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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1화

낯선 사내를 한밤중에 손보경의 방으로 들여보내 겁탈하는 시늉을 하게 한 뒤, 사통했다는 누명까지 씌우겠다니. 아무리 손보경을 내치기 위해서라지만 지나친 계책이었다. 자칫하면 한 여인의 일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릴 수도 있었다.공씨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계연수를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헌데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손보경을 떼어 낼 방도가 없지 않느냐.”그러고는 계연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차라리 동서가 후작에게 한번 물어보는 게 어떻겠느냐? 후작도 괜찮다고 한다면 손보경을 내쫓을 수 있고, 태후의 계략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한율이는 집안도 어울리고 자신의 마음에도 쏙 드는 규수와 새로 혼인할 수 있을 테지.”계연수가 물었다.“이 일을 한율이도 알고 있나요?”“아직은 모른다. 큰형수님이 일부러 한율이에게 숨기고 계시거든.”공씨가 한숨을 내쉬듯 덧붙였다.“한율이는 말수가 적고 무뚝뚝하기는 해도 워낙 반듯한 아이라, 이 일을 알면 아마 반대할 것이다. 그래서 큰형수님은 한율이 모르게 일을 처리하실 생각이고.”계연수는 공씨의 말에 숨은 뜻을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오늘 이 이야기는 결코 무심코 꺼낸 것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자신의 생각을 묻는 듯했지만, 실은 심서준의 의중을 떠보려는 것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그를 입에 올릴 까닭이 없었다.이런 일은 조금이라도 뒤처리가 허술하면 두고두고 화근이 남았다. 실행하려면 흔적조차 남지 않도록 깨끗이 수습해 줄 사람이 필요했을 터였다.그 속셈을 알아차린 계연수는 단호하게 말했다.“아무리 손보경을 내보내고 싶다 해도 이건 옳은 방법이 아니에요. 손보경 역시 자신의 뜻으로 이 집안에 시집온 것은 아닐 거예요. 그런데도 심씨 가문에서 이런 비열한 방법으로 한 여인을 내친다면 가풍에도 어긋나는 일이지요. 부군께서 아신다 해도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공씨는 뜻밖이라는 듯 잠시 멍하니 굳었다. 계연수의 말에는 조금도 타협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헌데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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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2화

계연수는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자 두 형수가 무엇을 바라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손보경은 모든 일을 지나치리만큼 완벽하게 해냈다. 늘 예법에 어긋남 없이 말하고 행동했으며, 얼굴에는 기쁨도 노여움도 슬픔도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완벽함 때문에 오히려 속내를 헤아릴 수 없었고, 사람들에게 마음이 깊고 음흉하다는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계연수는 예전에 손보경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 주라고 충고한 적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솔직하게 마음을 드러낸다면 주변 사람들도 그녀를 훨씬 친근하게 여길 것이라 생각했다.하지만 손보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사실 심씨 가문은 가풍이 바르고 집안사람들 사이의 정도 깊었다. 심원한 역시 부군으로서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손보경이 자신을 진정한 심씨 가문의 며느리로 여기고, 심원한에게 마음을 열어 태후의 뜻을 솔직히 밝힌 뒤 친정까지 포기할 각오를 했다면 이곳에서의 삶이 그리 고달프지는 않았을 것이다.더구나 계연수가 보기에 손보경은 머리가 영리하고 수완도 좋은 여인이었다. 심씨 가문에서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일쯤은 그녀에게 그리 어렵지 않을 터였다.그러나 계연수가 손보경과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눈 지도 어느덧 오래였다. 지금 그녀가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손보경이 계속 속내를 감춘 채 이처럼 행동한다면, 심씨 가문 사람들이 그녀를 경계하는 것도 당연했다.계연수는 공씨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손보경이 속이 깊고 수단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은 저도 알아요. 그렇다고 그런 식으로 일을 꾸미는 건 옳지 않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공씨는 답답한 듯 곧바로 설득하려 들었다.“헌데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달리 방법이 없지 않느냐.”계연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손보경은 지금 어느 절에 있나요? 저도 며칠 뒤에 부군과 함께 뱃속의 아이를 위해 복을 빌러 절에 갈 생각이었어요. 가는 김에 그 아이를 한번 만나 볼게요.”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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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3화

