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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1화

강지현은 딱히 배가 고프지 않은 데다, 오후 내내 와이너리에서 좋은 와인을 제법 음미한 탓에 이미 약간의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주호석의 지인들과 가볍게 앉아 몇 마디 담소를 나누던 그녀는 결국 먼저 자리를 떴다.와이너리는 본관에서 다소 거리가 있었다.강지현이 막 차에 오르려는데 저 멀리서 지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지현 씨, 제가 오늘 술을 좀 마셔서 할아버지께서 하룻밤 묵고 가라 하시네요. 실례가 안 된다면 차를 좀 같이 얻어 탈 수 있을까요?”성큼성큼 걸어오는 지현우의 곁에는 늘 대동하던 비서나 수행원들이 보이지 않았다.“지 대표님, 일행분들은 어디 가셨어요?”강지현이 의아한 듯 묻자 지현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분들은 할아버지의 다른 손님들을 배웅하러 갔어요. 저는 어차피 여기서 자고 갈 거라 강지현 씨를 찾아온 거예요.”배아름과 강지현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어차피 차에 자리는 넉넉했기에 강지현은 더 길게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의례적인 인사를 건넨 뒤 먼저 차에 올라탔다.차 안에는 강지현의 수행원들을 비롯해 사람이 많았다.강지현은 맨 뒷자리에 앉았고 가장 마지막에 탑승한 지현우와는 자연스럽게 거리가 떨어졌다.몇 분 지나지 않아 차는 숙소가 있는 별장에 도착했다.지현우가 묵을 객실은 마침 강지현과 같은 층에 있어서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함께 걷게 되었다.강지현의 방은 복도 더 깊숙한 안쪽에 있었고 지현우의 객실은 바깥쪽이었다.그가 먼저 방에 도착했음에도 그는 곧장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강지현과 배아름의 뒤를 계속 따르며 굳이 방 앞까지 배웅하려 들었다.“지 대표님도 오늘 피곤하셨을 텐데 더 안 바래다주셔도 돼요.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상황이 이쯤 되자 강지현도 결국 선을 그으며 한마디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지현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강지현 씨, 좋은 밤 보내시고 내일 뵙죠.”“안녕히 주무세요.”말을 마친 강지현의 돌아서는 발걸음이 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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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2화

