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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1화

계연수는 황후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리고 있었다.그녀는 소매 끝을 가만히 여민 뒤, 황후의 팔 위에 손을 살며시 얹었다. 손끝을 통해 전해지는 체온이 유난히 서늘하게 느껴졌다.“부군께서 이번 일로 심씨 가문의 근간이 흔들리지는 않을 거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황후마마께서도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황후 역시 황제가 얼마나 의심이 많고 사람을 쉬이 믿지 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황제는 늘 조정과 외척 사이의 균형을 중시했으니, 이번 일 또한 그 연장선에 불과할 터였다.그 사실을 알면서도 가슴 한편이 서늘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황제가 태자를 바꿀 생각만 품지 않는다면, 그 밖의 일은 아무리 쓰라려도 얼마든지 참고 견딜 수 있었다.정오가 가까워지자 창호를 투과한 햇빛이 전각 안으로 희미하게 번져 들었다. 황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계연수에게 함께 태후의 처소로 가자고 했다.손보경도 엄연히 심씨 가문의 며느리였다. 숙모인 계연수가 입궁한 김에 조카며느리를 찾아 안부를 살피는 것은 누가 보아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그러나 태후의 처소에 도착한 두 사람은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 황제도 그곳에 와 있었던 것이다.전각 안에는 탕약 특유의 씁쓸한 향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태후는 머리가 아픈 듯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은 채 연탑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황제는 그 곁에 자리해 병세를 살피고 있었다.겉으로 보기에는 병든 어머니를 염려하는 다정한 아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작 손보경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계연수는 황후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 정중히 문안을 올렸다. 예를 마치고 천천히 고개를 드는 순간, 미간을 찌푸린 채 이쪽을 바라보는 황제와 시선이 맞닿았다.황제의 눈빛에는 계연수가 이곳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는 뜻밖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이 찾아온 것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는 듯한 경계심도 희미하게 스쳐 지나갔다.계연수는 속으로 마음을 다잡고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 다시금 공손히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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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2화

황제는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댄 채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영청후부는 이미 조정 깊숙이 뿌리내린 종양과도 같았으니, 도려내지 않고서는 안 될 독종이었다. 그동안은 태후를 생각해 수없이 눈감아 주었지만, 이제 더 방치한다면 오히려 뒤탈만 커질 터였다.황제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자 태후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실 태후 역시 영청후부가 도를 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 드러난 죄목 가운데에는 그녀조차 전혀 알지 못했던 것들이 적지 않았다. 황제는 본래 외척이 권세를 믿고 전횡하는 일을 몹시 혐오했다.누구보다 제 아들의 성정을 잘 아는 태후였기에 더욱 잘 알았다. 황제에게 혈육의 정이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영청후부를 살려 달라고 애원해 봐야 그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어려웠다.태후는 잠시 거친 숨을 고른 뒤, 방향을 틀어 다시 입을 열었다.“더구나 심서준은 오늘 애가의 친정을 몰수할 수 있는 자다. 그렇다면 훗날 너의 성지가 제 뜻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히 그 성지마저 찢어 버리려 들지 누가 알겠느냐?”그녀의 목소리가 적막한 전각 안에 서늘하게 내려앉았다.“지금 문신과 언관들은 하나같이 심서준의 뜻을 좇고 있고, 백성들까지 앞다투어 그의 이름을 칭송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다 훗날 그가 네가 황제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여긴다면, 그때는 너마저…”순간 황제의 낯빛이 싸늘하게 굳었다.태후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채 끝맺지 못한 말이 입술 사이에서 뚝 끊겼고, 전각 안에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침묵이 흘렀다.그녀는 굳이 나머지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제 아들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마음속에 의심의 씨앗이 한 번 떨어지고 나면, 그것은 반드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다.그는 제 외숙부의 집안마저 가차 없이 내칠 수 있는 사람이다. 친어머니인 자신조차 경계하는 황제가 어찌 심씨 가문만은 아무런 의심 없이 믿겠는가.심씨 가문이 그를 황위에 올리는 데 힘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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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3화

