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의 모든 챕터: 챕터 631 - 챕터 640

682 챕터

제631화

해인은 더 이상 숨길 생각이 없었다. 유호가 사라진 지 보름이나 지나서, 해인의 인내심도 이미 바닥나 있었다.시간이 흐를수록 유호가 더 위험해질지도 몰랐다.“예태상 씨의 실험실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했어요. 그동안 당신이 한 일, 전부 제 눈으로 봤어요.”그 말을 들은 태상은 잠시 흠칫하더니 이내 웃었다.태상은 화를 내기는커녕 해인을 바라보는 눈빛이 더없이 부드러웠다.“해인 씨, 왜 굳이 몰래 지켜봤어요? 제가 매일 뭘 하는지 알고 싶었으면 전화 한 통이면 되는데요.” “그럼 제가 바로 말해 줬을 텐데요. 이렇게 번거롭게 굴 필요 없이요.”태상의 감정은 지나치게 안정되어 보였다. 해인이 무슨 짓을 해도 절대 화내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다.바로 그래서 해인은 더 섬뜩했다.해인은 태상의 말꼬리를 붙잡고 물었다.“그럼 제 남편이 어디 있는지도 말해 줄 수 있겠네요?”태상의 시선이 해인의 새하얀 목덜미에 조용히 머물렀다.빛이 닿는 순간 투명하게 비칠 듯한 고운 피부였다. 희고 고운 살결은 달빛을 머금은 듯 맑고 깨끗했다.태상의 목젖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겨우 시선을 거두면서 말했다.“저를 너무 대단하게 보는 거 아니에요? 제가 손을 해외까지 뻗어서 그런 큰 테러를 혼자 꾸밀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제 실험실 하나도 못 지키고 이렇게 됐겠어요?”해인이 미간을 좁혔다.“그 말은... 도와준 사람이 있다는 뜻이에요?”태상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역시 내가 좋아하는 여자야. 이렇게 똑똑하고 영리해!’해인이 다시 물었다.“예태상 씨, 아직도 저 좋아해요?”태상은 멈칫했다. 해인의 질문이 너무 돌직구라서 미처 대비할 틈이 없었다.태상의 시선이 다시 해인에게 내려앉았다. 머리카락 끝에서 눈썹, 눈, 마지막으로 연한 핑크빛 입술까지 천천히 훑었다.태상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맑게 가라앉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좋아해요.”‘꿈속에서조차 갖고 싶은데...’해인은 태상의 눈빛을 읽었다.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욕망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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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2화

모든 짐이 한꺼번에 태상의 어깨 위로 쏟아졌을 때, 이전까지 품고 있던 이상적인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예철진은 이제 죽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혼자 떠나 버린 뒤, 태상은 누구를 미워해야 할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그는 살아 있어도 사는 것 같지 않았다.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벌어 오는 기계로 전락했을 뿐이었다.희망은 전혀 없는 삶에 태상은 질릴 대로 질려 있었다. 그래서 아주 짧은 기쁨이라도 손에 쥐고 싶었다.바로 지금, 사랑하는 여자가 태상의 눈앞에 있었다. 태상은 갑자기 해인의 양어깨를 움켜쥐었다.태상은 해인을 품 안으로 끌어당기면서 감싸 안았다.“방금 제 모습을 보고 무서웠어요?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겁먹지 말아요. 그것 때문에 저를 멀리하지도 말고요.”태상은 진심으로 두려웠다. 해인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겁먹은 채 연락을 끊어 버릴까 봐...갑작스러운 포옹에 해인이 미간을 찌푸렸다.해인은 태상을 밀어내려 했지만, 태상의 힘은 지나치게 강했다.태상은 눈앞의 여자가 자기 시야에서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필사적이었다.해인은 막 아이를 낳은 몸이었다. 힘도 이미 다 빠졌고, 기력도 돌아오지 않았다. 힘으로 버티는 건 무의미하다는 걸 알기에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다.해인이 거칠게 밀어내지 않자 태상의 가슴이 벅차올랐다.태상은 해인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대로 자기 몸 안에 밀어 넣고 싶은 사람처럼.해인의 몸에서는 은은한 향이 났고 여린 몸은 부드러웠다. 짧은 포옹 하나만으로도 태상은 기쁨과 흥분을 주체하기 어려웠다.‘해인과 함께 살게 된다면 매일 내가 얼마나 행복할까? 얼마나 즐거울까?’태상은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 있었다. 눈앞의 해인이 한 손을 코트 주머니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태상의 감정이 가장 들떠 있을 때, 해인은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태상의 가슴에 갖다 댔다.태상이 이상함을 느꼈을 때에는 이미 차가운 총구가 급소를 겨누고 있었다. 방아쇠만 당기면 태상은 그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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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3화

