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주문춘귀: Bab 911 - Bab 920

1074 Bab

제911화

“그게 무슨 말이냐. 다 큰 어른이 어린아이와 똑같이 토라져서는.”계연수가 기막힌 듯 말하자 최씨는 더욱 서러운 얼굴로 손수건을 움켜쥐었다.“제가 이런 속사정을 대체 누구에게 털어놓겠어요. 시어머니께 말씀드려 봐야 결국 제가 못나서 부군과 아이의 마음도 붙잡지 못한다고 하실 텐데요.”말을 마친 최씨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기 시작했다.지난번에 계연수 앞에서 처음 속내를 털어놓은 뒤로, 최씨는 괴로운 일이 생길 때마다 그녀를 찾아와 울곤 했다. 솔직히 심정민의 행동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고, 최씨가 이유 없이 생떼를 부리는 것도 아니었다.모든 일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백씨에게 닿았다. 시어머니인 백씨가 감당해야 할 몫과 집안일에 무심한 심정민의 책임이 고스란히 최씨의 어깨에 얹혔다. 두 사람이 외면한 짐을 혼자 떠안았으니 최씨의 삶이 고단해지는 것은 당연했다.그렇다고 계연수가 나서서 정말 화리하라고 권할 수도 없었다. 만약 최씨가 스스로 모든 것을 버리고 새 삶을 택하겠다고 결심한다면 누구보다 지지해 줄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먼저 꺼내는 사람이 자신이어서는 안 되었다.바로 그때 심서준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계연수의 품에 안겨 울던 최씨는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황급히 몸을 일으킨 그녀는 심서준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까지 붉어졌다. 남들 앞에서 울던 모습을 들킨 것이 부끄러웠는지 제대로 인사만 올리고 서둘러 물러났다.최씨가 떠나자 심서준은 자연스럽게 계연수를 끌어안아 자신의 품에 기대게 했다. 이어 시종에게 들고 온 찬합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게 했다.찬합 안에는 그가 오는 길에 음식점에 들러 사 온 음식들이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요즘 계연수의 입맛은 전보다 조금 나아졌지만, 날마다 같은 주방 음식만 먹다 보면 다시 질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심서준은 종종 바깥에서 새로운 요리를 골라 가져오곤 했다.심서준이 가져온 음식은 계연수도 마음 편히 먹을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 젓가락을 쥐여 주고, 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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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2화

계연수는 유독 해가 저물고 나서야 입맛이 조금 돌아오곤 했다. 심서준은 이미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고 꺼리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에, 따스한 등불 아래 차려진 저녁상에는 계연수가 즐겨 먹는 음식들만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아침부터 변변히 먹지 못해 속이 비어 있던 계연수는 모처럼 마음 놓고 수저를 들었다. 좋아하는 음식으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나자 하루 종일 울렁거리던 속도 한결 편안해졌고, 창백했던 얼굴에도 희미하게나마 생기가 돌았다.그날 밤, 목욕을 마친 계연수는 은은한 온기가 감도는 방 안에서 나한탑에 앉아 여러 가지 천을 펼쳐 놓고 살펴보았다. 갓 씻은 머리카락에서는 희미한 향유 냄새가 풍겼고, 등잔불이 알록달록한 천 위로 부드러운 빛을 드리웠다.요즘 들어 그녀에게는 제법 한가한 시간이 생겼다. 주방은 최씨가 맡았고, 집안의 경조사와 선물 왕래는 장씨 어멈이 처리했으며, 장원의 일 역시 진복만이 도맡아 살피고 있었다. 더구나 연공을 바치는 시기도 이미 지나, 장원에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도 많지 않았다.한창 바쁠 때는 하루라도 한가롭게 쉬고 싶었지만, 막상 여유가 생기자 가만히 있는 것이 도리어 무료했다. 무엇이라도 해 볼까 궁리하던 계연수는 문득 뱃속의 아이에게 작은 옷을 지어 주고 싶어졌다. 기왕이면 손바닥만 한 신발도 몇 켤레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계연수는 이처럼 자그마한 물건을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방씨 어멈에게 차근차근 배울 생각으로, 우선 아이의 여린 살에 닿아도 좋을 만큼 부드러운 천부터 고르고 있었다. 마침 심서준도 맞은편에 앉아 있었기에, 어떤 색이 예쁠지 함께 골라 달라고 했다.“부군은 어떤 색이 좋으십니까?”심서준은 펼쳐진 천들을 한 차례 훑어보더니 무심히 손을 들어 푸른색 천을 가리켰다.계연수의 눈에는 그 색이 그다지 예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옆에 놓인 붉고 화사한 천을 집어 들고 다시 물었다.“이건 어떠세요? 아이에게 입히면 복스럽고 보기 좋을 것 같은데요.”심서준은 별다른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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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3화

