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결혼, 진짜 신분의 모든 챕터: 챕터 581 - 챕터 590

660 챕터

제581화

“할아버지, 전 태하의 아버지가 제 아버지를 해친 원수라는 말을 믿지 않아요. 여기에는 분명 무슨 오해가 있을 거예요.”긴 침묵 끝에 강지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녀는 복잡하게 얽힌 생각을 빠르게 정리한 뒤, 주호석의 곁으로 와 앉았다. 목소리와 태도는 한결 차분하고 부드러워져 있었다.엄경미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지현아, 오해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는 노릇이란다. 그런데 네가 이렇게까지 단정 짓는 걸 보니, 네 마음은 이미 진작에 김씨 가문 쪽으로 기운 모양이구나.”주호석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갈수록 험악하게 일그러졌다.노인의 호흡이 미세하게 가라앉자 주변의 공기마저 함께 얼어붙는 듯했고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이 사방을 짓눌렀다.엄경미의 이간질이 아주 제대로 먹혀들고 있었다.그녀의 말은 곧 주호석의 속내를 대변하는 것이었고 주호석은 지금 자신에게 명백히 깊은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다.“전 김씨 가문의 편을 드는 게 아니에요. 그저 제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 듣기 좋은 말은 얼마든지 늘어놓을 수 있어요. 하지만 전 할아버지 앞에서만큼은 오직 진실만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이에요.”강지현은 엄경미의 얄팍한 수작을 꿰뚫어 보았다. 그에 대응하는 그녀의 논리는 막힘없이 정연했으며 태도 또한 지극히 담대하고 여유로웠다.엄경미가 흠칫하며 굳어지자 강지현은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주호석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할아버지께서 제게 확실한 태도 표명을 원하신다는 걸 잘 압니다. 전 어릴 때부터 가문 밖에서 자랐고 할아버지와 깊은 교류를 나눈 적도 없으니, 할아버지가 이 손녀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시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에요.”“하지만 제가 사람과 일을 대할 때 지키는 철칙은 절대로 제 양심과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에요. 김씨 가문이 제게 진심으로 잘해주었기에 그 고마움을 마음 깊이 새겨둔 것이고 할아버지는 제 핏줄이시니 당연히 더 정성으로 대할 생각이고요. 그러니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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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2화

엄경미가 어안이 벙벙해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주호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좋다. 하지만 굳이 각서까지 쓸 필요는 없어. 다만 사건의 진상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기 전까지는 반드시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엄경미는 흠칫 놀라 끼어들려 했으나 주호석의 서슬 퍼런 눈빛에 가로막혀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강지현은 눈동자를 굴리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조사라는 것이 그리 단시간 내에 결론이 날 리 만무했다. 그녀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주호석이 말을 덧붙였다.“걱정 마라,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딱 두 달이면 된다. 두 달 안으로 진상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네 마음대로 돌아가도 좋다.”“알겠어요.”강지현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어차피 이 사건을 확실하게 매듭짓지 않는다면 그녀 역시 마음 한구석에 무거운 돌덩이를 얹어놓은 듯 불편했을 터였다.게다가 주호석은 엄경미와 달랐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을 손녀로 인정하고 있었고 주씨 가문의 가업을 더 완벽하게 승계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키워줄 용의가 있는 인물이었다.현재로서는 강지현 역시 주호석의 환심을 사두는 편이 유리했다.가문 내부의 갈등을 확실히 해결해야만 엄경미가 앞으로 두 번 다시 자신에게 손을 댈 수 없을 터였다.대화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강지현에게 내려졌던 금지령도 해제되었다. 다만 주호석은 강지현의 수행원들까지 풀어주지는 않았다.강지현은 어떻게든 믿을 수 있었지만 그녀가 데려온 수하들은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호석은 강지현의 경호원들이 전적으로 김태하의 수하들이라는 사실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그나마 다행인 건, 그들이 먹고 마시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최고로 대접해 줄 테니 그저 긴 휴가를 보낸 셈 치게 하라며 강지현에게 안심하라고 일러둔 점이었다.강지현은 더 이상 논쟁해 보아야 소용없음을 깨닫고 결국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는 별일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이며 갑작스러운 사정이 생겼으니 당분간 편히 휴가를 즐기고 있으라고 그들을 안심시켰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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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3화

