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랑을 빌었더니, 계약이 시작됐다: Chapter 81 - Chapter 90

122 Chapters

81화

화려한 조명 아래 신상 제품들이 진열된 매장을 둘러보던 아스모데우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뒤를 따르던 수행 비서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대표님?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아, 미안해요. 잠시만요.”아스의 시선은 이미 매장 반대편, 여유롭게 쇼핑을 즐기던 지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그녀가 왜 예고도 없이 이곳에 나타난 걸까.평소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했겠지만, 지희를 마주한 순간 아스는 아무렇지 않게 매장을 둘러볼 자신이 없어졌다.도망쳐야 할지, 먼저 인사를 건네야 할지 난감해하며 우물쭈물하는 사이, 지희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강 대표님!”밝은 미소와 함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아스는 목덜미부터 얼굴까지 확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지희가 성큼성큼 다가오자, 아스는 결국 체념한 듯 그녀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오랜만입니다, 한지희 씨.”“정말 오랜만이네요.”지희는 인사를 건네면서도 아스의 곁을 지키고 있는 수행원들을 흥미로운 듯 살폈다.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진 아스가 급히 상황을 정리했다.“아, 매장 점검은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죠. 먼저 가보세요.”“네, 알겠습니다. 대표님.”수행원들이 물러나고 오직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지희의 표정이 눈에 띄게 편안해졌다.그녀는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스를 올려다보았다.“그동안 많이 바쁘셨나 봐요?”“예, 조금. 일이 겹치는 바람에.”“연락이 전혀 없으셔서 걱정했어요.”“아, 죄송합니다.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네요.”아스의 정중하지만, 거리감이 느껴지는 대답에 지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서운함을 숨기지 않고 툭 내뱉었다.“그런 말이 더 속상한 거 아시죠? 그동안 제 생각은 전혀 안 하셨다는 뜻이잖아요. 제가 걱정했다는 건, 강아모 씨가 혹시 나한테 관심이 아예 없는 건가 싶어서 초조했다는 뜻이었어요.”지희는 짐짓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잦아드는 목소리로 덧붙였다.뜻밖의 직설적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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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사무실 분위기가 꽤 독특하네요. 블랙과 그레이 톤으로만 꾸며진 대표실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차갑지만 세련됐어요.”“……제가 선호하는 색상이라 그렇게 꾸몄습니다.”“깔끔하고 정갈한 게, 강 대표님의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달까.”지희의 부드러운 칭찬에도 아스의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그는 무거운 침묵을 깨듯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런데, 저를 왜 계속 찾아오신 겁니까?”“어머, 벌써 본론인가요? 혹시 제가 찾아오는 게 별로인가요?”지희가 장난기 머금은 미소를 지으며 되묻자, 아스는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아, 아닙니다. 싫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이유가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이유라…… 왜일 것 같아요?”지희의 짓궂은 질문에 아스는 대답 대신 애꿎은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뜨거운 액체가 입술에 닿으려던 찰나, 지희의 입술이 가볍게 달싹였다.“우리, 연애할래요?”“푸흡, 쿨럭!”생각지도 못한 돌직구에 아스는 마시려던 커피를 그대로 뿜어내고 말았다.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란 지희가 얼른 테이블 위의 티슈를 한 움큼 뽑아 건넸다.“세상에, 죄송해요! 제가 너무 갑자기 훅 들어갔죠?”“…….”아스는 대답도 못 한 채 셔츠와 바지에 묻은 커피를 닦아내느라 여념이 없었다.냉철한 사업가의 위엄은 이미 바닥에 흩뿌려진 커피 얼룩과 함께 사라진 뒤였다.“셔츠가 다 더러워졌네요. 정말 미안해요, 제가 새로 사 드릴게요.”“괜찮습니다. 여벌이 있으니, 나중에 갈아입으면 됩니다.”“사과의 의미로 선물하고 싶어서 그래요.”“정말 괜찮습니다. 저는 셔츠보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가 더 궁금하군요.”아스가 젖은 티슈를 내려놓으며 지희를 똑바로 응시했다.그의 눈빛에는 경계심보다는 순수한 의문이 서려 있었다.