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랑을 빌었더니, 계약이 시작됐다: Chapter 71 - Chapter 80

122 Chapters

71화

한편, 멀찌감치 서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달봉은 홀로 울며 떠난 그레모리 걱정에 발만 동동 굴렀다.어젯밤 그녀의 온기를 기억하는 그에게, 오늘 펠이 뱉은 말은 그레모리뿐만 아니라 달봉의 심장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전후 사정 먼저 묻지도 않고, 다짜고짜 그렇게 상처를 주면 어떡해?"서아는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펠을 응시하며 쏘아붙였다.길가에 내버려진 채 멀어지는 그레모리의 차 뒷모습이 서아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펠은 억울함과 초조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서아의 어깨를 붙잡았다."서아, 그녀도 악마야! 인간에게 호의적이라고는 하지만 본성은 결국 악마라고! 게다가 질투심이 얼마나 강한 녀석인데.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정말 너무 걱정돼서 제정신이 아닐 지경이었다고! 네가 조금이라도 상처받을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웠어.""결과적으로 나는 상처받지 않았어. 혹시 상처받는 일이 생긴다고 해도 그건 내 몫이야. 네가 그렇게까지 마음 쓸 일 아니라고.""어떻게 그래? 넌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안돼!"펠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격하게 울렸다.서아는 그런 펠을 보며 나직하게 물었다."지금 어린애처럼 떼쓰는 거야?""난 네가 우는 게 싫어. 네가 상처받고 마음 아파하는 걸 보면 나 자신이 견딜 수 없이 화가 나. 난 네가 늘 웃었으면 좋겠어. 기분 좋아 밝게 웃는 모습도, 맛있는 걸 먹으며 행복해하는 모습도, 예쁜 걸 보고 즐거워하는 모습도 다 좋아. 늘 그렇게 웃게만 해주고 싶다고, 나는!"펠의 고함 섞인 고백에 서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저 계약 때문이라 생각하기엔 그의 말에 담긴 무게가 너무도 무거웠다."펠…. 그런 건 걱정 안 해도 돼. 난 이미 상처에는 단련된 사람이야.""상처는 단련될 수 없어."펠이 서아의 말을 끊으며 나직하게 읊조렸다.그의 눈에 슬픔이 서렸다."너도, 나도 그저 담담한 척 회피할 뿐이야. 익숙해졌다고 해서 마음이 단단해진 게 아니라고."말을 마친 펠은 서아를 와락 끌어안았다.갑작스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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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달봉은 그런 그녀를 품에서 살며시 떼어놓고 바로 앉혔다.그리고 투박하지만, 따뜻한 두 손으로 그레모리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안 받아주셔도 됩니다. 제가 모리 님 대신 화내드릴게요. 그러니까 이제 울지 마세요. 제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 같으니까요."달봉의 깊은 눈동자에는 그레모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그녀를 향한 수백 년의 연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달봉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그레모리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힘없이 웃음을 흘렸다."바보.""네? 갑자기….""너 말이야, 너. 정말 바보 같아.""사랑 앞에서는 누구나 바보가 되지요. 모리 님도 그렇잖아요. 상처를 준 루루 님이 미워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으시듯이, 저도 그런 거예요. 우리 둘 다 지독한 바보네요."달봉의 씁쓸한 미소에 그레모리의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려왔다.펠에게서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오직 자신만을 향한 헌신적인 온기.그레모리는 충동적으로 달봉의 셔츠 깃을 끌어당기며 속삭였다."키스해 줘.""……네?"달봉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그레모리는 젖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네 키스는 나한테 위로가 돼. 나 정말 나쁘지?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두고 네 진심을 다 알면서 이러는 거. 하지만 난 악마니까, 이런 나쁜 짓쯤은…… 읏!"달봉은 말을 이어가던 그레모리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막아버렸다.거칠지만 동시에 한없이 다정한 침범이었다.잠시 후, 입술이 살짝 떨어진 찰나 달봉이 그녀의 이마를 맞댄 채 낮은 숨을 내뱉었다."모리 님 자신을 나쁘게 말하는 건 듣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이용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니, 마음껏 저를 이용해 주세요."그레모리는 천천히 눈을 감고 달봉의 목을 감싸안았다.