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랑을 빌었더니, 계약이 시작됐다: Chapter 91 - Chapter 100

122 Chapters

91화

아스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한 여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불가능합니다.”아스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이득이라니요. 제게 사랑은 비즈니스가 아닙니다. 그리고 제 곁에 누군가를 두는 일은, 이미 오래전에 끝난 계약입니다.”“강 대표, 자제하게. 고작 죽은 여자 하나 때문에 인생을 도박에 걸 텐가?”한 회장의 무심한 도발에 아스의 이성이 끊어졌다.그는 책상을 짚고 상체를 숙이며 한 회장을 매섭게 노려보았다.그의 눈동자에는 슬픔보다 더 깊은 광기가 서려 있었다.“그 ‘죽은 여자’가 제 전부였습니다. 그녀가 없는 자리에 다른 누군가를 앉히는 건, 제 영혼을 난도질하는 것과 같습니다.”아스는 옆에서 당황해 굳어버린 지희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한지희 씨가 저를 쫓아다니든 소문이 나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제 인생에 ‘약혼’이라는 단어를 억지로 끼워 넣으려 하지 마십시오. 그건 사라에 대한 모욕이자, 저에 대한 선전포고입니다.”“강아모!”한 회장이 호통을 쳤지만 아스는 멈추지 않았다.그는 거칠게 몸을 돌려 회장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고리를 잡은 그의 손등에 핏줄이 돋아났다.“협업은 계속 진행하겠지만, 사적인 관계는 여기서 끝입니다. 다시는 이런 제안으로 저를 부르지 마십시오.”쾅—!문이 부서질 듯 닫히고 아스가 사라지자, 회장실에는 지독한 정적만이 남았다.지희는 팔짱을 꼈던 자신의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아스의 눈빛에서 읽은 것은 자신을 향한 혐오가 아니라,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여자를 향한 처절한 절개였다.지희의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아려왔다.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사라’라는 여자가 미치도록 부러우면서도, 그 지독한 순애보에 자신의 마음이 더 깊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한편, 복도로 나온 아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벽을 짚었다.사라를 닮은 지희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느껴졌던 그 찰나의 흔들림이 죄악처럼 느껴졌다.“……사라야, 미안해.”그는 떨리는 손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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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하지만 아스는 지희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낮게 읊조렸다.“당신 아버지가 말했지. 약혼이 서로에게 이득이라고. 그래서 그 이득의 근거를 없애주려는 것뿐이야.”“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건 당신 인생이잖아!”“한지희 씨.”아스가 처음으로 지희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그 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어둡고 축축했다. 지희는 그 눈빛에 압도되어 숨을 멈췄다.“이 매장은 오늘로 죽어. 당신 아버지가 나를 압박할 카드로 이 매장을 점찍었다면 오산이야. 난 지키기 위해 파괴할 거니까.”“……잔인해. 당신 정말 나쁜 사람이야.”지희의 목소리가 떨렸다.아스는 그런 지희를 더 잔인하게 무시하며 곁을 지나쳐 나갔다.“앞으로 다시는 내 매장을 찾아오지 마. 이제 사라 패션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당신이 쫓아다닐 대상도, 당신 아버지가 먹어 치울 먹잇감도 사라졌다는 소리야.”아스는 돌아보지 않고 매장을 나섰다.지희는 돌아서 가는 아스를 보며 마음이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아스의 복수는 한 회장뿐만 아니라, 그를 진심으로 쟁취하려 했던 지희의 마음까지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었다.