지희는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큰 의미는 없어요. 내 배경이나 기회를 엿보고 잘 보이려고 다가오는 남자들과는 달랐으니까. 무엇보다 죽은 전 연인을 여전히 잊지 못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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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강아모 씨?”당황한 지희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스는 이미 평정심을 잃은 뒤였다.그는 지희의 눈을 피하며 다급히 책상 위의 서류 가방을 챙겼다.“갑자기 급한 회의가 생각났습니다. 먼저 가봐야 할 것 같군요.”“잠깐만요! 아직 제 대답은…….”“죄송합니다. 사람을 시켜서 지희 씨를 밖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아스는 지희가 무어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집무실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문고리를 잡은 그의 손등에 푸른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그것은 도망치려는 자의 비겁함이자, 자신을 가두려는 자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강아모 씨! 지금 도망치는 거잖아요!”뒤에서 들려오는 지희의 외침을 외면한 채, 아스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비서들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아스는 자기 심장 소리가 복도 끝까지 울려 퍼질까 봐 두려워하며 입술을 짓씹었다.차갑게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홀로 남겨진 지희의 허망한 시선이었다.지하 주차장에 도착해서야 아스는 차체에 몸을 기대고 무너지듯 숨을 내뱉었다.차가운 금속의 촉감이 닿았지만, 지희가 남긴 온기는 여전히 그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지금 진짜 도망친 거지, 강아모?”지희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냉철한 비즈니스 감각으로 업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강아모 대표가, 고작 여자 하나의 고백에 셔츠가 젖는 줄도 모르고 줄행랑을 쳤다.완벽주의자로 소문난 그의 빈틈을 목격한 순간, 지희의 정복욕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주변 사람들을 전부 제 통제하에 두는 완벽한 대표님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네?”지희는 소파에 다시 여유롭게 몸을 기댔다.아스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아직도 그의 긴장감이 서린 온기가 남아 있었다.그가 사랑을 무서워한다고 했을 때, 그 눈 속에 스쳤던 지독한 슬픔과 공포.지희는 그것이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아주 깊숙이 박혀 있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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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서아 씨, 멍하니 있지 마! 지금은 서아 씨가 이 드레스의 주인이야. 카메라 렌즈를 집어삼키겠다는 기세로 보라고!”모리가 스튜디오에 들어섰을 때, 촬영은 이미 난항을 겪고 있었다.서아는 거대한 반사판과 쉴 새 없이 터지는 스트로보 조명 사이에서 길을 잃은 듯 보였다.화려한 검은색 프릴 드레스는 서아의 하얀 피부를 돋보이게 했지만, 정작 드레스를 입은 서아 본인은 박제된 인형처럼 작고 위태로워 보였다.셔터 소리가 날카롭게 들릴 때마다 그녀의 어깨는 미세하게 움츠러들었다.“그만, 스톱!”결국 모리가 성큼성큼 다가갔다.차가운 공기가 서아의 뺨을 스쳤다.모리는 말 대신 서아의 턱끝을 강하게 치켜올렸다.당혹감으로 일렁이는 서아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모리가 낮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너, 펠 앞에서만 그렇게 당당한 거야? 걔가 널 볼 때 짓는 그 오만한 표정 있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으면서도 오직 너 하나만을 갈구하는 그 눈빛. 그걸 이번엔 네가 지어봐.”“……모리 씨.”“잊지 마. 넌 지금 그 악마를 네 발아래 굴복시킨 유일한 존재야. 이 공간의 지배자는 너라고.”그 말은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서아의 잠자던 세포를 일깨웠다.막연한 공포로 떨리던 서아의 눈동자에 서늘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펠의 장난스러운 미소,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뜨거운 시선, 그리고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가 자신이라는 확신.찰칵—!서아는 거칠게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부드러운 레이스가 손안에서 구겨졌지만, 그 모습조차 하나의 연출처럼 완벽했다.그녀가 고개를 살짝 비틀자, 순진한 소녀의 얼굴 뒤에 감춰져 있던 매혹적인 카리스마가 베일을 벗고 터져 나왔다.“좋아, 지금이야! 그대로 시선 아래로 깔아!”모리의 환호성과 함께 셔터가 폭발하듯 터졌다.