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랑을 빌었더니, 계약이 시작됐다: Chapter 101 - Chapter 110

122 Chapters

101화

서아는 떨리는 손으로 계약서를 밀어냈다.사라 패션의 대리인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서아의 눈동자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하고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열 배의 계약금은 매력적이네요. 하지만 전 저를 믿어준 사람들을 배신한 대가로 금 사슬을 차고 싶지는 않아요.”서아는 곧장 그레모리 실장의 집무실로 달려갔다.그곳엔 조명도, 음향도 사라진 텅 빈 기획안을 붙들고 고뇌하던 그레모리가 있었다.서아는 거칠게 몰아쉬는 숨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실장님, 꼭 화려한 무대여야만 하나요? 아스가 길을 막았다면, 우리는 길이 아닌 곳을 런칭 쇼장으로 만들면 되잖아요.”그레모리의 눈이 번득였다.서아의 제안은 무모했지만, 동시에 루리앤이라는 브랜드가 가진 본질—기존의 틀을 깨는 자유—과 맞닿아 있었다.그레모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정석대로 안 되면 야성으로 승부해야지. 가자, 서아아. 세상에서 가장 넓고 화려한 런칭 쇼장으로!”다음 날 해가 질 녘, 아스모데우스가 승리를 확신하며 와인을 즐기던 시각.도심 한복판의 가장 번화한 교차로가 술렁이기 시작했다.신호가 붉은색으로 바뀌고 차량이 멈춰선 찰나, 어디선가 심장을 울리는 강렬한 비트가 쏟아져 나왔다.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거리의 전광판들이 일제히 루리앤의 로고로 물들었다.펠이 자신의 마력을 조용히 흘려보내 도심의 미디어 파사드를 해킹한 결과였다.횡단보도의 하얀 선이 순식간에 루리앤의 ‘런웨이’로 변모했다.당황한 시민들과 운전자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화이트 슈트를 입은 서아가 안개 속을 걷듯 우아하고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조명 팀은 없었지만, 시민들이 꺼내든 수천 개의 스마트폰 플래시가 세상 그 어떤 조명보다 눈부신 스포트라이트가 되어서 서아를 비췄다.“말도 안 돼, 저거 한서아 아냐?”“미쳤다, 여기서 패션쇼를 한다고?”서아는 오직 자신만의 걸음걸이에 집중했다.바람에 흩날리는 옷감과 거리의 소음, 사람들의 환호성이 어우러져 루리앤이 지향하는 ‘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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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쇼를 성공시킨 루리앤의 화제성은 하룻밤 사이 신드롬으로 변해 있었다.SNS 피드는 온통 횡단보도 위를 걷는 서아의 영상으로 도배되었고, 주요 일간지들은 ‘거리로 나온 예술, 루리앤의 반란’이라는 헤드라인을 앞다투어 쏟아냈다.사라 패션의 최상층 집무실.아스모데우스는 그 찬란한 찬사들을 하나하나 도려내듯 응시하다 결국 책상을 쾅! 하고 내려쳤다.묵직한 책상이 비명을 질렀고, 정적만이 감돌던 방 안은 그의 서늘한 분노로 순식간에 빙점까지 얼어붙었다.아스는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타오르는 불길을 삭히고 있었다.그때, 예고도 없이 육중한 문이 열리며 지희가 걸어 들어왔다.“반갑지 않으시겠지만, 오늘은 사적으로 온 게 아니라 공적으로 온 것이니 잠시 시간 좀 내주시죠.”지희는 아스의 살벌한 기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아하게 소파에 몸을 묻었다.아스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차갑게 되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내 인내심이 바닥이라는 걸 알고도 발을 들인 겁니까?”“제가 마음에 둔 상대가 이토록 곤란해하는데, 지켜만 볼 수는 없어서요.”지희는 여유롭게 다리를 꼬며 아스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그녀의 눈에는 아스의 분노를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는 영악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저랑 손잡고 일해보지 않을래요? 루리앤의 그 천박한 화제성을 단번에 누를 아이디어가 제게 있거든요.”“아이디어?”“루리앤과 정반대되는 컨셉으로 대중의 시선을 갈라놓는 거죠. 사람들의 취향이라는 게 모두 같을 순 없잖아요? 그들이 ‘거리의 자유’를 말한다면, 우리는 사라 패션만이 할 수 있는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함’과 ‘압도적인 럭셔리’로 정공법을 펼치는 거예요.”지희는 아스의 책상 위로 태블릿을 밀어 넣었다.그 안에는 루리앤의 거친 생동감을 비웃기라도 하듯, 극도로 화려하고 정제된 블랙 라인 기획안이 띄워져 있었다.“루리앤의 쇼가 일종의 해프닝이었다면, 우리는 진정한 권위가 무엇인지 보여줘야 해요. 대중은 금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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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펠이 남기고 간 잔인한 진실은 연회가 끝난 뒤에도 아스의 숨통을 옥죄었다.