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랑을 빌었더니, 계약이 시작됐다: Chapter 111 - Chapter 120

122 Chapters

111화(외전 2.)

외전 2화.식탁 위의 열기는 침실로 이어지며 더욱 짙고 은밀해졌다. 시우는 서아를 안아 들고 침실로 향하는 짧은 거리조차 아쉬운 듯, 그녀의 목덜미에 쉴 새 없이 입을 맞췄다. 예전 같으면 가벼운 염동력으로 몸을 띄웠겠지만, 이제는 자신의 팔 근육에 전해지는 서아의 무게감을 온전히 느끼며 걷는 발걸음이 생경하면서도 벅찼다.침대에 서아를 내려놓자마자 시우는 그 위로 몸을 겹쳐왔다. 하얀 시트 위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로 얽혔다.“하아, 시우야…… 잠깐만.”서아가 거친 숨을 내뱉으며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지만, 시우는 오히려 그녀의 손목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다. 권능이 사라진 대신 남은 인간 남자의 단단한 완력이 서아를 제압했다.“안 돼. 멈추는 법을 잊었어.”시우의 눈동자가 갈증에 허덕이는 짐승처럼 번들거렸다. 그는 서아의 티셔츠를 머리 위로 벗겨내고, 드러난 어깨선을 따라 느릿하게 혀를 내둘렀다. 닿는 곳마다 서아의 피부가 잘게 떨렸고, 그 진동은 고스란히 시우의 심장으로 전달되었다.“마력이 있을 땐 몰랐는데…… 네 살결이 이렇게 뜨거웠어?”그의 낮은 목소리가 서아의 가슴골 사이로 흩어졌다. 시우는 서아의 속옷마저 가볍게 걷어치우고, 탐스러운 곡선을 그리며 드러난 그녀의 가슴을 한 입에 머금었다.“아앗, 시우야……!”서아는 등을 활처럼 휘며 신음을 내뱉었다. 시우의 혀끝이 예민한 곳을 자극할 때마다 뇌리가 하얗게 점멸했다. 시우는 서두르지 않았다. 아니, 서두를 수 없었다. 처음 마주하는 인간의 육체가 주는 쾌락은 너무도 강렬해서, 그는 서아의 몸 구석구석을 탐닉하며 그 감각을 뼈에 새기듯 음미했다.시우의 손바닥이 서아의 매끄러운 허벅지를 타고 올라가 은밀한 곳에 닿았다. 이미 듬뿍 젖어 든 그곳의 열기에 시우는 입술을 깨물며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서아, 나 봐.”시우가 서아의 다리 사이로 자리를 잡으며 명령하듯 속삭였다. 서아가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시우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었다.“……윽!”꽉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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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외전 3.)

