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빌었더니, 계약이 시작됐다

사랑을 빌었더니, 계약이 시작됐다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3-27
Oleh:  소담결Tamat
Bahasa: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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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빌었을 뿐인데… 왜 내가 그 남자 거야?” 단 한 번, 사랑받고 싶었다. 그래서였다. 그 수상한 남자와 계약을 맺은 건. “대가는 간단해. 네 영혼.” …미친 줄 알았다. 그런데 다음 날, 그가 다시 나타났다. “이제 시작하자. 연애.” 도망칠 수 없다. 계약은 이미 끝났으니까. 차갑고 위험한 남자, 펠. 그런데... 왜 자꾸 설레는 거지? 이 연애, 끝나면 나는 살아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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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 1

1화

“신이 저주스럽다.”

입 밖으로 비명이 새어 나간 순간, 서아는 스스로도 놀라 제 입을 틀어막았다.

손바닥 너머로 비릿한 알코올 향이 훅 끼쳤다.

“…미쳤네, 나.”

텅 빈 골목이었다. 자정을 넘긴 시간,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길고양이가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소리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금 내뱉은 말이 허공에 흩어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에 ‘닿은’ 것 같은 서늘함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깜빡, 깜빡.

머리 위 전등이 임종을 앞둔 환자처럼 가쁘게 명멸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불빛이 골목의 그림자를 비정상적으로 늘어뜨렸다.

서아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겨우 지탱하며 벽을 짚었다.

억지로 끌려간 회식 자리에서 꾸역꾸역 들이부은 소주가 속을 뒤집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더 괴롭히는 건 숙취가 아니었다.

내일, 그리고 그 모레.

시지프스의 형벌마냥 반복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비루할 일상이었다.

“하… 진짜.”

짧은 한숨이 차가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와, 방금 그거 꽤 마음에 드는데?”

그 순간, 서아의 등 바로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전율이 일었다. 서아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술기운에 무뎌졌던 감각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뭐야.”

서아는 녹슨 기계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밤의 어둠을 그대로 오려다 붙여놓은 것 같은 남자가 서 있었다.

가로등 불빛조차 빨아들이는 칠흑 같은 머리칼, 그리고 비현실적일 만큼 창백한 피부.

무엇보다 서아의 시선을 묶어버린 것은 인간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서늘하고 어긋난 눈동자였다.

“신을 저주하는 인간이라니.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수집품이거든.”

남자가 입꼬리를 뒤틀며 웃었다.

서아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공포보다 먼저 치민 것은 불쾌감이었다.

‘미친놈인가. 요즘 도를 아십니까는 야근도 하나.’

“관심 없으니까 가던 길 가세요. 경찰 부르기 전에.”

무심하게 뱉어낸 서아가 다시 몸을 돌려 발을 뗐다.

하지만 남자의 존재감은 그림자처럼 그녀의 뒤꿈치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아쉽네. 큰맘 먹고 영업 나온 건데.”

남자가 한 발짝 다가왔다.

찰나의 순간, 주변의 온도가 영하로 곤두박질쳤다.

폐부로 들어오는 공기가 얼음 파편처럼 날카로웠다.

서아의 발걸음이 자석에 이끌리듯 멈췄다.

“네 소원, 들어줄 수 있어.”

“…뭐?”

“말 그대로야.”

남자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우아하면서도 기괴했다.

“돈, 명예, 복수. 네가 그 좁은 머릿속으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

서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비릿한 조소가 입술 사이로 흘렀다.

“사기 치지 마요. 아저씨 같은 사람 많이 봤으니까.”

“사기가 아닌데.”

남자의 눈이 가늘어지며 기이한 빛을 냈다.

“대신 조건이 있지.”

“…조건?”

“네 영혼. 그건 내가 가져간다.”

골목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 진짜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아저씨, 내 영혼? 이미 회사에 팔아넘긴 지 오래거든요? 가져갈 게 없어서 사양할게요. 이미 내 인생은 지옥이니까.”