스튜디오 안은 서아라는 새로운 뮤즈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아우라로 가득 찼다.조명의 열기는 더 이상 위협이 아니었다.서아는 조명 아래에서 자신을 태워 빛나는 불꽃처럼 움직였다.촬영이 끝났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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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지금 네 표정은 너무 착해. 독기를 품어. ‘나를 사랑한다면 네 전부를 바쳐봐’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주 잔인하고 우아하게. 네가 이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건 그를 유혹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그를 완전히 박제하기 위해서라고.”모리의 목소리는 최면술사처럼 서아의 이성을 파고들었다.“더 망가져도 돼. 입술을 살짝 벌리고, 시선은 카메라가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그 남자를 비웃듯이 내려다봐. 네가 느꼈던 그 우월감, 펠을 네 마음대로 휘두를 때 느꼈던 그 은밀한 쾌락을 이 렌즈 안에 쏟아내란 말이야.”모리가 서아의 어깨를 강하게 눌러 자세를 고정한 뒤 뒤로 물러났다.“자, 감독님! 다시 갑니다. 지금, 이 눈빛 놓치지 마세요.”모리의 디렉팅이 끝나자마자 서아의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되었다.서아는 이제 더 이상 조명에 겁먹은 어린 양이 아니었다.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조여 잡으며 카메라를 향해 오만한 시선을 던졌다.마치 렌즈 너머에 펠의 심장을 쥐고 흔드는 여왕이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모니터에 찍힌 컷을 확인한 모리의 입가에 기괴한 미소가 번졌다.‘그래, 그거야. 내 뮤즈.’모리는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클릭하며 서아의 컷을 하나씩 넘겼다.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모리의 입가에는 기괴할 정도로 황홀한 미소가 번졌다.‘이거야.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눈빛.’지금껏 수많은 톱모델을 렌즈에 담아왔지만, 그들은 모두 모리가 원하는 것을 ‘흉내’ 낼 뿐이었다.하지만 서아는 달랐다. 모리가 던져준 컨셉이라는 불씨를 삼키고, 그녀는 스스로 발화하여 거대한 화염이 되었다.모니터 속 서아는 단순히 예쁜 인형이 아니었다.펠이라는 거대한 악마를 발치에 둔 채, 비웃듯 카메라를 내려다보는 저 서늘한 포식자의 아우라.그것은 모리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던 '루리앤'의 세계관이 현실로 튀어나온 결과물이었다.“완벽해…….”모리는 화면 속 서아의 눈동자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내렸다.처음엔 펠을 곁에 두기 위한 도구였고, 그에게 상처를 주기 위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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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루리앤의 화보가 공개된 지 단 몇 시간 만에 세상은 한서아라는 이름으로 들썩였다.포털 사이트 메인은 그녀의 눈빛을 찬양하는 기사로 도배되었고, 루리앤 공식 홈페이지는 서버가 마비될 정도로 뜨거운 반응이 이어졌다.“펠, 이것 좀 봐! 댓글이 몇십 개씩 올라와.”카페 구석, 태블릿 화면을 넘기던 서아의 눈이 생기로 반짝였다.사진 아래 달린 ‘기적의 뮤즈’, ‘압도적인 아우라’ 같은 찬사들은 늘 위축되어 살던 서아에게 생전 처음 느껴보는 짜릿한 보상이었다.그 맞은편, 펠은 턱을 괸 채 화면이 아닌 서아의 얼굴을 무심한 듯 깊게 응시했다.“그렇게 좋아?”“응! 신기해. 내가 정말 이렇게 보이나 싶어서. 모리 실장님이 진짜 대단한 것 같아. 나한테서 이런 모습을 어떻게 찾아냈을까?”서아가 해맑게 웃으며 모리를 칭찬하자, 펠의 눈썹 끝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서아의 재능이 증명된 것은 분명 기쁜 일이었으나, 세상의 시선이 제 계약자에게 꽂히는 상황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펠은 가슴 한구석이 일렁이는 이유를 애써 ‘소유권’에 대한 집착으로 정의 내렸다.서아를 향한 이 기묘한 갈증이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오만한 악마인 그에게 아직 허락되지 않은 영역이었다.“모리가 잘한 게 아니라, 네가 원래 이만큼 빛나는 애였던 거야. 녀석은 그저 렌즈를 들이댔을 뿐이고.”펠은 짐짓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서아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이제 널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질 텐데. 앞으로는 밖에서 이렇게 노닥거리는 것도 조심해야 하나?”“에이, 설마. 내가 연예인도 아닌데 뭘.”서아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펠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얽었다.