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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가짜 결혼, 진짜 신분: Chapter 461 - Chapter 470

472 Chapters

제461화

강지현이 주씨 가문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문수정에게 오히려 기묘한 평온이 찾아왔다.집안에 닥친 이 날벼락 같은 재앙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던 것이다.백하린이 눈앞의 화근이라면, 강지현은 그들의 명운을 뒤흔들 업보였다.권미숙은 이제 지는 태양에 불과했다. 노파에게는 더 이상 이씨 가문을 지탱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지금 이규진은 가족을 필요로 했기에, 문수정은 이도운마저 무너지게 둘 수는 없었다.이도운은 문수정의 말을 듣고도 묵묵부답했다. 그저 조용히 권미숙을 향해 다시 무릎을 꿇었다.그리고 바닥에 머리를 세 번 조아렸다.이후 문수정이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입을 닫은 채 미동조차 안 했다.새벽녘, 결국 노부인의 심장이 멎었다.이씨 가문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임종을 지켰다.의사의 사망 선고가 내려지기 무섭게, 절차에 따라 고인을 염습하고 수의를 입히는 장례 준비가 진행되었다.모든 뒷수습을 마치고 나니 이미 밖은 아침이었다.권미숙이 생전에 유언을 남겼는데, 자신의 장례는 모든 절차를 간소화하여 크게 벌이지 말고 영감과 합장해 달라는 내용이었다.화장을 마친 유해는 이도운의 손에 들려 곧장 집안에 마련된 빈소로 모셔졌고, 곧바로 밤샘 조문이 시작되었다.피로가 극에 달한 문수정은 이민지, 진태웅과 함께 잠시 머무르다가 잠을 청하러 들어갔다.이민지와 진태웅 역시 금방 자리를 떠났다. 이규진 쪽에도 여전히 보살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다만, 노부인의 부고는 아직 이규진에게 차마 전하지 못한 상태였다.집을 나서는 길, 진태웅이 할 말이 남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그리고 길에 올라서자마자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강지현이 주씨 가문 핏줄이라니, 이제 너희 집은 폭삭 망한 거야. 우리 지금 큰일났어. 내가 보기에 강지현이 다음으로 복수할 대상은 이도운이야. 차라리 이번 기회에 네 오빠랑 인연 끊어!”“진태웅, 너 진짜 인간도 아니다. 할머니가 방금 돌아가셨는데 꼭 지금 이 타이밍에 그딴 소릴 해야겠어?”이민지는 필사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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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2화

“그럼 우리 어쩌지? 아니면 강지현한테 메시지 보내서 사과라도 할까?”이민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떨렸다.사실 조금 전 병실 밖에 있을 때, 이미 장문의 사과문을 작성해 두긴 했었다.하지만 도저히 전송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물론, 지금 와서 보내봤자 진작에 차단당했을 게 뻔했다.강지현이 이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그때 조금이라도 우정을 소중히 여겼을 텐데.이민지는 강지현이 이씨 가문에 처음 들어왔을 때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참 단순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사실 그녀를 딱히 미워했던 건 아니었다.그저 배경도 별 볼 일 없는 여자가 매사에 잘나가니, 그게 꼴 보기 싫고 질투가 났을 뿐이다.그래도 강지현이 제 비위를 맞춰주며 다가오자 달갑게 받아들였다.입맛이 유독 까다로운 터라 임신 기간 입덧 때문에 통 먹지를 못했다.이를 본 강지현이 정성껏 이색 요리를 연구해다 바쳤다.강지현이 만든 음식은 식욕을 돋우는 데다 맛도 아주 훌륭해서 집안의 전문 셰프보다 나을 정도였다.덕분에 이민지는 임신 기간 내내 한결 편하게 보낼 수 있었다.하지만 강지현이 잘나면 잘날수록,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게도 자꾸만 깎아내리고 싶었다.그러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강지현에게 점점 더 모질게 굴었다.조금이라도 반항하려 하면, 도리어 전부 그녀의 잘못으로 몰아세웠다.“이제 와서 후회하면 뭐 어쩌자고. 반성이고 나발이고 이미 늦었어!”진태웅이 그녀를 째려보며 핀잔을 주었다.“사과는 무슨 얼어 죽을 사과야? 괜히 가서 긁어 부스럼 만들 일 있어?”이민지는 고개를 숙인 채 자책감에 입을 다물었다.아내가 정말 겁에 질린 것을 보고 진태웅은 더는 몰아세우지 않았다.잠시 후, 짜증스럽게 담배에 불을 붙였다.이씨 가문은 이미 끝장난 거나 다름없는데, 강지현이 더 한 짓인들 못 하겠는가?그보다 당장 제 밥줄이 끊기게 생겼으니 골치가 아팠다.지금에 와서 이씨 가문과 선을 긋는다고 해도 이미 때를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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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3화