외전 3화.“시우야, 촬영 취소하면 위약금이 얼마인지 알아?”서아가 짐짓 꾸짖는 투로 말했지만, 시우는 대답 대신 시트 조절 레버를 당겨 서아의 좌석을 뒤로 확 젖혀버렸다.갑작스러운 반동에 서아가 당황하며 눈을 크게 뜬 순간, 시우의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를 집어삼킬 듯 덮쳐왔다.“돈 따위, 금고에 널린 금덩이라도 가져다주지. 하지만 내 눈앞에서 그놈 손길을 받아내는 건…… 단 1초도 못 참아.”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우의 입술이 서아의 입술을 짓눌렀다.아침의 다정함은 간데없고, 오로지 질투와 소유욕에 허덕이는 갈증만이 남았다.시우는 서아의 턱을 억세게 잡아 고정하고, 그녀의 입안 구석구석을 자신의 흔적으로 난도질하듯 훑었다.“으읍……!”서아의 여린 신음이 터져 나왔지만, 시우는 멈추지 않았다.오히려 그 소리에 자극받은 듯, 그의 손은 서아의 얇은 원피스 지퍼를 가차 없이 내렸다.지익,소름 끼치는 마찰음과 함께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서아의 하얀 가슴팍에 닿았다.하지만 그 차가움도 잠시, 시우의 뜨거운 손바닥이 그녀의 가슴을 으스러뜨릴 듯 움켜쥐었다.“마력이 없어서 다행인 줄 알아, 서아. 있었다면 벌써 그 스튜디오를 통째로 태워버렸을 테니까.”시우는 서아의 쇄골과 가슴골 사이를 거칠게 깨물며 붉은 낙인을 새겼다.다른 남자의 잔상이 남은 곳을 자신의 낙인으로 덮어버리려는 듯, 그의 입술은 집요하고도 잔인했다.서아는 시우의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며 등을 활처럼 휘었다.“하아, 시우야…… 여기서 이러면…… 누가 봐.”“보라고 해. 네가 누구 것인지 확실히 각인시켜 줄 테니까.”시우는 서아의 속옷을 옆으로 밀쳐내고,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거칠게 파고들었다.좁은 차 안, 가죽 시트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두 사람의 젖은 마찰음이 뒤섞여 노골적인 열기를 내뿜었다.시우가 서아의 가장 깊은 곳을 단숨에 꿰뚫자, 서아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비명을 지르듯 숨을 몰아쉬었다.“아……! 시우, 시우야!”“기억해, 서아. 네 몸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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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외전 4.)

외전 4화.모리의 등짝 스매싱과 강제 귀가 조치 덕분에 시우는 서울 헬렐 호텔 최상층에 위치한 자신의 대표실로 쫓겨나다시피 돌아왔다.사방이 통유리로 된 집무실 너머로는 서울의 야경이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으나, 시우의 기분은 그보다 훨씬 더 서늘했다.“……이게 다 내가 오늘 안에 처리해야 할 서류라고?”시우가 광택이 흐르는 대리석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태블릿과 서류 뭉치를 보며 미간을 짓눌렀다.옆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던 달봉이 창백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대표님. 대표님이 아까 스튜디오에서 ‘촬영 중단’ 외치고 나가시는 바람에 루리앤 쪽에서 클레임 들어오고, 사라패션 본사에서도 경위서 올리라고 난리에요. 제가 겨우겨우 막고 있습니다.”달봉의 눈 밑에는 이미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모리의 말대로 과로사 직전의 몰골이었다.시우는 펜을 굴리며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앉아 서류들을 훑어내렸다.인간의 비즈니스란 참으로 번거로웠다.서명 하나, 이메일 한 통에 수십억이 왔다 갔다 하는 꼴이라니.하지만 시우의 머릿속에는 일보다 아까 자신을 몰아세운 모리에 대한 괘씸함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그리고 그 화살은 자연스럽게 모리의 연인인 달봉에게 향했다.“봉봉.”“……네?”“목이 마른데 호텔 로비층 내려가서 토마토 주스 좀 사와. 내가 평소에 마시는 그 브랜드로.”달봉이 기가 찬다는 듯 입을 벌렸다.“대표님, 비서실에 말하면 바로 준비해줄 텐데요?”“싫어. 굳이 ‘그 브랜드’여야 해. 서아가 나한테 처음 만들어줬던 거랑 제일 비슷한 맛이 나는 거 말이야. 호텔 앞 편의점까지 가야 할 텐데, 설마 거절하는 건 아니겠지, 봉봉?”달봉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모리에게 당한 화풀이를 자신에게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전직 악마이자 현직 상사인 시우의 명령을 거역할 순 없었다.한참 뒤, 숨을 몰아쉬며 주스를 사 온 달봉이 돌아오자마자 시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아, 봉봉. 생각해보니 주스보다는 얼음 가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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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외전 5.)

