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주문춘귀: Bab 921 - Bab 930

1074 Bab

제921화

계연수가 일부러 소실 이야기를 꺼낸 것은 심서준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예상대로 심서준의 미간이 단숨에 좁아졌다. 그는 고개를 숙여 계연수를 바라보며 낮게 물었다.“그 말을 받아들였느냐?”계연수는 그의 겉옷을 받아 들고 고개를 들었다.“어머님께서 직접 분부하셨는데, 제가 어찌 거역하겠어요.”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옷걸이에 겉옷을 걸며 말을 이었다.“저는 부군의 뜻을 먼저 여쭤야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헌데 어머님께서는 부군과 상의할 필요 없이 제가 알아서 정하라고 하시더군요.”그러고는 다시 심서준을 바라보았다.“이미 분부를 내리셨으니, 우선 부군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보려던 참이었어요.”심서준은 계연수를 한 번 바라보았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옷을 모두 갈아입은 뒤 안쪽 방으로 들어간 그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잠시 후 계연수가 뒤따라 들어오자 심서준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김이 두 사람 사이로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가운데, 그의 짙은 시선이 계연수에게 머물렀다.“너는 어떻게 하고 싶으냐?”계연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나란히 앉았다.“제가 어찌 그토록 너그럽겠어요. 제 손으로 부군께 소실을 들이겠다고 나설 수는 없지요.”그 말을 듣고서야 심서준의 굳어 있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꾹 다물려 있던 입가에도 희미한 웃음기가 스쳤다.그러나 계연수는 곧 현실적인 문제를 덧붙였다.“헌데 어머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일이니, 마냥 모른 척할 수도 없잖아요. 어떻게든 매듭은 지어야 해요.”그녀는 심서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살짝 원망스러운 어조로 말했다.“게다가 따지고 보면 이 일이 벌어진 것도 모두 부군 때문이잖아요?”심서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계연수의 옷깃으로 내려갔다. 단정히 여민 깃 사이로 지난밤 자신이 남긴 붉은 자국이 희미하게 드러나 있었다.그제야 심서준도 일이 시작된 까닭을 알아차렸다. 전날 밤 힘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 탓에 계연수의 목덜미에 흔적을 남겼고,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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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2화

심서준이 앞으로 매일 저녁을 함께하겠다고 하자 계연수는 선뜻 믿기지 않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그 표정을 살피던 심서준은 그녀의 허리에 붙은 부드러운 살을 손끝으로 살짝 꼬집었다.“내가 함께 있겠다는데 기쁘지 않은 것이냐?”계연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그럴 리가요.”심서준은 그녀의 허리를 천천히 쓸어 주며 말을 이었다.“내일은 내 서재를 쓸 수 있도록 정리해 두거라. 관아에서 처리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문서를 이곳으로 가져오게 하겠다.”그제야 계연수는 심서준이 기분을 맞추기 위해 가볍게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로 공무를 처소까지 가져와서라도 자신과 저녁을 함께할 생각인 듯했다.마음 한구석에 따스한 기쁨이 스며들었다. 계연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렇게 할게요.”심서준은 잠시 뒤 다시 물었다.“어머님께는 언제 사람을 골랐다고 말씀드릴 생각이냐?”계연수는 머릿속으로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모레쯤 말씀드리려고 해요.”심서준은 가만히 계연수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제법 영리하다는 생각을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심씨 노부인의 분부를 거스르지 않고 소실을 고른 현숙하고 너그러운 부인이었다. 정작 일이 성사되지 않은 까닭은 사람마다 트집을 잡은 심서준에게 있었으니, 계연수에게는 아무런 허물도 남지 않았다.그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려 웃었다.이렇듯 약삭빠르게 제 몫을 챙기는 계연수에게서는 예전의 생기 넘치던 모습이 엿보였다. 한때 사씨 가문에서 보낸 세월에 눌려 빛을 잃었던 그녀가 이제야 조금씩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듯했다.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서준은 앞으로 계연수를 더욱 아끼고 제멋대로 굴 수 있게 품어 주고 싶었다.그러나 지금 품 안에 앉은 여인에게서는 은은한 향기가 끊임없이 풍겨 나왔다. 계연수가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부드러운 옷자락이 그의 몸을 스쳤고, 그 사소한 움직임마저 사람을 유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오래 품에 안고 있다가는 절제하기 어려울 듯했다. 심서준은 결국 허리에 둘렀던 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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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3화

