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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화

이해리는 겉으로 태연한 척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한 죄책감이 맴돌았다.자신에게 너무나도 큰 도움을 준 정지안에게 또다시 짐이 되어버린 상황이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약속했던 식사 자리마저 엉망이 되어버리다니...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였다.정지안은 그녀가 긴장할 때 나오는 작은 버릇들을 눈치챘다.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낮게 속삭였다.“본인 탓인 건 아네요. 그동안 줄곧 이런 식으로 만남을 미뤄왔지만, 이번이 그중에서도 가장 큰 파장을 일으켰어요.”이해리는 무심코 대화에 휩쓸려 얼버무렸다.“그런 거라면 정말 죄송해요.”“고작 죄송하다 한마디론 부족하죠. 이제 날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명색이 그녀의 아주버님이었고 이 멘트는 어떤 맥락으로 들어도 묘하게 애틋한 기운을 풍겼다.이해리는 찌릿하게 번져오는 낯선 감정을 애써 외면하며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지안 씨는 여기 무슨 일로 오셨어요?”정지안도 나름 태연하게 대답했다.“저도 가구 보러 왔어요. 당분간 집에 들어가긴 힘들 것 같아서 회사 근처에 있는 집을 살짝 꾸며볼까 해서요.”지극히 평범한 대답이지만 아까 나눈 대화의 잔상들이 끈질기게 맴돌았다.다행히 정지안은 더 이상 이해리를 붙잡고 늘어지지 않았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혼하고 서둘러 해외 나가야겠네.’전에는 조금 주춤했다면 최근 한 번의 강력한 압박과 더불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정지안까지 겹친 상황이 돼버렸다.이전까지는 단순히 자신만이 느끼는 기묘한 감정일 터, 하지만 방금 정지안은 노골적으로 선을 넘어 희롱했다.이해리는 감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아직 시간이 이른데 같이 좀 둘러볼까요?”정지안은 휴대폰을 힐긋 보고는 어느덧 차분해진 표정으로 물었다.이에 그녀도 딱히 거절하지 않았다.“그래요. 둘러보시다가 마음에 드는 가구가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지안 씨 집안 분위기도 바꿀 겸 제가 사드릴게요.”그녀는 어차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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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화

정도원의 몰골을 보자 이해리는 짜증이 확 밀려왔다.“야, 정도원! 이제 그만 좀 해!”방금 오초아랑 문자를 주고받다가 한참 답장이 없길래 괜히 불안해하던 참이었다.아니나 다를까 정도원 이 개자식이 이해리가 연락이 닿지 않자 협박 메시지나 보내댔다.이해리를 못 찾으면 그녀의 친구를 찾아가서라도 괴롭혀놓겠다는 내용이었다.“내가 왜 너한테 친구 얘기를 꺼냈을까.”그렇지 않았다면 정도원은 오초아의 직장조차 몰랐을 텐데.이해리는 한 걸음 다가가 언짢은 표정으로 정도원을 노려보았다.“여기서 뭐 하는 짓이야? 경찰에 확 신고해버릴라!”이미 분노에 가득 차 있던 정도원은 어디에도 해소할 곳이 없어 답답했는데 이해리를 보자 더욱 격분했다.“누가 누굴 신고해? 너 그딴 식으로 일을 꾸미면서 내 감정은 고려해봤니?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며칠간 정도원은 복잡한 감정에 시달렸다. 한편으로는 이해리와 정지안이 불륜 관계가 아닐까 의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 때문에 해고당한 윤유나가 종일 징징거려서 진저리가 났다.한편 이해리는 오초아에게 먼저 돌아가라고 눈짓을 하고는 시큰둥하게 정도원을 쳐다봤다.“저쪽 가서 얘기해. 여기서 딴 사람들 방해하지 말고.”정도원은 그녀의 오만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바짝 다가서며 으름장을 놓았다.“말투가 왜 이래? 우리 아직 이혼 안 했어. 벌써 새 남자 생긴 거니? 이젠 가식조차 안 떨겠다는 거야?”이 남자의 논리는 너무나도 기괴했다. 이해리는 기가 막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바람피운 건 너야.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나불거리지 마라! 제 형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더니 이제 와서...”이해리는 별 뜻 없이 말했지만 형을 언급한 순간 정도원은 제대로 긁혔다.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도원이 손을 번쩍 들어 올리고 당장이라도 휘두를 기세로 다가왔다.이해리는 무의식적으로 피하려다 뒤에 있던 정리함에 발이 걸려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넘어졌다.종아리에 통증이 차오르더니 곧이어 이상한 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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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화

