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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1화

“지금 농담이죠? 강지현이 주상 그룹의...”“참, 백하린 씨랑 우리 대표님이 예전에 인연이 아주 깊으셨던 모양이더라고요?”하원영이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며, 주단우를 대신해 백하린의 의혹에 쐐기를 박았다.그녀는 이런 구경거리를 가장 좋아했다.악녀가 제 꾀에 넘어가 참교육 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짜릿한 일은 없으니까.백하린의 얼굴은 똥이라도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눈동자마저 사정없이 흔들렸다.마치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하원영이 팔짱을 끼며 비아냥거렸다.“듣자 하니, 우리 대표님이 주상 그룹으로 복귀하기 전에 백하린 씨한테 꽤 괴롭힘을 당하셨다고 하던데. 남의 남편 가로채는 짓거리를 그렇게나 좋아한다면서요?”“아니, 어떻게 해성 그룹 같은 대기업에서 이런 염치 없는 사람을 주상 그룹이랑 협력하는 자리에 보낼 수 있죠? 주상 그룹 입장에서 해성 그룹이 장난치나 싶지 않겠냐고. 게다가 해성 그룹 직원들은 죄다 몰상식하다는 인상만 줄 텐데...이거 회사 이미지에 완전 악영향 아니겠어요?”하원영의 마지막 한마디는 정확히 백하린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준 격이었다.그녀가 던진 폭탄에 주변은 술렁이기 시작했다.백하린의 안색은 점점 더 하얗게 질려갔다.지금 하원영이 작정하고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반박할 여력이 없었다.강지현이 주상 그룹 대표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하원영에게 받아칠 여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적당히 하죠? 하원영 씨가 끼어들 자리는 아니니까.”주단우가 이를 갈며 차갑게 경고했다.하지만 하원영은 콧방귀만 뀌었다.어차피 주시언이 있는 한 주단우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게다가 주시언도 딱히 자신을 말리지 않자, 하원영은 보란 듯이 눈을 흘겼다.어느새 주변은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그래도 집안 망신은 시킬 수 없었기에 주단우와 주시언은 거의 동시에 부하에게 눈짓을 보냈다.구경하던 직원들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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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2화