해인은 권총을 꽉 움켜쥐었다.태상이 쉽게 협박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예상했다.그래도 태상의 태도가 너무도 무르지도 단단하지도 않게 버티는 바람에, 해인은 총까지 겨눌 수밖에 없었다.해인이 잠깐 멈칫한 사이, 태상이 눈을 번쩍 뜨더니 해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뭐 하는 거예요?”해인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방아쇠를 당겼다.하지만 권총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해인 씨는 저를 쏘지 못해요.”태상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했다.“안전장치도 풀지 않았는데, 어떻게 저를 죽일 수 있겠어요?”해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물건을 다뤄 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그런 장치가 있는지도 몰랐다.태상은 해인의 손목을 잡아 다시 자기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한유호가 뭐가 그렇게 좋아요? 해인 씨가 그렇게까지 놓지 못할 만큼? 한유호가 해 줄 수 있는 건... 저도 전부 해 줄 수 있어요.”“저를 좀 봐 주면 안 돼요? 해인 씨가 예전에 고태겸을 버리고 한유호를 사랑했듯, 지금은 한유호를 버리고 저를 사랑할 수도 있잖아요.”그 말은 해인에게 혐오감만 안겼다. 그런 가정은 성립될 수 없었다.해인과 태상은 절대 있을 수 없는 관계였다.그러나 발사되지 않는 총은 장난감과 다를 바 없었다. 권총은 태상의 손에 빼앗겼고, 태상은 빼앗은 권총을 문가 쪽으로 걷어찼다.“당신이 원하는 건 저잖아요. 원하는 대로 해 줄게요. 저는 유호 씨가 어디 있는지만 알면 돼요.” “예태상 씨, 어디서 하고 싶어요? 이 소파, 아니면 침대예요? 전부 맞춰 줄게요.”태상이 굳어졌다. 해인의 말은 태상을 놀라게 했다. 동시에 태상의 온몸과 머릿속을 전에 없던 흥분으로 가득 채웠다.태상의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시선은 해인의 창백한 입술에 닿아 있었다.“정말 그래도 돼요?”해인은 눈을 내리깔았다. 아이를 막 낳은 몸은 눈에 띄게 지쳐 보였지만, 망설이지 않았다.“네.”어렵게 침을 삼키면서, 태상은 해인의 얼굴에서 가까스로 시선을 떼어 냈다.“해인 씨가 그렇게 말해 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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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4화

‘유호 씨... 칩은 꺼냈을까? 다친 곳은 없을까?’‘무사했다면, 왜 거의 한 달 동안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지?’해인의 머릿속은 의문으로 가득했다.해인은 멀지 않은 곳에 선 유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눈물이 뺨을 적시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유호가 한 걸음씩 안으로 들어오자 해인은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그녀는 눈앞의 모든 것이 환상일까 봐 두려웠다. 눈을 깜빡이면 꿈속에서처럼 다시 사라질 것만 같았다.하지만 유호는 살아 있었다.유호의 움직임은 민첩했다. 걷는 모습에도 문제는 없어 보였다. 모든 것이 멀쩡해 보였다.해인은 겨우 한숨을 돌렸다.전에는 유호의 머릿속에 박힌 칩 때문에 계속 괴로워했다. 하지만 지금은 살아 있다는 사실에 비하면 다른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해인에게는 유호가 살아 있기만 하면 됐다.태상의 뒷머리에서 흐른 피가 아이보리색 소파를 더럽히고 있었다.하지만 몸 절반은 아직도 해인을 누르고 있었다.유호의 시선이 태상을 스쳤다. 숨이 짧게 멎으면서,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워졌다.곧이어 유호의 시선이 해인의 얼굴에 닿았다.해인의 얼굴은 너무나 창백했다. 입술에도 핏기가 없었다. 막 출산한 뒤 지친 사람처럼 바람만 스쳐도 쓰러질 듯했다.‘애 낳은 지 얼마나 됐다고 산후조리는커녕 여기까지 와서 이 자식하고 뭘 하고 있는 거야.’‘몸 다 망가뜨릴 작정이야? 지금 몸조리 잘못하면 평생 고생할 수도 있다는 거 몰라?’유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표정은 몹시 험악했다. 하지만 태상을 바라보는 눈에는 살기가 서렸다.유호는 허리를 숙여 문가에 떨어진 권총을 주워들었다.해인은 안전장치가 걸려 발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린 유호가 빠른 손놀림으로 권총을 쥐었다. 목소리는 온기 하나 없이 차가웠다.“예태상, 감히 내 여자를 건드리려고 해? 내가 정말 죽은 줄 알았어?”유호는 권총을 장전했다. 허공에서 가볍게 겨냥한 뒤, 망설임 없이 태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그 모습을 보자 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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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5화