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이 또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달봉은 한 손으로 다정하게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면서도, 맞닿은 입술은 떼지 않았다.오히려 더 깊고 애절하게 그녀의 숨결을 탐했다.그것은 달봉에게 있어 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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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모리 님, 당신은 단 한 번도 시든 적이 없습니다. 제 눈에는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당당한 꽃이었어요. 루루 님이 몰라주는 당신의 가치를, 제가 죽을 때까지 증명해 보이겠습니다.”“입만 살아서는……. 넌 예전부터 그랬어. 환생을 몇 번이나 하면서도 매번 내 옆에서 알랑방귀 뀌면서 아부나 떨고.”그레모리는 짐짓 쌀쌀맞게 대꾸했지만, 그녀의 손은 달봉의 셔츠 단추를 하나둘 풀고 있었다.달봉은 낮게 웃으며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아부가 아니라 진심이었습니다. 당신을 처음 뵙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당신 아닌 다른 것을 눈에 담은 적이 없으니까요.”달봉의 상체가 그레모리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다.그의 탄탄한 가슴 근육이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에 맞닿자, 그레모리는 짧은 숨을 들이켰다.달봉의 손길은 그녀의 목선을 지나 어깨, 그리고 허리 곡선을 따라 조심스럽게 내려갔다.마치 세상에서 가장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을 다루는 듯한 조심스러움이었다.“봉, 너무 느려.”그레모리가 답답한 듯 그의 등줄기를 손톱으로 살짝 긁자, 달봉의 눈빛이 순식간에 짙은 욕망으로 번뜩였다.그는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그레모리의 목덜미에 깊게 얼굴을 묻었다.그의 뜨거운 숨결이 닿는 곳마다 소름이 돋아났고, 그레모리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 섞인 이름을 내뱉었다.“봉. 달봉아…….”자신의 이름이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달봉은 심장이 터질 듯한 희열을 느꼈다.지금 그녀가 붙잡고 있는 육체는 바로 자신이었다.달봉은 그녀의 입술을 다시 한번 집어삼키며 격렬하게 파고들었다.어둠이 내린 침실 안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로 엉켰다.그레모리는 달봉의 등 뒤로 팔을 꽉 두른 채, 그가 주는 열기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지독하게 외로웠던 짝사랑의 세월이 이 순간만큼은 마취된 듯 느껴지지 않았다.달봉의 다정함은 독약 같으면서도 치유제 같았다.평생 주인 없는 마음을 주느라 닳아버린 그녀의 영혼에, 달봉이라는 남자가 쏟아붓는 맹목적인 사랑은 가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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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달봉이 무심코 던진 "루루 님은 서아 님 말이라면 껌벅 죽는다"라는 말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그녀의 가슴 한구석을 찔렀다.‘나한테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인데.’그레모리의 눈동자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것은 명백한 질투였다.하지만 그 질투의 이면에는 지독한 부러움이 공존하고 있었다."모리 님?"침묵이 길어지자, 달봉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서아라는 여자, 참 대단하네."그레모리가 나직하게 읊조렸다.목소리에는 시샘보다 씁쓸한 인정이 담겨 있었다."루루의 그 고집불통 성격을 껌벅 죽게 만들 정도면.""모리 님은 모리 님만의 매력이 있습니다. 비교하지 마세요. 저한테는 모리 님이 세상 그 누구보다 대단한 분이니까요."달봉이 단호하게 대꾸하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그레모리는 그의 손길에서 전해지는 묵직한 진심에 조금은 위안을 얻었다."그래, 나도 알아. 내가 어디 가서 빠지는 급은 아니지."그레모리는 억지로 고개를 꼿꼿이 쳐들며 입꼬리를 올렸다.***밤공기는 차가웠지만, 맞잡은 두 손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는 서아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서아는 펠과 나란히 발을 맞추어 걸으며 자꾸만 새어 나오려는 미소를 참았다.아까 자신을 와락 끌어안고 쏟아냈던 그의 고백 같은 말들이 귓가에 웅웅거렸고, 그럴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펠 역시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뒤엉켜 정리되지 않았다.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 전부 진심이었다는 사실이, 악마인 그에게는 낯설고도 두려운 자각이었다.'좋아한다고 고백이라도 한 것 같잖아.'고백이라니.지옥의 군주가 인간 여자에게 마음을 내보였다고?