굳이 말끝마다 속내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서로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계연수는 그 말을 남기고 먼저 자리를 떴다. 백씨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봄바람에 계연수의 옷자락이 가볍게 흔들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덧붙이지 못했다.처소로 돌아오자마자 용춘이 참았던 숨을 내쉬듯 다급하게 물었다.“넷째 부인께서는 대체 무슨 뜻으로 그러신답니까? 누가 봐도 일부러 부인 속을 뒤집으려는 것 아닙니까?”계연수는 따뜻한 찻잔을 들고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은은한 찻향이 피어오르는 사이에도 얼굴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그래. 애초부터 내 속을 불편하게 하려고 벌인 일이야.”찻잔을 내려놓은 계연수가 담담히 덧붙였다.“내일까지 두고 보면 알겠지. 생각해 둔 바가 있으니 너는 걱정하지 말거라.”이튿날 오전, 백씨는 약속대로 한 처녀를 데리고 심씨 노부인의 처소를 찾았다.처녀는 두 손을 얌전히 모은 채 노부인 앞에 다소곳이 서 있었다. 수수한 빛깔의 옷을 입고 머리에는 은비녀 하나만 꽂았는데, 단출한 차림이 오히려 고운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응지처럼 매끄러운 피부에 조그마한 얼굴은 희고 말갔으며, 화장기 없는 자태에는 가냘프고 애처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과연 백씨가 그토록 자랑할 만한 미모였다. 아직 세상 물정에 익숙하지 않은 듯 수줍고 조심스러운 기색마저 어려 있어, 한눈에도 연약하고 순한 처녀처럼 보였다.백씨가 웃음을 띠며 처녀에게 말했다.“어서 노부인과 둘째 부인께 문안드리렴.”처녀는 말이 떨어지자 곧 허리를 곱게 낮추어 반듯하게 만복례를 올렸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흐트러진 데가 없어 예법이나 몸가짐을 흠잡기도 어려웠다.심씨 노부인은 처녀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제법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얼굴이 빼어난 데다 성정까지 얌전해 보였으니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노부인이 계연수를 돌아보며 물었다.“네가 보기에는 어떠냐?”계연수는 처녀를 잠시 바라본 뒤 차분하게 대답했다.“제가 보기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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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4화

계연수가 이토록 조목조목 따져 묻자, 백씨는 바싹 마른 입술만 몇 번 달싹였다. 조금 전까지 얼굴 가득 머금고 있던 살가운 미소도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무어라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채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심씨 노부인은 계연수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심서준이 오랜 세월 관직에 몸담으며 적잖은 사람의 원한을 산 만큼, 가까이에 둘 사람은 더욱 신중히 골라야 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계연수가 짚어 주고 나니, 새삼 그 중요성이 마음에 와닿았다.생각할수록 계연수의 차분하고 세심한 성정이 마음에 들었다. 무슨 일을 맡겨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앞뒤를 두루 살펴 빈틈없이 처리했다. 훗날 심씨 가문의 안살림을 이끄는 안주인이 된다 해도 그릇된 판단을 내릴 일은 없을 듯했다.게다가 부군에게 소실을 들이는 문제를 두고도 이토록 너그럽고 사려 깊게 처신하니, 어디 하나 흠잡을 데조차 없었다. 노부인은 계연수를 바라보는 마음이 한층 든든해져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는 백씨를 바라보며 말했다.“더는 다른 말을 보탤 것 없다. 서준이가 도찰원에 있으니 처녀 하나의 내력을 알아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게다. 확실히 조사해 두어서 나쁠 것도 없고, 그리 번거로운 일도 아니지 않으냐.”노부인의 담담한 목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또렷하게 울렸다.“오늘은 우선 이 처녀를 데리고 돌아가 결과를 기다리거라. 정말 아무 흠 없이 깨끗한 아이라면 그때 다시 데려오면 될 일이다.”그 말을 들은 명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찌할 바를 몰라 손끝을 가만두지 못하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백씨를 바라보았다.그녀의 신분은 조금만 파헤쳐도 거짓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명연은 백씨의 먼 친척이 아니었다. 영국공부의 대감이 오래전 밖에 따로 두었던 외실에게서 얻은 사생아로, 영국공부에는 단 한 번도 발을 들여 본 적이 없었다. 남들 앞에 떳떳이 내세울 수 있는 신분일 리 만무했다.어머니와 그녀는 오랜 세월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그늘 속 사람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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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5화