태상의 속마음을 해인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태상은 의대에 갈 만큼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유호의 손에 넘어가면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을 터였다.해인의 말에 유호의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았다.‘서두를 필요는 없지. 나중에도 처리할 시간은 충분하니까.’해인은 소파에 힘없이 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유호는 자신의 코트를 벗어 조심스럽게 해인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마르고 여린 몸이 코트 안에 힘없이 감겼다.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지금은 침대에 누워 몸을 추스를 때였다. 그런데 해인은 아이를 낳자마자 유호 때문에 여기까지 달려왔다.유호는 미안한 마음에 가슴이 아팠다.그는 허리를 숙여 해인을 품에 안았다. 그제야 해인이 얼마나 가벼운지 실감했다. 출산 후라면 남아 있을 법한 붓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 손으로도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 야윈 몸이었다.해인의 몸은 차가웠다. 손끝에도 온기가 없었다. 유호는 미간을 찌푸린 채 흔들리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여보...”유호는 사랑하는 여자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유호의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일단 병원으로 가자.”해인은 유호의 품에 기댄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익숙한 품이었다. 너무 익숙해서, 그 안에 있으니 마음이 놓였다.유호는 피범벅이 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태상을 차갑게 노려보았다.“네 처분은 잠시 미뤄 두지. 돌아와서 마저 처리하겠어.”해인을 대할 때와는 달리, 유호의 눈빛은 음산할 만큼 차가웠다.태상의 부상은 심각했다. 어깨에는 총상이 있었고, 차가운 단검이 살을 찢고 깊숙이 박혔었다. 태상의 한쪽 발은 이미 저승 문턱에 닿은 듯했다.머리는 여전히 어지러웠다. 한동안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입을 열면 붉은 피가 먼저 차올랐다.시야 안에서 두 사람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태상의 눈 밑에 쓴웃음이 번졌다.‘한유호가 어떻게 돌아왔지?!’‘해외에서 벌어진 그 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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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6화

“이 바보야. 아이를 낳은 지 얼마나 됐다고 몸도 안 챙기고 예태상한테 간 거야?”유호의 미간은 깊게 패여 있었다. 눈에는 애처로운 기색이 가득했다.‘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이었어.’‘이 여자... 지금 자기가 몸조리해야 할 때라는 건 알고 있는 거야?’‘산모는 찬바람도 함부로 쐬면 안 된다는 말도 있는데...’‘몸조리를 잘못해서 후유증이라도 남으면 어쩌려고 이렇게 자기 몸을 함부로 굴리는 거야?’해인은 한 달 전보다 눈에 띄게 야윈 유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남자의 턱선은 더 또렷해져 있었다.해인은 손을 들어 유호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졌다.‘정말 내가 알고 있는 그 한유호야...’‘유호 씨는 죽지도 않았고, 다치지도 않았어.’‘이렇게 멀쩡히 내 눈앞에 나타나 나를 품에 안고 있는데...’유호에게서 나는 익숙한 향이 해인의 마음을 깊이 안정시켰다.해인은 손을 들어 유호의 굳게 찌푸린 미간을 천천히 펴 주었다.“나 괜찮아. 자연분만이라 회복도 빨라. 아이 낳고 바로 걸을 수도 있었어. 그냥 조금 기운이 없을 뿐이야.”유호는 그 말을 믿는 얼굴이 아니었다.“그래도 네 몸부터 챙겼어야지.”해인은 이 이야기를 더 이어 가고 싶지 않았다. 질문을 유호에게 돌렸다.“당신... 정말 내 남편 한유호지...?”해인은 유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양손으로 유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익숙한 단단함이었다.옷 너머로도 해인은 유호의 가슴과 복부의 선을 느낄 수 있었다.유호가 그 폭발에서 죽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해인의 마음은 전에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다시 살아 돌아온 것 같은 안도감이었다.유호의 가슴에 이마를 비비면서 해인의 눈가가 붉어졌다.긴 시간 이어진 걱정과 불안, 눌러 두었던 마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올 곳을 찾은 듯했다.“무사했으면 왜 미리 연락 안 했어? 내가 그동안 얼마나...”말을 잇던 해인의 목이 메면서 더 이상 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해인은 유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참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을 수가 없었다.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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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7화

