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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1화

심씨 노부인의 처소를 나서려던 심서준은 문턱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어머니를 돌아보았다.“소실을 들이는 일은 이제 어머니께서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연수는 본래 사려 깊고 도리를 아는 사람이니,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면 싫더라도 따르려 할 겁니다. 헌데 그렇다고 제가 그 사람에게 그런 서러움까지 감내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차분한 목소리였으나 그 안에 담긴 뜻만큼은 단호했다. 그는 잠시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낮게 덧붙였다.“만약 어머니께서 저를 품고 계실 때 아버지께서 소실을 들이셨다면, 어머니께서는 어떤 심정이셨겠습니까?”그 한마디에 심씨 노부인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무언가 반박하려던 입술이 가볍게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사실 안채의 여인들은 자신이 아이를 품으면 부군의 곁에 믿을 만한 사람을 붙여 두곤 했다. 회임한 사이 총애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느니, 차라리 자기 손으로 고른 여인을 곁에 두어 부군의 마음을 붙잡으려는 것이었다.심씨 노부인 역시 계연수를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소실을 계연수에게 직접 고르게 한 것도, 낯선 여인 대신 믿을 수 있는 자기 사람을 심서준의 곁에 두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하면 계연수도 마음을 놓을 수 있고, 아들 역시 불편을 참지 않아도 될 터였다.그러나 아들의 눈에는 그 배려가 오히려 계연수에게 상처를 주는 일로 보였던 모양이었다.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계연수와 심서준은 금실이 남달랐고, 두 사람 사이의 정은 지금 한창 깊어지고 있었다. 그런 때에 소실 이야기를 꺼냈으니, 아무리 좋은 뜻에서 한 말이라 해도 계연수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세월이 흐르면 사내가 처첩을 여럿 거느리는 일이야 흔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들이 스스로 절제하고 있는 데다 계연수의 뱃속에는 귀한 아이까지 자라고 있었다. 굳이 서둘러 집안에 분란의 씨앗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심씨 노부인은 한동안 말없이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네 뜻이 무엇인지는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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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2화

하지만 계연수가 그의 곁으로 온 뒤부터는, 잊고 지냈던 기쁨이 때때로 불쑥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곤 했다.어스름한 저녁, 따뜻한 등불 아래에서 계연수가 창가에 앉아 자신을 위해 바느질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부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거창한 일이 아니라, 어쩌면 이런 소소한 일상의 온기를 함께 나누는 것인지도 몰랐다.심서준은 이런 평온함이 유난히 좋았다.자신이 이토록 좋아하게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만큼.계연수는 심서준이 곁으로 다가오자 하던 일을 잠시 내려놓고 따뜻한 차를 따라 주었다. 맑은 찻물이 잔에 차오르자 은은한 향이 촛불의 온기와 뒤섞여 방 안에 번졌다.“부엌에서 저녁상을 모두 준비해 두었다고 합니다. 지금 드시겠습니까?”심서준은 계연수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조금 있다 먹지.”그렇게 대답한 그는 계연수가 들고 있던 신발 밑창을 자연스럽게 가져갔다. 손바닥 위에 올려 이리저리 살펴보던 심서준이 문득 물었다.“내 장화 치수는 알고 있느냐?”계연수는 그의 물음이 뜻밖이라는 듯 눈을 휘며 웃었다.“정확한 치수는 몰라도 부군의 장화를 재어 보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방 어멈도 알고 있고요.”심서준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물었다.“어째서 내게 직접 묻지 않았지?”계연수는 그제야 말문이 막혔다.그에게 물어보지 않은 까닭은 그저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안채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로 심서준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고, 더구나 장화 치수 정도는 굳이 그에게까지 물어볼 만큼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계연수가 생각한 바를 그대로 털어놓자, 심서준은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검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럼 언제쯤 완성할 수 있겠느냐?”계연수는 바느질감을 내려다보며 잠시 헤아려 보았다. 그건 자신도 확답하기 어려웠다. 앞으로 얼마나 빨리 능숙해지느냐에 달린 일이었다.배운 대로 잘 만들어 첫 켤레부터 마음에 들게 완성된다면 다시 만들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결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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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3화