“그건 네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고.”평온한 목소리는 서두르는 기색 하나 없이 지독할 정도로 침착했다.주시언이 손을 들어 강지현의 비서에게서 USB 하나를 건네받았다.이를 본 순간 백하린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순간 자신이 헛것을 보았나 싶을 정도였다.저건... 강지현의 USB 아니던가?이도운에게 있을 때 몰래 사용했다가 나중에 다시 빼앗겼다.하지만 분명 단 하나뿐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강지현 쪽에는 절대 백업 본이 없을 터였다.강지현이 졸업을 앞두고 작업했던 프로젝트 데이터는 지도 교수와 함께 보완하는 과정에서 이미 해외 유수의 탑티어 기업으로부터 눈도장을 받은 상태였다.입사를 위한 치트키나 다름없었기에 강지현은 이를 따로 발표하지 않고 아껴두었다.이후 그녀가 이경 그룹에 합류하기로 결정하면서, 이 데이터 역시 뒷전으로 밀려났다.따라서 공식 발표되기 전이라 소유권을 증명할 길이 없다는 걸 알았기에 과감히 손을 댔다.그런데 만약 강지현에게 백업 본이 남아 있다면, 자신은 그 길로 완전히 끝장나는 셈이었다.해성 그룹은 고사하고, 절도죄 하나만으로도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만큼 처참하게 매장당할 터였다.“백하린 씨, 듣자 하니 한동안 직장 생활을 쉬다가 갑작스럽게 해성 그룹에 들어갔더군요. 이 짧은 시간 안에 해성 그룹 해원시 지사 대표 자리까지 꿰차다니, 정말 대단한 수완을 가졌나 봅니다?”주시언은 노트북을 열어 데이터를 불러오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정작 백하린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미 안절부절못했다.시선은 노트북 화면만 뚫어지게 응시하며 마른침만 연신 삼켰다.주단우 역시 수상한 기류를 눈치채고 미간을 찌푸렸다.‘이 인간들, 대체 무슨 꿍꿍이지?’백하린은 강지현과 앙숙 같은 사이가 아니었던가?상대가 배경이 좀 있다고 해서 이렇게 찍소리도 못하고 겁에 질려 떨다니,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수준이었나?“백하린 씨, 정신 차려요. 강지현이랑 원수지간이든 뭐든 그건 사적인 일일 뿐입니다. 오늘 당신은 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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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3화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해성 그룹이 대표 자리에 백하린 씨를 앉혔는지, 이제 그만 털어놓으라는 겁니다. 그리고 당신이 들고 온 이 협력 프로젝트 기획안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도.”주시언은 백하린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목소리는 늘 그렇듯 부드럽고 따뜻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호통보다 무거운 압박감으로 다가왔다.잠시 후, 그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정 기억이 안 난다면 제가 힌트를 드리죠. 이 일은 제 여동생이자, 주상 그룹의 강 대표와 아주 깊은 관련이 있어요.”말을 마치자마자 주시언은 노트북에서 USB를 뽑아냈다.달깍, 하는 소리와 함께 백하린은 이성의 끈이 뚝 끊어졌다.결국 밀려드는 공포를 견디지 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악을 쓰며 외쳤다.“증거 있어요? 공식적으로 발표된 적도 없는 데이터인데, 그게 누구 건지 어떻게 알아요?”그 말을 들은 주단우 역시 멍하니 굳어버렸다.반면 주시언은 여전히 침착했다.“방금 그 말은 본인의 죄를 인정한 겁니까?”“아니...!”백하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가 하얗게 질려갔다.회의실 안의 모든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억울함과 수치심에 눈물까지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무슨 소릴 하는지 전혀 모르겠네요.”“모르겠다면 내가 똑똑히 알려주지. 강 대표님의 결과물을 훔친 뒤, 해성 그룹의 협력 프로젝트에 도용한 것. 백하린 씨, 당신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이 정도면 엄연히 법적 책임을 져야 할 텐데?”하원영은 백하린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를 향한 연민은 눈곱만큼도 없었다.오히려 백하린이 울기 직전까지 몰릴수록 속이 다 시원할 지경이었다.이쯤 되니 주단우 역시 더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만약 저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번 프로젝트 자체에 심각한 결함이 존재한다는 뜻이었다.그렇다면 주시언이 계약 체결을 막은 것은 회사에 막대한 손해가 생기기 전에 미리 구해준 셈이 된다.“나... 난 그런 적 없어요! 하원영 씨, 왜 사람을 함부로 모함하고 그래요?”백하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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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4화

좌절감과 수치심이 해일처럼 밀려와 이제는 공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던 백하린은 제발 이 모든 게 악몽이기를 바라며 허벅지를 미친 듯이 꼬집었다.하지만 그녀의 고통을 조롱하듯 흘러가는 1분 1초는 심장을 칼날로 헤집는 것 같았다.끔찍하게도 보기 싫었지만, 강지현에게서 도저히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겉모습은 그대로인데, 지금 두 사람 사이의 격차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이었다.이제는 감히 넘볼 수조차 없는 아득하고 거대한 벽이 존재했다.강지현은 하루아침에 화려하게 변신해, 주상 그룹이라는 국내 최고 재벌가의 후계자가 되었다.그녀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곳은 자신이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해도 평생 닿을 수 없는 세계였다.문득 세 남녀의 운명을 한순간에 얽매었던 학창 시절의 어느 오후가 머릿속을 스쳤다.그때의 강지현은 그저 수수하고 깨끗한 느낌이 전부였다.정교한 이목구비에는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지금처럼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을 만큼 매혹적이진 않았다.백하린 역시 참 예쁘게 생겼다고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지할 곳 없는 가련한 고아일 뿐이라며 내심 비웃었다.이도운이 두 사람의 세계 속으로 강지현을 끌어들였을 때, 그녀의 노력과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었다.당시만 해도 그저 머리가 조금 좋을 뿐, 둔하고 미련해서 절대 남자의 사랑 따위는 받지 못할 거라며 스스로를 위로했었다.그러나 지금, 비겁하게 쌓아 올린 위안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백하린은 애초에 강지현과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상대가 되지 않는 이 외로운 싸움에서 그녀는 철저한 패배를 맛보았다.강지현이 마침내 백하린을 바라보았다.무심한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표정은 소름이 끼칠 만큼 평온했다.“백하린 씨, 오랜만이에요. 주상 그룹에서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네요.”백하린의 몸이 잘게 떨렸다.그녀 역시 여유롭게 받아치고 싶었지만 책상 모퉁이만 움켜쥘 뿐이었다.결국 마른침을 연신 삼키며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그야말로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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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5화

