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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1화

백씨는 늘 화려하고 값비싼 장신구로 치장하고 다녔다. 허리는 꼿꼿했고, 몸가짐에는 명문가 규수 특유의 오만함이 배어 있었다. 빼어난 용모까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으며, 말하거나 행동할 때도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다.반면, 그에게는 그 모든 것이 없었다.심태숙은 어릴 적부터 사람들의 안색을 살피며 아버지와 적모의 환심을 사는 법부터 익혀야 했다. 백씨처럼 태어날 때부터 몸에 밴 당당함은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뼛속 깊은 곳에는 떨쳐 내지 못한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었다.그래서 처음 본 순간부터 백씨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부부로 살아온 세월이 벌써 수십 년이었다. 백씨도 전에는 부군을 살뜰히 내조하던 현숙한 부인이었다. 요 며칠 어리석은 욕심에 눈이 멀어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그래도 심태숙은 차마 그녀를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싶었다.지난밤, 그는 백씨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의 방에 들였던 소실들은 모두 장원으로 보내고, 나 소실까지 내보내기로 했다. 앞으로는 백씨와 조용히 의지하며 살아갈 생각이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탐하며 남들과 다투지 않고, 자식들이 훌륭히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며 손주들이나 정성껏 돌보다가 그렇게 평온하게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그는 우선 백씨에게 몇 달 동안 장원에 머물다 돌아오라고 했다. 손에 쥐고 있던 권한과 재물도 모두 내놓으라고 했고, 백씨 역시 순순히 따르겠다고 약속했다.심태숙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돌이켜 보면 부군인 자신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탓도 있는 듯했다. 이제라도 백씨가 마음을 돌려 다시는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는 백씨와 나눈 이야기를 심서준에게 모두 전한 뒤,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서준아, 네가 한 말이 모두 나를 위해서였다는 건 안다. 헌데 네 넷째 형수가 나와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데… 나는 끝내 그 사람을 버릴 수가 없구나. 그 사람도 내게 약속했다. 앞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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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2화

이튿날 아침 일찍, 심씨 노부인은 또다시 사람을 보내 계연수를 불렀다.그때 계연수는 아직 아침 죽을 먹는 중이었다. 아침이면 여전히 속이 메슥거려 식욕이 좀처럼 돌지 않았고, 그 탓에 먹는 속도도 몹시 더뎠다. 작은 숟가락으로 묽은 죽을 조금씩 떠먹다 보니 죽 한 그릇을 비우는 데도 반 시진 가까이 걸리곤 했다.용춘은 식탁 곁에 서서 계연수의 창백한 안색을 살피다가 나직이 물었다.“이 아침부터 노부인께서 부인을 왜 찾으시는 걸까요?”계연수는 물로 천천히 입안을 헹군 뒤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자신도 까닭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심씨 노부인의 처소로 향했다.그곳에 도착해 보니 뜻밖에도 백씨가 먼저 와 있었다.계연수가 백씨를 보지 못한 지는 고작 이틀뿐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사이에 백씨는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안색은 핏기 없이 창백했고, 입가에 늘 어려 있던 웃음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화려한 옷차림마저 빛을 잃은 듯했으며,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은 낯설기까지 했다.계연수는 먼저 심씨 노부인에게 문안을 올린 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방 안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끝에, 백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뜻밖에도 계연수에게 지난 일을 사과하는 말이었다.계연수는 백씨의 창백한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담담하게 답했다.“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저도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으니 더는 신경 쓰지 마세요.”물론 백씨는 그것이 예의상 건네는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다면 자신의 아버지에게까지 손을 댔을 리 없지 않은가.하지만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른 이상, 이제 와 따지고 들 기력도 없었다. 백씨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지난 이틀 동안 백씨 가문에서는 동원할 수 있는 연줄을 모조리 찾아다녔다. 그러나 심서준이 맡아 처리하는 사건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모두가 난색을 보이며 슬그머니 발을 뺐다. 공연히 끼어들었다가 화를 자초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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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3화