“민지야,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니? 그게 정말이야?”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이씨 가문의 노인네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에 백하린은 크게 충격받은 척했지만, 사실임을 확인한 순간 입꼬리가 주체할 수 없이 위로 치솟았다.심지어 조소가 터져 나올 뻔한 걸 꾹 참았다.‘늙어 빠진 노인네, 그렇게 나랑 이도운이 이혼하기를 바라더니 제대로 천벌을 받았구나!’백하린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이민지에게 자세한 내막을 캐물었다.이민지는 진태웅이 당부한 대로 그저 할머니가 갑작스러운 심부전증으로 돌아가셨다고만 전했을 뿐, 강지현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백하린이 집안 상황에 대해 이것저것 떠보자, 이민지는 평소와 달리 놀라울 정도로 유순하게 하나하나 답변해 주었다.전화를 끊고 나서야 어딘가 묘한 위화감이 느껴져다.평소의 이민지라면 제 얼굴만 봐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나서 온갖 난리를 피웠을 텐데, 오늘따라 왜 저렇게 태도가 고분고분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심지어 이도운을 생각해서라도 오빠 보러 한번 와주면 안 되겠냐며 간곡히 부탁까지 했다.오빠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새언니의 온기라나 뭐라나.‘설마 집안의 기둥이 꺾이니까 그제야 현실을 깨닫고 주제 파악을 한 건가?’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민지가 전해준 이 소식은 아주 시의적절했다.마침 이도운과 이혼 숙려 기간을 보내며 관계를 뒤집을 결정적인 돌파구가 절실하던 참이었으니 말이다.눈엣가시 같던 노인네가 사라졌으니,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백하린은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당장 항공편을 예약하고, 아파트에서 이윤후를 데리고 나와 친정집에 맡겼다.요즘 워낙 일이 바빠 출장이 잦았던 터라, 부모님도 그러려니 하며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다만 이윤후는 엄마와 떨어지기 싫은지, 같이 가겠다며 목을 놓아 울어댔다.핏줄끼리 통하는 감각이라도 있나, 난데없이 아빠를 보고 싶다며 칭얼거리기까지 했다.백하린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조만간 아빠가 집으로 올 거라며 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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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4화

물론 강지현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백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 아직 장례 절차가 다 끝나지 않아서, 직접 가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요.”“당연히 그래야죠.”서운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꺼내 결재를 진행했다.“휴가 승인해 줄 테니, 가서 일 처리 잘해요.”“감사합니다, 부회장님!”생각보다 시원하게 허락해주는 서운혁 때문에 백하린은 어안이 벙벙했다.“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고 복귀할게요.”“어차피 회사에서도 하린 씨를 조만간 해원시로 보낼 예정이었어요. 미리 내려가서 프로젝트 답사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서운혁이 담담하게 말했다.어차피 백하린이 서경시에 머무는 기간은 짧을 것이고, 결국 해원시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이었다. 그건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하지만...“백하린 씨.”“네?”서운혁은 한참 동안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나쁜 감정 오래 붙들고 있어 봐야 본인 손해예요. 인생 망가지는 거 한순간입니다. 이혼하겠다고 결심했으면, 이제 와서 흔들리지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요.”백하린은 말문이 막혔다.서이정이 서운혁에게 심어준 프레임은 완벽했다.이도운이 바람을 피워 백하린에게 상처를 주었기에 이혼 소송 중이라는 것이었다.하지만 그녀가 이혼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그는 백하린이 집에 돌아갔다가 전남편에게 붙잡히거나 휘둘리지 않을까 내심 불안했다.“걱정 마세요.”일일이 설명하기 복잡했던 백하린은 그저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남자들 마음은 다 똑같잖아요. 여자만큼 정이 깊지도 않고. 저도 감정에 휘둘리는 일 없이 최대한 냉정해지려고요.”덤덤한 말투에는 씁쓸함이 묻어났다.마침 서운혁은 술기운이 올라와 몸이 후끈거리는 상태였고, 심장마저 뜨겁게 달아올랐다.옆을 돌아보니 백하린의 청초한 얼굴에 지워지지 않는 슬픔이 서려 있었다.순간 어디서 난 용기인지, 그녀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사실 세상 모든 남자가 다 똑같은 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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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5화