오초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정지안에게 거침없이 쏘아붙였다.이에 이해리가 다급하게 외쳤다.“초아야, 이건 지안 씨랑 상관없는 일이야.”그녀는 정지안이 잠시 망설이거나 난처해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곧장 입장을 밝혔다.“도원이가 한 짓이라면 법대로 처리하는 게 마땅하죠. 제가 대신 신고해드릴게요.”말을 마친 남자는 휴대폰을 챙겨서 병실을 나섰다.복도에서 정지안이 통화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이해리와 오초아는 서로를 마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오초아가 먼저 혀를 차며 말했다.“그래도 가족인데 설마 진짜 의절까지 하겠어?”이해리는 고개를 저었다.피로가 몰려와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정지안이 돌아와서 그녀에게 당시 상황에 대해 몇 가지 더 확인했다.불과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정도원이 구금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이해리는 믿기지 않아서 두 눈을 크게 떴다.“정말 법대로 간 거예요?”이혼 소송도 다 끝내지 못한 마당에 남편의 구금이라니!정지안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차갑게 물었다.“혹시 뭐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요?”이해리는 할 말을 잃었다. 고개를 내젓다가 또다시 끄덕였고 결국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이때 정지안이 또 전화를 받고 병실을 나갔다. 오초아는 충격에 휩싸인 채 이해리를 쳐다보며 할 말을 머뭇거렸다.“뭐가 궁금한지 알아. 아는데 지금은 일단 묻지 마. 그게 좋을 것 같아.”이해리가 나직이 말했다.전에 그녀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은 일을 더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아서라고 억지로라도 이해할 순 있었다. 정지안도 어쨌거나 정씨 가문 사람이니까.하지만 오늘 나눈 농담 같은 대화, 그리고 지금 그가 보여준 단호한 태도는 너무나도 노골적이었다.이러고도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이 없다고? 이젠 이해리 본인조차 납득하기 어려웠다.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병실 밖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이해리 어디 있어? 기생충 같은 년! 당장 기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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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화

기자라니?심여진의 얼굴이 굳었다.“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휴대폰을 힐끔 보자 아니나 다를까 병원에 기자들이 몰려온다는 메시지가 떴다.그녀는 순식간에 기세가 꺾였다.“잘났어, 이해리! 너 두고 봐! 절대 이대로 안 넘어갈 테니까.”순순히 물러날 리는 없지만, 지금은 일단 체면을 지켜야 했다.심여진이 떠날 때, 오초아가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해리가 말렸다.“저대로 가버리면 기자들은 어쩌라고? 헛걸음했다고 너만 원망하는 거 아니야?”이에 이해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기자들 부를 때부터 저렇게 가버릴 줄 알았어.”“근데 왜...”“초아야, 이제 간호사 좀 불러줄래?”이해리는 나직이 말을 건넸다.심여진은 망신을 당할까 봐 도망쳤지만, 병원에 CCTV가 있다는 건 깜빡한 모양이다.잔뜩 흥분해서 소리 지르며 이해리를 찾아왔던 그 순간부터 모든 행동이 녹화되었을 터였다.오초아가 빙긋 웃었다.“알았어. 금방 불러올게.”그녀가 떠난 후, 이해리는 휴대폰을 꺼냈다.CCTV 영상을 휴대폰으로 보는 것이 번거롭긴 했지만, 그녀는 능숙하게 화면을 다루었다.오초아가 돌아왔을 때, 기자들도 이미 와 있었다. 예상대로 심여진이 없으니 자칫 소란이 일 뻔했다.그때 이해리가 CCTV 영상을 캡처해서 기자들에게 전송했다.기자들은 만족한 듯 발길을 돌렸고, 그날 밤 심여진이 병원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소식은 즉시 실검 상위에 올랐다.정도원은 구치소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윤유나가 와서 보석을 신청했다.“이해리 만나서 따질 거야.”종일 구치소에 갇힌 정도원은 조금 수척해졌다. 그 와중에 어머니가 소란을 피워 실검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는 당연히 이해리의 짓이라고 생각했다.윤유나가 두 눈이 충혈된 채 정도원의 손을 잡고 말했다.“도원 씨, 지금은 해리 씨한테 가지 마세요.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이상 도원 씨를 만나주지도 않을 거예요.”“나한테 죄지은 게 얼만데 따끔하게 혼내지 않고서 배겨? 거기에 너까지 회사에서 내쫓게 만들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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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화