계연수는 분가가 어째서 조정의 일과 관련되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막 물으려던 순간, 심서준이 문득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버지께서는 분명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부모님께서 아직 살아 계시고, 집안 어른들 또한 건재한데 분가한다면 사람들은 심씨 가문의 형제들이 불화하여 집안에서 서로 다투고 있다고 여길 것이라고. 폐하와 관료들이 보기에 나는 도찰원의 좌도어사이자 심씨 가문의 종손이다. 헌데 제 집안의 화목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그 말을 듣는 순간, 계연수의 마음도 차츰 무거워졌다.그녀는 심서준의 지친 눈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의 가슴께로 몸을 기울였다.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부드럽게 짚은 뒤, 힘을 적당히 조절해 천천히 눌러 주며 나직이 말했다.“분가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부군께서는 이 일로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저도 부군 곁에서 지내는 동안, 이제는 집안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충분히 익혔어요. 어머님께서도 제게 잘해 주시고, 넷째 형수님도 요즘은 한결 잠잠해지셨잖아요. 기껏해야 안채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뿐이니, 부군께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은은한 향기가 배어 있는 손가락이 관자놀이를 누르는 감촉이 무척 편안했다. 심서준의 미간에 서려 있던 긴장도 서서히 풀렸다.계연수의 부드러운 몸이 품속으로 기울어져, 봉긋한 가슴이 그의 흉부에 맞닿았다. 심서준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는 제 품에 조금 더 바싹 끌어당겼다. 이윽고 낮은 한숨을 흘린 그의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 살짝 잠긴 목소리에는 묘하게 짙은 울림이 배어 있었다.“헌데 나는 분가하고 싶다.”사실 심서준에게 처음 분가할 마음이 든 것은 계연수가 밤늦도록 장부를 살피는 모습을 보았을 때였다. 한집에 식구가 많으면 그만큼 돌보아야 할 일도 많아졌다. 그러면 계연수가 온전히 자신에게만 마음을 쏟을 수 없을 것이다.더구나 대가문은 사람이 많을수록 지켜야 할 규율과 얽매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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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4화

그런데도 계연수는 가늘게 눈을 뜨고 심서준을 바라보았다. 숨결이 흐트러진 자신과 달리 그는 여전히 반듯하고 태연한 낯빛이었다. 흔들림 하나 없이 점잖은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또 그의 태연한 얼굴에 속아 넘어간 것만 같았다.한동안 두 사람의 숨소리만 은밀하게 뒤섞이던 방 안으로, 방 어멈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후작, 부인. 저녁상을 올릴 때가 되었습니다.”그제야 심서준은 계연수를 품에서 천천히 놓아주었다.몸은 떨어졌지만, 방 안에는 아직도 달아오른 온기가 아스라이 맴돌았다. 계연수는 짧게 숨을 고르다 문득 서늘한 기운이 목덜미에 닿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숙여 보니 어느새 옷깃이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그런데도 여태껏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계연수는 붉어진 얼굴로 옷매무새를 여미며 속으로 생각했다.역시 심서준은 겉으로만 점잖은 사람이었다.그로부터 이틀쯤 지나자, 백씨가 계연수의 처소에 첩을 들여보내려 했다는 소문이 심씨 부저 곳곳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심씨 노부인이 아들의 첩을 알아보았다면 그나마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맏형수인 백씨가 그토록 열성적으로 동서의 방에 여인을 밀어 넣으려 한 까닭이 무엇인지, 심씨 부저 사람들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아도 훤히 알고 있었다.형수라면 마땅히 시동생 부부가 화목하게 지내기를 바라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을 여인을 들이려 한 데다, 그 여인마저 떳떳하게 내세울 수 없는 외실의 딸이었다. 어느 모로 보아도 형수다운 처신은 아니었다.물론 처음 이 일을 부추긴 사람은 이수옥이었다. 하지만 며느리에 불과한 이수옥이 시어머니인 백씨의 뜻을 억지로 꺾을 수 있었겠는가. 결국 백씨 역시 같은 마음이었기에 일이 이 지경까지 흘러왔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었다.은밀하게 오가던 수군거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백씨의 귀에도 들어갔고, 심태숙 역시 모두 전해 들었다. 그는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수치스러워 계연수를 찾아가 사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그날 밤, 심태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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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5화