더 이상 맨정신으로 버틸 수 없었던 백하린은 대뜸 인신공격을 퍼부었다.비록 눈시울은 붉게 물들었고 두려움에 목소리마저 떨렸지만, 강지현을 향한 지독한 증오심이 공포를 집어삼킨 지 오래였다.하원영이 콧방귀를 꼈다.“구걸이라니? 내 보기엔 그 단어, 당신한테나 딱 어울리는 것 같은데. 남자 하나 잡아 보겠다고 기를 쓰며 꼬리 흔들어 대고, 이도운 때문에 남의 물건까지 훔치고 말이야. 그 추잡한 짓거리가 눈앞에서 낱낱이 까발려졌는데도 어떻게 아직도 오리발을 내밀 수 있지? 이 아줌마야.”공격력으로 치면 회의실 전체를 통틀어 하원영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그녀가 내뱉은 마지막 한 마디에 백하린은 하마터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뻔했다.나이를 가지고 공격당한 적은 평생 처음이었다.비록 대여섯 살 연상인 건 사실이지만, 워낙 철저하게 관리해온 덕에 몸매부터 피부, 자태까지 갓 스물을 넘긴 대학생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해 왔기 때문이다.하지만 하원영이 내뱉은 ‘아줌마’라는 호칭은 그녀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뭉개버렸다.주시언도 선을 좀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하원영을 힐끗 바라보며 테이블 아래로 산만하게 흔들거리던 다리를 툭툭 쳤다.경고의 의미를 알아챈 하원영은 마치 부모에게 혼이 난 아이처럼 입술을 삐죽였다.“백하린 씨, 마지막으로 한번 더 묻겠는데, 해성 그룹 프로젝트 말이에요. 내 논문 데이터 표절한 거 맞죠?”강지현의 시선이 허공을 맴돌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손에 쥔 USB가 책상 위에 가볍게 부딪힐 때마다 툭, 툭, 미세한 소리가 울렸다.회의실 안은 숨이 막힐 정도로 고요했다.백하린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강지현이 여전히 기회를 주고 있다고 착각한 그녀는 단지 자신을 압박하려는 수작일 뿐이라 확신했다.‘저년이 나한테 기회를 줄 리가 없지.’“내가 표절했다고 하는데, 그럼 증거를 대 봐. 증거 하나 없이 이딴 식으로 나오면, 주상 그룹이 날 모함하고 비방한 죄로 고소해 버리는 수도 있어.”“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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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6화

주병찬은 국내에 없었다. 주시언이 일을 제쳐 두고 급히 달려오지 않았다면 주단우를 감당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하원영은 떠나려는 주시언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때 주시언이 하원영의 어깨를 가볍게 누르며 말했다.“배웅해 줘.”하원영이 망설이자 강지현이 말했다.“원영 씨, 가서 오빠 좀 배웅해 줘요.”그제야 하원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언을 따라갔다.주단우 역시 더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해성 그룹 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그의 반응을 살폈지만, 주단우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그가 현다영 곁을 지나칠 때, 현다영은 마침 고개를 돌렸다.현다영의 태도가 달라진 걸 눈치챈 주단우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옆에 있던 공용 쓰레기통을 걷어찼다.마침 맞은편에서 청소 아주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는 허리를 펴고 빤히 그를 쳐다봤다.주단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치우세요.”30분 뒤, 주상 그룹 건물 앞에 경찰차 두 대가 도착했다.백하린은 회의실에 붙잡혀 있었고, 해성 그룹 사람들 역시 이곳에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경찰이 오기 전, 그들은 밖에서 각자 전화를 하고 있었다.회의실 안에는 백하린과 강지현만 남아 있었다.강지현이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마침 경찰도 도착했다. 그녀는 경찰과 몇 마디 나눈 뒤, 먼저 들어가 사람을 데려가게 했다.백하린은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한순간에 대여섯 살은 늙어버린 듯했다. 축 처진 얼굴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나 분노가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비참함과 처량함만이 어려 있었다.경찰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백하린은 저항하지 않았다. 아주 담담하게 자리에서 일어났고 질문을 받자 심지어 웃으며 대답하기까지 했다.일이 마무리되자 강지현은 곧바로 김태하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는 아직 경찰서에 가서 참고인 조사를 받아야 하니, 끝나는 대로 집에 돌아가겠다고 말했다.두 사람이 해원시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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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7화