엄경미의 목소리가 잘게 떨려왔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눈가도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강지현은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지만, 그 눈빛에서는 위선밖에 느껴지지 않았다.세상에 알려진 엄경미와 주승호는 남부러울 것 없는 잉꼬부부였다. 심지어 주병찬마저도 주승호가 엄경미를 지독하게 사랑했노라 말했었고 엄경미 역시 주승호를 위해 더는 아이를 낳지 않고 주단우를 입양하기까지 했다.그런 사정들이 있었기에 강지현은 엄경미가 대놓고 적의를 드러낼 때마다 매번 한 걸음씩 물러서 주곤 했었다.어찌 됐든 엄경미는 아버지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었으니 만약 그녀가 자신과 원만하게 지낼 의사만 있다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진짜 가족이 되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다.그러나 엄경미는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줄곧 물과 기름처럼 강지현을 밀어냈다.지금 와서 보니 엄경미가 주승호에게 품은 원망과 증오의 깊이는 강지현이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듯했다.강지현이 채 말을 이어 가기도 전에 저 멀리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엄경미는 황급히 등을 돌리더니 이내 수행원들을 따라 서둘러 자리를 떴다.강지현은 가슴 한구석이 미세하게 짓눌리는 듯한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엄경미가 주승호를 입에 올릴 때 보인 감정의 동요만큼은 진심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정말 부부 금실이 좋았다면 왜 아버지는 모든 유산을 전부 나한테 넘긴 거지?’강지현은 본래 엄경미가 엄씨 가문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둔 탓에 주승호의 재산 따위에는 애초에 관심도 없을 거로 생각했었다....김태하를 태운 차량 행렬이 짙은 어둠을 뚫고 웅장하고 광활한 리조트의 외곽 도로로 진입했다. 그러나 내부로 들어서기도 전에 마주 오던 정체불명의 차들이 앞길을 턱 하니 가로막아 섰다.잠시 실랑이하던 최동윤은 이내 김태하 쪽으로 돌아와 리조트의 보안 규정상, 밤에는 외래 방문객의 출입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강지현의 이름을 대며 신원을 밝혔음에도 소용이 없었다.김태하가 차 문을 열고 내리려던 바로 그 순간, 휴대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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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4화

강지현의 시선이 창밖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머물렀다.“그렇게 하겠다고 했어.”“그래.”김태하는 이유를 단 한마디도 묻지 않고 곧바로 답했다.“네가 진심으로 원해서 하는 일이라면 난 뭐든 지지해. 그게 얼마나 걸리든 난 언제까지고 널 기다릴 테니까.”그의 말에 강지현은 가슴 한구석이 찡해졌다. 순간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이내 묵묵히 미소가 번졌다.김태하라면 당연히 이렇게 말해줄 줄 알았다. 오직 그만이 그녀를 이토록 사무치게 그리워하게 만들고 한없이 유약하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다시금 단단하게 일어서는 힘을 주는 존재였다.“하지만 너무 무리하진 마.”김태하가 말을 이었다. 무언가 평소와 다른 이질감을 감지한 듯 그의 목소리에는 서서히 걱정 어린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어떤 일이든 내가 네 곁에서 함께 마주할 테니까.”“태하야...”강지현은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서둘러 흐르는 눈물을 훔쳐내며 속삭였다.“지금 당장 널 꼭 안고 싶다.”무심코 내뱉은 그녀의 진심 어린 한마디에 수화기 너머가 일순 깊은 정적에 잠겼다. 그녀가 잠시 숨을 죽이고 기다리다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찰나였다.“강지현, 보고 싶어.”갑작스럽게 남자의 음성이 귓가를 쟁쟁하게 울렸다. 김태하가 이토록 정중하고 진지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강지현이 나직하게 웃었다.“나도 보고 싶어. 내가 너보다 훨씬 더 많이 보고 싶어 할걸?”“정말이야?”김태하가 되물었다.“그러면 지금 당장 내가 네 눈앞에 나타난다면 기뻐해 줄 거야?”“당연하지.”망설임 없는 확고한 대답을 듣고서야 김태하의 눈가에 서려 있던 초조함이 완전히 가셔졌다. 그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나 지금 에덴 리조트 앞이야.”그 말을 들은 강지현은 몇 초간 완전히 넋을 잃고 굳어버렸다.그녀는 서둘러 반대편 테라스로 달려가 먼 곳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밤하늘은 그저 캄캄하기만 했고 저택의 부지가 워낙 광활했던 탓에 정문 외곽은 눈을 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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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5화