외전 5화.서아의 대형 패션쇼 피날레를 앞둔 전날 밤, 헬렐 호텔 대표실은 평소의 냉철한 분위기 대신 기묘한 긴장감과 꽃향기로 가득 찼다.시우는 평소 결재 서류를 훑던 매서운 눈빛으로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상자 속 반지를 노려보고 있었다.“봉봉.”“……네, 대표님.”구석에서 산더미 같은 장미꽃 줄기를 다듬던 달봉이 허리를 펴며 대답했다.그의 손에는 가시 방지용 장갑이 끼워져 있었고, 얼굴에는 피로와 황당함이 교차하고 있었다.“이 반지가 서아 손가락에서 빠지면 어쩌지? 아니면 너무 꽉 끼어서 피가 안 통하면?”“대표님, 아까부터 벌써 다섯 번째 물어보시는 겁니다. 서아 씨 사이즈는 제가 저번에 잠드셨을 때 몰래 재 온 거라 정확하다니까요. 그리고 그건 최고급 다이아몬드라 빠지지도, 조이지도 않게 세팅됐습니다.”시우는 초조한 듯 넥타이를 거칠게 풀었다.수천 년간 지옥을 호령하며 영혼들을 벌하던 그가, 고작 손가락 한 마디 굵기의 금속 고리 때문에 손바닥에 땀을 쥐고 있었다.“프러포즈 멘트는? 너무 유치한 거 아니야? ‘나의 영원한 계약자가 되어줘’ 같은 건?”“제발 참아주세요, 대표님. 그건 무슨 판타지 소설 대사 같잖아요. 그냥 진심을 담으세요. ‘사랑한다, 평생 내 곁에 있어라’ 이렇게요.”달봉은 혀를 차며 준비해 둔 꽃다발을 시우 앞에 내밀었다.시우는 꽃다발을 받아 들며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봉봉 너, 나중에 모리한테 프러포즈할 때 내 아이디어 훔쳐 쓰기만 해봐. 바로 해고야.”“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대표님처럼 이렇게 요란하게 안 할 거니까요.”달봉의 투덜거림에도 시우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창밖의 야경을 응시했다.엘이 남겨준 이 짧고 유한한 인간의 생애에서, 그는 가장 영원한 약속하려 하고 있었다.다음 날, 패션쇼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다.런웨이의 불빛이 꺼지고 피날레 모델로 나선 서아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무대 끝에 섰다.관객들의 환호와 플래시 세례가 쏟아지는 순간, 예정에 없던 암전이 찾아왔다.웅성거림 속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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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외전 6.)

외전 6.지희는 품에 안긴 은방울꽃 부케를 다독이며 아스에게 다가갔다.아스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마치 낯선 성물을 마주한 악마처럼 뻣뻣하게 굳어 그녀를 응시했다.“받아요.”지희가 불쑥 부케를 내밀자, 아스의 미간이 좁아졌다.“……이게 의미하는 바를 모르지 않을 텐데요.”“알아요. 그래서 주는 거예요. 이건 내 방식대로 하는 프러포즈거든요.”“지희 씨, 나는…….”아스의 말문이 막혔다.그의 눈동자에 스친 짙은 고독을 읽어낸 지희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루프탑의 밤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렸지만, 시선만큼은 흔들림 없이 그를 꿰뚫었다.“알아요. 당신 마음속에 여전히 죽은 연인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는 거. 그리고 어쩌면 평생 그 어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것도요.”“그런데 대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하는 겁니까.”“덮어줄게요. 억지로 잊으라고 안 해요. 그게 찬란한 행복이었든, 시린 아픔이었든, 강아모 대표님이 지켜온 그 순애보는 당신이라는 사람을 만든 소중한 조각이니까요. 그 지독하게 깊은 사랑을 했던 당신이라서, 내가 좋아하게 된 거기도 하고요.”아스의 눈동자가 거칠게 일렁였다.수천 년을 살아온 악마에게도 인간의 진심은 늘 치명적인 법이었다.지희는 아스의 커다란 손 위에 자기 손을 겹치며 나직하게 속삭였다.“그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나를 사랑할 수 있어요. 사람들은 그걸 ‘추억’이라고 불러요. 당신의 과거를 지우려는 게 아니라, 그 위에 내 온기를 덧칠하고 싶을 뿐이에요.”“추억…….”아스가 그 단어를 생소한 주문처럼 읊조렸다.지희의 목소리는 악마의 유혹보다 달콤했고, 그 어떤 저주보다 강력하게 그의 심장을 옥죄어 왔다. 굳게 닫혀 있던 얼음 성벽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패기 있게 고백하던 지희가 그 질문에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연애 안 해본 티 내시네요. 일단은 데이트부터 해야죠. 시도 때도 없이 보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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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외전 7.)

