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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화

정도원이 일어나 맞이하려 하자 이해리가 은근히 그 손길을 거부했다.남자의 얼굴에 겨우 떠올랐던 미소가 순식간에 어색하게 굳어졌다.“우리 해리, 아직도 나한테 쌀쌀맞네?”이해리는 팔짱을 끼고 냉담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그렇게 부르지 좀 마. 이혼에 관해 얘기하자는 것마저 거짓이었다면 더 이상 너한테 써줄 시간 없어!”실은 오는 길에 이미 짐작했었다. 정도원은 이런 수작을 부릴 것이 분명했다.막상 그 꼴을 보게 되니 이해리는 자신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남자의 눈 밑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빛마저 완전히 사라졌다.“흐음... 진짜 나랑 이혼하려고 마음 굳혔네.”“뭘 더 확인하고 나섰어?”이해리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이제 조건을 논해볼까? 아니면 뭐 이혼 전에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그녀는 정씨 가문이 지금쯤 주가 하락을 막기 위해 일련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하지만 정도원이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게다가 윤유나마저 이미 내보냈으니 이해리가 당분간 이 모든 상황을 직접 지켜보지 않는다면 더 이상 신경 쓸 일 없겠지?아니나 다를까 정도원이 입을 열었다.“지금 회사 사정이 좋지 않잖아. 엄마 말로는 우리 둘이...”별안간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이해리가 그의 휴대폰을 흘끗 보며 웃었다.“안 받아?”짐작할 것도 없었다. 윤유나에게서 걸려온 전화겠지.발신자 표시를 본 남자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해리야...”“받아봐. 그 또한 네 성의잖아.”이해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정도원 역시 그걸 알아차렸는지 ‘어차피 이렇게 된 거’라는 심정으로 휴대폰을 잡고 전화를 받았다.몇 초 후, 평온한 표정으로 이해리의 얼굴을 쳐다보던 남자가 갑자기 정색했다.“뭐라고?”보나 마나 전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하는 말이었다.이해리는 조용히 메뉴판을 살펴보기 시작했다.이른바 단골집이라는 이곳은 정도원만 좋아했던 술집이었다.그녀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고 잘 마시는 편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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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화

“네 탓 아니야. 일단 푹 쉬어.”정도원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나 윤유나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여전히 애틋함이 절로 배어 나왔다.그는 윤유나의 손을 부드럽게 그러쥐고 손등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너무 걱정 마. 비행기는 얼마든지 다시 예약할 수 있어.”“미안해요. 해리 씨 찾아간 거 맞죠? 두 사람 얘기 잘 나누실 거라 생각했는데...”윤유나는 코를 훌쩍였다.정도원이 위로의 말을 건네려던 찰나, 복도에서 소란이 일었다.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샛노란 머리의 남자가 거들먹거리면서 안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운 윤유나를 보고 다짜고짜 입을 나불거렸다.“여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나한테 왜 아무 말도 없었어?”“여... 여보라니? 지금 무슨 헛소릴 하는 거예요? 저 아세요?”윤유나가 질린 듯 되물었다.“뭐야? 지금 날 모르는 척하는 거야? 네가 아무리 돈 많은 남자 꿰찼어도 그렇지. 우리 결혼 사실까지 숨길 수 있을 것 같아?”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정도원을 훑어보았다.“아, 이 사람이야? 네가 말하던 그 재력가가? 확실히 보통은 아니네! 나 없이도 잘만 사는구나... 근데 말이야. 바람피우는 것들은 꼭 천벌 받게 돼 있어. 봐봐, 너도 지금 교통사고로 병원 신세 지고 있잖아!”안 그래도 심란했던 정도원은 이 남자의 경멸적인 말투에 짜증이 폭발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대체 누군데 여기서 헛소릴 지껄여요?”노란 머리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입을 나불거렸다.“나 윤유나 남편이에요. 이렇게 말했는데도 못 알아들으시겠어요? 유나 너 나랑 헤어지더니 안목이 영 별로네. 어쩌다 이렇게 멍청해진 거야...”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도원의 주먹이 얼굴에 날아들었다.“도원 씨!”윤유나는 비명을 지른 뒤 입을 틀어막았고 병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문이 닫히지 않은 틈새로 누군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 윤유나와 정도원을 알아보더니 몰래 촬영하기 시작했다.또 한 번 실검을 불태운 윤유나의 기사를 확인하고 이해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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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화