계연수는 집으로 돌아온 뒤, 밤이 깊어서야 오늘 태후의 처소에서 황제를 마주친 일을 심서준에게 들려주었다.곰곰이 돌이켜 보면 태후의 안색이 다소 창백하기는 했지만, 중병을 앓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더구나 태후는 황제와 동난각에 단둘이 앉아 있었다. 황후와 자신이 들어갔을 때 두 사람의 대화가 뚝 끊긴 것을 보면, 그전까지 남들에게 들려서는 안 될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이야기를 이어 가던 계연수는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심서준을 바라보았다.“태후께서는 분명 폐하 앞에서 온 힘을 다해 당신과 심씨 가문을 이간질하실 거예요. 만약 폐하께서 그 말을 정말 믿으시면 어떡하죠?”심서준은 걱정으로 어두워진 계연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러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그녀를 다독였다.조정에서 벌어지는 일로 계연수가 지나치게 마음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심서준이 보기에 이번 일은 그리 심각한 위기가 아니었다.어느덧 계절은 오월에 접어들어 밤공기에도 제법 온기가 배어 있었다. 회임 석 달째에 이른 계연수의 배도 이제는 옷자락 아래로 희미한 곡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심서준은 그녀의 아랫배를 부드럽게 쓸어 보다가 문득 물었다.“요즘 몸이 조금 무거워진 것 같지 않느냐?”계연수는 뜻밖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태후에 관한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심서준이 느닷없이 다른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제가 무거워져서 싫으세요?”심서준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그런 뜻은 아니다.”그는 계연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아이를 가졌으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거라.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마음껏 먹고, 무료할 때는 최씨 가문의 아가씨나 진가옥을 부르면 된다. 장모님께 와서 함께 있어 달라고 해도 좋고.”그제야 계연수는 심서준의 속뜻을 알아차렸다. 이런저런 일에 마음 쓰지 말고 편안하게 지내라는 말이었다.하지만 상황이 이토록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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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4화

계연수는 이미 그의 눈빛과 목소리에 깊이 빠져든 뒤였다.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예전에도 부군께서 잘생겼다고 생각했어요. 언제나 그렇게 생각했는걸요…”심서준의 엄지가 계연수의 부드러운 뺨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다정하기만 하던 그의 눈빛이 문득 깊어지더니, 낮은 목소리가 귓가로 스며들었다.“헌데 어째서 그때는 그토록 사옥현에게 시집가려고 한 것이냐?”예상치 못한 질문에 계연수는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심서준을 바라보았다.“그때는 제가 시집갈 수 있는 사람이 그분뿐이었으니까요.”심서준은 눈을 살며시 내리깔았다. 담담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계연수의 맑은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그보다 더 전에는? 장인어른께서 변고를 당하시기 전에도 네가 마음에 품고 있던 사람은 줄곧 사옥현이지 않았느냐.”말끝에 이르러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끊겼다.이미 지나간 일을 다시 들춰낼 생각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여전히 심서준의 마음속에 풀리지 않은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물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는 오래 묵은 질투가 사나운 물결처럼 밀려왔다.계연수는 거짓말에 능한 작은 사기꾼이었다. 입으로는 자신이 잘생겼다며 달콤하게 말하면서도, 정작 마음속에는 다른 사내를 품고 있었다.그러나 계연수는 그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아버지가 변고를 당하기 전까지 그녀는 사옥현의 얼굴조차 본 적이 없었다. 얼굴 한 번 마주친 적 없는 사람을 어떻게 마음속 깊이 그리워했겠는가.그녀가 알고 있던 것이라고는 아버지가 사씨 가문과 혼사를 정했다는 사실뿐이었다. 당시 사옥현에 관한 몇 가지 평판도 전해 들었다. 옥처럼 단정하고 온화한 공자라고 했기에 그 혼사를 굳이 거부하지 않았을 뿐이었다.게다가 아버지는 사옥현이 첩을 들이지 않겠다고 약조했다며, 세가의 공자 가운데 그런 사내는 드무니 그와 혼인하면 평탄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계연수는 아버지의 말을 믿고 혼사를 받아들였다.그렇다고 사옥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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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5화