서아는 다시 몸을 돌렸다.

이번에야말로 이 기괴한 대화를 끝낼 작정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래서 더 탐나는데.”

그녀의 발걸음이 다시 멈췄다.

“뭐…?”

“지옥 같은 인생을 사는 인간이, 벼랑 끝에서 어떤 소원을 뱉어낼지.”

남자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머리로는 무시하고 지나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발이 바닥에 붙어버린 듯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뭘 원할 줄 알고 그런 소릴 해.”

“몰라.”

남자가 어느새 서아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에게선 향수 냄새도, 사람의 체취도 아닌, 서늘한 숲의 냄새가 났다.

“그래서 궁금해. 네가 이 비참함을 대가로 무엇을 살지.”

잠깐의 정적 속에서 서아는 남자의 눈을 노려보았다.

오기가 치밀었다.

미친놈이라면 제대로 미친 소리로 받아쳐 주고 싶었다.

당황하는 기색이라도 보고 싶었다.

서아의 입꼬리가 천천히, 아주 가파르게 올라갔다.

“좋아. 거래해.”

남자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이제야 말이 통하네.”

남자가 허리를 숙여 서아의 시선 높이를 맞췄다.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 서아는 도망치지 않고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혹은 기이할 정도로 느리게 뛰었다.

“말해봐. 뭘 원해?”

서아는 떨리는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명확했다.

“…나를.”

마지막 단어가 나오기 전, 골목의 공기가 멈춘 듯 고요해졌다.