이수옥은 평소 심정우 앞에서 제멋대로 명령하듯 구는 데다 자존심도 무척 높았다. 더욱이 그녀가 보아 온 계연수는 언제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계연수는 성정이 온순하고, 바로 그 온순함으로 오숙부의 마음을 얻었다고 여겨 왔다.그런데 지금껏 들어 본 적 없는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수옥은 흠칫하며 계연수를 올려다보았다.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싸늘한 얼굴을 마주한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오숙모께서 왜 제 말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세요? 저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에요.”계연수는 싸늘하게 웃으며 이수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네가 나를 오숙모라 부른다면, 그에 맞는 예법부터 지켜야 할 것이다. 내 앞에서 해도 되는 말과 해서는 안 되는 말조차 구분하지 못하느냐? 내가 일을 험악하게 만들었다고? 시어머니를 부추겨 네 오숙부에게 소실을 들이게 하려 한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지? 고작 아랫사람인 네가 감히 어른의 일을 대신 결정하려 들다니, 누가 그런 담력을 주었고 누가 그런 법도를 가르쳤느냐?”계연수는 한마디 한마디 서늘하게 몰아붙였다.“너는 대체 어려서부터 어떤 가르침을 받고 자란 것이냐?”거듭되는 질책에 이수옥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질렸다.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선 그녀는 입술만 달싹일 뿐, 감히 한마디도 받아치지 못했다.이수옥은 다급히 심정우의 소매를 힘껏 잡아당겼다. 자신을 위해 무어라도 말해 달라는 뜻이었다.자신이 두둔하려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시어머니, 곧 심정우의 어머니였다. 게다가 이제 자신은 심정우의 부인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가 계연수에게 이토록 모진 말을 듣는 자신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그러나 고개를 돌린 심정우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수옥을 바라보는 눈빛에 희미한 혐오가 어려 있었다.아주 옅었지만, 잘못 보았다고 넘길 수 없을 만큼 선명한 감정이었다.이수옥은 넋을 잃은 듯 그를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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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4화

하지만 심정우의 가슴속에 아무리 많은 말이 뒤엉켜 있어도, 지금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말은 한마디뿐이었다.“오숙모, 수옥이가 일부러 숙모님께 무례하게 굴려던 것은 아닙니다.”계연수도 더는 이 일로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 전 이수옥의 무례한 태도를 몇 마디 꾸짖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굳이 끝까지 몰아세우며 일을 키울 이유는 없었다.더구나 큰 키를 구부정하게 낮춘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심정우의 모습을 보니 계연수의 마음도 편하지 않았다. 깊이 상심한 기색이 역력한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저 심정우의 부부 사이만이라도 평온하고 화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계연수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려 말했다.“괜찮다. 내가 그 아이와 정말로 따지고 들겠느냐? 우선 가서 찾아보거라. 조금 전 몹시 다급하게 뛰어가던데,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느냐.”심정우는 본래 이수옥을 쫓아갈 생각이 없었다. 제멋대로인 규수의 성미를 받아 주는 일에는 이제 정말 지쳐 있었다.그러나 계연수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더는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낮게 대답했다.“…예.”몸을 돌려 떠나기 전, 심정우는 끝내 참지 못하고 계연수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계연수의 눈매는 이미 평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여전히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이라, 조금 전 서늘하게 이수옥을 꾸짖었던 순간이 마치 찰나에 피었다 사라지는 달맞이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그 모습을 본 심정우의 가슴이 미묘하게 조여 왔다. 그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려 떠났다.계연수가 다시 처소를 향해 걷기 시작하자, 뒤따르던 용춘이 참지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부인은 말을 너무 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계연수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러나 어려서부터 온 집안의 사랑을 받으며 제멋대로 자란 명문가 규수였다. 마음속에 악의만 없다면, 굳이 말 한마디 한마디를 붙들고 따질 생각은 없었다.무엇보다 이수옥은 심정우의 부인이었다. 심정우의 후원이 평온하고 화목하기를 바란다면, 계연수 역시 이번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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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5화