화려한 연회장을 빠져나와 도착한 아스의 저택은 거대한 무덤처럼 적막했다.아스는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제 손등에 말라붙은 붉은 와인 자국을 내려다보았다.펠의 비웃음이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고작 사라의 대역이라니…….’그 순간, 거실 구석진 그림자 사이로 낯익은 실루엣이 보였다.아스는 숨을 멈췄다.그토록 그리워하던, 그러나 단 한 번도 다시 손잡지 못한 여인. 사라였다.그녀는 슬픈 눈으로 아스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야 할 자리에는 펠의 비웃음만이 가득 찼다.아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하지만 눈을 감을수록 사라의 환영은 더욱 선명해졌다. 지독한 환각이었다.밤새도록 사라의 망령에 시달리던 아스는 동이 트기도 전, 서늘한 한기를 품은 채 저택을 나섰다.그가 향한 곳은 지희의 사무실이었다.이른 아침부터 화보 시안을 검토하던 지희는 거칠게 열리는 문소리에 고개를 들었다.쾅!“대, 대표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지희는 당황했지만, 이내 아스의 흐트러진 셔츠 차림과 공허하게 타오르는 눈빛을 발견하고 아스에게 달려갔다.아스는 대답 없이 지희에게 몸을 기댔다.그는 떨리는 손으로 지희의 얼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지희는 아픈 비명을 삼켰지만, 아스의 눈에 비친 것은 지희가 아니었다.“사라…….”“……네?”지희의 물음에도 아스는 듣지 못한 채 그녀를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사라를 향한 갈망과 지희를 향한 혐오가 뒤섞인, 지독하게 뒤틀린 포옹이었다.아스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제발, 사라. 나를 비웃지 마. 당신의 그 얼굴로 나를 그렇게 보지 말란 말이야.”지희는 아스의 품에 안긴 채 그의 고통스러운 중얼거림을 들었다.‘사라’라는 이름이 그녀의 심장을 비수처럼 찔렀지만, 그녀는 상관없었다.자신이 원하는 강아모라는 남자가 지금 제 품 안에서 떨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지희는 아스의 등을 마주 안으며 그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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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56화소파에 누워 자고 있는 엘을 두고 집을 나선 두 사람은 펠의 호텔 스위트룸으로 향했다.거대한 통창 너머로 화려한 야경이 펼쳐졌지만, 방 안의 열기는 그 어떤 불빛보다 뜨겁게 달아올랐다.서아의 목에 걸린 목걸이는 이제 방 안의 조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찬란한 황금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것은 곧 다가올 종말의 신호인 동시에,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얼마나 깊게 침잠해 있는지를 증명하는 낙인이었다."펠, 무서워. 하지만 멈추고 싶지 않아."서아가 떨리는 손으로 펠의 셔츠 깃을 잡았다. 펠은 대답 대신 서아의 허리를 감싸안아 침대 위로 눕혔다. 어둠 속에서도 금빛으로 번득이는 그의 눈동자가 서아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두려워하지 마. 네 영혼이 타오르는 만큼, 나도 너와 함께 불타 없어질 테니까."펠의 낮은 목소리가 서아의 귓가를 긁으며 내려갔다. 그의 입술이 서아의 목덜미를 타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목걸이 위에 닿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펠의 뜨거운 숨결이 섞이자, 서아는 절로 몸을 떨며 그의 어깨를 꽉 쥐었다.단순한 육체적 겹침이 아니었다. 펠이 서아의 살결에 입을 맞출 때마다, 서아는 자신의 영혼 한 조각이 펠의 안으로 녹아 들어가는 감각을 느꼈다. 펠 역시 인간의 체온이라 믿기 힘든 서아의 열기에 취해, 악마로서의 냉정함을 완전히 잊은 채 그녀를 탐닉했다."서아, 넌 내 지옥에 나타난 유일한 빛이야. 이 빛이 꺼지는 순간이 온다면, 난 기꺼이 암흑 속에서 영원히 네 이름만 부를 거야."펠의 고백은 농밀한 애무가 되어 서아의 전신을 휘감았다. 서아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펠의 등에 손톱자국을 새겼다. 파멸이 예고된 사랑이었기에 그들은 단 1초의 틈도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서로를 갈구했다.황금빛 목걸이의 광채가 절정에 달하며 방 안을 눈부시게 메웠다. 그 빛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심장 박동을 하나로 맞추며, 다가올 비극을 잊은 채 가장 깊고 어두운 쾌락 속으로 침잠했다.이 밤이 지나면 영혼의 수거가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오히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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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57화스튜디오에서 서아를 본 그레모리는 서아의 목에 걸린 황금빛 목걸이를 확인하고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계획대로였다.