“사랑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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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유진
백유진
탐난다..루시퍼의 사랑.. !! 아주 재밌게 잘 봤습니다
2026-04-12 16: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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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령
연화령
너무 재미있네요. 흥미로워서 계속 읽게되요!
2026-03-13 08: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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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jk0367
jk0367
술술 읽히네요 막장 아니라서 좋아요 가볍고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2026-03-09 18:33:00
2
0
최호석
최호석
재밋게 잘 보고 있습니다
2026-03-08 21:15:42
2
0
Hanae Kang
Hanae Kang
재밌어요. 궁금해서 계속 읽게되요.
2026-03-08 09: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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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Bab
1화
“신이 저주스럽다.”입 밖으로 비명이 새어 나간 순간, 서아는 스스로도 놀라 제 입을 틀어막았다.손바닥 너머로 비릿한 알코올 향이 훅 끼쳤다.“…미쳤네, 나.”텅 빈 골목이었다. 자정을 넘긴 시간,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길고양이가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소리뿐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금 내뱉은 말이 허공에 흩어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에 ‘닿은’ 것 같은 서늘함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깜빡, 깜빡.머리 위 전등이 임종을 앞둔 환자처럼 가쁘게 명멸했다.위태롭게 흔들리는 불빛이 골목의 그림자를 비정상적으로 늘어뜨렸다.서아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겨우 지탱하며 벽을 짚었다.억지로 끌려간 회식 자리에서 꾸역꾸역 들이부은 소주가 속을 뒤집어놓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그녀를 더 괴롭히는 건 숙취가 아니었다.내일, 그리고 그 모레.시지프스의 형벌마냥 반복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비루할 일상이었다.“하… 진짜.”짧은 한숨이 차가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와, 방금 그거 꽤 마음에 드는데?”그 순간, 서아의 등 바로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고막을 찔렀다.전율이 일었다. 서아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술기운에 무뎌졌던 감각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뭐야.”서아는 녹슨 기계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그곳에는 밤의 어둠을 그대로 오려다 붙여놓은 것 같은 남자가 서 있었다.가로등 불빛조차 빨아들이는 칠흑 같은 머리칼, 그리고 비현실적일 만큼 창백한 피부.무엇보다 서아의 시선을 묶어버린 것은 인간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서늘하고 어긋난 눈동자였다.“신을 저주하는 인간이라니.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수집품이거든.”남자가 입꼬리를 뒤틀며 웃었다.서아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공포보다 먼저 치민 것은 불쾌감이었다.‘미친놈인가. 요즘 도를 아십니까는 야근도 하나.’“관심 없으니까 가던 길 가세요. 경찰 부르기 전에.”무심하게 뱉어낸 서아가 다시 몸을 돌려 발을 뗐다.하지만 남자의 존재감은 그림자처럼 그녀의 뒤꿈치에 붙어 떨어지지 않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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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서아의 눈썹이 파르르 꿈틀했다.황당함과 불신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녀가 되물었다.“뭐?” “말 그대로야. 나는 인간이 아니야.”남자는 점심 메뉴라도 고르는 사람처럼 덤덤하게 내뱉었다.서아는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맥 빠진 웃음을 흘리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아, 네네. 그러시겠죠. 얼굴이 이렇게 비현실적인데 인간이면 반칙이지.” “…….” “그래서요? 정체가 뭔데? 외계인? 아니면 어디 신화에 나오는 신? 그것도 아니면 악마?”비아냥거리는 말투였지만, 펠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는 서아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대답을 골랐다.“굳이 네 지식 체계 안에서 분류하자면—”펠의 말이 멈췄다.동시에 골목을 메우던 가로등의 미세한 웅웅거림조차 잦아들었다.“너희가 부르던 이름으로는… ‘악마’에 가깝겠지.”순간, 진한 밤안개가 발목을 감싸듯 골목의 공기가 서늘하게 식었다.서아는 소름이 돋은 팔을 무의식적으로 문질렀다.“하… 진짜 컨셉 확실하시네. 