***루리앤의 겨울 패션 런칭쇼를 앞두고 패션계의 시선은 오직 한곳으로 쏠렸다.광고계와 SNS를 장악한 ‘미지의 신인’ 서아의 행보였다.모리가 촬영한 화보가 공개되자마자 서버가 다운될 정도의 폭발적인 반응이 일었고, 서아가 입은 코트와 머플러는 정식 런칭 전부터 예약 판매 완판이라는 기염을 토했다.“이번 겨울 쇼의 메인, 그리고 피날레는 무조건 서아다.”모리는 확신에 찬 어조로 회의실 테이블을 내리쳤다.화보의 화제성이 실질적인 매출 지표로 증명되자, 루리앤 내부의 반대 여론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서아는 이제 모리의 사적인 뮤즈를 넘어, 루리앤의 사활을 건 ‘대표 모델’로 격상된 것이다.런칭쇼 당일, 스튜디오의 백스테이지는 흡사 전쟁터와 같았다.수십 명의 스태프가 분주히 움직이는 가운데, 그 중심에는 정적의 핵처럼 서아가 앉아 있었다.거울 속 서아의 모습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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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런칭쇼 피날레까지 단 10분.스태프들이 분주히 오가는 백스테이지 구석에서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비릿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미연과 그 일행이 서아의 피날레 드레스가 걸린 랙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어머, 실수야. 가위가 손에서 미끄러졌네?”미연의 손에는 날카로운 재단 가위가 들려 있었고, 그 발치에는 이번 쇼의 정점이자 그레모리가 밤새워 작업한 순백의 실크 드레스가 처참하게 찢겨 있었다.어깨선부터 가슴팍까지 길게 갈린 옷감은 마치 상처 입은 새의 날개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이제 어떡해? 이거 입고 나가면 피날레가 아니라 코미디가 되겠는데?”뒤늦게 달려온 서아가 훼손된 드레스를 보고 하얗게 질려 굳어버렸다.눈물이 차오르기도 전에, 등 뒤에서 서늘한 냉기가 느껴졌다.“무슨 소란이지?”그레모리였다.그녀의 등장에 미연은 급히 가위를 숨기며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미 늦었다.그레모리의 시선은 바닥에 처참하게 찢긴 드레스에 꽂혔다.폭풍 전야 같은 정적이 백스테이지를 짓눌렀다.미연이 변명을 늘어놓으려 입을 떼려는 찰나, 그레모리가 천천히 걸어와 드레스의 찢어진 단면을 손가락으로 훑었다.그녀의 입가에 기묘하고도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오히려 좋아.”“……네?”당황한 것은 미연뿐만이 아니었다.서아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레모리를 바라보았다.그레모리는 미연의 손에서 가위를 낚아채더니, 망설임 없이 드레스의 반대쪽 어깨와 밑단을 더 거칠게 찢어발겼다.“순백의 천사 같은 피날레? 따분해. 세상은 완벽한 것보다 파괴된 것에 더 열광하는 법이거든.”그레모리는 찢어진 옷감 사이로 드러난 서아의 가냘픈 어깨를 꽉 쥐었다.“서아아, 들리니? 밖에서 널 기다리는 사람들의 갈증이. 넌 오늘 가시밭길을 걷는 순교자가 되는 거야. 상처 입고 찢겼지만, 그 누구보다 고고하게.”그레모리는 서아의 쇄골에 붉은 립스틱을 짓이기듯 발라 마치 붉은 선혈이 흐르는 것 같은 연출을 더 했다.미연 일행을 향해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오직 서아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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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며 멀리하려 했던 시간이 무색해질 만큼, 품 안의 서아는 너무나 가벼웠고 또 위태로웠다.펠은 이를 악물며 그녀를 더 깊이 끌어안았다.이것이 소유욕인지, 아니면 그가 그토록 경멸하던 인간의 '사랑'인지 확인하는 것조차 두려울만큼 강렬한 이끌림이었다.서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눈앞에는 차가운 달빛을 등진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펠의 얼굴이 있었다.평소의 오만함은 온데간데없고, 형용할 수 없는 고통과 열망이 뒤섞인 기묘한 표정.서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왜 그랬어?”질문은 공중에서 힘없이 흩어졌다.펠은 대답 대신 서아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 넘겼다.