계연수는 붓을 움직이며 용춘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과장된 말은 아니었다. 명연이 눈에 띄게 아름다운 처녀라는 사실만큼은 계연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정교하게 빚은 듯한 이목구비에는 겁 많고 여린 기색이 배어 있었다.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서 있기만 해도 보는 이로 하여금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처녀였다.그런 생각을 하던 계연수의 붓끝이 문득 종이 위에서 멈추었다.심서준은 분명 소실을 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처럼 빼어난 미인을 직접 보아도 정말 아무런 마음이 일지 않을까.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계연수는 이내 시선을 내리깔고 다시 붓을 움직였다. 먹물이 종이 위로 고르게 번져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떠오른 생각을 애써 마음 밖으로 밀어냈다.그때 곁에서 용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들려왔다.“만에 하나 후작께서 정말 그 처녀를 마음에 들어 하시면 어쩌지요?”계연수는 그 말을 듣고 가볍게 웃었다.용춘이 의아한 듯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부인께서는 걱정되지 않으세요?”계연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나직이 대답했다.“전혀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그러나 심서준은 얼굴 하나만 보고 쉽사리 마음을 내어 줄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난밤 귓가에 낮게 내려앉던 그의 약속이 아직도 생생했다. 자신이 믿기로 한 사람인 만큼, 근거 없는 의심으로 그 믿음을 흔들고 싶지도 않았다.계연수는 완성한 서신을 봉하여 사람을 시켜 도찰원으로 보냈다. 그 뒤 한동안 장부를 살펴보다가 방 어멈을 불러 신발을 만드는 법을 배우며 고요하게 오전을 보냈다.오후가 되어 심서준이 돌아왔다.그가 후원으로 이어지는 수화문을 막 넘어 대숲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엷은 바람이 댓잎을 흔들어 사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가운데, 분홍빛 옷을 입은 여인이 고개를 숙인 채 황급히 그의 앞으로 걸어왔다.그대로 가다가는 부딪칠 듯하여 심서준이 몸을 살짝 비켜섰다. 그러자 여인은 중심을 잃은 듯 그의 발치에 넘어졌다.심서준의 미간이 가늘게 좁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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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6화

계연수는 백씨가 이런 비열한 수단까지 써서 백명연을 심서준의 눈앞에 들이밀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곰곰이 따져 보니 백씨의 속셈은 뻔했다. 백명연의 신분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드러날 것 같으니, 그전에 심서준에게 얼굴부터 보이려 한 것이다. 혹여 그가 백명연의 미모에 마음을 빼앗기기라도 한다면, 출신에 얽힌 흠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계연수의 속을 뒤집어 놓는 일이라면 백씨는 언제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뒤따르던 방 어멈도 눈살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오전까지만 해도 얌전하고 철이 든 처녀인 줄 알았는데, 오후가 되자마자 이런 식으로 후작을 유혹하려 들다니요.”그녀는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지 살핀 뒤 목소리를 한층 낮추었다.“후작께서 여태 어떤 여인들을 못 보셨겠습니까. 예전에도 처소의 시녀들 가운데 후작을 유혹하겠다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덤빈 아이까지 있었습니다. 후작께서는 그런 수작을 무엇보다 혐오하시지요.”방 어멈의 얼굴에 깊은 근심이 떠올랐다.“저 처녀는 마음 씀씀이가 바르지 못합니다. 부인께서는 절대로 곁에 두지 마십시오. 그대로 들였다가는 훗날 또 무슨 사달을 일으킬지 모릅니다.”이런 일까지 벌어진 이상, 계연수도 백명연을 받아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애초부터 소실로 들일 마음조차 없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전당에 도착하자 큰방의 여인들이 이미 모두 모여 있었다. 백씨는 한쪽에 앉아 있었는데 굳게 얼어붙은 얼굴에는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대청 한가운데에는 시녀 하나와 백명연이 밧줄에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시녀는 겁에 질려 쉴 새 없이 울음을 터뜨렸고, 백명연 또한 온몸에 힘이 빠진 듯 바닥에 주저앉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백명연은 명문가의 법도가 이토록 엄중한 줄 몰랐다. 자신이 벌인 일이 이처럼 큰 죄가 되리라고는 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일이 이 지경까지 커질 줄 알았더라면 감히 그런 수작을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백씨를 따라 이곳에 오던 날, 어머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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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7화