심서준이 하나씩 늘어놓는 말을 듣고 있자니, 마치 계연수의 잘못을 낱낱이 헤아려 고하는 듯했다.그러나 심서준은 평소 무릎 덮개를 쓰지도 않았다. 망토를 지을 만한 질 좋은 가죽 역시 해마다 셀 수 없이 들어와, 한 번도 걸쳐 보지 않은 망토가 수두룩했다. 그러니 계연수로서는 굳이 그런 것까지 손수 만들어 줄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그런데 심서준은 오래전의 일까지 어제 일처럼 줄줄이 꿰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음속에 담아 둔 지 제법 오래된 모양이었다. 그저 이제껏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그 사실을 깨닫자 계연수는 문득 웃음이 났다. 언제나 냉담하고 무심해 보이는 심서준이 속으로는 이런 사소한 일까지 하나하나 기억하며 서운해했다니, 뜻밖이면서도 묘하게 귀여웠다. 결국 참지 못한 웃음이 입가에 번졌고, 그녀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곱게 휘었다.심서준은 웃음을 터뜨린 계연수를 바라보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이내 팔을 뻗어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고는 단숨에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요즘 들어 계연수는 갈수록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심서준이 지금과 같은 표정을 지으면 휘하의 수하들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할 텐데, 계연수는 겁을 먹기는커녕 그의 앞에서 태연히 웃고 있었다.심서준이 고개를 숙여 품 안의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환하게 피어난 웃음은 더없이 아름다웠고, 웃음을 참지 못한 가녀린 몸이 꽃가지처럼 그의 품 안에서 잘게 흔들렸다. 오랫동안 그녀와 가까이하지 못했던 탓인지, 맞닿은 몸에서 따스한 온기가 전해지자 가라앉아 있던 열기가 순식간에 몸속을 타고 번졌다.그는 계연수의 허리를 감싼 팔에 저도 모르게 힘을 더했다. 은은한 향유 냄새와 목욕을 마친 뒤의 따뜻한 체향이 코끝으로 스며들자, 품 안의 여인을 놓아주고 싶은 마음은 더욱 사라졌다.계연수에게는 이렇듯 질투하는 심서준의 모습이 무척이나 낯설고 신기했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기대 앉은 채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듣고 보니 제 잘못이 맞네요. 헌데 이제 와서 무릎 덮개나 망토를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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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4화

심서준의 대답은 그답지 않을 만큼 솔직한 고백이었다.계연수를 좋아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다만 그 마음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자신조차 알지 못했다. 뒤늦게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너무 깊이 빠져, 더는 돌이킬 수도 없는 뒤였다.적어도 어린 시절의 심서준은 이 세상에 대신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고 믿었다. 설령 계연수를 잃는다 해도 아무 일 없었던 듯 태연한 얼굴로 평소와 다름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계연수를 잊을 수 없었고, 뒤늦게 깨달은 그 설렘을 대신할 사람 또한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그녀가 손가락만 살짝 까딱해도 그는 결국 다시 돌아갈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심서준의 마음은 줄곧 계연수의 것이었다.계연수는 그 대답이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정확히 언제부터 자신을 마음에 품었는지 듣고 싶었으나, 속내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심서준에게 이만큼의 고백을 받아 낸 것만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그래서 계연수는 더 욕심내지 않고 이쯤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적어도 심서준은 자신을 좋아한다고 분명히 인정하지 않았는가.계연수는 그의 품에 기댄 채 눈을 반짝이며 다시 물었다.“그럼 저를 얼마나 좋아하세요?”심서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엄지로 계연수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었다. 따스한 손끝이 여린 피부를 스치자 계연수의 속눈썹이 가볍게 떨렸다.“좋아하는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느냐.”깊고 잔잔한 눈빛이 흔들림 없이 계연수에게 머물렀다.“네가 내 곁에 오래 머물수록 더욱 잘 알게 될 것이다.”그 말은 어떤 화려한 맹세보다도 무거웠다. 소리 없이 하루하루 쌓이고,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깊고 단단해질 마음을 약속하는 말이었다.그 뜻을 알아들은 계연수는 잠시 심서준을 바라보다가 또 하나의 질문을 꺼냈다.“그럼 부군께서는 언젠가 마음이 변하실 수도 있나요?”심서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낮게 웃었다. 이내 계연수의 허리와 무릎 아래로 팔을 넣어 가볍게 안아 들고 침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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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5화

