잠자리에 누우니 두 사람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그렇게 뒤척이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잠도 깊지 않았다. 어렴풋이 강희라와 강시우의 목소리가 들렸다.강희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하이고, 이번엔 지난번보다 더 오래 자네. 도대체 언제 깰까?”“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가 몸 상태는 좋다고 했잖아요. 매일 마사지해 주고 물리치료 하면서 근육만 살려 두면 돼요. 영양 수액도 계속 맞고 있으니 괜찮을 거예요.”“그래도 뭔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가서 무당이라도 좀 알아볼까?”“그래요. 제가 오늘 알아볼게요.”그 말을 듣는 순간, 강지연은 이곳이 베르덴의 집이라는 걸 알아차렸다.그 뒤에 무슨 이야기가 더 오갔는지는 흐릿했다. 할머니가 올라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강지연은 마음이 급해졌다. 이번에는 예전처럼 꿈속의 세상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다.해결해야 할 일이 많았고 자신이 사라지면 이
Read more

제726화

순간 굳어 버린 강지연은 피가 단숨에 머리끝까지 치솟는 느낌이었다.본능적으로 노트를 주우려 손을 뻗었지만 온하준이 먼저 집어 들었다. 그의 얼굴에 잠깐 걸려 있던 웃음은 그 한 줄을 읽는 순간 그대로 굳어 버렸다.거칠게 숨을 내뱉는 온하준의 모습에 강지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이거 무슨 뜻이야?”온하준의 목소리는 심하게 잠겨 있었고 매 단어는 목구멍에서 겨우 짜내듯 흘러나왔다.“내가 그렇게 싫어?”“아무 뜻 없어.”강지연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노트를 되찾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온하준은 노트를 더 세게 움켜쥔 채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강지연, 똑바로 설명해 봐.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나를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거야?”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묻어 있었다.“네가 뭘 잘못한 건 없어.”강지연이 작게 말했다.“내 문제야. 너랑 상관없어.”정말 그랬다. 어제 그가 이하나와 무슨 이야기를 했든, 뭘 했든, 그건 오늘의 결심과는 별개였다. 이곳으로 돌아온 첫날부터 마음속으로 이미 정해 둔 목표였다.하지만 온하준에게는 그 말이 더 듣기 싫었던 모양이었다.“네 문제? 나랑 상관없다고?”온하준은 그 말에 완전히 격분한 듯 강지연의 손을 덥석 붙잡더니 그대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너무 강한 힘에 그녀의 손목은 순간 하얗게 질렸다.“온하준, 뭐 하는 거야!”최아현이 다가와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온하준은 갑자기 강지연을 홱 잡아당겨 자기 품 쪽으로 끌어넣었다. 강지연은 당황스러웠다.여긴 학교였고 이들은 아직 고등학생이었다. 이렇게 안고 있는 모습을 선생님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난리가 날 게 뻔했다.“놔. 좋게 말로 하면 되잖아.”하지만 온하준은 이미 좋게 해결할 마음이 없는 듯했다.“나 강지연이랑 할 말 있어.”온하준은 강지연을 끌어안은 채 최아현을 향해 말했다.“따라오면 강지연 그냥 메고 갈 거야.”최아현이 그 말에 얼어붙은 사이, 온하준은 이미 강지연을 끌고 멀어지고 있었다.“온하준! 돌아와!
Read more