심서준의 말이 떨어지자 전당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백명연에게 쏠렸다.그 순간 백씨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한층 더 빠졌다. 사적으로 몇 사람만 있는 자리에서 밝혀졌다면 어떻게든 둘러댈 수 있었을 테지만, 하필 집안사람들이 모두 모인 전당에서 추궁을 받게 되었다. 가슴속에서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다.백씨는 무릎을 꿇고 있는 백명연을 향해 다급히 눈짓했다. 쓸데없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그러나 백명연은 이미 심서준이 내뿜는 서늘한 기세에 완전히 압도된 뒤였다. 바닥에 꿇어앉은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자신의 출생부터 백씨가 꾸민 일까지 숨김없이 털어놓았다.말이 이어질수록 전당 안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모든 전말을 들은 심씨 노부인은 경악하여 숨을 들이켰다. 백씨를 가리킨 손가락이 분노로 떨렸으나, 너무 어이가 없었던 탓에 한동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심씨 가문 같은 명문에서는 소실을 들인다 해도 출신이 깨끗한 집안의 여인을 골라야 했다. 그런데 백명연이 어디 하나 떳떳한 처녀란 말인가. 아비가 외실에게서 얻은 딸인 데다, 그 어미는 남들 앞에서 입에 올리기조차 어려운 기녀 출신이었다.만일 이 혼사가 정말 이루어진 뒤 백명연의 출신이 세상에 알려지기라도 했다면, 심씨 가문은 물론 조정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심서준의 명성까지 흠집이 날 수 있었다.심씨 노부인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을 들어 백씨를 노려보았다.“이 아이가 네가 말한 먼 친척이냐?”떨리는 목소리에는 억누르기 힘든 노기가 서려 있었다.“이런 아이가 네가 그토록 장담하던 깨끗한 집안의 처녀란 말이냐?”백씨의 얼굴은 이미 종잇장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심서준이 저토록 단언하는 것을 보면 백명연의 내력은 이미 낱낱이 조사되었을 터였다. 이제 와 부인해 봐야 거짓말만 하나 더 보탤 뿐이었다.궁지에 몰린 백씨는 자리에서 내려와 전당 한가운데 무릎을 꿇었다.“저는 그저 어머님의 근심을 덜어 드리고 싶었습니다. 후작의 눈이 워낙 높은 것을 알기에, 어떻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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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8화

그때 심서준의 담담한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누가 먼저 일을 꾸몄든,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에 따른 벌은 받아야 합니다.”심씨 노부인도 그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싸늘한 시선으로 이수옥을 내려다보며 꾸짖었다.“네 오숙부의 처소에 관한 일에 네가 왜 끼어들었느냐? 네가 나설 자리가 맞다고 생각하느냐?”노부인의 차가운 목소리가 넓은 전당에 울려 퍼졌다.“정녕 네가 이 일을 부추겼다면 반년 동안 월례금을 받지 못하게 하겠다. 공금에서 지급되는 비용도 모두 절반으로 줄이고, 두 달 동안 근신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거라.”노부인은 잠시 말을 멈춘 뒤 물었다.“내 처분에 할 말이 있느냐?”이수옥은 조금도 변명하지 않았다. 곧바로 바닥에 이마를 대고 선선히 처분을 받아들였다.“노부인의 분부를 따르겠습니다.”심씨 노부인은 다시 백씨에게 시선을 돌렸다.“비록 네 며느리가 먼저 낸 생각이라고는 하나, 너는 그 아이의 시어머니이지 않으냐. 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하고 아랫사람의 철없는 짓에 휩쓸렸으니 네게도 잘못이 있다.”잠시 생각하던 노부인이 조금 누그러진 처분을 내렸다.“집안의 총장부는 당분간 네가 계속 맡아라. 다만 곳간의 관리는 연수에게 넘기도록 해라.”겉으로는 두 사람의 잘못을 나누어 벌하는 공정한 처분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백씨가 쥐고 있던 권한을 조금씩 거두어 계연수에게 넘기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계연수는 이미 장원을 관리하고 있었다. 이제 곳간까지 손에 넣었으니, 훗날 총장부마저 넘어가면 백씨가 이 집안에서 설 자리는 거의 사라질 터였다.백씨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이번 일은 크게 번지지도 않았고 실질적인 피해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백명연이 자신의 은근한 암시를 받고 움직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찌 되었든 그런 수작을 직접 벌인 사람은 백명연이었다. 그런데 노부인이 자신에게 내린 처분은 잘못의 정도에 비해 지나치게 무거웠다.결국 이번 일을 빌미 삼아 자신을 벌하려는 것에 불과했다.더구나 심서준에게 소실을 들이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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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9화

