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아는 떨리는 손으로 계약서를 밀어냈다.사라 패션의 대리인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서아의 눈동자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하고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열 배의 계약금은 매력적이네요. 하지만 전 저를 믿어준 사람들을 배신한 대가로 금 사슬을 차고 싶지는 않아요.”서아는 곧장 그레모리 실장의 집무실로 달려갔다.그곳엔 조명도, 음향도 사라진 텅 빈 기획안을 붙들고 고뇌하던 그레모리가 있었다.서아는 거칠게 몰아쉬는 숨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실장님, 꼭 화려한 무대여야만 하나요? 아스가 길을 막았다면, 우리는 길이 아닌 곳을 런칭 쇼장으로 만들면 되잖아요.”그레모리의 눈이 번득였다.서아의 제안은 무모했지만, 동시에 루리앤이라는 브랜드가 가진 본질—기존의 틀을 깨는 자유—과 맞닿아 있었다.그레모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정석대로 안 되면 야성으로 승부해야지. 가자, 서아아. 세상에서 가장 넓고 화려한 런칭 쇼장으로!”다음 날 해가 질 녘, 아스모데우스가 승리를 확신하며 와인을 즐기던 시각.도심 한복판의 가장 번화한 교차로가 술렁이기 시작했다.신호가 붉은색으로 바뀌고 차량이 멈춰선 찰나, 어디선가 심장을 울리는 강렬한 비트가 쏟아져 나왔다.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거리의 전광판들이 일제히 루리앤의 로고로 물들었다.펠이 자신의 마력을 조용히 흘려보내 도심의 미디어 파사드를 해킹한 결과였다.횡단보도의 하얀 선이 순식간에 루리앤의 ‘런웨이’로 변모했다.당황한 시민들과 운전자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화이트 슈트를 입은 서아가 안개 속을 걷듯 우아하고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조명 팀은 없었지만, 시민들이 꺼내든 수천 개의 스마트폰 플래시가 세상 그 어떤 조명보다 눈부신 스포트라이트가 되어서 서아를 비췄다.“말도 안 돼, 저거 한서아 아냐?”“미쳤다, 여기서 패션쇼를 한다고?”서아는 오직 자신만의 걸음걸이에 집중했다.바람에 흩날리는 옷감과 거리의 소음, 사람들의 환호성이 어우러져 루리앤이 지향하는 ‘살
Last Updated : 2026-03-17 Read more