주호석은 강지현을 한참 동안 묵묵히 응시하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강지현은 겉으로는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으나 속으로는 가슴이 조마조마해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윽고 주호석이 입을 열었다.“그리하려무나. 사실 지현우 그 아이는 꽤 괜찮은 녀석이다. 지난번에 너를 보고 가더니 인상이 아주 좋았다고 하더구나. 게다가 진씨 가문 사람들에게 들으니 진작부터 너에게 꽤 마음을 쓰고 있었다더군.”강지현은 대꾸하지 않은 채 속으로 다른 계산을 굴렸다. 아무래도 주호석은 김태하가 이곳까지 왔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는 듯했다.만약 알고 있었다면 강지현이 밖으로 나가겠다고 했을 때, 두 사람이 접촉하지 못하도록 대놓고 제약을 걸었을 터였다.주호석이 그녀를 이곳에 붙들어 둔 본질적인 목적은 김태하와 떨어뜨려 놓음으로써 감정적으로 휩쓸리는 것을 막으려는 데 있었다.만약 이 자리에서 김태하를 만나겠다고 선언했다면 갈등의 골만 깊어지고 상황이 더 험악해졌을 것이다.결국 지금으로선 김태하를 비밀리에 몰래 만나는 수밖에 없었다.강지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호석은 그녀의 기분이 상한 줄로만 알고 말을 덧붙였다.“누구와 함께하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네게 어떤 가치를 가져다줄 수 있느냐지.”“애초 네가 주씨 가문으로 막 돌아왔을 때 김씨 가문에서 정략결혼을 제안해 왔었지. 국내 재계에서 네가 입지를 다지는 데 그 가문이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수 있을 거라 판단했기에 나 역시 그 혼사를 승낙했던 게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예전과 다르다. 만약 김씨 가문이 더 이상 우리의 동맹이 될 수 없다면 너 역시 새로운 동맹을 찾아보는 쪽으로 생각을 고쳐먹어야 할 게다.”주호석은 할 말을 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지현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비서에게 이따가 지현우를 만나러 갈 차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주호석이 나가자 입맛이 싹 사라진 강지현은 이내 수저를 내려놓았다.주씨 가문 사람들에게 김씨 가문은 그저 이용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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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6화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배아름의 눈빛에 미세한 경악이 스쳤다.‘역시 주씨 가문의 핏줄이라 그런지 태세 전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유부녀라며 철벽을 치고 거리를 두더니 회장님의 환심을 사려고 저렇게 지현우와 친한 척을 하다니.’“아름 씨는 굳이 안 따라 들어와도 돼요.”배아름이 회사 로비로 함께 발을 디디려던 찰나, 강지현이 쓱 고개를 돌려 그녀를 제지했다. 배아름이 멈칫 굳어지자 강지현은 화사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지 대표님과 나눌 이야기는 회사 기밀 사항이라 사람을 대동하기에 곤란해서요. 게다가 오후에는 지 대표님과 근처 구경도 좀 하고 같이 저녁 식사라도 하게 될지 모르는데 아름 씨를 온종일 밖에서 대기하게 만드는 건 예의가 아니죠. 그러니까 먼저 들어가 봐요. 일정이 끝나면 지 대표님이 절 데려다주실 테니까.”강지현이 눈짓을 보내자 지현우는 얼른 맞장구를 쳤다.“그래요. 오늘 같은 날에는 굳이 따라다닐 필요가 없겠네요. 모든 일정은 제가 회장님께 따로 보고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하루는 제가 책임지고 강지현 씨를 모실 테니까.”지현우는 눈꼬리를 아래로 접으며 배아름을 향해 말했다.상황이 이쯤 되니 배아름도 더는 고집스럽게 따라붙을 명분이 없었다. 그녀는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하지만 멀어져 가는 강지현과 지현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배아름의 마음 한구석에는 왠지 모를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난 먼저 돌아갈 테니 너희 두 명은 여기 남아서 들키지 않게 쥐 죽은 듯이 강지현을 계속 감시해.”“알겠습니다.”...“강지현 씨, 사실 프로젝트 건은 아직 서류 준비가 덜 돼서 오후에나 본격적으로 논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 오전에는 먼저 회사 내부를 가볍게 구경하고 아까 말씀하신 저녁 약속은...”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지현우는 기쁜 마음으로 열변을 토했으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지현이 단호하게 말을 끊어버렸다.“지 대표님, 정말 죄송한데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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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7화