백씨는 심태숙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다리에서 힘이 풀려 휘청거리던 그녀는 곁에 놓인 작은 탁자를 다급히 짚고서야 간신히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지난 세월 동안 그녀는 심태숙에게 수도 없이 불평하고 원망을 쏟아 냈다. 그럴 때마다 심태숙은 한결같이 다정한 말로 달래 주었다. 백씨가 아무리 냉랭한 얼굴로 대하더라도 그는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마음 한편에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은 늘 남아 있었지만, 그렇다고 심태숙과 혼인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 부군이 지금, 자신을 내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백씨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심태숙을 바라보았다. 떨리는 입술 사이로 겨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겨우 이만한 일로 저를 내치시겠다는 겁니까?”심태숙은 아무 말 없이 백씨를 바라보다가 허탈한 쓴웃음을 흘렸다.“겨우 이만한 일이라고?”그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듯 잠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무겁게 말을 이었다.“하정, 당신은 기녀의 딸을 서준이의 첩으로 들이려 했소. 그것만으로도 이미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일이오. 어머니께서 사람을 시켜 이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막지 않으셨다면, 당신의 평판마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을 것이오.”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엄중하게 가라앉았다.“더구나 율법에 따르면 관원이 기녀를 가까이할 경우 곤장 육십 대를 맞게 되어 있소. 만약 기녀를 속량하기까지 했다면 관직에서 파면된 뒤 다시 곤형을 받아야 하고!”백씨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몸이 저절로 뒤로 물러났으나, 힘이 빠진 발끝이 바닥에 걸려 다시 한번 휘청거렸다.관원이 기방의 여인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정에서 그런 일까지 일일이 엄하게 조사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몰래 기방을 드나드는 관리도 적지 않았고, 윗사람들 역시 대개 모른 척 눈감아 주었다. 그래서 백씨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그러나 심태숙이 율법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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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6화

“소연이는 아직 혼인도 하지 않았소. 내가 당신을 내치지 않은 데에는 그 아이를 생각한 까닭도 있소. 어머니가 쫓겨났다는 흠이 생기면 소연이의 혼사마저 어려워질 테니.”그 말을 듣자 백씨는 끝내 참지 못하고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체면과 자존심을 무엇보다 중히 여기던 그녀가 심태숙 앞에서 이토록 소리 내어 우는 것은 평생 처음이었다.“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요?”심태숙은 속수무책이라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없소. 이것이 내가 당신을 위해 생각해 낼 수 있는 최선이오.”백씨는 그의 소매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두 손으로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을 주었지만, 이미 그녀의 눈빛에는 모든 희망이 꺼진 뒤였다.*이튿날, 계연수는 고하운과 백씨 가문의 큰며느리인 명씨가 찾아오고 나서야 영국공이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심서준은 일이 시작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녀에게 단 한마디도 내비치지 않았다. 고하운이 직접 찾아와 사정하지 않았다면 계연수는 끝내 아무것도 몰랐을 터였다.명씨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고하운과 계연수가 옛정을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주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결국 은은한 향내가 감도는 방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계연수와 마주 앉은 고하운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몸가짐과 말투에는 예전의 거만함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때 계연수 앞에서 턱을 치켜들고 기세등등하게 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오늘은 더없이 낮고 비굴한 태도로 그녀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고하운도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자신은 영국공부 모든 사람의 희망을 짊어지고 이곳에 왔다.백씨 가문 사람들은 그녀라면 틀림없이 계연수의 마음을 돌릴 수 있으리라 믿었다. 지난번 심서준이 백씨 가문의 셋째 대감을 놓아준 것 역시, 고하운이 계연수를 찾아와 부탁했고 계연수가 그녀의 체면을 보아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사실 그런 오해가 생기도록 은근히 꾸민 사람도 고하운 자신이었다. 백씨 가문에서 조금이라도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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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7화

