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기억을 잃은 척할 때는 언제고: Chapter 301 - Chapter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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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1화

강하율은 피식 웃었다.“저 사람 안 죽였어요. 제가 범인이라고 의심되시면 증거를 가져오세요. 무고한 자에게 회유나 협박 하지 말고.”“강하율!”배윤제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기어코 감방까지 가시겠다? 그때는 후회해도 늦었어.”이내 경찰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법대로 처리하시죠.”경찰은 고개를 끄덕이며 현재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서류를 펼쳤다. 하지만 두어 줄을 읽더니 얼굴이 창백해졌다.“왜 아무 말씀 없죠?”배윤제가 버럭 화를 냈다.“안 봐주셔도 돼요. 어차피 본인이 호의를 거절하고 있으니까.”경찰은 고개를 들어 배윤제를 바라보며 난처한 듯 말했다.“그게... 기소정 씨 진술 보면 강하율 씨는 당시 김혜은 씨를 응급처치 중이었다고 합니다. 본인은 너무 무서워서 어머니를 안아 올리기만 했을 뿐, 강하율 씨가 계단 아래로 밀치는 장면은 못 봤다는데...”경찰은 말을 잇지 못하고 기소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지금 진술을 번복하신 겁니까?”“네.”기소정은 손수건을 집어 들고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닦아내는 시늉을 했다.“그날 너무 무서워서 하루 꼬박 앓아누웠거든요.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 제가 놓친 게 너무 많더라고요. 아무리 엄마를 죽인 범인을 잡고 싶어도 멀쩡한 사람을 억울하게 만들 순 없잖아요. 그래서 세부적인 내용을 다시 말씀드리러 왔어요.”“지금 장난하나!”기소정의 아버지 기형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통쳤다.“네 친엄마가 죽었는데 범인을 그냥 풀어주겠다고? 밤마다 꿈에 나타날까 봐 무섭지도 않니?”기소정은 손수건을 내려놓고 눈을 치켜떴다.“엄마가 아빠는 안 찾아가던가요? 어젯밤 제 꿈에 나타나서는 이번 생이 참 덧없고 허무하다고 하시던데.”기형만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딸이 하는 말의 뼈 있는 속뜻을 단번에 알아차린 것이다.그는 밖에서 낳은 혼외자식 때문에 줄곧 김혜은을 괴롭혀 먼저 이혼 서류에 도장 찍기만을 기다려왔다.다만 김혜은이 지금까지 꾹 참아낼 줄은 전혀 몰랐다.원래는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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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2화

차분한 음성이 들려오는 순간, 강하율은 드디어 반격의 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그녀는 사람들을 따라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배윤호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우연의 일치인지, 그는 강하율과 똑같은 디자인의 코트를 입었다.그전까지는 아무도 강하율의 옷차림에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의 등장과 동시에 사람들은 그녀가 지금까지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를 단번에 깨달았다.배윤제는 넋을 잃고 말았다.시선은 강하율과 배윤호 사이를 오갔고 저도 모르게 테이블 아래에 숨긴 손을 꽉 움켜쥐었다.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라와 통제하기 힘들 정도였다.“형, 요즘 호텔을 비워서 상황을 잘 모르나 본데...”“매일 호텔에 붙어 있다는 사람이 뭐라도 확실한 증거를 찾아냈나?”배윤호가 되물었다.배윤제는 어깨를 으쓱하며 냉소를 지었다.“형이 강하율을 감싸서 호텔 이미지를 좋게 만들고 싶으신 마음은 알겠지만...”이내 뜸을 들이며 강하율을 힐끗 쳐다보았다. 마치 배윤호가 그녀를 보호하는 건 오로지 호텔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려는 듯.“제대로 된 진술조차 못 하는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어?”이때, 경찰이 한마디 거들었다.“맞아요. 강하율 씨 진술이 자꾸 바뀌거든요. 무언가 숨기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 봅니다.”배윤호는 아무 말 없이 강하율을 쓱 쳐다보더니 옆자리에 앉았다.“밤공기가 찬데, 춥지는 않아?”“견딜만해요.”강하율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러다 사람들이 오해할까 봐 서둘러 한마디 덧붙였다.“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두 사람의 뜬금없는 대화에 주변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그때, 또 다른 경찰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호텔 직원이 자수하러 왔어요. 주방 소속 요리사인데, 강하율 씨를 짝사랑하다 거절당한 뒤 앙심을 품고 생강차에 할머니가 드시던 정신과 약물을 몰래 섞었답니다. 그것 때문에 강하율 씨가 잠시 정신이 몽롱해져 기억이 뒤섞였던 모양이에요. 자, 여기 강하율 씨 혈액 검사 결과지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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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3화