제727화

“안 중요하다고?”온하준은 이를 악물더니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제기랄, 내가 이하나랑 어떻게 되든 너한텐 아무 상관도 없다는 거야?”강지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아니, 이야기가 왜 여기로 튀는 거지?’온하준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말을 쏟아 냈다.“안 중요하다면서 내 앞에서 울긴 왜 울어? 안 중요하면 이하나랑 같이 있는 게 싫다는 소리는 왜 했는데? 안 중요하면 스피치 대회는 왜 나간 거고 안 중요하면 왜 기어코 이하나를 내 가게에서 쫓아내려 한 건데? 그리고 내 허벅지는 왜 만진 거...”“야, 잠깐만!”강지연이 다급히 말을 잘랐다.“네 허벅지를 만진 건...”하지만 왜 그랬는지는 끝내 말할 수 없었다. 그게 더 답답했다.온하준이 말한 일들은 사실이었지만 의도는 그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뭔데? 이유를 말해 봐.”섬뜩할 만큼 번뜩이는 그의 눈빛이 지금 이 순간의 그를 유난히 공격적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어떻게 말해. 네가 다칠까 봐, 그런 끝을 맺지 말라고 그랬다고는 말할 수 없잖아.’“아무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강지연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말했다.“또 도망가네.”온하준은 노트를 들어 그녀의 눈앞에 들이밀었다.“그러면 이것부터 말해. 나는 이하나와의 관계를 이미 너한테 분명히 말했어. 걔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어제도 내가 걜 만나러 간 게 아니라 걔가 나 붙잡고 매달린 거야. 봐 달라고.”강지연이 손을 내리며 되물었다.“봐 달라고? 네가 뭘 했길래 걔가 봐 달라고 해?”온하준은 차갑게 웃었다.“그래, 넌 당연히 내가 뭘 하는지 모르겠지. 네 눈엔 차유준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이유가 차유준 때문이야?”온하준은 노트를 든 채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숨결이 강지연의 얼굴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이미 차유준을 선택해 놓고 왜 나를 건드리는 건데? 그렇게 건드려 놓고 이제 와서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비켜!”강지연이 그의 얼굴을 밀어내며 목소리를 높였다.“난 누구도 고
Read more

제728화

온하준은 오늘 완전히 그 노트에 꽂혀 있었다. 그는 노트를 다시 강지연의 눈앞에 들이밀며 윽박지르듯 말했다.“봐. 이 문장. 똑바로 보고 네가 직접 읽어.”강지연은 말문이 막혔다.“강지연, 내가 하나 알려 줄게. 이미 늦었어. 게임은 네가 시작한 거야. 그런데 끝내는 건 너 혼자 정하는 거 아니야. 빨리 읽어.”‘진짜 미친놈 같아.’강지연은 속으로 욕을 삼키며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그... 그게...”말끝이 자꾸 흐려졌다.“절대... 절대 온하준을... 좋아하지 말 것.”온하준은 강지연이 직접 읽는 걸 듣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네가 이 글을 쓸 때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분명히 말하는데 먼저 나를 흔든 쪽은 너야. 내가 물러나려고 했는데 네가 다시 와서 건드렸잖아.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하지 말라 해 놓고 이제 와서 도망가려고? 그건 안 되지.”온하준은 그 페이지를 찢어 일부러 천천히, 조각조각 잘게 찢어 버렸다.“온하준, 잠깐만...”강지연은 이제는 정말 그와 확실히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내 말 좀 들어. 나 진짜 그런 뜻 아니야. 나는 이하나가 어떤 애인지 알고 그래서 예전에 친했던 친구로서 네가 안 속았으면 해서 그랬어. 그래서...”온하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강지연을 바라봤다. 마치 계속 지어내 보라는 눈빛 같았다.강지연은 갑자기 무력감이 몰려왔다.“온하준, 나 진짜 너를 속인 적 없어. 내가 너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이미 서른을 넘긴 그녀가 이 세계의 온하준을 좋아할 수는 없었다.그 말에 온하준의 눈빛이 한순간 어두워졌다. 강지연도 이 순간에 묵직한 분위기를 선명하게 느꼈다.그녀는 상처받은 듯 씁쓸해진 온하준의 얼굴을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다 결국 참아 냈다.온하준이 이하나를 좋아하게 되는 것만 막으면 그것으로 그녀의 임무는 끝나는 것이었다. 강지연은 언젠가 조용히 이곳을 떠날 것이고 그러면 온하준과는 다시는 엮이지 않을 테니까.강지연은 그가 이제 조용히 돌아
Read more

