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Chapter 751 - Chapter 760

775 Chapters

제751화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왜 경찰차가 왔는지 궁금해했지만 행사는 이미 끝난 뒤였다.모두 몇 걸음 걸을 때마다 한 번씩 뒤돌아보면서도 규율을 지키기 위해 교실로 돌아갔다.그래도 호기심이 완전히 사라질 리 없었다.수업이 끝나자 학생들은 저마다 몰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수소문하기 시작했다.강지연도 나중에야 알게 됐다. 경찰차에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 교무부장과 신아정이 있었다는 것을.며칠 후, 게시판에 공고문이 붙었다. 교감이 심각한 비위 행위를 저질렀다는 내용이었다. 주된 혐의는 뇌물 수수였고 그 과정에 교무부장도 연루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원래 친척 관계이기도 했다.또 지역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던 학교 폭력 사건 역시 그 공고문을 통해 진상이 바로잡혔다.강지연이야말로 진짜 피해자였고 화장실에서 찍힌 그 영상은 편집된 것이었다. 실제로는 강지연이 막다른 상황에서 반격한 장면에 불과했다.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실제 괴롭힘에 가담한 관련자들은 파장이 크고 사안이 악질적인 만큼 전원 징계 처분을 기다리게 됐다.그 일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관련 게시물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삭제됐다.언젠가 다른 이슈가 터지면 이 일도 곧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힐 터였다.그리고 이번 사건에 얽힌 사람들 역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학교에는 곧 새 교감과 새 교무부장이 부임했다.시간이 흐를수록 수능은 점점 더 가까워졌고 모두 다시 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이하나, 주시은, 신아정은 다시는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로 갔는지 강지연도 몰랐고 더 이상 관심도 두지 않았다.어쨌든 다른 시공간에서 벌어졌던 비극만 다시 반복되지 않으면 됐다. 강지연은 그저 온하준이 다시는 그 사람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이번 소동도 서서히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이 없어졌다.아무리 큰 화제라도 결국 시간이라는 강물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기 마련이었고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다만 강지연에게 오빠 이야기를 묻는 사람들만 부쩍 많아졌다.원래부터 아이돌 덕후였던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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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2화

이과 과목이 약점인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그 시절 수능 성적이 형편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탓에 예전에 익혔던 것들은 거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뒤였다.그런 상태로 시험을 본 걸 생각하면 이번 결과도 나쁜 편은 아니었다.“성적 떨어졌잖아. 지난 시험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온하준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강지연은 대꾸하지 않았다. 사실 수학만 떨어진 게 아니었다. 영어를 빼면 다른 과목 성적도 전부 다 내려갔다.수능에서 멀어진 시간이 길수록 머릿속 지식도 점점 희미해지는 법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뒤로 그녀가 해온 일들은 수능 과목들과 별로 관련도 없었다.“영어만 잘해서는 안 돼.”세 사람은 식당으로 가는 길 내내 온하준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자리에 앉아 밥을 먹고 나서도 그 잔소리는 끝날 줄 몰랐다.결국 참다못한 최아현은 두 귀를 틀어막고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적당히 좀 해! 왜 우리 아빠처럼 굴어! 밥도 편하게 못 먹게 계속 잔소리만 하고!”온하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강지연을 한 번 힐끗 보더니 끝내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였다.“매주 며칠씩 보충수업 좀 하자. 이승우한테서 들을래, 아니면 내가 할까?”강지연은 정말 머리가 지끈거렸다.누가 알았겠는가. 서른이 훌쩍 넘은 자신이 다시 돌아와 수능을 치르는 것도 모자라 보충수업까지 받게 될 줄을.“이번 주 일요일 오후부터 시작하자.”온하준이 말을 이었다.“오전 수업 끝나고 바로 가게로 와. 가게에서 밥 먹고 보충수업 시작하게. 내가 살게.”지금 그들에게 주어지는 휴식은 일요일 반나절뿐이었다. 강지연이 아직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최아현이 눈을 반짝였다.“그럼 나는 밥 먹을 시간에만 가도 돼?”온하준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내가 네 아빠야? 네 밥까지 챙겨주게?”그 말에 강지연은 터지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아빠.”최아현은 온하준을 향해 진지한 표정으로 망설임 없이 ‘아빠’라는 호칭을 내뱉었다.강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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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3화