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생각들이 펠을 정신없게 만들었다.그는 괜히 헛기침하며 서아의 손을 더 꽉 쥐었다."펠.""응?""정말 그레모리한테 사과할 거지?""그럼. 약속했잖아. 악마는 계약과 약속은 확실히 지켜.""내일은 엘이랑 셋이서 맛있는 거 먹자. 오늘 아르바이트비 번 기념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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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나른한 금요일 오후, 창밖으로 비껴드는 햇살이 거실을 노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서아와 엘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거실에 널브러져 각자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는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는 중이었다."루루는 오늘 정시에 퇴근한대요?"소파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누워 있던 서아가, 거실 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는 엘을 내려다보며 물었다."아니요, 야근이래요.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서아 씨가 제일 잘 아니까요. 루루는 나한테 그런 사적인 스케줄 따윈 절대 공유 안 해주거든요."엘이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며 대답했다.서아는 픽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아아, 그런데 저도 펠한테 직접 듣는 게 아니에요. 걔는 나한테 자기 일정 같은 거 안 알려줘요. 오히려 나한테 어디냐, 뭐 하냐 묻는 집요한 연락만 오죠.""그럼, 누구예요? 아하, 설마 봉봉인가?"엘이 눈을 반짝이며 킥킥 웃었다."네, 맞아요. 달봉 씨가 알아서 일일이 다 말해주더라고요. 점심 메뉴는 물론이고 밥 먹는 시간까지 분 단위로 알려주던데요?""세상에, 화장실 가는 시간은 안 알려준답니까?"엘이 "푸하하!" 소리를 내며 거실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다.서아도 어이가 없다는 듯 휴대전화 화면을 보며 맞장구를 쳤다."다행히 그건 아직이네요. 제가 답장을 안 보내는데도 마치 의무처럼 계속 보고를 해오고 있어요.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실제로 달봉은 서아가 '루리앤' 모델 아르바이트했던 그날 이후부터, 펠의 일거수일투족을 첩보 작전 보고하듯 서아에게 전송하고 있었다.서아의 문자 함에는 달봉이 보낸 정성스러운 보고서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나름 불금인데, 우리 오랜만에 한잔할까요?"거실 바닥에 누워있던 엘이 몸을 일으키며 제안했다.서아는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안 그래도 시원한 맥주 생각이 나긴 하네. 뭐 주문할까요? 치킨?""맥주엔 역시 치킨이죠. 맥주는 냉장고에 좀 있어요? 아니면 제가 사 올까요?""전에 사놓고 안 마신 캔맥주가 몇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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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왜……?""그럼, 루루와의 계약을 깨고 계속 살 수 있으니까."맥주를 마시려던 서아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그녀는 천천히 캔을 내려놓고 엘을 쳐다보았다.그의 눈에는 안타까움과 갈망이 뒤섞여 있었다."왜 내가 살기를 바라? 나같이 운도 없고 재미도 없는 인생, 계속 살아봤자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래.""서아, 인생은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거야. 그 안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마음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천사님다운 도덕책 같은 소리네. 나한텐 그런 말 안 통해."서아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리자, 엘이 다급하게 그녀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도덕책이라도 좋아. 넌 충분히 매력 있고 가치 있는 사람이야. 자신을 좀 더 귀하게 여겨줬으면 좋겠어. 그래서 내가 네 소원을 들어주고, 네가 계속 너의 인생을 살길 바라."서아는 제 손등을 덮은 엘의 커다란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엘. 내가 펠과 계약한 소원이 정확히 뭔지는 알고 그런 말 하는 거야?""대충은 짐작하고 있어.""그럼, 네가 내 소원을 이뤄준다고 치자. 그다음은? 천사와 인간이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건데? 내 수명을 다하고 죽으면 남겨진 너는? 넌 영생을 살잖아. 날 바로 잊을 수 있는 기억 지우개라도 있어? 아니면 나도 천사라도 되는 거야?""그건….""내 소원은 네가 들어주기엔 너무 잔인해, 엘."서아의 단호한 말에 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그건 루루도 마찬가지 아니야? 