“혹시 바쁘시다면 굳이 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문 앞에 두고 갈게요.”지현우는 말을 마친 뒤 다시 몇 초간 서서 기다리다가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자 그제야 몸을 돌려 자리에서 물러났다.강지현은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를 터뜨렸다.문밖이 완전히 고요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복도의 부드러운 카펫 위에는 포장이 정성스럽고 고급스러운 선물 상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강지현은 밖으로 걸어 나와 지현우가 정말로 떠난 것을 확인한 후에야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선물 상자는 그리 무겁지 않았지만 손에 닿는 촉감과 질감이 좋았다.그녀는 방 한가운데로 걸어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묶여 있던 리본 끈을 풀어냈다.상자 안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인체 조각상이 들어 있었다.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미간을 찌푸린 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과거 그녀가 자선 만찬에서 연설하던 당시의 모습을 본뜬 듯했다.조각상이 입고 있는 파란색 드레스는 수만 개의 정교하고 자잘한 천연 블루 사파이어를 촘촘히 박아 완성한 것이었다.하지만 이 조각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부분은 보석이 아니었다.이 작품은 다름 아닌 세계적인 예술 거장 카이의 손에서 탄생한 것이었다.그는 올해로 이미 예순을 넘겨 진즉에 화려한 작품 활동을 접고 은둔한 인물이었다.그런 거장에게 직접 개인 맞춤형 조각상을 의뢰해 받아내다니, 지현우가 이 선물에 쏟아부은 정성과 그 막대한 가치는 가히 혀를 내두를 만했다.상자 옆에는 카드도 한 장 들어 있었는데 그 위에는 남자의 시원시원하고 힘 있는 필체가 남겨져 있었다.[약소한 선물로 제 마음을 조금이나마 전합니다. 부디 강지현 씨께서 기쁘게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구구절절한 군더더기 없이 그저 정중하고 평범해 보이는 문구였다.하지만 이런 선물을 보낼 정도라면 남자가 그녀에게 품은 마음은 결코 평범할 수가 없었다.강지현은 조각상을 다시 상자 안에 정돈해 넣고 원래 있던 자리에 가져다 놓은 뒤, 곧바로 지현우에게 보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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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3화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도련님이 이 새벽부터 짐까지 챙겨서 나가시다니, 출장이라도 가시는 건가요?”두 사람은 서로 얼굴만 마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조금 전 식당에서 주시언을 보았을 때만 해도 집사는 당연히 그가 미리 일정을 잡아두고 비서실에 통보해 놓은 줄로만 알았다.어젯밤 주시언은 아주 늦은 시간에 귀가해 오늘 아침에 챙겨갈 간단한 일상복 몇 가지만 미리 꾸려두라고 툭 한마디 던졌을 뿐이었다.집사는 주병찬 일가의 가사를 총괄하고 있었고 주병찬이 집을 비울 때마다 주시언의 일상 행적을 매번 주병찬에게 보고해야 했다.그렇기에 주시언이 캐리어를 챙기는 것을 보고 으레 출장을 가려니 짐작했다.본래 주시언은 매사에 빈틈없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 아랫사람들의 업무에도 상당히 협조적이었고 평소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사소한 일들은 굳이 남을 시켜 번거롭게 만들지 않는 성격이었다.집사는 주시언이 아무리 경황없이 바쁘더라도 집을 나서기 전에는 최소한 행선지 정도는 일러줄 거라 믿었건만, 이번만큼은 아무런 귀띔도 없이 훌쩍 떠나버린 터였다.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어느덧 아침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그러나 빗줄기는 잦아들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굵어지며 기세를 더해갔다.사무실 통창 너머로 내다보는 회색빛 하늘은 당장이라도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릴 듯 낮게 가라앉아 보는 이의 숨통을 옥죄어왔다.하원영은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복도 창가에 서서 유리창을 타고 투명하게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멍하니 응시했다.마치 사람의 눈물처럼 서로 먼저라 할 것 없이 뭉쳐져 굴러떨어지는 모양새가 꼭 차마 다 털어놓지 못한 억울한 사연을 쏟아내는 듯했다.“하원영 씨, 좋은 아침이에요.”마침 하원영이 있는 층으로 서류를 전달하러 왔던 현다영이 탕비실 옆에서 넋을 놓고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하원영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어딘지 모르게 가라앉아 있었고 한 박자 늦게야 입꼬리를 간신히 끌어올리며 대답했다.“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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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4화

현다영은 도망치듯 돌아서려는 하원영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하원영 씨, 아침은 먹었어요?”하원영은 찰나 멍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러면 나랑 같이 아침 좀 먹어줘요. 저도 오늘 너무 일찍 출근했더니 동기들이 아무도 안 왔거든요. 혼자 먹으려니까 심심해서 그래요.”현다영은 특유의 싹싹하고 활기찬 태도로 하원영을 이끌었다. 하원영 역시 순순히 그녀의 걸음에 뜻을 맡겼다.마침,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하던 차에, 현다영이 이렇게 옆에 있어 주니 오히려 잡념을 분산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탕비실로 들어간 현다영은 냉장고에서 자신이 챙겨온 아침 대용 간식을 꺼내 하원영과 정확히 절반을 나누었다.그것은 다름 아니라 어제 그녀가 줄을 서서 현시우에게 사다 주었던 한정판 치즈케이크였다.원래대로라면 현시우가 학교에 통째로 들고 가야 했을 물건이었지만 기특하게도 현다영에게 맛을 보라며 미리 큰 조각을 잘라 챙겨둔 터였다.어차피 혼자서는 다 먹지 못할 양이었기에 현다영은 그 반쪽을 하원영에게 선뜻 건넸다.“단 걸 먹으면 기분이 한결 좋아진대요. 기운이 바닥나서 아무것도 못 하겠다 싶을 때 딱 한입 베어 무는 거죠. 지현 언니가 나한테 알려준 비법이에요.”현다영은 싱글벙글 웃으며 하원영에게 디저트용 포크를 쥐여주려 했다.하원영은 차마 거절의 말을 뱉지 못했다. 늘 날이 서 있던 고양이가 오랜만에 부드럽게 털을 누이며 순해진 꼴이었다.다만 그녀는 포크를 받는 대신 케이크를 그대로 덥석 들어 올리더니 한입에 크게 절반을 베어 물었다.“맛있네요.”진하고 달콤한 치즈의 풍미가 입안 가득 번지자 정말로 순간이나마 마음속에 깃든 쓸쓸함이 사라지는 듯했다.다만 이런 행복은 너무도 짧게 스러졌다. 겨우 두 모금 삼키고 나니 이내 감정은 다시 제자리로 가라앉았다.하원영이 의외로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자 현다영은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말했다.“맛있으면 더 먹어요.”하원영도 굳이 사양하지 않고 부지런히 입을 움직였다. 그녀가 막힘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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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5화

