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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1화

장공주 저택.물가의 지은 정자에는 유소영과 아민, 두 사람뿐이었다.“아씨, 장공주 전하께서 옷을 갈아입으러 가신다고 하셨는데 어찌 이리 오래 걸리시는 걸까요?”유소영 또한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하지만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 하면 즉시 누군가 다가와 막아섰으니,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는 태세였다…… 아니, 이건 마치 그녀를 감시하는 것에 가까웠다.장공주가 무슨 속셈인 걸까?설마 대낮에 자신을 저택에 연금하려는 것은 아니겠지?다행히 유소영에게는 암암리에 따르는 호위가 있었다.호위는 이 사실을 즉시 고준형에게 알렸다.고준형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문 뒤였다.정자 주위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유소영은 고준형이 문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았으나, 그는 그녀를 보지 못한 듯 정자를 지나쳐 곧장 내원으로 향했다.그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고준형은 장공주 앞으로 안내되었다.그때 장공주는 식사를 하는 중이었는데, 마치 그를 보고서야 유소영이 아직 저택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듯했다.“내 정신 좀 보게. 여봐라, 가서 세자 부인을 모셔 오너라.”고준형의 눈빛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그럴 필요 없습니다, 전하. 신이 직접 제 처를 데리고 돌아가겠습니다.”그가 몸을 돌리려 하자, 장공주가 그를 불러 세웠다.“고 대인, 기왕 왔으니 본궁과 함께 식사나 하고 가시게.”“신은 공무가 있어……”“고준형. 네가 본궁이 너의 은사 강회산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원망하는 건 안다! 허나 그 옛날, 막북 전쟁에서 본궁의 부마는 누군가가 군량을 횡령한 탓에 억울하게 죽었단 말이다! 그런데 본궁더러 이 원한을 어찌 내려놓으란 말이냐!”장공주의 어조는 차갑고 매서웠다.고준형은 그녀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은사께서 잘못된 길로 드신 것이니, 신은 전하를 원망한 적 없습니다.”장공주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너는 본궁을 원망해야 마땅하다.”“그 옛날 무장들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강회산을 처형하라고 했을 때, 본궁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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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2화

“그래서…… 결과는 어찌 되었습니까?” 유소영은 기대가 무너질까 두려워 조심스레 물었다.고준형은 그녀를 응시했다.“임근의 진술에 따르면, 당시 은사께서 그에게 휘둘려 군량 횡령에 가담하게 된 건 약점을 잡혔기 때문이라더군. 그리고 그 약점이란 게 바로 부인 오라버니의 대리 시험 사건이었소.”유소영의 숨이 턱 막혔다.“대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그렇다면 강회산이 정말 큰오라버니의 대리 시험 사건을 주도했단 말인가?고준형은 평정을 유지했다. 옥처럼 맑은 눈동자는 깊은 연못처럼 가라앉아 있었다.“계속 조사해 보겠소.”“무엇을 말입니까?” 유소영은 고개를 숙인 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부인 오라버니의 사건 말이오…….”“결국, 증거가 확실해도 세자께서는 강회산이 무고하다고 믿으시는군요.” 유소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고준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침착했다. 구구한 변명 따위는 하지 않았다.“이 사건에는 분명 속사정이 있을 것이오.”“시간을 조금만 더 주시오. 내 은사를 대신하여 부인과 유씨 가문에 명확히 해명하겠소.”유소영의 눈빛은 싸늘했다.“그 말씀, 오늘 전각에서 연기하실 때와 별반 다르지 않군요.”“그때 입으로는 물증을 찾지 못했으니 폐하께 시간을 달라고 하셨지요. 그러나 사실은 모든 것이…… 세자의 손바닥 안에 있지 않았습니까.”“그때는 거짓을 고하셨는데, 지금은요? 방금 제 앞에서 하신 말씀은 진심입니까?”고준형의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스쳤다.“내가 굳이 부인에게 거짓말을 해서 무엇 하겠소? 은사는 이미 돌아가셨으니, 설령 부인이 그분을 원흉이라 여긴다 한들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않소. 내가 계속 조사하려는 건 은사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요.”유소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임근을 만나야겠습니다. 그 자의 입으로 직접 들어봐야겠어요.”고준형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규정에 어긋나는 일이오.”“꼭 만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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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3화