주임 의사는 김태하의 상태를 세심히 진찰한 후, 평소 복용하는 약의 용량을 꼼꼼히 체크했다.본래 김태하는 약을 그리 많이 먹는 편이 아니었으나 오늘은 유독 통증이 심했던 탓에 임의로 복용량을 늘린 상태였다.지금처럼 위장이 완전히 비어 있는 데다 밤새 잠까지 설쳤으니 괴로운 증상이 나타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진단 결과 별다른 큰 이상이 없자 주임 의사는 주요 혈 자리를 꾹꾹 누르며 불쾌한 통증을 완화해 주기 시작했다.곁에서 그 손길을 가만히 지켜보던 여의사는 순간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녀가 아주 어릴 적 몸이 아플 때마다 치료해 주시던 아버지의 손길과 무척이나 닮았었다.과거에 아버지는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다.서양 의학은 당장 눈에 보이는 효과는 빠를지 몰라도 인간의 신체가 지닌 자생력은 되려 망가뜨리기 십상이라고.당장 눈앞의 병은 고칠지 몰라도 결국 사람 자체가 무너져 내리고 근원적인 생명력마저 와해시켜 자연스레 버텨낼 재간이 없어진다는 뜻이었다.그렇기에 아버지는 평생 치료의 완벽한 균형을 찾는 데 온 힘을 쏟으셨다.한의학 역시 병을 완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환자를 치료하겠다는 날것 그대로의 초심을 지키며 단순한 통증의 말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에 깃든 진정한 생명력을 다시금 일깨우는 데 목적이 있을 뿐이었다.여의사가 잠시 생각에 잠겨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주임 의사는 이미 김태하의 처치를 모두 끝마쳤다.“김 대표님.”방을 나서기 직전 여의사는 결국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의문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대표님의 병을 정말 사모님께는 비밀로 하실 생각이세요?”그 순간 김태하의 움직임이 굳어졌고 여의사의 곁에 서 있던 주임 의사는 소스라치게 놀라 황급히 그녀의 팔뚝을 억세게 내리치며 서슬 퍼런 눈빛으로 강한 경고를 보냈다.‘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고 내린 지시대로 분수를 지키며 철저히 본분에만 충실히 하라고 그토록 일러두었건만. 이 계집애는 왜 갈수록 사리 분별을 못 하는 거지?’“김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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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8화

김태하가 권위를 내려놓고 여의사에게 진지하게 속내를 설명하는 모습을 보며 곁에 있던 주임 의사 역시 깊은 감동을 받았다.세간에 명성이 자자한 이 남자는 매사 과단성 있게 일을 처리하는 냉철한 경영자였다.성격이 워낙 고고하고 타인과 거리를 두는 기질이 있어 사적인 친목이나 연회는커녕 여자조차 가까이하지 않는 인물이었다.겉보기엔 그 어떤 약점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인간이었기에 소문 속에서는 괴물처럼 악마화되기도 했다.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느니, 오직 이익만을 좇으며 타인에게 지독하리만치 엄격하고 가혹하다느니 하는 악명들이 대다수였다. 그만큼 범접하기 힘든 존재였던 셈이다.그러니 두 의사 모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외면 아래 이토록 깊고 다정한 온기가 숨겨져 있을 줄은.사실 김태하 본인조차도 자신이 언제부터 타인과의 교류에서 이토록 자연스럽게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는지 잘 알지 못했다.서서히 상념에서 깨어난 그는 다시금 강지현을 떠올렸다.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모나고 날카롭던 온몸의 가시를 내려놓았고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법을 비로소 배우게 된 덕분이었다.바로 그 순간, 객실 문밖에서 미세한 인기척이 들려왔다.김태하의 손끝이 마치 무언가를 감응한 듯 미세하게 떨렸다.강지현이 채 카드키를 도어락에 대기도 전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안쪽에서부터 번개처럼 먼저 열려 젖혀졌다.남자의 훤칠하고 거대한 체구가 차가운 바람을 몰고 들이닥쳤다.강지현이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은 익숙한 품 안으로 파묻혔다.김태하는 강지현을 부서질 듯 격정적으로 끌어안았다. 고작 며칠 동안의 이별이었음에도 그에게는 마치 한 세기를 건너온 것처럼 아득한 세월로 느껴졌다.“태하야...”그저 품에 안겼을 뿐인데도 강지현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애틋함이 왈칵 치밀어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김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세게 그녀를 안는 것만으로도 그의 감정과 불안은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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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9화