백하린에게 정말 해성 그룹을 설득할 능력이 있었다면, 강지현이 이경 그룹에 있을 때 맡았던 일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리 없었다.이도운도 마찬가지였다.그와 백하린만 몰랐을 뿐, 둘 다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다. 강지현에게 완전히 휘둘리고 있었다.이도운은 백하린이 이번에 주상 그룹에 가면 분명 문제가 생길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씨 가문의 몰락과 권미숙의 죽음은 이도운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백하린 역시 마찬가지였다.백하린이 그를 이용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런 결말은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자업자득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이도운은 담배를 비벼 끈 뒤 고개를 돌렸다. 마침 강지현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경찰서 안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강지현도 그를 보았다.이도운이 고개를 숙인 채 몇 걸음 다가가려 하자, 강지현 곁에 있던 경호원들이 곧장 경계 태세를 취했다.“강지현.”이도운이 고개를 들고, 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수없이 불러 왔던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차갑고 담담하게 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강지현은 얼마든지 이도운을 무시할 수 있었다. 지금의 그는 그녀에게 무엇 하나 바랄 자격이 없었으니까.그런데도 강지현은 걸음을 멈췄다.이도운은 몰라보게 수척해져 있었다. 긴 코트를 걸친 그는 수염이 까칠하게 자라 있었고, 늘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정돈되어 있던 머리카락도 헝클어진 채 눈가에 내려와 있었다.처음 만났을 때의 풋풋함도, 한때 잘나가던 고고한 대표의 기품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었다.그는 세파에 닳고 닳은 중년 남자처럼 보였다. 빛나는 구석은 조금도 없었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초라하다는 생각만 들게 했다.강지현은 문득 자신이 예전에 왜 그에게 설렜는지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지금 눈앞의 이도운은 그녀에게도 낯설었다. 마치 서로를 알았던 시간이 전생처럼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기억은 여전히 선명했지만 다시 마주한 그는 이미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예전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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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8화

그 오랜 세월, 그녀가 아무리 잘해도 이도운은 손톱만큼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았다.희생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얻으려는 짓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할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 아니던가.강지현 역시 처음 사랑을 알던 시절의 자신이 몹시 어리석었다고 생각했다. 떠올릴 때마다 수치스러울 정도였다.다행히 그녀는 김태하를 만났다.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평생 진짜 사랑을 몰랐을지도 모른다.세상 사람들은 대개 이기적이고 냉정하다. 그래도 세상에는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다시 사랑을 믿고 싶어지게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엉망으로 망가졌던 마음도 다시 따뜻해질 수 있고, 상처로 얼룩진 사랑도 누군가를 통해 다시 아름다워질 수 있었다.강지현의 눈빛에 서서히 연민이 스쳤다.집에 돌아가면 김태하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에 남아 있던 분노마저 어느새 사르르 풀렸다.“이도운. 네가 죽든 말든 나와는 아무 상관없어. 네가 나를 배신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으니까.”그가 죽는다고 해서 기뻐할 일도, 슬퍼할 일도 없었다.강지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몇 걸음 가지 않았을 때, 뒤에서 이도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지현. 우리 사이엔 정말 아무것도 안 남은 거야?”이도운은 차라리 그녀가 자신을 욕해 주길 바랐다.화를 내도 좋았다. 더 잔인하게 짓밟아도 상관없었다.그저 강지현의 마음속에 자신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는 것만 확인하고 싶었다.강지현은 그의 목소리 따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끝내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이도운은 다급히 그녀를 따라가려 했다. 마음속으로 수없이 다짐하고 또 다짐했건만 막상 그녀를 마주하자 가까스로 버티던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그 순간, 경호원들이 곧장 그를 막아섰다. 이어 거친 주먹이 몇 차례 날아들었다.이도운은 배를 얻어맞고 그대로 몸을 웅크렸다. 숨이 턱 막히는 통증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결국 다리에 힘이 풀린 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그는 떨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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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9화