펠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영혼은 영롱하게 영글었고, 이제 수거의 때는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그레모리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그녀는 곧장 펠의 호텔로 향했다.거대하고 화려한 사무실 안에서 펠은 초조한 듯 가만히 앉아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레모리는 고혹적인 자태로 다가가 루루의 어깨 위로 가늘고 긴 손가락을 얹었다.“루루, 서아의 목에 있는 눈부신 황금빛 목걸이를 봤니? 네가 서아를 얼마나 깊이 탐닉하고 있는지 증명하는 낙인이지.”그레모리의 목소리는 달콤한 독처럼 펠의 귓가를 파고들었다.루루는 몸을 떨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레모리는 멈추지 않고 은근한 유혹을 이어갔다.“이대로 두면 서아의 영혼은 너의 손에 부서져 지옥으로 떨어질 거야. 네가 정말 서아를 사랑한다면, 네 손으로 그녀를 죽여야 하는 이 잔인한 계약을 견딜 수 있을까?”“무슨 꿍꿍이야, 모리. 내가 뭘 어떻게 하길 바라?”“계약 파기. 네가 서아를 포기하면 돼. 악마로서의 본분을 버리고 계약을 깼을 때 비로소 서아는 자유로워질 수 있어. 물론 너는 소멸의 길을 걷겠지만…….”그레모리는 루루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꿰뚫어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펠을 오랫동안 지독하게도 열렬히 짝사랑하던 그레모리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자, 선택해. 서아를 영원한 고통 속에 가둘지, 아니면 네 손으로 이 지독한 계약을 끝낼지.”그레모리의 제안은 구원처럼 들렸으나, 그 실체는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을 가장 치명적인 유혹이었다.펠의 손이 힘없이 떨리기 시작했다.“모리 님!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집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어느새 들어온 달봉이 서슬 퍼런 기세로 그레모리를 제지하며 앞을 막아섰다.평소의 능청스러운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그의 눈에는 서늘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어째서 두 분을 갈라놓으려고 하십니까? 계약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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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창밖으로 쏟아지는 차가운 소나기가 유리창을 거칠게 두드렸지만, 지희의 사무실 안은 기묘할 정도로 정적이 감돌았다.항상 오만할 정도로 당당했던 거대한 남자, 아스모데우스는 지금 지희의 품에 안겨 가느다란 떨림을 내뱉고 있었다.한참을 지희의 온기에 매달리던 아스는 어느새 기력이 다한 듯 그녀의 무릎 위에 머리를 기댄 채 소파에서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지희는 제 무릎을 누르는 그의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며, 잠든 남자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날카로운 콧날과 굳게 다문 입술 위로 여전히 고통의 잔재가 서려 있었다.지희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절대, 이 남자를 포기할 수 없어.’지희의 눈동자에 섬뜩할 정도로 짙은 소유욕이 일렁였다.언젠가는 그가 사라의 이름이 아닌, '한지희'라는 이름을 부르며 자신을 갈구하게 만들겠다는 다짐이 뼛속까지 새겨졌다.지희는 잠든 아스의 위로 몸을 숙여 그의 이마에 짧고 서늘한 입맞춤을 남겼다.창틈으로 스며든 새벽빛이 아스모데우스의 눈꺼풀을 두드렸다.무거운 눈을 뜬 아스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움직임도 없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차가운 지옥의 권좌도, 환각 속에 출몰하던 사라의 비명도 들리지 않는 기묘한 정적이었다.“……정신이 좀 드세요?”머리 위에서 들려온 지희의 나직한 목소리에 아스의 초점이 비로소 돌아왔다.그는 자신이 누군가의 무릎을 베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켰다.평소의 위압적인 자태는 온데간데없고, 잠결에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초점 없는 눈동자가 그의 당혹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내가…… 왜 여기서…….”상황 파악을 마친 아스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항상 냉정하고 오만했던 남자가, 여자 앞에서 아이처럼 무너져 잠들었다는 창피함과 당혹감이 뒤섞였다.아스는 허둥지둥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미, 미안합니다. 