서아는 멈추지 않고 따져 물었다.“나 멀리했잖아. 쳐다보지도 말라며, 거슬린다며. 그런데 왜 또 이렇게 도와주는 건데? 내 마음을 어디까지 망가뜨려야 속이 시원하겠어?”서아의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흘러 펠의 손등에 떨어졌다.뜨거운 눈물이 닿은 자리가 마치 불에 데인 듯 화끈거렸다.펠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그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계약 때문이라는 구차한 변명 뒤에 숨길 수 없음을 깨달았다.“망가지는 건 너만이 아니야, 한서아.”펠의 목소리가 낮게 읖조렸다.그는 서아의 턱을 잡아 자신을 똑바로 보게 했다.“네가 무대에서 쓰러지는 순간, 내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어. 악마에겐 있지도 않은 그 심장이 발밑으로 꺼지는 것 같았다고. 이래도 내가 널 단순히 ‘계약자’로만 보는 것 같아?”“그럼 뭔데? 너한테 난 도대체 뭔데……!”서아의 외침은 끝맺어지지 못했다.펠이 거칠게 서아의 입술을 집어삼켰기 때문이다.그것은 다정한 위로라기보다 절박한 항복에 가까운 행위였다.펠은 서아를 부서뜨릴 듯 강하게 끌어안으며, 오랜 시간 억눌러왔던 갈증을 한꺼번에 쏟아냈다.서아는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라 몸을 떨었지만, 이내 그의 목을 감싸 안으며 그가 내뿜는 뜨거운 숨결에 몸을 맡겼다.펠의 입술에서 느껴지는 것은 지독하리만큼 뜨거운 진심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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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그 말이 신호탄이었다.펠은 참아왔던 이성을 놓아버린 듯 서아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겨 입술을 겹쳤다.펠의 입술은 뜨겁고도 차가웠다.서아의 찢긴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어깨를 그의 커다란 손이 거칠게 훑고 지나갈 때마다, 서아는 전신이 저릿한 쾌락에 휩싸여 발끝을 세웠다.펠은 서아의 아랫입술을 잘게 씹으며 그녀의 작은 신음 소리조차 자신의 폐부로 들이마셨다.달빛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뒤엉켰다.더 이상 계약 이행을 위한 연기가 아니었다.서아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미리부터 슬퍼할 필요는 없다.10년 뒤의 소멸보다 지금 이 남자의 혀끝에서 느껴지는 진한 갈망이 훨씬 더 현실적이었으니까.펠 역시 다짐했다.이 여자의 영혼을 거두는 날, 자신 또한 기꺼이 무(無)로 돌아가겠노라고.***사라 패션의 정적이 감도는 대표실의 문이 열렸다.지희는 평소의 화려하고 거만했던 태도를 벗어던진 채, 구겨진 자존심을 애써 갈무리하며 아스 앞에 섰다.아스는 창밖을 내다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지희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우리 아버지가 하신 무례했던 말들,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아스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지희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동자는 메마른 사막처럼 황량했다.사과를 받았음에도 그의 표정에는 어떠한 안도감도 없었다.“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한 회장님은 그저 자기 방식대로 하신 것뿐이니까요.”“그래서 그렇게까지 하신 건가요? 매장을 없애고, 당신이 지켜온 그 모든 시간을 스스로 불태우면서까지…… 나를 거부해야 했나요?”지희의 목소리가 떨려왔다.그녀는 아스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언제나 당당했던 그녀의 눈에 처음으로 처연한 진심이 고였다.“진지하게 묻고 싶어요. 도대체 이유가 뭐예요? 내가 한 회장의 딸이라서? 아니면 내가 당신한테 부족해서? 매장까지 없애버릴 만큼 내가 그렇게 끔찍한 존재인가요?”아스는 대답 대신 그저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았다.지희는 너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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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백스테이지의 화려한 소음이 닿지 않는 외진 숲의 폐허.