계연수는 심씨 노부인의 아랫자리에 앉았다. 자리를 잡기가 무섭게 젊은 조카며느리 둘이 다가와 살갑게 말을 붙였고, 둘째 형수님 진씨도 몸은 좀 어떠냐며 걱정스레 안부를 물었다. 심씨 노부인까지 요 며칠은 입맛이 조금 돌아왔느냐고 연달아 묻는 바람에, 계연수는 이쪽저쪽을 돌아보며 대답하느라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맞은편 백씨의 곁에 앉아 있던 이수옥은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계연수가 심씨 가문에 들어온 지 불과 반년 남짓이었는데, 어느새 집안사람들의 마음이 온통 그녀에게로 기운 듯했다. 반면 시어머니인 백씨의 곁은 텅 비어, 다가와 말을 건네는 이조차 없었다.그 차이가 너무도 선명해 이수옥은 내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전에는 계연수를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선뜻 다가가기 어려울 만큼 멀리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불과 반년 만에 어떻게 집안사람들의 마음을 이토록 사로잡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사실 이수옥은 시집온 뒤로 계연수와 두어 번밖에 마주치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계연수가 아이를 가진 뒤로 아침 문안을 드리러 나오지 않았고, 요즘은 몸까지 좋지 않아 처소 밖으로 거의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큰형수님은 틈만 나면 계연수의 처소를 드나들며 가까이 지내는 눈치였다. 이수옥 역시 한때는 그처럼 해 볼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친정어머니도 편지를 보내, 계연수가 이제 아이까지 가졌으니 기회가 될 때마다 가까이 지내라고 거듭 당부했다. 지금 심씨 가문이 누리는 권세와 지위는 모두 심서준이 이끄는 집안에서 비롯된 것이니, 계연수와 친분을 쌓아 두어서 나쁠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하지만 지난 일에 연회에서 벌어졌던 일까지 생각하면 선뜻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수옥 역시 은근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이제 와 먼저 계연수를 찾아가 비위를 맞추려니 도무지 체면이 서지 않았다.지금도 계연수의 양옆에는 이미 사람들로 빈자리가 없었다. 맞은편에 앉은 형수님과 숙모들까지 앞다투어 살갑게 구는 모습을 보자, 이수옥은 손에 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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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6화

사람들이 모두 물러나자 동쪽 별실에는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반쯤 열린 창호 사이로 엷은 봄빛이 스며들었고, 따뜻하게 데워진 방 안에는 갓 우린 차향이 은은하게 감돌았다.계연수는 심씨 노부인의 맞은편에 단정히 앉아 고운 손으로 찻잔을 채웠다. 가느다란 물줄기가 잔 안으로 흘러들며 맑은 소리를 냈다.심씨 노부인은 차를 받으면서도 계연수의 목덜미에 남은 붉은 흔적을 두어 번 더 살폈다. 이윽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요즘 몸은 좀 어떠하냐?”계연수는 차분히 손을 거두며 사실대로 대답했다.“많이 좋아졌어요. 입맛도 전보다는 조금 돌아왔고요.”심씨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뜸을 들였다. 손끝으로 찻잔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던 그녀가 이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서준이는 평소 공무로 늘 바쁘지 않으냐. 그러니 안채에서는 곁에서 잘 보살펴 주어야 한다. 그래야 집안일에 마음 쓰지 않고 조정의 일에만 전념할 수 있지.”그 말을 들은 순간 계연수의 마음이 희미하게 멎었다. 심씨 노부인이 자신을 따로 남긴 까닭이 어렴풋이 짐작되었으나, 얼굴에는 아무런 기색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심씨 노부인은 그런 계연수를 깊이 바라보았다.“너는 지금 아이를 품고 있으니 무엇보다 몸을 조심해야 한다. 조금의 탈도 있어서는 안 돼.”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레 계연수의 아직 평평한 아랫배로 향했다.“네 배 속의 아이는 내가 가장 기다리고 아끼는 손주다.”심씨 노부인은 손을 내밀어 계연수의 손을 잡았다. 손등을 다독이는 손길은 다정했지만, 뒤이어 나오는 말은 마치 값을 약속하듯 분명했다.“아이를 무사히 낳고 나면 네게도 섭섭하지 않게 해 줄 것이다. 적어도 점포 세 곳은 내어 주마.”먼저 달콤한 보상을 내밀어 마음을 누그러뜨리려는 속셈이 빤히 보였다. 계연수는 눈을 내리깔고 다소곳이 대답했다.“어머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심씨 노부인은 얌전하게 순응하는 계연수의 모습을 보고 만족한 듯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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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7화