펠은 손끝으로 전해지는 서아의 온기에 묘한 충만감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계약 관계에서 오는 당연한 반응이라 자신을 속였다.“아무튼 조심해. 넌 내 계약자니까. 아무도 널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내가 지킬 거야.”“알았어. 나도 내몸 귀한 줄 알거든.”서아의 해맑은 대답에 펠은 비로소 작게 미소 지었다.***“서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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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하지만 그 대가가 정말 '10년'이라는 시간뿐이었을까?아니, 그 '10년'이라는 유통기한 자체가 펠이 설계한 잔인한 미학의 일부라면?하지만 자신은 10년이라는 시간에 얽매이지 않은 계약이었다.모리는 그 사실을 모르고 말한 것이다.“서아아, 왜 그렇게 조용해? 모리가 피곤하게 했어?”펠이 신호 대기에 걸리자, 고개를 돌려 서아를 바라봤다.평소라면 다정하게 느껴졌을 그 눈빛이, 오늘따라 자신을 관찰하는 수집가의 시선처럼 느껴져 서아는 소름이 돋았다.“……펠.”“응.”“펠은 내가 10년 뒤에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않아? 아니, 10년이 되기 전에 내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아? 아니면, 그 뒤에도 내가 계속 살아있기를 바라?”서아의 질문에 펠의 눈동자가 아주 잠시 흔들렸다.하지만 이내 그는 특유의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서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넌 내 계약자잖아. 내 손안에 있는 동안 넌 가장 아름다울 거야. 그게 내가 약속한 전부고, 네가 알아야 할 전부야. 10년 뒤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아.”확답을 피하는 그의 태도.모리의 말대로 그는 정말 10년 뒤의 나를 상상하지 않는 걸까?아니면, 정말로 내가 재가 되어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를 ‘계획’하고 있는 걸까?서아는 펠의 손길 아래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심장 근처가 서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펠의 다정함 속에 감춰진 악마의 본성, 그리고 모리가 던진 독한 의심의 씨앗이 서아의 내면에서 뒤엉키기 시작했다.처음으로, 서아는 펠의 품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피난처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펠, 넌 정말 나를 지키고 있는 거야? 아니면…… 내가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거야?’펠을 바라보는 서아의 눈동자에 전에는 없던 짙은 의구심과 경계심이 서리기 시작했다.악마와의 낙원은 그렇게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차 안의 무거운 침묵을 깨트린 것은 서아의 작은 움직임이었다.서아는 습관처럼 가슴 위에 걸린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그것은 펠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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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펠은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악마에게 진심이란 곧 약점이었고, 계약자에게 마음을 여는 것은 곧 지배력을 상실하는 치욕과 같았다.“펠, 혹시 목걸이의 변화가 내가 모르는 다른 안좋은 거라도 있는 거야?”서아가 조심스럽게 물어왔지만, 펠은 시선을 전방에 고정시킨 채 차갑게 내뱉었다.“아니. 그냥 그 목걸이가 거슬려서 그래. 마력이 불안정해진 것뿐이니까, 너무 의미 부여하지 마.”“의미 부여하는 거 아닌데……. 난 그냥, 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 좋아서 그랬지.”서아의 목소리가 작아지며 시무룩하게 잦아들었다.평소라면 그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졌겠지만, 지금의 펠은 그 ‘가까워짐’이라는 단어 자체가 공포스러웠다.=황금빛은 그에게 경고등이었다.네가 이 아이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 10년 뒤에 네가 마주할 절망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잔인한 예고.‘착각이야. 이건 그저 내 소유물이 최고의 가치를 발휘하고 있는 것에 대한 만족감일 뿐이야.’그는 자신을 세뇌했다.서아를 보며 가슴이 뛰는 것은 그녀가 내뿜는 생명력이 탐나기 때문이고, 그녀가 웃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자신의 계약이 성공적으로 이행되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라고.주차장에 차를 세운 펠은 차 문을 열기 전, 잠시 멈춰 섰다.차 안의 희미한 조명 아래서 서아의 목걸이는 여전히 은은한 황금빛을 내뿜으며 그의 부정을 비웃고 있었다.“먼저 내려. 난 호텔에 다시 들렸다가 들어갈게.”펠은 서아의 눈을 피하며 차갑게 말했다.서아가 내린 뒤, 홀로 남겨진 펠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진심이라니, 웃기지도 않는군.”하지만 떨리는 그의 손끝은 이미 알고 있었다.