외전 7.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서는 길, 정오의 햇살은 잔인할 만큼 눈부셨다.아스모데우스는 평소보다 두 뼘 정도 뒤처진 채 지희의 뒤를 따랐다.수천 년간 지옥의 정점에서 수억 개의 영혼을 굽어살피던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 발걸음조차 어디로 향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머릿속은 복잡했다.조금 전 식사 자리에서 보여준 자신의 한심한 모습이 자꾸만 복기 되었다.스테이크를 해체하던 그 괴상한 손놀림, 메시지 답장 하나에 쩔쩔매던 서툰 변명. 악마로서의 위엄도 패션 회사의 대표로서의 위엄도 이미 바닥을 쳤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수치심’이라는 인간적인 감정이었다.그때, 앞서 걷던 지희가 갑자기 자리에 멈춰 서더니 홱 뒤를 돌아보았다.아스는 충돌을 피하려 급히 멈춰 섰지만, 미처 거리를 벌리기도 전에 지희의 시선이 그의 오른손등에 꽂혔다.“어? 아모 씨, 손등이 왜이래요?”“네? 아, 이건…….”대답할 틈도 없었다. 지희의 작고 부드러운 손이 아스의 커다란 손등을 덥석 붙잡았다.“……!”순간 아스의 사고 회로가 하얗게 점멸했다.그것은 비유가 아니라 실재하는 충격이었다.차가운 지옥의 냉기 속에서 얼어붙은 영혼들만을 봐오던 그에게, 살아있는 인간의 체온이란 금기된 마법만큼이나 치명적이었다.지희의 손가락 끝에서 전해지는 미열은 마치 가느다란 전류가 되어 그의 팔꿈치를 타고 올라와 심장을 정면으로 타격했다.아스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여기, 살짝 긁혔잖아요. 아까 스테이크 썰다가 그런 거예요? 아니면 어디 부딪혔나?”지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상처를 살폈다.사실 그것은 어제 시우의 결혼식 예식장을 장식하던 장미 가시에 스친 사소한 흔적이었다.평소의 아스라면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것만으로도 흔적 없이 지웠을 상처였다.하지만 지희 앞에서만큼은 철저히 ‘인간 강아모’로 존재하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갈망 때문이었을까.악마의 경이로운 치유력은 이상하게도 이 작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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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외전 8.)

외전 8.지희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질투라기보다는, 그가 가진 상처의 깊이를 가늠해 보려는 조심스러운 탐색에 가까웠다.아스는 떨리는 손으로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차가운 저와는 달리,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제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그런 사람이었죠.”그것은 과거형이었다.하지만 그 문장 안에 담긴 애정의 농도는 현재 진행형보다 훨씬 진했다.지희는 가슴 한편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그 ‘따뜻한 사람’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아모 씨가 여전히 그 그림자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하지만 지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어제 루프탑에서 스스로 맹세하지 않았던가.그의 상처를 덮어주겠노라고.지희는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아스가 꽉 쥐고 있던 차가운 커피잔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아까의 기습적인 스킨십과는 다른, 아주 조심스럽고도 단단한 위로였다.“아모 씨. 아까 내가 그랬죠? 잊지 않아도 된다고.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아모 씨의 마음도, 나는 존중해요. 하지만 그 추억이 아모 씨를 갉아먹게 두지는 않을 거예요.”아스가 고개를 들어 지희를 바라보았다.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아까의 장난기 어린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한없이 깊고 따뜻한 신뢰만이 가득했다.“내 이상형은요, 자기 아픔을 솔직하게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에요. 완벽해 보이려고 애쓰지만, 사실은 넥타이 하나 매는 것도 서툰, 그런 귀여운 남자요.”지희의 농담 섞인 고백에 아스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제가 그렇게 귀엽습니까?”“네, 완전요. 그러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마요. 과거의 그 사람도, 아모 씨가 이렇게 좋은 사람 만나서 다시 웃는 걸 바랄걸요? 만약 내가 그 여자였다면, 나보다 더 당신을 많이 웃게 해줄 여자가 나타나길 기도했을 것 같은데.”그 말은 아스의 심장에 박힌 가장 날카로운 가시를 더 깊이 쑤셔 넣었다.사라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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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외전 9.)