고준형은 말을 마치자 문을 열고 나갔고, 방 안에는 유소영 혼자 남겨졌다.유소영은 방금 전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사내와 입을 맞춘 건 처음이었는데, 그토록 격렬할 줄이야…….솔직히 말해서 방금 전 일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라 통제 불능의 감각과 불안함만 느껴질 뿐이었다.의아했다. 무엇을 정리하라는 거지?아민이 들어와 호롱불을 다시 밝히고 나서야 유소영은 자신의 연지가 번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아민의 작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아씨, 지금 후작부로 돌아가시나요?”방 밖.석심이 세자를 뒤따르며 물었다. “세자, 어디 가십니까? 아직 요리도 나오지 않았는데요!”고준형의 눈가에는 아직 열기가 남아 있었고,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다.“따라오지 말고 부인을 잘 지켜라.”“예!”그는 복도 끝으로 가서 창문을 열어젖혔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열을 식히기 위함이었다.정말 미쳤지.어쩌자고 유소영을 형부에 데려가겠다고 했을까.됐다, 놀라게 한 대가라고 치자.이번 한 번뿐이다. 다음은 없어.향이 두 개쯤 타들어 갈 시간이 지난 후.요리가 모두 나왔다.유소영은 수저를 들지 않은 채 문 쪽을 바라보았다.석심이 세자에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즉시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곧이어 고준형이 들어왔다.아민은 세자를 보자 앞선 일이 떠올라 자신이 여기 있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뒤를 돌아보니 아씨가 옷자락을 꽉 붙잡고 있었다.뭐 하시는 거지?고준형은 옷자락을 걷어 올리며 자리에 앉았다. 바람을 좀 쐬고 온 덕분인지 평소의 냉철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유소영의 소소한 행동을 모두 지켜보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토록 괴로운 식사 자리는 처음이었다.유소영은 내내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깐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형부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서둘러 식사를 마쳤다.……..마차 안.고준형은 유소영이 불편해하는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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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4화

황궁.어전 서재.장공주가 건의했다.“황제 오라버니, 이번 사건에 연루된 관원이 워낙 많아 지난날 강회산의 사건을 훨씬 뛰어넘습니다.”“만약 이들을 모조리 처벌한다면 필시 큰 소란이 일어날 것입니다.”“작금에 외환이 가중되어 주변 나라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안으로는 안정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이토록 대규모로 관원을 교체하다가는 빈틈을 노리는 자들이 생겨 조정에 해가 될까 염려됩니다.”“게다가 군량을 횡령한 관원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극악무도한 자들은 아닙니다. 이삭처럼 어쩔 수 없이 그 길로 들어선 이들도 많지요. 단 하나의 과오로 그들의 지난 치적까지 모두 지워버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황제의 눈빛이 엄숙해졌다.“아상, 군량 횡령을 그토록 증오하더니, 어찌 갑자기 그들을 두둔하는 게냐?”장공주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이 모든 건 고준형이 제게 부탁한 말입니다.”“그 아이도 오라버니께서 이 일로 골머리를 앓고 계신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황제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네가 그 부인을 저택에 붙잡아 두고 억지로 시킨 거겠지.”장공주가 짐짓 화난 척했다.“오라버니! 제 저택 일을 어찌 그리 훤히 아십니까? 혹 저를 감시라도 하시는 겁니까?”황제는 다시 정색하며 말했다.“짐은 네가 한순간의 충동으로 임근에게 사형을 가해 사적인 원한을 갚으려 할까 봐 사람을 붙여둔 것이다.”장공주가 고개를 저었다.“제가 이리도 조심했건만...... 결국 오라버니 눈은 속이지 못했군요.”“확실히 조심하긴 했더구나. 이런 상황에서 고준형과 직접 만났다가는 구설에 오르기 쉬우니, 유씨를 다리 삼아 우회하는 방법을 썼지 않느냐. 그러나 그 또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었다.”황제가 노파심에 간곡히 타일렀다.“아상, 부마의 일로 네가 오랫동안 원한을 품어온 건 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권력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장공주는 겉으로는 순종하는 기색을 보였다.“오라버니, 제 걱정은 마세요. 이 나이에 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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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5화