심서준의 냉정하고 가차 없는 처분에 백명연은 마지막 희망마저 잃었다. 잿빛으로 질린 얼굴로 힘없이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명령을 받은 시종들이 곧 전당 안으로 들어와 그녀를 끌고 나갔다. 백명연이 끌려가는 소리와 흐느낌이 문밖으로 멀어지는 동안,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심씨 노부인도 더는 이 소란을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피로한 얼굴로 손을 내저으며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모두 물러가라고 명했다.그제야 최씨가 황급히 다가와 이수옥과 함께 백씨를 부축했다. 넋이 반쯤 나간 백씨를 이끌고 세 사람은 전당을 빠져나왔다.처소로 돌아온 백씨는 시종들을 모두 물린 뒤 이수옥을 바라보며 물었다.“조금 전에는 어째서 나를 감쌌느냐?”이수옥은 백씨 앞에 단정히 선 채 눈을 내리깔았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뒤 또렷하고 조리 있게 대답했다.“어머님과 저는 한집안 사람입니다. 어머님께서 어려움을 겪으시면 저 역시 편히 지낼 수 없습니다.”그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더구나 저는 갓 시집온 며느리인 데다 장손의 부인도 아닙니다. 노부인께서 저를 꾸짖고 벌하신다 해도 집안의 대세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헌데 어머님께서는 심씨 가문의 점포와 장부를 관리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노부인의 신임을 잃고 그 권한마저 빼앗기시면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저희 집안 식구들입니다.”백씨는 뜻밖이라는 듯 이수옥을 바라보았다.이 어린 며느리가 이토록 멀리 내다보고 대세를 헤아릴 줄은 몰랐다. 마음이 벅차오른 백씨는 이수옥의 두 손을 꼭 붙잡고 연달아 칭찬했다.며느리를 정말 제대로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에 눈치가 느리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최씨보다 훨씬 영리하고 분별이 있었다.이수옥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백씨의 눈빛을 살폈다. 그 안에 가득한 기쁨과 칭찬을 확인한 순간, 자신이 옳은 선택을 했음을 알았다.물론 조금 전에 밝힌 이유도 거짓은 아니었다.백씨가 집안의 안살림을 쥐고 있어야 자신들이 속한 집안도 넉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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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0화

물론 민간에서는 집안 어른이 분가 문서만 작성한 뒤, 관아에 신고하지 않은 채 사적으로 살림을 나누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누군가 고발하지만 않는다면 관아에서도 굳이 나서서 문제 삼지 않았다.그러나 심서준은 조정의 관료였다. 그에게는 명성과 체면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므로, 분가하려면 반드시 문서를 작성해 관아에 제출하고 정식 절차를 밟아야 했다.더구나 심씨 가문에는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큰 분쟁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분가를 강행하면 집안의 화목을 깨뜨렸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을 수도 있었다.심서준은 본래 다른 관료들의 잘못을 탄핵하고 기강을 바로잡는 일을 맡고 있었다. 누구보다 법도와 위험을 잘 아는 사람이 이런 이치를 모를 리 없었다.심씨 노부인은 충격에 잠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았다.“너… 다시는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 말거라. 분가가 하고 싶다고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일인 줄 아느냐?”심서준은 어머니의 동요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창가로 스며든 오후 햇빛 아래, 그의 얼굴은 평소처럼 차분하고 단호했다.“탄핵을 걱정하시는 것이라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먼저 분가를 꺼냈으니, 그에 따르는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알고 있습니다.”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지금 필요한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허락뿐입니다. 아버지께서는 현재 경성에 계시지 않고 양주에서 봄나들이를 하고 계시니, 오늘 중으로 서신을 보내 뜻을 여쭙겠습니다. 헌데 아버지께서는 틀림없이 허락하실 겁니다.”심씨 노부인은 심서준의 눈을 바라보았다. 깊고 고요한 눈빛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아들은 언제나 그랬다. 한번 마음을 정하면 누구도 쉽게 뜻을 돌릴 수 없었다. 이렇게 직접 말을 꺼낸 이상 이미 속으로 모든 결정을 끝냈다는 뜻이었다.심씨 노부인이 답답한 마음에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엇 때문에 굳이 분가까지 하려는 것이냐? 많은 식구가 한데 모여 살아야 집안도 북적이고 정이 넘치는 법이다.”노부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들을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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