내가 실례를…… 한지희 씨 무릎을…… 아니,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그는 뒷말을 잇지 못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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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서아의 집 앞, 가로등 불빛조차 희미하게 일렁이는 골목은 서늘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펠이 퇴근해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엘이 유령처럼 나타나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서아를 어떻게 할 생각이야?”엘의 목소리는 평소의 고결함 대신 억눌린 불안으로 가득했다.펠은 피곤한 듯 미간을 짚으며 차갑게 대꾸했다.“대뜸 무슨 소리야?”“서아 목걸이 봤잖아. 아직 10년도 안 됐어. 그런데 이미 황금빛으로 변했지. 그건 네가 정말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이고.”펠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엘의 입을 통해 나오자, 가슴 밑바닥이 서늘해졌다.“…….”“예정보다 더 빨리 그녀의 영혼을 수거하게 되어버렸어. 정말 수거할 생각이야?”“…….”“뭐라고 말 좀 해!”답답함에 소리치는 엘을 향해 펠이 서늘한 안광을 쏘아붙였다.“네가 무슨 상관이야. 내가 알아서 해.”“왜 상관이 없어? 내가 서아를 좋아하는데.”순간, 정적이 골목을 덮쳤다. 펠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뭐?”“몰랐어? 이런 둔탱이가 어떻게 자신의 마음은 그렇게 빨리 깨달았을까. 나 서아 좋아해. 진심으로. 네가 계약을 파기하고 소멸하더라도 서아를 살려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너……!”펠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악마의 기운이 일렁이며 주변 공기가 급격히 냉각되었다.“넌 끝까지 이기적이구나, 미카엘. 하긴, 이미 한 번 배신한 놈이 두 번 배신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지.”“난 널 배신한 적 없어.”“내게 칼을 겨눴을 때부터 이미 넌 나를 배신한 거야.”“그건 네가 오만하게 네 뛰어난 능력만 믿고 신을 넘보려 했기 때문이잖아!”엘의 외침에 펠이 비릿한 실소를 터뜨렸다.그 웃음은 자조적이었고, 동시에 핏빛 증오를 머금고 있었다.“내가 언제! 내가 너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난 신의 말을 거역한 적도 없었어!”“하지만 라파엘이……!”순간 엘은 말을 멈췄다.뱉어낸 이름이 공중에서 얼어붙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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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60화.엘이 차원의 틈 저편으로 자취를 감추자, 천상의 정원은 다시 고요에 잠겼다.라파엘은 조금 전까지 엘이 서 있던 빈자리를 응시하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손에 든 가위 끝에는 잘려 나간 꽃잎 하나가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오래전, 천상에는 모든 천사가 우러러보던 '하늘의 샛별'이 있었다.신의 권능을 가장 완벽하게 나누어 받은 존재이자, 그 누구보다 찬란하게 빛나던 최고의 천사.그는 펠이라는 이름을 얻기 전, 존재만으로도 만물에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빛 그 자체였다.라파엘 역시 그를 진심으로 연모하고 동경했다.그러나 그 동경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그마한 균열을 만들었고, 그 틈 사이로 시커먼 열등감이 독초처럼 자라났다.‘왜 당신이어야만 했을까. 왜 신의 시선은 항상 당신에게만 머물렀던 걸까.’모두가 그를 좋아했고, 신의 사랑까지 독차지했던 그 빛을 바라보며 라파엘은 매일 밤 자신의 그림자를 확인해야 했다.동경은 질투로, 질투는 다시 증오로 변질되었다.라파엘은 알고 있었다.완벽한 자를 무너뜨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가장 신뢰하는 이의 손을 빌려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결국 그 작은 열등감에서 시작된 속삭임이 거대한 전쟁의 서막이 되었다.엘의 올곧은 정의감을 이용해 펠을 반역자로 몰아세웠고, 펠이 소중히 여겼던 이들이 그에게 칼을 겨누게 했다.가장 고결했던 자를 가장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뜨린 뒤에야 라파엘은 비로소 안도했다.그가 사라진 뒤에 남은 빈자리를 자신이 채울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여전히 넌 나를 보지 않는군.”라파엘의 시선이 지상의 황금빛 광채가 일렁이는 곳으로 향했다.타락해서도, 악마가 되어서도, 심지어 영혼이 찢겨 나가는 계약 속에서도 펠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라파엘은 손에 든 가위를 힘주어 쥐었다.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꽃줄기가 맥없이 잘려 나갔다.자신의 열등감이 빚어낸 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펠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구원을 얻는 꼴을 지켜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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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천상에서 펠의 분노가 대지를 뒤흔드는 사이, 지상의 펜트하우스에는 서늘한 살기가 내려앉았다.