서아 네가 없는 세상을 사는 건 루루에게도 똑같은 형벌이야. 녀석도 결국 너 때문에 힘들어하게 될 거라고.""10년쯤이야 너희 같은 존재들한테는 찰나 같은 시간 아니야? 뭐 얼마나 진심이 되겠어. 잠시 허전하다 말겠지.""마음이 깊어지는 건 시간의 길이와 상관없어, 서아."엘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서아는 가슴 한구석이 찡해오는 것을 느끼며 맥주 한 모금을 크게 들이켰다."상관이 없긴 왜 없어? 게다가 너희는 영생을 사는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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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악마들이 사는 세상도, 내가 사는 세상도 인간 세상과 크게 다를 건 없어. 살아가는 방식이나 가치관은 인간들과는 완전히 다르지만.""어떻게 다른데?"서아가 테이블 쪽으로 몸을 바짝 붙이며 물었다.엘은 비어버린 맥주 캔을 손가락으로 툭 치며 말을 이었다."인간은 시간의 제약을 받으며 살아가기에 매 순간이 절실하고 감정의 소용돌이가 크지. 하지만 우리는 '영원'을 전제로 살아. 그래서 감정의 변화가 아주 느리고 무뎌. 루루가 서아 너에게 보이는 그 걱정이나 조바심은, 우리 세계의 기준으로 보면 지각변동이 일어난 수준이나 다름없어."서아는 엘의 말을 곱씹으며 창밖의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영원을 사는 존재들이 찰나를 사는 자신에게 보여주는 이 다정함이 얼마나 이질적이고 귀한 것인지, 새삼 마음 깊이 스며드는 밤이었다.태초에 신이 세상을 빚은 이유는 거창한 계획 때문이 아니었다.그저 끝도 없이 펼쳐진 허허벌판이 지루했기 때문이었다.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잎사귀가 보고 싶어 울창한 나무를 심었고, 나무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는 것이 허전해 산등성이를 겹겹이 쌓다 보니 어느새 산맥이 완성되었다.찰박찰박 시원한 파도 소리가 듣고 싶어 바다를 채웠고, 은은한 향기로움에 취하고 싶어 꽃밭을 일구었다.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아름다운 풍경도 혼자서 감상하기엔 금세 심심해져 버린 신은, 이 세상을 함께 누빌 천사를 만들었다.까르르거리며 신나게 여기저기 뛰어놀던 천사들은 곧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기 시작했다.신은 아이 같은 천사들을 위해 산속엔 짐승을, 바닷속엔 물고기를, 꽃밭엔 벌과 나비를 풀어놓았다.그렇게 만물이 생동하고, 서로의 동무가 되어줄 천사들이 늘어나면서 그들의 세계는 거대하고 화려하게 형성되었다."그거 알아? 우리 세계에도 피부색이 다른 천사들이 아주 많아. 하지만 우린 너희 같은 언어라는 게 없어. 그런데도 모두가 서로의 뜻을 알아듣고 대화할 수 있지."맥주 한 모금을 삼키던 서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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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천사가 인간을 해코지하게 돼서 타락한 거야?""그런 셈이지. 인간을 짝사랑한 나머지 질투에 눈이 멀어 죄 없는 다른 인간을 해치거나, 믿었던 연인의 배신에 눈이 뒤집혀 서로에게 가해자가 되기도 했어. 감정의 골이 깊어질수록 인간이라는 종 자체에 대한 증오가 생겨나 타락의 길을 걷기도 했지. 타락한 이들은 여러 유혹으로 인간을 꾀어 파멸로 몰아넣었어.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였어. 전면전으로는 천사를 이길 수 없으니, 천사가 잠든 틈을 타 잔인하게 숨통을 끊어놓기도 했지.""정말 아수라장이었겠네. 그렇게 해서 천사, 인간, 그리고 타락 천사가 공존하는 세계가 된 거야?""응. 인간들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발전하고 있고, 우리는 여전히 그들 틈에 섞여 유희를 즐기며 무언가를 배우고 있지. 그게 축복일지, 혹은 또 다른 타락의 씨앗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말이야.""그 시대를 직접 살아본 게 아니어서 그런지, 꼭 신화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신기하고 흥미롭기도 하지만…… 사실 조금 무섭기도 해."서아가 빈 캔을 매만지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뭐가?""지금은 이렇게 다정한 천사지만, 언젠가 돌변할지도 모르는 거잖아. 우리 인간들에게 천사는 마냥 착하고 선한 이미지인데, 질투 때문에 살인까지 저질렀다니.""이런, 그러게. 그럼 나도 언제 어떻게 변하게 될지 모르겠는데?"엘이 히죽거리며 서아를 바라보았다.장난기 섞인 눈빛이었지만, 서아는 팔을 휘저으며 질색했다."헐, 무슨 그런 공포스러운 말을!""농담이야. 설마 내가 그러겠어?""그렇지만 펠은 천사들의 모함과 배신 때문에 분노했잖아. 천사들 사이에도 질투와 모함이 있다는 건데, 그 엉망진창인 상황을 신은 가만히 보고만 계시는 거야? 방관하는 거냐고.""그분 나름의 생각이 있으시겠지.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섭리라는 게 있으니까.""무책임하다. 만들어놓고 내팽개치고 있는 거잖아.""쉿, 조심해. 어디선가 다 듣고 계실지도 몰라."엘이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며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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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뭐, 뭐……? 