그가 부정하면 할수록, 황금빛은 더욱 짙어질 것이며, 그가 쌓아 올린 오만의 성벽은 서아라는 작은 균열로 결국 무너져 내릴 것임을.그는 이제 서아를 보는 것이 두려워졌다.그녀를 향한 이 감정이 정말 ‘사랑’으로 정의되는 순간,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악마의 금기를 깨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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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펠은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악마에게 진심이란 곧 약점이었고, 계약자에게 마음을 여는 것은 곧 지배력을 상실하는 치욕과 같았다.“펠, 혹시 목걸이의 변화가 내가 모르는 다른 안 좋은 거라도 있는 거야?”서아가 조심스럽게 물어왔지만, 펠은 시선을 전방에 고정시킨 채 차갑게 내뱉었다.“아니. 그냥 그 목걸이가 거슬려서 그래. 마력이 불안정해진 것뿐이니까, 너무 의미 부여하지 마.”“의미 부여하는 거 아닌데……. 난 그냥, 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 좋아서 그랬지.”서아의 목소리가 작아지며 시무룩하게 잦아들었다.평소라면 그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졌겠지만, 지금의 펠은 그 ‘가까워짐’이라는 단어 자체가 공포스러웠다.황금빛은 그에게 경고등이었다.내가 이 아이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 마주할 절망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잔인한 예고.‘착각이야. 이건 그저 내 소유물이 최고의 가치를 발휘하고 있는 것에 대한 만족감일 뿐이야.’그는 자신을 세뇌했다.서아를 보며 가슴이 뛰는 것은 그녀가 내뿜는 생명력이 탐나기 때문이고, 그녀가 웃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자신의 계약이 성공적으로 이행되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라고.주차장에 차를 세운 펠은 차 문을 열기 전, 잠시 멈춰 섰다.차 안의 희미한 조명 아래서 서아의 목걸이는 여전히 은은한 황금빛을 내뿜으며 그의 부정을 비웃고 있었다.“먼저 내려. 난 호텔에 다시 들렸다가 들어갈게.”펠은 서아의 눈을 피하며 차갑게 말했다.서아가 내린 뒤, 홀로 남겨진 펠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진심이라니, 웃기지도 않는군.”하지만 떨리는 그의 손끝은 이미 알고 있었다.그가 부정하면 할수록, 황금빛은 더욱 짙어질 것이며, 그가 쌓아 올린 오만의 성벽은 서아라는 작은 균열로 결국 무너져 내릴 것임을.그는 이제 서아를 보는 것이 두려워졌다.그녀를 향한 이 감정이 정말 ‘사랑’으로 정의되는 순간,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악마의 금기를 깨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그를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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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언제 나타났는지, 엘이 한 손에 화려한 찬합 도시락을 들고 슬며시 다가오며 박수를 쳤다.그의 목소리는 조금 전의 살벌했던 공기를 단숨에 환기할 만큼 경쾌하고 부드러웠다.엘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천적인 천사의 등장으로 분노로 이글거리는 모리를 능글맞게 쳐다 보았다.“자, 자, 다들 일단 숨 좀 돌리자고요. 우리 서아 기운 차리게 이것 좀 먹일까요? 실장님도 한입 하실래요?”엘은 모리를 향해 싱긋 윙크하며, 서아의 앞에 놓인 간이 테이블 위에 정성껏 준비한 도시락을 펼쳐 놓았다.뚜껑을 열자마자 고소하고 달콤한 음식의 향기가 촬영장에 퍼져나갔다.펠의 독설에 체한 듯 가슴이 답답했던 서아는, 엘이 건네는 따뜻한 온기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엘…… 이렇게 까지 안해줘도 되는데…….”“당연히 해야지. 우리 서아 촬영한다는데 이 오빠가 가만있을 수 있나?”엘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서아의 손에 젓가락을 쥐여주었다.“서아아, 이거 네가 좋아하는 소스로 만든 거야. 얼른 먹고 기운 내야지. 예쁜 얼굴에 눈물 자국 있으면 사진 안 예쁘게 나오잖아.”엘은 다정하게 손수건을 꺼내 서아의 눈가를 조심스레 닦아주었다.“실장님, 여기 샌드위치 진짜 맛있는데 하나 드셔보실래요? 서아 잘 부탁드린다는 뇌물입니다.”“좋네. 서아야, 일단 먹어. 먹고 기운 차려야 촬영 재개할 거니까.”모리의 허락까지 떨어지자 스튜디오의 분위기는 급격히 완화되었다.***백화점의 ‘사라 패션’ 매장은 아스모데우스에게 성소와도 같은 곳이었다.그는 죽은 사라의 체취와 흔적을 쫓듯 매장을 둘러보곤 했지만, 최근 들어 그 평온한 의식은 번번이 깨지기 일쑤였다.매장의 옷깃을 매만지는 그의 등 뒤로 늘 약속이라도 한 듯 익숙한 목소리가 날아들었기 때문이다.“어머, 강 대표님! 여기서 또 뵙네요? 우리 정말 인연인가 봐요.”마주쳤다기보다 지희가 일방적으로 아스를 기다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지희는 늘 우연을 가장한 뻔뻔함으로 무장한 채, 화려한 웃음을 띠며 그에게 살갑게 다가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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