계연수는 다시 한번 기억을 차근차근 더듬어 보았다.심서준은 근거도 없이 말을 지어낼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이토록 확신한다면, 분명 실제로 무언가를 들은 것이리라.그 순간 한 가지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계연수는 물에 빠진 뒤 심서준의 처소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었다.돌이켜 보면 바로 그날 밤을 기점으로 심서준의 태도가 눈에 띄게 냉랭해졌다. 그전까지는 무뚝뚝하더라도 그녀를 세심하게 챙겨 주었는데, 그 뒤부터는 마치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는 사람처럼 차갑게 굴었다.계연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부군께서 말씀하시는 게… 제가 물에 빠졌던 날 밤의 일입니까?”심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계연수를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그러나 그 눈빛에는 분명히 쓰여 있었다.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고.계연수는 정말이지 억울했다. 그날 물에 빠져 정신을 잃기는 했지만, 그런 상황에서 사옥현의 이름을 불렀을 리는 절대로 없었다.그녀는 조심스레 확인하듯 물었다.“부군께서는 그날 제가 사옥현이라고 부르는 걸 똑똑히 들으신 겁니까?”심서준이 계연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아니다.”“그럼 제가 사옥현을 불렀다고 어떻게 확신하신 겁니까?”심서준은 눈썹을 살짝 내리며 시선을 가라앉혔다. 표정에는 여전히 불편한 기색이 서려 있었지만, 그는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그날의 일을 들려주었다.“네가 물에 빠진 뒤 내가 너를 구해 냈다. 그날 한밤중에 네가 잠시 정신을 차린 듯 내 소매를 붙잡고 나를 바라보았지.”그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한데 네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옥현이었다.”심서준은 당시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는 듯 계연수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물론 성까지 붙여 부르지는 않았다. 내가 분명히 들은 것도 ‘옥’ 자뿐이었지. 헌데 네가 아는 사람 가운데 이름에 ‘옥’ 자가 들어가는 사내는 사옥현밖에 없지 않느냐.”너무도 진지한 그의 말과 한없이 엄숙한 표정을 마주한 순간,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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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6화

잠시 후, 쉰 듯 낮은 목소리가 계연수의 귓가에 다시 내려앉았다.“그날… 네가 부른 사람이 나였구나.”낮게 잠긴 목소리 끝에 희미한 떨림이 배어 있었다.계연수는 심서준에게서 이런 목소리를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등에 손을 얹어 가만가만 쓸어내리며 조심스레 물었다.“부군, 왜 그러세요?”심서준은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계연수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가 이내 천천히 풀렸다.한동안 말없이 그녀의 온기를 느끼던 그는 끝내 길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돌이켜 보면 모두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다.그때 자신이 먼저 고개를 숙였더라면, 그 알량한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내려놓았더라면, 단 한 번이라도 계연수를 더 만나 그녀의 마음을 물었더라면…두 사람이 이토록 먼 길을 돌고 돌아서야 서로의 곁에 닿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그날 밤, 심서준은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깨달았다. 그리고 그 마음은 깨달음과 동시에 산산이 부서졌다.하지만 그때 계연수가 부른 사람이 자신이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계연수와 사옥현의 혼약을 깨뜨렸을 것이다.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그녀를 제 곁에 붙잡았을 터였다.심서준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나직이 말했다.“아무것도 아니다.”그는 계연수의 어깨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의 동요를 감추려는 듯 다시 차분한 얼굴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모두 지나간 일이니, 이제 와서 굳이 꺼낼 필요도 없다.”계연수는 곧장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조금 전까지 집요하게 과거를 캐묻던 사람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자신이 오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제 와서 지나간 일이니 그만하자니, 너무도 제멋대로였다.심서준은 이야기를 끝내려는 듯 그녀를 품에 안고 잠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계연수는 그의 품 안에서 몸을 비틀어 빠져나온 뒤, 두 손으로 심서준의 뺨을 감쌌다.이번에는 절대로 피하게 둘 생각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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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7화