사실 이수옥이 느끼는 감정은 분노라기보다 서러움에 가까웠다. 심정우가 자신을 달래 주기를 바랐고, 그에게 쌓인 불만을 성질로 풀어냈을 뿐이었다. 심정우를 다치게 할 생각은 한 번도 없었다.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저지른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를 격분하게 한 것은 조금 전 심정우의 눈에 스쳤던 혐오였다.하지만 막상 심정우의 얼굴에 피가 맺힌 것을 보자 이수옥도 그대로 굳어 버렸다.심정우는 한 손으로 뺨을 감싸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조금씩 배어 나왔다. 그가 고요히 이수옥을 바라보았지만, 이상하리만치 얼굴에는 분노조차 없었다.이수옥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심정우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괜찮으냐고 묻고 싶었으나, 그의 눈빛과 마주치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뻗으려던 손만 허공에서 어색하게 굳었다.문득 두 사람 사이의 무언가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애써도 예전으로 되돌리기 어려울 만큼 깊이 금이 간 듯했다.심정우가 이수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당신은 기어이 나와 하루도 편할 날 없이 싸워야겠소? 내가 영영 집에 돌아오지 않아야 그제야 속이 시원하겠소?”이수옥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거칠게 훔쳤다. 눈물로 흐려진 두 눈이 원망스럽게 심정우를 향했다.“내가 당신에게 못할 짓이라도 했어요? 내가 대체 언제 당신에게 몹쓸 짓을 했는데요?”심정우가 이를 악물었다.“그럼 내가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 하오? 내 사유 재산도 달라고 해서 모두 주었고, 녹봉도 전부 당신에게 맡겼잖소. 헌데 대체 나더러 뭘 더 하라는 것이오?”이수옥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너무나도 많았다. 남들이 보아도 흠잡을 수 없는 떳떳한 안주인의 체면을 원했고, 아이도 하나 갖고 싶었다. 설령 훗날 심정우가 곁에 없게 되더라도, 아이만은 자신의 곁에 남아 의지가 되어 주기를 바랐다.심정우는 정말 그녀가 달라는 것은 무엇이든 주었다. 하지만 정작 이수옥이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만큼은 끝내 내어 주려 하지 않았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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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6화

심정우는 이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상처를 본 심정민이 몹시 화를 내는 바람에, 결국 그의 완강한 손에 이끌려 어머니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그날 밤이 되기도 전에 이수옥이 금비녀로 심정우의 얼굴에 상처를 냈다는 이야기가 집안 전체에 퍼졌다. 사람들은 셋째 부인의 성미가 너무 사납고 괄괄하다며 뒤에서 수군거렸다.일이 이토록 커진 것은 무엇보다 백씨가 소란을 크게 벌인 탓이었다. 백씨는 이수옥의 친정어머니까지 집으로 불러들여 제법 요란하게 일을 처리했다. 심씨 가문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아무리 입단속을 하려 해도 결국 어디에선가 이야기가 새어 나가기 마련이었다.계연수도 이수옥이 정말 그런 짓까지 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데 정작 얼굴을 다친 심정우는 사람들 앞에서 이수옥을 감싸는 말을 몇 마디 했다고 했다.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심정우라면 충분히 그럴 법한 일이었다.그날 밤 계연수는 따뜻한 제비집 죽을 천천히 떠먹고 있었다. 곁에 앉아 시중들던 용춘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그래도 셋째 도련님과 셋째 부인의 금실은 좋은 줄 알았습니다. 집안사람 중에 셋째 도련님의 성품이 온순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언제나 셋째 부인을 먼저 생각하고 세심하게 보살피셨잖아요.”용춘의 얼굴에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 떠올랐다.“그런데도 셋째 부인은 뭐가 그리 부족해서 이런 일까지 벌였을까요?”계연수는 제비집 죽을 한 숟가락 떠먹은 뒤 담담히 말했다.“너무 받아 주기만 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지.”이수옥이 성정을 조금 누그러뜨리고 전체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심정우가 그녀를 응석받이처럼 감싸고 받아 주어도 별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수옥은 본래 성미가 드세고 도도했다. 그런 사람을 한없이 받아 주기만 하면 오히려 잘못된 버릇을 키울 수 있었다.물론 부부 사이에서 반드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누르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수옥이 바깥에서 심정우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부군을 제 뜻대로 휘두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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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7화