정지안의 눈빛은 그야말로 노골적이었다.“그래 보이네요.”그는 웃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그나저나 지안 씨가 아직 미혼이라 들었는데 혹시 일에만 몰두하시는 타입인가요? 저도 여기 막 도착해서 정씨 가문에 관한 얘기를 많이 전해 들었어요. 집안에서 최근에 지안 씨 맞선을 주선하려 한다던데 사실인가요?”이해리의 얼굴에 난감함이 스쳤다.심여진이 정지안에게 혼담 상대를 찾아주려는 일은 어느 정도 자신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음에도 남자의 뜨거운 시선을 외면할 수 없었다.이때 정지안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네, 그렇습니다마는 교수님도 혹시 같은 생각이신가요?”에드워드가 호탕하게 웃었다.“하하, 저도 확실히 지안 씨한테 소개해드릴 만 한 분을 알고 있어요.”에드워드는 이 나라의 사교 예절에 대해 잘 모르는 듯했다.어떻게 첫 만남부터 상대의 혼담을 주선하려 한다는 말인가.이해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제 막 상황 수습에 나서려다가 정지안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이 남자는 줄곧 그녀만 쳐다보고 있었다.하지만 이해리가 고개를 들자 또 은근 시선을 피했다. 좀 전의 뜨거운 눈길은 전부 그녀의 착각인 것처럼 말이다.에드워드 역시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정말이지 지안 씨는 외모나 출신, 사업적 능력과 수완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것 없네요. 이런 육각형 남자는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죠.”이해리도 속으론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심여진이 아들 정지안의 맞선을 주선하겠다고 말한 순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섰다고 한다.불과 며칠 사이에 이해리는 온갖 소문을 들었는데 어느 집안의 따님은 정지안과 인연을 맺으려고 일부러 귀국까지 했다고 한다.그것참 입이 쩍 벌어질 지경이었다.에드워드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며 자신도 괜찮은 상대들을 몇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정지안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죄송하지만 마음만 받을게요, 교수님.”“왜죠?”“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거든요...”정지안은 그렇게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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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화

이해리가 화장을 고치고 돌아섰을 때,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졌다.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화장실 문 앞에 서서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고 있었다.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해리는 이 남자를 처음 본 순간부터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서로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 느낌이 더욱 강렬해졌다.“안녕하세요.”그녀는 인사를 건네고 지나치려 했지만, 남자가 덥석 막아섰다.“굉장히 미인이시네요. 오늘 포럼에서 만난 분 중에 가장 예쁘신 것 같아요.”“칭찬 감사합니다.”이해리는 남자를 찬찬히 살피며 홀가분하게 대답했다.“그쪽도 매너가 넘치시네요.”오는 길에 그녀는 이번 포럼에 대한 정보를 꽤 파악하고 있었다.산업 스파이들이 많이 출몰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고 에드워드 역시 유독 들이대는 남자들은 조심하라고 미리 당부했었다.지금 눈앞의 남자가 바로 그런 부류 중 하나였다.그 남자는 이해리의 칭찬에 기분이 좋은 듯했다.“말을 참 예쁘게 하시네요. 오늘은 누구랑 오셨어요? 에드워드가 그쪽 지도교수라고 하던데 맞나요?”고작 몇 마디 대화만으로 남자는 이미 실마리를 드러내고 있었다.우연히 마주친 그녀인데 이토록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게 말이 될까?이해리는 표정 변화 없이 여전히 옅은 미소를 띠었다.“어떻게 아셨어요? 에드워드 제 교수님 맞아요. 아주 프로패셔널하고 대단한 분이시죠.”“그러는 그쪽은 누구랑 함께 오셨어요?”상대방이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 알게 된다면 이를 발판 삼아 단서를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그녀는 산업 스파이를 잡는 데 큰 관심이 없지만, 이 남자가 감히 자신을 건드렸으니 그냥 보내줄 수는 없을 터였다.남자가 웃으며 뒤돌아섰고 이해리는 재빨리 그를 따라나섰다.두 사람은 나란히 대화를 나누며 회의장으로 돌아갔다.막 모퉁이를 돌았을 때, 이해리는 기세등등하게 다가오는 실루엣을 발견했다.정지안이 그들을 향해 정색한 얼굴로 다가왔다.“지안 씨...”이해리가 눈짓을 보내려 했지만 정지안이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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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화