그 순간 계연수의 가슴 깊은 곳에서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잔물결처럼 번져 나갔다.수없이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마땅히 해야 할 말도 천 마디, 만 마디는 될 것 같았지만, 정작 입술을 열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심서준은 옆으로 돌아누워 계연수를 품에 안았다. 그녀가 넋을 잃은 듯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나직이 물었다.“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냐?”계연수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때부터 부군이 저를 좋아하셨을 거라고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계연수의 허리를 어루만지던 심서준의 손이 우뚝 멎었다.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탓할 수는 없었다.그 시절의 심서준은 분명 계연수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녀가 물에 빠지기 전부터 자신이 계연수를 특별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남몰래 그녀가 찾아오는 날을 기다리기도 했다.하지만 그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은 오만하고 서툴렀다.그는 높은 곳에 선 채 손에 미끼를 들고, 마음에 든 사냥감이 스스로 다가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사냥꾼과도 같았다.심서준은 누군가를 어떻게 좋아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사람들의 추켜세움과 찬사를 받는 데 익숙했다. 입으로는 자신의 우월함을 내세우지 않았지만, 뼛속 깊이 고고한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그래서 계연수에게 보일 듯 말 듯한 호의를 흘리면서도, 그 안에는 그녀를 살짝 골려 주려는 마음이 섞여 있었다. 자신이 던진 미끼에 계연수가 걸려들기를, 그녀 역시 자신을 연모하게 되기를 기대하며 기다렸다.하지만 계연수는 그런 기색에 몹시도 둔감했다.바로 전 순간까지만 해도 심서준의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다음 순간이면 과자 한 조각에 정신이 팔려 그를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다.그 때문에 심서준은 때때로 밤잠을 이루지 못한 채 뒤척였다.자신은 이 관계를 사냥꾼과 사냥감 사이의 아슬아슬한 유희라고 여겼다. 그러나 정작 덫에 단단히 사로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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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8화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는 순간, 계연수의 마음속에 자리한 자신의 모습도 달라질지 몰랐다.그녀가 생각하듯 언제나 모든 일을 손바닥 안에 쥐고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침착하고 든든한 사람도 아니었다.적어도 어린 시절의 심서준은 계연수 때문에 수없이 제 마음을 의심하고, 혼자 흔들리곤 했다.휘장 안에는 어둑한 빛이 고요히 내려앉아 있었다. 이야기를 마친 심서준은 계연수의 표정을 살피려 고개를 숙였지만, 어둠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그때 계연수가 그의 품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보드라운 숨결이 턱 끝을 스치더니 서서히 뺨 위로 번졌다. 이윽고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이 그의 입술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심서준의 목울대가 저도 모르게 크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는 계연수를 재촉하지도, 먼저 움직이지도 않은 채 가만히 그녀의 온기를 받아들였다.곧 계연수의 가늘고 고운 목소리가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왔다.“이런 이야기까지 솔직하게 들려주셔서 고마워요. 이렇게 좋은 분을 부군으로 맞았으니, 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그녀의 입술이 말을 할 때마다 심서준의 입술 위를 부드럽게 스쳤다.“그리고 이제 부군을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아요.”계연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진심을 담아 덧붙였다.“사실 저도 그때 부군과 가까워지고 싶었어요. 다만 부군이 너무 무서워서 그러지 못했을 뿐이에요.”그녀의 목소리에 엷은 웃음이 배었다.“헌데 이제야 알겠어요. 제 부군은 하나도 무서운 사람이 아니네요.”심서준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계연수의 마음 한편에는 작고 아련한 아쉬움도 남았다.어린 시절 처음 심서준을 보았을 때, 그녀는 세상에 이토록 빼어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넋을 잃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부터 이미 심서준을 좋아했던 것인지도 몰랐다.만약 자신이 그를 그토록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조금만 더 용기를 내어 먼저 다가갔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두 사람은 훨씬 일찍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연을 맺었을지도 몰랐다.그랬다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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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9화