무슨 연극 배우라도 돼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아는 완전히 웃어넘길 수 없었다.아까 스쳤던 그의 손, 그 비정상적으로 차가운 온기.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심장을 짓누르는 묘한 압박감이 그녀의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진짜면…? 만약 이 미친 상황이 진짜라면.’아주 잠깐 스친 생각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서아의 심장에 박혔다.서아는 일부러 밝은 톤으로 목소리를 높였다.“좋아, 악마님이시라고 치고. 그럼 질문 하나만 하죠.”펠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며 그녀의 입술에 주목했다.“사랑은 어떻게 해줄 건데? 악마가 사랑도 하나?”직설적인 질문에 펠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완벽하게 조각된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곤혹스러운 기색이 스쳤다.“…그게 문제지.” “뭐?” “나는 ‘감정’을 연성하거나 무(無)에서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니야. 나는 조건을 맞추고 결과를 도출하는 쪽이지.” “그게 뭔 소리야. 사랑해 달라니까?”서아의 미간이 좁아졌다.펠은 한 발짝 더 다가와 서아의 그림자를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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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펠은 서아의 머릿속이 얼마나 어지러운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소원을 들어준다는 건 빈말이 아니야. 내 사전엔 허언이란 없거든.”가볍게 덧붙인 말이었지만,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무게감이 남달랐다.“다만 네 소원은 좀 까다롭긴 해. '사랑'이라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보다 난해하거든. 시간도 꽤 걸릴 거고.”서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바라봤다.남자의 눈동자는 깊은 심연처럼 고요해서 도무지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이렇게 골치 아픈 걸 소원이라고 내뱉을 줄 알았으면, 애초에 ‘뭐든 들어준다’ 같은 호기는 안 부렸을 텐데. 아쉽게도 나에겐 인간의 속을 꿰뚫는 독심술 따위는 없어서 말이야.”펠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그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고 태연해서, 서아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하지만 골목이 깊어지고 가로등 불빛이 멀어질수록,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의 뺨을 때리며 정신을 깨웠다.‘잠깐. 나 지금… 정체도 모르는 위험한 놈을 집 근처까지 끌고 가는 거 아냐?’술기운에 억눌려 있던 생존 본능이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서아는 급히 걸음을 멈추고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그, 저기….”서아는 경직된 근육을 억지로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여기서 헤어져. 집 거의 다 왔고, 이쪽부턴 큰길이라 밝아서 괜찮거든.”입 밖으로 낸 말은 정중했지만, 속마음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악마고 뭐고, 지금 네가 제일 위험하다고!’펠이 우뚝 멈춰 섰다.그는 서아의 비겁한 퇴로를 이미 읽었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제 휴대전화를 내밀었다.“그래. 그럼 들어가.”예상외로 순순한 물러남이었다.서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대신 번호는 저장해 둬. 내일 데이트해야 하니까.”“……데, 데이트?”“응. ”펠의 눈은 지나치게 진지했다.농담이라고는 한 톨도 섞이지 않은 그 정직한 시선이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아, 아니… 저기!”서아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뒷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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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펠은 서아의 머릿속이 얼마나 어지러운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소원을 들어준다는 건 빈말이 아니야. 내 사전엔 허언이란 없거든.”가볍게 덧붙인 말이었지만,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무게감이 남달랐다.“다만 네 소원은 좀 까다롭긴 해. '사랑'이라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보다 난해하거든. 시간도 꽤 걸릴 거고.”서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바라봤다. 남자의 눈동자는 깊은 심연처럼 고요해서 도무지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이렇게 골치 아픈 걸 소원이라고 내뱉을 줄 알았으면, 애초에 ‘뭐든 들어준다’ 같은 호기는 안 부렸을 텐데. 아쉽게도 나에겐 인간의 속을 꿰뚫는 독심술 따위는 없어서 말이야.”펠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고 태연해서, 서아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골목이 깊어지고 가로등 불빛이 멀어질수록,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의 뺨을 때리며 정신을 깨웠다.‘잠깐. 