정지안이 건넨 질문에 돌아온 건 이해리의 흔들리는 눈빛뿐이었다.그녀는 정지안을 마주 보지 않고 나지막이 말했다.“교수님이 저쪽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얼른 돌아가죠, 우리.”이해리는 처음부터 이 화제를 피해왔다.들끓던 남자의 마음이 순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식어버렸다.“자꾸 내 질문 피하네. 설마...”‘관심이 없어서일까?’정지안은 끝내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한편 이해리는 눈을 깜빡이며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짐작했지만, 때마침 에드워드가 가까이에서 말했다.“두 사람 거기서 뭐 해요? 이제 프로젝트에 관해서 논의해야 하니 얼른 돌아오세요.”지도교수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은 이해리는 정지안을 올려다보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교수님이 부르시네요. 얼른 돌아가요.”그녀도 지금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오늘 이 장소에서 정지안과 그런 얘기를 나눌 수 없다는 점이다.이 자리의 주인공은 어쨌거나 에드워드이니까.정지안 또한 투자자 중 한 명으로서 협력을 논의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왔다.이해리는 본인 때문에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긴다면 죄책감을 느낄 게 뻔하다.하여 곧장 교수님께 다가갔다.뒤에 서 있는 정지안의 표정이 얼마나 음침해졌는지는 알아채지 못한 채로...그는 마치 상처받은 듯 서러운 표정이었지만 다시 자리로 돌아왔을 땐 평정을 되찾은 뒤였다.“드디어 돌아왔군요.”에드워드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고 혼잣말처럼 덧붙였다.“아까도 말했지만, 해리가 떠난 뒤로 지금 데리고 있는 학생들은 수준이 점점 떨어지고 있어요. 오랜 시간 거쳤어도 해리만큼 자랑스러운 제자는 없더라고요. 요즘 애들은 대체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어요. 도통 정신을 못 차리더라고요. 보기만 해도 골치가 아파요.”한창 얘기하던 에드워드가 갑자기 이해리에게 화제를 돌렸다.“아 참, 해리야, 우리도 마침 이렇게 만났겠다. 당분간 네가 좀 내 학생들 지도해 줄래? 알다시피 수년 동안 내가 믿는 사람은 오직 너잖아.”이해리가 무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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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화

하지만 강의가 시작되자 이해리는 자신이 학생 시절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깨달았다.앳된 얼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수많은 추억이 떠올랐다.갑작스러운 강의임에도 이해리는 점차 몰입했다.“혹시 제가 설명이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질문 있나요?”이해리가 말을 멈추었다.하지만 현장의 학생들 누구도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다들 존경심 가득한 눈으로 이해리를 바라보았고, 잠시 후 뜨거운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선생님, 강의 진짜 잘하시네요.”“저희는 질문할 것 없습니다. 선생님 강의에 완전히 빠져들었을 뿐이에요.”“맞아요. 선배님 강의 너무 잘하세요.”학생들의 칭찬이 이어지자 이해리도 더욱 자신감이 생겼다.다만 그녀는 조금도 우쭐해지지 않았다. 과거 자신이 공부하던 시절의 온갖 어려움을 떠올리며 더욱 가슴 벅차오를 뿐이었다.정지안은 이해리가 강의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에드워드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몰래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았다.그의 시선으로 이해리의 옆모습과 뒷모습만 보였다.강의를 시작하면 유난히 의기충천한 그녀, 평소 정지안의 앞에서 보여주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그런 이해리를 바라보며 정지안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그때 에드워드가 와인잔을 들고 다가왔다. 정지안이 그녀를 바라보는 모습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우리 해리 참 대단하죠? 전에 공부할 때도 해리는 가장 똑똑한 제자였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해리가 공부할 때 이룬 수많은 성과는 후배 학생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해리한테 꼭 돌아와서 공부하라고 강하게 권했을 리가 없죠.”에드워드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사실 지금까지도 해리가 다시 돌아와 주길 바라지만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네요. 아직은 확실히 결정하지 못한 것 같아요. 지금 이 프로젝트도 그냥 단순히 보러 온 것뿐이래요.”이해리는 열성적으로 강의를 이어가느라 두 남자의 인기척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문득 정지안이 눈썹을 찌푸렸다.“교수님은 해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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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화