“그래, 이번 일정에 동행한 내 전담 의료진이야. 유지성 주임 의사, 그리고 여기는 보조 의사고.”의사들이 미처 대꾸하기도 전에 김태하가 강지현의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그의 음성과 다정한 눈빛에는 형언할 수 없는 부드러움이 깃들어 있었다.오직 강지현의 곁에 서 있을 때만큼은 만년설 같던 김태하도 온 세상을 비추는 봄볕처럼 따스하게 녹아내렸다.여의사는 김태하를 바라보며 묘한 상실감에 휩싸인 채 고개를 숙였고 유지성이 서둘러 말을 받았다.“급하게 일정이 잡혀 임시로 합류하게 된 터라 사모님께선 아마 저희를 처음 보셨을 겁니다.”“고생 많으셨어요.”강지현은 곧장 두 의사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이내 김태하의 현재 몸 상태에 대해 구체적으로 캐묻기 시작했다.비록 이곳으로 오기 전, 병원에서 김태하의 곁을 지키며 온갖 정밀 검사를 함께 받았고 당시 모든 수치가 정상으로 나와 사실상 완치 판정을 받았다.하지만 큰 병을 한 번 앓고 나면 면역력이 약해지기 마련이라 강지현은 의사만 마주하면 저도 모르게 강박적으로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유지성은 아주 자연스럽게 대처했다. 김태하의 건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그저 무리하지 않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 된다고 안심시켰다.그러나 옆에 있던 여의사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다행히 강지현은 여의사의 미묘한 이상 기류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두 의사가 객실을 빠져나가자마자 강지현은 다시 김태하의 곁으로 와 안도 섞인 미소를 지으며 그의 커다란 손을 꼭 쥐었다.“이번엔 착하네. 멀리 오면서 의사까지 야무지게 대동할 줄도 알고. 안 그랬으면 나 진짜 화냈을 거야.”방 안에 둘만 남겨지자 그제야 긴장이 풀린 김태하는 대담하게 손을 뻗어 강지현의 가냘픈 허리를 단숨에 낚아채더니 자신의 단단한 가슴팍으로 강하게 밀착시켰다.그리고 거의 입술이 맞닿을 듯한 거리에서 낮게 읊조렸다.“왜 화를 내?”“네가 마음대로 독단적으로 행동했잖아. 나한테 귀띔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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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0화

오히려 남성용 향수에 가까운 냄새였다.김태하 본인은 향수를 그리 즐겨 쓰지 않았으나 워낙 수많은 사교계 자리를 거쳐 온 터라 그 미세한 차이를 누구보다 명확히 분별해 낼 수 있었다.순식간에 그의 깊은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고 표정 역시 눈에 띄게 험악해졌다.강지현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김태하가 단단히 오해했음을 직감한 그녀는 황급히 두 손으로 그의 차가운 뺨을 감싸 쥐었다.“저거 내 옷 아니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마. 다른 사람 옷을 잠깐 빌려 입은 것뿐이야.”“다른 사람? 누구? 남자 옷이야?”김태하는 거의 무의식중에 질문을 퍼부었다. 평소라면 그 누구보다 차갑고 이성적인 그였으나 갑작스럽게 치밀어 오른 질투심은 그의 심장과 오장육부를 사정없이 뒤틀어 놓았다.설령 강지현이 자신을 배신할 리 없다는 걸 맹신하면서도 감히 어떤 존재가 그녀의 곁에 맴돌며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 자체가 그를 미칠 듯이 괴롭게 만들었다.김태하의 감정 변화는 지극히 노골적이었다. 강지현은 손끝을 통해 그의 전신 근육이 터질 것처럼 팽팽하게 굳어 들어가는 것을 생생하게 느꼈다.“진정해.”강지현은 김태하가 이성을 잃을까 봐 다급히 달래기 시작했다.“그냥 지인의 비서 옷이야. 난 얼굴도 못 봤고 옷만 빌렸어.”원래는 모든 사실을 이토록 빨리 털어놓을 생각이 없었으나 눈앞의 남자가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처럼 눈을 뒤집는 통에 그녀는 결국 침대 위에 몸을 일으켜 앉아 여기까지 온 자초지종을 차근차근 설명해 줄 수밖에 없었다.“그 말은, 회장님께서 나를 만나는 것을 금지했다는 뜻이야? 무슨 이유로?”질투에 눈이 멀었던 김태하의 머리 위로 순간 얼음물이 쏟아진 듯했다. 그의 얼굴 위에 순식간에 짙은 중압감이 겹겹이 내려앉았다.“그게... 할아버지가 지금 가문 내부에서 일어난 일을 조사하는 중인데 그 사안이 김씨 가문과 엮여 있는 모양이야.”강지현 역시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김태하를 이해시킬 수도, 속일 수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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