그레모리는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미카엘을 찾았다.부서진 석조 기둥 위에 앉아 있던 미카엘이 빛바랜 금발을 쓸어 넘기며 특유의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안녕, 모리? 날 경멸하던 네가 먼저 나를 찾다니, 정말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네.”“나도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야.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 돋으니까 입 다물어.”그레모리는 혐오감을 숨기지 않은 채 차갑게 대꾸했다.악마와 천사.태생부터 상극인 두 존재 사이에 팽팽한 살얼음판이 깔렸다.미카엘은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그럼, 본론만 말해볼까. 왜 날 찾았어?”“너, 아직도 루루의 계약을 방해하고 다닌다며?”“그게 왜? 그거 따지려고 새삼스럽게 여기까지 온 거야? 신의 순리를 지키는 건 내 취미이자 본업이라서 말이야.”미카엘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그레모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한 걸음 다가갔다.그녀의 눈동자에는 아티스트 특유의 광기 어린 집착이 서려 있었다.“아니. 나랑 손잡고 한서아와 루루의 계약을 파기하는 거 어때?”“뭐……?”미카엘의 미소가 일순간 굳었다.예상치 못한 제안이었다.그레모리는 감정을 억누르듯 낮은 목소리로 이어갔다.“난 한서아 라는 완벽한 피사체가 필요해. 10년 후 그 아이의 영혼이 거두어져 죽는 걸 원하지 않아. 그 재능이 썩는 건 예술에 대한 모독이니까. 너 역시 루루가 계약을 이행하지 못하도록 늘 훼방을 놓잖아. 그놈의 고리타분한 순리라는 핑계를 대면서.”그레모리의 제안은 미카엘에게 충분히 솔깃한 독 사과였다.이미 서아를 향한 마음이 단순한 연민을 넘어선 그에게, 그녀의 수명을 늘릴 수 있다는 말은 무엇보다 강력한 유혹이었다.하지만 그레모리는 결정적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서아와 펠의 계약 기간은 10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미카엘은 굳이 그 허점을 정정하지 않았다.진실을 밝히는 것은 이 달콤한 제안을 가로막는 방해물일 뿐이었으니까.“좋아. 흥미롭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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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서아는 몸의 실루엣을 따라 유연하게 흐르는 최고급 화이트 실크 슈트를 입고 있었다.브라탑 위로 걸친 재킷은 단추를 채우지 않아,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드러나는 굴곡이 보는 이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했다.젖은 듯 뒤로 넘긴 슬릭백 헤어는 그녀의 하얀 이마와 날카로운 턱선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평소의 망설임은 간데없고, 만물을 굽어보는 듯한 오만한 우아함이 카메라 렌즈를 꿰뚫고 있었다.“세상에, 루루. 저 눈빛 좀 봐. 저건 인간의 것이 아니야.”그레모리가 모니터를 가리키며, 쾌락에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자신이 이 공간의 유일한 주인임을 완벽하게 자각한 지배자의 눈이지. 네가 저 영혼을 헐값에 샀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보기엔 네가 저 눈빛에 영혼을 저당 잡혀야 할 판국인걸?”그레모리의 비아냥은 펠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펠의 시선은 서아가 와인 잔을 든 채 창가에 기대어 살짝 고개를 돌리는 찰나에 고정되었다.차가운 화이트 슈트가 주는 결벽적인 순백이 역설적으로 그녀의 살아있는 박동을 더욱 선명하게 도드라지게 만들었다.그것은 펠이 심어준 '사랑의 연기'가 아니었다.펠이 가르친 적 없는,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한 존재감이었다.셔터 소리가 멈춘 짧은 정적 속에서 서아가 문득 고개를 돌려 어둠 속에 숨은 펠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입가에 희미하고도 매혹적인 미소를 띠더니, 마치 그를 유혹하듯 와인 잔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그 순간, 펠의 인내심이 끊어졌다.