지금 뭐 한 거야?""딸꾹질 멈췄다고. 거봐, 효과 직방이지?"엘의 뻔뻔한 대답에 서아의 얼굴이 맥주 캔보다 더 붉게 달아올랐다.삑삑 삑삑. 띠리릭.야근의 피로를 어깨에 짊어진 채, 펠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서아의 얼굴을 볼 생각에 피곤함도 잊고 달려왔건만, 집 안의 공기는 평소와 달리 묘하게 들떠 있었다."서아, 나왔어. 서아?"신발을 벗으며 거실로 들어선 펠은 눈앞의 광경에 그만 얼음이 되고 말았다.거실 바닥에는 빈 캔맥주들이 볼품없이 나뒹굴고 있었고, 식탁 위에는 치킨 봉지와 음식 찌꺼기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하지만 펠을 진정으로 분노하게 만든 건 그 난장판의 중심에 있었다.거실 바닥, 보드라운 러그 위에서 엘과 서아가 나란히 누워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이, 이것들이……! 나 없는 밤 동안 대체 뭘 한 거야?!"천둥 같은 펠의 고함이 정적을 깨뜨렸다."아, 깜짝이야. 루루, 벌써 왔어?"펠의 고함에 엘이 부스스한 꼴로 상체를 일으켰다.반면, 서아는 얼마나 마신 건지 세상모르게 곯아떨어져 펠의 목소리에도 그저 웅얼거리며 몸을 뒤척일 뿐이었다."엘, 너 나 없는 동안 서아한테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당장 설명해!""글쎄~? 이런 거, 저런 거?"엘이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야비하면서도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밤사이 있었던 그 '쪽' 소리 나는 기습 키스를 떠올리며 펠을 도발한 것이다."뭐라고?! 너 지금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이런저런 얘기 했다고. 왜 그렇게 앞서가실까?""너 똑바로 말 안 해?"참다못한 펠이 성큼성큼 다가가 엘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에구구, 우리 루루 다혈질 또 나왔네. 서아야, 일어나 봐. 루루가 지금 나 때린다!"엘의 호들갑스러운 외침에 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서아? 지금 서아라고 했냐? 감히 네가 그 이름을 함부로 불러?""어제부터 말 놓기로 했지. 너랑 나랑 친구인데, 너한테만 말 놓는 거 부러워서 나랑도 말 좀 놓자고 했더니 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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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서아의 눈이 순식간에 보석처럼 반짝였다.의심 섞인 눈초리로 되묻는 그녀에게 펠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 진짜로.”“야호! 신난다!”서아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올랐다.그 천진난만한 모습이 마치 세상을 다 얻은 아이 같았다.조금 전까지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던 펠과 옆에서 관망하던 엘은, 그런 서아의 모습이 한없이 사랑스러워 저도 모르게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다음 날 아침, 스튜디오 근처의 공기는 어제의 소란을 비웃듯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서아를 모리의 스튜디오 안으로 들여보낸 펠은 차마 발길을 떼지 못하고 입구 근처를 서성였다.잠시 후,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모리가 냉소적인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뭐야? 네 피앙세 데려다줬으면 그냥 갈 것이지, 또 뭐가 걱정돼서 불러냈어?”모리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다.펠은 평소의 당당함은 온데간데없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그런 건 아니고…….”“그럼, 뭔데?”“할 말이 좀 있어서.”모리는 팔짱을 낀 채 그를 차갑게 훑어내렸다.“무슨 할 말? 사과라면 됐어. 네 그 유난스러운 마음, 충분히 알았으니까.”“미안해. 그날은 내가 너무 흥분했어. 앞뒤 안 가리고 화부터 내서 미안하다.”펠의 낮은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모리는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사과는 됐다니까. 그런 뻔한 이야기라면 더 들을 가치도 없어. 나 바쁘니까 이만 들어간다.”“진심이야! 미안해, 모리! 친구로서 너를 전혀 배려하지 못했어. 모질게 굴어서 정말 미안해.”스튜디오 문고리를 잡으려던 모리의 손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친구’라는 단어가 예리한 칼날이 되어 그녀의 등을 찔렀다.모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친구……?”“그래. 우린 오래된 친구잖아.”“넌 정말 끝까지 나쁜 놈이구나. 너 정말 내 마음을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거야? 아니면 선 긋겠다고 일부러 작정하고 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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