형부 감옥.임근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똑같은 말을 낮에 고준형이 이미 물어보았거늘, 어찌하여 늦은 밤에 또다시 묻는단 말인가?그는 여전히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강회산이 대리 시험을 칠 사람을 구해 위아래를 속였소. 나중에 일이 탄로나자, 그 죄를 몽땅 그 대리 시험자에게 뒤집어씌운 게지.”“그자 또한 무고하지 않으니 감히 폭로할 배짱이 있었겠나. 천한 장사치 주제에 그런 편법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르려 하다니, 가당치도 않은 망상이었지. 그러니 강회산에게 약점을 잡혀 고변조차 못 했던 거야.”어둠 속에 서 있던 유소영은 이 대목에서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녀가 알기로, 오라버니는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대리 시험을 치른 것이었다.오라버니는 자신의 신분을 잘 알기에 감히 헛된 꿈을 꾸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찾아 글을 쓰고,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펼쳐 보이고 싶었을 뿐인데......임근이 말을 이었다.“내가 바로 그 약점을 잡아 그를 협박해 군량 횡령에 가담시켰네.”“이삭이 내 모든 재산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지 않았나. 그중 한 전당포의 귀중품 보관함에 연루된 모든 이들의 약점이 들어 있다네. 강회산의 것도 그 안에 있지.”“그걸 손에 넣으면 알게 될 걸세. 자네의 그 은사란 자가 겉보기에만 청렴결백하지, 실상은 나처럼 명예를 낚는 위선자라는 것을 말이야.”임근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고 대인, 자네 설마 죽어도 믿기지 않아서 다시 물으러 온 건가? 왜, 자네 마음속에선 강회산이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성인군자라도 되는 모양이지!”고준형은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고 질문을 마치자마자 자리를 떴다.홀로 남겨진 임근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어쩐지 놀아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마차 안.유소영은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고 고준형과 함께 후작부로 돌아가는 길이었다.그녀는 강회산의 일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고준형이 그녀를 달랬다.“쓸데없는 생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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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6화

고준형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그 증거들은 어디서 난 것입니까?”이삭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우리가 함께 축하할 줄 알았습니다. 어쨌든 이번 싸움은 꽤 근사하게 해내지 않았습니까.”“임근의 죄증에 관해서는…… 그냥 어떤 신비한 사람이 제게 주었다고 여기십시오. 예를 들면 강호의 의협심 넘치는 의인이 조정의 수사를 도운 셈 치는 겁니다.”“아무튼……”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들어 고준형을 바라보았다. “세자께서 저를 계략에 빠뜨려 그 죄증들을 내놓게 한 건 따지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세자께서도 그 죄증의 출처에 대해서는 굳이 따지지 마시지요.”생신 연회가 끝난 후, 이삭은 모든 걸 깨달았다.고준형은 분명 죄증을 쥐고 있었음에도, 일부러 누명을 씌우는 저급한 수단에 몰린 척했다. 사실 그가 진짜 끌어내려던 건 임근이 아니라 바로 자신, 이삭이었던 것이다…….고준형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인 뒤에 있는 진짜 배후, 정확히 말하면 대인과 강회산의 뒤에 있는 자가 도대체 누구입니까?”이삭은 시치미를 떼며 반문했다.“저희 뒤에 있는 사람이라니요? 임근이 아닙니까?”고준형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내 손을 빌려 임근을 제거하는 것, 그게 대인과 그의 계획이었겠지요. 하나 이 대인, 대인 또한 그자의 계획판 위에 있는 말일뿐입니다. 그 죄증으로 임근을 지목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마지막 수였을 테고요. 대인이 나선 이상, 이제 대인의 가치는 끝난 셈이니까요.”“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대인의 가족을 위해서라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이삭은 못 들은 척했다.그는 고개를 젖히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우리 모두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지요. 임근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허나 실상은 모두 장기말에 불과했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동정 어린 눈빛으로 고준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고 대인, 갈 길이 머십니다.”그들이 이토록 힘들게 공명을 얻은 것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였던가? 결국은 권력자들의 다툼에 쓰이는 도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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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7화