기형만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오해야! 당시 기획안을 상의하던 중, 경선희가 바닥에 쏟아진 찻물에 발을 헛디뎌 넘어졌을 뿐이라고. 상식적으로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이 직원들이 들락거리는 평일 대낮 사무실에서 그러고 싶겠니?”강하율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그는 전부 알고 있었지만 지난 10년 동안 자기 아내에게 단 한 마디의 해명조차 하지 않았다.김혜은이 그녀의 어머니를 비방하도록 방치한 채로.이런 부류의 남자들에게 불륜이라는 오명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모양이었다.오히려 두 여자가 자신을 사이에 두고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상황을 즐기기까지 하는 것 같았다.강하율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테이블 아래에서 배윤호가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고개를 돌리자 담담한 눈빛을 마주쳤다. 마치 진정하라고 신호를 보내는 듯했다.마음을 추스른 강하율이 정다인을 차갑게 쏘아보았다.기형만이 말을 이었다.“정다인 씨는 그렇다 쳐도 배윤제 씨까지 모를 리 없잖아요. 강하율 부모님이랑 워낙 각별한 사이 아니었나요? 경선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묵묵부답하는 배윤제의 안색이 몹시 어두웠다. 사람들 앞에서 뺨이라도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상황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눈치챈 정다인이 잽싸게 억울한 티를 냈다.“회장님, 이미 돌아가신 분인데 말하기 나름이죠. 사모님 생각은 다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아니면 뭐 하러 강하율 씨를 그 외진 뒷산까지 불러냈겠어요?”배윤제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이내 서늘하고 음침하게 가라앉았다.“강하율, 적당히 해. 그런 변명으로 네 결백이 증명될 것 같아? 제발 억지 좀 부리지 마. 이제 부모님까지 손가락질받게 할 작정이야?”“이런 상황을 만든 건 대표님 아니었어요?”강하율은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외투에 달린 브로치를 떼어내며 차분하게 말했다.“이게 내 증거예요.”그동안 하도 많이 당해서 무방비 상태로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호텔 유니폼이 워낙 단조로운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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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4화

강하율은 당일 경찰서를 나섰다.서류에 사인하던 중, 생강차를 끓였던 요리사와 마주쳤다.걷는 모양새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웠다. 강하율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의 눈에 경악과 공포가 서렸다.강하율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내가 뭐 귀신이라도 되나?’“뭘 봐?”목소리의 출처를 따라 돌아보니, 어느새 배윤호가 뒤에 서 있었다.즉, 요리사가 겁에 질린 대상은 그녀가 아니라 이 남자였던 것이다.강하율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요리사의 바짓가랑이 아래로 액체가 흘러나와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배윤호가 얼마나 무서우면 젊고 건장한 사내가 소변까지 지린단 말인가.그녀가 혀를 내두르려던 찰나, 커다란 손에 두 눈이 가려졌다.“보지 마. 정문에 기자들 깔렸으니까 쪽문으로 나가자.”강하율이 고개를 끄덕였다.“네.”대답을 마치고는 안혜슬과 함께 배윤호를 따라 쪽문으로 향했다.두 사람 사이의 묘한 기류를 눈치챈 안혜슬이 재치 있게 끼어들었다.“저... 배가 좀 고파서 뭐 좀 사 먹고 가려고 해요.”“하율아, 이따 집에서 봐!”그리고 강하율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이때 양승아가 차를 세우고 문을 열며 말했다.“어서 타세요. 기자들이 몰려오고 있어요.”강하율은 어쩔 수 없이 차에 몸을 실었다.돌아가는 길, 긴장이 풀리자 노곤함이 밀려왔지만 머릿속은 온통 의문으로 가득했다.“윤호 오빠, 그 요리사 찾아갔었어요?”“응.”배윤호가 무심하게 대답했다.“대체 뭐라고 했길래 바로 자수를 한 거죠?”“별말 안 했어. 몇 마디 일러줬을 뿐.”운전하던 양승아는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물론 사실이었다.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줬으니까.단호한 칼질로 힘줄을 끊어내고, 덤으로 남자구실 못 하게 할 직전에 간신히 멈췄다.자신이 모시는 상사는 그나마 강하율 앞이라서 말이 많은 편이지, 평소라면 입을 열 필요도 없었다.강하율은 당최 믿음이 가지 않았다. 배윤호의 잔혹한 모습을 직접 본 게 어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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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5화