심씨 노부인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계연수의 말이 틀리지 않았으니 달리 반박할 수도 없었다.그렇다고 먼저 꺼낸 말을 순순히 거두자니 체면이 서지 않았다. 한동안 찻잔만 매만지던 심씨 노부인은 결국 억지로 결론을 내렸다.“우선 사람부터 알아보거라. 서준이가 정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면 될 일이다.”될지 안 될지는 나중 문제이니, 일단 사람을 들일 준비만큼은 반드시 하라는 뜻이었다.말을 마친 심씨 노부인도 자신의 요구가 다소 억지스럽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계연수에게 무리한 일을 떠넘긴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이내 시선을 내리고 찻잔을 들어 차만 마셨다. 더는 계연수의 표정을 살피려 하지 않았다.계연수는 여느 때처럼 온순하게 대답했다.“예, 어머님. 그리하겠습니다.”바라던 대답을 들은 심씨 노부인은 그제야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별실에서 나온 계연수는 곧장 처소로 돌아가지 않고 후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답답한 마음도 식힐 겸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복사나무가 늘어선 연못가의 수각에 이르렀다.봄바람에 떨어진 연분홍 꽃잎이 맑은 수면 위를 느릿느릿 떠다녔다. 계연수는 난간 곁에 앉아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심씨 노부인 앞에서 나오던 때와 다름없이 얼굴은 차분했고, 눈빛에도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그녀의 뒤에는 시녀 추월과 추상이 함께 서 있었다. 두 사람도 조금 전 심씨 노부인이 한 말을 모두 들었지만, 감히 엉뚱한 마음을 품지는 못했다.정실의 처소에서 오랫동안 시중들었으니, 심서준이 단 한 번이라도 여인으로서 눈여겨본 적이 있었다면 그들 역시 헛된 기대를 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랜 세월 곁에 있었어도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날조차 손에 꼽을 정도였다. 진작부터 분수에 맞지 않는 마음은 깨끗이 접은 뒤였다.용춘만은 속이 타는 듯했다. 그녀는 계연수의 곁으로 다가가 몸을 낮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부인께서는 정말 후작께 첩을 들이실 생각이세요?”계연수는 시녀가 건넨 따뜻한 차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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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8화

이수옥도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회랑 끝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심정우였다.짙은 남빛의 소매 좁은 평상복이 훤칠한 몸에 단정히 맞아떨어졌고, 허리춤에는 군영에서 쓰는 아패가 매달려 있었다. 봄빛이 비스듬히 내려앉은 회랑을 따라 걸어오는 얼굴에는 평소처럼 서글서글한 웃음이 가득했다.심정우는 수각에 이르자 곧장 계연수 앞으로 다가갔다. 흐트러짐 없이 공손히 예를 올린 뒤 다시 한번 밝은 목소리로 불렀다.“오숙모.”계연수도 그를 보자 반가운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본래부터 심정우의 밝고 꾸밈없는 성정을 좋아했다. 문득 지난번에 매를 맞아 상처투성이가 되었던 일이 떠올라 자연스럽게 물었다.“등에 난 상처는 다 나았느냐?”“오숙모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작 다 나았습니다.”심정우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 보이자 계연수도 마음을 놓았다. 요즘은 심정우가 군영에서 지내느라 부저에서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기에, 그곳의 일은 어떤지, 많이 바쁘지는 않은지 안부 삼아 물었다.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친척처럼 자연스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옆에 서 있던 이수옥은 그 모습을 바라볼수록 속이 불편해졌다. 심정우가 계연수 앞에서는 환히 웃으며 막힘없이 대화를 이어 가는 모습이 어쩐지 눈에 거슬렸다.결국 참지 못한 이수옥은 두 사람 사이로 다가가 심정우의 말을 끊었다. 그의 팔을 제 팔로 감아 안으며 조금 굳은 얼굴로 물었다.“돌아온다는 말도 없이 갑자기 오시면 어떡해요?”심정우는 성정이 워낙 유순한 사람이어서 이수옥의 차가운 얼굴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내가 언제 돌아올지는 나도 모르는데 미리 무슨 말을 하겠소. 사람들과 술이라도 마시게 되면 더 늦어질 수도 있고.”이수옥은 그 무심한 대답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입술을 꾹 다문 그녀는 심정우의 신발을 발끝으로 힘껏 밟았다.“말씀 좀 곱게 하세요.”짙은 남빛 신발 위로 희미한 발자국이 남았다. 심정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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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9화