하원영의 목소리는 뚝 끊기며 아래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현다영은 그녀의 복잡한 속내를 완벽히 간파했다는 듯 나직이 읊조렸다.“왜냐하면 정말로 두려운 건, 그 사람이 애초에 그 자리에 나오지 않았을까 봐서인 거죠?”마지막 남은 자존심의 껍데기마저 무참히 들이박힌 하원영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현다영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다 잠시 후, 테이블 위에 놓인 쓰레기와 남은 물건들을 깔끔하게 정리했다.“가요, 이제 다시 일하러 들어가야죠.”“그게 끝이에요?”하원영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현다영이 무언가 더 쏘아붙일 줄 알았다.이를테면 타인의 감정은 안중에도 없이 오직 자기 생각만 하는 이기적이고 나약한 행동에 대해 어처구니없어하거나 혹은 어떻게든 그녀를 타이르고 설득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현다영은 하원영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하원영 씨의 일이잖아요. 타인의 입을 빌려 평가받을 필요는 없어요. 제가 하원영 씨의 죄책감을 대신 덜어줄 수도 없고 하원영 씨를 대신해 어떤 결정을 내리라고 등 떠밀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하지만 정말로 그 사람이 나오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했다면 애초에 이렇게까지 괴로워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정말로 가기 싫었다면 이렇게 온종일 매달려 생각하지도 않았을 테고요.”현다영은 말을 마치자마자 미련 없이 먼저 몸을 돌려 탕비실을 나섰다. 하원영은 자리에서 일어서다 저도 모르게 다시 그녀의 등 뒤로 소리쳤다.“현다영 씨, 다영 씨가 보기에도 역시 내가 틀린 거 같죠?”“세상에 무조건 맞고 틀린 일은 없어요. 그리고 설령 정말로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하더라도 도망치는 것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 중, 어느 쪽이 나중에 덜 후회스럽고 속이 편할지는 원영 씨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요.”현다영은 생긋 웃어 보이고는 이번에야말로 성큼성큼 걸어가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하원영은 다시금 창밖을 내다보았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 사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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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6화

“돌아가죠.”이번에는 비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시언이 낮게 말했다.정말 오래 기다렸지만 하원영은 오지 않았다.고개를 숙인 채 막 발걸음을 떼려던 순간, 누군가 그의 가슴팍을 가볍게 밀었다.고개를 들자, 비에 흠뻑 젖은 하원영이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께를 살짝 밀어내며 숨을 몰아쉬었다.“오빠...”하원영은 택시를 타고 왔지만 오는 내내 길이 막혔다. 구청 업무 시간이 끝날까 봐 마지막 구간은 비를 맞으며 뛰어왔다.그런데 주시언은 정말 구청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는 순간, 얼어붙었던 몸이 단숨에 녹는 것 같았다. 스산하고 차가운 날씨마저 그리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왔네.”굳어 있던 주시언도 그제야 조금 표정을 풀었다. 웃음이 번지려던 찰나, 그는 하원영의 손목을 붙잡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비서도 급히 다가왔다.우산은 꽤 컸지만 세 사람이 함께 쓰기에는 비좁았다. 결국 비서는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미안해요, 너무 늦었죠?”하원영은 주시언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그가 자신을 원망할까 봐 겁이 났다.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시언은 그녀의 팔을 잡고 빠르게 구청 안으로 들어갔다.“서류는 다 챙겼어?”“네, 다 챙겼어요.”하원영이 작게 대답했다. 호적등본은 어젯밤 늦게 하씨 가문에서 몰래 가져온 것이었다.“됐어.”주시언은 더 묻지 않고 하원영을 데리고 곧장 절차를 밟았다.담당 직원은 하원영의 몰골을 보고 잠시 망설였다.“이 상태로 사진 찍으시겠어요? 잠깐 정리하시고 오후에 다시 오셔도 되는데요.”“괜찮습니다.”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주시언과 하원영은 잠깐 서로를 바라보다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그 순간만큼은 두 사람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1분 1초도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직원은 조금 놀란 듯했지만 하원영의 상태가 마음에 걸렸는지 드라이기와 깨끗한 티셔츠를 가져다주었다. 간단히라도 정리하고 사진을 찍으라는 배려였다.하원영은 옷을 갈아입고 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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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7화