배윤호가 고개를 돌렸다.“왜?”강하율은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지난번 고백 영상 때문에 난리가 났잖아요. 그런데 이런 자리에 저를 데리고 가면 또 말이 나오지 않을까요?”“겁나?”강하율이 중얼거렸다.“아니요. 전 단지 윤호 오빠가 걱정돼서...”“이건 우리 둘 문제야. 남들이 뭐라고 하든 무슨 상관이지?”“...아, 네.”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배윤호의 제안을 수락한 뒤였다.대체 언제부터 ‘우리 둘’이 된 거지?곁눈질로 힐끔거리자 배윤호가 계속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하지만 차마 마주 볼 엄두는 나지 않았고, 그의 시선이 닿는 뺨이 화끈거리는 것만 같았다.강하율은 한참이 지나서야 애써 침착한 척 화제를 돌렸다.“그나저나 기소정은 무슨 수로 이렇게 빨리 설득한 거예요? 당연히 내일 아침까지는 걸릴 줄 알았는데.”“김혜은이 너한테 정보를 주겠다고 한 건 단순히 조익현을 제거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자기 딸 때문이었지. 기소정은 엄마가 왜 무리수를 뒀는지, 그 속뜻만 알아차리면 돼. 너를 감옥에 보내거나 이번 기회에 집안 권력과 재력을 꽉 거머쥘지는 충분히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기소정과 강하율은 사실 대단한 원수 사이도 아니었다.괜히 남을 도와 그녀를 상대하는 데 힘을 빼느니, 차라리 김혜은이 마지막으로 남겨준 울타리 안에서 기씨 가문의 실속을 최대한 챙기는 게 이득이었다.적어도 기형만이라는 인간 말종을 응징한 이상 그나마 김혜은도 눈을 편히 감았을 터였다.강하율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기소정이 평생 호의호식하며 지낼 수 있게 됐고, 부부 공동 재산이 사생아에게 흘러가는 것도 막았으니 김혜은 입장에서는 분명 바랄 게 없는 결과였을 것이다.하지만 꼭 이렇게 허망하게 죽어야만 했던 걸까?“혹시... 다 저 때문은 아닐까요? 사실 그분, 처음엔 우리 엄마 얘기 꺼내는 거 진짜 싫어하셨거든요. 그런데 결국 이 지경까지 왔네요.”강하율은 자책감이 밀려왔다.“뒷산은 김혜은이 직접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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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6화

정다인은 심문실에서 나오자마자 임현서 어머니의 뒷모습을 발견했다.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이번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 여긴 무슨 일이지?하지만 그 실루엣이 다시 나타났을 때, 손가락에서 번쩍이는 비취반지가 눈에 들어왔다.지난번 기씨 가문이 주최한 연회에서 틈만 나면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보여주던 그 반지였다.그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는 듯 쪽문으로 빠져나갔다.설마 김혜은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걸까?그때, 차가 급정거하면서 정다인의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정신을 차려보니 배윤제는 이미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였다.“뭐야!”평소 여유롭고 거침없던 남자가 이토록 서슬 퍼렇게 날뛰자 차 안의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눈치를 살폈다.정다인은 여자친구로서 어떻게든 그를 달래려 애썼다.“윤제 씨, 이 구간이 원래 좀 막히잖아요. 장 비서님한테 다른 길로 돌아가 달라고 하면 되니까 너무 화내지 마요.”배윤제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정다인은 겁에 질린 나머지 찍소리도 못 냈다.잠시 정적이 흐른 뒤, 배윤제가 눈가를 주물렀다.“김혜은의 죽음이 석연치 않아. 나중에 어떤 결론이 나든 태반이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식이겠지. 우리 호텔에서 벌어진 일이니까 둘 다 각별히 주의 깊게 살펴봐. 곧 연말이라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있을지도 모르니.”정다인 앞에서 대놓고 이런 말을 하는 건, 그녀를 특별히 신뢰해서가 아니었다.호텔 경영권이 배윤호에게 완전히 넘어가게 될 경우, 부총괄 자리도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경고하려는 목적이 컸다.배윤호가 해고한 사람을 세원시에서 감히 채용할 이는 없을 테니까.자신의 여자친구로서 어찌 그런 망신을 당하게 두겠는가.정다인도 그의 속뜻을 깨닫고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이 있어도 전 윤제 씨 편인 거 아시잖아요.”“그래. 당분간 다들 자중하도록 해.”그날 밤, 배윤제는 정다인을 데려다준 뒤 본가로 향했다.집사가 이미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도련님, 어르신께서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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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7화

