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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가짜 결혼, 진짜 신분: Chapter 441 - Chapter 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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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1화

두 사람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낡고 허름한 응급실 복도, 현시우는 군데군데 멍이 든 얼굴로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남동생을 발견하자마자 현다영은 주단우를 제쳐두고 곧장 달려갔다.한바탕 캐물은 끝에 그저 경상과 타박상만 입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주단우가 뒤를 따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편에서 세 사람이 다가왔다.한 명은 교사, 나머지 두 명은 학부모였다.현시우와 싸운 상대는 그보다 한 살 많은 재수생이었다.시작은 사소한 말다툼이었으나, 어느 순간 눈이 돌아간 현시우가 주변에 있던 물건을 집어 들고 뒤에서 선배의 머리를 내리쳤다고 했다.천만다행으로 생명에 지장은 없었지만, 봉합 수술을 끝내고 지금은 수액을 맞으며 안정을 취하는 중이었다.피해자 학부모는 현시우의 보호자가 와서 배상 문제를 담판 짓기만을 벼르고 있었다.“사과해.”현다영은 현시우의 머리를 누르며 먼저 사과하게 했다.하지만 현시우는 입을 꾹 다문 채, 미동도 없이 완강하게 버텼다.누구보다 제 남동생을 잘 아는 그녀였다.평소 성격이 온순하고 착해 남과 두루 잘 지내는 편이라, 절대로 먼저 싸움을 걸었을 리 없었다.그러나 내막이 어찌 되었든 상대는 피를 흘리며 실려 왔고, 현시우가 먼저 기습해 일을 키운 탓에 죄질이 몹시 나빴다.병원에 오기 전, 교사가 전화로 현다영에게 경고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피해자 측의 합의와 용서를 구하지 못해 중징계라도 받게 된다면, 당장 내년 수능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했다.결국 현시우는 억지로 고개를 숙이며, 차갑게 식어버린 목소리로 한마디를 내뱉었다.“죄송합니다.”사실 현다영이 오기 전, 그는 이미 선생님의 설득에 마지못해 사과를 건넸었다.하지만 피해자 학부모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가정교육을 못 받았다며 비난을 쏟아낸 것도 모자라 가족들까지 줄곧 모욕했다.현시우의 주먹에는 진즉부터 단단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이렇게 불만 가득한 얼굴로 하는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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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2화

“5,000만 원이요?”현다영의 안색이 돌변했다.당장 수중에 그만한 큰돈이 없을뿐더러, 설령 있다고 한들 이건 명백한 갈취이자 협박이었다.“나 유준서 일부러 때린 거 아니에요. 걔가 어린애 패는 거 말리려고 그랬어요! 처음부터 손 댈 생각은 없었어요.”상대방이 거액을 요구하자, 결국 현시우도 소리를 버럭 질렀다.가뜩이나 억울했던 참이지 않은가.유준서는 집안의 돈과 권력을 믿고 사방에 온갖 행패를 부리고 다니는 인간이다.부모가 지역 자산가에다 학교 재단 후원회원들과 친하다는 핑계로 제 세상인 양 굴었다.평소 눈에 띄는 애들을 무차별로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 가장 악질인 건 아직 학교도 안 들어간 유치원생을 갈취하는 더러운 취미가 있다는 점이었다.현시우는 전부터 유준서 주변에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맴돌며 정기적으로 ‘상납’하는 모습을 눈여겨봐 왔다.그 조그만 어린애들이 어디서 돈과 과자를 구해오는지 몰라도, 매일같이 그에게 갖다 바쳐야 했다.그러다 조금이라도 제 마음에 안 들면, 유준서는 여지없이 학교 밖에서 아이들을 쥐잡듯 잡으며 윽박지르곤 했다.몇 번이나 그 모습을 목격하면서도 현시우는 매번 참아왔었다.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유준서는 그저 자신을 빤히 쳐다봤다는 이유로 그를 밀치며 몇 차례 손찌검해댔다.그것도 모자라 급기야 가족들까지 입에 담지 못 할 말로 비하하고 모욕했다.이미 꼭지가 돈 상태에서, 현시우의 눈에 유준서가 한 어린 여자아이를 다그치는 모습이 들어왔다.사정없이 손바닥을 갈기는 바람에 여자아이의 입가가 찢어지며 선혈이 흘러내렸다.그 순간 현시우는 피가 거꾸로 솟고 눈앞이 핑 도는 것 같았다.정신을 차려보니 발밑에 굴러다니던 벽돌 조각이 손에 쥐어져 있었고,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어 뒤에서 유준서의 머리통을 내려쳤던 것이다.일이 터지고 나서야 현시우는 자신이 충동적이었다는 사실을 후회했다.하나뿐인 누나까지 말려들게 한 것이 못내 미안했다.얌전히 학교나 잘 다니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수능 전까지 꾹 참고 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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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3화