“이미 충분히 좋아요. 굳이 바꿀 필요 없어요. 나 때문에 돈 많이 썼겠다.”하원영이 조용히 말했다.주시언이 고른 곳이라면 분명 가장 좋은 곳일 터였다. 실제로 하원영은 들어오자마자 이 집이 마음에 들었다.창밖 풍경도, 마당도, 무엇보다 좋아하는 발코니도 있었다.하씨 가문도 호화롭기는 했지만 그 안에서 하원영에게 허락된 곳은 언제나 가장 차갑고 외로운 한구석뿐이었다.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집 안은 따뜻했고 하원영도 처음으로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비가 그치고 햇살이 발코니까지 들어오면 그곳에 꽃을 가득 심어도 좋을 것 같았다.그때 주시언이 비서에게서 서류 한 부를 받아 들었다. 하원영은 그제야 생각에서 깨어났다.서류는 수십 장이나 되는 계약서였다. 비서는 곧바로 하원영에게 내용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주시언이 며칠 동안 일을 미뤄 둔 것도 바로 이 계약서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계약서에는 하원영의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주시언과 혼인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 하원영은 아내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갖되 의무는 지지 않아도 되었다.주시언은 그녀의 모든 생활비를 책임지고 남편으로서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부부 관계를 맺을 필요도 없었고 서로의 사생활도 존중하기로 했다.혼인을 얼마나 유지할지도 하원영이 결정하면 됐다. 한마디로 이 계약서는 주시언이 하원영에게 건네는 안전장치나 다름없었다.이 결혼이 그녀에게 족쇄가 되지 않도록, 마음 놓으라는 뜻이었다.하지만 하원영에게는 주시언이 너무 많은 것을 내어 주는 것처럼 보였다.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도와주고 있을 뿐이었다.“이 계약서, 너무 불공평해요. 오빠한테는 남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하원영이 씁쓸하게 말했다.주시언은 하원영의 옆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그럼 내가 뭘 받으면 좋을 것 같은데?”“뭘 받고 싶은데요?”하원영은 주시언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다.“아이.”하원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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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8화

하원영이 낮게 말했다.“오빠 아버지께서 오빠가 이렇게 한 거 아시면, 나 정말 미워하시겠다.”“그걸 지금 걱정하기엔 좀 늦지 않았어?”주시언은 가볍게 웃었다. 하원영이 말하는 사이, 그는 이미 그녀의 짐가방을 열고 있었다.하지만 짐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하원영은 하씨 가문에서 나올 때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다. 호텔에 머무는 동안 급하게 산 옷 몇 벌이 전부라 쇼핑백 하나도 채우지 못할 정도였다.주시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그녀의 옷을 하나씩 옷장에 걸어 넣었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지금 네가 생각해야 할 건 앞으로의 새 생활이야.”주시언이 건넨 것은 명품 백화점에서 쓸 수 있는 무제한 쇼핑 카드였다.그는 하원영에게 현금을 직접 주면 그녀의 자존심이 상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계약서를 핑계로 삼았다. 두 사람은 어쨌든 부부였고 앞으로 함께 살아야 했다. 그런데 하원영을 계속 이렇게 초라하게 지내게 둘 수는 없었다.주시언은 무엇 하나 허투루 넘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원영 때문에 자신의 생활 방식이 흐트러지는 것도 그냥 두지 않을 터였다.하원영은 거절하지 않았다.“쓰고 돌려줄게요.”주시언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쓰고 돌려줘. 그런데 한도 없는 카드라, 아마 다 못 쓸 거야.”하원영은 말문이 막혔다. 두 사람이 말하는 ‘다 쓴다’의 의미가 전혀 달랐다.쇼핑 카드를 건넨 뒤, 주시언은 잠시 멈칫하더니 바지 주머니에서 검은색 벨벳 상자를 꺼냈다.그리고 그대로 하원영에게 내밀었다.하원영은 그게 무엇인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이건 안 해도 되지 않아요?”“하려면 제대로 해야지.”주시언은 또 다른 반지 상자를 꺼냈다. 두 상자를 열자, 안에는 한 쌍의 결혼반지가 들어 있었다.하원영의 반지에는 10캐럿이 훌쩍 넘어 보이는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디자인도 상당히 화려했다.“이거 직접 고른 거예요?”하원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시언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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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9화