“아니요. 하율은 분명 받아들일 겁니다. 4년이나 몰래 곁을 지켜왔는데, 어릴 적 기억 때문이라도 절대로 저 포기 못 해요. 지금은 그저 제가 다인이랑 같이 있는 게 속상해서 심술 부릴 뿐이에요.”배윤제가 단호하게 말했다.명혜숙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꾸했다.“그래,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네가 최근 들어 부쩍 서두르더니 결국 윤호한테 호텔 경영권까지 내주고 말았잖니. 이건 아주 안 좋은 징조야. 우선은 사람들 입부터 막아야 해. 연말 되기 전에 다인이랑 먼저 약혼해. 그러면 강하율 건은 일단 덮어두마.”“...알겠습니다.”배윤제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살다 살다 강하율 때문에 타협하는 날이 올 줄이야.그녀가 이 사실을 안다면 분명 기뻐할 터였다.이내 본론으로 돌아가 물었다.“할머니, 김혜은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기씨 가문 사람들도 결코 깨끗한 부류는 아니지. 기소정이 그동안 조익현 때문에 적을 만든 게 어디 한둘이더냐. 이제 와서 손을 뗐을지 몰라도, 원한을 품은 자들이 그리 쉽게 물러나지는 않을 거야.”명혜숙이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기씨 가문과 친분이 있는 기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배윤제는 더 물어봤자 무용지물임을 알았고, 이 정도까지 말한 이상 일단락된 것으로 판단했다.“그렇군요.”명혜숙은 초대장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경매 행사다. 윤호도 올 테니 사람들 앞에서는 친한 척이라도 해. 형제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이 나게 해서는 절대 안 돼. 가는 김에 다인이도 데려가서 얼굴 좀 비추고, 좋아하는 것도 몇 개 사주거라. 적어도 너희 관계가 돈독하다는 걸 남들에게 보여줘야지.”“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배윤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돌아가는 길에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펍에서 모이기로 약속했다.명혜숙은 멀어지는 손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이내 문밖을 향해 한마디 던졌다.“들어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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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8화

안혜슬은 텅 빈 선반을 보며 수군거리는 두 남자를 발견했다.양승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안혜슬 씨랑 강하율 씨는 절친이 따로 없다면서요? 그럼 서로에 대해 아주 잘 아시겠네요?”안혜슬은 고개를 끄덕이려다 문득 배윤호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랐다.평소에는 어리바리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만큼은 눈치가 백 단이었다.“당연하죠.”그리고 잽싸게 말을 이었다.“하율은 졸업하자마자 호텔에 입사해서 줄곧 일만 했죠. 워커홀릭이라 사생활도 단조로운 편이고.”양승아가 혀를 찼다.“에이, 어디서 시치미죠?”“연애 문제만 빼고요.”안혜슬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을 쏟아냈다.“하율이 가정 형편은 두 분도 아시다시피, 10대 때 배씨 가문에 얹혀살게 되었죠. 아무리 명문가라 해도 결국 남의 집이라 어린 나이에 불안함을 느끼는 건 당연해요. 그 와중에 지극정성으로 잘해주는 남자가 나타나면 진짜 행복인 줄 알고 덜컥 믿어버리는 거예요. 결과적으로는 완전 쓰레기 같은 놈이었지만요.”“다행히 하율이가 순한 양처럼 당하고만 있는 성격이 아니라서 단칼에 잘라내긴 했어요. 그래도 몇 년이나 만난 사이잖아요. 입으로는 괜찮다고 해도 사람 마음 가지고 놀아난 그 기분이 오죽 더럽겠어요?”“그런데 누군가 말해줬죠. 가장 힘들었을 때 상대방이 베풀어준 호의가 사실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고. 하율한테는 지금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할 뿐이에요.”이내 배윤호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남자답게 이런 이야기쯤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칠흑같이 어두운 두 눈 속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양승아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그럼 강하율 씨가 마음 정리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안혜슬은 눈을 깜빡이더니 짓궂게 되물었다.“양 비서님, 설마 하율한테 관심 있어요?”“아니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양승아는 펄쩍 뛰며 부인했다.“관심 있어도 줄부터 서야 할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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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9화