그 말만으로도 고하운의 가슴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오늘 계연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다면 앞으로 백씨 가문에서 자신이 어떤 대접을 받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고하운은 더 이상 체면을 돌볼 겨를도 없이 자리에서 내려와 계연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밖에 있는 명씨에게 들릴까 두려운 듯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흐느꼈다.“언니, 제가 잘못했어요. 그때 언니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백씨 가문의 큰부인이 저를 며느리로 점찍은 것도 모두 언니 때문이었어요. 헌데 그때는 제가 분별력을 잃고, 언니가 내가 잘되는 꼴을 보기 싫어서 그러는 줄 알았어요. 이제야 제가 틀렸다는 걸 알겠어요. 언니는 어릴 적부터 무엇 하나 나보다 못한 게 없었는데, 뭐가 아쉬워서 내가 잘되는 걸 시기했겠어요.”고하운은 눈물을 훔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다급히 말을 이었다.“이제야 알겠어요. 진심으로 저를 생각해 준 사람은 처음부터 언니뿐이었어요. 그때 언니가 나를 말린 것도 백씨 가문이 얼마나 복잡하고 험한 곳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잖아요. 그러니 이번 한 번만 더 저를 구해주세요. 오늘 언니의 도움을 얻지 못하고 돌아가면, 앞으로 백씨 가문에서 제가 어떻게 버티겠어요. 영국공의 죄를 모두 없던 일로 해 달라는 것도 아니에요. 처벌을 조금만 가볍게 해 줘도 돼요.”말을 마친 고하운은 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가늘게 흐느꼈다.명씨가 아직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고하운이 이토록 비굴하게 매달리는 모습을 듣는다면, 자신과 계연수의 사이가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각별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아차릴 터였다. 그러면 고하운이 백씨 가문에서 겨우 붙들고 있던 유일한 버팀목마저 사라지게 된다.백선혁은 부인인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언제나 미지근하고 무심한 태도로 대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박대하지도 않았다.고하운은 그가 무엇보다 자신의 벼슬길을 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백선혁은 그녀에게 친정에 자주 들러 계연수와 우애를 다지라고 여러 번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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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8화

계연수는 말없이 고하운을 바라보았다.그 시선을 받은 순간, 고하운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그녀는 허둥지둥 손을 들어 뺨의 눈물을 닦아 냈다. 그러고는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는 듯 간절한 눈빛으로 계연수를 바라보았다.계연수는 입술을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명씨에게 분명히 밝혀 두어야 할 말이 있었다. 지금 확실하게 선을 긋지 않으면 같은 일로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찾아와 번거롭게 할 것이 분명했다.잠시 후 명씨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계연수를 향한 지나칠 만큼 살가운 웃음이 어려 있었다.명씨는 계연수보다 웃어른이었으므로 예법대로라면 계연수가 일어나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계연수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명씨는 황급히 다가와 손사래를 쳤다.“아이고, 몸도 무거운데 어딜 일어나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대로 앉아 있으세요.”명씨도 이번 일이 자신의 동서가 벌인 낯부끄러운 짓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계연수 앞에서 고개를 들 면목이 없었다.사실 영국공부 사람들도 백씨의 계획을 처음부터 모르지는 않았다. 백씨가 친정으로 돌아와 의논했을 때, 모두가 백명연을 곁에 두고 길러 온 목적이 애초에 인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했다.백명연은 꽃처럼 아름답고 달처럼 고운 미모를 지녔다. 계연수와 나란히 세워 놓아도 어느 한쪽이 기울지 않을 만큼 빼어난 자태였다.그토록 절색인 여인을 보고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물론 심서준의 눈이 높고 성정이 냉담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가 백명연에게 마음을 빼앗긴다면, 백씨 가문은 심서준을 움직일 또 하나의 패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그들은 그저 한번 시험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일이 성사된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었고, 실패해도 그만이라고 가볍게 여겼다. 설마 그 작은 계책이 이토록 큰 화를 부를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일을 빈틈없이 처리하지 못한 백씨 탓이라고 생각했다. 심서준은 본래 강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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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9화