정지안의 답장을 본 이해리는 다시 난관에 봉착했다.‘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장소’를 찾으려 할수록 그 생각 자체가 너무 이상했다. 마치 불륜을 저지르는 기분이랄까...몰래 숨어서 만나다가 심여진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또다시 아수라장이 되는 게 아닐까?고심 끝에 장소를 정한 이해리는 다음 날 아침 정지안에게 주소를 문자로 보내줬다.돌아온 답장은 물음표 하나,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막 해명하려 하는데 정지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해리 씨, 푸르지오 언제 돌아가요?”이해리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잠시 침묵했다.“저 지금 여기...”이곳의 경비가 오초아 집보다 낫다고 판단해 두 사람은 어젯밤에 바로 이곳으로 옮겨왔다.오초아는 아침 일찍 출근했고 집에는 현재 이해리 혼자 있었다.전화기 너머의 남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방금 보낸 식당 이름 말이에요.”“아 네, 거긴 회원제 식당이에요. 조용하게 식사하기 좋을 것 같아서요.”“식사 대접한다더니 결국 또 식당이었어요? 너무 성의 없는데.”그녀는 잠시 멍해졌다.“어젯밤에 분명 괜찮다고...”별안간 정지안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해리 씨가 직접 해줘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고 나서도 이해리는 한참 동안 멍한 상태였다. 몇 분이 지나서야 정지안의 말이 무슨 뜻인지 겨우 깨달았다.‘그래서 지금 여기로 온다고?’“나 아직 환자인데 왜 이렇게 곤란하게 구냐고, 왜...”당장 장을 보러 가기엔 시간이 빠듯하니 배달이 빠를 터였다.이해리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정신없는 와중에도 여러 가지 음식을 주문했고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가 새로 산 식기 세트를 꺼냈다.그녀가 산 식기는 독특하고 예뻤는데 배달 음식을 담아놓으니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정지안이 도착했을 때, 음식이 한 상 가득 차려졌다.그가 전화를 건 지 불과 한 시간 만이었다.요리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면 기껏해야 이 한 시간 동안 이해리가 배달 앱으로 식자재를 사놓고 그가 와서 거들어 줄 생각이었다.정지안이 식탁 앞에서 꼼짝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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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화

이해리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정지안이 마침내 모든 식당 이름을 다 말한 줄 알았는데 한창 접시 하나를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도 남자의 시선을 따라가다 창피해서 어디로 숨어버리고 싶었다.접시 안에 든 파인애플 번은 심지어 갓 구워져 노릇노릇하고 바삭해 보였다. 사이드에는 부드러운 버터 조각까지 끼워져 달콤한 향기가 코를 찌르고 군침을 돌게 했다.정지안은 다시 한번 눈썹을 치켜올리며 수치심으로 얼굴을 들지 못하는 이해리를 똑바로 보았다.“로이지의 파인애플 번이네요? 설마 제빵까지 할 줄 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죠?”어느덧 입꾹닫 해버린 이해리, 고개를 푹 숙이고 다리를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서운함이 북받쳐 올라왔다.“저 아직 환자거든요. 밖에 나가는 것도 불편한데 성의 없다고 하셔서 이렇게밖에 해드릴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왜 또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일일이 그릇에 담는 게 얼마나 번거로운데.”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 갔지만, 서운한 기색은 숨길 수 없었고 마지막엔 코까지 훌쩍였다.잠시 침묵하던 정지안은 갑자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미안해요. 제가 똑똑히 설명하지 못했네요. 실은 해리 씨가 장을 봐 오고 제가 와서 같이 요리해 줄 생각이었어요. 이렇게 서두를 줄은 몰랐죠...”그는 이해리의 다리에 감긴 붕대를 흘긋 보았다.골절이 아니라서 걷는 데 큰 문제는 없어 보였지만 이 많은 접시를 부랴부랴 씻어내고 음식까지 담은 걸 생각하니 한 시간이 확실히 빠듯하게 느껴졌다.“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그냥 농담으로 건넨 건데.”이해리는 민망함에서 벗어나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애초에 고마움을 표하려던 자리인데요 뭘.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직접 요리해드릴게요.”“그 말은 또다시 번거롭게 굴겠다는 뜻인가요?”정지안의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남자의 눈빛을 마주치자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어디서 튀어나온 용기인지 저도 모르게 말부터 뱉어버리는 그녀였다.“그러게요. 지안 씨는 대체 왜 이렇게 저를 도와주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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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화