게다가 조금 전 심정우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밀어낸 일까지 떠올리자 이수옥의 가슴속에 서운함이 치밀었다.두 사람은 분명 약속했다. 심정우가 혼인 초부터 자신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적어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부인의 뜻을 따라 체면을 세워 주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는 방금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밀쳐 또다시 망신을 주었다.계연수에게는 그토록 살갑게 웃으며 선물까지 건네면서, 자신에게는 냉랭하게 구는 모습도 못내 얄미웠다. 마음속 불만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자 이수옥은 심정우에게 다가가 그의 귀를 힘껏 잡아당겼다.“그래서, 부군은 지금 저와 함께 돌아가실 거예요, 안 돌아가실 거예요?”심정우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몸을 숙이며 연달아 비명을 질렀다.“아야, 아야! 알았으니 이것부터 놓고 말하시오!”그가 순순히 항복하자 이수옥은 그제야 사람들 앞에서 한 번 되갚아 준 듯 마음이 조금 풀렸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손을 놓자, 심정우는 벌게진 귀를 감싸 쥐고 그녀를 노려보았다.‘드센 여편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으나, 마침 이수옥이 매서운 눈길을 보내오자 감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계연수도 이수옥에게 이토록 드센 면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심정우를 빈틈없이 휘어잡는 모습이 뜻밖이어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부드럽게 말했다.“모처럼 집에 돌아왔으니 처소에 가서 쉬어야지. 부인도 기다렸을 테고.”심정우의 속에서는 싫다는 말이 백 번도 넘게 치밀었다. 처소로 돌아가 봐야 호랑이 같은 이수옥과 마주해야 하지 않는가.그래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약속이 있었다. 남들 앞에서는 자신이 이수옥의 뜻을 따라 주는 대신, 처소 안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지내기로 했다. 심정우는 한번 한 약속을 저버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계연수까지 돌아가 보라고 하자 결국 얌전히 이수옥을 따라나섰다.이수옥은 아직까지도 심정우와 첫날밤조차 치르지 못했다. 그가 집에 돌아오는 날도 드물었지만,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부인의 체면을 세워 주고 말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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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0화

두 사람은 애초부터 제 뜻과 상관없이 억지로 맺어진 사이였다. 솔직히 말하면 이수옥 역시 자신에게 시집와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다.심정우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이수옥의 눈가에는 오히려 물기가 더욱 짙게 고였다. 울음을 억누르느라 잠긴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저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왜 손끝 하나 대려 하지 않는 겁니까?”심정우는 고개를 숙였다. 차마 이수옥의 젖은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 한참을 침묵하다가, 결국 또다시 같은 말만 내놓았다.“미안하오.”번번이 미안하다는 말뿐이었다. 이수옥은 그 무책임한 사과에 정말로 미쳐 버릴 것 같았다.그녀는 심정우의 옷깃을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우리 분명히 약속했잖아요. 부군도 저를 좋아하지 않고, 저 역시 부군을 좋아하지 않지만, 어쨌든 부군은 저를 부인으로 맞았고 저는 이 집에 시집왔어요.”격해진 숨을 애써 가다듬었으나 목소리에는 억울함과 울분이 고스란히 배어 나왔다.“저는 부군을 대신해 안채를 돌볼 테니, 부군께서는 제게 정실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체면을 세워 주기로 했잖아요.”이수옥은 붉어진 눈으로 심정우를 올려다보았다.“그러니 적어도 아이 하나는 낳게 해 주시면 안 됩니까?”심정우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이수옥의 절박한 물음에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동안 마른 입술만 달싹이던 그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내가 첩은 들이지 않겠다고 했잖소. 밖에서는 그대 말도 따르고, 그대 체면도 지켜 주겠다고 했고. 헌데… 그것만큼은 정말 할 수 없소.”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가 애써 달래듯 덧붙였다.“게다가 내 위에는 형님도 계시니 내게 자식이 있든 없든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오. 어머니께서 그대를 탓하시면 내가 나서서 말할 것이오.”심정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수옥에게는 더없이 잔인한 말을 이어 갔다.“정 안 되면 내 몸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좋소. 모두 내 탓이라고 하면 아무도 그대를 나무라지는 않을 것이오.”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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