배윤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치킨쯤이야, 남들 다 먹는 걸 저라고 못 먹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확답을 들은 강하율은 음식을 식탁으로 옮기고 사람들에게 맥주를 한 캔씩 나눠주었다.안혜슬이 맥주캔을 치켜들며 외쳤다.“자자, 오늘은 상사 그런 거 없어요!”“하율아, 큰 고비 넘겼으니까 앞으로는 꽃길만 걷자. 건배!”강하율은 미소를 지으며 캔을 치켜 올렸다.고개를 드는 순간, 문득 배윤호와 눈이 마주쳤다.“고마워요.”“응.”배윤호가 나지막이 대답하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그러자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묘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꽤 매력적인 모습이었다.마음 같아서는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을 정도였다. 그랬다면 분명 비싼 값에 팔 수 있었을 텐데, 차마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치킨을 먹기 시작하자 배윤호와 양승아는 유독 조심스럽게 행동했다.하지만 그렇게 점잖게 굴어서야 어떻게 제대로 즐길 수 있겠는가.두 사람은 닭 다리를 손에 쥔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안혜슬이 웃음을 터뜨렸다.“아니, 음식 두고 제사라도 지내시게요? 자, 일단 한 입 크게 물어보세요.”양승아는 반신반의하며 닭고기를 입에 가져다 댔다.순간, 안혜슬이 한 손으로 그의 손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를 고정하더니 힘껏 잡아당겼다.“하하하! 양 비서님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귀여운데요?”안혜슬은 양승아의 입가에 묻은 튀김 가루를 가리키며 웃음을 터뜨렸다.양승아는 입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근데 이렇게 먹으니까 확실히 맛은 있네요.”말을 마치고는 배윤호 쪽을 몰래 살폈다.강하율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를 향했다.배윤호는 들고 있던 닭 다리를 내려놓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감히 내 몸에 손대지 말라는, 소리 없는 위압감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강하율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내 닭 다리를 건네받아 젓가락으로 고기를 발라서 접시에 담아주었다.“자, 상전님. 드시죠.”맞은편에서 입가에 기름칠을 잔뜩 한 채 고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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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0화

딱 떨어지는 정장 바지에 주름이 칼같이 잡혀 있었고, 위로 올라갈수록 흩날리는 하얀 연기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뿌연 담배 연기 너머로 남자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서늘한 기운을 내뿜었다.“미안, 새 걸로 바꿔줄게.”하지만 미안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였다.오히려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처럼 느껴질 정도였다.생각에 잠긴 찰나, 눈앞의 연기가 흩어지며 남자가 불쑥 허리를 숙여 다가왔다.강하율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뺨 위로 온기가 전해졌다.배윤호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가를 가볍게 문질렀다.“칠칠하지 못하게.”“네?”강하율은 조금 전 자신도 치킨을 들고 뜯어 먹었다는 사실이 번뜩 떠올랐다.순간 당황한 나머지 급히 일어서려다 하마터면 배윤호의 얼굴에 부딪힐 뻔했다.그를 피하려던 몸이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가기 직전, 배윤호가 재빨리 손을 뻗어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코끝에 옅은 담배 냄새가 맴돌았다.때마침 인기척을 듣고 무슨 일인가 싶어 달려온 안혜슬과 양승아는 두 사람이 껴안고 있는 모습을 맞닥뜨리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급히 뒷걸음질 쳤다.“전 아무것도 못 봤어요!”“저도 마찬가지예요.”강하율은 후다닥 몸을 바로 세우더니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윤호 오빠, 그거 백만 원이 넘어요.”“알았어.”곧이어 송금 완료 문자가 떴다.안혜슬과 양승아는 어이가 없었다.돈 얘기는 역시 분위기 깨는 법이다.뒷정리를 마친 뒤 배윤호와 양승아는 집을 나섰다.강하율과 안혜슬도 대충 씻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안혜슬이 옆에서 중얼거렸다.“하율아, 아까 전화한 거 누구였어?”강하율은 방금 있었던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털어놓았다.“뭐라고?”안혜슬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내 이럴 줄 알았어. 배윤제가 순순히 포기할 사람이 아니지. 네가 죽자 살자 매달렸으면 오히려 질려서 도망갔을 텐데, 지금처럼 아예 본체만체하니까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 거야. 이건 대놓고 도전장 내미는 꼴이잖아.”“마음대로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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