계연수는 심서준의 목소리에 어린 그 한 자락의 서운함에 유난히 약했다.그가 조금만 억울한 기색을 내비치면, 계연수는 번번이 마음이 약해져 순순히 그의 뜻을 받아 주고 말았다.따스한 휘장 안에서 다정한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희미한 햇살이 창호를 비집고 들어올 무렵, 계연수는 나른한 몸으로 심서준의 품에 포근히 웅크려 있었다.심서준의 품은 넓고 따뜻했다. 맞닿은 체온 탓에 몸이 조금 더워졌는데도, 계연수는 그 품을 떠나기가 아쉬워 가만히 그의 가슴에 뺨을 묻었다.자리에서 일어난 심서준은 그녀에게 조금 더 자라고 말한 뒤 침상 곁에 서서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계연수는 미련이 남은 듯 그의 팔을 꼭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떨어질 줄 모르고 다정히 붙어 있다가, 시간이 제법 흐른 뒤에야 아쉬움을 달래며 헤어졌다.그러나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못했다.오전이 되자 심씨 노부인의 처소에서 사람이 황급히 찾아와 계연수를 불렀다.황후가 궁에서 급히 서신을 보내온 것이었다. 오늘 아침 조회에서 태후가 측근인 태감을 시켜 만조백관이 지켜보는 앞에서 심서준을 탄핵했다는 내용이었다.그에게 씌워진 죄목은 다름 아닌 붕당을 만들어 사익을 꾀했다는 것이었다.심 수보는 소식을 듣자마자 입궁하여 황제를 알현하려 했으나, 황제는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 우선 집으로 돌아가 기다리라는 말만 전해 왔다.예로부터 제왕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 바로 신하들이 무리를 지어 사사로운 세력을 키우는 일이었다.계연수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아 있던 나른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불길한 예감이 차가운 손처럼 심장을 움켜쥐었다.“그럼 부군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는 겁니까?”심씨 노부인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아직 모른다.”계연수는 답답해진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애써 호흡을 고르려 해도 안에서부터 밀려오는 불안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그 시각, 심서준은 황제의 부름을 받고 궁에 들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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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0화

황제는 언제나 꼿꼿하던 심서준의 등이 제 앞에서 굽혀진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가벼운 탄식이 정적 속으로 흩어졌다.“오호라, 네게 무슨 죄가 있다는 것이냐?”심서준의 침착하고 당당한 목소리가 전각 안에 울렸다.“신에게는 사람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죄가 있습니다.”그는 이마를 바닥에 댄 채 흔들림 없이 말을 이었다.“신의 조카며느리인 손보경이 마음속에 원망을 품고 있었으나, 신은 그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사전에 경계하지 못해 그녀가 신에게 누명을 씌우게 하였으니, 이는 신의 불찰입니다.”황제는 눈을 내리깔고 엎드린 심서준을 바라보았다.“누명을 씌웠다?”낮고 무거운 목소리에서 서늘한 기운이 배어 나왔다.“그렇다면 오늘 조회에서 태후가 사람을 시켜 너를 탄핵한 내용이 모두 거짓이라는 말이냐?”심서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 점 거리낄 것 없이 맑고 곧은 눈으로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폐하께서 신에게 손보경을 한 번 만나게 해 주십시오. 신이 몇 가지만 물으면, 폐하께서도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곧 분별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심서준의 눈을 꿰뚫어 보려는 듯 깊고 무거운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심서준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또한 밀보에는 여섯 명의 대신이 신과 모의하여 영청후부를 모함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입증할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까? 서로 모의했다는 사실을 보여 줄 서신이나 문서가 남아 있습니까?”그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증거가 있다면 신은 기꺼이 조사를 받겠습니다.”심서준은 그런 증거가 존재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애초에 모의 자체가 없었던 일이었다.태후는 죄목을 날조하고 거짓 증인을 꾸며 낼 수는 있어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증거까지 허공에서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영청후부 사건은 심서준이 꼬박 열 달 동안 직접 파헤친 사건이었다. 모든 증거에는 출처가 있었고, 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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