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전 태하의 아버지가 제 아버지를 해친 원수라는 말을 믿지 않아요. 여기에는 분명 무슨 오해가 있을 거예요.”긴 침묵 끝에 강지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녀는 복잡하게 얽힌 생각을 빠르게 정리한 뒤, 주호석의 곁으로 와 앉았다. 목소리와 태도는 한결 차분하고 부드러워져 있었다.엄경미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지현아, 오해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는 노릇이란다. 그런데 네가 이렇게까지 단정 짓는 걸 보니, 네 마음은 이미 진작에 김씨 가문 쪽으로 기운 모양이구나.”주호석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갈수록 험악하게 일그러졌다.노인의 호흡이 미세하게 가라앉자 주변의 공기마저 함께 얼어붙는 듯했고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이 사방을 짓눌렀다.엄경미의 이간질이 아주 제대로 먹혀들고 있었다.그녀의 말은 곧 주호석의 속내를 대변하는 것이었고 주호석은 지금 자신에게 명백히 깊은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다.“전 김씨 가문의 편을 드는 게 아니에요. 그저 제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 듣기 좋은 말은 얼마든지 늘어놓을 수 있어요. 하지만 전 할아버지 앞에서만큼은 오직 진실만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이에요.”강지현은 엄경미의 얄팍한 수작을 꿰뚫어 보았다. 그에 대응하는 그녀의 논리는 막힘없이 정연했으며 태도 또한 지극히 담대하고 여유로웠다.엄경미가 흠칫하며 굳어지자 강지현은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주호석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할아버지께서 제게 확실한 태도 표명을 원하신다는 걸 잘 압니다. 전 어릴 때부터 가문 밖에서 자랐고 할아버지와 깊은 교류를 나눈 적도 없으니, 할아버지가 이 손녀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시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에요.”“하지만 제가 사람과 일을 대할 때 지키는 철칙은 절대로 제 양심과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에요. 김씨 가문이 제게 진심으로 잘해주었기에 그 고마움을 마음 깊이 새겨둔 것이고 할아버지는 제 핏줄이시니 당연히 더 정성으로 대할 생각이고요. 그러니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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