그 순간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저 음영이 혹시 종양이면 어떡하지.정작 김태하는 담담했다.“저는 매년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이런 이상 소견은 없었고요.”“네, 맞습니다. 이런 갑작스러운 병변은 예전 부상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의사는 무거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다만 아직 확정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닙니다. 너무 앞서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정확한 건 조직검사 결과가 나와 봐야 알 수 있습니다.”김태하가 말이 없자, 최동윤이 급히 끼어들었다.“그냥 괜한 걱정일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저희 대표님은 원래 건강하셨습니다.”“물론 그럴 수도 있죠.”의사는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더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괜한 걱정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다만 김태하가 말한 증상들을 생각하면 그럴 확률은 낮아 보였다.한동안 침묵하던 김태하가 낮게 물었다.“만약 선생님들이 의심하는 병이 맞다면, 치료는 가능합니까?”“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종양이라고 해도 종류가 다 다르고, 지금 보이는 범위도 크지 않습니다. 악성만 아니라면 보존적 치료로도 지켜볼 수 있습니다.”김태하는 많이 회복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수술을 버틸 만한 몸은 아니었다. 악성이든 양성이든, 지금으로서는 보존적 치료가 최선이었다.“그럼 저는...”김태하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그러다 곧 담당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죽습니까?”죽음에 대해서라면, 김태하는 아주 어릴 때 이미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유괴범에게 붙잡혀 있던 그때,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태어나며 짊어지게 된 것들, 갚아야 할 것들,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미워했던 사람들까지.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그저 살고 싶었다.그때 느꼈던 생에 대한 집착과 죽음의 공포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김태하를 놓아주지 않았다.그는 무엇이든 완벽하게 해내려 했다. 스스로에게 엄격했고 조금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았다.다시는 그때처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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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0화

“나 보고 싶었어?”강지현이 김태하의 어깨에 턱을 묻고 살짝 비볐다.집에 들어오자마자 묘한 느낌이 들었다. 김태하는 소파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꼭 오래도록 그녀만 기다린 사람 같았다.“응. 보고 싶었어.”김태하는 조심스레 그녀를 끌어안고 손끝으로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나도 모르겠어. 오늘따라 유난히 네가 보고 싶더라.”“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강지현이 부끄러운 듯 작게 속삭였다. 숨결이 그의 귓가를 스치고 곧이어 김태하의 뺨에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이게 신혼의 달콤함이라는 걸까. 강지현은 이제야 그 말을 조금 알 것 같았다.붙어 있어도 더 붙어 있고 싶고 떨어지면 금세 또 보고 싶어지는 마음.두 사람은 서경시에 있는 동안 거의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고작 몇 시간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돌아오는 내내 강지현은 김태하가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그에게 한참 매달려 있고 나서야, 그녀는 겨우 만족한 듯 숨을 골랐다.강지현은 두 손으로 김태하의 얼굴을 감싸고 이마를 그의 이마에 가볍게 맞댔다. 체온이 평소와 다르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심한 듯 말했다.“오늘 장 봐 왔어. 맛있는 거 해줄게.”“좋아.”김태하가 부드럽게 웃었다.“뭐 먹고 싶어?”“네가 해주는 건 다 좋아.”예상했던 대답이었다. 강지현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웃고는 옷을 갈아입으러 침실로 들어갔다.평소에도 김태하는 집에 있으면 강지현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런데 오늘은 몇 시간 떨어져 있었던 게 못내 아쉬웠는지, 평소보다 더 그녀에게 붙어 있으려 했다.강지현이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으려 하자, 김태하도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는 그녀를 붙잡고 한참이나 입을 맞췄다. 덕분에 잠옷 하나 갈아입는 데 거의 40분이 걸렸다.주방에 가서도 두 사람은 쉽게 떨어지지 못했다.김태하가 강지현에게 앞치마를 매어 주다가 그대로 뒤에서 끌어안았고, 두 사람은 주방 한쪽에 기대 한참이나 서로를 놓지 못했다.정작 요리를 시작했을 때는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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