고준형의 대답은 명료하고 간결했다.“그렇소. 내 일찍이 의심했지. 군량 횡령 사건이 임근과 관련이 있다 해도, 은사의 배후에 있는 자가 임근일 리는 없다고 말이오.”“이번에 임근을 조사하면서 그 추측이 사실임을 확인했소.”“이삭은 배후의 진정한 주모자를 감추기에 급급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임근의 유죄를 입증하려 들 것이오.”유소영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이삭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지난번 이삭 곁에 있던 복면 자객들은 일전에 재상이 보낸 자들보다 무공이 훨씬 강하고 틀도 정돈되어 있었어요. 차원이 다른 자들이었죠.”고준형이 덧붙였다.“그리고 사라진 장부도 있소.”“이전에 어쩔 수 없이 이삭에게 넘겼던 장부 말이오. 이삭을 체포한 뒤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찾지 못했소. 임근에게 넘긴 것도 아니었고.”“게다가 이삭은 모진 고문을 당한 뒤에야 임근을 실토했고, 이후 나와 손잡고 임근을 치겠다고 약조했소. 모든 과정이 너무 작위적이지. 특히 주씨 가문에서 있었던 그날 밤, 우리를 불태워 죽이려 한 것은 더욱 그렇소. 그러나 같은 자리에 있던 주 어르신에 대해서는 임근이 입막음을 지시하지 않았지.”유소영은 그제야 이해가 갔다.“세자, 그 말인즉슨 이삭이 일부러 자신을 드러내 붙잡혔다는 건가요?”고준형이 턱을 가볍게 끄덕였다.유소영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놈들의 계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니, 도무지 막을래야 막을 수 없게 했다.“어째서 그랬을까요? 군량 사건을 계속 파헤치다 보면 언젠가 자신 뒤에 있는 진짜 주모자가 드러날까 봐 두려웠던 걸까요?”“그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소.”유소영이 재차 물었다. “그럼 강회산의 배후에 있는 자도 바로 그 사람일까요?”고준형은 확답을 줄 수 없었다.유소영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알겠습니다.”어찌 됐든 강회산이라는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진상이 밝혀지겠지 싶었다.그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했다.정무에 관한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고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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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8화

장부실.유소영은 한편으로는 세자를 피하기 위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씨 가문의 사업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예전에도 점포 관리를 돕곤 했지만, 주축은 어디까지나 아버지였다.아버지가 대국을 주관하지 않으니 많은 점포의 매출이 곤두박질쳤다.그녀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정리를 단행해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계선생이 들어와 그녀에게 보고했다.“부인, 오천만 은에 대한 장부입니다. 자금은 모두 회수되었습니다. 하오면 이 자금을 유경원으로 보내시겠습니까, 아니면 전당포로 다시 보내시겠습니까?”“세자께서는 어떻게 처리하라 하셨느냐?”“세자께서는 부인의 뜻에 따르라고 하셨습니다.”유소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일단 다른 곳에 보관해 두게. 상황이 잠잠해지면 그때 하나씩 전당포로 돌려보내도록 하지.”회계선생이 명을 받들었다.“예, 당장 처리하겠습니다.”진영.고장훈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눈을 감기만 하면 머릿속이 온통 유소영의 모습으로 가득 찼다.혼례를 치르던 날의 붉은 단장, 전장으로 떠나는 그를 배웅하던 아쉬운 눈빛, 그리고 오늘 전각에서 보였던 그녀의 자태까지…….어쩌다 그들은 이렇게 어긋나버린 것일까?고장훈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순간,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붉게 물들었다.서재에 두고 온 그림!만약 임씨 집안사람들이 그걸 찾아내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다!그는 서둘러 겉옷을 걸쳐 입고는 말에 올라타 고삐를 풀었다.“이랴!”어서 후작부로 돌아가야 한다!그러나 우려했던 일은 현실이 되었다.같은 시각.후작부 유경원 밖.임걸이 그림 한 폭을 들고 고준형을 찾아왔다.처음에는 호위가 그를 막아섰으나, 그는 고장훈의 서재에서 세자 부인의 물건을 찾았다며 큰소리로 떠들어댔다.호위는 급히 세자에게 보고했다.이윽고 호위가 길을 터주었고, 그를 세자의 서재로 안내했다.서재.고준형은 백색 의복을 입은 채, 훤칠하고 준수한 자태를 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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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9화