“제 부군이 백씨 가문의 셋째 대감을 풀어 준 것은 율법에 정해진 구금 기간을 이미 다 채웠기 때문입니다. 누가 찾아와 청을 넣었는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명씨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굳어 있었다. 뒤늦게 의미를 깨달은 그녀가 고하운을 돌아보았다. 핏기 없이 질린 고하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모든 내막이 한꺼번에 선명해졌다.고하운이 지금까지 백씨 가문 사람들을 모두 속여 온 것이다.명씨의 가슴속에서 수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들끓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을 믿고 이토록 자신만만하게 심부까지 찾아왔단 말인가.그녀는 붙잡고 있던 고하운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힘이 어찌나 거셌던지 미처 대비하지 못한 고하운의 몸이 옆으로 크게 휘청거렸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친 것은 명씨의 눈에 서린 짙은 혐오였다.고하운은 창백한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계연수는 더 이상 그 광경을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후 처리해야 할 집안일이 남아 있다고 말하며 완곡하게 대화를 끝낼 뜻을 내비쳤다.명씨도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제 고하운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녀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마지막 설득을 시도했다.“아무리 그래도 하운이는 부인의 사촌 동생이 아닙니까? 그 아이 역시 백씨 가문의 며느리입니다. 백씨 가문에 큰일이 생기면 하운이라고 그 안에서 편히 지낼 수 있겠습니까? 두 집안이 혼인으로 맺어지는 것은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살기 위해서이지 않습니까. 살다 보면 언젠가는 당신들도 우리 백씨 가문의 도움이 필요할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명씨는 애써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이번 한 번만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하운이도 영국공부에서 훨씬 편히 지낼 수 있을 것이고, 앞으로 두 집안 역시 서로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겁니다.”계연수는 그 말을 조용히 듣다가 명씨를 똑바로 바라보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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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0화

그날 있었던 일은 오후에 심서준이 돌아온 뒤 계연수가 직접 물어보았다.심서준의 표정은 시종 냉담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도 말하듯 담담하게 대답했다.“지난번에 너무 쉽게 용서해 주었더니, 내가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 사람인 줄 아는 모양이지. 이번에는 제대로 아프게 해 줄 생각이다. 그 고통이 뼛속까지 스며들도록.”계연수는 그가 말한 ‘지난번 일’이 무엇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다시 물었다.“이번 일이 사실로 밝혀지면, 영국공부에는 어떤 처벌이 내려지나요?”심서준은 바깥옷을 갈아입은 뒤 계연수의 곁에 앉았다. 그의 옷자락을 따라 바깥의 서늘한 공기가 희미하게 스며들었다.“가벼우면 작위가 강등될 것이고.”잠시 뒤 이어진 무심한 목소리에 계연수의 몸이 저도 모르게 굳었다.“무거우면 작위를 박탈당하고 곤장 삼십 대까지 맞게 될 것이다.”과연 무거운 처벌이었다. 명씨가 다급하게 자신을 찾아와 매달린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말을 마친 심서준은 피로가 밀려드는지 손을 들어 미간을 천천히 문질렀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그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하려 했다.계연수도 배웅하려고 따라 일어났으나, 심서준이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다시 앉혔다. 그러고는 계연수의 손을 잡아 부드러운 손바닥을 살짝 주무르며 말했다.“배웅하지 않아도 된다. 금방 돌아와 함께 저녁을 먹을 테니 기다리고 있거라.”계연수도 그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더 따라나서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심서준이 앞뜰의 서재에 도착하자, 곧 시종이 부친에게서 온 서신을 가져왔다.그는 봉함을 뜯어 서신을 빠르게 훑었다. 고작 두어 줄만 읽어 보아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었다. 예상한 대로 분가를 허락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심씨 가문을 주시하는 눈이 많다는 것은 심서준도 잘 알고 있었다. 율법과 도리에 맞게 분가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이면에 형제간의 불화나 집안싸움이 있으리라 멋대로 짐작할 터였다.부친이 걱정하는 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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