권미숙의 사망 소식이었다.낯선 번호로 날아온 문자였지만, 말투만 보아도 강지현은 발신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할머니는 평소 심장이 좋지 않아 절대 감정을 격하게 표현해서는 안 되었고, 오직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당부가 진작부터 있었다.어제 자신을 마주치고 격분했던 것이 결국 화근이 된 게 분명했다.강지현이 자책감에 빠져 멍하니 있을 때, 김태하도 잠에서 깨어났다.휴대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자연스럽게 품으로 끌어당기며 슬그머니 다가왔다.“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어?”강지현의 미간에 아주 살짝 잡힌 주름을 포착한 김태하가 몸을 들이밀며 그녀의 휴대폰을 가져가려 손을 뻗었다.“이도운 할머니가 돌아가셨대.”강지현의 목소리가 김태하의 귓가에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담담하다 못해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어조였지만, 김태하는 평온함 이면에 숨겨진 아주 미세한 감정의 파동을 귀신같이 알아챘다.그리고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강지현을 더 으스러지도록 안아줄 뿐이었다.자신의 온기로 서늘하게 식어버린 그녀의 살결을 녹였다.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강지현이 겉으로는 강하고 결단력 있어 보여도 속내는 한없이 여린 사람이라는 것을.뼛속까지 정이 많아, 설령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던 상대일지언정 한 생명의 죽음에 간접적으로나마 얽혔다는 사실만 해도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을 터였다.강지현이 이럴 때마다 그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이씨 가문 사람들의 생사 따위는 눈곱만큼도 중요하지 않았다.그저 강지현이 속상해하는 게 싫을 뿐이었다.“지현아,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네 잘못이 아니야.”김태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내 강지현의 휴대폰을 가져가 내려놓더니, 손을 들어 귀 뒤편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그리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녀의 이마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난 정말로...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사실 강지현은 어제부터 내심 걱정이 되긴 했었다.하지만 설마 권미숙이 자신 때문에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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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6화

“어제 먼저 시비를 걸어온 건 그 노인네야. 망언을 퍼부으며 너 공격하고 나까지 모욕했잖아. 우린 그냥 정당방위 한 거야. 비위 좀 안 맞춰줬다고 뒷감당까지 하라고? 세상에 그런 말도 안 되는 법은 없어. 약하게 군다고 해서 무조건 다 용서되고 옳은 건 아니니까.”강지현이 고개를 들어 김태하를 바라보았다.어느새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뺨에는 미미한 홍조까지 감돌았다.김태하는 자신이 말실수라도 한 줄 알고 잘생긴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내가 틀린 말을 한 건가?”“아니, 맞아. 너무 정답이라서... 꽉 막혀 있던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아.”호수 같은 눈동자에 잔잔한 물결이 일렁거렸다.입꼬리를 올리며 활짝 웃는 달콤한 미소에 김태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그녀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귓불이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어 갔다.김태하는 강지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한층 가라앉은 눈빛으로 진지하게 말했다.“지금 이 순간부터 네가 뭘 하든 다 맞아. 틀린 거 없어, 무조건 정답이야. 그 어떤 인간, 그 어떤 일 때문에 조금이라도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 원인 제공자가 나라고 해도 절대 용납 못 해.”낮게 읊조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잔잔했으나, 한 마디 한 마디가 심금을 울렸다.강지현은 그가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꼭꼭 숨겨둔 채 오롯이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그저 작은 위로를 바랐을 뿐인데, 도리어 김태하가 당장이라도 울 기세였다.강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마치 새끼 고양이가 머리를 들이밀듯,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입술 위로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그리고 아랫입술을 가볍게 머금고 살짝 잡아당겼다.마침 한 줄기 햇살이 베개 위로 내려앉으며, 두 사람의 입술 사이로 길게 늘어난 투명한 타액을 눈부시게 비추었다.김태하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서툴면서도 유혹적인 여자의 몸짓을 바라보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체를 움직였다.이내 강지현의 손을 잡아 단단한 복근 위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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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7화