제729화

식당.온하준과 강지연은 구석 자리에 마주 앉았다.온하준의 얼굴은 아직도 붉었다. 귓불부터 목덜미까지 옅은 홍조가 남아 있어 숨만 쉬어도 들킬 것처럼 티가 났다.“달걀 까 줄게.”그는 삶은 계란을 집어 들었다. 손끝은 괜히 조심스러웠고 껍질 하나 까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다 까고는 강지연 앞 빈 접시에 조심히 올려놓았다. 그리고 바로 두 번째 달걀. 다음은 귤. 그다음은 또 귤.강지연은 달걀 껍데기와 귤껍질과 전쟁을 치르는 온하준을 보다가 문득 웃음이 났다.이런 온하준은 처음이었다.강지연의 시선이 계속 닿는 걸 온하준도 느꼈는지 귤을 까는 손이 점점 더 느려졌다.결국 그녀의 끊임없는, 소리 없는 응시를 버티지 못한 듯 온하준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진지하면서도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하면 안 되는 짓을 하게 만들지 말라고.”그런 위협을 빨개진 얼굴로 하니 더 우스웠다.결국 강지연이 웃음을 터뜨렸다.“웃어?”온하준이 귤을 내려놓고 사나운 표정을 지었지만 강지연은 그저 그 모습이 웃기기만 했다.결국 온하준은 그녀의 그런 시선 앞에서 먼저 무너지고 말았다. 얼굴은 새빨갰지만 눈빛만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여기까지 할게. 그... 그 이상은 안 해. 다음은 없어.”서툴렀지만 그 말은 거짓 같지 않았고 강지연은 정말로 믿었다. 이 순간, 어린 온하준의 약속은 진심이라고.그는 스물일곱의 온하준이 아니었고 그녀 역시 열일곱의 강지연이 아니었다.강지연은 눈앞의 어딘가 서툴기만 한 소년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온하준, 우리는 아직 어려. 앞으로 변수가 너무 많아. 너는 지금의 나를 잘 몰라. 나중에 더 잘 맞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입 다물어.”온하준은 삶은 계란을 집어 강지연 입에 툭 밀어 넣었다.“내가 뭘 하는지 나도 잘 알아. 네가 훈수 둘 필요 없어.”그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와 함께 따뜻한 팥죽 한 그릇이 식탁 위에 놓였다. 차유준이었다.강지연
Read more

제730화

“내가 깐 계란을 네가 왜 먹어?”“내가 가져온 팥죽도 네가 먼저 퍼먹었잖아.”“여기 있어. 다시 줄게.”“웃기네. 네가 먹던 걸 강지연한테는 안 주더니 나는 왜 줘? 내가 싫어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해?”“농구할 때 같은 물병 돌려 마신 게 한두 번이냐.”강지연은 걸음을 옮기며 뒤에서 이어지는 두 사람의 싸움 소리에 고개를 저었다.‘차라리 둘이 살아.’그때 최아현이 앞쪽에서 뛰어왔다. 숨이 가빠 보였고 얼굴은 벌써 달아올라 있었다.“강지연! 큰일 났어.”“왜 그래? 무슨 일인데 이렇게 급해?”강지연이 최아현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이것 봐!”최아현은 참아 두었던 분노를 터뜨리며 휴대전화 화면을 강지연의 얼굴 앞으로 들이밀었다.화면에는 지역 커뮤니티 글이 떠 있었는데 제목부터 눈을 찔렀다.[충격! 누군가의 민낯 다시 한번 공개! 교내 폭력 현장 실황!]밑에는 몇십 초짜리 영상이 붙어 있었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잘라낸 영상이었다.샤워실 사건 중에서도 강지연이 이미 옷을 입고 나온 뒤 주시은을 제압하던 장면만 똑 떼어 붙여 놓은 것이었다.편집은 교묘했다.강지연이 한마디를 내뱉는 순간 무표정한 옆얼굴을 일부러 확대했고 반대로 주시은이 겁에 질려 얼굴이 하얗게 된 채 떨고 있는 장면은 길게 살려 대비를 극대화했다.댓글은 이미 쌓일 만큼 쌓여 있었다. 익명으로 쏟아지는 추측과 비난이 지저분하게 넘실거렸다.[나 이 학교 다니는데, 때린 애가 누군지 알아. 평소엔 조용한 척하더니 진짜 무섭네.][맞은 애가 저렇게 떨 정도면 얼마나 무서웠겠어. 소름이다.][쟤 배경도 만만치 않다던데. 매일 비싼 차로 데리러 오는 사람이 있다잖아.][어린애가 벌써 스폰 받는 거야? 요즘 애들 진짜 답 없다.][이거 학교폭력 아니냐? 학교에서는 뭐 하는 거지?]최아현의 눈가가 붉어졌다.“진짜 너무하잖아. 우리 분명 걔네 휴대전화에서 영상을 다 지웠어. 그런데 어떻게 또 퍼진 거지?”“괜찮아. 무서워할 거 없어.”강지연이 담담하게 말하자 최아현은
Read more
PREV
1
...
7172737475
...
78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