여자는 이내 현다영의 반반하고 곱상한 얼굴을 아래위로 훑었다. 저런 번듯한 사내를 데리고 다니는데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5,000만 원이...”“얼마 안 하네. 당신 아들 목숨값으론 충분하겠어.”현다영이 반박하려던 찰나, 주단우가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이더니 여자의 얼굴을 향해 뿜어냈다.“콜록! 콜록...”유준서 어머니가 연신 기침하며 눈을 부릅뜨자, 곁에 있던 남편이 즉각 고함을 질렀다.“어디서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려!”주단우가 피식 웃었다.“내 입은 꽤 깨끗한 편인데? 하루에 양치질을 몇 번이나 하거든. 오히려 그쪽들한테서 나는 구린내가 여기까지 진동해서 숨을 못 쉬겠네. 그나저나, 두 분은 왜 이렇게 궁상맞으실까? 흔치 않은 기회로 한탕 뜯어낼 생각이었으면 좀 더 크게 부르지, 고작 5,000만 원이 뭐야? 우리 집 개가 고기 한 점 얻어먹는 값보다 싸네.”현다영은 흠칫 놀랐다.주단우가 제 편을 들며 독설을 쏟아내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사태를 해결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개입이었지만, 듣는 순간 속이 다 시원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아니나 다를까, 부부는 머리끝까지 피가 솟구쳐 콧김만 씩씩 뿜어댔다.어떻게 맞받아쳐야 할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한참이 지나서야 간신히 욕설 몇 마디를 쥐어짜 냈다.“너 이 새끼, 지금 시비 걸러 왔냐? 내가 저놈 당장 유치장에 처넣고 학교도 못 다니게 만들어 줄...”“와, 무서워라.”악에 받친 폭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단우가 손뼉을 쳤다. 대놓고 비꼬는 기색으로 겁먹은 척 시늉했다.그가 의도적으로 상대를 도발하고 있음을 알아챈 현다영은 주단우를 차갑게 노려보았다.“부대표님, 시우 내년에 수능 봐야 해요. 저한테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해요.”주단우가 제대로 돕는 거라면 받아들일 수 있었다.하지만 불난 집에 부채질해대는 거라면, 저 오만한 안면을 당장이라도 갈겨버릴 기세였다.“시우야, 이리 와 봐.”주단우가 현시우를 향해 손짓했다.현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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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4화

현다영은 주단우를 바라보았다.남자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치료비가 얼마라고 했죠?”“80만 원이요...”교사가 얼떨결에 대답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단우는 지갑에서 현금 뭉치를 꺼내더니, 맞은편 부부의 발밑을 향해 던져버렸다.사방으로 흩날리는 지폐를 보며 부부는 펄쩍 뛰었다. 이건 명백한 모욕이었다.“500만 원도 과해 보이는데 싫으면 말고. 더는 국물도 없어. 추후에 당신 아들놈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나 찾아와. 내 이름은 주단우니까.”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주단우는 명함까지 바닥에 툭 던졌다.유준서 어머니는 이제 참을성의 한계에 다다랐다.“너 지금 우리가 누군지 알고 겁도 없이 설쳐? 감히 그따위로 지껄여놓고 금성시 바닥에서 살아남을 것 같아? 내가 장담하는데 현시우 놈은 오늘부로 대학은커녕 인생 종 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어디 두고 봐!”서슬 퍼런 협박에 현시우는 덜컥 겁이 나 슬그머니 현다영의 눈치를 살폈다.정작 현다영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주단우가 어디 보통내기인가.감히 면전에서 기고만장하게 떠들어댔으니, 설령 제 남매를 도울 목적이 아니었다고 한들 절대로 저 인간들을 곱게 살려두지 않을 터였다.이제 자신은 주단우가 펼치는 잔혹한 연극을 구경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그래? 강동시에서 아주 대단한 거물인가 보네.”“당연하지! 강동시를 주름잡는 분이 바로 내 친구이자...”남편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또다시 주단우의 콧방귀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그는 현시우를 바라보며 물었다.“너 성적은 어떠냐?”순간, 현시우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꽤 좋은 편이에요.”말을 마치고는 각 과목 성적을 줄줄이 읊었다.과연 허세는 아니었고, 과목마다 성적이 전부 최상위권으로 대단히 우수했다.“이렇게 성적이 좋고 우수한 학생이라면 마땅히 해원시에서 가장 좋은 명문고에 다녀야지. 강동시 같은 시골구석에서는 아무리 잘나가는 학교라 한들, 결국엔 네 급에 안 맞아.”주단우가 말을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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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5화