“마음에 들면 커플룩으로 한 세트 더 맞추라고 할게.”김태하는 고개를 숙여 거울을 바라보았다.화장기 없는 강지현의 얼굴은 맑고 하얗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전형적인 고전 미인이라, 청초한 생얼과 달리 메이크업하면 감탄이 나올 만큼 매혹적이었다.지금 비록 편안한 잠옷 차림으로 남자의 흠 잡을 데 없이 잘생긴 이목구비에 밀려 있을지언정, 기죽기는커녕 오히려 묘하게 잘 어울렸다.심지어 김태하 특유의 귀하고 위엄 있는 분위기마저 완전히 압도할 정도였다.마치 안하무인 대기업 외동딸 옆에 선 연하남 같달까.그 생각이 떠오른 강지현이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그녀가 웃자 김태하의 마음도 사르르 녹아내렸다.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별로야?”“좋아, 그럼 만들어 달라고 해. 너랑 커플룩 입을래.”강지현은 손을 뻗어 평소에는 잘 웃지도 않는 남자의 얼굴을 두어 번 주물렀다.살이 없고 피부가 얇았지만 손에 닿는 감촉은 꽤 좋았다.게다가 입을 맞출 때마다 매번 아주 부드럽게 감기곤 했다.김태하는 다정한 눈빛으로 강지현을 바라보며, 그녀가 제 얼굴을 마음대로 만지도록 내버려 두었다.“배고프지? 씻고 나가서 밥 먹자.”김태하는 강지현을 품에 잠시 안아주고 나서야 등을 떠밀었다.강지현도 눈치채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짐을 챙기던 게, 아무래도 멀리 외출할 모양이었다.“어디 가려고? 멀리 가면 안 돼. 오늘 의사 선생님이 검사하러 오시기로 했단 말이야.”강지현은 김태하의 진료 시간만큼은 아주 정확하게 기억했다.요 며칠 약도 제때 챙겨 먹었고, 오래 서 있지 못하는 것만 빼면 겉보기에는 거의 다 회복된 듯했다.외상은 딱지가 떨어져 선홍색 흉터만 남았을 뿐이다.내상 역시 특별히 불편한 점은 없었는데, 의사도 전에 다시 고열에 시달리지만 않으면 정상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했었다.“서경시로 가려고.”김태하가 덤덤하게 입을 열자, 강지현은 순간 멍해졌다.“갑자기 거긴 왜?”“프로젝트가 하나 있어서, 가는 김에 겸사겸사 확인해 보려고.”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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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8화

김태하의 직언에 강지현은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대체 누가 사다 놓은 건지 알 수가 없는 속옷들이었다.하여튼 그가 드레스룸을 정리하게 한 뒤로, 속옷 서랍에 은근슬쩍 자리를 잡고 있었다.문제는 디자인의 수위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는 점이었다.혹시 지순옥이나 은주희가 장만해 준 게 아닐까 의심도 했다.하지만 평소 두 사람의 올곧고 진중한 성품을 떠올려 보면, 이런 낯 뜨거운 이벤트를 더해 줄 위인들로는 보이지 않았다.그렇다면 설마, 김태하가 진짜 이런 취향이었던 걸까?어쩐지 매번 샤워할 때마다 속옷을 가져다 달라고 하면 귀신같이 골라 오더라니.물론 다른 걸로 다시 갈아입고 나오곤 했었다.집에서도 부끄러워서 도저히 입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하지만 간절함이 뚝뚝 떨어지는 김태하의 눈빛을 보자, 강지현은 또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결국 두 사람은 타협 끝에 딱 한 세트만 챙기기로 합의했다.강지현은 고개를 돌린 채 붉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김태하, 너 진짜... 변태 같아.”“그래?”김태하는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듯 무덤덤했다.마침내 캐리어 안에 안착한 속옷을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남자는 다 그래.”강지현은 할 말을 잃었다.이거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기분인데?결혼 전과 후가 완전히 다르다더니, 정말 틀린 말 하나 없었다....김태하가 이틀 전에 찍은 검사 결과가 드디어 나왔다.엑스레이상으로는 내장의 어혈은 거의 다 빠진 상태였다. 근육과 골격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다만 위쪽에 흐릿하게 잡힌 음영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의사가 일찍이 김태하와 따로 대면해 이야기를 나눴던 부분이었다.얼핏 어혈처럼 보이기는 하나, 확실히 안심하기 위해서 정밀 검사를 한번 받아보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였다.사실을 알게 된 김태하는 강지현에게 비밀로 했고, 의사의 입단속도 단단히 시켰다.덕분에 진단서에는 그저 몸이 아주 잘 회복되어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만 적혀 있었다.그런데도 강지현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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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9화