밤이 되자 비는 완전히 그쳤다.차가운 공기가 가라앉은 가운데,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낮은 흐느낌처럼 들려왔다. 괜히 마음까지 쓸쓸해지는 밤이었다.김태하는 아직도 사무실 안쪽 작은 발코니에 서 있었다. 그는 드문드문 불이 켜진 맞은편 건물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최동윤이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대표님, 시간이 늦었습니다.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강지현은 집에 없었다.맞은편 방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집으로 돌아간다 한들, 더 허전해질 뿐이었다.요 며칠 김태하는 오전에는 병원에 가 몸을 돌보고 오후에는 미래 그룹에서 일을 처리했다.의사는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보존적 치료를 이어 가려면 무엇보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최동윤도 그 말을 잊지 않고 틈날 때마다 김태하에게 쉬라고 권했다. 하지만 강지현이 없자 김태하는 꼭 넋이 빠진 사람처럼 굴었다. 밥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고, 제때 쉬어도 얼굴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최동윤은 김태하가 속으로 얼마나 힘들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차라리 한 번에 무너지는 고통이 나았다. 이렇게 천천히 마음을 갉아먹는 고통이야말로 더 잔인했다.김태하의 병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최동윤은 자신이었다면 벌써 무너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태하는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회사에서 서류를 보고, 전화로 강지현과 평범하게 웃으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래.”김태하는 짧게 대답하고 시선을 거두었다. 밤바람이 차가웠던 탓인지, 그는 가볍게 기침을 했다.최동윤은 곧바로 들고 있던 코트를 내밀었다.돌아가는 길, 김태하는 강지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두 사람 사이에는 열두 시간의 시차가 있었다. 계산해 보니 강지현이 있는 곳은 이제 막 아침 여덟 시쯤이었다.평소라면 이미 일어났을 시간이었다.아니나 다를까, 강지현에게서 곧바로 답장이 왔다.최동윤은 룸미러로 뒷좌석을 힐끗 보았다.김태하는 한참 동안 휴대폰만 붙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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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0화

“무슨 일 있어? 할아버지가 널 난처하게 했어?”겉으로는 그저 연인 사이의 다정한 말 한마디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태하는 예민하게 눈치챘다.강지현은 원래 속마음을 쉽게 드러내는 편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보고 싶어도 밖에서는 좀처럼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거나, 오롯이 둘만 있는 밤이 아니라면 더더욱.“아니...”사실 강지현은 이곳에 온 뒤로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았다.엄경미와 주호석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했고 지현우라는 사람도 자꾸 신경이 쓰였다.그래서 유난히 김태하가 보고 싶었다. 김태하는 강지현에게 힘이 되어 주는 사람이었다. 당장이라도 돌아가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김태하를 꼭 끌어안고 푹 자고 싶었다.하지만 김태하는 생각이 많은 편이었다. 이런 말을 했다가는 예민하게 굴 게 뻔했다.게다가 강지현은 오늘 바로 귀국할 생각이었다. 김태하가 잠에서 깰 때쯤이면 자신은 이미 집에 도착해 있을 터였다.깜짝 놀라게 해 줄 수도 있었다.그 생각을 하니 강지현도 기분이 좋아졌다.“그냥 정말 네가 보고 싶어서 그래.”“나도. 나도 네가 보고 싶어.”김태하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전화기 너머로 손을 뻗을 수만 있다면 당장 강지현을 끌어안고 입 맞출 기세였다.곧 강지현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군가 온 모양이었다. 두 사람의 통화도 얼마 지나지 않아 끊겼다.김태하는 꺼진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최동윤에게 지시했다.“M국으로 갈 거야. 공항으로 출발해.”“대표님, 설마 지금 말씀하시는 겁니까?”최동윤은 운전대를 꽉 쥐고 미간을 찌푸렸다.“내일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잔말 말고.”김태하가 단호히 말했다.최동윤도 김태하가 한번 마음먹으면 누구도 말릴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하물며 강지현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그래도 걱정은 됐다.김태하는 무조건 빨리 움직이라고 했지만 최동윤은 기어이 동행 팀을 꾸렸다. 그렇게 시간을 끌고 끌어 새벽이 되어서야 김태하를 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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