주단우는 녀석의 진지한 얼굴을 보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머리를 대충 헝클어뜨렸다.누군가에게 ‘형’이라 불리는 것, 그리고 이토록 절실한 존재가 된다는 게 생각보다 꽤 기분 좋은 일임을 문득 깨달았다.매사 남을 속이고 뒤통수칠 궁리할 때보다 훨씬 마음이 편했다.“저희 누나요!”현시우가 냉큼 현다영을 가리켰다.“저, 주 대표님... 아까 저희가 너무 경황이 없고 마음이 급해서 말이 좀 험하게 나갔습니다. 사실 저희도 돈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라, 자식 걱정되는 마음에 그만...”“맞습니다. 안심하세요. 현시우가 대표님 지인인데 저희가 감히 뭐라 하겠습니까...”그제야 정신을 차린 부부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며 주단우가 깔아놓은 판에 어떻게든 묻어가려 발버둥을 쳤다.하지만 주단우는 그들을 싸늘하게 흘겨볼 뿐이었다.이내 교사 앞으로 걸어가더니 허리를 숙여 귓속말로 나지막하게 한마디를 건넸다.여자는 순간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가자.”볼일을 끝낸 주단우가 현다영에게 턱짓했다. 이제 현시우를 데리고 나가자는 신호였다.밤은 이미 깊었다.이 시간에 운전기사 노릇까지 하긴 귀찮았던 주단우는 학교 근처의 호텔 객실 두 개를 잡았다.현다영과 현시우가 한방을 쓰고, 주단우가 독방을 쓰기로 했다.그날 밤 잠들기 전, 주단우의 객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는 하반신에 타월 한 장만 달랑 걸친 채 문을 열었다.남자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탄탄한 상반신을 마주한 순간, 현다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정작 주단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며 농담을 건넸다.“부끄러워하긴, 내 몸이 장난 아니라서 눈 둘 곳을 모르겠나?”“부대표님, 옷부터 입으시죠.”현다영은 어이가 없었다.물론 몸매가 훌륭하다는 건 그녀도 인정하는 바였다.하지만 아무리 좋아 봐야 그저 걸어 다니는 마네킹일 뿐, 그것도 자아도취가 아주 심각한 수준이었다.“무슨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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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6화

”부대표님.”현다영이 어떻게든 버텨 보려는 듯 말했다.“저희가 이러는 건, 역시 좀 아닌 것 같은데요.”“아닐 게 뭐 있어? 나한테 보답한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너도 나한테 빚지고 싶진 않을 거 아니야?”주단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소파로 걸어가 엎드렸다. 허리 곡선이 묘하게 드러나, 보고 있자니 괜히 상상력을 자극했다.그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자신이 결국 들어줄 거라고 확신하는 태도를 보이자 현다영은 괜히 답답해졌다.그녀는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빠르게 궁리하고 있었다.몇 초가 지나도 아무 반응이 없자, 주단우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흘끗 보았다.“걱정 마. 안 건드린다고 했으면 안 건드려. 네가 내 여자가 되고 싶다고 해도, 귀찮아서 사양했을 거야.”그 말을 듣고 나서야 현다영은 마지못해 걸음을 옮겨 주단우 곁으로 다가갔다.그녀는 가볍게 손을 풀고 숨을 한 번 들이마신 뒤, 그의 허리께에 손을 얹었다.“윽...!”그녀가 이렇게 세게 누를 줄은 정말 몰랐다. 평소에는 작고 여려 보이기만 하던 여자가 의외로 힘이 좋았다. 한 번 꾹 누르자마자 통증이 확 밀려와, 그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야, 현다영. 살살 좀 해! 은인 죽일 셈이야?”“부대표님이 대충 주무르라고 하셨잖아요. 전 이런 거 잘 모른다고요. 원래 마사지 좋아하는 사람들은 세게 받는 거 좋아한다면서요?”현다영은 퉁명스럽게 받아쳤지만 손 힘은 저도 모르게 조금 풀었다.“...난 세게 받는 거 안 좋아해. 아픈 거 제일 싫어한다고.”주단우가 낮게 중얼거렸다. 얇은 목욕가운 너머로 그의 단단한 근육과 따뜻한 체온이 손끝에 고스란히 느껴졌다.방 안의 공기가 문득 묘하게 달라졌다.주단우는 더 이상 아프다고 투덜대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살짝 감은 채, 그녀의 서툰 손길을 꽤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현다영은 주단우가 몹시 못마땅했다. 하지만 이토록 가까이에서 이성과 닿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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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7화