사고가 워낙 갑작스러워서 주헌은 정신을 차릴 틈도 없었다. 한편으로는 유호를 돌봐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친 경호원들을 수습해야 했다.다시 표적이 될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주헌은 함부로 자신들의 행방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래서 겨우 허름한 민가 하나를 빌렸다.그 폭발은 너무 참혹했다. 몇 분 전만 해도 말을 나누던 사람이 다음 장면에서는 무너진 더미에 깔려 피와 살이 뒤엉킨 채 쓰러져 있었다. 주헌의 마음도 편할 리 없었다.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게 될까 봐, 그동안 병원에도 가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유호를 돌봐야 했다.하지만 의학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막 수술을 마치고 생체 징후를 꼼꼼히 지켜봐야 하는 환자를 돌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유호가 처음 깨어났을 때, 유호는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헌은 한때 수술이 실패한 줄 알았다.다행히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 예상보다 늦어지기는 했지만 유호는 점차 회복됐다.어젯밤 늦게, 유호는 꼬박 사흘 동안 잠든 뒤에야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며칠 전 흐릿하게 깨어났던 때와는 달랐다. 이번에는 완전히 정신이 돌아온 상태였다.깨어나자마자 유호가 가장 먼저 물은 것은 날짜였다.해인의 예정일이 거의 다 되었다는 말을 듣자, 유호는 곧바로 주헌에게 귀국 항공권을 끊으라고 했다. 쉬지도 않은 채 곧바로 귀국했다.해인은 유호의 몸을 몇 번이나 살피면서, 불안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다친 데 없어?”유호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문제는 너야.”유호는 해인을 더 꼭 끌어안았다. 해인을 자기 안으로 감싸 넣고 싶은 사람처럼.“내가 못나서 우리 아이가 태어나는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어. 여보, 혼자 고생하게 해서 미안해.”원래 예정일대로라면 해인은 이틀 뒤에 출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조금 일찍 태어났다.해인은 유호가 분만 때 함께했는지 아닌지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유호가 무사히 살아 있는 것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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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8화

애리는 잠시 멈칫했다가 진심으로 해인을 위해 기뻐했다.해인의 배가 납작해진 걸 보자, 전날 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해인에게서 전화를 받았던 일이 떠올랐다. 애리는 무심코 해인의 뒤쪽을 바라보았다.“아이는 낳았어? 미안해. 어젯밤 수술이 너무 길어서 너를 챙기지도 못했어. 괜찮아? 아기는?”의사의 시간은 원래 자기 것이 아니었다. 애리는 수술에 묶여 있었을 뿐이었다. 해인은 서운해하지 않았고, 애리를 탓할 마음도 없었다.“아기는 건강해. 영지 씨가 봐 주고 있어.”유호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해인이부터 검사해 주세요. 어제 헬기 안에서 아이를 낳아서 걱정됩니다.”헬기에 탔던 의료진은 유호가 직접 찾은 사람들이라 믿을 수 있었다. 그래도 출산 장소가 병원만큼 완벽할 수는 없었다.애리는 더 묻지 않았다. 곧바로 산부인과 의료진을 불러 해인을 진료하게 했다.10분 뒤, VIP 병실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 모였다.병원 산부인과 전문의와 교수들이 전부 유호에게 불려왔다.한 병실에 교수만 5명이 들어찼다. 각자의 뒤에는 커다란 팀이 따라붙었다. 의사, 인턴, 전공의까지 모이는 바람에 병실이 거의 꽉 찼다.교수들은 모두 안경을 쓴 채 병상에 앉은 해인을 바라보았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해인은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실험대상처럼 둘러싸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자연분만이라서 괜히 몸이 불편해졌다.해인은 유호를 바라보며 난감하게 말했다.“내 상태...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나쁘지 않아.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다른 산모들도 봐야 하니까 먼저 보내 줘.”‘이건 의료 인력을 낭비하는 일 아닌가?’해인의 침대 옆으로 다가간 유호가 따뜻한 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주었다.“이건 과한 게 아니라, 남편으로서 아내를 아끼는 마음이야.”많은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듣자 해인은 쑥스러웠다. 고개를 숙인 뺨이 붉어졌다.대놓고 애정을 드러내는 두 사람의 모습에 병실 안의 교수와 전공의들은 속으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다행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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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9화