만약 정도원이었다면 윤유나의 이런 연약한 말투에 속상해서 미칠 지경이었을 것이다.아쉽게도 이해리는 그와 달랐다.그녀는 여유롭게 휴대폰을 잡고서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용건이 뭐죠? 별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요.”윤유나는 당연히 잘못 걸어왔을 리가 없다.이해리의 말을 듣자 그녀는 갑자기 초조해졌다.“해리 씨, 잠깐만요. 할 얘기가 있어서 연락드렸어요.”“말하세요, 그럼.”“전화상으론 그렇고... 만나서 얘기해요. 지금 제가...”윤유나가 주소를 말하자 이해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그곳은 하필이면 지금 비즈니스 포럼이 열리고 있는 호텔 근처였다.혹시 자신을 미행했던 것일까 아니면 따로 조사했던 것일까.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이번 비즈니스 포럼은 정도원의 회사와 전혀 관련 없는 분야이기에 그가 참석할 이유도, 이와 관련된 사실을 알 리도 없었다.정지안이 에드워드의 프로젝트에 투자한다는 사실조차 이해리는 놀라웠다.그녀는 정신을 다잡고 차분하게 물었다.“제가 만나줄 거라 확신하는 이유가 뭐죠?”“그런 확신은 없어요. 다만 우리 두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 시간을 내주시길 바랄 뿐이에요.”이 말을 들은 이해리는 잠시 망설였다.“만나줄 순 있는데 지금 제가 좀 바빠서 기다려주셔야 할 것 같아요.”30분 남짓 지난 후, 이해리는 윤유나가 말한 주소로 조금 늦게 도착했다.아늑한 카페 안, 윤유나는 벽 쪽 자리에 앉아 창밖의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통 가늠이 안 갔다.이해리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고 걸음을 늦추어 테이블로 다가갔다.제스처 하나하나가 부드럽고 우아한 기품이 흘러넘쳤다.인기척을 느낀 윤유나는 뒤늦게 고개를 들고 눈앞의 이해리를 찬찬히 훑어보았다.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그녀의 기세에 윤유나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이해리는 오늘 깔끔하게 재단된 비즈니스 정장에 머리를 반쯤 묶어 올려 한눈에 봐도 군더더기 없이 일 잘하는 사람 같았다.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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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화

정도원에게 윤유나는 처음부터 그저 외로움을 달래는 반려동물에 불과했던 건 아닐까.“뭐 이런 멍청이가 다 있어. 고작 대체품 주제에 정까지 붙어서 제 인생을 망치다니, 쯧쯧.”이해리가 앙칼지게 몇 마디 내뱉었다.윤유나는 자신을 향한 비난임을 직감하고 얼굴빛이 더욱 창백해졌다.“말이 너무 심하네요. 도원 씨랑 만나게 된 계기가 해리 씨 때문일진 몰라도 서로에게 쏟은 감정만큼은 진심이었어요.”“진심이요? 한쪽은 외롭다고 제 몸 하나 주체하지 못하고 들이댄 거고, 다른 한쪽은 신분과 재력에 눈이 멀어서 재벌가에 시집가는 게 목적이었잖아요. 두 사람은 이런 걸 두고 찐 사랑이라 하나 봐요?”이해리는 느긋하게 말을 이어가며 뒤로 기대앉았다.팩트 폭격을 날리는 그녀 앞에서 윤유나는 어떠한 반박의 여지도 없이 눈물로 애원했다.“제가 이렇게 빌게요... 저랑 아이 모두 온전한 가정이 필요해요. 해리 씨도 예전에는 도원 씨 사랑했잖아요. 전남편이 앞으로 잘 살기를 바라지 않나요?”“뭐라고요? 도원이가 지금 잘 사는 것처럼 보여요 아니면 유나 씨랑 함께하면 잘 살 수 있을 거라 여기는 거예요?”줄지은 반문에 윤유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오늘 제가 먼저 해리 씨를 부른 이유는 도원 씨를 대신해서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예요. 저는 이미 도원 씨 아이를 가졌고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저희의 혼인 관계는 사실이에요. 아무리 이혼을 강요해도 소용없다고요.”윤유나의 눈물 어린 호소가 오히려 이해리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정도원은 사내대장부가 돼서 본인이 직접 나섰어야죠! 왜 하필 임신한 유나 씨를 앞장세워서 이런 일을 시키고 있어요? 유나 씨도 참 헌신적이시다. 그러다 헌신짝 돼요.”“아무튼! 제가 원하는 건 도원 씨랑 함께 하는 거예요.”말을 마친 윤유나는 고개를 푹 떨궜다.이해리의 태도를 봤을 때 오늘 대화가 그리 순조롭지만은 않은 듯했다.그녀를 잠시 응시하던 이해리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됐어요. 임신까지 한 마당에 제가 뭐라고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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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화