“시간도 늦었고, 저 먼저 가 볼게요.”현다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뒤에서 주단우가 몇 번이나 불러도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다음 날 이른 아침, 강지현은 막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김태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왜 이렇게 일찍 깼어? 더 자지.”“잠이 안 와.”김태하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쪽 팔꿈치를 강지현 옆에 짚고 있었는데,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이 팔에 간지럽게 스쳤다.강지현은 눈을 크게 뜨고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뒷말을 기다리는 눈치였다.“네가 내 곁을 떠나기까지 이제 나흘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까, 한순간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아서.”다음 주면 강지현은 국내를 떠나야 했다. 물론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것이고 오래 머물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김태하는 이기적일 만큼 그녀의 시간을 조금도 다른 사람에게 내주고 싶지 않았다.“왜 그래... 내가 아주 안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강지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태하가 손끝으로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그 말 하지 마. 듣기 싫어.”강지현은 눈을 깜빡였다. 보면 볼수록 이 남자가 귀엽게 느껴졌다.사람 혼을 쏙 빼놓을 만큼 잘생긴 얼굴을 하고서는, 주인 곁을 떠나기 싫어하는 작은 짐승처럼 굴다니. 이게 말이 되나?그녀는 손짓해 김태하의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긴 뒤, 그의 귓가에 바짝 대고 물었다.“그럼 나 얼마나 보고 있었는데?”숨결이 닿자 김태하의 귀 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주 작게 떨리기까지 했다.“동트기 전부터 해 뜰 때까지.”김태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그럼 왜... 뽀뽀해서 깨우지 않았어?”강지현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일부러 숨을 살짝 섞으면서 말하자, 김태하의 목덜미가 순식간에 붉어졌다.워낙 피부가 하얀 탓에, 한 번 붉어지면 유난히 티가 났다.“...아까워서.”순간 멈칫했다. 똑같이 귓가에 내려앉은 그의 한마디가 오히려 그녀의 몸과 마음을 뜨겁게 만들었다.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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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8화

하지만 지순옥은 진작부터 김태하와 오늘 오전 10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아둔 상태였다. 그 녀석도 분명히 알겠다고 잘 대답했었고, 그녀는 출발하기 전에 특별히 확인 메시지까지 보냈었다.그런데 김태하 쪽은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가지 않는 듯 조용하기만 했다.“할머님, 오셨어요?”강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지순옥 일행을 안으로 맞이했다.“태하는 지금 씻고 있어요. 금방 나올 거예요.”그녀는 다소 쑥스러운 듯 말하다가, 지순옥의 곁에 선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할머님, 이 두 분은 누구세요?”“내가 소개해 주마. 이쪽은 내 오랜 친구이자 국제 심리학 연합 연구원의 원장인 이든 선생이란다. 지금은 M국의 제1의대 교수로 있으면서, 평소에는 대형 병원의 심리 자문도 맡고 계시지.”“그리고 이 아가씨는 이든 선생의 비서란다.”지순옥의 소개를 듣자마자 강지현은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김태하가 심리 치료를 받으러 가겠다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 것이다.하지만 당시 그 말을 하던 김태하의 표정에는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기에, 그녀는 그가 이 일에 꽤 거부감을 느끼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상처를 남에게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리는 김태하에게, 의사를 만난다는 건 자신의 상처를 다시 헤집는 일과 다름없지 않을까?강지현은 김태하가 억지로 자신을 몰아세우는 걸 원치 않았다. 만약 그가 싫다면,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덮어둘 수 있었다.어차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때문이라면, 앞으로 자신이 곁에서 세심하게 돌보고 지켜주며 나쁜 감정에 빠지지 않게만 해주면 별문제 없지 않을까?굳이 상처를 들추어내지 않더라도, 더 악화되지만 않는다면 그게 바로 치유되는 길일 터였다.하지만 지순옥이 좋은 마음으로 주선한 일이었고 김태하 본인도 이미 동의했으니, 강지현도 더는 뭐라 말하기 힘들었다.다행히 지순옥은 사려 깊은 사람이라 김태하가 거부감을 가질까 염려해, 의사를 친구라는 명목으로 집으로 초대했다.사실 김태하는 어제 오후에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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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9화