외전 9.화려했던 헬렐 호텔의 루프탑 웨딩 파티가 끝나고, 서울의 야경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새벽.연회장의 불은 꺼졌지만, 호텔 뒷마당의 작은 벤치에는 여전히 묘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아…… 진짜 죽겠다. 대표님 결혼식인데 왜 제 수명이 깎이는 기분일까요.”달봉은 턱시도 나비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치며 벤치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그의 눈 밑에는 평소보다 두 배는 짙어진 다크서클이 훈장처럼 내려앉아 있었다.며칠 밤을 새우며 은방울꽃 수급부터 하객 명단 확인, 심지어는 시우의 넥타이 각도까지 챙겨야 했던 비서의 고충이 고스란히 묻어났다.그 옆에서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손톱을 매만지던 모리가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봉봉, 엄살은. 네 주인님이 지옥의 왕좌를 버리고 인간 여자랑 계약을 갱신하는데, 그 정도 수고는 당연한 거 아냐?”“그 ‘주인님’ 모시느라 제 연애 전선은 이미 초토화됐다니까요? 모리 님, 아까 부케 못 받아서 화나신 거 제가 다 압니다. 근데 그건 바람이 분 거지 제 잘못이 아니잖아요.”달봉이 억울한 듯 항변하자, 모리의 눈썹이 움찔거렸다.사실 아까 지희에게 부케를 뺏긴 건 모리에게 꽤 큰 사건이었다.비록 여인의 사랑을 받게 해주는 악마이기는 하나, 지금은 서아의 든든한 조력자로서 그깟 꽃다발 하나 놓친 게 자존심 상했다.“누가 화났대? 난 그냥 꽃가루 알레르기가 걱정됐을 뿐이야. 그리고 봉봉, 너 착각하지 마. 내가 부케를 받으려고 했던 건 순전히 서아의 체면을 위해서였으니까.”“아 예, 그러시겠죠. 근데 아까 부케 놓칠 때 ‘야! 내 부케!’라고 소리 지른 건 제가 아니라 환청이었나 봅니다?”달봉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모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평소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해서 달봉을 거꾸로 매달아버렸겠지만, 이상하게도 이 인간 남자 앞에서는 마력이 혀끝에서만 맴돌 뿐이었다.모리는 홧김에 옆에 놓여 있던 샴페인 병을 집어 들었다.하지만 병은 이미 비어 있었다.“치, 술도 없네. 야, 봉봉. 너 차 있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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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외전 10.)