심 수보가 돌아와 분가에 동의한다는 뜻을 밝힌다면, 심씨 노부인도 그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여길 뿐 끝까지 막을 수는 없을 터였다. 제 아들이 이미 굳게 결심한 일을 무슨 수로 꺾겠는가.그리고 백씨가 지금 장원으로 떠나는 것도 시기상 좋지 않았다.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심씨 노부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녀는 서늘한 눈으로 백씨를 바라보며 쏘아붙였다.“네가 갑자기 이러는 건 또 무슨 뜻이냐? 네가 그런 여인을 서준이 방에 들이려 해 놓고, 마치 서준이가 너한테 몹쓸 짓이라도 한 것처럼 구는구나. 이제 와 그런 얼굴로 집안일에서 손을 떼겠다는 게냐?”백씨는 뜻밖의 질책에 순간 멍하니 굳었다.솔직히 처음 장원으로 가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는 그런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고 할 수 없었다. 억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집안 식구인데, 심서준은 이번 일을 너무 가혹하게 처리했다.자신이 한 일이라고 해 봐야 그리 큰 해를 끼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심서준은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끝까지 몰아붙였다. 누구라도 자신과 같은 일을 겪었다면 속이 편할 리 없었다.그렇다고 백씨가 장원으로 가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곳에서 한동안 세상의 눈을 피하고 싶었다. 요 며칠 양가에서 서신이 날아올 때마다 가슴이 무겁게 짓눌리는 듯했다. 이제는 이 집에 남아 그 모든 일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비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그러나 심씨 노부인의 차가운 말을 듣자 백씨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어머님께서 또 저를 오해하시는군요. 저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후작과 동서를 볼 면목이 없을 뿐이에요.”계연수는 곁에 조용히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을 뿐, 굳이 끼어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사실 백씨가 장원으로 떠나든 남든 계연수에게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심서준은 이미 분가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설령 백씨가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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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4화

계연수의 말을 들은 백씨는 순간 멍하니 굳었다.틀린 말은 아니었다. 집안사람끼리 서로 물고 뜯는 모습을 남들이 본다면 분명 웃음거리로 삼을 터였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난 지금, 그중 가장 우스운 꼴이 된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백씨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굳은 얼굴로 서 있던 그녀는 먼저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쓸쓸하게 멀어지는 옷자락 뒤로 문이 닫히자, 방 안에는 잠시 무거운 정적만이 남았다.심씨 노부인도 더는 백씨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 계연수를 곁에 붙들어 두고 의원을 불러 맥을 짚게 했다.의원은 한동안 손끝으로 맥을 세심하게 살핀 뒤, 태기가 안정되어 있어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아뢰었다. 그제야 심씨 노부인의 굳어 있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녀는 곧바로 곁에 있던 어멈을 시켜 보약과 보양품을 모조리 가져오게 했다.잠시 후 계연수의 앞에는 크고 작은 상자가 가득 쌓였다. 상자 뚜껑이 열릴 때마다 말린 약재 특유의 쌉싸래한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계연수는 산처럼 쌓인 상자들을 바라보며 이걸 대체 언제 다 먹나 싶었다. 아무리 자신에게는 너무 많다며 사양해도 심씨 노부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계연수는 더 거절하기를 포기하고, 그 많은 보양품을 전부 처소로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그로부터 다시 며칠이 흘렀다.계연수는 그동안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찾아오는 사람을 일절 만나지 않았다. 처소 안에서 조용히 몸을 돌보며 모처럼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나, 이날만큼은 황후가 입궁하라는 전갈을 보내온 탓에 거절할 수 없었다.계연수는 단정히 몸을 꾸린 뒤 다시 궁으로 향했다.황후 역시 계연수가 회임했다는 소식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번에 그녀를 부른 까닭은 용하다는 고승을 궁으로 초청했으니, 계연수의 맥을 짚고 사주도 살펴보게 하려는 것이었다.계연수는 본래 이런 일을 그리 믿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황후만큼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깊이 신뢰하는 눈치였다.곤녕궁에 들어선 계연수는 곧 황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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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5화