정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해리 곁으로 다가오더니 신사적으로 손짓했다.“같이 가줄래요?”어차피 그녀도 아까 제대로 식사를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으니.이해리는 처음에 사양하려 했지만, 남자의 단호한 표정을 보자 내심 억눌렀던 호기심이 발동했다.“그러죠, 그럼.”아직 정도원과의 이혼 수속을 마친 건 아니니 그녀도 정씨 가문의 일원이었다.시어머니가 입원했다는데 병문안을 하러 가는 건 지당한 일이지.병원으로 가는 길, 이해리는 비로소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되었다.정도원의 회사 주가가 폭락하면서 사태가 커졌고 심여진이 그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는 것이다.윤유나에게 따지러 갔지만, 오히려 화병을 얻어 쓰러졌다고 한다.이해리는 혀를 내밀며 자연스럽게 말했다.“여사님도 참! 요즘 신경 쓸 일이 많으신가 봐요. 지안 씨 소개팅 주선하랴, 그 인간 회사 일 신경 쓰랴... 거기에 윤유나 씨는 겉으론 순진한 척해도 속으론 계산적인 여자라 누구랑 대화하든 결국엔 열 받게 만드는 법이죠.”이해리는 사실대로 얘기했을 뿐이지만 심여진이 정지안의 어머니란 걸 뒤늦게 깨닫고 하던 말을 멈췄다.“죄송해요, 지안 씨. 제가 혹시 무례하게 굴었다면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정지안은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어머니가 해리 씨를 감금하려 했던 일을 생각하면 방금 그 평가는 아주 관대한 편인데요?”그녀가 깨고소하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훌륭했다.“이해해주셔서 고마워요.”정씨 가문의 일은 이해리에게 복잡하기만 한 문제였다. 정도원과 결혼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저들의 속내를 알 수 없었고 평소에도 거의 왕래하지 않았다.심여진은 처음부터 며느리 이해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정도원이 그녀에게 구애할 때 워낙 난리를 피웠어야지. 온 동네 사람들이 그가 아내에게 잡혀 살고 아주 헌신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이해리는 시집오자마자 시어머니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았다. 다행히 정도원이 중간에서 잘 처신해주었고 나중에는 꼭 필요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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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화

여기까지 듣던 이해리는 정도원이 은근 가슴 찔리는 걸 느꼈다.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뭐라 더 말하려 했지만, 옆에 있던 정지안이 덥석 가로챘다.“도원아, 너야말로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 마.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회사 주식이야. 해리 씨 붙잡고 주절거려봐야 무슨 소용인데? 모든 건 너랑 윤유나가 저지른 거잖아. 그날 네가 해리 씨를 데리고 연회장에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날 리가 없어.”정도원은 정지안 앞에서 늘 기가 죽는 편이었다. 거기에 꾸중까지 들으니 찍소리도 못하고 투덜거리기만 할 뿐이었다.“형은 몰라. 유나가 회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형이 해리 주식까지 받고 그렇게 나서주는 거, 그거 다 이용당하는 거야.”그 말을 듣자 이해리는 저도 모르게 정지안을 곁눈질했다.이미 말싸움이 격해질 대로 격해진 상태였다.만약 정지안을 의식하지 않았다면 정도원은 아마 그녀와 정지안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몰아붙였을지도 모른다.결국 정도원은 형 정지안을 두려워했다.그 순간 이해리는 속으로 싸늘하게 웃었다.병실에서 심여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다들 들어와.”정지안이 목을 축이며 안으로 들어섰고 이해리가 그의 뒤를 따랐다.이 광경을 본 정도원은 또다시 눈빛이 음침해졌다.며칠 동안 그녀와 정지안이 부쩍 가까워진 것 같았고 예전부터 품어왔던 의심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쳤다.다들 들어오자 심여진은 병약한 기색이 역력한 채 몸을 일으켰다.“다들 모였으니 그냥 말할게.”이해리는 정지안 옆에 서서 애초에 끼어들 생각조차 없었다.하지만 심여진이 대뜸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해리야, 도원이가 요즘 너한테 미안한 짓 한 거 알아. 무슨 요구든 들어줄 테니 우리 그만 이 일 해결하자. 계속 이대로 끌고 가는 건 방법이 아니야.”이해리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심여진이 지금 와서 화해를 종용하는 것은 오로지 회사 주가에 너무 심각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그렇지 않고서야 이전에도 수많은 기회가 있었을 텐데 왜 그때는 시어머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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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화