사실 심씨 노부인도 손자 부부의 내밀한 일에까지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수옥의 성정이 워낙 거칠고 안하무인이라, 누군가 곁에서 눌러 주지 않는다면 심정우가 어디까지 휘둘리게 될지 알 수 없었다.백씨 역시 소실을 들이자는 방안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심정우가 이수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혼인 전에는 입버릇처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는 이수옥이 무슨 짓을 해도 한없이 감싸고 돌았다. 지켜보는 백씨조차 답답할 지경이었다.물론 백씨는 며느리인 이수옥을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멋대로 굴며 자신의 아들을 업신여기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다만 두 사람이 혼인한 지 이제 겨우 두 달이었다. 이토록 서둘러 소실을 들인다면 남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십상이었고, 사돈댁 또한 결코 만만한 집안이 아니니 해명하기도 어려웠다.적어도 반년쯤 지난 뒤에 소실을 들이는 편이 적당할 듯했다.이수옥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일이 이 지경까지 번지자 가슴속에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자신의 행동 하나가 이토록 큰일을 불러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심정우가 정말 소실을 들인다면 앞으로 자신은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그것만큼은 절대로 허락할 수 없었다.이틀이 지난 어느 날 오후, 심서준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막 측문을 넘어서자 문지기가 황급히 다가와 곁에서 몇 마디를 속삭인 뒤, 봉해진 서신 한 통을 내밀었다.심서준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 서신을 받아 펼쳐 본 그의 얼굴은 더욱 무겁게 굳었다. 그는 곧장 몸을 돌려 큰백부의 처소로 향했다.그곳에서는 심한율과 그의 아버지 심문청이 심서준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심서준이 들어서자 심문청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오늘 이른 아침, 태후께서 보낸 사람들이 보경이를 데리러 상국사로 향했다. 태후께서 몸이 편찮으시니 보경이더러 입궁하여 곁에서 시중을 들라는 것이었어. 그때 그곳에는 네 큰형수밖에 없었다. 궁에서 사람이 와 전지를 전하는데 어찌 거역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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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8화

“무슨 일이든 서두르지 말거라. 정말 일이 벌어진다 해도 황급히 결백부터 주장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다급하게 해명하려 들면 오히려 스스로 진영을 흐트러뜨리게 될 뿐이니.”심서준의 목소리는 시종 차분했다.“손보경이 정말 우리를 지목한다면, 저들에게 증거를 내놓으라고 하면 된다. 우리는 그 증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만 확인하면 되고. 거짓은 아무리 꾸민다 해도 끝내 진실이 될 수 없다.”그 말을 들은 심문청은 가슴속에 든든한 버팀목 하나가 생긴 듯했다.심서준의 말대로 거짓이 진실로 바뀔 수는 없었다. 이쪽에서 먼저 당황하여 결백을 증명하려 이리저리 뛰어다닌다면, 오히려 태후가 파 놓은 함정에 제 발로 들어가는 꼴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는 편이 가장 나았다.심문청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심한율에게도 방금 심서준이 일러 준 대로 행동하라고 당부했다.심한율 역시 오늘 찾아가는 목적이 어디까지나 상대의 의중을 떠보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자칫 작은 실수 하나로도 큰일이 벌어질 수 있는 만큼, 그는 긴장한 얼굴로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이번 일은 심씨 가문에서도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사안이었다.소식을 들은 심씨 노부인은 곧바로 심서준을 불렀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네 아버지는 앞으로 며칠이나 더 있어야 돌아오시느냐?”심서준은 날짜를 헤아려 본 뒤 답했다.“아마 이틀 정도면 도착하실 겁니다.”심씨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에 어린 근심은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물었다.“만일 태후께서 정말 손보경을 이용해 우리를 모함하려는 것이라면, 네가 막아 낼 수 있겠느냐?”심서준의 눈매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어머니께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손보경이 심씨 가문에 시집온 날부터 저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하고 대비해 왔습니다.”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태후께서 정말 우리 심씨 가문을 치려 하신다면, 늦게 오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찍 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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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9화