그림 속의 인물은 유소영이었다.단지 그뿐이었다면 고준형의 안색이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그가 신경 쓰는 것은 그림 위에 적힌 시였다.[문득 길가 버들 빛을 보고 나니, 낭군을 벼슬길에 떠나보낸 것이 후회스럽구나.]이는 여인의 원망을 담은 규원시였다.단 두 줄만으로 출정한 남편을 향한 그리움을 호소하고 있었다.이 필체는 그도 알아보았다.바로 유소영의 솜씨였다.보아하니 이 서화는 유소영이 선물한 것이 분명했다…….안방.유소영은 시간이 늦은 것을 보고 잠자리에 들러 돌아왔다.그러나 세자는 아직 잠들지 않고 탁자 옆에 앉아 무언가를 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집중한 듯 보였다.가까이 다가가 확인한 그녀의 안색이 순식간에 놀라움으로 물들었다.이건…….고준형이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낯이 익소?”유소영은 비교적 침착했다.그녀는 담담하게 인정했다. “이건 제가 예전에…… 고장훈에게 주었던 것입니다.”이내 그녀가 주도권을 쥐고 물었다.“세자께서 어디서 이것을 찾으셨습니까?”고준형이 한 손으로 그 그림을 눌렀다.기분 탓인지 모르겠으나, 하필 손이 닿은 곳이 그림 속 여인의 목덜미라 실제의 그녀마저 숨이 막혀 오는 듯했다.사내의 목소리는 평온하고 부드러웠다.“장훈의 서재요.”“누군가가 찾아내어 내게 보낸 것이지.”유소영은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다.어쨌든 이미 지나간 일이었으니까.다만, 세자가 어째서 저리…… 기분이 언짢아 보이는지 알 수 없을 뿐이었다.“이미 지난 물건이니 태워 버리시지요.”그녀가 제안했다.고준형이 담담하게 말했다.“초상화를 태운다니, 불길하지 않소? 게다가 그림 솜씨도 훌륭하고 글씨 또한 빼어난데 태워 버리기엔 아깝군.”그는 그 말을 하는 동안 줄곧 서화를 응시하고 있었다.본래 떳떳하던 유소영도 이 순간만큼은 다소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그녀는 해명하려 했다.“사실 그때는…….”고준형이 말을 끊었다.“보아하니 부인도 그때는 장훈이와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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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0화

유소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들어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어찌 저토록 고고한 신선 같고 욕심 하나 없어 보이는 얼굴로 그런 말을 뱉을 수 있단 말인가?고준형은 정색한 얼굴이었다.“안 되오?”유소영은 말문이 막혔다.대체 자신이 무슨 말을 묻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 건가.세상에…… 세상에 대놓고 그리 묻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유소영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은 부부가 아닌가.입맞춤 정도는 당연한 일이었다.허락이 떨어지자, 그제야 고준형이 고개를 숙이며 다가왔다.“부인, 만약 불편하다면 나를 밀어내도 좋소.”유소영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말이 너무 많은 것 아닌가?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입술이 내려앉았다.지난번과는 달랐다.이번에는 상대의 부드러움이 선명하게 느껴졌다.조심스러움마저 묻어났고, 단번에 파고드는 대신 한 걸음씩 살피는 듯했다.마치 붓으로 입술 선을 그려내는 것 같았다.쏟아지는 장대비처럼 격렬하진 않으나, 만물을 소리 없이 적시는 봄날의 보슬비처럼 마음을 간질였다.유소영은 눈을 감았다. 가슴 속에서 누군가 북을 치기라도 하듯 심장이 쿵쿵거렸다.사내의 커다란 손바닥이 그녀의 뒷머리를 감싸자, 그녀는 저항할 힘도 없이 그가 이끄는 대로 맡겼다.처음보다 불안과 당혹감은 덜했다.그러나 입맞춤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유소영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눈을 뜨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고준형이 손을 뻗어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문지르며 온화하고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그러니 이런 일도 그리 무서운 게 아니오. 나를 피할 필요 없소.”유소영은 목이 메는 듯했다.피하고 있었다는 걸 어찌 알았을까?…….한편, 후작부 밖.급히 돌아오던 고장훈은 관아로 끌려가는 임걸과 마주쳤다.호위가 그에게 알렸다.“임 이공자께서 절도를 저질러 세자의 명으로 관아에 넘기는 중입니다.”임걸은 입이 틀어막힌 채 소리를 지르려 발버둥 쳤다.고장훈은 그를 신경 쓰지 않았으나,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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