워낙 낯가림이 심하고 숫기 없는 성격 탓이었다.두 시간의 비행 끝에 서경시에 착륙했을 때, 태양은 아직 저물지도 않았다.기내에서 김태하의 품에 안겨 달콤한 낮잠을 청한 강지현은 내릴 땐 몸도 마음도 한결 개운해진 기분이었다.그와 팔짱을 끼고 공항 대합실을 걸어 나오다, 문득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나 왜 신혼여행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지?”“너랑 있으면 매일 신혼인데, 뭘.”김태하가 손을 고쳐 잡으며 빈틈없이 깍지를 꼈다.두 사람은 VIP 전용 통로를 이용해 이동했고, 최동윤과 또 다른 수행 비서가 뒤에서 캐리어를 든 채 따르고 있었다.마침 저녁 식사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기내에서 배를 든든히 채운 뒤였다.차에 올라타고 나서야 강지현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번 여정이 사실은 김태하가 약혼식장을 예약하기 위해 특별히 마련했다는 것을.해원시가 경제의 중심지라면, 수도는 이곳 서경시였다.가장 화려하고 성대한 결혼식을 약속했던 김태하는 국내의 상징인 ‘상원궁’에서 한 번, 해원시에서 또 한 번 예식을 올릴 생각이었다.서경시의 상원궁은 수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현재는 박물관 겸 유적지로 쓰이는 곳이다.국가적인 대형 행사가 아니고서야 대관 자체가 불가능한 성역에 가까웠다.김태하가 이 정도로 무모할 줄이야, 감히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릴 생각은 어떻게 한 거지?“네가 여기 풍경을 좋아한다고 했잖아.”“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강지현도 비로소 떠올렸다.언젠가 두 사람이 함께 휴대폰으로 영상을 시청하던 중, 우연히 상원궁의 사계절을 담은 영상을 보게 된 적이 있었다.초봄의 아스라한 정취부터 하얀 눈으로 뒤덮인 겨울까지, 하나같이 꿈결처럼 몽환적인 절경이었다.옛사람들의 숨결이 깃든 풍경은 고즈넉한 운치와 낭만으로 가득했다.사랑하는 이와 이곳에서 사계를 함께하며,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고 밝은 달을 나란히 감상했을 모습을 상상하자 강지현은 가슴이 벅차올랐다.“옛사람은 지금의 달을 보지 못했으나, 지금의 달은 일찍이 옛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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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0화

강지현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저 눈물이 가득 고인 채로 김태하를 바라볼 뿐이었다.나름대로 온갖 풍파는 다 겪으며 자란 몸이었다.남에게 무시당할 때도, 반대로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을 때도 있었다.하지만 김태하 같은 부류는 난생처음이었다.그는 자신이 한 모든 약속을 사명처럼 여기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면서까지 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세상에 정말 이런 사람이 있을까.넘어진 아이는 달래줄 사람이 없으면 울지 않는다. 누군가 다가와 괜찮냐고 보듬어줄 때, 비로소 눈물이 터지는 법이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부모를 여의고 자라 사랑받는 느낌을 잘 몰랐다.이도운에게 속아 원망하고 괴로워했을지언정 억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그런데 김태하가 과분할 정도로 잘해주니까, 오히려 마음 깊이 묻어두었던 온갖 서러움과 응어리가 한꺼번에 밀려왔다.결국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왜 울어... 내가 미리 말 안 해서 속상해?”강지현은 고개를 저었지만, 목이 메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감정을 추스르려 애쓰던 찰나, 안절부절못하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넓은 품으로 뛰어들었다.“나한테 너무 잘해주니까, 꼭 꿈꾸는 것 같아. 너를 만난 뒤로 모든 게 다 현실인지 아닌지 헷갈려.”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코맹맹이 소리도 꽤 심했다.김태하는 비로소 한시름 놓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그럼 날 때려봐. 내가 아파하면 꿈이 아니라는 증거잖아.”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제 몸으로 가져가려 했다.깜짝 놀란 강지현이 얼른 제지했다.그리고 속상하면서도 애틋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무슨 헛소리야. 때려도 날 때려야지.”“그건 절대 안 돼.”김태하가 다급하게 그녀의 두 손을 꼭 붙잡아 감싸 안았다.“이게 웬 난리래. 분명 기쁜 일인데, 울고불고 투정 부리다가 이젠 사람까지 패려고 하네?”남자가 능청스레 놀려대자, 강지현은 언제 울었냐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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