그로부터 사흘이 더 흘렀다. 궁궐 안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요했지만, 심씨 가문 사람들은 누구 하나 마음을 놓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가슴 졸이며 보냈다.양주에 머물던 심 수보도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급히 돌아왔다. 도착한 그날 밤, 그는 곧장 심서준을 서재로 불러들였다.심서준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심 수보는 두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창가에 서 있었다. 앙상하리만치 야윈 뒷모습은 깎아지른 산봉우리처럼 꼿꼿했고, 세월에도 꺾이지 않은 강직한 기개가 서려 있었다.뒤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나서야 심 수보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심서준을 바라보며 그가 처음 꺼낸 말은 뜻밖의 물음이었다.“영청후부의 사건이 마무리된 뒤로 청류 사이에 이런 말이 퍼졌다고 하더구나. ‘도어사의 말 한마디가 구경의 말보다 무겁다.’ 너도 들어 본 적이 있느냐?”심서준은 입술을 다문 채 아버지 앞에서 눈을 내리깔았다.“들었습니다.”잠시 뒤, 그가 차분히 덧붙였다.“사람을 시켜 더는 퍼지지 않도록 막아 두었습니다.”서재 안에는 어스름한 등불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나이 든 수보의 얼굴 위로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깊게 팬 주름과 노쇠한 눈매가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세월에 닳은 듯한 쉰 기운이 배어 있었다.“너도 지금 청류에서 네 명망이 얼마나 높은지 알고 있을 것이다. 언관들은 모두 너를 따르고, 육과급사중은 누구 하나 두려움 없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탄핵 상소가 끊임없이 올라오고, 사람들은 너를 조정을 떠받치는 기둥이라 칭송하지.”“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은 나도 일찍이 짐작했다. 네 성정이 본디 그러하고, 폐하께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셨으니까. 당초 폐하께서 너를 중용해 지금의 자리에 앉히신 것도, 네가 이만한 일을 해내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심 수보의 눈빛이 촛불 너머로 깊이 가라앉았다.“너는 폐하의 손에 들린 예리한 칼이었다. 당시에는 폐하의 황권이 아직 굳건하지 않았고, 이황자 성왕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니 네가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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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0화

심서준은 태후가 손보경을 궁에 붙잡아 둔 순간부터 분가를 당분간 미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분가를 논하기에 적절한 때가 아니었다.그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당분간은 저도 분가할 생각이 없습니다. 헌데 이번 일이 모두 지나가면 반드시 분가할 것입니다. 넷째 형수님은 무슨 일을 하든 집안 전체의 형편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그동안 넷째 형수님이 심씨 가문의 안살림을 맡으며 어떤 일들을 벌였는지, 아버지께서도 어느 정도는 들어 보셨을 겁니다.”심서준의 목소리는 시종 담담했지만, 그 뜻만은 단호했다.“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혈육의 정도, 가문의 대국도 서슴없이 저버리는 사람입니다. 훗날 또 다른 이익이 걸린다면 무슨 뜻밖의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넷째 형수님이 벌여 놓을지도 모르는 일을 더는 대신 수습하고 싶지 않습니다. 부디 제 뜻을 헤아려 주십시오.”심 수보는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 심서준의 말에는 분명 일리가 있었다. 다만 백씨가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한 집안의 부인으로서 오랜 세월 어른들을 정성껏 모셔 왔으니 나름의 효심은 있었다.이번 일에 관해서는 그도 이미 전해 들었다. 백씨가 지나치게 제 뜻대로 집안일을 좌우하려 드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심태숙 역시 부인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으니 단단히 꾸짖을 생각이었다.그러나 그는 심서준의 말에 곧바로 답하지 않고 짧게 말했다.“그 일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다음 날 오전, 심 수보는 심씨 가문의 모든 사람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집안의 법도를 새로 세웠다. 특히 집안의 여인들끼리 편을 갈라 다투고 분란을 일으키면 곧바로 부인을 내쫓겠다고 엄중히 못 박았다.그 말을 할 때 심 수보의 시선이 백씨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백씨는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채 몸조차 움직이지 못했다.심씨 노부인이 평소 집안일을 맡고 있었고, 심 수보는 성품이 온화하여 사소한 일에는 좀처럼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심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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