나 지금… 정체도 모르는 위험한 놈을 집 근처까지 끌고 가는 거 아냐?’술기운에 억눌려 있던 생존 본능이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서아는 급히 걸음을 멈추고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그, 저기….”서아는 경직된 근육을 억지로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여기서 헤어져요. 집 거의 다 왔고, 이쪽부턴 큰길이라 밝아서 괜찮거든요.”입 밖으로 낸 말은 정중했지만, 속마음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악마고 뭐고, 지금 네가 제일 위험하다고!’펠이 우뚝 멈춰 섰다. 그는 서아의 비겁한 퇴로를 이미 읽었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제 휴대전화를 내밀었다.“그래. 그럼 들어가.”예상외로 순순한 물러남이었다. 서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대신 번호는 저장해 둬. 내일 데이트해야 하니까.”“……네? 데, 데이트요?”“응. 연애를 하기로 계약했으면 데이트를 하는 게 인간의 절차라며.”펠의 눈은 지나치게 진지했다. 농담이라고는 한 톨도 섞이지 않은 그 정직한 시선이 오히려 더 소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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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그의 목소리, 확신에 찬 그 눈빛이 자꾸만 뇌리를 스쳤다. 너무나 당당하고 자신 있게 말하던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믿고 싶어지는, 말도 안 되는 기분이 자꾸만 서아를 괴롭혔다. ‘내일이면 정체를 알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정말 나가볼까? 그러다 이상한 섬으로 팔려 가면 어떡하지?’ 머릿속에선 수만 가지 비극적인 시나리오가 써졌다가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밤을 꼬박 새우고 동이 터 올 무렵에야 서아는 결정을 내렸다. 만나보기로. 진짜 미친놈인지, 아니면 정말 믿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위험하다는 경각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 앞서는 건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이었다. 저렇게 멀쩡하고 잘생긴 남자가 왜 그런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지, 그 이면을 보고 싶었다. “후, 죽기야 하겠어.” 서아는 거울 앞에 섰다. 퀭한 눈가를 화장으로 가리고, 어젯밤과는 다른 단정한 옷을 골라 입었다. 어젯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정체불명의 남자와의 첫 데이트. 서아는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챙겼다. 약속 시간인 10시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입을 옷이 마땅치 않아 옷장을 몇 번이나 뒤엎었는지 모른다. 그나마 가장 괜찮은 것을 골라 입었음에도,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그냥 출근할걸. 괜히 아프다고 거짓말했나. 하루 일당이 얼마인데.’ 후회가 밀려오면서도 서아는 세수를 세 번이나 다시 하며 서툰 화장에 공을 들였다. 평소 거치적거려 질끈 묶었던 머리도 오늘은 어깨 위로 길게 풀러 내렸다. 조금 푸석하긴 했지만,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내고 싶었다. 데이트라는 단어가 이토록 가슴 뛰는 것이었던가. 자신도 모르게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발견하고 서아는 황급히 얼굴을 굳혔다. ‘미쳤어, 윤서아. 누군지도 모르는 놈 만나러 가면서 뭐가 좋다고 헤실거려? 위험한 외출일지도 모른다고!’ 이성과 감정이 머릿속에서 치열하게 치고받는 와중에도 외출 준비는 멈추지 않았다. 현관 앞에 선 서아의 시선이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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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팝콘 먹다가 손이라도 맞닿으면 어떡하지?’ 하지만 기대(?)와 달리 영화가 끝날 때까지 팔꿈치 한 번 부딪히지 않았다. 펠은 조각상처럼 굳은 채 화면만 응시할 뿐이었다. ‘바보같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미친놈이니 위험한 놈이니 하더니 손 맞닿을 걱정이나 하고. 네가 무슨 드라마 여주인공이냐?’ 자괴감이 밀려왔다.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을 나서는 인파 속에서, 펠은 서아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다시 한번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서아의 따뜻한 손바닥이 살짝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펠은 정면을 응시한 채, 아주 작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꽤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갑자기 훅 끼어든 온기. 또다시 제 손을 덥석 잡아끄는 펠의 행동에 서아의 고개가 자동으로 바닥을 향했다. 터질 듯한 심장 소리가 발끝까지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왜 자꾸 바닥만 보고 걸어? 그러다 어디 부딪히겠어.” “아닌데? 나 앞만 보면서 아주 잘 걷고 있는데?” 서아는 뜨끔한 마음에 고개를 바짝 치켜들었다. 목에 깁스라도 한 사람처럼 뻣뻣하게 정면을 응시하며 대답했지만, 이미 펠의 입가엔 짓궂은 미소가 번진 뒤였다. 