사실 강지연은 늘 의심하곤 했다. 자신이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갔던 일이 꿈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두 개의 평행 시공간이 존재하는 건지.어쩌면 그 모든 게 꿈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이 팔찌는...’강지연이 깨어나자 집안은 금세 부산스러워졌다. 강희라와 강시우는 몇 번이나 그녀의 방을 들락날락했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강지연은 서른을 훌쩍 넘긴 오빠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꿈속에서 막 학교에 기부하고 돌아가던 소년 강시우를 떠올렸다.그 순간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왜 그렇게 쳐다봐?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오빠도 못 알아보겠어?”강시우가 허리를 굽혀 웃으며 말했다.강지연은 늘 강시우가 젊다고 생각했다. 서른이 넘은 나이인데도 세월의 흔적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으니까.그런데 꿈속의 강시우와 비교해 보니 저 눈빛은 정말 여우처럼 능글맞고 노련했다.“오빠, 많이 늙었네요.”강시우의 눈빛이 번뜩였다.“뭐라고? 앞으로 선물 같은 거 없을 줄 알아.”강지연은 웃음을 터뜨렸다.예전처럼 깨어날 때마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의사와 약속을 잡고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는 것이었다.강시우는 밖으로 나가고 강희라가 들어와 그녀의 옷을 갈아입힌 뒤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일 층 가서 엄마 불러올게. 옷 다 갈아입으면 불러.”강시우는 말을 마치고 문을 닫고 나갔다.강지연은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내려다보며 잠금장치를 조심스레 건드렸다.너무 오래 누워 있었던 탓에 관절도 근육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애써 버클을 밀어 움직였다.그리고 거기 새겨진 ‘Jiyeon’이라는 글자를 분명히 보았다. 양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그때 강희라가 방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지연아, 병원 가자.”강지연은 강희라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었다. 잠시 후 강시우가 다시 올라와 그녀를 안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렇게 셋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예전과 마찬가지로 이번 검사 결과도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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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4화

“너...”최아현은 강지연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지연아, 너 왜 이렇게 좀...”“강지연!”멀리서 차유준이 그녀를 불렀다.“그래, 금방 가!”강지연은 미소를 지은 채 차유준 쪽으로 달려가며 최아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최아현, 나 먼저 교실 가서 문제 좀 풀게. 야간 자율 학습 끝나고 같이 기숙사 들어가자.”최아현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강지연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온하준은 언제 왔는지 어느새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서 있었지만 그가 보고 있는 건 최아현이 아니라 뛰어가고 있는 강지연의 손목이었다.“너희 둘 무슨 일 있었어?”최아현은 강지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온하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등을 돌려 제 갈 길을 가버렸다.그 순간 강지연은 여전히 관객 같은 상태였고 시선은 온하준에게 붙들려 있었다.마치 자신의 시야를 스스로 조종할 수 없는 것처럼 계속해서 온하준을 따라가고 있었다.그녀는 이승우가 온하준과 합류하는 모습을 보았다.이승우가 말했다.“하준아, 얘기 다 끝났어. 내일 오후 누리 고등학교로 가자. 김도윤 걔네 학교에서 기다린대.”강지연은 깜짝 놀랐다.‘또 김도윤이랑 어울린다고? 다시는 안 만난다고 분명히 약속했는데.’“알겠어.”하지만 온하준은 강지연과의 약속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쉽게 받아들였다. 강지연은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었다.‘이 한 입으로 두말하는 인간아. 다시는 안 어울린다며? 나랑 약속해 놓고 왜 또 만나는 건데?’하지만 아무리 외쳐도 한 점의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깼다.눈을 뜨자 여전히 베르덴의 집이었고 휴대전화 알람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사실 그녀는 늘 알람을 맞춰두고 있었다. 정말 깊은 잠에 빠져 다른 시공간으로 넘어간 상태라면 알람 따위로는 절대 깨어나지 못했으니까.강지연은 다시 누워 눈을 감았다. 다시 꿈으로 들어가 온하준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잠은 오지 않았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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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5화