휴대폰 너머로 심여진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이해리는 그녀가 곧바로 이혼하지 말라고 자신을 말릴 거라 예상했다.이전의 대화에서 심여진은 윤유나가 절대 정씨 가문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했으니까.설마 임신 소식에 마음이 흔들린 걸까?아니나 다를까 심여진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해리야, 이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 서두르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유나가 정말 임신했대?”마지막 질문에 흥분과 기대감이 은근히 섞여 있었다.이에 이해리는 소리 없이 냉소를 지었다.정도원과 결혼한 뒤, 심여진은 그녀에게도 아이를 재촉했었다.정씨 저택에 갈 때마다 시어머니랍시고 대놓고 말하거나 빙빙 돌려가며 아이 얘기를 꺼냈었지. 어느 한번은 식사 자리에서 글쎄 불임 검사 한번 받아보라고 제안까지 했었다.그때 정도원은 이해리의 표정이 굳어진 걸 알아채고 급히 화제를 돌렸고 그 후 심여진은 며칠간 잠잠했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도원이 몰래 엄마를 찾아가서 이해관계를 따졌을 듯싶었다. 그래서 심여진도 감히 더는 며느리에게 덤비지 못했던 거겠지.윤유나의 임신 사실에 심여진은 아마도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직접 저한테 찾아와서 말했는데 설마 거짓말이겠어요? 여사님도 그 두 사람 관계를 모르시는 건 아니잖아요. 이미 수없이 몰래 만났을 테니 임신도 이상할 것 없죠.”이해리는 자신의 말이 듣기 거북하다는 것을 잘 알지만 지금 심여진에게는 곧 손자가 생긴다는 사실이 가장 기쁜 일이었다.이해리의 비꼬는 투에도 그녀는 화조차 내지 않았다.“정말 네 말대로 유나가 임신한 거라면 그 또한 소중한 생명이잖니. 해리 너는 마음씨 착하니까 설마 유나에게 아이 지우라고 강요하진 않겠지?”이해리는 다시 냉소를 지었다. 심여진의 속셈이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그러니까 여사님 말뜻은 그 아이를 낳겠다는 거죠?”“내가 또 언제 그렇게까지 말했니... 근데 너도 알다시피 도원이랑 결혼한 지 몇 년은 됐으면서 여태껏 임신 소식 한번 없었잖아. 그동안 내가 얼마나 초조했는지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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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화

이해리는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더 할 말 없습니다. 이런 일은 양쪽 모두 원만한 결과를 얻을 순 없어요. 도원이가 바람피우기로 마음먹은 날부터 이런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까지 생각했어야죠. 언젠가는 반드시 선택해야 할 때가 온다는 걸요. 저는 할 말 다 했으니 서둘러 모든 절차를 마무리 지으세요. 계속 저를 남겨둘 생각이시다면 그것도 간단해요. 윤유나더러 아이 지우고 말끔히 이혼하고 더 이상 저를 귀찮게 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됩니다. 아마 윤유나가 그렇게까진 못하겠죠?”고작 실검 몇 개로 정도원은 윤유나를 잠시 피해 있으라고 해외로 내보냈다.그런 그녀가 임신까지 했으니 사실상 면죄부를 받은 셈이었다.빨리 이 소동을 끝내는 것이 모두에게 좋을 터였다.이해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쿨하게 전화를 끊었다.휴대폰을 내려놓은 후에야 가슴이 격렬하게 오르내리는 것을 깨달았다.오늘 있었던 일들이 그녀에게 엄청난 감정 기복을 안겨주었다.예전 같았으면 이해리는 자신이 배신당할 거라고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그것도 이토록 철저하게...지금 돌이켜보니 그녀는 한번 누군가를 믿기로 마음먹으면 그 믿음을 전부 내어주는 경향이 있었다.이해리는 고개를 저으며 이제 그만 생각을 접으려고 애썼다.그날 오후, 의사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전에 받은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다고 했다.“오후 내내 병원에 계시나요?”“네.”“그럼 검진결과 받고 의사 선생님 찾아뵙겠습니다.”이해리는 의사와 얘기를 좀 나누고 싶었다.요즘 정도원과의 이혼 문제로 그녀는 마음고생이 심했다. 며칠 전부터 가슴이 답답하고 무언가에 짓눌린 듯한 느낌이 가시질 않아 결국 병원에 가서 간단한 검사를 받아보기로 했다.혹시나 몸에 이상은 없는지 또 앞으로 맡게 될 프로젝트나 해외 일정에 지장이 없을지 미리 확인하고 싶었다.병원을 찾은 이해리는 모퉁이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윤유나가 산부인과 쪽으로 향하는 모습이 왜 이렇게 수상쩍어 보이는 걸까?그녀를 본 이해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오늘에야 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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