계연수에게 아버지는 그런 존재였다. 아버지만 곁에 살아 있다면, 세상에서 아무리 고된 일을 겪더라도 진정한 시련이라 여겨지지 않았다.그녀는 소매 속에서 오므라든 손끝에 천천히 힘을 풀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해 아버지께 큰일이 생겼습니다.”계연수는 더 자세한 사정을 밝히지 않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정혜 방장은 그 한마디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역시 맞군요. 신금이 지나치게 차가우면 병화로 사주의 한기를 덥혀 주지 않는 한, 고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형국이 됩니다. 다만 부인의 병화는 시간에 있어 그 자리가 멀고, 사주 전체를 따뜻하게 만들기에는 힘이 부족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해 큰 고비를 겪으신 것이지요.”정혜 방장의 잔잔한 목소리가 고요한 전각 안에 낮게 울렸다.“허나 그 고비를 넘긴 뒤로 병화가 비로소 단단히 뿌리를 내렸습니다. 지금의 부인께서는 더없이 귀한 운명을 지니셨습니다.”계연수는 정혜 방장이 이토록 정확히 과거를 짚어 낼 줄은 미처 몰랐다. 놀라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황후가 조급한 기색으로 물었다.“그렇다면 뱃속의 아이들은 어떻습니까?”정혜 방장은 계연수가 대략 몇 월 며칠 무렵에 아이를 가졌는지 몇 가지를 물었다.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며 헤아리던 그의 미간이 이내 서서히 좁아졌다.“두 아이 가운데 하나는 부인의 사주에 있는 병화의 기운을 빌려 왔고, 다른 하나는 신금의 기운을 빌려 왔습니다. 불은 양이요, 쇠는 음이지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한층 무거워진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헌데 먼저 세상에 나올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한차례 큰 고비를 겪을 겁니다. 명에 칠살이 들어 성정이 강렬하고, 살아가며 숱한 시련과 좌절을 겪을 것입니다. 그 모든 풍파를 견뎌 끝내 살아남는다면, 더없이 존귀한 명격을 이루겠지요.”“뒤에 태어날 아이는 천덕과 월덕을 함께 타고났습니다. 평생 큰 굴곡 없이 순탄할 것이며, 타고난 복도 오래도록 이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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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6화

황후의 말은 계연수의 불안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혀 주었다.돌이켜 보면 그녀 역시 열네 살에 닥친 그토록 큰 고비를 끝내 견뎌 내지 않았던가. 더구나 정혜 방장도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처음부터 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그 말을 되새기자 꽉 조여 있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계연수의 안색이 한결 편안해진 것을 본 황후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그녀가 그린 그림 이야기를 꺼냈다.“네가 그린 매화도가 지금 황제 폐하의 어서재에 걸려 있다. 폐하께서는 궁중 화공들에게 모사본까지 그리게 하여, 그 그림을 보고 배우라고 하셨단다.”계연수는 뜻밖의 이야기에 놀란 눈을 들었다. 황후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너는 아직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바깥에서는 벌써 네 그림 솜씨에 관한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거금을 내고서라도 네 그림을 사고 싶다는 사람들까지 있다더구나. 네 그림에는 위운필의 화풍이 깃들어 있다며, 근래 보기 드물게 뛰어난 여류 화가라고들 한다.”황후의 목소리에는 흐뭇한 기색이 묻어났다.“민간의 여인들 가운데서도 너를 보고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 제법 많다고 하더구나.”계연수는 자신의 그림이 이처럼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는 온전히 자신의 실력만으로 얻은 명성은 아니었다. 황제의 눈에 들고, 궁중 화공들까지 그녀의 그림을 입에 올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뒷받침이 없었다면 민간에까지 이토록 큰 바람이 불기는 어려웠을 터였다.계연수는 부끄러운 듯 눈을 내리깔며 황후에게 심서준이 자신을 데리고 위운필을 만나러 갔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신이 어릴 적부터 위운필의 그림을 보며 배웠고, 그의 작품을 자주 모사했다는 말도 덧붙였다.사실 그녀가 그림에 처음 마음을 빼앗긴 것도 심서준의 서재에서 우연히 본 위운필의 작품 때문이었다. 처음 그 그림을 펼쳐 보던 순간, 먹빛 사이에 서린 맑고 깊은 정취에 단번에 사로잡혔다.언젠가 자신도 보는 이의 가슴을 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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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7화