외전 10.톱모델 한서아의 아침은 언제나 차갑고 날카로운 자기검열로 시작되었다.그녀의 몸은 단순한 신체가 아니라, 수억 원대의 계약이 오가는 정밀한 예술품이자 가장 엄격한 전장이었다.평소라면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떠 가벼운 스트레칭과 해독 주스로 몸을 깨웠을 그녀였지만, 요 며칠 사이 서아의 세계에는 기묘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이상해.”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서아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어지럼증에 다시 베개 위로 쓰러졌다.머릿속에 수천 마리의 나비가 날갯짓하는 듯한 몽롱한 감각.평소 저혈압이 있긴 했지만, 이토록 전신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는 기분은 생전 처음이었다.거실에서 조찬 모임 관련 서류를 훑고 있던 시우가 침실의 미세한 공기 흐름 변화를 감지하고 번개처럼 달려왔다.“서아, 아직 안 일어난 거야? 혹시 어디 안 좋아?”시우가 침대 머리에 앉아 서아의 이마를 짚었다. 악마 특유의 서늘한 체온이 닿자, 서아는 작게 신음하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시우야, 나 좀 이상해. 몸이 내몸 같지가 않아. 자도 자도 졸음이 쏟아지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 아무래도 지난주 파리 화보 촬영 때 독감이라도 옮아온 걸까?”시우의 눈매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그에게 서아의 건강은 지옥의 안위보다 중요한 절대 명제였다.“열은 없는데…… 공기가 너무 희박하게 느껴지는군. 봉봉! 당장 주치의를 펜트하우스로 압송해 와! ”“시우야, 제발…… 그렇게 호들갑 떨지 마.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서아는 시우를 말리며 겨우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입맛을 돋우기 위해 평소 즐겨 마시던 산미 강한 에스프레소를 한 잔 내렸지만, 잔을 입가에 가져가는 순간 서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평소에는 세련되게만 느껴지던 원두의 향이, 오늘따라 지독한 타는 냄새와 비릿한 금속 향처럼 코끝을 찔렀다.“우욱……!”서아는 커피잔을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싱크대로 달려가 헛구역질했다.위장이 뒤집히는 듯한 강렬한 거부감.시우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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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외전 11.)

외전 11.모리의 지적은 뼈아팠다.마력이 있었다면 손짓 한 번으로 서아의 입덧을 멈추거나 태교 음악을 허공에 띄웠겠지만, 이제 시우는 오직 자신의 두 발과 두 손으로 모든 걸 해결해야 했다.“걱정 마라, 모리. 마력 따위 없어도 내겐 서아를 향한 집념과, 그리고…… 무한한 재력이 있지.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서아의 머리카락 한 올도 다치지 않게 할 거다. 내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어머, 아빠 됐다고 아주 대사가 신파네. 그럼 넌 이제 밤샘 육아도 몸으로 때워야 할 텐데, 괜찮겠어? 인간 몸뚱어리 그거 생각보다 금방 고장 난다고.”모리의 독설에도 시우는 끄떡없었다.그는 이미 집무실 한편에 쌓인 명품 아기용품 상자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서아는 모델이라 감각이 예민해. 아이도 분명 엄마를 닮아 미적 감각이 뛰어날 거다. 마력으로 꾸며준 환상 따위는 필요 없어. 내 손으로 직접 조립한 아기 침대와 내가 직접 고른 유기농 면 의류만 입힐 거다.”“대표님! 제가 당장 육아 백과사전 전 권을 구매해서 요약본을 만들겠습니다! 인간 아빠로서 갖춰야 할 모든 덕목을 제가 서포트하겠습니다!”달봉이 다시 한번 충성심을 불태우며 눈물을 닦았다.모리는 툴툴거리면서도 은근슬쩍 가방에서 보석이 박힌 작은 노리개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툭 던졌다.“이거, 마력은 없어도 인간 몸에 좋은 기운이 서린 진귀한 보석이야. 서아한테 전해줘. 임신 기간 동안 마음 안정되는 데는 직방이니까.”“모리 님…… 역시 츤데레의 정석이네요.”달봉의 감탄에 모리는 다시 선글라스를 내려쓰며 차갑게 대꾸했다.“닥쳐, 봉봉. 드라이브나 가. 나 지금, 이 염장질 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당 떨어져.”집무실을 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시우는 다시 초음파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마력을 버리고 인간이 된 대가로 얻은 이 작은 생명.그것은 그가 지옥에서 누렸던 그 어떤 절대적인 권력보다도 무겁고 소중했다.시우는 사진 속 작은 점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쓸어내렸다.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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