펠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서아는 귓가까지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지만, 지지 않겠다는 듯 턱을 한껏 당긴 채 당당하게 발을 내디뎠다. 물론 펠의 시선에 비친 서아는 관절이 굳어버린 나무 인형처럼 부자연스럽게 ‘뚝딱’거리며 걷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펠은 참다못해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는 그를 느끼며 서아는 속으로 절규했다. ‘망했어. 사랑이고 계약이고 뭐고, 첫 데이트부터 완전히 망해버렸다고!’ 망가진 제 모습에 자괴감이 밀려오던 그때, 펠이 웃음을 갈무리하며 다정하게 물었다. “점심은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봐.” “먹고 싶은 거?” “응. 난 뭐든 상관없어. 사실 인간 음식 중에는 내 입에 맞는 것도 있고, 도통 안 맞는 것도 있어서 말이야.”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털어놓는 펠을 보며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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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미친놈인 줄만 알았던 이 남자는 오늘따라 지나치게 정상적이고, 심지어 세심하기까지 했다. 무뚝뚝한 듯하면서도 툭툭 내뱉는 다정함이 서아의 마음을 자꾸 건드렸다. 안내받은 가게는 사방이 화사한 꽃장식으로 가득한 예쁜 레스토랑이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어, 저는 까, 까르보나라요.” 입에 붙지 않는 생소한 이름에 말을 더듬은 서아가 민망함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스테이크를 주문한 펠이 주문서를 넘기고 직원이 사라지자, 펠이 턱을 괴며 물었다. “까르보나라가 그렇게 먹고 싶었어?” “응. 그 이름을 제일 많이 들었거든. 다른 파스타보다 훨씬 궁금했어.” “입에 맞았으면 좋겠네.” 펠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서아는 순간 ‘와’하고 감탄사를 내뱉을 뻔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보던 서늘한 미소와는 달랐다. 인간이 아닌, 천사가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로 눈부신 미소였다. 서아는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네 정체는? 오늘 알려준다며.” “너도 성격 참 급하구나? 천천히 알아가자고. 먹기도 전에 정체를 알아버리면, 그 까르보나라가 무슨 맛인지 느낄 새도 없을걸.” “뭐, 얼마나 대단한 분이시길래.” 서아가 입술을 삐죽거리던 그때, 펠의 커다란 손이 서아의 얼굴을 향해 쑥 뻗어 왔다. “뭐, 뭐 하는 거야?” 놀란 서아가 의자 뒤로 몸을 젖혔지만, 펠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아의 입술 옆을 쓱 문질렀다. 그의 손끝엔 작은 가루 하나가 묻어 있었다. “팝콘 부스러기.” 펠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것을 보여주었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줄 알았더니, 그래도 먹긴 먹었나 보네.” ‘아, 진짜… 나 오늘 왜 이러니. 모양 빠지게!’ 서아는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네가 보기에 오늘의 난 어때?” “멀쩡했어. 아주.” 서아가 새침하게 대답하자 펠이 자신만만하게 덧붙였다. “거봐. 날 알면 미친놈 소리 안 나온다니까?”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노란빛이 도는 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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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뭐, 그래. 알았어. 카페는 알아본 거야?” “응. 근데 차 타고 몇 분 가야 해. 괜찮지?” “응, 상관없어.” 식당을 나서며 펠은 거침없이 계산대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서아는 문득 어제의 기억을 더듬었다. ‘참, 영화관 올 때도 펠의 차를 타고 왔었지.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네.’ 가게 문을 나서자마자 딱딱한 보도블록의 촉감이 구두를 타고 그대로 전해졌다. 억지로 밀어 넣었던 발바닥과 발가락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잠시 기다려. 주차장에서 차 가지고 나올 테니까.” “그래.”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서아는 식당 앞에 서서 욱신거리는 발을 달래기 위해 꼼지락거렸다. 펠이 빨리 차를 끌고 나오길 기다리며, 서아는 남모르게 제자리걸음을 하며 통증을 분산시켰다. 매끄러운 엔진음과 함께 육중한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서아 앞에 멈춰 섰다. 스르륵, 창문이 내려가며 핸들을 잡은 펠의 조각 같은 옆얼굴이 드러났다. “타.” 서아는 홀린 듯 조수석 문을 열고 몸을 실었다. 먼지 하나 없이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깔끔한 실내를 보니, 펠의 성격이 다시금 짐작되었다. ‘차까지 검은색이라니. 무슨 어둠의 자식이라도 되나?’ 차에 대해 잘 모르는 서아가 보기에도 제법 비싸 보이는 차였다. 펠은 시트에 몸을 깊게 묻은 서아를 힐끗 보더니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조용하고 괜찮은 드라이브 코스를 찾았어. 드라이브, 좋아해?” “제대로 해본 적은 없지만… 버스 타고 창밖 구경하는 건 좋아하니까, 좋아한다고 해도 되겠지?” “다행이네.” 펠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서아는 그가 앞을 보는 사이, 구두 속에서 욱신거리던 발을 몰래 빼냈다. 해방감과 함께 차가운 공기가 발가락 사이를 스치자 이제야 살 것 같았다. 