맞은편에서 황제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심씨 부인, 마음에 드느냐?”계연수는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 공손히 답했다.“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신첩에게는 더없이 마음에 드는 귀한 하사품이옵니다.”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용포 자락을 끌며 계연수의 앞을 지나던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다시 입을 열었다.“짐의 백방도도 앞으로는 계속 심씨 부인에게 수고를 끼쳐야겠구나.”계연수는 화보를 받쳐 든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그러나 얼굴에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더욱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신첩이 정성을 다하겠습니다.”이윽고 눈앞을 가리고 있던 검은 용포 자락이 멀어졌다. 그러나 황제가 남기고 간 용연향은 전각 안에 짙게 머물러, 여전히 사람의 숨을 옥죄는 듯했다.황제는 본래 의심이 많고 걸핏하면 사람의 속내를 헤아리려 들었다. 그 앞에 설 때마다 계연수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듯했다. 감히 내색할 수는 없었지만, 숨조차 마음대로 쉴 수 없게 만드는 그 압박감에 자연스레 거부감이 들었다.황제가 떠난 뒤, 황후는 계연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폐하께서 네 그림 솜씨를 이토록 높이 평가하시니, 너에게도 좋은 일이지 않겠느냐.”계연수는 얼굴에 조금의 내키지 않는 기색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얌전히 눈을 내리깔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심씨 가문으로 돌아온 계연수는 황제가 하사한 매화 화보를 다시 꺼내 찬찬히 펼쳐 보았다.과연 수많은 사람이 봉무구의 매화를 그토록 칭송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겨우 두어 장을 넘겼을 뿐인데도 머릿속을 가리고 있던 안개가 단숨에 걷히는 듯했다.매화를 이런 식으로도 그릴 수 있다니.붓을 움직이는 방식부터 먹의 농담을 다루는 법, 가지와 꽃을 배치하는 구도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몇 번이나 보았던 매화가 낯설고도 새로운 모습으로 종이 위에서 피어나는 듯했다.계연수는 그 자리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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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8화

심서준이 무심한 듯 건넨 평범한 한마디에 계연수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심서준의 눈을 바라보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 깊숙한 곳에 자신을 향한 걱정과 안쓰러움이 선명히 어려 있었다.실제로 계연수의 마음에는 떨쳐 내지 못한 근심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두 팔을 들어 심서준의 목을 끌어안고, 이날 정혜 방장이 자신의 운명을 풀이해 준 일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들려주었다.이야기를 모두 들은 심서준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그 말을 믿느냐?”계연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방장께서는 제가 열네 살 때 겪었던 일까지 알아맞히셨어요. 그러니 아주 정확한 것 같아요.”심서준은 입꼬리를 희미하게 끌어 올렸다. 그의 손끝이 계연수의 살짝 찌푸려진 미간에 내려앉아, 주름을 펴 주듯 부드럽게 쓸었다.“그 일 때문에 이렇게 속상해하고 있었느냐?”계연수는 결코 가볍게 넘길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심서준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되물었다.“부군은 그런 말을 듣고도 마음이 괴롭지 않으세요?”심서준은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명격 따위는 본래 믿을 만한 것이 아니다.”계연수는 그의 소매를 손끝으로 살며시 움켜쥐었다. 그래도 마음속 의문이 풀리지 않아 나직이 물었다.“그렇다면 제가 열네 살 때 큰일을 겪었다는 건 어떻게 알아맞힌 걸까요?”심서준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아무리 침착하고 영리해도 계연수 역시 이런 일 앞에서는 마음이 흔들리는 여인이었다.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내가 스무 살이던 해, 사건을 조사하다 우연히 서하사의 방장을 만난 적이 있다. 그때 방장이 내 운명을 한 번 보더니, 그해 연말에 피를 볼 재앙이 닥칠 테니 문을 걸어 잠그고 사람을 만나지 말라고 하더구나.”계연수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눈을 깜박였다.“그해 연말, 실제로 피를 보기는 했다. 겨울에 눈이 너무 많이 쌓인 탓에 길에서 넘어져 무릎이 까졌지.”심서준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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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9화