엘이 자신의 근원을 쏟아부어 억지로 멈춰 세운 서아의 시간.그 정적을 깨고 방 한복판에 일그러진 빛의 균열이 생겨났다.그 틈새로 걸어 나온 것은 라파엘의 형상을 한 기괴한 분신이었다.본체의 온화한 미소는 간데없고, 오로지 집착과 광기만이 서린 눈동자가 잠든 서아를 향했다.“미카엘, 네가 고작 이런 인간 여자 하나를 위해 천사의 고결함을 버리다니. 정말 눈 뜨고 봐줄 수가 없네.”분신의 손에서 뻗어 나온 빛의 사슬이 서아를 낚아채려던 찰나, 반투명해진 몸으로 바닥에 엎드려 있던 엘이 서아의 앞을 가로막았다.그의 육체는 이미 바스러지는 나비의 날개처럼 위태로웠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내…… 내가 있는 한, 그녀를 데려갈 수는 없다.”엘은 떨리는 손으로 성검을 고쳐 쥐었다.날카로운 빛의 사슬이 엘의 가슴팍을 꿰뚫었다.이미 근원을 잃은 몸에 가해진 타격은 영혼을 찢는 고통이었으나, 엘은 신음조차 내뱉지 않은 채 사슬을 손으로 움켜쥐었다.그의 손바닥에서 은색 피가 배어 나와 바닥을 적셨다.“비켜. 죽음보다 더한 무(無)의 공간으로 사라지고 싶은 거야?”“사라지는 건…… 내가 아니라 네놈의 가증스러운 위선이다!”엘은 마지막 남은 영혼의 조각까지 태워 올렸다.그의 몸 주변으로 타오르는 불꽃은 이제 푸른색이 아닌, 자신의 생명을 연료로 삼은 핏빛 광채였다.엘은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분신의 가슴에 성검을 박아넣었다.“이건 서아를 향한 나의 속죄이며, 동시에 펠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이다!”분신이 비명을 지르며 산산조각이 났다.그 충격으로 엘 역시 멀리 튕겨 나가 벽에 부딪혔다.서아를 감싸고 있던 결계가 위태롭게 흔들렸지만, 엘은 기어코 기어가 서아의 침대 밑자락을 붙잡았다.반투명하다 못해 이제는 배경이 비쳐 보일 정도로 흐릿해진 엘이 잠든 서아를 향해 힘겹게 미소 지었다.그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고백이 새어 나왔다.“부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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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외전 1.)

외전 1화.창밖으로 보이는 해운대의 새벽 바다는 여전히 푸른 빛이었지만, 펜트하우스 안의 공기는 어딘지 모르게 낯설었다.침대맡에 앉아 있던 시우(펠)는 문득 어깨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수천 년을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불쾌하고도 생경한 감각, ‘추위’였다.“……윽.”그는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튕겼다.실내 온도를 조절하려던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 같던 마력 대신, 맥없는 마찰음만 허공을 맴돌았다.불꽃은 피어오르지 않았고, 냉기는 여전히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다.시우는 당혹감에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희고 길쭉한 손가락은 그대로였으나, 그 안을 흐르던 파괴적인 권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시우야, 일어났어?”열린 문틈으로 서아가 들어왔다.그녀는 두꺼운 담요를 시우의 어깨에 덮어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안색이 왜 이래? 갑자기 인간 돼서 적응 안 되지? 새벽엔 원래 좀 추워.”시우는 어깨에 닿는 담요의 묵직한 무게감에 움찔했다.예전 같으면 느껴지지도 않았을 그 가벼운 천 조각이 지금은 생존을 위한 생명줄처럼 느껴졌다.그는 어색하게 담요를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하지만 그 순간, 배 속에서 ‘꼬르륵’하는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시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고결한 천사였을 때도, 오만한 악마였을 때도 경험한 적 없는 육체가 원초적으로 아우성쳤다.“푸하하! 시우야, 배에서 그런 소리도 나? 진짜 신기하다!”서아의 자지러지는 웃음에 시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이게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속이 텅 빈 것 같고, 기운도 없어. 온몸이 다 떨려.”“그게 바로 배고픔이야. 자, 얼른 나와. 따뜻한 거 해놨으니까.”주방으로 나간 시우는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다.물 한 잔을 마시려 해도 직접 컵을 꺼내 정수기 버튼을 눌러야 했다.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물잔이 날아오던 시절은 끝났다.높은 선반에 있는 컵을 내릴 때조차 까치발을 들어야 하는 비효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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