그저 조금만 움직여도 공포가 밀려오는 듯했다.“긴장 풀거라. 이든 선생은 그저 너랑 이야기 나누며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러 오신 거지, 딱딱하게 진료를 보러 오신 게 아니란다.”지순옥은 분위기가 다소 무거워진 것을 보고 얼른 말을 건넸다.강지현은 김태하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그의 허벅지 위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할머님이랑 잠시 나가 있을 테니 의사 선생님과 편하게 이야기 나눠. 나 금방 돌아올게.”그녀는 김태하의 곁을 지켜주고 싶었지만, 혹시나 자신 앞에서 그가 더 불편해할까 봐 걱정이 앞섰다.하지만 강지현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김태하가 그녀를 홱 붙잡았다.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잡은 손을 놓아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어쩌면,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간일지라도 그의 본능적인 첫 번째 반응은 여전히 강지현이 곁에 머물러 주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몰랐다.강지현이 멈칫하자, 김태하는 그제야 서서히 손을 풀었다.“괜찮습니다, 강지현 씨도 함께 계셔도 좋아요. 저희는 그저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것뿐이고, 두 분은 부부이시니 딱히 피하실 이유도 없지요.”이든의 국어 실력은 훌륭했고 목소리 또한 무척이나 부드러웠다.그는 강지현을 바라보며 안심하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강지현이 지순옥을 바라보자, 지순옥은 미소를 지으며 곧 점심시간도 다 되어가니 근처에서 먹을거리를 직접 좀 사 오겠다고 했다. 이따가 다 함께 간단하게 요기라도 하자면서 말이다.이든이 자신의 비서를 바라보자, 비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지순옥을 따라나섰다.방 안에 세 사람만 남게 되자, 이든은 그제야 주머니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김 대표님, 지현 씨. 듣기로는 두 분이 신혼여행 중이시라던데,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감사합니다.”강지현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 사이 이든은 펜으로 종이 위에 슥슥 그림을 그려 나갔다.그것은 간단한 캐리커처였는데, 마침 두 사람이 맞은편 소파에 앉아 두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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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0화

“이 사람의 장점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리고 어떤 모습이든, 전 다 좋습니다.”김태하의 대답은 강지현이 예상한 그대로였다. 그런데도 막상 직접 듣고 나니 얼굴이 괜히 달아올랐다.강지현은 가볍게 헛기침하고는 이든을 바라보았다.“선생님, 이제 제 얘기는 그만하시면 안 될까요? 다른 얘기 좀 해 주세요.”“좋습니다.”이든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김태하에게 물었다.“김 대표님, 최근 일상에서 특별히 마음이 편안해진다거나 감정이 안정된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으신가요?”“있습니다.”김태하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강지현을 바라보며 말했다.“아주 많습니다.”“예를 들면, 밤중에 잠에서 깼을 때 아내가 곁에서 편안하게 숨 쉬고 있는 걸 볼 때요. 아니면, 지금처럼 아무 말 없이 그냥 옆에 앉아 있어 줄 때도 그렇습니다. 곁에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 마음이 놓이고 감정도 훨씬 안정됩니다.”‘방금 내 얘기는 그만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이쯤 되면 김태하의 심리 상담을 하는 건지, 아니면 그녀의 심리 상담을 하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대화의 중심이 자꾸만 그녀에게로 돌아왔으니까.그래도 그의 말은 강지현의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었다.김태하가 지금 자신에게 깊이 의지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에게 이토록 큰 의미를 지니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지현 씨가 김 대표님께 아주 큰 힘이 되어 주시는군요. 대표님은 참 운이 좋으십니다. 평생을 살아도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이들도 많거든요.”이든이 진지하게 말하자, 김태하는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강지현의 손을 더 꼭 잡았다.“알고 있습니다.”그제야 이든은 심리 진단 평가지를 꺼냈다. 김태하가 문항을 보고 답을 고르면, 옆에 있던 강지현이 대신 표시해 주는 방식이었다.처음에 강지현은 김태하가 이런 검사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그는 생각보다 훨씬 진지했다. 질문 하나하나에 집중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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