하지만 온하준은 강지연을 볼 수 없었다.그는 맞은편의 김도윤과 손을 맞잡으며 환하게 웃었고 강지연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내려다보았다.온하준과 거의 바짝 붙어 있는 자리였지만 그녀는 온하준의 존재를 조금도 느낄 수 없었고 온하준 역시 그녀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그저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온하준이 김도윤과 악수하는 것도, 서로 끌어안는 것도, 다시 어깨동무를 한 채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가자고 약속하는 모습까지도.뒤에서 아무리 소리치고 심지어 온하준의 등에 매달려 목을 조르듯 붙잡아도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다시 그 시절의 자신 쪽을 보니 어린 강지연은 차유준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두 사람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강지연은 마지막 방법이라도 붙잡아 보듯 십 대의 자기 몸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혹시라도 다시 겹칠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이제는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금의 그녀는 그저 온하준이 누리 고등학교를 떠나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심지어 이 꿈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끝내 제 뜻대로 움직이지 못한 채 계속 그들을 따라갔다.그들은 택시를 타고 이동했고 그녀는 온하준이 탄 차 뒤에 매달리듯 따라가다가 결국 그들과 함께 식당에 도착했다.김도윤과 김도진은 이곳에 처음 와본 모양이었다.두 사람은 식당 안을 연신 둘러보며 감탄했고 온하준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두 농구팀은 식당에서 가장 큰 룸에 모여 커다란 한 상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맥주를 마셨다.‘아직 성인도 안 된 애들이 감히 술을 마신다고?’강지연은 온하준 앞으로 훅 다가가 이를 악물고 쏘아붙였다.“너희 지금 술 마시는 거 들키면 큰일이야. 마시지 마!”하지만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었다.최아현과 강지연을 제외한 모두의 앞에 맥주 한 병씩이 놓였고 반병쯤 들어가자 분위기가 확 풀리며 다들 의형제라도 된 듯 가까워졌다.물론 고3들이니 자연스럽게 어느 대학을 목표로 하는지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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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6화

그때 차 안의 자리 배치는 이랬다. 온하준과 최아현이 둘 다 뒷좌석에 앉아 있었고 다시 말해 강지연은 온하준에게 밀리듯 차 문과 그의 몸 사이에 끼어 있는 형국이었다.“온하준.”최아현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울렸다.“너 또 마음 바꾼 거야?”“뭘?”온하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학교 말이야.”최아현이 머뭇거리며 물었다.“너 원래는 진경시에 있는 대학 가려고 했잖아.”“그런 적 없어. 난 처음부터 해성에 남을 생각이었어.”“거짓말하지 마. 너 진경시에 집도 알아보고 있었잖아.”최아현은 슬쩍 그의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일부러 엿들은 거 아니야. 지난번 네가 중개사랑 통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온하준은 잠시 말이 없었다.“친구 부탁받고 알아봐 준 거야. 네가 오해한 거다.”“오해한 거 아니잖아.”최아현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너 강지연 때문이잖아.”온하준은 다시 침묵했다.“맞지? 요즘 지연이가 너한테 별로 신경 안 써주니까 그래서 마음 접은 거지?”최아현이 조심스럽게 떠보듯 말했다.“아니야.”“온하준.”최아현은 목소리를 낮춰 그를 달랬다.“너 그러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다들 친구잖아. 지연이도...”“아니라니까. 그만 얘기해.”온하준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최아현은 한숨을 내쉬고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온하준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 한참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한참 뒤 아주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뱉었다.“지연이는 날 모르는 척하지 않을 거야.”최아현은 그를 빤히 바라봤다. 딱 술 취한 사람을 보는 눈빛이었다.그녀는 마지막으로 한숨을 한 번 더 내쉰 뒤 속으로 중얼거리듯 체념했다.‘그만하자. 나는 지연이 제일 친한 친구고 지연이가 어떤 선택 하든 지지할 거야. 그런데 온하준이 맨날 저렇게 죽을상하고 다니는 건 보고 싶지 않은데.’“넌 아무것도 몰라.”온하준은 그 한마디를 끝으로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정말로 눈을 감고 잠든 듯했다.온하준의 기사는 먼저 최아현을 집에 내려주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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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7화