그는 조명이 쏟아지는 촬영장 한복판으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갔다.당황한 스태프들이 웅성거렸지만, 펠의 눈에는 오직 백색의 빛 속에 잠긴 서아뿐이었다.“촬영 중단해.”펠의 낮고 서늘한 명령에 스태프들이 얼어붙었다.그는 서아의 앞까지 순식간에 다가가 그녀의 손에 들린 와인 잔을 뺏어 옆 테이블에 거칠게 내려놓았다.쨍그랑.잔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펠이 서아의 어깨를 바짝 당겨 안았다.“……펠? 갑자기 왜 그래?”방금까지 카메라 앞에서 서늘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던 서아가 동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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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그레모리가 손가락을 튕기자, 붉은빛이 감도는 핀 조명이 두 사람을 좁게 비추었다.펠은 거칠게 풀어헤친 셔츠 차림으로 서아의 등 뒤에 섰다.커다란 손이 서아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아 제 몸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펠, 너무 가까운 거 아니야……?”서아가 귓가에 닿는 펠의 뜨거운 숨결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하지만 펠은 대답 대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낮게 읊조렸다.“가만히 있어. 도망가면 더 화날 것 같으니까.”펠의 시선은 카메라가 아닌, 오직 서아의 옆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마치 당장이라도 그녀를 집어삼킬 듯한 포식자의 갈증이 서린 눈빛이었다.서아는 그의 품 안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고동과 서늘한 마력의 향기에 정신이 아득해졌다.펠의 긴 손가락이 서아의 하얀 재킷 깃을 타고 내려와 그녀의 손을 깍지 껴 쥐었다.거울처럼 마주 본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히는 순간, 스튜디오 안의 공기가 타오를 듯 뜨거워졌다.그것은 계약 관계를 넘어선, 날 것 그대로의 욕망이 부딪히는 소리 없는 폭발이었다.분위기가 반전되었다.그레모리는 조명을 부드러운 웜톤으로 바꾸고, 소품으로 놓인 커다란 가죽 소파를 활용하라고 지시했다.“이번엔 힘 빼. 그냥 늘 있는 일처럼, 서로가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존재인 것처럼.”펠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고 앉아 한쪽 팔을 소파 등받이에 걸쳤다.서아는 자연스럽게 그의 다리 사이 공간에 자리를 잡고 앉아, 펠의 가슴에 등을 기대었다.펠의 다른 한 손이 서아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정리해 주었다.“아까보다 훨씬 낫다. 그치?”서아가 고개를 살짝 들어 펠을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펠은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손길만큼은 서아의 뺨을 스치듯 조심스럽게 머물렀다.펠이 서아의 어깨 위로 턱을 괴자, 서아는 익숙하다는 듯 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두 사람 사이에는 억지로 꾸며낸 긴장감이 없었다.수천 년을 함께 산 반려들처럼, 서로의 체온이 가장 완벽한 안식처가 된 듯한 평온함이 흘렀다.카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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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화보가 공개된 건 평범한 월요일 오전 10시였다.하지만 그 결과는 평범하지 않았다.그레모리가 개인 SNS와 패션 매거진 공식 계정에 [The White Sanctuary]라는 제목으로 서아와 펠의 커플 컷을 올리자마자, 인터넷은 그야말로 폭발했다.“이거 보정 아니지? 어떻게 사람이 저런 분위기를 내?”“옆에 있는 남자는 누구야? 모델이야? 서아랑 케미 미쳤다….”“슈트 핏 봐. 한서아, 지금까지 왜 이런 거 안 보여줬어?”단순한 화보 홍보 수준이 아니었다.'한서아 화이트 슈트', '한서아, 모델 남자 케미' 같은 키워드가 실시간 검색어 상단을 점령했다.