여태껏 아들 정도원에게 관대했던 심여진은 이제 와서 잘못을 지적하기 시작했다.“너랑 해리랑 그렇게 오래 만났는데 갑자기 웬 윤유나가 튀어나와? 이번엔 네가 잘못했어! 당장 가서 유나랑 이혼 절차 밟고 가짜 결혼 생활도 깨끗하게 정리해.”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해리는 차가운 미소만 지었다.사실 심여진에게 있어 정도원이 누구랑 함께하든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아들 녀석이 누굴 더 좋아하는지 뭐가 중요할까.그녀는 오직 정씨 가문의 입장에서 누가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계산할 뿐이었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윤유나를 제삼자로 여기고 있으니 아웃시키면 그만이다.“엄마! 왜 말이 달라져요? 전에는 이렇게 말씀 안 하셨잖아요...”옆에 있던 윤유나도 마침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오늘 저를 찾아오셨을 때, 저는 그냥...”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심여진이 덥석 가로챘다.“닥쳐! 서경 그룹 주가를 더 떨어뜨릴 작정이니?”윤유나는 뭐라 더 말하고 싶었으나 정도원 앞에서 감히 엄두가 안 나 분노에 질린 듯 갑자기 머리를 감싸 쥐었다.이내 연약하게 흐느끼다가 숨이 멎으며 바닥에 쓰러졌다.병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심여진은 쓰러진 윤유나를 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어쩜 이렇게 기절을 해!”정도원이 재빨리 그녀를 부축해서 안아 들고 의사를 찾으러 나갔다.이해리와 정지안만이 침대 앞에 남겨졌다.“야 이놈아, 당장 돌아와!”심여진은 떠나가는 아들 녀석을 바라보며 계속 이해리의 눈치를 살폈다.하지만 정도원 저 인간은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지 않았다.이해리는 자신의 팔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웃었다.“도원이는 이 일을 제대로 해결할 생각이 없어 보이네요. 그럼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할까요?”이제 겨우 이해리를 안심시키려다 계획이 어그러졌다. 심여진의 표정 또한 구겨질 대로 구겨진 뒤였다.옆에 있는 정지안에게 계속 눈짓을 보냈지만, 그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듯 휴대폰을 만지며 업무 문자에 답장하고 있었다.심여진은 어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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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화

이해리는 움찔 놀라더니 고개를 내저었다.“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진 않았어요.”그녀는 애초에 심여진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정도원 앞에서만 억지로 좋은 아내인 척 연기했을 뿐이다.하지만 부모님 일이 있고 난 뒤, 남의 부모를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걸 꺼렸다.그러다 보니 심여진에게 ‘어머님’이라고 부른 경우도 매우 드물었다.정지안은 이런 사정을 모를 터였다.여기까지 생각한 이해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정지안 때문에 일었던 설렘도 이내 희미해졌다.“먼저 가볼게요. 오늘 고마웠어요.”“도원이랑 합칠 생각은 있고요?”심여진이 그렇게까지 장담했으니 만에 하나 정도원과 윤유나가 정말 이혼한다면 이해리도 다시 마음이 바뀔지 모른다.그녀는 이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며칠간 정지안의 여러 행동을 되새겨 보았을 때, 지금은 답하기에 적절한 타이밍이 아니었다.이해리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노코멘트 할래요.”너무 많은 여지를 남긴 이 한 마디, 정지안이 원하던 답이 아니란 걸 그녀는 너무 잘 안다.남자의 표정이 살짝 변했지만, 그녀는 눈치채지 못하고 앞서 걸어갔다.병원을 감도는 공기가 그다지 좋지 않아서...다만 몇 걸음 채 가지 않아 이 남자가 손목을 거칠게 잡아챘다.이해리는 갑작스러운 현기증과 함께 다시 끌려가 벽에 기댔다.정지안이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은 옆 벽을 짚었다.곁눈질로 남자의 단단한 팔뚝을 본 순간, 이해리는 긴장한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뭐... 뭐 하시는 거예요?”그녀는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했지만 흔들리는 시선 속에서도 남자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그건 마치 그녀를 꿰뚫을 기세였다.“대답해!”정지안의 말에 이해리가 무심코 물었다.“뭐를요?”“걔랑 다시 안 만난다고, 이혼할 거라고 말하란 말이야!”정지안의 노골적인 태도가 부담스러웠던 탓일까. 이해리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엄격하기만 하던 눈빛이 지금은 마치 깊고 푸른 바다에 빠진 듯 절절하기만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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