강지연은 온하준의 방 안에 떠 있었다. 온하준의 학창 시절 방에 와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분위기는 결혼 후의 그와 똑 닮았었다.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이런 방 안에 있으니 마치 결혼했을 때 그녀가 수없이 드나들었던 그의 서재로 다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책상 옆 벽에는 그가 손수 적어 붙인 표가 보였다. 강지연은 가까이 다가가 거기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들여다보았다.지금 그녀의 시야는 마치 그의 책상 위에 떠 있는 것처럼 가까웠다.그건 온하준이 직접 써놓은 학습 계획표였다. 정말 놀라울 만큼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었다.하루의 단 15분조차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있었고 전체 계획 아래로 주간 계획과 월간 계획까지 따로 정리돼 있었다.그리고 그 전체 계획의 마지막 시점은 내년, 그러니까 수능이 끝난 뒤였다. 거기에는 굵은 필체로 여섯 글자가 적혀 있었다.[진경시로 간다.]강지연이 그 글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사이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온하준이 어느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와 머리카락은 흠뻑 젖어 있었고 끝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지금 강지연의 느낌으로는 자신이 그의 책상 위에 쪼그려 앉아 얼굴을 거의 맞댄 채 온하준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자기 손목 위에 닿는 것 같기도 했다.“온하준...”강지연이 작게 이름을 불러봤지만 온하준은 여전히 듣지 못하는 듯했다.당연히 강지연이 책상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방향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리 없었다.솔직히 말하면 두 번의 삶을 통틀어서도 그녀는 온하준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본 적이 없었고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본 적도 없었다.지금은 피부의 모공 하나하나까지 또렷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제야 그녀는 열여섯 살의 강지연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어리고 서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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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8화

그리고 온하준은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담배 한 갑을 꺼냈다. 그 안에서 담배 한 대를 빼 드는 순간 강지연은 어이가 없었다.‘아니, 갑자기 담배는 왜 피우는 건데?’두 세계를 통틀어도 온하준은 원래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아니었다.“온하준!”강지연은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당장 그거 내려놔!”하지만 온하준이 들을 리 없었다. 그는 결국 담배에 불을 붙였고 매캐한 연기에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터뜨렸다.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한참이나 멈추지 않았다.“꼴좋다.”강지연이 콧방귀를 뀌었다.온하준은 결국 담배를 끝까지 피우지도 못한 채 눌러 끄더니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고 그러고 나서야 침대에 몸을 눕혔다.강지연은 그제야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평범한 검은색 볼펜으로 향했다.온 정신을 한곳에 모아 조심스럽게 그 펜에 닿아 보려 하자 다행히 이번에는 잡혔다.그녀는 곧장 온하준이 책상 위에 올려둔 연습장 종이에 글씨를 써 내려갔다.[온하준, 나랑 한 약속 잊지 마. 김도윤, 김도진, 이하나랑 어울리지 마. 걔들이랑 같은 대학도 가지 말고 친구도 되지 마.]정말 죽을 맛이었다. 꿈속에서 고작 이 한 줄을 쓰는 데도 온 힘을 다 쏟아부어야 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허공에 떠 있는 채 거의 모든 힘을 쥐어짜 써 내려간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스탠드의 노란 불빛 아래 글씨체는 조금 흐트러져 있었지만 문장은 또렷했다.무슨 글자인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선명했다. 다만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떠올렸다.‘에이, 됐어. 남기지 말자.’바로 그 순간 온하준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강지연은 놀라 급히 펜을 제자리에 던져놓았고 펜은 책상 위에 떨어지며 딱 소리를 냈다.혹시 들은 건 아닐까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온하준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아마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온하준은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글씨를 남긴 연습장은 그의 오른손 바로 옆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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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9화