특히 서아의 그 무심한 듯 고결한 눈빛과 그녀를 집어삼킬 듯 응시하는 펠의 위험한 텐션이 담긴 컷은 전 세계 팬들의 감성을 자극했다.서아는 아침부터 쉴 새 없이 울려대는 휴대전화 알림에 잠에서 깼다.“……어? 이게 다 뭐야?”SNS 팔로워 수는 초당 수천 명씩 늘어나고 있었다.화보 속 '여왕' 같던 모습은 간데없고, 침대 위에서 머리를 헝클어뜨린 채 당황해하는 서아의 모습은 영락없는 소녀였다.그때, 펠이 커피잔을 들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펠! 이거 봐, 사람들이 다 우리 얘기만 해. 나 어떡해? 무서워!”서아가 휴대전화를 내밀며 칭얼거리자, 펠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 그녀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무서울 게 뭐 있어. 넌 그냥 거기 서 있었을 뿐이고, 사람들은 네 진짜 가치를 이제야 알아보는 건데.”“그래도……. 저 남자 누구냐고 묻는 사람들도 엄청 많아. 너 모델 데뷔하라고 난리야!”그 말에 펠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그는 서아의 손목을 잡아채며 얼굴을 가까이 밀착시켰다.“모델 데뷔? 웃기지 마. 다른 여자들과 카메라 앞에 설 생각 죽어도 없으니까. 물론 네 상대 남자 모델로는 나뿐이겠지만”서아는 그의 질투 섞인 대답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엘은 대형 모니터 가득 띄워진 서아의 화보를 응시하고 있었다.화이트 슈트를 입고 고결하게 빛나는 서아.그리고 그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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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한편, 패션계의 거물 ‘사라 패션’의 수장인 아스모데우스는 평소와 다름없이 우아한 몸짓으로 집무실 창가에 서 있었다.하지만 그의 손에 들린 태블릿 속 화면에는 루리앤의 신작 화보와 한서아라는 이름이 끊임없이 점멸하고 있었다.루리앤.그레모리라는 발칙한 실장이 이끄는 그 신예 브랜드가 감히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브랜드가 품은 ‘새로운 얼굴’이 아스모데우스의 감각을 날카롭게 긁어대고 있었다.“……거슬리는군.”낮게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불쾌함과 경탄이 기묘하게 섞여 있었다.아스모데우스는 욕망을 먹고 사는 악마였다.그는 인간의 눈빛만 봐도 그가 무엇을 갈망하는지, 그 영혼이 얼마나 저급하거나 고결한지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그런데 화보 속 한서아는 달랐다.그녀는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는 듯한 순수한 얼굴로, 세상 모든 이의 갈망을 끌어당기는 거대한 블랙홀 같은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특히 그녀 옆을 지키는 펠의 존재는 아스모데우스의 오만함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고결한 척하던 펠이 고작 인간 여자 하나를 위해 스스로 카메라 앞에 서서 호위무사 노릇을 자처하다니.“루리앤의 인기가 치솟을수록 사람들은 더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되겠지.”아스모데우스는 책상 위로 태블릿을 거칠게 던졌다.툭, 소리와 함께 화면 속 서아의 눈동자가 그를 비웃는 듯했다.아스모데우스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입술을 훑으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그레모리가 공들여 빚은 인형인 줄 알았더니, 제법 생명력이 넘치는군. 하지만 너무 밝은 빛은 눈을 멀게 하는 법이지.”그는 비서실로 연결되는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루리앤의 다음 행보를 단순히 지켜만 볼 생각은 없었다.욕망의 주인인 그에게, 가지고 싶은 장난감이 생겼을 때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뿐이었다.완벽하게 소유하거나, 아니면 다른 누구도 가질 수 없게 망가뜨리거나.“루리앤의 다음 시즌 기획안 전부 가져와. 그리고…… 한서아에 대해 모델 이상의 것을 조사해.”루리앤 패션의 야심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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