구두 위에 발을 살짝 올리고 한숨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발, 많이 아팠나 보네.” “……!”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지나치게 세심한 건지. 서아는 화들짝 놀라 다시 구두 안으로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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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정적이 감돌았다. 서아가 먼저 그 침묵을 깨뜨렸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정말 말해주겠지? 더는 도망갈 곳도 없잖아.” “궁금한 거 참느라 애썼어.” 펠이 여유롭게 대답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 부드러운 눈매를 보며 서아가 툭 내뱉었다. “근데 너, 아까부터 안 웃는 사람이라더니 거짓말 아냐?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째 웃었는지 알아?” “내가? 난 웃은 적 없는데.” “아, 역시 넌 미친놈이 맞나 봐. 아니면 내가 어젯밤부터 제대로 홀렸거나. 웃지도 않은 네가 내 눈에는 웃는 걸로 보였다는 게 말이 돼?” 서아의 황당하다는 반응에 펠이 결국 참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였다. “좋아. 인정할게. 웃었어. 네가 너무 웃겨서, 그리고 네 반응이 꽤 재미있어서 말이야.” “너 진짜……!” 서아가 다시 뿔이나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찰나였다. 펠의 커다란 손이 테이블 너머로 불쑥 다가와 서아의 오른손을 덥석 잡았다. 갑작스럽고도 단단한 그 악력에 서아의 심장이 발끝까지 덜컥 내려앉았다. “자, 준비해.” “뭐, 뭘 준비하라는 거야?” 서아가 당황해 말을 더듬었지만, 펠의 눈빛은 이미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갑고도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날 받아들일 준비.” “뭐?” 대체 무슨 소리냐고 되묻기도 전이었다. 서아의 사고 회로를 단번에 마비시키는 비현실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파르르, 공기가 기묘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펠의 등 뒤에서 칠흑보다 더 깊은 어둠이 일렁이더니, 이내 웅장하고 거대한 날개가 솟구쳐 올랐다. 카페의 천장을 가득 채울 듯 활짝 펼쳐진 검은 날개는 깃털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듯 기이한 빛을 내뿜으며 느릿하게 펄럭였다. 그 압도적인 위용 앞에 카페의 소음은 사라지고, 오직 날개가 공기를 가르는 서늘한 소리만이 서아의 귓가를 울렸다. “이, 이게 무슨…….” 서아는 말문이 막혔다. 비명을 지를 수도, 손을 뺄 수도 없었다.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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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서아는 필사적으로 현실을 붙잡으려 했다.눈앞의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영혼을 대가로 한 계약이 진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하지만 펠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쐐기를 박았다.“장난이라니. 내가 분명 말했지. 오늘 나에 대해 알려주겠다고. 그리고 지금 알려준 거야. 미친놈도, 정신병자도 아닌 내 진짜 모습.”펠, 아니 루치펠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났다.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의 무게였다.“그래, 미친놈도 정신병자도 아니라고 치자. 일단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쳐!”서아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지며 속사포처럼 터져 나왔다.사고의 흐름이 한계치에 다다랐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패닉 반응이었다.“루시퍼는 타락 천사,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악마’의 대명사라고! 아니, 그냥 악마 그 자체잖아! 만약 네 말이 진짜라면, 넌 미친놈은 아닐지 몰라도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놈은 맞는 거잖아. 내 말이 틀려?!”서아는 눈앞의 존재가 뿜어내는 기이한 광채와 거대한 날개를 애써 외면하며 논리적인 허점을 찾으려 발버둥 쳤다.하지만 펠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오히려 등 뒤의 날개를 우아하게 접어 내리며, 마치 억울한 누명이라도 쓴 사람처럼 태평하게 대꾸했다.“내가 악마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건 인간의 영혼을 가져가기 때문이야. 난 계약 외의 해코지는 절대 안 해. 사람들이 나에 대해 편견이 너무 심하다니까.”“편견……? 지금 ‘영혼’을 가져간다는 말을 하면서 편견이라고 하는 거야?”얼이 빠진 채 부르르 떠는 서아와 달리, 펠은 여유롭기만 했다.서아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쓰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그러니까 네가 굳이 펠이라고 부르라고 한 이유도 루치펠의 그 펠에서 따온 거였어?”“정답. 머리가 좋네.”펠이 기특하다는 듯 생긋 미소 지었다.“아니, 이건 머리가 좋은 거랑 상관없는 문제거든!”조금 전까지 스킨십 하나에 설레며 두근거렸던 심장이, 이제는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전혀 다른 의미로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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