강지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팔에 찬 거? 팔에 뭘 찼는데?”홍순자는 여전히 팔찌가 채워진 손목을 잡고 있으면서도 웃으며 되물었다.“아직 잠이 덜 깼니?”강지연은 자기 손을 들어 반짝이는 팔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저 아무것도 안 찼어요?”“그렇다니까.”홍순자도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강지연은 손을 내렸다.“아, 방금 꿈꿨는데요. 제가 새 팔찌를 하나 산 꿈이었어요.”역시 이 팔찌는 이 시공간의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듯했고 강지연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볼 수 없는 모양이었다.그런데 홍순자는 그 말을 그대로 기억해 두었다가 전시를 보고 난 뒤 그녀를 데리고 팔찌를 사러 갔다.강지연이 팔찌를 찬 손을 내밀었다. 점원은 그녀의 피부색을 감탄하며 팔찌를 채워 보이더니 손목에 아주 잘 어울린다고 거들었다.그러고는 새 팔찌를 그녀가 이미 팔찌를 차고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채워주었다.정말 아무도 이 팔찌를 볼 수 없는 게 맞았다.만약 강지연 스스로 그 팔찌가 손목에 닿는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녀조차도 이 모든 게 환각이라고 의심했을 것이다.하지만 그 팔찌는 분명 정말로 그녀의 손목 위에 있었다.그 후로도 강지연은 띄엄띄엄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하지만 더는 어린 강지연과 하나로 겹치지 않았다.꿈속의 그녀는 언제나 허공을 떠도는 관찰자의 시선으로만 남아 그들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을 지켜봐야 했다.무엇보다도, 온하준을.온하준은 그녀와 했던 약속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 늘 김도윤, 김도진과 어울렸다.같이 농구하고 같이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늘 그랬듯 계산은 온하준이 했다.그녀는 투명 인간이었고 심지어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붙어 있어도 온하준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강지연은 몇 번이고 온하준에게 메시지를 남겼다.연습장 위에도 써보고 계획표 위에도 써보고 방 벽에도 써보고 심지어 그가 샤워할 때는 김이 서린 유리 위에도 적어봤다.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온하준은 보지 못했다.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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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0화

‘50등 밖이라고?’온하준은 늘 학년에서 1등을 차지하던 애였다. 강지연은 속이 뒤집혔다.“온하준, 너 지금 대체 뭐 하는 거야?”하지만 온하준은 그저 몸을 곧게 세운 채 서 있을 뿐, 선생님 말씀에도 대답하지 않았고 물론 그녀의 분노 어린 외침 역시 듣지 못했다.“온하준, 무슨 어려운 일 있니? 선생님께 말해 봐. 공부 때문이든, 생활 때문이든, 아니면 감정적으로 혼란스러운 일이 있든, 뭐든 선생님이랑 이야기할 수 있어.”선생님은 꽤 참을성 있게, 정말로 그를 도와주고 싶다는 태도로 말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단 한마디뿐이었다.“감사합니다, 선생님. 제가 뭘 하는지는 저도 잘 압니다.”“너!”선생님은 그 말에 순간 크게 기가 막힌 듯했지만 화를 억누르고 끝까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온하준, 선생님은 네가 원래 자기 생각도 뚜렷하고 자기 관리도 잘하는 아이라는 걸 알아. 사람은 누구나 젊은 시절에 한 번쯤 좌절을 겪을 수 있어. 하지만 한 가지는 꼭 알아야 해. 좌절을 이겨내는 건 절대 방황이나 퇴폐가 아니야. 예전의 너 자신보다, 그리고 네 경쟁자들보다 더 강해지는 것만이 진짜 좌절을 이기는 거다. 네가 이렇게 주저앉아서 계속 무너지기만 하면 그때야말로 정말 남들에게 우습게 보이게 되는 거야.”선생님의 이 말은 강지연도 단번에 알아들었다.온하준이 만약 실연 때문에 무너진 거라면 그렇게 주저앉아 있다고 해서 여자의 마음이 돌아오는 게 아니라 더 강해져야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하지만 온하준이 그 뜻을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지금의 온하준은 삶은 돼지가 뜨거운 물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그저 무심하게 흘려듣는 얼굴일 뿐이었다.“알겠습니다, 선생님.”선생님이 무슨 말을 해도 온하준은 같은 말만 반복했다.대답은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이미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결국 선생님도 더는 어쩌지 못했다. 한참을 애써 타이르며 사상 교육을 한 끝에 온하준을 다시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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