심서준은 계연수가 아이의 솜저고리 이야기만 하는 것을 듣다가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내 신은 이제 만들지 않을 생각이냐?”그제야 잊고 있던 일이 떠오른 계연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얼른 심서준의 가슴을 밀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어제 이미 다 만들었어요. 다만 오늘에야 마지막 실밥을 정리했을 뿐이에요. 제가 가져올 테니 한번 신어 보세요.”심서준은 상체를 일으키며 그녀의 허리를 받쳐 일으켜 주었다. 계연수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장화 한 켤레를 품에 안고 돌아왔다.그녀는 심서준의 앞까지 다가오더니 망설임 없이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부군, 발을 들어 보세요. 제가 갈아 신겨 드릴게요.”계연수가 자신의 앞에 몸을 낮추고 앉아 직접 신을 갈아 신겨 주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심서준의 가슴속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잔잔히 밀려들었다.창밖의 햇빛은 어느덧 기울어 방 안에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러나 희미하게 남은 빛은 계연수의 어깨와 머리카락 위에 고스란히 머물렀다. 그의 앞에 몸을 낮춘 그녀의 모습은 눈앞에 또렷하면서도 한없이 부드럽고 아름다웠다.심서준은 순순히 발을 들어 주었다. 계연수의 희고 가느다란 손이 그가 신었던 장화를 벗겨 낸 뒤, 정성껏 만든 새 장화를 조심스럽게 신겨 주었다.새 장화를 신은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심서준은 마치 부드러운 솜 위를 밟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발이 가벼운 것인지, 마음이 들뜬 것인지 자신도 분간하기 어려웠다.계연수의 기대 어린 목소리가 아래에서 들려왔다.“부군, 잘 맞아요?”심서준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계연수가 얼굴을 들자 맑은 살구꽃 눈에 촉촉한 기대가 가득 고여 있었다. 새하얀 토끼가 자신의 대답만 기다리며 올려다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심서준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던 어린 시절의 계연수도 꼭 저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그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숙였다. 뻗어 나온 손이 계연수의 뺨에 가만히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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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0화

며칠이 더 지나자 영국공부의 사건은 대강 전모가 밝혀졌다. 애초에 복잡한 사건도 아니어서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진상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심씨 가문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 일이 자주 입에 오르내렸다.백씨가 백명연을 굳이 사람들 앞에 끌어내지만 않았더라면, 영국공이 바깥에 숨겨 둔 모녀의 존재가 끝내 드러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영국공은 그동안 모녀를 외부의 별원에 두고 몰래 보살폈고, 누구에게도 그들의 존재를 내비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실제로 이 일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결국 제 손으로 들어 올린 돌에 제 발등을 찧은 셈이었다.백씨는 요 며칠 처소에만 틀어박힌 채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계연수 역시 이 사건이 불거진 계기와 무관하지 않았으나, 그 일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그런데 건너편 처소에 사는 몇몇 형수들이 계연수를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은근히 백씨를 헐뜯는 말을 꺼냈다.모두 같은 심씨 가문 사람들이기는 했으나, 그들 역시 형세를 살펴 유리한 쪽으로 움직이는 데 익숙했다. 이제 백씨가 심씨 가문 안에서 완전히 세력을 잃었다고 판단했으니, 앞으로 안살림을 맡게 될 계연수와 가까워지려는 것이었다. 그러자 자연스레 백씨의 흠을 들추는 말도 뒤따랐다.이날은 봄 경치도 유난히 아름다웠다. 맑은 햇살 아래 연못의 수면이 잔잔히 반짝였고, 따뜻해진 바람에는 막 피어난 꽃과 새잎의 싱그러운 향이 섞여 있었다.계연수는 요 며칠 봉무구의 매화 화보를 연구하고, 황제에게 바칠 복사꽃 그림을 그리느라 처소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았다. 모처럼 수사에 나와 바람도 쐬고 사람들과 한담을 나누니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 트이는 듯했다.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계연수는 문득 손보경을 본 지 꽤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별다른 뜻 없이 손보경의 근황을 물었다.지난번 절에서 돌아온 뒤에는 다시 가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최근 들어 또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둘째 형수 진씨가 대답했다.“다시 절에 가서 요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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