해인의 귓가에 유호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닿았다.“여보, 아이 낳을 때 많이 아팠어?”해인은 잠깐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아팠어.”전날 밤 길에서 태상을 봤을 때, 해인은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그래서 헬기 안에서는 오직 아이를 빨리 낳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야 태상을 찾아가 유호의 행방을 따져 물을 수 있으니까.아픔을 곱씹을 시간조차 없었다. 고통에 감각이 무뎌질 만큼 아팠지만, 오직 아이를 무사히 낳는 것만 생각했다.하지만 출산이 아프지 않을 리 없었다.해인은 그 기억은 조금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유호는 잠옷 너머로 해인의 푹 꺼진 배를 살며시 만졌다.예전과 촉감이 확연히 달랐다. 배 위의 살은 부드럽게 늘어져 있어서, 마치 솜뭉치를 만지는 듯했다.유호가 말했다.“나한테 보여 줘.”해인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자기 배를 볼 자신이 없었다.옷 너머로도 해인은 느낄 수 있었다. 원래 탄력 있던 피부가 쭈글쭈글해져 있었다.임신 동안 배는 ‘공’처럼 부풀어 올랐다. 어느 날 그 ‘공’이 갑자기 꺼졌으니, 어떤 모습일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가장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하지만 유호는 완강했다. 해인을 침대에 눕히고 옷자락을 반쯤 들어 올렸다.해인이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보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해인은 그대로 굳어졌다.막 아이를 낳은 해인의 배는 너무 느슨했다.하지만 유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유호는 몸을 숙였다. 속눈썹을 내리깐 채, 해인의 주름진 배 위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해인은 멍해졌다.유호의 얼굴에는 싫은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대하듯 경건했다.유호의 눈빛은 너무도 부드러웠다. 해인은 잠깐 착각할 만큼 흔들렸다. 유호는 해인의 모습이 예쁘든 안 예쁘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입맞춤을 끝낸 유호는 해인이 추울까 싶어 바로 옷을 정리해 주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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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0화

해인은 고개를 저었다.죄책감을 느끼는 건 선한 사람뿐이었다. 진짜 원흉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깨닫지도 못한 채, 남의 생명을 함부로 짓밟는 법이다.“진짜 죄인은 예태상이야. 이 모든 걸 주도한 사람도 예태상이고.”유호가 희미하게 웃었다. 손바닥으로 해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정말 예태상 혼자서 그렇게 큰 폭발을 계획할 수 있다고 생각해?”해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사실 해인도 이미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유호가 해외에서 수술을 받는 일은 극비였다. 그런데 유호가 떠나자마자 실험실이 폭발했다. 사람이 많은 도심에서 그런 폭발을 계획하고도 들키지 않는 일은 태상이 멀리서 지시한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해인은 유호의 셔츠 단추를 살짝 잡았다. 유호의 귀에 가까이 대고 살짝 물었다.“당신 해외 일정 누가 흘린 거야? 한씨 집안에 ‘스파이’가 있는 거지?”그 이야기가 나오자 유호가 차갑게 웃었다.“있지.”해인이 멈칫했다.“누구야?”유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시선만 창밖으로 향했다.유호의 얼굴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사람이 의식을 잃고 있을 때는 청각이 더 예민해질 때가 있다.수술이 끝난 뒤 유호는 연구소 밖으로 옮겨졌다.그때 유호는 아직 깨어나지 못한 채, 길가에 세워 둔 차 안에 누워 있었다.주헌 일행이 어느 길로 빠져나갈지 논의하던 중, 유호는 유창한 영어 목소리를 들었다. 낯익은 목소리였다....출산으로 체력을 너무 많이 소모했던 해인은 밥을 먹고 나서 다시 졸음에 빠졌다.유호는 침대 옆에 앉아 해인의 손을 잡았다. 해인이 편히 잠들 수 있도록 수면에 도움이 되는 디퓨저를 꽂았다.그리고 해인이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뒤에야 유호는 병실 밖으로 나갔다.유호는 병실 밖에 충분한 인력을 남겨 두었다. 해인을 돌보는 산후도우미 두 명에게도 몇 가지를 당부한 뒤 떠났다.병실 문을 나서자마자 유호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의 부드러움이 사라졌다. 대신 매서운 냉기가 내려앉았다.유호는 옆에 선 주헌을 흘끗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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